3.
쏟아지는 햇살에 우영이 번쩍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기절하듯 눈을 감은 참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우영의 머릿속으로 열렬했던 지난밤이 센서 등처럼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위에서, 아래에서, 침대 헤드를 잡고, 무릎을 꿇은 채, 갈증에 지쳐 물을 마시던 냉장고에서, 식탁 위에서, 씻으러 갔던 욕실과, 나오다가 넘어졌던 바닥에서까지, 아주 미친 듯이, 동틀 때까지 흘레붙던 지난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고태성은, 고태성은……. 섹스에 미친 놈이었다.
“하…….”
돌연 헛숨이 터졌다. 동정인 척할 땐 언제고, 고작 한 번의 섹스에 밤새 온갖 체위를 다 시도한 그를 떠올리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소 체력 관리를 단단히 해 왔기에 망정이지, 일반인이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새삼 운동도 잘 하지 않던 고태성의 체력이 놀라웠다. 싸자마자 발딱발딱 세우던 그의 문란한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저 또한 쾌락에 눈이 돌아 사양 없이 붙어먹었으므로 할 말은 없었다.
도대체 그간 얼마나 많은 관계를 가져 왔기에 그렇게 능숙하게 저를 다뤘을까. 그는 첫 경험인 제게도 전율이 일 만한 쾌락을 느끼게 해주었다. 속수무책으로 떠오르는 상상에 이가 바득 갈렸다.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문득 작게 들려오는 숨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제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께에 얼굴을 기댄 채 새근새근 잠이 든 고태성이 보였다. 미친 사람처럼 몰아붙이던 어제와 달리 곤히 잠든 얼굴은 온순한 천사 같았다.
우영은 늪에 빠져들듯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길게 감긴 눈매와 곱게 뻗은 속눈썹, 그 아래 찍힌 작은 눈물점까지 눈에 담듯 찬찬히 살폈다. 어제도 느낀 바지만 그는 분위기만 조금 바뀌었을 뿐 얼굴은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헤어져 있는 동안 그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언젠가 책상에 팔을 괸 채 잠든 그를 힐긋거리던 때가 떠올랐다. 혹여 깨기라도 할까, 가슴 졸이고 몰래몰래 훔쳐보며 애를 태우던 때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우영이 손을 뻗었다. 눈 앞을 가린 까만 머리칼을 찬찬히 쓸어 넘겨 보았다. 요란하게 요동치던 감정이 수면 아래로 고요히 가라앉고 있었다.
입 맞추고 싶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우영이 하얀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이 떨어지며 옅은 소리가 났다.
우영은 아주 가까운 틈에서 또 그를 응시했다. 종일 물고 빠느라 살짝 부은 입술이 도톰해져 있었다. 우영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그의 입술 위를 엄지로 살짝 쓸어 보았다. 멍청한 심장이 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고태성과 입을 맞추고, 밤새도록 섹스를 하고, 같은 침대에서 벌거벗은 채, 꽉 끌어안고 잠을 잤다. 평생을 바라 오던 일이었다. 행복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매 순간 잠겨 있던 황홀경 속에서도 갑갑한 속은 쓰리기만 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우영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제가 바란 관계가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어긋난 겉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거짓으로 자신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녀석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혹여, 만에 하나 제게 호감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떠올리자마자 헛웃음이 흘렀다. 좆같은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제게 2년간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갑자기 남자가 좋아지기라도 한 걸까? 동성 간의 섹스가 궁금해졌나? 문란함이 도를 넘어서, 이제 이성 간의 관계조차 지겨워졌나?
차라리 이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전부 추측일 뿐, 똑같은 물음의 도돌이표였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제가 바라는 일은 없을 터였다.
우영은 다시 잡념에 잠겼다. 저도 모르게 움직인 손가락이 고태성의 말랑한 입술을 문지르듯 쓸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살결을 홀린 듯 바라보는 찰나, 도톰한 입술이 제 손가락을 살짝 물듯이 덮었다.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은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이윽고 고태성의 감긴 눈이 사르르 뜨였다.
“……우영아.”
낮게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원래 고태성은 잠에 취하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깨지 않는 놈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우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
“또……. 하고 싶어?”
제 손가락에 가로막힌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일순 엄지에 뜨거운 속살이 감겨 왔다. 시선을 내려 보니, 그가 입술을 모아 우영의 손가락을 느리게 빨고 있었다. 느른한 눈빛을 보내는 고태성의 얼굴이 지독하게 야했다. 얼어붙은 듯 경직되어 있던 우영이 손가락을 빼냈다.
“어제……. 너무 좋았어.”
잠기운 가득한 눈을 천천히 감은 고태성이 속삭였다. 동시에 허리를 더 꽉 감싸 안아 왔다. 따라 바짝 맞붙은 하반신에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어젯밤 종일 품고 있던 그의 아래가 여전히 단단하게 올라붙은 것이 느껴졌다.
“……어. 나도.”
우영은 한숨처럼 답했다.
좋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난생처음 허덕이던 열락에 사람들이 왜 그 짓에 환장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상대가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면 더더욱 좋았을 테지만, 그것까지 바라기엔 너무 큰 욕심이었다.
“……너도 좋았어?”
“…….”
“응?”
고태성이 다시 서서히 눈을 떴다. 얇은 속쌍꺼풀이 또렷하게 선을 그렸다.
“그럼……. 앞으로 나랑만 하면 안 돼?”
부드럽게 속삭이는 유혹의 말에 우영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앞으로라니, 앞으로도 계속 섹스하자는 말인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거 싫어.”
“…….”
“네가 더 만족할 수 있게, 잘할게.”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긴 하나, 이 관계에 다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그게, 그렇게 좋았냐?”
“……응. 지금도 또 하고 싶어.”
눈을 감은 고태성이 울긋불긋한 우영의 가슴께에 입을 맞췄다. 어느새 올라온 손은 부어오른 돌기를 튕기듯 스쳤다. 밤새 예민해진 우영의 몸이 움칠 튀었다. 허벅지께에 그의 뜨거운 좆이 슬금슬금 문질리고 있었다.
“한 번 더 할래?”
달래듯 묻는 말에 우영의 낯빛이 굳어졌다. 또 속절없이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 것만 같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복잡한 미로 속에서 점점 헤매는 기분이었다.
“고태성.”
우영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부름에 그가 물끄러미 시선을 올렸다.
“너 나 좋아해?”
정제되지 않은 물음이 헐거워진 나사처럼 툭 튀어 나갔다.
“너 나 좋아하냐고.”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고태성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짧은 정적 속에서 고태성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뱉을 수 있었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제 손으로 저지른 확인 사살에 푹 찔린 기분이었다.
우영의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나까지 먹으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
“존나 아무하고나 막 섹스하나 봐.”
빈정거리는 말에 고태성의 눈가가 희미하게 굳었다. 따라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난…….”
“괜찮아. 나도 좋았다니까.”
눈을 치켜뜬 우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구구절절 변명하는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비참했다. 그러나 내색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 잘하더라.”
우영은 한쪽 입매를 올려 웃었다. 손을 뻗은 그가 고태성의 머리칼을 찬찬히 쓸어 넘겨 주었다. 동그랗고 뽀얀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이 드러났다. 개 같은 속과는 달리 다정하기만 한 손길이었다.
“근데……. 네 말은 못 들어줘.”
우영은 금세 무정해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별로…….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고태성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확연히 굳어 가는 낯빛을 보며 우영은 한 김 식은 숨을 내쉬었다.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감추려 날카롭게 벼린 심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한 번 더 할까?”
“…….”
“아직 시간 있는데.”
이어지는 침묵에 우영이 그의 턱 끝을 움켜쥐었다. 뒷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
“나이스, 나이스!”
타앙! 우영이 걷어찬 공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 안으로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입술 위로 뿌연 입김이 흩어졌다. 그의 완벽한 득점으로 인해 팽팽했던 경기가 결국 끝이 났다.
인조 잔디가 깔린 캄캄한 축구장에는 쨍한 흰 조명이 열한 명의 부원들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체교과 운동부 동아리인 ‘싸커킥’의 첫 활동이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몰라도 기가 막히게 촌스럽기도 했다.
“아, 씹…….”
성공적인 골과는 별개로 우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길게 펴고, 뻐근한 고개도 이리저리 젖혔다.
고태성과의 관계도 벌써 며칠 전 일이건만, 아직도 꼬리뼈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이 있었다. 아무리 체력 단련을 꾸준히 하는 자신이라지만 오기 부리듯 이어 간 아침 관계까지는 무리였던 듯했다. 더 무자비하게 박아 대던 고태성 때문이었다.
‘너 나 좋아하냐고.’
쓸데없이 던진 물음에 미간을 좁힌다. 그날 오전, 말 한마디 없이 가졌던 관계는 꽤 오래 이어졌었다. 마치 묵언 수행이라도 하듯이.
씨발, 그딴 말은 왜 했는지.
쪽팔려서 어디에 숨고만 싶었다. 마치 저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듯 보였을까 짜증이 났다. 진심을 내보이는 건 싫었다. 아무 미련 없어 보이게 굴자고 다짐했으면서, 더는 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면서, 그의 앞에선 여전히 제가 아니게 되었다. 치졸하고 옹졸했다.
“권우영, 맞지? 너 진짜 잘한다.”
이름 모를 남자가 다가와 이온 음료를 건넸다. 경기 시작 전 신입생들 앞에서 동아리 설명을 하던 3학년 선배였다.
“감사합니다.”
우영이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찬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음료수 한 병을 시원하게 비운 우영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액체가 턱선과 목울대를 타고 흘러내렸다.
땀으로 젖은 머리칼이 축축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죽도록 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이거 완전 에이슨데. 나 이번에 신입생 오티 안 갔더니 너 같은 애 있는 줄도 몰랐다. 슛 쩔었어, 진짜.”
그가 양 엄지를 치켜들며 웃었다. 슬쩍 바라본 등엔 ‘이찬형’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그는 동아리의 주요 멤버인 듯했다.
“우영, 권우영! 에헤이. 딱 볼 때부터 느낌 오더라니. 아, 우리 팀으로 뽑았어야 했는데 존나 아깝다. 씨발, 아까워어.”
멀리서 젖은 머리를 털며 다가온 선배 하나가 구시렁거렸다. 따라 우영의 주변으로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 권우영? 걔 아냐? XX학번? 군대 먼저 다녀왔다는 신입생.”
“아, 유디티? 아까 건우가 그랬던 것 같은데.”
“맞을걸. 축구부 뛰었다던. 이건우 어디 갔냐?”
“걔 민준이랑 음료수 사러 갔어.”
웅성거리는 대화에 이찬형이 눈을 크게 떴다.
“XX학번? 너 XX야?”
마주 보고 선 그가 우영의 양어깨를 움켜쥐었다. 눈을 치켜뜬 우영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맞아요.”
“와, 미친. 우리 친구네, 우영아?”
이찬형이 활짝 웃으며 우영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야, 너 왜 이제 나타났어. 나 면제라서 동기들 다 군대 갔거든. 약간 나랑 영혼의 단짝 느낌 나는데. 어때, 나랑 친구 하실?”
경기 내내 벤치에 서서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우영이 퍽 마음에 든 듯했다.
“어? 야야, 말 놔라. 이래 봬도 나도 축구 짬밥 좀 있거든?”
“좋지.”
능글거리는 말에 우영이 낮게 웃었다. 스물둘이면 대부분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 있을 나이였지만, 선배들 사이에 제 친구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나이가 뭐라고 동갑이라는 말에 괜스레 더 편한 느낌이 들었다.
“와, 씨. 뭐야 너. 존나 웃으니까 인상 확 다르네.”
“그런 말 좀 듣긴 해. 뭐, 많이 다른가?”
“어. 근데 웃지 마. 나 반할 것 같애.”
손바닥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던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찬형이야말로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우영아. 말 나온 김에 XX의 우정도 다질 겸 소주나 한잔할까? 너 어디 살아? 통학 아니지?”
“어, 나 정문 쪽.”
“아, 역시. 마음에 들어. 딱이야!”
이찬형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야, 그럼 나 너네 집에서 좀 씻어도 되냐? 나 쭈구리 통학이거든…….”
그가 넉살 좋게 우영의 옷깃을 흔들었다. 별안간 등 뒤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와, 씨. 이찬형, 이 박쥐 같은 새끼! 우리 집 온다며어~!”
“아, 형! 저 지금 영혼의 단짝 만났다니까요? 소, 울, 메, 이, 트! 우리 가까워질 시간이 필요해요. 우영아, 알지? 원래 남자들끼리는 목욕탕부터 가면서 친해지는 거. 너네 집 욕실부터 시작하자.”
천연덕스러운 윙크에 우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
“우영아, 난 오늘 참 기분이 좋다.”
집으로 가는 길, 이찬형이 넉살 좋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축구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던 참이었다. 지독한 축덕이라는 그는 우영과 좋아하는 축구팀이 같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눈을 더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네 환상적인 어시와 기막힌 슈팅을 보는 순간 난 느꼈어. 넌 진짜 된 놈이라는 걸……. 우리 싸커킥에 한 획을 그어 줄 귀인이라는 것도. 어? 사람의 직감이란 게 있잖아.”
그가 머리로 우영의 어깨를 툭 밀었다. 눈을 치켜뜬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다 잘 차던데.”
“아냐 아냐, 솔직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존나 개발 많아. 내가 누구라고 말은 못 하지만, 관전하다 울화통 터진 게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 너도 이제 몇 판 뛰다 보면 알걸.”
이찬형이 찡그린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앞으로 공 찰 일 있으면 불러 줘. 알바 가는 날 빼고 다 가능.”
씩 웃어 보인 우영이 이찬형을 내려다보았다. 제대 이후 오래간만에 짜릿한 경기였다. 발끝에 감기는 타격감과 숨이 턱까지 찰 만큼 정신없이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공놀이가 즐거웠다. 제 뒤로 따라붙던 박수갈채와 고함이 아직도 생생했다.
“너 알바도 해? 무슨 알바?”
“정식은 아니고, 가끔 고깃집 땜빵.”
“어딘데?”
“후문 사거리 전에 동혁 숯불갈비.”
“아, 나 가 봤어! 거기 물냉 존나 맛있는데. 고기 불향 오지고.”
입맛을 다시는 행동에 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기보다 냉면 맛을 중시하는 사장님이 들으면 좋아할 말이었다.
“아무튼, 진짜 앞으로 계속 나와. 아니, 무조건 나와야 된다! 유니폼도 애들한테 바로 주문하라고 했어. 한국대 체교과 싸커킥의 새로운 신화를 세울 선수 입장이라고. 하하!”
“아이씨, 오바 그만해.”
“어어, 오바 아닌데, 오바 아닌데.”
우영이 질색하자 이찬형이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근데 너 여기 살아? 집 좀 사나 보다?”
막 도착한 오피스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던 우영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젖힌 이찬형이 높은 건물 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신축에다 풀 옵션 투룸이라 월세 존나 비싸잖아. 보증금도 그렇고.”
“아……. 어.”
스르륵 열린 자동문을 지나치던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은 고작 다섯 평짜리 수준의 월세만 내고 있었으나 구구절절 제 사정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뭐랬더라, 그것도 존나 비싸다던데.”
“뭐?”
“그, 관리비. 신축 오피스텔이라고 뭐, 기본 공동 관리비도 있다며. 다른 빌라보다 일반 관리비도 훨씬 더 나온다던데? 동기 한 명이 여기 알아보다가 포기했거든. 엄마한테 등짝 존나 맞고.”
끊임없는 수다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달마다 꼬박꼬박 이수화에게 보내는 건 한 달 월세의 반값뿐이었다.
‘관리비도 없어서, 월세만 주면 돼.’
조금의 변화도 없던 이수화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 많이 컸네. 뻥도 치고.
신세 지는 걸 염려하던 전과 달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떤 마음으로 한 일인지는 알았다. 조만간 한국에 들어온다고 하니, 꿀밤이나 한 대 놔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우영이 불을 켜며 물었다.
“먼저 씻을래?”
“어우, 아니. 주인님 먼저 씻으셔야지요. 나 양심은 있다.”
신발을 벗던 이찬형이 손을 내저었다. 우영은 사양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땀을 흘려 찝찝했음에도 옷을 바로 벗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벗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가관이었다. 가슴께에 고태성이 남겨놓은 울긋불긋한 자국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남이 보면 어떤 오해를 살지 알만했다.
미친놈. 물끄러미 응시하던 우영이 욕을 중얼거렸다. 이어지려는 생각을 뚝 차단했다.
기다리고 있을 이찬형 생각에 우영은 빠르게 씻기 시작했다. 땀을 흘린 뒤 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찝찝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뻗어 샴푸를 누르는 찰나 찔걱찔걱 빈 소리가 났다.
“아이씨…….”
우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샴푸가 똑 떨어져 오는 길에 사 온다는 걸 깜박하고 말았다. 정신없이 이어지던 이찬형의 수다 때문이었다. 뚜껑을 열고 탁탁 털어 보니 딱 제가 쓸 양이 마지막이었다.
씻고 나가서 사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명색이 첫 방문 손님에게 샴푸도 없이 씻게 할 순 없었다. 다행히 오피스텔 바로 맞은편 건물에 편의점이 있었다.
빠르게 샤워를 마친 우영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대충 꺼내 입고 거실로 나가자, 핸드폰 게임을 하는 이찬형이 보였다.
“샴푸 다 써서 사 올게. 편의점 바로 앞에 있어서 3분이면 돼.”
우영이 식탁 위에 놓인 지갑을 챙겨 들었다.
“어어, 그래. 지환이 형이 후문에서 술 사 준다는데 씻고 나갈래? 아까 그 너 뽑았어야 한다고 구시렁대던 형. 돈 존나 잘 써.”
이찬형이 훌렁훌렁 옷을 벗으며 물었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어, 일단 금방 갔다 올게.”
“오케이, 그럼 너랑 간다고 한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주인님~!”
그가 곰살맞게 엉덩이를 흔들며 욕실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넉살에 우영이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맨발에 슬리퍼를 구겨 신은 우영은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밖을 나섰다. 아직 날이 쌀쌀했지만 어차피 편의점은 바로 앞이었다.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후끈후끈 덥기도 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편의점에 들렀다. 생수 한 병과 대강 눈에 보이는 샴푸를 집었다. 계산대로 가자 아르바이트생이 우영의 젖은 머리와 반팔 차림을 힐긋거렸다. 괜스레 머쓱해졌다.
계산한 것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편의점을 나왔다. 찬 바람에 그새 발이 시려 왔다. 젖은 머리를 툭툭 털며 빠르게 보폭을 좁혔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우영아.”
기시감에 우영이 멈칫 고개를 들었다. 재회 이후 고태성은 신출귀몰했다. 이젠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연락 좀 하고 오지?”
건조한 말에 고태성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우영의 젖은 머리칼을 스쳤다.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반소매 아래 차갑게 식은 팔뚝을 문지르며 쳐다보자, 그가 침묵을 지켰다. 심각한 낯빛은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묵언 수행하듯 붙어먹었던 마지막 섹스가 떠올랐다. 치기에 휩싸인 채 짐승처럼 허덕이기만 하던 모습이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우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짧게 끝낼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나중에 해. 지금 바빠.”
“뭐 하느라 바쁜데?”
틈 없이 되돌아온 물음과 함께 고태성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우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되냐?”
무감하게 되물은 우영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행동에 조금 짜증이 났다.
“좀 아무 때나 막 찾아오지 마.”
“…….”
“그렇게 네 멋대로 구는 거, 고칠 때도 됐잖아.”
한숨처럼 뱉으며 그의 팔을 떨어냈다. 우선은 샴푸도 없이 씻고 있을 이찬형 때문에 빨리 올라가 봐야 했다. 눈을 내리깔고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그가 저지하듯 우영의 손목을 쥐었다. 어딘가 조급한 손길이었다.
“그럼 같이 올라가. ……나 오늘 재워 줘.”
느리게 이어지는 말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우두커니 선 고태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집이 숙박업소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물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하는 말이 황당할 지경이었다. 전이라면 몰라도, 섹스까지 한 마당에 그와는 이럴 사이가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
우영이 다소 귀찮은 듯 뱉었다. 이어지는 정적에 문득 시선을 올리자,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옅은 한숨을 내쉰 우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싫어서가 아니고.”
“…….”
“집에 손님 있어. 친구.”
신경이 쓰여 괜한 말을 덧붙여 본다. 하기야 그렇게 붙어먹고 내외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는 했다.
“언제 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물음이 돌아왔다. 삽시간에 싸해진 눈빛이 쏟아졌다. 그 변화를 지켜보던 우영의 눈가가 살짝 비틀렸다. 또 제멋대로 저를 쥐고 흔들려는 수작이 빤했다. 헤어진 이후 제가 가장 싫어하게 된 그의 모습이었다.
우영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태성.”
잇새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샜다.
“너 내 번호 몰라?”
번호는 바꾸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와 똑같은 번호였다. 제 번호를 몇 년간 달달 외우고 있던 그였으니 잊었을 리 없었다. 지웠을 리도 없었다. 그냥 고태성이라면 그랬을 것 같았다.
“……알아.”
고태성이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나랑 뭘 하고 싶으면, 미리 물어보고 와.”
“…….”
“친구든 섹파든 그게 예의야. 알겠냐?”
다그치는 말에 고태성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정적 사이로 앙다문 그의 턱에 심줄이 서는 것이 보였다.
약속을 잡기 전 미리 상대의 양해를 구하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제 사정은 살피지 않는 막무가내식 태도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무슨 큰일이라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친구라며.”
“뭐?”
“위에 있는 거, 친구라며.”
한껏 굳은 고태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네 친구면……. 내 친구잖아.”
“…….”
“……같이 있으면 안 돼?”
물끄러미 우영을 주시하는 눈동자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면서도 조르듯 옷깃을 살짝 움켜쥐는 행동에, 그것을 한 번 더 당기는 모습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권우영 친구가 내 친구지. 왜, 싫어?’
‘아니, 뭐……. 그러시든가.’
언젠가 그와 했던 대화가 머릿속을 관통하듯 스쳤다. 벌써 한참은 된 일임에도 생생하기만 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우영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가 하는 말이 전부 옳았던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진창에 처박혔던 과거는 한 번이면 충분했다. 더는 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언제 적 소릴 하냐.”
“…….”
“이제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느리게 올라간 시선이 까맣게 물든 고태성의 눈동자에 닿았다. 팔을 들어 툭 쳐 내자 그의 손이 가볍게 떨어졌다. 그대로 무심한 시선을 돌린 우영이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열린 자동문 안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분명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고태성인데, 이상하게도 매몰차게 구는 자신의 심장이 아팠다.
집으로 돌아온 우영이 욕실 문을 두드렸다. 살짝 열린 틈 사이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 미안. 늦었지.”
불쑥 튀어나온 손 위로 샴푸를 건네주자, 이찬형이 넉살 좋게 웃었다.
“어어, 괜찮아. 뜨끈한 물 쫙쫙 나와서 사우나 온 거 같고 좋네.”
“……어. 씻고 나와.”
대꾸해 줄 기운이 없어 문을 닫고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소파에 털썩 걸터앉아 다리를 크게 벌린 채 등을 푹 기댔다. 머릿속엔 종전에 보았던 고태성의 눈빛이 떠올랐다.
왜 그딴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또 말도 없이 집은 왜 찾아온 건지.
괜한 짜증에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조금 전 보았던 단정한 얼굴과 감색 코트 자락이 스쳐 지나갔다.
추운데 씨발, 옷은 왜 자꾸 그딴 걸 처입고 다니냐고…….
가뜩이나 추위를 많이 타던 놈이었다. 감기까지 걸렸다며 엄살 부리더니. 그런 차림으로 안 걸리는 게 더 이상했다.
하아. 짙은 한숨이 나왔다. 찡그린 눈가를 손바닥으로 꾹꾹 짓눌렀다.
어떡한다. 이 관계를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전처럼 친구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거, 차라리 속 시원히 고백이라도 해 버릴까. 전부터 존나 좋아했다고, 지금도 좋아한다고. 고태성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황할까? 싫어할까? 그러지 말고 그냥 섹스나 하자고 조를려나.
애당초 저를 좋아하냔 말에 답하지 않았던 그였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제 위에서 눈이 돌아 섹스에 미친 사람처럼 굴던 그를 떠올리면 그럴 가능성도 농후했다.
……씹새끼.
생각하자마자 또 욕이 나왔다. 여기까지 와서 그딴 비참함을 또 느끼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붙잡는 건 제가 아니어야 했다.
“야아, 우영아. 욕실 잘 썼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음성에 흠칫 눈을 들었다. 허리께에 간신히 수건만 걸친 이찬형이 씩 웃으며 머리를 털고 있었다. 성격과 달리 날카로운 얼굴과 은근히 잘 짜인 몸에 시선이 닿았다. 팔뚝과 등판을 따라 화려하게 수놓은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어때? 괜찮아? 간지 나? 나 복근 만드느라 존나 힘들었는데.”
시선을 느낀 이찬형이 힘을 주고 인상을 쓰며 복부를 탁탁 두드렸다. 이어 빙글 돌아 제 등을 보이며 자랑하듯 보디빌더 포즈를 취했다.
“이거 이거, 멋있지 않아? 돈 졸라 많이 들었는데. 나 거울 볼 때마다 감탄하잖아.”
우영의 시선이 그의 등 위로 미끄러졌다. 비늘이 겹겹이 쌓인 용 한 마리와 큼지막하게 수놓인 장미꽃이 보인다. 팔뚝 위로 뜻을 알 수 없는 레터링이 화룡점정이었다.
우영의 눈가가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저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놈에게 대놓고 별로라고 말할 순 없었다.
“……어, 잘했네.”
“진짜? 너도 할래? 소개해 줄게. 아는 형님이 타투 샵 하시는데 안 아프게 잘 해 줘. 내가 소개해 줬다고 하면 할인도 해 줄걸.”
“아니, 난 괜찮아.”
“왜? 보니까 너 어깨도 넓고 몸 좋을 것 같은데. 한번 보자.”
이찬형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헛웃음을 터뜨린 우영이 소파 뒤로 몸을 내빼며 팔을 휘젓는 순간이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쿵쿵쿵!
초인종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우영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자동으로 뜬 인터폰 화면에는 아까 보았던 고태성의 코트 자락이 보였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우영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상황 파악을 하는 사이, 쾅쾅쾅!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요란한 초인종과 노크 소리에 당황할 새도 없었다.
걸어오던 이찬형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누구 왔는데? 내가 열어 줄까?”
고개를 돌린 그가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 어. 아니, 내가.”
조급하게 일어난 우영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버튼을 누르고 문을 달칵 열자, 굳은 얼굴로 선 고태성이 보였다.
“……뭐야.”
문고리를 잡은 우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어느새 1층 현관 비밀번호까지 알아낸 셈이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고태성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뭐 해?”
우영은 답하지 않고 그를 잠자코 주시했다. 집에 가란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또 막무가내로 구는 행동에 짜증이 치밀었다. 겉으론 평정을 유지했으나 잔뜩 엉킨 말들이 속에서 튀어 나가지 못하고 섞여 들었다.
“우영아, 친구 왔어?”
돌연 등 뒤에서 이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꾹 다문 고태성의 눈동자가 우영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일그러졌다.
우영은 잡고 있던 문틈을 조금 더 좁히며, 안으로 고개를 돌려 답했다.
“어, 잠깐만 있어.”
다시 고개를 돌린 우영이 걸어 나왔다.
“뭔데.”
등 뒤로 현관문을 탁 닫으며 시선을 들었다. 제멋대로 찾아온 걸 보니 얘기가 짧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집에 가라니까 왜 여기까지 올라와?”
미간을 좁힌 우영이 고태성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적막 속에서 고태성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천천히 내려간 우영의 시선이 그 주먹에 닿았다. 묵직한 고요와 싸한 분위기에 눈을 치켜떴다. 과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이질적이었다. 왜인지 그는 지금 몹시 화가 난 듯 보였다.
“……랬잖아.”
“뭐?”
“나랑 하자고 했잖아.”
그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우영이 이맛살을 좁혔다.
“……그 짓이 그렇게 좋아? 그새, 그 며칠도 못 참을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날이 선 눈동자가 우영을 노려보았다. 한 걸음 다가온 고태성이 주먹을 쥔 팔을 문에 기댔다. 커다란 덩치 탓에 마치 그의 팔 안에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넌……. 넌, 씨발. 대체 왜 그래?”
그가 밀어붙이는 듯한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다소 거세어진 어투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뭐가 그렇게 쉬워?”
“뭔 소리야, 조용히 좀 말해.”
눈을 치켜뜬 우영이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방음이 잘 되는 곳이었기는 했지만, 복도에 퍼지는 목소리가 크게 느껴진 탓이었다.
“왜. 그 새끼한테 들릴까 봐, 걱정돼?”
고태성은 투박하게 그의 손을 쳐 냈다. 낮게 내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입술을 꽉 깨문 그는 우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난 항상 이렇게 어려운데……. 넌, 왜 그렇게 쉬워.”
“…….”
“넌 어떻게 그렇게 전부, 좆같이 다 쉬워?”
단어 하나하나, 꽉꽉 억누르듯 말하는 그의 음색이 옅게 떨렸다.
우영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그가 했던 말을 정리하며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아…….”
짙은 숨을 길게 내쉰 고태성이 시선을 돌렸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붉게 물든다. 그의 옆얼굴은 괴로운 듯, 또는 분한 듯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본 적 있던 표정이었다.
우영에게서 떨어져 나간 그가 고개를 툭 떨궜다. 사이로 짧은 고요가 이어졌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중얼거렸다.
“……돌아 버릴 것 같아.”
끓듯이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에, 우영은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그를 응시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놈의 말은 전부 틀렸다. 제게 쉬운 일 따윈 하나도 없었다. 이 상황에 화를 낼 사람이 있다면 그건 고태성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우영아.”
고개를 떨군 고태성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스르륵 다가와 어깨 위로 이마를 툭 떨구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뜨끈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응? 여기서 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씨발…….”
읊조리는 욕설은 자취를 감추려는 듯 차츰 작아져만 갔다. 분명 화를 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간절해 보였다.
우영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알 수 없는 답답함에 눈가를 찡그렸다. 그의 머릿속을 알 것 같긴 했으나, 섣불리 답을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우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기다려.”
그리고 딱딱하게 읊조렸다. 단호하게 그의 어깨를 밀어낸 우영이 등을 돌려 잠금장치를 열었다. 뒤에 우두커니 서 있을 그를 한 번 보지도 않은 채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이찬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듯했다. 우영은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 그래도 심란한 심경에 딱히 둘러댈 말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아. 알았다.”
돌연 이찬형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네 친구 까였구나? 잠깐 보니까 죽을상 하고 있던데. 지금 여친이랑 싸우고 온 거 아냐?”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굳어 있던 우영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 맞아.”
“와, 존나 잘생겼던데. 갔어? 왜 싸웠대? 쟤도 XX야? 우리랑 동갑?”
“……어. 응. 아니, 아직 밖에 있어.”
머뭇거리는 답에 가방을 주섬주섬 정리하던 이찬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너 못 나가겠네?”
눈치 빠른 물음에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애써 말하지 않아도 입장을 헤아려 준다. 그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놈인 듯했다.
“……미안. 얘기 좀 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뭐 오늘만 날이냐. 나중에 마시면 되지.”
지퍼를 닫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이찬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영은 가볍게 눈짓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찬형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달칵, 문을 열고 주변을 살피자 우측 벽에 기대어 선 고태성이 보였다. 뒤에서 운동화를 구겨 신던 이찬형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우영의 어깨를 짚고 선 그가 고태성에게 까닥 인사했다.
“저, 초면에 할 말은 아닌데, 힘내세요. 어디든 내 짝은 따로 있더라고요. 어우,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기셨네.”
난데없는 말에 고태성의 낯빛이 차츰 더 어두워졌다. 안타깝다는 듯 그를 바라본 이찬형이 우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하튼, 주인님, 저 갈게요? 이따 나올 수 있음 연락해?”
“……어, 들어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상반되는 쾌활한 목소리였다. 넉살 좋게 윙크까지 날린 그가 등을 돌리자, 고태성의 얼굴에 더욱 그늘이 졌다. 가만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들어와.”
작게 턱짓하자 고태성이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달칵. 문이 닫히자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슬리퍼를 벗은 우영이 거실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돌연 뒤에서 뻗어온 손에 손목이 잡혔다. 내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굳은 얼굴의 고태성이 저를 보고 있었다. 그대로 잡힌 손을 툭 떨어냈다.
“이제 됐냐?”
우영은 터벅터벅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아, 한숨을 내쉬곤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잖아. 지금.”
날 선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멀거니 선 고태성이 우영을 내려다보았다. 둘 사이로 짧지 않은 적막이 이어졌다.
“차라리…….”
달싹거리는 입술에 우영이 느리게 시선을 올렸다.
“차라리 한 명이랑만 해.”
“뭐?”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렇게 바꿔 가면서 골라 먹지 말고, 차라리 한 명이랑만 하라고.”
그늘진 얼굴의 고태성이 우영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저를 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그 심지 굳은 얼굴에 헛숨이 터졌다. 그가 또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우영이 소파에 등을 푹 기댔다. 마른세수하듯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짓누르며 쓸어내린다. 거친 손길에 뺨이 붉게 번졌다.
“아……. 짜증 나네.”
우영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이찬형과 섹스한 사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기는 했다. 자꾸만 저를 문란한 게이 취급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야 저 또한 일부러 보란 듯이 얘기했으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고태성과는 겨우 두 번, 아니 한 번 잔 사이였다. 저와 무슨 사이도 아닌 그가 제 사생활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뭣도 아닌 주제에, 그런 주제에 골라 먹느니 뭐니 지껄이는 말에 더한 짜증이 치솟았다.
“골라 먹든 하나만 먹든 뭔 오지랖인데.”
우영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휩쓸려 다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를 그만큼 좋아하니까. 기분이 더러운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그만큼 좋아하니까. 모든 게 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반복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또 화가 났다.
“씨발, 너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잇던 우영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마주친 고태성의 표정이 낯설게 보였다. 제게 보이는 불안정한 눈빛에, 또 말아 쥔 주먹에 괜한 신경이 쓰였다. 먼저 그딴 말을 지껄인 주제에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 씹.”
한숨을 내쉰 우영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좆같지만 저라고 그와 언쟁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고태성에게 낸 화는 제게 여실히 돌아왔다. 그 상처받은 눈빛을 떠올리며 자꾸만 제 잘못을 곱씹던 것이 벌써 몇 번째였다.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다. 고태성은 원래 이런 놈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됐고.”
고개를 돌린 우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와서 하려던 대단한 말이 뭔데. 들어나 보자.”
이어지는 정적에 고개를 들자, 고태성이 찬찬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우영아…….”
난데없는 행동에 우영의 시선도 그를 따라 느리게 내려갔다. 고요 속에서 짙은 시선이 오갔다. 그의 붉은 입술 새로 옅은 숨이 흘렀다.
“나로는 부족해?”
달래듯 부드러운 음색이 울려 퍼졌다.
“내가 잘하겠다고 했잖아…….”
“…….”
“너도 좋아했잖아.”
그는 연약한 소동물처럼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우영은 굳은 채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무릎을 살며시 쥔 고태성이 허벅지 위로 뺨을 기댔다. 아래로 내리깔려 있던 속눈썹이 서서히 올라왔다.
별안간 마주친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제 다리 사이에 앉아 보내는 퇴폐적인 눈빛에서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걱정돼서 그래.”
“…….”
“그러고 다니다 학교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한숨 같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 한마디 말에, 우영의 표정이 차츰 경직되었다.
소문, 소문……. 그래, 그런 거 존나 싫어했었지, 고태성.
홀린 듯 잠겨 들던 꿈에서 또 확 깨어난 기분이었다. 과거에 그가 내비쳤던 혐오와 경멸이 떠올랐다. 악몽 속에서나 보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목소리 낮춰. 동네방네 네 취향 떠벌리고 싶은 거 아니면.’
상처받은 저는 생각지도 않고 입을 틀어막던 그였다. 고작 몸 한 번 섞었다고, 그에겐 한낱 방황일 뿐인 놀이에 빠져 잊고 있었다. 고태성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틀린 자존심이 또 펄떡펄떡 날뛰기 시작했다.
낮게 탄식한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반항기 어린 눈동자에 비뚜름한 미소가 어렸다.
“뭐, 소문 좀 나면 어떠냐. 껄떡대는 게이 새끼들 먼저 좀 꼬여 주면 좋지.”
“…….”
“말 나온 김에 네가 소문 좀 내 주던가.”
심드렁한 얼굴에 고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아, 맞다. 넌 그런 거 싫어했었나?”
우영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고태성의 흰 뺨을 툭 건드렸다. 마주치는 시선에 고태성의 낯이 굳어 갔다. 감정을 감추지 못한 그의 눈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영은 일부러 웃었다.
“난 또 뭐 별거라고.”
“…….”
“너랑은 안 나게 할 테니까 걱정 마.”
고태성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삽시간에 싸늘해진 눈빛이 우영에게로 쏟아졌다.
“……그딴 짓을 왜, 하려고…… 해?”
잠긴 목소리가 띄엄띄엄 새었다. 그 목소리에 우영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비참하지 않으려면 더 당당한 척을 해야 했다.
“내가……. 내가 해 준다잖아.”
“네가 그걸 왜 해 줘. 내 인생인데.”
“……내가 다 해 주겠다고.”
빈정거리는 우영의 말에 고태성은 또다시 끓듯이 답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뭔데. 왜?”
“좀, 씨발!”
우영의 무릎을 꽉 움켜쥔 고태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데없는 고함에 우영의 눈빛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는 전처럼 제게 집착하고 있었다.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비틀리고, 어긋난, 말도 안 되는 모순적인 집착이었다.
고태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도 예기치 못한 듯, 느리게 눈을 깜박인 그가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가슴께가 야트막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아, 아니……. 아니야.”
고태성은 고개를 떨궜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을 번복했다. 차분히 내려온 앞머리에 가려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고른 치아가 붉은 입술을 씹는 것이 보였다.
고태성은 그대로, 시선을 들지도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내가…….”
“…….”
“내가, 빨아 줄까?”
우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상황에 맞지 않은 말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고태성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깊고 새카만 눈동자가 우영에게로 향했다.
“그 새끼들이 하는 거, 다 해 줄게……. 응?”
그가 허락을 구하듯 무릎에 뺨을 비벼 왔다. 반지르르 윤기 나는 우아한 고양이가 관심을 갈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주 막 나가라, 이제?”
우영은 헛숨을 터뜨렸다.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 속을 긁어 놓을 땐 언제고, 요망스럽기 짝이 없는 여우 짓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던지는 것도, 또 제 바지에 슬금슬금 손을 올리는 것도 전부 진절머리가 났다. 놈이야말로 얼마나 쉽게 살아왔으면 이런 짓을 망설임 없이 하는 건지 꼴 보기가 싫었다.
“너 뭐냐?”
물음에도 고태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묵묵한 반응에 우영이 입 안 살을 잘근 씹었다. 돌연 피어오른 한 줄기 의심이 그의 속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설마 남자 좆까지 빨아 본 건 아니지?”
우영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듯 물었다.
여자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가 아니라 당연한 전제였다. 하지만 남자 경험까지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게이를 그렇게나 혐오하던 놈이었다. 남자와 여자, 그깟 빌어먹을 성별 때문에 속이 썩어 문드러져 갔던 저였다. 그런 고태성이 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경험이 있다면 억울할 것 같았다. 묵묵히 지켜 왔던 제 오랜 짝사랑이 다 부질없는 짓으로 치부돼버리는 일이었다.
씨발, 진짜 해 본 건가?
불현듯 속이 갑갑해졌다. 망할,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꽉 다문 입술을 벌리고 속에서 거짓 없는 진심을 전부 끄집어내고 싶었다.
굳은 얼굴의 우영이 그의 몸을 발로 툭 찼다.
“뭐 해.”
“…….”
“뭐 하냐고, 씨발…….”
여전히 묵묵하게 저를 응시하는 시선에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이어지는 정적에 못된 마음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냥 씹질하고 싶어서 이 지랄한 거냐?”
적막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돌린 우영이 ‘돌겠네.’ 하며 웃었다.
“빨아, 그럼.”
금세 냉랭해진 얼굴로 그는 일부러 나쁜 말을 뇌까렸다. 고태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더 차가운 얼굴을 했다.
“너 잘하는 거 해 보라고.”
적막이 흘렀다. 이윽고 눈을 내리깐 고태성이 우영의 바지춤을 붙들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손길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 놈은 진짜로 제 아래를 빨아 줄 생각인 듯했다.
고태성은 옛날부터 그랬다. 누구보다도 가까운, 제일 친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처음……. 그딴 불필요한 것들에 집착하며 저를 통제하려고 했다. 우영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그딴 게 아니라, 그딴 비틀린 감정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좋아해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변한 것은 없었다. 구제 불능인 자신부터가 문제였다.
순간 울컥 오기가 치밀었다.
“존나 안 꼴리는데……. 되려나 모르겠네.”
억지로 상처 주는 말을 하며 눈가를 찌푸렸다. 소파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댄 우영이 오만한 자세로 고태성을 내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굳어 있던 그가 시선을 들었다.
“그럼 키스해 줄까?”
“…….”
“저번에 키스하고……. 꼴린다고 했잖아.”
그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묵묵히 우영의 바지 위로 손을 뻗어 잠잠한 중심부를 문지르듯 꾹 눌렀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행위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우영은 거친 손길로 그의 팔을 쳐냈다.
“필요 없으니까……. 씨발, 그냥 왜 이러는지나 말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끝내 고태성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지금.”
“…….”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정적 사이로 고태성이 시선을 맞춰 왔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뭐, 씹. 내 얘기하지 말고 네 얘기를 해.”
“없어?”
“……하.”
제 말엔 답도 않고 빈틈없이 쏘아 대는 물음에,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대화 방식은 여전했다. 상대의 말은 듣지 않고 제 말만 해대는 화법이었다. 벽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있어.”
“…….”
“있다고, 씨발, 왜.”
옅은 숨을 내쉰 우영이 눈가를 짓누르며 말했다.
“있는데……. 왜 그래?”
“뭐?”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 왜 막 만나고 다녀?”
고태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우영 또한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어쩐지 대화의 주제가 계속 돌고 돌아오고 있었다. 속에 열이 올랐다.
“누군데?”
“…….”
“내가 아는 사람이야?”
날을 세우는 얼굴에 우영이 또 헛숨을 터뜨렸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 또 지랄이네.”
“그러지 마.”
“아, 뭘!”
그의 말을 끊듯 우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사람 속을 긁는 것도, 들어 주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 우영이 고태성을 노려보았다.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 왔다.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수절이라도 해라, 이거냐?”
“…….”
“그럼 넌 뭔데? 너랑은 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라도 해? 뭐, 네 말대로 네가 섹스 잘하니까? 하나뿐인 게이 친구를 위한 봉사 정신? 뭐 그딴 맥락으로 지껄이는 거?”
재회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개소리를 지껄인다. 고태성과 말을 나누다 보면 밑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갑갑해서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 안 살을 아득 씹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속 안에서 시커먼 감정이 들들 끓기 시작했다.
“야.”
투박하게 팔을 뻗은 우영이 그의 뒷머리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반항 없이 끌려온 그의 머리가 사타구니 사이로 파묻혔다.
“좆같은 소리 할 거면 그냥 빨기나 해.”
우영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고태성은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자꾸만 나사 빠진 등신처럼 굴고 있었다.
고요 속에서 고태성이 움직였다. 우영의 바지춤에 손가락을 걸어 끌어 내렸다. 느슨한 바지가 허벅지까지 쉬이 내려가고, 그 아래로 딱 붙은 드로즈가 드러났다. 그가 그 위로 입술을 대었다. 습한 숨결과 함께 얇은 면 위로 뜨거운 혀가 들러붙어 왔다.
미친 새끼.
우영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별다른 반발도 없이 이렇게 흔쾌히 제 좆을 빨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확실히 그는 과거의 고태성이 아니었다.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확연히 크기를 키운 좆이 속옷을 팽팽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야 좋아하는 놈이 가랑이 사이에서 문지르고 지랄을 해 대는데 안 설 리가 없었다. 씨발, 이 상황에서도 착실히 발기하는 제 아래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무릎을 꿇은 채 바짝 붙은 고태성이 우영의 드로즈를 끌어 내렸다. 속옷이 끌려 내려가며 꼿꼿하게 선 우영의 자지가 고태성의 흰 뺨을 퉁 쳤다.
우영은 짙은 숨을 내쉬었다. 눈가를 찌푸린 채 가만히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고태성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그의 입 안으로 제 좆이 모습을 감췄다. 일순 뜨겁고 좁은 점막이 성기를 감싸 왔다. 눈을 내리깐 고태성이 우영의 무릎을 잡고 볼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 시각적인 자극에 아래가 뻐근하게 아플 만큼의 흥분이 몰려왔다.
“하아…….”
우영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지그시 시선을 내렸다. 적나라하고 야한 얼굴에 골이 지끈거렸다. 좁은 입 안에서 우영의 자지는 틈틈이 크기를 부풀려 갔다. 한 눈에도 그가 받아 내기 버거운 것이 보였다. 다소 서툰 움직임에 그가 이 행위에 능숙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하아……. 씹, 이 세우지 마.”
끓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로 손을 뻗은 우영이 고태성의 앞머리를 살짝 쥐었다. 눈을 가리는 앞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동그란 이마가 보였다. 그것을 그대로 꽉 움켜쥐었다. 다소 강한 악력에 예쁜 눈가가 일그러졌다.
불룩한 뺨과 젖은 입술이 가학심을 자극했다. 들쑥날쑥한 감정과 별개로, 낯선 감정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늘 여유만만하고 남을 깔아보는 듯한 그를 벌겋게 울리고 싶었다. 발정과는 다른 욕구였다. 정상적이지는 않은 욕망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간 정말 일을 치를 듯해, 우영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턱을 젖혔다. 눈을 감자 시커먼 어둠이 찾아왔다. 그 사이로 제 아래를 빨아 대는 젖은 소리와 저릿저릿한 쾌감만이 그를 덮쳐 왔다.
“하…….”
미친 짓인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당장이라도 싸 버릴 것 같은 강한 자극에 몸이 떨렸다. 그렇기에 더 끝내고 싶지 않았다. 차츰 내려간 손이 고태성의 목 뒤를 조이듯 감쌌다. 느른하게 풀린 눈을 뜨곤 그의 머리를 바싹 앞으로 당겼다. 귀두 끝이 목구멍을 쿡 찌르는 느낌이 났다.
“우윽…….”
고태성이 와락 눈가를 찌푸렸다. 따라 핏줄 하나 없는 흰 눈자위가 벌겋게 물들었다.
“하아……. 그렇게 해서 싸겠어?”
흘리듯 말한 우영이 이를 꽉 물었다. 그의 고운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허리를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태성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코로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도 열심히 혀를 굴리며 빨아 대는 것이 우스웠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치기 어린 집착으로 똘똘 뭉치게 하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태성…….”
낮은 신음이 섞인 부름에 고태성이 젖은 눈을 치켜떴다.
“네 말 들어 주면……. 넌, 뭐 해 줄래.”
우영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고태성이 답하려는 듯 얼굴을 뒤로 물리자,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으읍…….”
“하아……. 멈추지 말고 계속 빨아. 쌀 것 같으니까.”
예쁜 얼굴이 젖고 있었다. 제 좆에서 흘러나온 액과, 침으로, 깨끗하고 흠 없는 얼굴이 말갛게 젖어 들고 있었다. 시커멓고 못난 제 감정과 시선으로 더럽혀지고 있었다.
깨닫는 찰나 저릿한 절정이 치밀었다. 기둥의 아래를 붙든 우영이 그의 입에서 자지를 주르륵 빼냈다. 붉게 달아오른 고태성의 뺨 위로 귀두를 문지르며, 잔뜩 젖은 기둥을 손에 감싸 쥐고 위아래로 탁탁탁 흔들었다. 절정이 찾아오고 있었다.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크읏…….”
짧은 신음과 함께 희멀건 정액이 쏘아져 나왔다. 그것은 고태성의 흰 뺨으로, 붉은 입술 위로, 오뚝한 콧대와 둥그렇게 뻗은 속눈썹 위로 떨어졌다.
“하아……. 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더러워져 가는 아름다운 얼굴을 주시했다. 제가 저지른 미친 짓에 또다시 헛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우영은 여전히 꼿꼿이 발기한 좆을 잡고 꾹 다물린 그의 입술 위로 질척질척 문질렀다.
“벗어.”
“…….”
“꼴렸으니까 하고 가.”
낮게 뇌까리며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고태성이 정액으로 젖은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우영의 입술 끝이 살짝 휘었다. 저를 살리는 것도, 망가뜨리는 것도 전부 놈의 짓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기댄 우영이 느리게 상체를 숙였다. 헐렁한 티셔츠 자락을 쭉 당겨 고태성의 뺨과 입술을 슥 문질렀다. 검정 티셔츠 위로 희멀건 정액이 치덕치덕 묻었다.
“싫어?”
지그시 묻는 말에 고태성이 시선을 맞춰 왔다. 살짝 치뜬 눈 사이 작은 동공이 싸한 눈빛을 띠었다. 하나 쏘아보는 듯한 눈빛도 잠시, 금세 눈을 내리깐 그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좋아.”
늘 그렇듯 부드러운 음색이 귀를 간질였다. 제 얼굴을 닦아주는 우영의 손길에 비스듬히 얼굴을 맡긴 채, 그가 티셔츠 위로 뺨을 비볐다.
우영은 그의 턱을 더 꽉 움켜쥐었다. 온순한 답에 괜한 치기가 치밀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깊숙이 입을 맞췄다. 꽉 닫힌 입술을 잘근 씹어 벌리고 혀를 밀어 넣으며 그를 끌어당겼다. 다소 난폭한 키스에 고태성이 눈가를 찡그렸다.
“하아……. 입 더 벌려.”
쭙, 입술을 빨아들인 우영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고태성이 서서히 붉은 입술을 벌렸다. 우영은 천천히 그의 위로 밀어붙이듯 체중을 실었다. 그 손길에 고태성이 거실 바닥 러그 위에 떠밀리듯 누웠다.
“빨고 싶으면 말 잘 들어야지.”
그의 어깨를 꾹 누른 우영이 속삭였다. 어느새 완전히 위에 올라탄 그가 다시 고태성의 입술을 맞물었다.
끊임없이 넘어오는 달큰한 향기를 삼키며 우영은 눈을 감았다. 종전과는 달리 뜨거운 입 안을 부드럽게 배회하자, 도톰한 혀가 화답하듯 혓바닥을 얽어 왔다. 맞닿은 체온 아래 고태성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것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새까만 구둣발로 억세게 짓밟혀도 남겨진 발자국 하나에 웃어 버리는 백치 같은 미련이다.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끝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야 마는, 그 발아래 깔린 채로도 웃고야 마는 비정상적인 욕망이었다.
그래 봐야 남는 건 거스러미 같은 집착뿐임을 빤히 알면서도.
“존나, 잘 서네…….”
입술을 떼어 낸 우영이 비스듬히 웃었다. 아래로 딱 맞붙은 하반신을 느리게 문질렀다. 그의 바지 밑으로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윤곽을 드러냈다.
고작 키스 하나에 제게 발정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지만 만족스러웠다. 정신이 두 갈래로 나뉘기라도 한 듯 상극의 감정이 양립했다.
바닥을 짚고 다시 상체를 낮춘 그가 고태성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입고 있는 목 폴라를 아래로 죽 끄집어 내리곤 목덜미를 아득 깨물었다. 거친 혀 놀림에 고태성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달래듯 여린 살을 다시 혀로 살살 굴리자, 흰 목덜미에 붉은 울혈이 번졌다.
“하아…….”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 우영이 무릎을 벌리고 섰다. 양팔을 겹쳐 티셔츠를 휙 벗어 던진다. 고양된 숨을 내쉴 때마다 잘게 나뉜 잔근육이 보기 좋게 움직였다.
“벗어. 불편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고태성이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코트를 툭 벗고, 입고 있던 목 폴라를 우영과 똑같이 벗어 올렸다. 그는 마치 말 잘 듣는 개처럼 굴었다. 하라는 대로 따르는 모양에 더 짜증이 났다. 저조차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심리였다.
“야.”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우영이 손가락으로 그의 도톰한 유두를 꾹 짓눌렀다. 아래로 밀 듯 힘주어 좌우로 문지르자 고태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나랑 섹파 하고 싶어서 이러냐?”
“…….”
“말해.”
다시금 바짝 솟은 돌기를 꽉 눌렀다. 따라 뒤로 밀린 고태성의 어깨가 움칠 떨렸다. 느리게 움직인 그의 시선이 우영에게로 닿았다.
“……나랑만 하면.”
고태성이 낮게 읊조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가 원하는 건 한결같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여전히 무정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우영이 상체를 낮췄다. 꼿꼿하게 선 유두를 혀끝으로 문지르며 쭉 빨아들이자, 머리 위에서 낮은 숨이 터졌다.
“그럼 너는?”
묻고는 다시 그의 유두를 혀로 굴렸다. 작은 돌기를 괴롭히듯 꾹꾹 누르자, 고태성이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내가 그러면, 너는?”
“읏…….”
“설마 넌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나만 정조를 지켜라 이거냐?”
다시금 입술을 떼어 낸 우영이 시선을 내리자,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난, 안 그래. 네가 처음이라고 했잖아.”
갈라진 목소리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 새끼. 저를 등신 천치로 보는 건지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단단히 힘이 들어간 그의 허리를 붙들고는 번들거리는 유륜을 콱 깨물었다. 붉게 부풀어 오른 흰 살갗에 금세 잇자국이 났다.
“읏…….”
“그래……. 아다라 그런지 맛있긴 하더라.”
짜증이 나 일부러 빈정거렸다. 더 반박할 가치도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혀를 내어 그의 젖꼭지를 우롱하듯 할짝거리는데, 별안간 두피가 꽉 당겨 왔다.
멈칫, 움직임을 멈춘 우영이 다시 느리게 시선을 올렸다. 앞니로 짓깨문 입술이 보였다. 조금 더 시선을 올리자 희멀건 낯에 드리운 그늘이 보였다.
돌연 그의 손에 잡힌 머리채에 욱신 힘이 들어왔다.
“……아다라 맛있었어?”
억누르는 음색이 흘렀다. 답을 하려는 찰나, 고태성이 제 가슴께로 우영의 얼굴을 콱 처박았다. 단단한 근육 위로 코가 뭉개지듯 문질렸다. 난데없는 행동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얼마나 맛있었는데?”
차게 식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퍼졌다.
“뒤로 먹어 보니까……. 좋았어? 앞으로 먹던 다른 새끼들이랑은 달랐어?”
딱딱한 음색이 차츰 거세어졌다. 숨구멍을 가로막은 가슴팍 탓에 숨이 막혔다.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바닥을 짚고 힘을 주어 얼굴을 떨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제 머리채를 쥐어 잡은 손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우영은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읽어 낸 건, 늘 그렇듯 비정상적으로 뭉친 집착과 질투였다.
우영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안 그러면 내가 널 왜 또 들였겠냐.”
뚝 떨어지듯 말을 뱉자마자 시야가 덜컥 뒤집혔다. 삽시간에 뒤로 넘어간 우영의 뒤통수에 딱딱한 소파가 쿵 부딪쳤다.
“아.”
“말 가려서 해.”
이글거리는 눈빛이 쏟아졌다. 나사 풀린 인형처럼 굴다 별안간 씩씩거리는 모습에 기가 찼다. 고태성이 핀트가 나가는 부분은 늘 제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싫은데.”
“…….”
“애인도 아니고, 내가 섹파 기분까지 맞춰 줘야 하나?”
비아냥대는 말에 고태성이 턱에 힘을 주었다. 원망하듯 우영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이제 그는 제 화를 감출 생각도 않는 듯했다. 점점 짙어져 가는 눈빛 속에서 우영은 감정을 감췄다.
“맞춰 주면 안 돼?”
별안간 고태성이 우영의 허리를 콱 붙들었다. 그대로 아래로 죽 끌어 내리자 소파 다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몸이 아래로 죽 끌려갔다. 딱딱한 바닥이 등 뒤에 닿았다. 반발 없이 바닥에 드러누운 우영은, 무정한 얼굴로 제 위에 올라탄 그를 응시했다.
“맞춰 줄 수 있잖아.”
그가 짓씹듯 뱉었다.
“너 불쌍한 새끼 좋아하잖아.”
그의 손이 우영의 바지 속을 투박하게 쑤셨다. 다시 발기한 좆을 콱 움켜쥐며, 상체를 숙여 우영의 귓불을 깨물고 혀를 밀어 넣었다. 굳어 있던 우영이 미간을 확 좁혔다.
“나 불쌍하잖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생각할 틈도 없이 쭙, 추웁, 두툼하고 뜨거운 혀가 귀 안을 질척하게 채웠다. 짙은 숨결과 함께 찌릿한 전류가 올라왔다.
“읏, 네가 뭐가, 불쌍…….”
우영은 그의 어깨를 붙들고 턱을 살짝 젖혔다. 아래로는 마구잡이로 좆을 쥐고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칠지만 자극적인 손길에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귀두 끝에선 착실히 액이 흘러나왔다.
“하아……. 아니야?”
그가 작게 물으며 우영의 하의를 벗겨 냈다.
“이만하면 불쌍할 때 됐잖아……. 우영아.”
살짝 고개를 숙인 그가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자연스레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는 금세 휑해진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늘 하던 것처럼 익숙한 일인 양, 우영의 볼기를 움켜쥐고 혀를 밀어 넣었다.
“으, 윽…….”
물 흐르듯 이어지는 행위에 우영이 바닥 러그를 쥐었다. 뜨겁게 감겨 오는 촉감에 절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하나 말릴 생각은 없었다. 다리 사이에서 제 엉덩이를 빠는 고태성을 보는 건 상상 이상으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나도…… 예뻐해 주라.”
그가 눈을 깜박였다. 잠시 빠져나갔던 혀가 회음부 위를 미끄러지듯 문질렀다. 춥, 추웁. 게걸스레 빠는 소리가 이어졌다. 고태성은 우영을 주시하며 시선을 맞춘 채로 아래를 빨아 댔다.
“아, 흐으……. 읏.”
우영은 낮게 신음했다. 저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에 사고 회로가 멎었다.
어쩌면 이 또한 호강에 겨운 짓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라도 그와 살을 섞고 지낼 수 있는 지금이 제 인생의 마지막 행운일지도 몰랐다. 이러다 그가 동성과의 섹스마저도 지겨워지면, 비틀린 집착마저도 식어 버린다면, 이제 다시는 저를 찾지 않는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짓 또한 끝나 버릴 터였다.
생각하자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우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억누르기 어려운 집착이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를 놓기 싫다는 욕망만 커지고 있었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가 저와의 관계에 중독되길 바란다. 막무가내로 억지 부리는 것이 꼴 보기 싫지만 제게 집착하길 바란다. 양날의 검이 제 갈망을 자꾸만 조각조각 부수었다. 하지만 부서져 나뉘어 퇴색되었을지언정 그 크기는 한결같았다.
아직도 권우영은 고태성이 미치도록 좋았다.
“하아……. 고태성…….”
“으음…….”
안을 채우던 혀가 쑥 빠져나가고, 두 개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안을 침범했다. 가위질하듯 구멍을 넓혀 가는 손가락에 지독한 쾌감이 몰려왔다. 온몸을 두들기는 듯한 감각에 우영의 좆이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오감이 예민하게 달아오른다. 등 뒤로 닿는 러그의 털조차 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그가 만져 주고, 빨아 주는 대로 느끼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약해 빠진 몸은 고작 몇 번의 쾌락에 길들어 시작도 전 절정을 원하고 있었다.
“아……. 씨발…….”
눈을 질끈 감은 우영이 눈가 위로 팔을 툭 얹었다. 자괴가 몰려왔다. 제가 이렇게 잘 느끼는 몸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경험이 없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욕 좀, 그만해…….”
“하으……. 씹. 네가 똑같이, 빨려 보던지.”
“여기, 누가 빨아 준 적 있어?”
별안간 부스럭거리며 바지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멍 위로 금세 뜨거운 것이 문질렸다. 귀두 끝에 맺힌 쿠퍼액이 미끄러지듯 배회하며 우영의 구멍을 잔뜩 적셨다. 묘한 촉감에 우영이 허리를 비틀었다.
“좀, 쓸데없는 소리…….”
찌푸린 눈을 뜨는 순간, 아래가 묵직하게 벌어졌다. 두툼한 귀두 끝이 안을 벌리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희고 고운 피부와 달리 검붉은 색 위로 핏줄이 돋은 흉흉한 그의 좆이 떠올랐다. 눈을 뜨고 그걸 보기는 싫어 다시 눈을 꽉 감았다.
“아…….”
돌연 아래에서 낮은 신음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허리에 힘을 준 우영은 아래를 조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좁은 구멍에 그가 아파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제 아래를 파고드는 게 고태성의 좆이라는 걸 떠올렸다.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씨발……. 고태성…….”
턱을 치켜든 우영이 불룩하게 근육이 솟은 그의 팔뚝을 꽉 쥐었다. 별안간 두꺼운 귀두가 몸을 두 개로 가르듯 밀고 들어왔다. 철썩, 안을 끝까지 파고들고는, 빠르게 주르륵 빠져나갔다. 내장을 방망이로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아! 으윽!”
우영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첫 삽입 이후 전희란 없었다. 전처럼 아프냐고 물어 오는 말도 없었다. 지난번 관계하고는 달랐다.
“하아……. 응……. 왜?”
싸늘하지만 부드러운 음색이 낮게 되물었다. 그는 마치 벌을 주듯 성기를 길게 빼냈다가 다시 푹 처박았다. 달래는 음색과 달리 하반신에 자비라고는 없었다. 거친 허릿짓에 우영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고통과 함께 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것이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
“흐, 아. 으흑.”
“왜에……. 우영아. 하아…….”
우영은 잔뜩 찡그린 채로 눈을 치떴다. 목까지 붉게 달아오른 고태성의 얼굴이 보인다. 어쩐지 눈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유라곤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기분이 좋았다. 이 상황에서도 그를 괴롭게 하고 싶었다.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너……. 흐으, 누구랑 섹스, 하는지 알기는, 하냐. 읏…….”
정욕에 일렁이는 눈동자를 주시하며, 우영이 턱을 치켜들었다. 철퍽, 철퍽. 좁은 구멍을 넘나드는 딱딱한 좆의 표면이 여실히 느껴졌다. 따라 우영의 둔부가 드세게 흔들렸다.
“모를, 까 봐…….”
고태성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영아……. 모를까 봐.”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돌연 더듬더듬 우영의 손을 쥐었다. 그 손길에 끌려간 우영의 손이 축축이 젖은 접합부에 닿았다. 단단한 자지가 손바닥과 손가락을 스치며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가 나오는 것이 선명하게 만져졌다. 이질적인 촉감에 우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씹, 하아. 모르나, 해서……. 읏!”
“하아, 후으……. 읏.”
“씨발, 좋냐? 흐읏. 아…….”
우영이 끓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마구잡이로 뒤흔들리는 중에도 할 말을 꾸역꾸역 뱉어 냈다.
“십년지기, 불알친구, 따먹으니까, 좋, 하윽. 냐고……. 아읏.”
선명하게 인식시키고 싶었다. 지금 네 아래서 헐떡이고 있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권우영 나라고. 뒤틀린 집착이건 비정상적인 질투건, 이제 나는 네 친구였던 권우영이 아니라고. 이렇게 엉망으로 살을 섞고 처박아 대며 즐기는 게, 나 권우영이라고.
“응, 권우영…….”
바지만 풀어 헤친 채 우영의 치골을 꽉 붙든 그의 허릿짓이 점점 거칠어졌다. 퍽! 퍽! 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짐승 같이 처박는 행위에 우영이 와락 눈가를 찌푸리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일그러진 눈을 치뜨자, 벌겋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내 친구, 우영이…….”
“우윽……!”
돌연 그가 우영의 목덜미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래가 저릿하도록 쑤셔 대는 행위도 멈추지 않았다. 목구멍이 졸리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정수리가 소파에 턱턱 부딪혔다.
“흐읏, 하……. 권우영…….”
“아, 학……!”
고태성은 그의 목을 감싸 쥔 채 미친 듯이 박아 댔다. 따라 우영의 몸도 철썩철썩 빠르게 흔들렸다. 우영의 둔부와 그의 사타구니가 아프도록 맞붙었다. 마치 매 맞듯 빠르고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우영은 축축하게 물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양손으로 제 목을 조르는 고태성의 팔을 힘을 주어 꽉 붙들었다. 하나 떼어 내지는 않았다.
떠밀리듯 흔들리던 우영이 눈을 감았다.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수면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끝내 냉랭한 눈매 끝에 맺힌 한 방울의 감정이 미끄러져 내렸다.
***
섹스는 끝장을 보려는 맹목적인 시합처럼 이어졌다. 젖은 소리 사이론 아무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고, 들짐승 같은 숨소리와 신음만 난무했다. 엉덩이를 들라는 둥, 힘을 빼라는 둥, 천천히 하라는 둥 관계에 필요한 말만 툭툭 떨어졌다.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서로 물고, 할퀴고, 나쁜 말을 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서로를 상처 내려 버둥거렸다. 애증의 칼날은 눈처럼, 비처럼, 쏟아지는 햇볕처럼 스몄다. 그 몹쓸 것들에 하염없이 조각나고 베였다. 그러면서도 한껏 비벼 대는 몸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씨팔.”
먼저 눈을 뜬 우영이 격하게 욕을 뱉었다.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온몸이 처참한 흔적으로 적나라하게 물들었고, 목구멍까지 칼칼하게 쓰려왔다. 지난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미친 새끼. 목까지 졸라 대는 걸 보니 죽여 버리고 싶었나 보지.
온몸으로 저를 짓누르고 통제하려 들던 그가 떠올랐다. 그걸 저지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자신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우영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고태성의 말간 얼굴을 응시한다. 벌건 입술의 상처가 뽀얀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젯밤 제가 죄 씹어 댄 흔적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래로 좆을 넣은 것 말고는 섹스인지 레슬링인지 다를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러나저러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그리워하던 지난 2년보다는 더 나은 것 같았다. 눈을 감은 고태성을 바라보며, 우영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되새겼다.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일어난 우영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몸은 깨끗한 걸 보니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가 직접 닦아 준 듯했다.
참 좆같은 매너다. 남아서 이런 짓을 할 바엔 좀 부드럽게나 할 것이지. 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잠기운을 쫓아낼 겸, 상체를 숙인 채 눈을 깜박이는데 침대 아래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뒤적거리니 전화가 걸려 온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이 시간에 제게 전화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우영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거실로 나갔다. 조심스레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 할머니.”
힐긋 뒤를 돌아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어차피 깨지도 않을 테지만 푹 자게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겨?
“어어. 잘 먹고 다닌다니까.”
우영이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불과 그제 아침 통화에 물었던 말을 또 묻고 있었다. 귀와 어깨 사이로 핸드폰을 끼우고는, 그대로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할머니는? 별일 없어?”
-으응. 할미 남친 생긴 거 몰러? 그, 데이투 다니느라 아주 바뻐. 요즘 장사도 슬슬 해.
능청스러운 말에 우영이 피식 웃었다. 운일동 경로당 메이트라던 박씨 할아버지와 자주 놀러 다니시더니, 진짜 남자 친구로라도 삼은 모양이다. 근래 유행어도 곧잘 배워 오곤 했다.
“그래? 빨리 결혼식 올려 줘야겠네.”
-다 늙어서 결혼은 무슨. 너도 안 해도 뎌! 요즘은 그, 딩크……. 그게 유명하단다. 거 젊은이들이 요즘은 애도 안 낳는대! 힘들다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디, 그럴 필요 없지.
벌컥벌컥 물을 마시던 우영이 실실 웃었다.
“나는 하고 싶은데?”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할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그려,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누구 생기면 바로 데려와. 할미가 봐 줄 테니까. 저 박 씨가 또 관상 공부도 해. 같이 보면 더 좋고.
“와……. 우리 할머니 완전 사랑꾼이었네? 나 좀 배신감 느낀다.”
다 비운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중얼거리자, 수화기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흥. 그럼 그럼. 만간에 집에 와! 보고 싶으니께. 에그그, 물 끓는다!
“응, 조심하고. 곧 갈게요. 사랑해.”
익숙한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웃음기 어린 얼굴로 지난밤 받은 메시지들을 확인하는데, 연달아 전화가 걸려 왔다.
‘쵸파’
의외의 이름에 눈을 치켜떴다. 이수화였다.
“어. 웬일이냐?”
-……우영아, 통화 돼?
“되니까 받았지, 임마.”
우영은 터벅터벅 걸어 다니며 거실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을 주웠다. 찌뿌듯한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어……. 주말인데 시간 되나 싶어서.
“무슨 시간?”
-나, 한국 왔거든. 저번에……. 간다고 했잖아.
“어, 왔다고? 벌써?”
우영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긋 보았다. 오전 10시였다. 적어도 지구 반대편에서 왔을 텐데 연락도 없었다니 의외였다.
“넌 새끼야, 미리 연락하지. 언제 만날까?”
-오늘……. 가능해? 내일은 집안 모임이 있고, 평일엔 너 학교 가야 하니까…….
이수화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울렸다.
마침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평일이어도 강의 시간을 피해 만나면 되니 상관은 없지만, 굳이 미룰 이유도 없었다. 고태성과 둘만 남아 있는 것도 민망했는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오늘 괜찮아.”
-그럼 이따가 점심 먹을까?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또렷한 미성과 익숙한 말투에 우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존나 많이 먹어도 되냐?”
-응, 당연하지.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고기?”
-어……. 그러면 괜찮은 곳으로 알아볼게. 몇 시에 만날까? 열두 시 괜찮아?
물 흐르듯 건네 오는 말에 세탁기에 옷을 넣던 우영이 낮게 웃었다.
“오……. 먼저 시간도 잡을 줄 알고. 많이 컸어 이수화?”
그가 능청스레 말했다. 확실히 고등학교 때와는 달라진 면이 있었다.
-응……. 나 많이 컸지. 나 키도 더 컸어……. 1년 전부터 자세 교정하는 필라테스 받았는데……. 시작하기 전보다 2센티나 더 컸거든.
“오, 그래서 몇인데?”
-백칠십팔…….
“와-, 부럽다.”
웃음기 어린 얼굴이었지만, 높낮이 없는 말투에 이수화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진짜 많이 커진 건데. 평균 훨씬 넘는 건데. 이제 나보다 작은 사람도 엄청 많아…….
억울한 듯 중얼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던 우영이 천연덕스레 말했다.
“알았어, 새끼야. 그럼 존나 큰 거 이따 확인해 보자.”
수화기 너머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장소는 조금만 알아보고 톡으로 보낼게.
“오케이. 이따 봐.”
-응!
전화를 끊은 뒤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슬슬 씻고, 서점에 들러 과제에 필요한 책을 산 뒤 약속 장소로 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대충 집안을 정리하며 엉망이 된 제 옷은 전부 세탁기에 넣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고태성의 옷은 소파 위에 가지런히 널어놓았다. 그가 입고 다니는 것은 늘 비싼 것들뿐이었기에 함부로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도 없었다.
씻기 위해 조심스레 문고리를 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누운 고태성은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네.
힐긋 보고는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하여간 잠이 많은 건 여전했다.
샤워를 끝낸 우영이 보송하게 말린 티셔츠와 바지를 꿰입었다. 저놈을 깨워야 하나, 약에 취한 놈들처럼 끓는 밤을 보내 놓고 오순도순 밥을 먹이고 보내기도 뭐했다. 시간은 벌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디 가?”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모로 누운 고태성이 우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느껴지는 기시감에 금세 시선을 떨구었다.
“어.”
“어디 가냐고.”
“약속 있어서.”
우영은 딴청을 피우며 옷장을 뒤적거렸다. 성의 없이 뱉은 말에 정적이 이어졌다.
“안 가면 안 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우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고태성은 그 자리에 그대로 누운 채로 우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말이잖아. 나랑 있자.”
그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보내는 빤한 시선이 우영에게로 쏟아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는 죽이려고 들더니, 오늘은 같이 있고 싶어?”
시선을 거둔 우영이 바닥에 앉아 양말을 끌어 올렸다.
“씨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구만.”
“……미안.”
쉽게 돌아오는 사과에 헛웃음을 흘렸다. 따지고 보면 저도 즐겼으니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오늘은 안 돼.”
“…….”
“……다음에 먹던지.”
덧붙인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이미 그어 놓은 선은 한참 전에 지났다. 어제부로 냉랭하게 굴 생각도 지워 버렸다. 아무리 서로 죽일 듯 몸을 섞었다 해도 애당초 싫은 사람과 그럴 수는 없었다. 서로가 원해서 벌인 일에 비틀린 증오를 섞고 싶지는 않았다.
“씻어라. 나 곧 나가야 돼.”
툭 뱉은 말에 물끄러미 우영을 바라보던 고태성이 일어났다. 그대로 욕실로 걸어 들어간 그를 확인하고는, 제 옷 중 사이즈가 가장 큰 옷들을 욕실 앞에 가지런히 두었다. 다행히 집에 새 속옷도 있었다.
기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선 우영이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영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을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전보다 인상이 좀 사나워진 것 같았다.
피어싱은 뺄까.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 양아치 같아 보이려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별것 아닌 고민에 빠졌다. 이수화하고는 제대 이후 첫 만남이었으나, 뭐 아무렴 상관없을 것 같았다.
티셔츠 위에 대강 후드티를 겹쳐 입고, 옷장을 열어 겉옷을 고르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어느새 욕실에서 나온 고태성이 서 있었다. 제가 앞에 놓은 트레이닝 바지만 입은 채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머리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곧은 어깨를 타고 흘렀다.
“누구 만나는데?”
다소 날이 선 목소리였다. 하나 딱딱한 음색과는 달리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섣불리 답하지 못한 우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눈치는 있었다. 이수화의 만남을 그가 싫어하리란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이 이수화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수화를 싫어하는 그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냥, 친구.”
점퍼를 걸친 우영이 대수롭잖게 답했다. 그래도 괜한 말을 꺼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야 백배 나을 것이다. 이 정도 예의는 차려 주어도 될 것 같았다.
“걔는 안 질려?”
별안간 푹, 꽂히듯 들려온 말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우두커니 선 고태성이 하,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상처 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돌아간 시선은 방 한구석을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걔는……. 왜 안 질려?”
잠긴 듯한 목소리가 샜다. 그의 낯빛이 차츰 어두워졌다. 단 두 마디 말이 무얼 뜻하는지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을 어떻게 알았든 따져 볼 새도 없었다. 둘을 둘러싼 공기가 삽시간에 진득하게 눌어붙고 있었다.
“……뭔 소리야.”
“이수화 만나는 거잖아. 왜 거짓말해?”
끝이 또렷한 날카로운 눈동자가 번뜩였다.
“내 기분 나쁠까 봐? 그래서 거짓말해? 아, 이것도 또 나를 위해서야?”
그가 빈정거리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자리에 멈춰 선 우영은 굳은 듯 그를 응시했다.
3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의 생일날 겪었던 처참한 대화가, 고통스럽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야, 이수화야?
나야, 이수화야?
그 개 같은 물음이 또 들리는 것 같았다. 군에서도 수없이 꾸던 악몽이었다. 땀에 절어 벌떡 눈을 뜨면, 동이 틀 때까지 다시 잠들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지던 최초의 균열이었다.
돌연 관자놀이가 지끈지끈했다. 어느새 고태성은 제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거짓말한 게 아니고, 말할 필요가 없어서 안 한 거야.”
눈을 내리깐 우영이 피로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필요가 없어?”
“어.”
“필요가 왜 없는데?”
여전히 꼬투리를 잡는 화법에 우영이 미간을 좁혔다. 시선을 올리자 딱딱하게 굳은 그의 눈가가 보였다. 물기 어린 목선을 따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걸 굳이 왜 말해야 하는데.”
“어제 너랑 밤새도록 섹스한 건 나야. 근데 필요가 없어?”
묘하게 어긋난 말에, 또 고양되어 가는 그의 낯빛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는 화가 나 보였다. 예상했던 일이었고, 이해는 했으나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궁지에 몰린 이수화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저를 밀어 내고, 수능 날까지 끝끝내 제 사과를 무시하며 잠적하였던 놈의 짓이 울컥 떠오른 탓이었다. 깨닫는 순간 괜한 반발심이 일었다.
“좀, 그만해라. 애새끼도 아니고.”
표면을 뚝 자른 듯 날카로운 정적이 이어졌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스물둘 처먹고 3년 전이랑 똑같은 짓 하는 거 쪽팔리지도 않냐? 그만해.”
뾰족하게 뱉어 낸 말에 고태성이 우두커니 우영을 보았다. 습한 정적이 이어졌다. 시선을 내린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열려 있던 옷장에서 아무 점퍼나 꺼내 대강 팔을 끼워 넣었다.
“준비하고 나가. 먼저 갈 테니까.”
“…….”
“간다.”
속으론 욕을 짓씹었다. 이렇게 굴고 싶지는 않았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찝찝한 속을 두고 그대로 걸음을 내디디는 찰나, 등 뒤에서 파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란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고태성이 있었고, 거울에 처박힌 주먹에서 번져 가는 붉은 피가 시야에 들어왔다.
“씹, 뭐 하는 짓이야!”
다급하게 걸어간 우영이 그의 팔목을 홱 붙들었다. 조각조각 바닥에 떨어진 거울 조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얀 손등 위 상처에서 벌건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지 마.”
그가 낮게 짓씹었다. 고개를 떨군 탓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하나 당황한 우영의 귀에 그런 게 들어올 리 없었다. 그의 팔목을 꽉 붙든 우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미친 새끼…….”
“가지 마. 가지 말라고. 가지 마.”
그는 상처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 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팔목을 타고 바닥으로 똑, 똑 떨어졌다.
헛숨을 들이켠 우영이 그의 허리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하, 일단 이리 와. 발 조심해, 파편 밟지 말고. 씨발, 찢어졌네…….”
“좀, 가지 말라고!”
고함과 함께 그가 우영의 손을 확 쳐 냈다. 가슴께에 둔탁한 주먹이 퍽 스치고 지나갔다. 난데없는 외침과 드센 손놀림에 우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코앞에 벌겋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새빨간 핏방울과 희게 질린 얼굴이 대조되었다. 우영을 뚫어질 듯 노려보는 그의 가슴께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아……. 씨발…….”
고태성의 잇새로 앓는 듯한 신음이 샜다. 이어 고개를 툭 떨구곤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누른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도를 넘는 과한 반응에 우영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를 응시했다.
“좀……. 가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가지 말라잖아…….”
그가 끓듯이 중얼거렸다. 서서히 고개를 든 눈동자는 초점이 엇나간 듯 보였다.
“가지 말라는 거 들어주는 게 어려워?”
“…….”
“그게, 그렇게 어려워? 왜 맨날 나는 뒷전이야? 씨발, 왜? 왜, 왜! 왜 걔는 되고 난 안 되는 건데!”
점진적으로 커지던 목소리가 비명처럼 거세어졌다. 괴로운 얼굴은 마치 절규와도 같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그의 고함에 우영의 얼굴 위로 짙은 당혹이 물들었다.
“……고태성.”
말꼬리가 흐려졌다. 바로 선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눈가를 굳힌 우영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양말 밑으로 바스락, 깨진 거울 조각들이 스쳤다.
“윽…….”
손바닥으로 얼굴을 짓누른 고태성이 고개를 홱 돌렸다. 뒤이어 새어 나오는 음색에 흐느낌이 묻어 있었다.
“야.”
놀란 우영이 고태성의 어깨를 붙들었다. 고개를 숙이며 그를 들여다보려는데, 꽉 다문 입술 아래로 떨어진 눈물방울이 턱 끝에 맺혀 있었다. 그것들이 연달아 바닥으로 뚝, 뚝, 빠르게 추락했다.
깨달은 찰나, 숨이 턱 멎은 것 같았다.
“고, 잠, 잠깐만……. 왜 울어.”
말까지 더듬거리며 조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른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별안간 들이닥친 충격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귀찮게 안 해…….”
축축이 젖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질리게 안 할 테니까……. 지금처럼만 지내도 되니까…….”
“…….”
“가지 마……. 가지 마. 좀. 가지 마. 만나지 마. 응? 다른 새끼도 씨발, 뒤지게 싫은데, 진짜 그 새끼까진, 윽, 좆같아서, 진짜 못 견딜 것 같아, 우영아…….”
그가 헐떡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꽉 깨문, 상처 난 입술과 일그러진 얼굴에 군데군데 피가 묻어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뚝뚝 눈물을 떨구는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처연했다. 세상에 홀로 뚝 떨어져 우는 아이 같았다.
돌연 가슴이 욱신욱신 아파 왔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상반되는 감정이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늘 그가 우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맞닥뜨리니 제가 원하던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꼈다. 이런 걸 보고 싶어 했을 리 없었다.
찌푸린 우영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하릴없이 흔들리는 단단한 어깨를 살며시 끌어당기자, 그가 제 가슴께에 습한 얼굴을 묻어 왔다.
우영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젖은 머리에서 저와 같은 샴푸 향이 났다.
“……고태성. 얼굴 들어 봐.”
“흐윽……. 윽. 하아……. 흐.”
“씨발……. 울지 마. 왜, 왜 우는데.”
우영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등을 당겨 안았다. 고태성 또한 우영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 일단……. 일단, 미안해. 그런 적 없어. 너 질린 적 없다고, 씨발. 그리고 이수화랑 그런 사이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고. 하…….”
앞뒤도 없이 횡설수설 말을 지껄였다. 사고 회로가 멎은 것 같았다. 한없이 떨어내는 눈물에 목이 메고 가슴이 쑤셨다. 두꺼운 가면 아래, 겹겹이 덮어 둔 껍데기 속 마주한 민얼굴에 기시감을 느껴서였다.
우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서러워하는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억지로 고장 냈던 나침반도, 홀연히 개척했던 탈출구도, 실은 돌고 돌아 온 우회로였단 걸 끝끝내 깨우쳤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