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간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고태성 때문이었다. 생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07:31 니가고태성한테우리집알려줬냐?]
눈 뜨자마자 남기혁에게 보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직도 읽지 않은 걸 보니 자는 듯했다. 그가 있는 곳과는 시차가 달랐기에 연락하기도 어려웠다.
오늘 첫 강의는 ‘명저 읽기와 토론’이라는 필수 교양이었다. 피로한 기색을 감추며 강의실에 자리를 잡자, 뒤따라 이건우와 김재원이 옆자리를 차지했다.
“우영이 형, 운동부 뭐 들었어?”
까불거리던 이건우는 금세 형 소리를 붙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체육부에서 기강이 꽉 잡혀 있던 김재원이 뒤에서 제대로 나무란 듯했다.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었기에 편한 대로 하게 두었다.
“나 축구.”
“와, 우리도 축구 픽했는데. 존나 그냥 찰떡궁합이네.”
조잘거리는 이건우의 옆에서 김재원이 혀를 찼다.
“야, 다른 애들도 엔간하면 다 축구부터 찍었거든. 애쓴다, 애써.”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우영이 짧게 웃었다.
한국대 체교과의 신입생은 필수로 운동부에 들어야 했다. 농구, 배구, 배드민턴 여러 가지 종목이 많았으나 당연히 어릴 적 선수로 뛰던 축구로 택했다. 전공 강의 또한 과 특성답게 대부분 체육관에서 진행하는 실기 과목이 많았다. 시간표만 보아도 저에게 딱 맞는 과를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우영이 형. 오늘 안 까먹었지?”
“어?”
“과팅 하기로 했잖아. 간호과 애랑 얘기해 봤는데 그냥 3대3으로 하기로 했어. 너무 많아도 웃길 것 같아서.”
“아, 그거 오늘이었나.”
우영이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을 설치는 바람에 심신이 피로했다. 어려서 그런지 실행력이 좋기도 했다.
“어, 설마 내뺄 생각은…….”
“아니, 해. 상관없어.”
“예스!”
외치는 말에 괜스레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피곤한 건 피곤한 거고, 먼저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했다.
여자인 사람과 친하게 지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내내 공학이었건만, 참 지지리도 관심 없이 살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소개팅이라니. 경험 없는 저 때문에 괜히 어색해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피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전에 마음먹었던 대로 안 해 본 건 다 해 볼 참이었다.
남기혁에게서 답이 없는 핸드폰을 닫고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수업 내용이 영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
집에 들른 우영은 세수하고 양치질을 한 뒤 잠시 누워서 쉬었다.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맞춰 둔 알람이 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두툼한 기모 후드티에 검정 점퍼, 짙은 청바지와 운동화를 대강 구겨 신고 집을 나섰다. 과팅이라고 해서 따로 멋을 낼 것도 없었다.
기분 전환이다, 기분 전환. 누굴 진지하게 만나기 위해 나가는 자리는 아니었다.
길을 걷는 중에도 어젯밤 만났던 고태성 생각이 났다. 저를 보던 애틋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딘가 초연해진 듯한 분위기 또한 낯설게 다가왔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도, 수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와 다시 친구라도 하고 싶은 걸까. 뭘 어쩌고 싶은 걸까.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시간이라는 필터에 걸러진 고통은 말간 추억만 남는다. 괴로움이 옅어질수록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었다.
제가 고태성이었다면, 상대를 잠깐의 다툼으로 멀어진 친구로만 생각했다면 전처럼 지내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우영 또한 친구로서의 고태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괴로웠던 시간보다 행복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영이 형,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바로 톡 보내. 우리가 몰아준다.”
“미친놈, 어차피 우리 순위는 뒤거든.”
“에에? 난 빼라. 너만.”
“웃기는 새끼네 이거. 너나 나나?”
“아닌데. 난 우영이 형이랑 같이 설 건데.”
말꼬리를 늘이며 치대는 모습에 우영이 피식피식 웃었다.
자연스럽지는 않은 만남이었다. 교제를 위해 나가는 자리라고 생각하니, 맞선이라도 보는 양 기분이 묘하게 근질거렸다.
셋은 곧 시끌벅적한 술집에 들어섰다. 전화 통화를 하던 이건우가 누군가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이! 김세진!”
따라 슬쩍 시선을 돌리니 나란히 앉은 여자 세 명이 보였다. 이쪽으로 시선이 모이는 듯해, 괜스레 눈을 내리깔고는 이건우의 등 뒤를 따랐다.
“이건우, 오랜만이다?”
“그래, 안녀엉. 잘 지냈니?”
“응응. 안녕하세요, 오빠! 얘기는 들었어요. 군대 일찍 다녀오셨다면서요? 저희 다 스무 살이라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자리에서 일어난 김세진이 우영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우영은 자리에 앉으며 살짝 웃었다. 그의 얼굴을 힐긋 바라본 김세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나머지 두 명의 시선도 우영에게로 쏠렸다.
“저는 김세진이고, 얘는 이주아, 그리고 유윤별이에요. 다들 인사해.”
“나는 이건우, 여기는 권우영 형이고, 얘는 김재원. 뭐 시켰어?”
“응. 우리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모듬 튀김이랑 소주, 맥주 시켜 놨어.”
“센스 굿.”
이건우는 짓궂게 웃으며 눈을 치켜떴다.
“근데 우영 오빠 진짜 진짜 잘생겼다. 초면에 이런 말 죄송한데 존잘이에요.”
“야씨, 김세진 바로 침 발라 놓는 거 봐라?”
“아니, 진심 잘생겼잖아! 존나 내 스타일인데?”
거침없는 말에 자리에 앉은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스레 머쓱해진 우영은 물을 들이켰다. 잘생겼다는 칭찬은 군대에서 지겹도록 들어 봤으나,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야. 너네 설마 다 우영이 형 보러 온 건 아니지? 재원이랑 나도 인기 많거든!”
“응 맞아, 건우도 인기 많아. 저번에 박하은이 소개시켜 달라고 했었거든? 다음 날 바로 남친 생겨서 패스했지만.”
“그러게. 체교과 신입생 다 잘생겼나 봐.”
김세진이 우영의 물잔을 채워 주며 웃었다. 별안간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이 없어 그냥 슬쩍 입술 끝을 올려 웃어 주었다.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어 갔다. 이건우와 김세진이 오디오를 비우지 않고 떠들어 댄 덕분에, 딱히 뭐라 할 말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주제의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금세 스스럼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1차가 끝나자마자 2차가 이어졌다. 그곳에선 우영의 옆자리에 김세진이 앉았다. 그녀는 초면에 느낀 대로 우영에게 큰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신이 난 채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다들 금세 취기가 올랐다. 주량이 센 우영의 정신은 당연히 멀쩡했다.
“야! 미친! 존나 쪽팔렸겠다!”
“어, 나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자퇴할 뻔했잖아.”
“미친 새끼.”
“아, 개 웃겨!”
실컷 떠드는 아이들을 두고 우영이 슬그머니 자리를 나섰다. 술을 마시면 꼭 담배가 더 땡겼다. 군 생활 중 힘들 때마다 피워 댄 탓에,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끊기가 쉽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우영은 연기와 함께 한 김 가라앉은 생각을 내보냈다.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맞춰 주고 있었으나 사실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고태성, 고태성, 고태성이었다.
핸드폰을 켜 보니, 남기혁에게선 땀방울을 흘리는 이모티콘만 달랑 와 있었다.
씹새끼. 파리의 특산품을 보내 준다며 주소를 물어보더니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있던 것이다. 며칠 전 도착한 건 그냥 마트에서도 파는 초콜릿 쪼가리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우영은 담배를 끼운 손으로 피곤한 듯 눈가를 짓눌렀다. 짧아진 필터를 빨아들이고 뱉는 순간, 또 익숙한 목소리가 흘렀다.
“우영아.”
우영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헛숨을 터뜨렸다. 보지 않아도 누가 자신을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사그락사그락.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또 술 마셔?”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고태성이 서 있었다. 표정 변화 없는 기다란 눈매를 바라보던 우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나 따라다니냐?”
“……아니. 나도 약속 있어서.”
무심하게 묻는 얼굴에 고태성이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너도 담배 피워?”
우영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대학로 번화가는 다 거기서 거기라 우연히 만날 수도 있었지만, 괜한 의심이 들었다.
“아니.”
“그럼 혼자 흡연 구역엔 왜 왔는데.”
“너 보이길래.”
“그러니까, 따라온 거네.”
“…….”
“왜 따라왔는데?”
“할 말 있어서.”
삐뚜름한 얼굴의 우영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아. 네가 할 말 있으면, 난 무조건 닥치고 들어야 돼?”
속이 비틀렸다. 종일 그를 앓았던 주제에 날 선 말들이 잘도 튀어 나갔다.
가만히 우영을 쳐다보던 고태성이 한 걸음 다가오며 고개를 저었다. 바짝 다가온 그가 우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를 스르륵 빼냈다. 우영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나 아팠어.”
아무렇지 않게 재떨이에 꽁초를 툭 버린 고태성이 다시 우영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내 얘기 좀 들어 주면 안 돼?”
말하며 벌어져 있던 우영의 점퍼를 살며시 닫아 주었다. 찬찬히 시선을 든 우영이 나붓하게 내리깔린 그의 속눈썹 끝을 응시했다.
“……억지 부리는 거 아니고, 부탁인데.”
도톰한 입술이 달싹거렸다. 슬픔이 밴 처연한 얼굴에 우영의 눈가가 굳었다. 무어라 답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하이 톤의 음성이 소리쳤다.
“우영 오빠!”
김세진이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우영의 표정이 경직 되었다.
“어, 친구분이에요?”
문득 우두커니 선 고태성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우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와……. 대박. 안녕하세요.”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고태성에게 인사했다. 묻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고태성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네. 저 우영 오빠 좀 데리고 가도 돼요?”
그녀가 은근하게 팔뚝을 붙들어 왔다. 헤실거리는 입꼬리와 풀린 눈빛을 보아하니 취기가 많이 오른 듯했다.
고태성은 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사이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지켜보던 우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어, 들어가자.”
그녀의 등을 살며시 짚으며 밀자,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 김세진이 우영을 올려다보았다. 돌연 걸어가던 그녀가 까치발을 든 채 우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빠, 끼리끼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봐요.”
“…….”
“존잘은 친구도 존잘이라는 말이 맞았네.”
키들거리는 말에 우영이 억지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친구. 그리 달갑지는 않은 단어였다.
“형, 담배 끊어요. 몸에도 안 좋은 거.”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김재원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앉은 이건우가 호들갑을 떨었다.
“와, 김재원 꼰대냐? 우리 형 담배 피우는 게 얼마나 섹시한데.”
“아냐, 끊어야지.”
우영은 대강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나 아팠어.’
처연한 눈빛이 어른거렸다. 종전에 들은 고태성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프다니. 생전 감기 한 번 안 걸리던 놈이 어디가 아팠다는 걸까. 혹시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걸까. 엄살 부리는 타입도 아닌데 지금은 괜찮은 건지 신경이 쓰였다. 어쩐지 안색이 전보다 더 창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3차 갈까요, 3차? 노래방 어때!”
“콜!”
“우영 오빠, 노래방 좋아해요?”
소란스러운 대화가 한참을 이어지고 있었다. 우영과 달리 아이들은 아직 헤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영은 대화에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시선은 손에 쥔 핸드폰에만 가 있었다.
“뭐야, 우리 누가 계산했다는데? 누가 했어? 형이 했어요?”
놀란 얼굴의 김재원이 주머니에 지갑을 넣으며 걸어왔다. 일제히 저를 보는 시선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아니, 난 아닌데.”
돈은 그가 우선 결제한 뒤 더치페이하기로 얘기를 끝낸 참이었다. 딱히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 제가 계산을 했을 리 없었다.
“어?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했다던데? 뭐지?”
“와씨, 누가 술 취해서 테이블 잘못 계산하고 나간 거 아니야? 개이득이네.”
숙덕거리는 대화에 우영의 눈가가 굳었다. 누군지 바로 짐작이 가버린 탓이었다. 깨달은 찰나 저도 모르게 낮은 숨이 터졌다.
“나 화장실 좀.”
그는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성큼성큼 걸어 나와 화장실 문을 쾅 닫고 섰다. 세면대 앞에서 선 채로 열 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태성 짓이 분명했다. 그 새끼가 아니고서야 저런 짓을 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또 괜한 분노가 치솟았다. 제가 고태성을 끊어 내지 못하는 것과, 그가 제멋대로 제 인생에 개입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변함없이 막무가내로 구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02:14 미안한데 나속이너무안좋아서먼저들어갈게]
[02:14 끝나면계좌랑금액보내줘 쏘리;]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로 화면을 응시했다. 덩그러니 떠 있는 시계를 보다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식은 한숨을 흩뿌리며 그는 그대로 뒷문을 향해 나섰다.
집으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아무 생각지 않으려 했다. 잡념을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곤 했다. 백치가 된 듯한 그 느낌이 싫었다.
우영은 습관처럼 빠르게 걸었다. 정신 차려 보니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사념이 엉망으로 꼬일 때마다 뛰던 습관 때문이었다. 고태성을 잊으려 만들었던 버릇이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답이 없는 문제임에도 끝이 보이질 않아 더 막연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냥 신물이 났다. 그에게도, 저 자신에게도.
말간 달빛이 그를 비췄고, 어렴풋한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라왔다. 숨은 계속 차올랐다. 이 지긋지긋하고 요란한 감정을 한시 빨리 씻어 내고 싶었다. 깊숙한 곳에 모든 생각을 다 욱여넣은 채 잠들고 싶었다.
뛰듯이 도착한 오피스텔 앞에서 우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성마른 손길로 비밀번호를 누르는 찰나, 누군가 우영의 팔목을 탁 그러쥐었다. 흠칫 고개를 든 우영이 와락 눈가를 찌푸렸다. 저와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고태성 탓이었다.
“…….”
우영은 열 오른 입술을 아프게 짓깨물었다.
또 고태성이었다. 또.
어차피 도망갈 수도 없건만 그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제 입장은 안중에도 없다는 양 한결같이 굴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고통과 함께 번져나간 취기로 속이 메슥거렸다.
“또 왜…….”
그는 끓듯이 신음했다. 찌푸린 눈매 또한 가늘어졌다.
“왜, 씨발, 왜 자꾸 따라와. 왜!”
우영이 잡힌 팔목을 거칠게 뿌리쳤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심장이 욱신욱신 아팠다. 왜? 이유를 모르겠다. 지난 시간 동안 그가 제게 사과하고 후회하기를 수없이 바랐건만, 그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아……. 씹.”
욕을 짓이긴 우영이 얼굴을 아프게 벅벅 문질렀다.
수없이 저를 들쑤시는 양가감정이 벅차기만 했다. 보고 싶은데 보기 싫었고, 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이해하기 싫었다. 모조리 말도 안 되는 생각들뿐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 그가 보인 가벼운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하며 종일 곱씹는 제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짜증이 났다. 좆같게도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 좀 그냥 둬.”
“…….”
“제발, 그냥 좀 두라고.”
우영은 이를 꽉 물어 냈다. 쓰린 한숨처럼 내뱉은 말은 마치 부탁처럼 들리기도 했다.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는 손길에 눈가와 뺨이 벌겋게 물들었다. 하나 고태성은 여전히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뒀잖아.”
그가 우영의 팔목을 쥐었다. 얼굴을 가렸던 손을 아래로 떼어 내는 손길에 감았던 눈이 뜨였다.
“얼마나 더 그냥 둬야 하는데.”
달래듯 차분한 말과 달리 찌푸린 얼굴이 보였다. 까만 눈동자에 진심이 어려 있다. 제게로 애틋한 눈길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살짝 찡그린 눈썹은 언뜻 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2년 전 마지막 날 집 앞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저를 보고 있었다. 상황이 그때와 꼭 똑같았다.
우영은 체념한 듯 눈을 감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뭘 어쩌고 싶은 건데.”
“…….”
“이제 와서 나랑 뭐 하자는 거냐고.”
억누르는 단어엔 한이 서려 있었다. 한번 달아오른 감정은 쉬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눈앞에 있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
불현듯 오른쪽 뺨에 차가운 냉기가 닿았다. 낯선 체온에 우영이 눈을 치떴다.
“추워. 너 감기 걸려.”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고태성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장난기라곤 없는 진중한 얼굴이었다. 그 당돌함이 어처구니없어 그를 노려보았다. 냉랭한 시선에, 그가 꼬리를 내리듯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제야 얼음장 같은 손이 느껴졌다. 밖에서 얼마나 기다린 건지 발갛게 물든 귓불을 보며, 그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던 놈이라는 사실도 새삼 떠올랐다. 그런 주제에, 늘 자신의 목도리를 서슴없이 제게 매주곤 하던 쓸데없는 다정함까지도.
별것 아닌 기억을 떠올린 찰나, 우영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넌 진짜, 여전히 좆같다…….”
2년을 돌고 돌아도 항복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
암만 이를 세우고 경계해 봐야 헛수고다. 죽일 각오로 목덜미를 물어뜯지 않는 이상 적을 물리칠 방법은 없다는 소리였다. 같잖은 공격은 먹히지 않는다. 고태성도 마찬가지였다. 미적지근한 태도로 피하기만 해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중간하게 마신 술이 부족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우영은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캔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목 끝까지 덩어리져 있던 화가 그제야 한 김 식어 갔다.
“술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잔소리할 거면 꺼지시고요.”
“…….”
“빨리 말해. 피곤해.”
우영은 손등으로 피로한 얼굴을 문질렀다.
고태성이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술 냄새,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을 저와는 달리, 그에게선 향긋한 향기만 흘렀다. 이것조차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조금만 생각 정리 좀 하고.”
“…….”
“……어려워.”
중얼거리는 말에 우영이 헛숨을 내쉬었다.
“씨발, 뭐 시험 치러 오셨어요?”
날카롭게 뱉으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전부터 그랬다. 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까뒤집어 헤쳐 보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영은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빈 캔을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올 테니까 그 전까지 해결해.”
우영은 터벅터벅 일어나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 좁지도 않은 거실인데 그와 함께라는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등신, 머저리, 찌질이 새끼.
좆같은 짝사랑엔 면역력도 없다. 안 되는 걸 바라는 것도, 체념에 질릴 때가 됐는데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저야말로 뭘 바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
샤워를 마친 우영은 검정 반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걸쳐 입고 거실로 나갔다. 여전히 같은 자세로 소파에 앉은 고태성이 보였다. 제 공간에 그가 있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강 털어 낸 우영이 물었다.
“다 했냐?”
“응.”
“말해.”
선 채로 뱉은 단호한 답에 고태성이 시선을 들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가 지그시 말했다.
“거기 서서 들을 거야?”
말하며 제 옆자리를 툭툭 친다.
늘 여유가 넘치던 전과는 달리 그는 어딘가 온순해진 분위기를 풍겼다. 꼬리 내린 강아지 같은 모습에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다른 말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 털썩 앉았다. 고집부릴 그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괜한 일로 더 입씨름하기도 싫었다. 머릿속은 지금도 충분히 전쟁터였다.
“얘기해.”
우영이 툭 내뱉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한 채였다. 그를 눈에 담는 순간 흔들릴 저를 알았다. 여기서 더는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고태성은 바닥 즈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생각 많이 했어.”
“…….”
“그땐 잘 몰랐고……. 어렸고, 네 말대로 내가 이기적이었어.”
“…….”
“내 생각만 한 거, 그리고 널 이해해 주지 못한 거……. ……나도 후회해.”
그는 마치 고해성사하듯 읊조렸다. 마치 긴장이라도 한 사람처럼 양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채였다.
고작 몇 마디에 힘들었던 과거가 스쳐 지나간다. 떨어져 있던 시간은 2년뿐이었지만, 왜인지 살아온 기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그와는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끝이라는 모순된 전제를 두고 살았다. 제 마음만 정리하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억지 전제를 되새기며, 언제든 원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텨 온 시간이었다.
별것도 아닌 사과에 가슴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바라던 일임에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우영아.”
낮은 음색이 부드럽게 스몄다. 그가 제 쪽을 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하자.”
“…….”
“나도……. 이제 널 이해할 수 있어.”
잠긴 듯한 목소리에, 우영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허공을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날카롭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는 멀어지기 싫어.”
그는 마치 이별한 연인이 애원하듯 말했다.
“존나 싫어. 우영아.”
한숨처럼 속삭이곤, 우영의 어깨 위로 무너지듯 이마를 툭 기대 왔다.
가만히 앞을 보고 있던 우영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이 사과를 받아들이는 순간, 전보다 더한 괴로움이 찾아올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짝사랑은 아직도 끝을 맺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우영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따라 짧은 적막이 흘렀다. 고양이처럼 어깨에 뺨을 문지르던 고태성이 찬찬히 눈을 들었다. 가까운 틈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전히 아름답고, 형형한 얼굴이 저를 보고 있었다.
묵묵히 그를 보던 우영은 느린 숨을 내쉬었다.
어깨에 뺨을 붙인 채 저를 빤히 보는 눈동자가, 가지런한 속눈썹이, 매끈한 뺨과 붉은 입술이 너무도 그립고 소중히 여기던 것이라, 또다시 전부 망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모난 감정은 좁은 틈에서도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우영의 눈빛이 서서히 짙어졌다.
이렇게 너를 떨어내기 어렵다면, 억지로라도, 완벽하게 끊어 낼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편이 덜 괴롭지 않을까.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우영이 서서히 상체를 숙였다.
아주 느리고, 가볍게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닿았다기보다 스쳤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정도로 얕은 접촉이었다. 동시에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일었다.
“……이래도?”
스칠 듯 말 듯한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별것 아닌 접촉에도 온몸에 저릿저릿한 전기가 흘렀다.
잠시 입술을 떼어 냈던 우영은 다시금 상체를 숙였다. 뜨겁고 말랑한 입술이 꾸욱 눌렸다. 그대로 고개를 비틀어 살짝 맞물어 보듯 포개어 보았다. 키스라기엔 가볍고, 뽀뽀라고 하기엔 진득했다.
초옥……, 촉, 물기 어린 소리가 이어졌다. 고작 입술만 몇 번 물었다 놓는 입맞춤이 참으로 아슬아슬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자의 마지막 발버둥이기에 더욱 그랬다. 턱없이 갈증이 났고, 모자라기만 했다. 그를 완전히 떼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주제에 한가득 사심만 채우고 있었다.
“……이래도, 나랑 멀어지기 싫냐.”
우영은 잠긴 목소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는 고장 난 인형처럼 느리게 눈을 깜박거릴 뿐이었다. 다신 볼 수 없어질 그 예쁜 얼굴을 내려다보며, 우영은 소파 위를 짚은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 처참했던 외사랑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끝내 부리고 만 억지는 비겁한 도망이자 발악이었다.
높은 곳으로의 비상은 더 큰 추락의 공포를 가져온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락까지 가라앉은 침묵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태성. 제 성 지향성을 지독하게 혐오했고, 그 이유만으로 십년지기를 한순간에 내팽개친 놈이었다.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전부 거짓일 것이다. 제가 아는 그라면 그럴 리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 고태성이었다.
적막이 무겁게 늘어졌다. 고태성은 몸을 물리지도 우영을 밀어 내지도 않았다. 입술 위로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여전히 숨 막히도록 좁은 틈 사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여느 때보다도 굳어 있는 그의 입매가, 파랗게 물든 눈빛이, 전부 뭘 의미하는지 너무도 확연해서 가슴이 쑤셔 왔다.
그제야 제가 한 짓을 크게 깨닫는다.
미친 짓. 미친 짓이었다.
우영은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문드러진 속과 달리,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새었다. 미동 없이 이어지는 침묵은 쓰라리기만 했다.
“……고태성.”
우영은 마치 확인하듯, 그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고태성은 답 없이 기다란 눈매를 치켜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우영의 눈빛이 짙어졌다. 소파를 짚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쥐니 단단한 어깨가 손바닥 가득 잡혀 왔다.
우영은 비스듬히 틈을 좁히며, 그대로 다시 입술을 포갰다. 또 그가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혀를 내어 꽉 닫힌 입술을 갈랐다. 금세 닿아 오는 고른 치아 위를 혀끝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보았다. 늘 예쁘게 웃어 보일 때마다 드러나던 가지런한 치열이었다. 또다시 충격과 같은 전율이 머릿속을 자르르 마비시켰다.
고개를 깊숙이 비틀고, 한 번 더 춥, 빨아올리자 손에 쥔 그의 어깨가 움칠 떨렸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그가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한 손으론 그의 등을 가로질러 안으며 상체를 더 기울였다.
그는 늘 자신을 무모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고태성을 갈망하지 않는 권우영은 원래 없던 사람인 양 지워 버리던 존재였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이제 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아무렴 상관없다. 어차피 끝난 일이니까. 끝인 걸 알았으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였다.
우영은 제 체온이 옮겨 간 입술을 베어 물고, 갈구하듯 그의 숨결을 빼앗아 삼켰다. 그것조차 내어 주기 싫을 만큼 욕심이 났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이 순간이, 일분일초가, 그냥 모든 것이 전부 안타까워 놓치기 싫었다.
고개를 더 깊숙이 비틀었다. 도톰한 입술을 연신 문지르다, 제 것보다 더 뜨거운 혀를 질척하게 얽었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첫 키스의 맛이 달았다. 정말로 끝내주게 달기만 했다. 입맞춤 하나에 형용하기 어려운 쾌락이 전신을 데웠다.
상체가 서서히 그에게 기울었다. 어느새 자신은 그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고, 그의 등은 소파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지금 몰아붙이고 있는 건 자신인데, 외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이대로 질식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요령 없는 행위에 거친 숨이 가빠 왔다. 색색 숨을 흘리던 우영은 그제야 서서히 눈을 떴다. 맞물려 있던 입술이 느리게 떨어지며 젖은 소리를 냈다.
“하아…….”
우영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설핏 찌푸린 채 저를 응시하는 눈에, 모든 사고 회로가 멈췄다. 이성은 모조리 날아가고 본능만 남았던 행위였다. 제가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일에 심장이 저릿하고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혀를 내어 젖은 입가를 핥은 우영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슥 훔쳤다.
저도 모르게 허탈한 헛웃음이 흘렀다.
“존나 꼴리는데…….”
“…….”
“더 해도 되냐?”
부러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이길 수 없는 걸 알았으나 지고 싶지 않았다. 미리 패배를 예견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마주 본 고태성의 눈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흔들렸다. 정말 일을 치기라도 할 듯 느리게 거리를 좁히자, 돌연 뒤통수가 꽉 당겨졌다. 그가 축축이 젖은 우영의 뒷머리를 움켜쥔 탓이었다.
“치게?”
우영이 빈정거렸다.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 두들겨 맞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영부영 굴어서 떨어져 나갈 그가 아니었고, 애당초 그걸 위해 시작한 행위였다.
어차피 끝났다. 한 톨 남은 정조차도 완벽하게 치워 버려야 했다.
“한 대 치고 꺼지든가.”
물끄러미 그를 주시하며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최대한 재수 없게 뱉은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속수무책으로 쑤셔 대는 심장과 달리 음색은 건조하기만 했다.
적막 속에서 우영은 생각했다. 뭐라도 하고 빨리 끝내 버리라고. 당장 주먹을 내지르고, 비참한 욕을 뱉어 저를 갈기갈기 찢고 사라져 버리라고. 감히 친구를 사랑한 죗값에 합당하는 벌을 주고 떠나라고. 차라리 그게 나을 거라고.
하나 그는 제 뒷머리를 꽉 움켜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에 잠긴 듯 보이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찌푸린 우영이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뒤통수에 다시금 억센 힘이 들어왔다.
“아.”
“어디 가.”
낮은 목소리와 함께 두피가 얼얼하게 당겨 왔다. 와락 눈살을 일그러뜨리는 찰나, 별안간 아래로 거칠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턱이 들리고 시야가 휙 돌았다. 삽시에 푹신한 소파가 등 뒤로 닿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우영이 눈을 들었다. 제 위에 올라탄 고태성의 낯빛이 그늘져 있었다.
“왜?”
그는 아직 번들거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기억 속에서 늘 여유롭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나 보내고, 다른 새끼 부르려고?”
마치 꽉 짓이기는 듯 억누르는 음색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무어라 답하려는 찰나, 거칠게 다가온 그의 얼굴에 코끝이 아프게 부딪치고, 입술이 엉망으로 맞물렸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경직되어 있던 우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 딱딱한 이가 맞부딪히고 서툰 움직임에 입술이 잘근 씹혔다. 신음할 새도 없이 뜨거운 혀가 혓바닥 아래를 쑤시듯 문질러 왔다.
“으읍……!”
눈앞에 고태성의 감은 눈과 긴 속눈썹이 보였다. 그는 우영을 잡아 삼키려는 듯, 아니 정말로 먹어치우려는 양 혀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낭만이라고는 없는 저돌적인 입맞춤에 우영이 그를 거칠게 밀어 냈다. 상체가 짓눌려 숨이 가빠 왔다.
“하아, 고태, 읏!”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놀랄 틈도 없이 목덜미를 찌릿하게 빠는 질척한 행위에 발끝까지 찌릿한 감각이 번졌다.
“아……. 씹.”
우영은 낮게 신음했다. 턱을 치켜들고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잘근거리던 그가 다시 올라와 입술을 포갰다. 짓누르는 듯한 키스가 한참을 이어졌다.
어지러웠다. 늘 고태성에게 욕정하는 꿈을 꾸었고, 눈 뜨기도 전 꿈인 것을 깨달았었다. 하나 지금은 제가 숱하게 꿔 왔던 꿈도 환각도 아니었다. 정말로 현실이었다. 고태성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오롯이 갈망해 온 건 확고했으므로 더 잴 것도 없었다.
우영은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꽉 감싸 안았다. 가슴께로 단단하게 맞닿아 오는 상체가, 뜨겁게 얽히는 숨결이, 진득하게 섞이는 타액과 한 번씩 스치는 코끝이 숨 막히도록 좋았다.
그가 진득한 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어 냈다. 여전히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눈빛이 우영에게로 잔뜩 쏟아져 내렸다.
“권우영…….”
“하아…….”
“그런 닳아 빠진 말은, 어디서 배워 왔어?”
그가 들릴 듯 말 듯 욕을 지껄였다. 목 깊은 곳을 울리는 낮은 음색에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응?”
돌연 단단한 손가락이 티셔츠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길이 닿는 족족 뜨끈한 열이 번져 나갔다. 별것 아닌 움직임에도 찌릿찌릿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제야 우영은 조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씨발, 뭐……!”
우영이 투박하게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고태성이 제 입술을 잡아먹을 듯 씹어 댄 것도 모자라 손까지 대고 있었다. 온갖 혼잡한 생각이 그를 좀먹기 시작했다.
“꼴린다며.”
그러나 돌아온 답은 단조로웠다.
“나 때문에 꼴린 거니까, 내가 해결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긋한 음색과 함께 고태성의 눈매가 옅게 휘어졌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끓어오르다 못해 어딘가 핀트가 나간 듯 보일 지경이었다.
상황과 맞지 않은 언행에 우영이 이맛살을 좁혔다.
“무슨 개소, 읍…….”
다시 시작된 저돌적인 입맞춤에 말이 먹혔다. 방 안 가득 젖은 혀를 섞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꾸 파고드는 통에 코끝이 부딪치고 뭉개졌다.
우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휘몰아치는 흥분에 뻐근하게 부푼 아래가 아팠다. 진즉에 발기한 좆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야 정상적인 남성의 몸으로 흥분하는 것이 당연했다.
일순 단단하게 부푼 하반신이 짓눌렸다. 잠시 혀 놀림을 멈춘 고태성의 손이 점점 내려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우영의 트레이닝 바지에 손가락을 걸어 끌어 내렸다. 느슨한 바지가 쉽게 벗겨지고, 윤곽이 선연한 드로즈가 드러났다. 당황한 우영이 그의 복부를 짚어 밀어 냈다.
“야, 우읍. 아……!”
와락 인상을 찌푸린 우영이 억지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가 또 입술을 깨물어 왔다. 쫓고 도망가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우영의 반항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왔다.
“으븝, 이 미친, 새끼……!”
“하아……. 왜.”
질척한 숨을 내쉰 고태성이 반쯤 벗겨진 드로즈를 아래로 죽 끌어 내렸다.
“꼴렸으면 싸야지, 우영아.”
꼿꼿하게 선 살덩이가 퉁, 하고 튀어 올랐다. 적나라한 광경에 우영이 헛숨을 내쉬었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좆을 감싸 쥐자 강렬한 자극에 허리가 움칠 튀었다.
“아, 윽.”
우영은 짙은 숨을 짓씹었다. 경악스러운 상황에 부끄러워할 틈조차 없었다. 고태성은 귀두 끝으로 흘러나온 액을 엄지로 둥글리며, 곧게 뻗은 자지를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모든 행동이 너무나도 능숙했다. 전신을 덮친 쾌감과 별개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우영이 턱을 꽉 물었다.
이 새끼, 벌써 경험 있는 거야?
그가 누군가와 엉망으로 엉킨 채 뒹구는 상상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 사이로 지독한 질투와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뚝 자르듯, 좆을 움켜쥐고 흔드는 악력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으, 흣.”
혼란도 잠시, 온몸을 직통하는 쾌감에 우영이 턱을 치켜들었다. 거친 손길에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불거지고, 허벅지 안쪽이 바르르 떨렸다. 흘러나온 액에 젖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우영의 허리가 움칠움칠 튀었다. 지금 그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앞뒤 재 볼 틈도 없었다. 살면서 누군가 제 것을 만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아, 씹…….”
“우영아.”
나직한 부름에 우영이 열에 달뜬 눈을 떴다. 쾌감이 솟구쳤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이며, 고태성의 딱딱한 팔뚝을 움켜쥐었다.
“읏, 하. 아.”
“……함부로 좆 세우고 다니지 마.”
“아, 흐으…….”
“응?”
보채는 말에, 우영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묵직하게 솟은 자지가 고태성의 손안에서 꺼덕거리며 움직였다. 난생처음 타인이 주는 짜릿한 쾌감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개, 무슨, 상관인데. 씹새.”
그러나 착실하게 꺼덕거리는 좆과는 달리 날 선 말만 튀어 나갔다. 그가 저를 갖고 놀고 있다는 저열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혼란의 기저에 잔뜩 깔린 잡념이 우영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상관 있어.”
그는 우영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엄지로 선단 위를 문질렀다. 흥건한 선액이 흘러나와 손가락을 적셨다.
우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독하게 고양된 흥분에 평소와 달리 빠른 사정감이 찾아왔다.
“하읏, 씨발. 흔들기나, 해……. 아.”
“응.”
목을 울리는 신음에 고태성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절정이 코앞이었다. 우영은 그의 위로 제 손을 겹친 채 짐승처럼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 씹, 쌀 것, 같아. 윽…….”
입술을 짓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비릿한 맛이 배어 나왔다.
돌연 뜨거운 혀가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우영은 짙은 숨결을 내뱉으며 그의 혀를 기꺼이 머금었다. 그가 제 좆을 흔들고, 입술을 빨아 주고 있었다. 생각하자 지독한 쾌감으로 발끝이 꼿꼿이 섰다.
“으, 큿.”
짧은 신음과 함께 툭, 투둑, 진득한 정액이 둘의 손 위로 튀었다. 거친 숨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제법 긴 사정이 끝날 때까지 고태성은 후희를 책임지듯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난 순간, 뒤로 고개를 툭 젖힌 우영이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아, 씨발.
무언가 아주 좆 됐음을 느꼈으나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어지러웠다. 한바탕 쏟아 내고 나니 텅 빈 속이 뜨겁게 끓었다. 폭풍우가 휩쓸고 간 자리엔 적막만 잔해처럼 남았다. 1분이 영원 같았다.
우영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혼미한 정신에 짙은 시선이 얽혔다. 어렴풋이 찍힌 눈물점이 여전히 나른한 눈빛을 뿜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눈동자는 아직도 한결같았다.
그렇게도 보고 싶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소파 아래 떨어진 수건을 쥐어 흔적을 대강 닦아 내고, 허벅지에 걸친 바지를 한 번에 끌어 올렸다. 그제야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괜스레 손길이 급해졌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
“비켜. 무거워.”
한쪽 다리를 들어 그를 툭 밀었다. 그러나 제 위에 무릎걸음으로 앉은 그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답 없이 우영을 내려다보던 고태성이 손을 뻗었다. 붉게 물든 목덜미를 엄지로 살짝 문질러 왔다. 난데없는 손길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다시 눈이 마주친 찰나, 고태성의 입술이 달싹였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흠칫. 귀를 파고드는 사나운 알림음에 둘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트월에 붙은 인터폰 위로 새파란 화면이 떴다.
자동으로 연결된 화면엔 검정 볼 캡을 쓴 남자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팔목에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건 채였다. 이태평이다. 우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실실 웃는 걸 보아하니 거나하게 취한 듯 보였다. 손에 든 봉투도 안줏거리와 술인 듯했다. 그는 일주일 중 열흘을 술 마시는 데에 쓰는 사람이었다.
미친. 시간이 몇 신데, 지금.
벌써 새벽 세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우영의 얼굴 위로 당황의 빛이 스쳤다.
시끄럽게 이어지는 소리에 상체를 일으키려는 찰나, 고태성이 어깨를 지그시 눌러 왔다. 제법 드센 악력에 우영이 움직임을 멈췄다.
“나 아직 안 끝났는데.”
차분하게 내려앉은 까만 머리칼이 눈가에서 살랑였다.
“뭐?”
“얘기 안 끝났다고.”
눈빛이 단호했다. 왜인지 싸하게 식어 보이기도 했다.
요란하게 깜박이던 화면은 금세 까맣게 꺼졌다. 침묵 속에서 우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술도 좀 마신 데다, 사정 직후라 기운도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쉽게 판단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아, 짧은 숨을 내쉰 우영이 털썩 드러누웠다.
“뭔데.”
그대로 찌푸린 눈을 치떴다.
“……원래 이 시간에 집까지 막 드나들어?”
고요한 목소리가 찬찬히 허공을 갈랐다. 또 예기치 못한 물음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술에……. 담배에.”
“…….”
“남자고 여자고…… 그렇게 막 만나고 다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선택이 이거야?”
이어지는 물음에 우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선택이라니. 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 앞에 살게 된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누군가 드나든 적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여자는 김세진을 말하는 것일 테고, 남자는 이태평을 일컫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둘 중 누구와도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막 만나고 다니냐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뭔 개소리야.”
멋대로 판단하고 지껄이는 말에 우영의 표정이 굳어 갔다. 다짜고짜 찾아온 그에게 먼저 입을 맞추긴 했으나, 제 아래에 손을 댄 것은 놈이 먼저였다. 그에게 이런 식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별안간 방 안쪽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이태평일 것이다. 2년 만에 보는 그를 앞에 두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틈은 없었다. 일단 그를 눈앞에서 치워 내야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할 듯했다.
우영은 소파를 짚고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켰다.
“여기까지 와서 꼰대질할 거면 가라.”
제 위에 올라앉은 그를 밀어 내며 시선을 돌렸다. 피로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은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꼴린다고 흔들어 달랄 땐 언제고.”
“…….”
“쌌으니까 볼일 끝났다?”
싸한 낯빛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영이 눈매를 굳혔다. 꼴린다고 한 것도, 흔들라고 한 것도, 싸고 난 뒤 가란 것도 전부 제가 한 말이긴 했으나, 앞뒤 없이 섞으니 뉘앙스가 이상했다.
“말이 왜 그렇게 되냐? 그건 갑자기 네가…….”
말문을 막듯, 다시 소란스러운 벨과 함께 인터폰 화면 위로 이태평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양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쭉 찢어 내리며 우는 얼굴을 했다. 이 시간에 제가 봤으면 안 열어 줬을 리도 없을 텐데, 되지도 않는 애교 부리는 걸 보아하니 취해도 단단히 취한 듯했다.
“……하, 일단 비켜. 나중에 이야기하던가…….”
“싫어.”
살짝 얇아진 그의 눈은 찌푸린 듯 보였다. 하지만 날이 많이 추웠다. 밖에서 기다리는 이태평을 집에 들이든 도로 보내든 먼저 마무리를 해야 했다. 고태성이 다시 천천히 상체를 기울이며 낮춰 왔다. 하반신부터 이어지듯 차근히 몸이 맞붙었다.
“야.”
와락 인상을 찡그린 우영이 거칠게 그의 가슴을 밀쳤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제 말은 무시한 채로 제멋대로 구는 짓에 짜증이 훅 솟구쳤다.
“네 좆대로 구는 거 받아 주던 시기 지났으니까, 그만해.”
“……”
“나 그만 긁어.”
우영은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감정이라곤 묻어 있지 않은 무뚝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따라 차게 식었던 고태성의 얼굴에 미묘한 기색이 스쳤다.
잠시 우영을 바라보던 그가 찬찬히 눈을 내리깔았다.
“……밖에 너무 추워, 우영아.”
거친 입맞춤에 살짝 부은 입술 새로 한숨 섞인 말을 속삭였다.
“이 시간에 나가면……. 택시도 안 잡히고.”
“…….”
“나 지금 감기 걸려서, 열도 나는데.”
조곤조곤 흘러나온 말은 전처럼 다정하기도, 또는 투정 같기도 했다. 화를 낼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저도 모르게 당황한 우영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택시라니. 자취방을 구한 게 아니라 통학이었나?
이곳에서 운일동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당연히 학교 근처로 집을 구했을 줄 알았건만 의외였다. 오래전부터 독립하고 싶어 했던 그를 알았기에 더 그랬다.
“……아픈 사람 쫓아내는 거 아니야.”
돌연 그가 우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대로 들어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따끈한 열이 옮겨 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에 전체적으로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이 추운 날씨에 코트 쪼가리만 입고 다니니 그럴 만도 했다.
짧은 생각에 잠긴 순간 그가 뺨을 더 지그시 눌러 왔다. 말랑한 피부가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겼다. 묘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긴 찰나, 이질적인 소리가 울렸다.
쪽, 쪼옥.
우영이 흠칫 눈을 치켜떴다. 제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소리였다. 입술을 묘하게 문지르는 행위에 팔뚝을 따라 찌르르한 소름이 돋았다. 손바닥이 성감대라도 된 양 예민하게 간질거렸다.
“야, 너 왜 이러는, 읏, 데.”
우영의 눈동자에 당혹이 스쳤다. 흠칫 놀라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가 꽉 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입을 맞추던 고태성은 우영의 손을 쥔 채로, 기다란 눈매를 치켜떴다.
“……왜. 이런 거 좋아하잖아.”
“뭐?”
“아니야?”
“미친 새끼…….”
우영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아까는 여자니 남자니 멋대로 판단하고 헤픈 사람 취급하더니, 또 개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 남자 좀 좋아했다고, 제가 입 한 번 맞췄다고, 몸이라도 막 굴리고 다닐 거라 생각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불현듯 자존심이 확 상했다. 온갖 부정적 감정이 스며들었다. 얼굴을 찡그린 우영이 헛숨을 툭 터뜨렸다.
“그래서.”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 우영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지금 나랑 섹스라도 하자 이거냐? 내가 존나게 밝히니까?”
저를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에 울컥 열이 받았다. 그를 아직 좋아한다고 해서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게 좋을 리 없었다.
“……안 돼?”
고태성의 눈동자가 까맣게 빛났다.
“뭐?”
“그럼 안 되냐고.”
경직된 우영이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좆같은 물음에 답을 주기도 전, 틈도 없이 말이 돌아왔다.
“안 될 거 없잖아.”
우영의 미간이 와락 좁아졌다. 고개를 돌려 헛웃음을 터뜨리자, 한쪽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의 끈이 투둑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어이없네.”
금세 싸하게 굳은 눈매로 고태성을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뭔 개수작이냐?”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강한 악력에 고태성의 몸이 흔들렸다.
“네 말대로 아무 데서나 좆 세우고 질질 싸 대니까, 내가 쉬워 보여?”
“…….”
“하지 말란 짓 하고 다니는 거 보니까 한심해? 그래서 어디까지 하나, 사람 처놀리면서 지켜보기라도 하려고 그러냐?”
분노가 억눌린 음색이 얕게 떨렸다. 멱살이 잡힌 고태성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의 동요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늘 그랬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와의 싸움은 늘 이렇게 흘러갔다. 아무리 혼자 발을 동동 굴러 봐야 그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그게 저와 고태성의 관계였다. 절대 변하지 않을.
우영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가 뭘 착각하나 본데.”
“…….”
“난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안 처먹어.”
빈정거리는 말과 함께 그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알아들었으면 꺼져.”
잇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그를 노려보던 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씨발, 개 같은 새끼…….
침대에 투박하게 걸터앉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거칠어진 숨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 끝내 털썩 드러누웠다.
잠잠히 숨을 고르는 찰나 방문 너머로 철컥,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영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
“우영이 형! 어제 왜 먼저 갔어!”
강의실 앞에서 만난 이건우가 우렁차게 물었다.
“……갑자기 술이 확 올라서.”
“아, 어제 애들 형 먼저 갔다고 다 졸라 아쉬워했어. 특히 김세진, 형한테 제대로 꽂힌 것 같던데? 연락 안 왔어?”
“어, 왔어.”
그러잖아도 어제 새벽 연락이 왔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어 오늘 아침에서야 답장하게 되었다.
그녀는 우영에게 속은 괜찮은지, 해장은 무얼로 할 것인지 등의 소소한 물음을 보내 왔다. 친구들도 아니고 제게 호감 있는 여자와 연락하는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좀 묘했다.
오늘 첫 강의는 공통 교양인 ‘현대 사회와 윤리’였다. 이름만 들어도 지루할 게 뻔해 보이는 과목이다. 강의실에 들어간 우영이 자리에 앉았다. 중간쯤 자리를 잡고는 가방에서 빈 노트와 필통을 꺼냈다. 대학에 입학했다고 끝이 아니니 학점 관리도 중요시해야 했다.
“나 근데 윤별이 마음에 들더라. 귀엽던데. 형도 세진이하고 잘해 봐. 걔 개념도 있고, 털털해. 얼굴도 예쁘잖아.”
이건우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우영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직 서로 아는 것도 없는데, 뭘.”
“형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 유교 사상 있는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냐.”
“야. 우영이 형 정도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뭘 그렇게 급하게 미냐. 너 뒤에서 김세진이랑 딜한 거 아냐?”
“와, 아니거든?”
김재원과 호들갑 떨던 이건우가 팔꿈치로 치는 바람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우영의 볼펜이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눈을 치켜뜬 우영이 손을 뻗는 찰나 누군가 펜을 주워 주었다.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어딘가 익숙했다. 받아들며 인사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감사합…….”
……니다.
불현듯 눈이 마주친 사람은,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는 고태성이었다.
“안녕.”
머리 위에서 익숙한 음색이 들렸다. 차분한 흑발 아래 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당황스러움에 말문이 턱 막혔다. 상대의 손 위에서 펜을 낚아챈 우영이 시선을 돌렸다. 놀랄 틈도 없었다.
고태성의 눈동자가 이건우와 김재원을 스쳤다. 그는 한쪽 어깨에 걸쳐 놓았던 가방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고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 앉았다.
“우영이 형. 친구?”
이건우가 우영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어, 응.”
우영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아무리 공통 교양이라지만 학년도 다른 그와 강의가 겹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캠퍼스는 생각보다 좁은 모양이었다.
“오, 안녕하세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이건우가 우영의 등을 감싸듯 짚었다. 넉살 좋게 건네는 인사에 고태성이 힐긋 시선을 들었다.
“우영이 형 친구분……도 형이에요? 잘생기셨다.”
묵묵부답에도 이건우는 능청스레 웃었다. 고태성의 시선이 우영의 어깨를 감싼 손에 닿았다. 얼핏 굳은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눈이 휘둥그레진 이건우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진짜요? 고등학교?”
“네.”
“와, 신기하다. 형은 무슨 과세요?”
“……동양화.”
저를 가운데에 두고 오가는 대화에, 살짝 찡그린 우영이 괜스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원체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친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런 때까지 적용될 줄은 몰랐다.
“저 동양화과 처음 봐요. 그림 잘 그려요? 존나 멋있다. 그럼 형은 3학년이에요? 2학년?”
이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돌연 우영의 눈치를 본 김재원이 그만하라는 듯 그의 옆구리를 쳤다.
“아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틈을 두었던 고태성이 입을 열었다.
“1학년인데.”
낮은 목소리에 우영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1학년이라고? 왜?
고태성은 군 면제였다. 수능도 멀쩡히 친 놈이 지금 1학년이라니. 2년 동안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 형도 군대 먼저 다녀오셨어요?”
“아니.”
놀란 우영과 달리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기분 탓인지 점점 말수가 짧아지고 있었다.
“아아.”
찰나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제야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이건우가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중얼거렸다.
“이거, 형들 옆에 있다가는 우리 거의 오징어 대마왕 되겠는데. 그치 김재원, 우리 살기 너무 팍팍해졌지.”
“야, 교수님 오셨다.”
김재원이 책상 위를 툭 치자 이건우의 수다가 멎었다.
젊은 교수의 묵직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우영 또한 입을 다문 채 앞을 보았다.
“나 펜 좀 빌려줘.”
불현듯 들려오는 낮은 속삭임에 우영이 흠칫 시선을 돌렸다.
상체를 살짝 붙인 태성이 그가 왼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스르륵 빼냈다. 이어 손등에 따스한 체온이 스쳤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동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고마워.”
고개를 살짝 기울인 고태성이 눈을 휘어 웃었다. 우영은 묵묵히 필통을 열어 다른 볼펜을 꺼냈다. 답은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교수의 강의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하나 커다란 스크린에 펼쳐진 PPT 화면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본능적인 궁금증이 잡념을 헤집는다. 머릿속은 이미 그가 했던 말로 가득 차 버렸다.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영의 시선이 찬찬히 돌아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저를 보고 있는 고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우영의 입술이 달싹였다.
“왜 아직도 1학년이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교수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우영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태성이 펼쳐놓은 빈 노트 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너 기다렸지.”
한숨 같은 속삭임이 떨어졌다. 숨이 턱 막힌다. 그러니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
강의가 끝나자마자 우영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부리나케 집에 돌아와 기한이 한참 남은 과제를 하고, 빠르게 팔굽혀펴기까지 마쳤다.
한껏 땀을 낸 후 샤워를 하고 나왔다. 흐트러지는 정신 수련엔 운동만 한 게 없었다.
오늘 강의는 끝났으나 일과가 남아 있었다. 입학 전 아르바이트를 했던 ‘동혁 숯불갈비’의 알바 땜빵을 채워 주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그만둔 이후에도 사장 주동혁은 종종 연락을 해왔다. 군말 없이 일도 잘하는 데다, 잘생긴 얼굴로 손님을 끌어모으는 우영을 탐냈기 때문이었다.
하여 우영은 다른 고깃집의 두 배 가까이 되는 넉넉한 시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짬 내어 다니기에 안성맞춤인 일자리였다.
“여기 숯 좀 갈아 주세요!”
“네!”
자글자글 갈비 굽는 소리와 짙은 숯불 향이 코를 찔렀다. 검정 앞치마를 매고 목장갑을 낀 채 이리저리 불을 갈러 다니던 우영은 호출 테이블의 숯과 불판을 갈아 준 뒤 뒤뜰로 나왔다.
한창 바쁜 저녁때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 몇 시간째 숨 고를 새도 없던 참이었다. 툭하면 잡생각이 떠오르는 지금은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하아.”
스트레칭하며 한숨 돌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달칵달칵, 불을 붙이는 찰나, 앞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든 우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태평이형: 권우영! 22:31]
[태평이형: 형아똑땽해 22:31]
[태평이형: (이모티콘) 22:32]
이태평이었다. 그러잖아도 연락해 볼 참이었는데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었다.
고태성을 보낸 후 심란한 마음에 제법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떠오른 이태평 생각에 느지막이 밖으로 나가자 이미 아무도 없었다. 취중에도 상황 판단은 빠른 듯했다.
[태평이형: 어떻게문전박대를 22:33]
[태평이형: 난너를그렇게키우지않앗는데 22:33]
[태평이형: 흑흑억울해잉ㅠㅠ 22:33]
“참나.”
연달아 울리는 메시지에 우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다란 담배를 비스듬히 물고는 양손으로 빠르게 답을 적기 시작했다. 찡그린 얼굴은 심각한 낯을 했다.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술을 마셔 대는지, 다음번에 만날 땐 잔소리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2:34 뭐래;;그시간에누가깨있냐?]
[22:34 술작작드세요]
[22:35 다음엔연락하고와]
굳이 깨어 있었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마저 덧붙이고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농땡이 피우기엔 눈치가 보였다.
“우영아, 담배 다 피우고 와서 숯 좀 옮겨 줘!”
“예! 잠시만요!”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 선 매니저가 소리쳤다. 급하게 연기를 빨아들이곤 지져 끈 담배를 깡통에 떨궜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바빠서 마음이 놓였다.
***
한껏 진이 빠진 몸을 끌고 집으로 향해 걸었다. 오피스텔까지 거리는 꽤 있었으나 밤공기도 쐴 겸 조금 걷고 싶었다. 우영은 어릴 적부터 걷는 걸 좋아했다. 기억 속에선 늘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지만.
감춰 두었던 우울이 목을 조른다. 저녁도 걸렀건만 더부룩한 속이 답답해졌다.
고요 속에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먹먹한 귓가에는 고태성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스몄다.
‘남자고 여자고…… 그렇게 막 만나고 다녀?’
오만가지 생각이 우영을 뒤덮었다. 별생각 없이 던졌을 말 몇 마디에 흔들리는 제가 볼썽사납다.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분명 끝낼 작정으로 시작한 입맞춤이었다. 먼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 것은 자신이었으나, 그까지 상식 밖의 행동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불현듯 제 위에 올라탄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틀린 채 초점이 엇나간 눈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남들은 몰라도 권우영 그 자신은 알 수 있었다. 혼자 멋대로 오해하고 제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게이가 뭐라고. 남자 좋아하는 게 뭐 그렇게 잘못된 일이라고. 씹새끼. 차라리 문란하게 놀기라도 했으면 그딴 말이 이렇게 짜증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습다. 입술을 맞대는 순간 끝날 거라 생각한 주제에, 경멸받아 마땅하다 생각한 주제에, 그가 건네는 못된 말에 굳이 합리화하려는 제 모순된 행동이 가증스러웠다. 벌레 취급이든 걸레 취급이든, 무턱대고 저지른 행위의 대가를 받아들여야 함을 알면서도 또 딴생각만 파고들려는 저열한 자신이 끔찍하게 싫다.
불현듯 자괴가 몰려들었다. 우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속상한 마음과 별개로 꽉 눌러 놓았던 그리움이 터진 둑처럼 솟구쳐 올랐다.
보고 싶다.
닿고 싶다.
듣고 싶다.
뜨겁게 포개었던 말랑한 입술과 일렁이는 짙은 눈동자, 목 깊은 곳을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희미한 미소까지, 전부.
갈망하는 것들에 주어 따윈 필요 없었다. 권우영의 중심은 늘 그뿐이었다.
미적미적 걷던 우영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홀로 헤치는 적막은 시리고 건조하기만 했다.
기계적으로 걷던 우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뚝 멈춰 섰다. 가로등 아래 선 기다란 인영 탓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길쭉한 체형은 굳이 다가가지 않아도 누군지 잘 알 것 같았다.
가만히 서서 그를 응시하던 우영은 다시 일정하게 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윤곽이 선명해졌다. 빈틈없이 저를 따라오는 짙은 시선까지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고태성.
삼킨 이름에 잇새로 하얀 입김이 흘렀다. 하지만 우영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대로 다가간 우영이 비스듬히 턱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왜.”
우영이 툭 내뱉었다.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눈길엔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막무가내로 찾아온 주제에 당당한 태도는 여전했다.
또 늘어지는 적막에 파묻힌다. 이질적인 기류가 낯설고 싫었다. 더 입을 떼기는 싫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윽고 마주친 시선 속에서, 끝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나랑 잘래?”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또.
“나랑 하자.”
“뭐?”
“나랑…… 섹스하자고.”
거칠 것 없는 직설적인 어투에 눈가가 일그러졌다. 비뚜름하게 그를 올려다본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저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에 헛웃음이 흘렀다.
“……또라이냐?”
우영은 금세 차가워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제 귀를 의심했으나 그의 말은 한결같았다.
며칠 새 벌써 몇 번이나 섹스하잔 말을 들었다. 그것도 남자, 아니 고태성에게서.
아팠다더니 진짜 맛이라도 가 버린 걸까. 겉은 멀쩡해 보이건만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아니면 설마, 정말 진심이기라도 한 걸까.
“왜?”
“…….”
“나는 맛없어 보여?”
적막 속에서 부드러운 음색이 느릿느릿 퍼졌다. 우영의 시선을 느낀 고태성이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마치 처마 밑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아기 고양이처럼 굴고 있었다.
“해 줄 거지?”
그가 다시 사르르 눈을 치떴다. 그 새카만 동공과 마주친 순간, 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백지처럼 모든 잡념을 지우고, 앞뒤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다.
점퍼 주머니 속에 꽂은 손에 열이 올랐다.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우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꿈속에서만, 환상 속에서만 그를 제 아래에 짓누르고 눈물을 떨구게 했던 숱한 날들이 떠올랐다. 평생을 소원하던 일이었다. 죽어서까지 이룰 수 없으리라 확신했던 갈망이었다. 그런 그가 제게 먼저 손을 내밀고 기회를 쥐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제 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우영은 고개를 돌리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로등 불빛에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비뚜름히 기울이고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그래. 해 줄게.”
무심한 눈빛이 쏟아졌다. 부러 한쪽 입술 끝을 살짝 올리고 그를 보았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가 생각하는 헤픈 자신처럼. 그저 지나가는 한 사람처럼, 별것 아닌 것처럼.
썩어 가는 마음이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이러쿵저러쿵 합리화해 봐야 저 또한 변명할 길 없는 속물이었다.
그대로 등을 돌린 우영이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일정한 전자음과 함께 자동문이 열렸다. 망설임 없는 걸음을 내디디며,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따라와.”
“…….”
“섹스하자고.”
썩지도, 곪지도 않는 것이 무작정 뻗어 나간다. 밖으로 움튼 건 겨우 손톱만 한 새싹임에도, 지면 아래 썩은 뿌리는 여전히 무자비하게 포화했다.
가식적이고 음습하다. 고태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꼭 그랬다.
***
욕실 안에 습한 기운이 차올랐다. 뿌연 거울을 보고 선 우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짙은 한숨과 함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하나 달아오르는 속과는 달리 표정은 점점 더 식어만 갔다.
‘죽여 버리고 싶어. 너 이렇게 만든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선명하다. 의도가 확연했던 날 선 말들과, 경멸이 깃든 증오가 주었던 고통을 아직도 기억했다.
피로한 날이면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꾸고는 했다. 움푹 파인 상처는 지혈되지 못한 채로 아직도 벌건 피를 흘려 대고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건 다 개소리였다. 그깟 게 해결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능 날조차 돌아오지 않았던 연락과 일언반구 없는 도피에 느꼈던 배신감은 조금도 옅어질 줄 몰랐다.
거칠게 수전을 끈 우영은 미리 챙겨 들고 온 티셔츠를 꾸역꾸역 꿰입었다.
2년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놈이다. 별안간 나타나 섹스하잔 말의 의도는 추측조차 어려웠다. 그의 속은 알 길이 없다. 원래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뜻일까. 전처럼 소중하게 이어 갈 관계가 아니니까, 친구로도 남을 생각조차 없으니까. 남자와 한번 해 보고 싶다는, 그런 좆같은 호기심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기어이 제게서 끝을 보겠다는 그딴 조잡한 생각일지도.
제 감정만 정리하면 돌아갈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은 완전히 엇나갔다. 그에게 이미 권우영과의 추억은 없던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흔적도 없이 까맣게 타버린 듯했다.
달칵. 욕실 문을 열자 고요가 찾아왔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털며 고개를 드니, 침대 위에 고요히 걸터앉은 고태성이 보였다.
까만 시선이 저를 향해 느리게 움직였다. 분명 옷을 입고 나왔건만, 죄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뭘 봐.”
무심하게 뱉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불현듯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둔 그의 코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부드러워 보이는 남색 니트의 팔목은 걷은 채였다. 그 또한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했다.
우영은 눈가를 단단히 굳혔다. 이제는 수능과 친구 관계에 쫓기는 고등학생 따위가 아니었다. 고태성 없이도 잘 살아가던 어엿한 성인이었고, 제 행동에 책임을 질 여유도 있었다. 그와의 섹스는 늘 원해 왔던 것이었으므로 재고 따지며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제게는 과분한 일이었다.
뚜벅뚜벅 걸어가 앞에 멈춰 서자, 고태성의 시선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에게서 어렴풋한 샴푸 향이 났다. 고작 제 아래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우습게도 감흥 없는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음을 숨기는 것이 이제는 낯설 법도 하건만, 오랜 기간 몸에 밴 습관이 무섭기도 하다. 가면을 쓰는 일이 아직도 익숙하기만 했다.
“씻고 왔냐?”
물끄러미 우영을 올려다보던 고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나……. 철저하게도 준비하셨네.”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한쪽 무릎을 침대에 살짝 걸치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별다른 대화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심하게 그를 보던 우영이 흰 뺨을 조심스레 쥐었다. 살며시 상체를 기울이자, 그의 상체도 뒤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둘의 틈이 점점 가까워졌다. 망설일 것 없이 비스듬히 입술을 맞댔다. 마주친 시선은 누구도 피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고태성의 등이 침대 시트에 완전히 닿았다. 촉. 말랑한 입술을 빨아 당기자 젖은 소리와 함께 소름이 죽 돋았다. 입술 사이로 고태성의 숨결이 느껴졌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벌써 두 번째 키스임에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우영은 마치 맛을 보듯 그의 입술을 삼켰다 놓기를 반복했다. 이어 자연스레 그의 위로 올라탔다. 고개를 숙이자, 아직 젖은 머리가 고태성의 이마를 간질거렸다.
“고태성.”
“……응.”
“후회 안 해?”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물음이었다. 두 번 묻지는 않기로 한다. 여기까지 온 자신이야말로 더는 망설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안 해.”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고태성이 우영의 등을 감싸 안았다. 얇은 티셔츠 위로 그의 단단한 손길이 느껴졌다.
“이미 많이 했어.”
내리깐 속눈썹이 그늘졌다. 그 야한 얼굴에 목이 끓었다. 적막한 방 안에 단둘뿐이었고, 제 아래 엉켜 있는 남자는 고태성이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우영은 그대로 말캉한 입술을 벌리며 혀를 밀어 넣었다. 그 또한 입술 틈을 벌리며 혀 아래를 문질러 왔다. 얼음처럼 굳어 있던 지난번 키스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부드럽고, 뜨거웠다. 고작 두 번 겪어 보는 키스에 돌풍 같은 충격이 번졌다.
서툴고 성급하지만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목을 울리는 낮은 신음이 샜고, 제 몸을 끌어안는 단단한 손길에 이성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순간은 속절없이 짧기도, 기약 없이 길기도 했다. 우영은 그의 뺨을 움켜쥐고 천천히 고개를 비틀었다. 코끝으로 밀려오는 고태성의 향기에, 체온에, 손길에 애가 달았다. 끝은 파멸일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음…….”
요령 없는 입맞춤에 숨이 막혀 왔다. 잠시 입술을 떼어 낸 우영이 서투른 손길로 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모르게 애틋한 눈길이 쏟아진다. 미치도록 한심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멈추고 싶지 않은 저열한 욕구가 갈망 사이로 섞여 들었다.
우영은 그의 니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단단한 살갗이 손바닥에 감겨 왔다. 그저 본능에 충실한 채 이리저리 살갗을 지분거리며 침대 위로 무릎을 세웠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아래가 빳빳이 섰다. 난생처음 해 보는 야한 짓에 부끄럽다는 자각도 없었다.
“하아……. 우영아.”
“……어.”
“더워.”
짧은 침묵이 흘렀다. 턱을 비스듬히 든 고태성이 양팔을 겹쳐 머리 위로 니트를 벗었다. 목 끝까지 꽉 잠가 놓은 흰색 셔츠가 보였다.
“……벗겨 줘.”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저를 향한 단호한 시선에 우영이 눈을 깜박였다. 제 아래 깔린 채, 저를 올려다보며 중얼대는 말이 외설적으로 들려왔다.
얼마나 잠자리 경험이 많기에, 이런 말도 서슴없이 할까.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의지와 달리 떨리는 손을 뻗었다. 목 끝까지 잠긴 새하얀 셔츠를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늘 욕망이 들끓었던, 꽉 잠긴 단정한 교복 셔츠 단추가 떠오른 탓이었다.
돌연 묵직한 욕구가 솟구친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만 기분에, 그대로 전부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하나 타들어 가는 속과 달리 손길은 조심스럽고, 빠르게 이어졌다. 견고하고 하얀 피부가 셔츠 사이로 금세 드러났다.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본능은 원초적이다. 경험이 없어도 보고 들은 것은 많았다. 우영은 그대로 상체를 숙였다. 톡 튀어나온 유두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불그스름한 게 색도 꼭 저같이 예뻤다.
“읏…….”
사탕을 굴리듯 혀로 훑자 그가 낮은 신음을 냈다. 멈추지 않고 쭉쭉 빨아들이니 그가 우영의 뒷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고작 가슴 빨아 주는 일에도 고양된 흥분이 찾아왔다.
찌푸린 채 가느스름해진 눈동자가 일렁였다. 하반신 아래로 묵직한 양감이 느껴졌다. 고태성 또한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섰냐?”
입술을 뗀 우영이 비뚤게 웃자, 고태성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응. 흥분돼.”
솔직한 답에 우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시선을 내렸다.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그의 한쪽 손목을 쥐어 보았다. 매번 힐긋거리기만 하던 그의 기다랗고 예쁜 손가락. 저 손을 참 좋아했었다.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어 그 좋아하던 손가락 사이를 기다랗게 핥아 올렸다. 그가 잡힌 손을 움찔 떨었다. 섹스의 전희가 아니라 마치 경건한 의식 같았다.
우영을 바라보던 고태성의 시선이 동요했다. 별안간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왔다. 동시에 시야가 휙 뒤집혔다. 어느새 우영의 위로 올라탄 고태성이 겹치듯 그의 몸을 짓눌렀다.
“하아, 우영아.”
그가 우영의 목덜미로 이마를 툭 떨궜다.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스며들었다.
“너무 느려…….”
한숨 같은 속삭임이 쏟아졌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 다짜고짜 하의가 휙 벗겨졌다. 말릴 새도 없이 삽시간에 아래가 휑해졌다.
아랫배 위쪽까지 올라붙은 성기의 모양이 적나라했다. 가릴 것 없는 새하얀 백열등 아래 드러난 맨몸이 민망했다.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헛숨을 터뜨렸다. 섹스하기로 한 마당에 다시 옷을 주워 입을 수도 없으니 적응해야 했다.
“너도 벗어.”
손을 뻗어 그의 벨트를 움켜쥐자, 고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왜. 보고 싶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넌 보고 싶어서 벗겼냐?”
“응.”
“…….”
“우영이 좆 크잖아. 중학교 때 내가 제일 먼저 봤었는데.”
“…….”
“처음으로.”
점심 메뉴 읊듯 산통 깨는 소리에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씨발……. 별걸 다 기억하네.”
“……넌 기억 안 나?”
그가 낮게 속삭이며 제 벨트를 쥔 우영의 손목을 쥐었다. 다른 손으론 우영의 맨허벅지를 느리게 쓸어 올렸다. 별것 아닌 손길에도 소름이 죽 올라왔다.
“너도 봤잖아. 내 거.”
그는 쥐고 있던 우영의 손목을 제 사타구니에 닿도록 스르륵 내렸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중심에 손바닥이 느리게 문질러졌다. 속으로 욕을 삼킨 우영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분명 그는 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손바닥 아래로 열기가 몰려 뜨거웠다. 마치 데일 것 같았다.
“지랄 말고…… 벗기나 해.”
우영이 입 안 살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원래 섹스를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분명 영화나 동영상에서 봤을 땐 물 흐르듯, 아니 순식간에 불타오르듯 하던데, 팔자 좋게 좆 크기나 추억하는 이 상황이 어쩐지 민망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별안간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씨발……. 불이라도 끌걸.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는 순간 달칵달칵, 금속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릎으로 선 고태성이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는 소리였다. 우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운 채로 손을 겹쳐 제 티셔츠를 훌렁 벗어 던졌다. 어차피 하려면 다 벗는 게 순서에 맞았다.
“야.”
“응.”
부르며 아래를 보자, 말 그대로 헐벗은 고태성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깎아 만든 듯 견고한 잔근육은 차치하고, 핏줄이 선 채 발기한 흉흉한 좆의 위용에 우영은 질린 얼굴을 했다. 그가 아름다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성기를 가진 놈이었단 걸 그간 잊고 있던 탓이었다.
“불 좀……. 꺼.”
“왜?”
“뭘 왜야. 넌, 씹, 분위기도 모르냐?”
“환한 게 좋은데.”
“…….”
“잘 보이잖아.”
말하며 그가 상체를 낮춰 왔다. 살갗이 맞물리듯 촘촘히 맞닿는 느낌이 생경했다. 적나라한 감촉에 우영이 숨을 훅 들이켰다. 벗은 몸이 부대끼자 정말로 섹스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등줄기에 자잘한 소름이 연달아 피어났다.
“우영아.”
“…….”
“나 좀 봐.”
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내 눈 예뻐했잖아.”
“…….”
“이제 안 예뻐?”
물음에 우영이 시선을 올렸다. 끝도 없이 깊고 까만 눈동자가 또렷하게 저를 보고 있었다. 전보다 더 청초해진 얼굴이 예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반질거리는 동공이 세공된 보석처럼 투명했다.
“우리 오래 안 봤는데……. 아직도 질려?”
고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 무표정한데도 어딘가 아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본 적 없는 모습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질릴 리가 없었다. 저를 향한 눈동자도, 까만 머리칼도, 의도가 어떻든 닿아 있는 살갗조차 고태성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전부, 존나게 좋기만 했다.
이를 꽉 물었다 뗀 우영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질린 적 없어.”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우영은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거친 손길에 반항 없이 딸려 온 그와 그대로 입술이 맞붙었다.
춥, 추웁. 젖은 소리가 본격적으로 방 안을 메웠다. 우영은 그를 전부 삼켜 버릴 듯 입술을 빨며, 혀를 밀어 넣고 입천장을 문질렀다. 고태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으, 음…….”
“하아……, 읍.”
우영은 찌푸린 눈을 감고 그의 널따란 등을 조급하게 매만졌다. 손끝에 찌릿찌릿 열이 퍼졌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뜨겁게 달아오른 두 개의 좆이 엉성하게 문질렸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자지가 불덩이처럼 절절하게 끓고 있었다. 엄지로 미끈거리는 표면을 문지르자, 툭 불거진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미치도록 야하게만 느껴졌다.
두 개를 함께 쥐려니 손이 모자랐다. 우영은 조급하게 혀를 섞으며 양 손바닥으로 그의 것과 제 것을 함께 쥐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질척한 액이 손바닥 위로 질질 흘렀다. 우영은 엄지로 끝을 둥글리며 손을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
고태성의 잇새로 낮은 신음이 새었다. 목을 울리는 음색이 색정적이다. 젖은 숨소리가 엉키며 열에 달뜬 공기가 금세 축축하고 뜨거워졌다.
“우영아, 읏, 좋아…….”
좁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 고태성이 신음하듯 속삭였다.
“하아……. 씹.”
욕을 중얼거린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누운 채 아래로 손을 모으고 흔들어 대니 가슴골이 둥글게 모여 솟아올랐다. 그의 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쥔 고태성이 그것을 사정없이 주물러 댔다.
“으, 흣.”
자비 없는 손길에 절로 허리가 튀었다. 유두를 꼬집어 대는 손끝이 아프기만 한데도 기분이 좋았다. 입 밖으로 내는 거친 숨결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누군가 가슴을 만져 주는 건 처음이었을뿐더러, 그게 고태성의 손가락이라는 사실만으로 사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아……!”
“하아, 읏.”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득한 정액이 튀어 올랐다. 두 남자 다 비교적 빠른 사정이었다. 우영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군 고태성이 열 오른 이마를 문질렀다. 느리게 새어 나오는 젖은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고태성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우영의 가슴께로 쪽, 쪽 입술이 맞닿았다. 동시에 점점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가락이 정액으로 잔뜩 젖은 판판한 아랫배를 문지르고, 골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생소한 곳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흠칫 놀란 우영이 고개를 내리며 그의 팔뚝을 잡았다.
“뭐, 뭐냐.”
“……응?”
“뭐 하냐고.”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는 우영의 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지로 회음부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손길에 허벅지가 바르르 떨리고, 팔뚝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읏. 야, 잠깐.”
“풀어 줘야 하잖아.”
낮게 답하는 고태성은 열중한 모습이었다. 신중한 손길에 하반신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에 우영이 헛숨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내가 아래라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누가 위건 아래건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섹스를 한다면 당연히 예쁜 그가 아래일 거라 생각했다. 자연스레 제 뒤에 손을 대려는 행동이 황당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너…….”
고태성의 입술이 달싹였다.
“뒤는 안 써 본 거 아니야?”
까만 눈동자가 미묘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린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싶어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했어?”
짧은 정적 속에서 고태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뒤로도……, 했어?”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샜다. 영문 모를 말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뭔, 개소리야.”
“아니지?”
우영의 답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답할 말을 고르려 잠시 입을 다문 사이, 고태성이 사르르 눈을 내리깔았다. 적막 속에서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난 처음인데.”
나직이 흘러나온 음색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장난기라고는 없는 진지한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나 아다라고, 우영아.”
“……뭐?”
“내 처음을 주는데, 네 처음도 주는 게 맞는 거 아니야?”
돌발적인 말에 우영의 눈가가 굳었다. 저도 모르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다라니. 제가 아는 고태성이 스물두 살 되도록 동정일 리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오래 교제해 온 여자도 있었을 뿐더러, 첫 키스에 느꼈던 능숙한 손놀림 또한 그랬다.
우영은 직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동정은 고사하고 문란해진 고태성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권우영의, 십년지기 친구의 좆을 그렇게 막 움켜쥘 수 있을 리 없었다. 제가 아는 그는 동성애를 혐오하던 놈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뻔뻔한 낯짝을 들고 헛소리를 잘도 했다.
왜, 씨발. 거짓말을 하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바텀의 첫 경험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야 원래 그런 용도로 생긴 곳이 아니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넣고 흔들고 싸는 놈과는 달리 받아들이는 쪽은 수월하지 않을 터였다. 그가 남자를 만났을 리는 없으니, 뒤가 익숙할 리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말도 안 되는 말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호기심이라도, 남자에게 뒤를 뚫리는 게 불쾌할지도 모르고.
늘 능구렁이처럼 제 좋을 대로 상황을 이끌어 가던 놈이었다. 그와 몸을 섞는 상상 속에서 제가 늘 위를 선점하긴 했었으나, 자신이 꼭 박는 쪽이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우영은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교감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굳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불편한 정리를 끝낸 우영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해, 그럼.”
어차피 자신은 고통을 견디는 것에 익숙했다. 겉이든 속이든 마찬가지였다.
“네가 박으라고.”
속으로는 욕을 곱씹었다. 그렇다고 제게 굳이 거짓말까지 하는 모습에 괘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콘돔은 있냐?”
“……응. 가져왔어.”
그가 침대 위에 널브러진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철저한 준비성에 헛웃음이 흘렀다.
우영은 가만히 누운 채로 그를 응시했다. 찰랑거리는 머리칼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이 미끄러졌다.
감탄이 나올 만큼 넓은 어깨와 허리가 완벽한 각을 이루었다. 잘게 쪼개진 견고한 복직근 아래, 검붉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휘어짐 없이 꼿꼿하게 선 좆의 모양은 바르고 반듯했으나, 그 크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 씨발, 징그러워.”
우영은 자각도 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고태성을 오랜 기간 좋아해 왔다지만 저렇게 대놓고 발기한 좆을 본 적은 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아래가 아픈 것 같았다.
“……말을 왜 그렇게 심하게 해.”
고태성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영은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네 크기를 봐라. 안 징그러운가.”
“너도 크잖아.”
“너랑 같냐?”
하아, 한숨을 내쉰 우영이 투박하게 등을 돌렸다. 저 또한 어딜 가도 뒤지지 않을 크기였으나, 고태성과는 비교 대상이 달랐다. 차라리 엎드려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씹,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섹스 좀 한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하는 순간, 그의 손에 잡힌 엉덩이가 벌어졌다. 구멍 위가 조금 문질리는가 싶더니 아래로 불쑥 이물감이 느껴졌다. 놀란 우영이 침대 시트를 와락 움켜쥐었다.
“읏, 야. 씹. 풀어, 준다며.”
자비 없는 행위에 등줄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돌리자, 무릎을 세워 앉은 고태성이 눈을 치켜떴다.
“……응. 손가락 넣은 건데.”
“…….”
“아직 한 개밖에 안 넣었어……. 아파?”
“……씨발.”
우영이 욕을 짓씹으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분명 굵직한 것이 벌리고 들어왔는데, 고작 손가락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우영아, 허리 살짝 들어 봐.”
달래는 음색과 함께 그가 우영의 치골 아래를 받쳤다. 기다란 손가락이 구멍 안을 느리게 휘젓기 시작했다. 이질적이고 생경한 느낌에 우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느낌 좆같아.”
잇새로 신음 같은 욕이 샜다. 돌연 이 상황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조금만 참아. 나 공부했어.”
“공부는 무슨, 야동이라도 봤냐?”
“응. 책도 읽었어. 그러니까……, 믿어도 돼.”
“미친 새끼. 그걸 본다고……, 읏!”
별안간 우영의 허리가 움칠 튀었다. 의도한 것이 아닌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이렇게, 안으로 넣어서……. 구부리라고 하던데.”
“아, 으!”
“여기 맞아?”
놀란 우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감각이 저릿하게 허리를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남자의 성감대가 뒤에도 있다는 것이 사실인 듯했다.
“아프면 얘기해. 아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액으로 잔뜩 젖은 손가락이 안을 짓누르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내벽 안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며 배회하는 손가락에 엉덩이가 움칠움칠 떨렸다. 베갯잇을 꽉 쥔 손에 땀이 배었다.
“아니, 그냥……. 아. 이상해.”
“……기다려 봐. 기분 좋게 해 줄게.”
“지랄, 아다 새끼가 뭘 안다, 그, 흣!”
우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어딘가를 뭉근하게 스치는 감각에 발끝이 꼿꼿이 섰다. 전기 스위치를 껐다 켜기를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아…….”
우영이 낮은 신음을 냈다. 자르르한 전류와 함께 이물감이 더 늘었다. 빡빡하게 다물린 아래가 고태성의 손가락을 꽉 물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고작 손가락 두 개인데도 그랬다.
“야, 잠깐 빼 봐. 그냥 아까처럼 흔들고 빼자. 읏. 내가, 금방 싸게 해 줄게.”
우영은 생각을 바꿨다. 제 아래는 고무 구멍이 아니었다. 손가락도 버거운 곳에 저 흉측한 좆을 넣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제 몸에 저딴 게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안 돼.”
돌연 반발하듯 그의 손가락이 안을 콱, 짓눌렀다. 바짝 엎드려 있던 우영이 흠칫 무릎을 세웠다.
“읏! 으…….”
“너 처음이잖아.”
등 뒤에서 차게 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백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질척대는 구멍 안을 휘저으며 천천히 자리를 넓혀 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 으윽, 움직이지 말라고!”
찌릿하게 번지는 감각에 우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기분이 전신으로 번져 갔다.
“……이것도, ……기면 안 돼.”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우영아.”
별안간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또다시 콘돔 포장지를 뜯는 소리가 났다.
“하아, 왜.”
우영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냥 할 작정인가. 하기야 저 또한 여기까지 와서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수없이 교차하는 혼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콘돔……, 위에 튀어나온 부분 잡고, 씌우는 거 맞아?”
뜬금없는 물음에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씨발, 내가 성교육 강사냐?”
“잘 몰라서 그래.”
“그냥 껴 달라고 하지 왜?”
“끼워 줄 거야?”
“미친 새낀가.”
“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래?”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딴 내숭을 떨지 않아도 아래에 깔려 줄 용의는 충분히 있었다. 끝까지 가증을 떠는 그의 모습이 괘씸했다.
“잡소리…… 말고. 아! 씨발, 못 하겠으면 그냥 누워. 내가 박을 테니까.”
“다 했어.”
고태성이 우영의 단단한 볼기를 잡아 벌렸다. 구멍 위로 미끌거리는 귀두가 문질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로 넣을 작정인 듯했다. 고작 이 정도로 풀어 주고 넣을 수 있나? 저만한 크기를? 속 시끄러운 고민에 머리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우영아.”
“어.”
“초박형은…….”
“……그만해라.”
등 뒤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에 농담 따먹기라도 하자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우영은 나름대로 첫 경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도가 낮은 어두컴컴한 곳에서, 또는 진득하게 내려앉는 분위기 속에서 타오르듯 이어지는 관계를 원했다. 아무리 연인 관계가 아니라지만 이런 산통 깨지는 상황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넣을게. 천천, 히.”
고태성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속이 불편한 와중에도 등 뒤로 겹쳐 오는 맨살에, 그 나긋한 웃음소리에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아래에서 피어난 묵직한 흥분이 머릿속까지 퍼져 갔다.
씨발, 나를 깔고 있는 게 고태성이라고. 내 뒤에서 좆을 세우고 삽입하려는 게, 고태성이라고.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으읏.”
뒤가 서서히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뜨거운 불기둥 같은 것이 스멀스멀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턱에 힘을 주자, 날카로운 턱선에 불뚝 심줄이 섰다.
“하아, 너무, 좁은데…….”
“네가 무식하게, 크니까……!”
등 뒤에서 심호흡하듯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별안간 엉덩이를 콱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볼기를 잡아 벌리는 적나라한 손길에 우영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억지로, 억지로 천천히 좆을 쑤셔 넣고 있었다. 서서히 내장 안을 채우듯 뭉근한 고통이 느껴졌다. 온몸을 스치는 오감이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우영, 아……. 아파, 힘 좀……. 힘 좀 빼 봐.”
“씹, 힘주지도, 않았어.”
“너무 조여서……. 씨발, 어떡하지?”
고태성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베개에 고개를 처박은 우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아픈 쪽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좆같았다.
“뭘, 어떡하는데. 빼 그럼.”
“싫어.”
틈 없는 답과 함께 고태성이 허리를 꽉 쥐어 왔다. 강한 악력에 멍이 들 것만 같았다.
우영은 이를 꽉 깨물고 베개에 뺨을 묻었다. 엉덩이에 불에 달군 쇠 방망이를 욱여넣는 기분이었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구멍이 찢어질 듯 욱신거렸다. 보지 않아도 귀 끝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은 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읏……. 거의, 넣었어.”
거친 숨과 함께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명치께까지 좆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그의 자지가 고동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살아 숨 쉬는 걸 제 안에 쑤셔 넣은 기분이었다. 불쾌하고 불편했다.
우영은 낮은 목소리로 끓듯이 말했다.
“알아……. 씨발. 존나 아파. 일단 움직이지 마.”
“응, 우영아……. 하아.”
귀 뒤에서 야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통과는 별개로 그 숨결 하나에 아래가 또 뻐근해졌다. 그에게선 전과 달리 농익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나, 쌀 것 같은데.”
“미친……. 조루 새끼야.”
“조금만…… 움직여 볼게.”
자리를 잡은 그가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벽 안에서 커다란 구렁이가 등을 세운 느낌이었다.
“하아……. 읏.”
가까운 곳에서 낮은 신음이 들린다. 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자지가 꽉 조인 구멍 안을 이리저리 스치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하, 으흑.”
참았던 숨을 터뜨리는 순간, 기다란 좆이 안을 주르륵 빠져나갔다. 안을 온통 짓누르며 빠져나가는 느낌에 우영이 몸을 떨었다. 시트를 단단히 쥔 손등 위로 핏줄이 섰다.
“……우영아. 콘돔 찢어진 것 같아. 작은가 봐.”
“씹…….”
“이거 그냥, 빼고 해도 돼? 더 뻑뻑해지는 것 같은데.”
“개, 잡소릴…….”
“잘할게.”
허락도 전, 바닥으로 콘돔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했다. 아직 젖은 구멍 위로 금세 축축한 귀두가 문질렸다. 팔뚝 위로 자글자글한 소름이 돋았다. 좆이 빠져나가자마자 금세 다물렸던 구멍이 다시 한계까지 늘어나기 시작했다. 뻐근한 고통에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씨발…….”
우영은 다시 질끈 눈을 감으며 베개를 꽉 감싸 안았다. 피 맛이 배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우영의 허리를 잡은 그가 몸을 뒤로 뺐다가 퍽, 쳐올렸다. 따라 철퍽, 젖은 소리가 났다. 다소 어색하고 서투른 움직임과 두꺼운 굵기 탓에 사방이 빠듯하게 압박되었다. 힘을 준 우영의 발가락이 안으로 곱아 들었다.
“아, 흐.”
절로 신음이 샜다. 아팠다. 과장을 보태서 손목으로 안을 쑤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파도 견딜 수 있었다. 제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고태성의 성기라니, 믿기지 않았다. 오로지 정신적 쾌락만으로도 멈추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통 속에서 만족스러운 흥분이 솟구쳤다.
“아……. 느낌 존나……. 좋다.”
등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을…… 긁듯이 넣으랬는데. 어때?”
그가 다소 초조한 듯이 중얼거렸다. 별안간 콘돔을 끼지 않은 생자지가 깊은 곳을 긁어내듯 짓이겼다. 뭍으로 나온 생선처럼 내벽 안에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아래에서 완전히 젖은 소리가 나고 있었다.
“우영, 아……. 아. 나 안에, 싸고 있어. 씨발, 못 참겠어…….”
“으, 윽.”
신음 섞인 말에 우영이 앓듯이 끙끙댔다. 정말로 사정 중인 것인지 질척거리는 소리가 짙어졌다. 수월해진 움직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 잠깐, 야. 흣.”
두툼한 귀두 끝이 이곳저곳을 쿡쿡 누르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고통 속에서 언뜻 이상한 쾌감이 스쳤다. 아랫배를 가득 채운 느낌에 하복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우영아, 읏. 어떠냐고.”
“몰라……. 씨발, 모르겠어. 아직……. 아!”
순간 그의 좆이 안쪽 한 지점을 콱 짓눌렀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 끼치는 쾌감이 자르르 올라왔다. 찌푸렸던 우영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대로 주르륵 빠져나간 좆이 다시 안을 철썩, 파고들었다.
“아, 흑! 아!”
우영은 눈을 꽉 감은 채 고개를 떨궜다. 숨소리만 헐떡거리는 적막 속에서, 몸이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침대 매트리스가 삐걱삐걱 소음을 만들어 냈다.
“하으, 읏……. 우영아, 뜨거워. 안에, 존나 뜨겁다.”
“아, 아. 읏. 너무, 깊게 찌르지, 말라고. 흣.”
탁, 탁, 탁탁! 우영의 둔부와 그의 치골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엇박자로 안을 찰박거리며 넘나들던 고태성의 허릿짓이 점점 탄력을 받아 가고 있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정신이 없었다. 우영은 저도 모르는 사이 거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 학. 읏. 천, 천천히 해. 씨발, 아!”
우영이 몸에 힘을 줄 때마다 툭 튀어나온 날개뼈와 등 근육이 유기적으로 물결쳤다. 전신에 자잘한 땀이 습하게 맺혔다.
“응, 으응……. 천천히, 할게.”
말과는 다르게 고태성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아래가 빠질 듯한 고통 사이로 촘촘히 파고드는 쾌감이 우영을 잘게 떨게 했다. 저릿저릿 올라오는 쾌락에 시트에 눌린 좆이 터질 듯 부풀었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아래로 손을 가져가 그것을 움켜쥐었다.
“하, 읏. 아…….”
“흐으, 뭐 해.”
별안간 팔목이 잡아채였다. 손을 뻗은 고태성이 우영의 양 팔목을 움켜쥐고 뒤로 당겼다. 자연스레 가슴이 들리고 턱이 뒤로 젖혀졌다. 타인에 의해 이렇듯 무방비하게 결박당한 건 처음이었다.
“혼자 하면 안 되지. 섹스는, 둘이 하는 거 아니야?”
“하, 안 놔? 으, 흑!”
“같이 해. 같이 하기로, 했잖아.”
철퍽철퍽, 젖은 소리가 난잡하게 울렸다. 둘의 움직임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우영이 움찔거리는 곳을 찾아 집중적으로 안을 쑤셔 대기 시작했다. 우영이 느끼는 쾌락 또한 차츰차츰 강렬해졌다. 두 사람 다 놀라우리만큼 빠른 적응력이었다.
“아, 흐, 고태, 성. 아!”
“응, 왜……. 좋아? 읏, 좋아, 우영아?”
뜨거운 좆이 구멍 안을 넘나드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고 구멍을 꽉 조였다. 허벅지 안쪽이 잘게 경련했다.
“나, 조루 맞나 봐. 아, 우영아. 안에, 또 쌌어. 젖은 소리 들려? 씨발, 미끄러워서 더 기분 좋아……. 아.”
고태성이 거칠어진 목소리로 헐떡였다.
“좀, 닥쳐……. 흐읏! 아! 으!”
우영은 아팠던 것도 잊고 낮은 신음을 끙끙 흘렸다. 꼬리뼈를 타고 찌릿찌릿 올라오는 쾌감에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제 위에서 발정하는 놈이 고태성이라는 사실 또한 그의 정신을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을 만큼 짜릿한 감각이었다.
“아, 거기. 잠깐, 씹. 읏!”
“어디, 여기? 하아, 여기?”
고태성은 빠르게 좆을 박아 넣으며, 손을 뻗어 우영의 입 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아……! 아, 흐. 으웁.”
흥분에 젖은 고태성의 눈은 초점이 나가 있었다. 그는 우영의 뜨거운 입 안을 마구 휘저으며 허리를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우영의 몸 또한 풍랑에 떠밀려 가는 나룻배처럼 넘실거렸다.
“하아, 읏. 뒤는, 처음이라면서, 존나 잘 느끼네? 권우영.”
고태성이 거친 숨과 함께 짓씹듯 읊조렸다. 전희 내내 부드럽게 달래던 모습과는 달라진 반응이었다.
“아, 윽. 으, 흣.”
우영은 그의 몸짓에 따라 하릴없이 흔들리며 눈을 꽉 감았다. 혼자 흔들고 사정하면 끝이 나곤 했던 자위와는 전혀 달랐다. 사정의 절정과 비슷한 종류의 쾌감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 좀, 놔 봐. 나 쌀 것, 같아.”
“왜, 막 ……리고, 다녔어?”
“놔, 놔 보라고……. 씨발, 흣, 아!”
고개를 파묻은 우영은 입 안 살을 짓씹으며 헐떡거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좆을 시트에 마구 비벼 대며 허리를 들썩였다. 강렬한 쾌감이 앞뒤로 그를 들쑤셨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네가, 처음 ……면. 내 뒤도……. ……데.”
“흐으, 아, 학, 으흑!”
우영은 신음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탓에 그가 낮게 지껄이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넌, ……이 그렇게, 쉬워? 응? 씨발, 우영아……. 아. 읏. 우영아.”
뭉개지는 발음이 축축이 젖은 숨소리와 섞여 흘렀다. 시트에 뺨을 파묻은 우영은 벌겋게 물든 고태성의 눈가를 알아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