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둘 사이로 짧은 적막이 스쳐 지나갔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는 짧은 찰나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단정한 코트 차림의 그는 전보다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우영아.”
“…….”
“잘 지냈어?”
익숙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우영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까마득하던 상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분한 흑발과 대조되는 희고 고운 피부가 달빛에 반짝였다. 또렷한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느른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간 수백 수천 번을 상상으로만 그리던 놈이었다. 혹여 술에 취해 환각을 보는 건 아닐까. 그렇다기엔 너무도 선명한 환상이었다.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2년이나 지났음에도, 제 눈앞의 그가 여전히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솟구쳤다.
혼잡한 속내와 달리 표정은 한없이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그린 듯한 눈매, 오똑한 콧대, 흩날리는 머리칼. 마지막으로 붉은 입술에 시선이 닿았을 땐,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꽁초를 툭 떨구곤 발로 지져 껐다.
“뭐냐.”
바싹 마른 음색이 새어 나왔다. 질척하게 녹아드는 속과 달리 말투는 건조하기만 했다.
바스락, 제게 한 걸음 다가오는 다리가 보였다. 그 움직임에 내리깐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끝까지 들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다정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불현듯 따스한 체온이 온몸을 감싸고, 향긋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흘렀다. 그가 우영의 어깨를 느릿하게 끌어안은 탓이었다.
경직된 우영이 흠칫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 발갛게 얼어붙은 귓불이 보인다. 시각, 촉각, 후각. 몸의 모든 감각이 그가 허상이 아니란 걸 선연하게 일러 주었다.
현실을 깨달은 우영이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 냈다. 그러나 떨어지기는커녕 더 힘주어 끌어 안아 왔다. 눈살을 찌푸린 우영이 낮게 침음했다.
“씹, 뭐 하는…….”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단조로운 어조에 헛숨이 터졌다.
정말로 딱 2년 만의 만남이었다. 군에 있을 때조차 연락 한 번 없던 주제에, 별안간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 열아홉 마지막 만남과 다를 게 없었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원통하기까지 했다.
“떨어져.”
하여 우영은 짓씹듯 내뱉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라.”
턱을 꽉 물고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만 같은 주먹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 그러나 묵묵부답이던 고태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뭐?”
“애인이 싫어해?”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중얼거렸다. 때아닌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거렸다.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리는 사이, 그가 찬찬히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전보다 선명해진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앞에 선 고태성은 여전히 고태성이었다. 아니,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졌다. 눈가로 착 내려앉은 흑색 머리칼이 기품 있는 분위기를 더했다.
“하…….”
시선을 떨군 우영은 피로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감성이 이성을 잡아먹는다. 머릿속에 온갖 심란한 생각들이 속속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개소릴 하는 거냐고, 그동안 연락 한 통 없던 주제에 무슨 짓이냐고, 그렇게 욕을 처먹고도 넌 내가 아직도 좆밥 같냐고,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껏 하라고. 그리고, 씨발, 나도. 나도…… 존나게 보고 싶었다고.
개 같은 생각을 욱여넣으며 고태성을 똑바로 주시했다. 반발심 어린 날카로운 눈빛이 여과 없이 그에게로 향했다.
“연락도 없이 좆대로 찾아오는 건 여전하네. 넌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냐? 아니, 애초에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는데?”
그는 이를 악물고 지껄였다. 서툴게 뱉어 내는 감정에 짙은 분노가 실렸다. 걸어오는 내내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메스꺼워지고 있었다.
“너도 참.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대단해.”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술을 제법 마시는 바람에 감정이 요동을 쳤고, 난잡한 생각으로 제가 무슨 말을 뱉을지 몰랐다.
“하……. 다음에 얘기해.”
한숨처럼 내뱉은 우영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전이고 지금이고 그의 앞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럽기만 했다.
“응.”
별안간 들려온 답에 우영이 멈춰 섰다.
“나 변한 거 하나도 없어.”
선명한 목소리가 시린 공기를 갈랐다.
“너는?”
“…….”
“너는 얼마나 변했는데?”
돌아온 물음이 가슴을 쿡 찔렀다. 우영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얼마나 변했냐고?
변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변한 게 없었다. 아직도 저는 찌질하고 모자란 열아홉 그 속에 그대로 멈춰 있단 걸 매일같이 깨닫는 중이었으므로.
끓어오르는 숨을 삼켰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우영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난 존나 변했지.”
“…….”
“네가 뭘 알겠냐.”
빈정거리는 말은 건조하기만 했다. 우영은 망설임 없이 오피스텔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이 떨려서 뻣뻣하게 힘을 주었다. 짧은 전자음과 함께 스르륵, 자동문이 열렸다.
우영은 그를 뒤로한 채 뚜벅뚜벅 걸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러다 멎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