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4부) (15/21)

1. (1)

잊은 건지 잃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충동적인 입대 결정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였다. 우영은 고태성을, 그리고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성장통 속에서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대로 대책 없이 그의 옆을 지키다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긍정해 왔던 모든 것이 안일한 생각이었다. 줄어들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부풀어 가는 애정을 막을 법은 없다. 이렇게 야금야금 갉아먹히다 보면, 끝내 저는 형체조차 남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입대 지원, 면접, 체력 검정, 입영 통지서, 군 휴학.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일사천리로 일어났다. 생애 처음 벌인 무모한 짓이었으나 괴로운 마음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고태성에게서 멀어지는 계획을 세울수록,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수록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실상은 죽도 밥도 아니었지만.

생각 외로 며칠쯤은 괜찮았다. 그렇게 일주일, 그리고 한 달 후쯤이 되었을 땐 딱 죽을 것 같았다. 종일 고태성 생각으로 머릿속이 헤집어졌다. 답지 않게 매일을 핸드폰만 들여다보았고, 사념에 잠겨 제 잘못을 되짚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일이 그렇게 끔찍한가? 죽고 못 살던 친구 관계를 단번에 끊어 낼 정도로?

혼란의 틈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남기혁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태성이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제게는 일언반구 없던 일이었다.

전화를 끊은 후 우영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허탈했다.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가 제게 이렇게까지 하리라 예상치 못했기에 더 그랬다. 자욱하게 깔린 뿌연 안개가 시야를 차단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나 어차피 내다볼 용기도 없었다.

돌연 어스름한 자괴가 밀려들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멀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지만 이미 제 손을 떠나 버린 문제였다.

12월 31일, 모두가 들뜬 밤, 우영은 방 안에 처박혀 종일 핸드폰만 붙들고 있었다. 그날은 그와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던 날이었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연락이 올 거란 믿음이 있었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다. 그와의 관계가 고작 이만큼 얕지는 않았다. 손톱만 한 기대만으로도 마음이 술렁였다. 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저를 놀라게 하곤 했으니, 별안간 집 앞에 짠하고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새벽달이 까무룩 질 때까지 전화는커녕 메시지 한 통 오지 않았다.

1월 1일, 해가 바뀌고 성인이 되던 추운 겨울날, 우영은 그와 약속했던 놀이터 벤치에 앉아 멀거니 밤하늘을 응시했다. 전처럼 둘이 아닌 혼자였다.

‘우영아.’

‘응.’

‘스무 살 되는 날……. 우리 둘이 여행 갈래?’

‘여행?’

‘응, 12월 31일에 가서 해돋이 보고 오자. 소원도 빌고.’

고요한 사위에 나직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 순간의 온도와 공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쓰린 공허가 번져 들었고, 속절없이 외로워졌다. 끝내 그가 제게 내밀었던 숱한 약속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고작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우영은 주먹을 아프도록 꽉 말아 쥐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짙은 슬픔이 그를 덮쳤고, 배신감으로 점철된 분노가 그 뒤를 따라 들었다.

일방적인 통보와 단절에 신물이 났다. 그에게 하릴없이 휘둘리기만 하는 일에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개중에 제일 좆같은 것은, 그가 이따위 짓을 해 대는데도 그리운 마음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었다.

막무가내로 구는 고태성보다 이런 자신에게 더 진절머리가 났다.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결심과 무관하게도 매 순간 위기는 찾아왔다. 이불 속에 누워 잠들기 전,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길을 걷다 하늘을 볼 때, 달이 유난히 밝게 느껴질 때. 매 하루의 순간순간 숨을 쉬듯 그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 패배를 인정했을지언정, 그에게 백기를 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절대 부러지지 않으리라는 굳은 심지를 다졌다. 한국대를 목표로 달려왔던 지난 6년의 결심보다 그 크기가 더 클 정도였다.

하여 그는 고태성이 보고 싶을 때마다 숨 가쁘게 달렸다. 시큼한 위액이 넘어오고,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뛰다 보면 요동치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우영은 몸을 혹사하여 마음의 고통을 상쇄하는 법을 익혀 갔다.

그러다 별안간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심장이 반응했다. 저도 모르게 받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 냈으나, 통화는 멈출 기미 없이 전투적으로 이어졌다.

기실 몇 달 만의 연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쁘지가 않았다. 심란하던 마음이 더 까맣게 짙어질 뿐이었다. 비정상적인 연락 횟수와 제 위치를 물어 오는 남기혁의 행동에 우영은 그가 저를 찾으려 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돌아오는 길 집 앞, 저를 기다리는 그를 발견했다. 멀찍이 서 있는 그를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우영은 탄식하듯 눈을 감았다.

괴롭다. 그간 쌓아 왔던 형체 없는 것들이 단번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사라진 그를 미워했으면서, 다신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끝내 눈앞에 나타난 그의 얼굴을 하나도 빠짐없이 새기듯 담는 제 모습에 환멸이 났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다.

‘네가, 끝까지 네 생각밖에 안 하는 이기적인 새끼라서. 그래서 내가 힘든가 봐.’

하여 꽉꽉 억누르던 속내를 터뜨렸다. 하지만 쏟아 내듯 쏘아 냈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왜 그런 상처받은 눈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지친 얼굴로, 애틋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지 혼란스러웠다.

친구라기엔 깊었고 아니라기엔 대체할 것이 없었다. 여태 고태성만큼 두터운 관계의 타인이 없었으니 비교 대상이랄 것도 없었다.

속상한 마음이 전보다 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시커멓게 탄 속은 바닥까지 눌어붙은 지 오래였다.

힘들다. 갈수록 깊어져만 가는 외사랑의 무게가 버거웠다.

우영은 그를 두고 자리를 떠났고, 더 이상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입대를 했다. 그날은 고태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

군 생활은 예상했던 대로 미친 듯이 힘들었다. 숨 쉴 틈 없이 독한 훈련을 한다는 말에 일부러 특수 부대에 지원한 건 맞지만, 예상보다 그곳은 더 산지옥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자마자 수십 킬로 구보를 했다. 일과의 반 이상이 구보나 웨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맨몸 운동 후 전술 훈련과 체력 단련까지, 몸을 혹사하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정말로 다른 생각할 틈이라곤 없었다.

힘든 건 체력뿐만이 아니었다. 이유 없는 내리 갈굼, 엉터리 군기도 좆같았다. 사람에 치이고 훈련에 치였다. 다른 생각할 여유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바라 왔던 일이었고, 원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케케묵은 외사랑은 그곳까지 그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늦은 새벽, 훈련 중 희게 뜬 달을 바라볼 때 고태성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상처받은 눈빛과 그늘진 얼굴이 선명했다. 몸이고 정신이고 잔뜩 지쳐서일까, 그를 생각하다 한심하게 눈물을 쏟기도 했다.

마지막 날, 제 입대 소식에 뉴욕에서 급하게 왔다는 건 한참 후에야 듣게 되었다. 멀리서 날아온 그에게 너무 매몰차게 굴었나 싶어 이따금 후회도 됐다. 이제 와 신경 써 봐야 전부 소용없는 일이었다.

제일 가깝게 지내던 그가 사라지니, 군에서 소통할 사람도 대폭 줄었다.

부대에서는 대원들을 모아 놓고 우편 수신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제게 보낼 사람이 없는 걸 알면서도 괜한 기대를 했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실망할 상대도 없건만 실망하기도 했다. 고작 그 편지가 뭐라고, 서운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대학도 가질 않았고, 좁았던 인맥 탓에 면회를 오는 이도 없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남기혁이고 이수화고 전부 해외로 대학을 갔기에 더 그랬다.

불행 중 다행인지, 입대 후 얼마 안 있어 이수화가 연락해 오기 시작했다.

그는 군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간식 등을 꼼꼼히 담은 소포와 편지를 자주 보내왔다. 종종 제가 살고 있다는 런던 켄싱턴의 사진도 함께 동봉하고는 했다. 덕분에 군대 안에서도 우영은 하이드 파크의 생생한 계절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공원에 서서 열심히 카메라를 눌러 댔을 그를 떠올리니 픽 웃음이 흘렀다.

몇 달 후, 그는 사람을 단 채로 면회도 왔다. 오래간만에 만난 이수화는 키가 몇 센티 자란 것 외에 달라진 것도 없었으나, 묘하게 차가운 분위기가 풍겼다. 외국물을 먹어 그런 건지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우영이 짓궂게 툭툭 장난을 걸 때 당황하는 얼굴이나, 배시시 수줍게 웃을 때는 전과 똑같았다.

이수화의 뒷바라지는 면회나 소포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따금 대원들이 먹을 치킨이나 피자 같은 걸 넉넉히 쏘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대 내에서 우영의 기가 살았다. 큰 씀씀이에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당시엔 그것보다 고마움이 더 컸다. 이수화가 다녀간 날이면 근 며칠간은 선임들의 갈굼이 덜했기 때문이었다.

신이 난 동료들이 그의 존재를 물어 올 때마다 대강 둘러대었다. 중성적인 이름 탓에 선임들이 여자 친구냐며 놀릴 때도 있었지만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이수화의 성격을 모르는 놈들에게 남자라고 말했다간 뭐라 얘기할지 눈에 훤했다. 철창 안 감옥 같은 이곳에서는 가십거리에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남기혁과는 전화를 자주 했다. 그에겐 군대의 좆같음을 온몸으로 토로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실실 처웃기 바쁘셨다. 어쩌다 은근슬쩍 고태성 소식을 묻을 때면, 그는 잘 모른다며 두루뭉술하게 대꾸했다.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고태성이 제 얘긴 하지 말라고 한 건지 모를 일이었으나, 소식도 듣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이제 소식 들려주는 것조차 싫어졌나?

끝까지 바라는 이에게서의 소식은 없었다. 고태성의 우정은 제 생각보다 깊지 않았고, 길지도 않았던 듯했다. 그렇지. 그는 늘 우영의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었다. 짜증이 났다. 그러나 이제 와 어쩔 도리도 없었다.

가끔 꾸는 꿈에서는 고태성과 이서율이 나왔다. 둘은 손을 잡고 있기도 했고, 짙은 분위기 속에서 입을 맞추기도 했다.

피로에 찌들어 잠을 자다가도 별안간 벌떡벌떡 일어나기 일쑤였다. 싹 가신 잠기운에 아프도록 얼굴을 문지르며 욕을 지껄이는 습관이 생겼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건 다 개소리였다. 몸이 멀어진 만큼 보고 싶은 마음만 더 커질 뿐이었다.

모든 건 잘못된 사랑을 시작한 제 탓인데, 안되는 걸 인정하고 말끔히 정리하면 모든 게 끝날 일인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씨발, 정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따위로 끝나 버릴 인연이었다면 정신 나간 척 입이라도 맞춰 볼걸, 차라리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해 볼걸, 미친 상상을 하며 잠드는 나날도 있었다.

실은 내가 너를, 존나게 좋아했다고.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고.

숨이 턱까지 막혀 올 때 담배를 피웠다. 선임이 죽상인 우영에게 다가와 좆같을 때 피워 보라며 건네준 것이 시작이었다. 말대로 따르다 보니 도움이 되었다. 잠시나마 속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었다.

딱 죽을 것만 같은 고비를 수없이 반복했고, 시간은 청산유수처럼 잘만 흘러갔다. 지옥 같았던 이병, 일병까지 버티고 나니 상병 시절부터는 조금 살 만해졌다. 아니, 어쩌면 군인이 천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맞았다. 이따금 학교로 돌아가지 말고 이대로 군인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와중에 좋은 인연도 만났다. 다른 이들에 비해 일찍 입대한 편이다 보니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우영을 맞선임 이태평이 잘 보살펴 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같은 한국대생이었고, 능글맞은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디자인과라고 했다. 고태성과 똑같이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묘한 친숙함이 더해졌다.

우영은 첫 휴가 때 그에게 술을 배웠다. 제 주량이 평균치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넉살 좋고 다정한 그는, 주변에 의지할 만한 존재가 없다시피 살아온 우영에게 귀한 인연이었다. 지옥 속에서 매일 동고동락하다 보니 돈독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입대한 만큼 그의 전역도 먼저였다. 허하고 슬프긴 했으나, 곧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우영 또한 1년 8개월간의 군 복무를 끝냈다.

다친 곳 없이 몸 건강히 제대를 마친 그는 이제 스물하나의 버젓한 성인이 되었다. 훈련으로 다져진 몸과 벌어진 어깨는 다부졌고, 기분 전환 겸 뚫은 피어싱 탓에 전보다 날렵하고 날티 나는 분위기가 풍겼다.

전역하자마자 우영은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개강까지는 약 석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졸업 전 계획했던 과외 아르바이트는 머리가 굳어 어려울 것 같아, 살펴본 중 제일 시급이 셌던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동혁 숯불갈비’의 사장인 주동혁은 30대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가끔 택시비 명목으로 오만 원권을 서슴없이 턱턱 쥐여 주거나, 회식 때 비싼 소고기를 실컷 먹게 해 주는 등 아랫사람에게 잘 베푸는 쾌활한 사장이었다. 개그 욕심이 있어 과하게 오버하는 면도 있었지만 웃긴 사람이었다.

처음 해 보는 고깃집 일 또한 재미있었다. 단련되어 있던 체력 덕에 힘든 건 하나도 없었다. 워낙 바운더리가 좁았던 인맥이었으니, 함께 일하는 동생들과 형 누나 등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재미있어졌다. 학과 생활이 바쁘지만 않다면 주말이라도 계속 이어 하고 싶을 만큼 그만두기 아쉬울 정도였다.

개강 전 살 집을 알아보는 동안엔 이수화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대 근처에 제 명의로 된 오피스텔 건물이 있고, 방이 많이 남으니 거기서 공짜로 살아 달라는 말이었다. 살아도 된다는 것도 아니고 살아 줄 수 있냐는 말이 퍽 그다웠으나, 염치도 없이 그럴 순 없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권유에 우영은 결국 손을 들었다. 몇 번의 통화 끝에 무보증금에 월세는 시세의 반만 내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어차피 할머니에게 손을 벌려야 했던 처지라 더 가릴 것도 없었다. 옛날에도 느낀 점이었지만, 이수화는 은근히 고집 있는 성격이었다.

처음으로 만들어 본 체크 카드에 첫 월급을 그대로 넣었다. 할머니의 선물을 사고 꼭 필요한 돈 외엔 건들지 않았다. 군에서 받았던 쥐꼬리만 한 돈도 전부 모으니 제법 되었다. 전부 합하니 할머니의 도움 없이도 용돈까지 충분했다. 그렇게 개강 전 이사를 끝냈다.

침대에 누운 우영은 어색한 새 집을 물끄러미 훑었다. 원룸 반지하나 알아보던 신세에서 별안간 신축 풀 옵션 투룸 오피스텔의 전망 좋은 로열층이라니,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관리비조차 없다고 했다.

이수화는 실질적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학창 시절엔 제가 도움을 주던 입장이었는데, 이렇듯 처지가 바뀌니 신기한 마음도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순간,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한국대학교 XX학번 체육 교육과 단체 채팅방’

제 번호는 어떻게 안 건지, 새로 초대된 채팅방에는 벌써 수십 명의 인원이 모여 있었다. 눈을 치켜뜬 우영이 스크롤을 내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들떠선 곧 있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쉴 새 없이 오가는 대화를 보고 있으려니 정신이 없었다.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끄곤 이수화의 이름을 눌렀다. 고맙다며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금세 확인한 그가 꽃을 뿌리며 열심히 뛰는 토끼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여태 ‘쵸파’라고 저장되어 있는 이름을 보니 픽 웃음이 터졌다. 오래된 핸드폰은 새 기종으로 바꿨으나 기존 연락처와 앨범은 그대로 옮겨 온 탓이었다. 그러니 그 안에 가득했던 고태성의 흔적도 여전했다.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손바닥만 한 전자 기기 속 안의 둘은 그대로였다. 백업된 채팅방은 2년 전 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뉜 우영은 앨범을 눌러 보았다. 마치 어제 찍은 것처럼 생생한 한 장의 사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마지막 축구 경기가 있던 날, 뉴질랜드에서 11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던 고태성과 정문에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함께 미래를 그리던 벅찬 기쁨과 감동, 그때 품었던 희망이 아직도 선명했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연락 한 통 없던 사이건만 정말로 얼마 전 일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현실을 깨닫자 문득 또 외로움이 덮쳐 왔다.

……등신.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빌빌대는 처지에 헛웃음을 흘린다. 핸드폰을 끈 우영은 얼굴 위로 팔을 툭 얹었다.

허망함이 속절없이 몰려들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대학 생활이 코앞으로 다가왔건만,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외려 사무치게 텅 빈 공허만 찾아들 뿐이었다. 숱한 고통을 딛고 성장한 줄 알았으나 결국 오만한 착각이었다. 아직도 우영은 열아홉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지난 아득한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하, 씨발…….”

그는 한숨과 그리움을 함께 짓씹었다. 또다시 금세 괴로워짐을 느꼈다.

잊으려다 잃어버렸다. 잊지는 못하고 잃기만 했다. 빌어먹을 분실인지 유기인지 깨닫지도 못한 주제에, 되찾아올 용기조차 없다. 짝사랑이야말로 참으로 지독한 고집이었다.

***

“권우여엉!”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온 이건우가 거친 손길로 우영에게 어깨동무했다.

“야, 형한테 무슨 말버릇이냐? 형, 이 새끼 완전 인성 나가리죠. 상종하지 마요.”

뒤따라온 김재원이 구시렁거리자, 실실 웃어 보인 이건우가 우영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파고들었다.

“왜에. 우리 친구 먹기로 했는데? 우영이도 그게 편하댔어. 그쵸? 김재원 너야말로 우리 우영이 괜히 귀찮게 만들지 마라.”

넉살 좋은 말에 우영이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어. 그냥 말 놓으라니까. 아님 너네가 형 할래?”

장난스레 말하며 씩 웃자, 그들이 호탕하게 따라 웃었다.

이건우, 김재원. 이들은 지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같은 조를 했던 아이들이자, 우영이 처음 친해진 학과 동기였다. 이건우는 넉살 좋고 애교가 많은 스타일이었고, 김재원은 깍듯하고 예의가 발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던 둘은 스스럼없는 사이인 듯했다.

합격하자마자 군 휴학을 내는 바람에 함께 강의를 듣는 학우들은 전부 동생이 되어 버렸다. 늦은 새벽까지 술잔을 주고받다 나온 말에 어쩔 수 없이 제 사정을 얘기했지만, 사실 우영은 두 살 터울인 걸 티 내지 않고 지낼 생각이었다.

괜히 불편하게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만나는 족족 설명해 주기에도 귀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친구고 동생이고 제게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우영아, 우리 교양도 같이 듣자! 개강하고도 정정할 수 있대. 난 아무거나 들어도 상관없는데.”

“미친 새끼. 너 왜 집착하냐?”

“멋있잖아. 유디티 출신인 것도 존나 발린다고. 진짜 내 롤 모델이야. 우영이 형님.”

직설적인 칭찬에 우영이 귓불을 만지작대며 웃었다. 전보다 하얘진 뺨에 볼우물이 슬쩍 패었다.

“시간표 보내 줄 테니까 정정할 거면 따라오던지.”

“어어, 좋아. 까먹기 전에 지금 보내 주라. 김재원, 너도 바꿔.”

질척대는 이건우의 행동에 김재원이 혀를 찼다. 고개를 끄덕인 우영이 핸드폰 앨범에 저장해 놓았던 시간표를 전송하는 사이,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우영우영, 과팅 할 생각 없어? 나 간호학과에 아는 애가 물어보던데. 너랑 나랑 재원이 하고 아무나 한 명 껴서 가면 딱이야.”

“……과팅?”

“어. 걔 친구들 졸라 예쁘대.”

신이 나서 떠드는 말에 우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평생 고태성 하나만 좋아해 온 건 맞지만, 제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여태 만나 볼 생각조차 없었고 그럴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부대 안 바글바글한 수컷들 사이에서도 딱히 눈에 띄는 놈이 없었던 이유였다.

의문을 품어 봐야 답은 알 수 없다. 전부 부딪치고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남자만 좋아하는 건지, 여자도 좋은 건지, 또는 그 새끼처럼 잘난 놈만 눈에 들어오는 건지. 그저 어릴 적부터 쌓아 온 유대감 탓에 고태성에게만 유난한 애착을 느껴온 건지.

“그래.”

우영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더는 거리낄 것도 없었고 전과 달리 어느 정도 여유도 생겼다. 남자건 여자건 못 해 본 것,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볼 생각이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 했으니 시도 못 할 것도 없었다.

“오, 진짜? 와씨, 개이득!”

“이건우, 내 의견은 안 물어보냐?”

“넌 당연히 가야지. 새꺄, 독거노인이 가릴 처지이신가요?”

“네에. 뒤지실래요?”

투덕거리는 대화 속에서 우영이 픽 웃었다.

친근한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학창 시절의 저와 고태성이 떠올랐다. 어느 하나 비슷한 구석도 없건만 주책맞기도 했다. 돌연 가슴께에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우영은 뻐근한 눈을 짓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병이다, 병이야. 이 정도면 고질병이었다.

이제는 하나씩 지워 나가야 할 때였다. 가장 친했던 친구인 고태성을 되찾으려면, 제가 먼저 그의 친구가 되어야 했다.

***

전공 강의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보았던 익숙한 얼굴들이 모였고, 교수가 스크린에 띄운 간단한 수업 계획을 들었다.

강의는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어딜 가나 이건우와 김재원이 졸졸 쫓아오는 바람에 외로울 틈도 없었다. 그다지 재미는 없었지만 전부 처음 해 보는 일이라 그런지 시간은 잘도 흘렀다.

개강 첫날, 정신없던 하루 일정을 마친 우영은 어둑하고 소란한 학교 후문 앞을 걸었다. 초저녁부터 길거리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 형.”

걸려 온 전화에 핸드폰을 귓가에 대었다. 오늘 저녁은 맞선임이었던 이태평과의 약속이 있었다.

-우영, 어디야?

“나……. 이제 후문 지났어.”

-그 앞에 쓰리고 간판 보여?

“쓰리고?”

답하며 주변을 훑자, 멀리서 손을 휘적거리는 이태평의 모습이 보였다. 단번에 그를 발견한 우영의 입술 끝이 씩 올라갔다.

“형!”

“권우영~! 잘 지냈어?”

우영은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뛰어갔다. 싱글벙글한 이태평이 우영의 머리를 자연스레 헝클어뜨렸다.

“이야, 얼굴 좋아진 거 봐라? 전역하니까 살맛 나지?”

“당연한 소릴. 존나 숨만 쉬어도 재밌지. 형 가고 혼자 심심해서 뒤지는 줄 알았어.”

“음. 내가 좀 인싸긴 해.”

능청스러운 말에 헛웃음을 터뜨린 우영은, 불퉁한 얼굴로 그를 툭 쳤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복학생 아저씨 주제에.”

오늘 그와는 제대 후 첫 만남이었다. 전역하고 바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과 달리 그가 아주 바빴기 때문이었다.

“어쭈? 형 인기 많아. 몰랐어?”

“참나.”

“너 대학로 안 돌아봤지? 형님이 한국대 핫플레이스 도장 깨기 시켜 준다.”

“어, 나 배고프니까 맛있는 거 사 줘.”

“오케이, 죽이는 삼겹살집 알려 줄게. 너 한 입 먹고 뒤로 넘어갈 수도 있어.”

“아. 진짜 오바 언제까지 할래.”

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간만의 만남인데도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착잡했던 기분이 금세 들떴다.

***

소주는 쓰다. 한마디로 맛대가리 없다. 처음 입에 댔을 땐 이 맛대가리 없는 물을 왜 마시는지 몰랐으나 여러 번 겪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뭐, 넌 안 그렇게 생겨서 범생이인 게 특이해.”

이태평이 소주잔을 채우며 씩 웃었다. 술을 홀짝인 우영은 잘 익은 삼겹살을 우물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데?”

“으음. 과묵한 양아치 느낌? 동료에게 배신당한 아픔을 묻고, 조직을 나가지도 못한 채 뒷골목을 누비는……. 외로운 한 마리의 늑대?”

“뭐래. 조폭 영화 좀 그만 봐.”

우영이 킥킥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멀끔하게 생긴 이태평은 생긴 것과 달리 실없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개그 코드가 잘 맞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야, 권우영. 천천히 마셔. 나 너 무섭다. 내가 진짜 주량으로 진 적 없는데 너는……. 무슨 애가 얼굴색 하나 안 변하냐?”

“나도 그게 취한 거라니까?”

“어어, 취한 건 당연히 알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우리 우영이, 눈물도 막 뚝뚝 흘리면서……. 혀엉, 나 힘들…….”

“아, 좀!”

인상을 와락 찌푸린 우영이 그의 입을 막았다. 이태평이 키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어. 야, 군바리들이 다 그렇지 뭘 부끄러워하냐.”

“아이씨…….”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금세 술잔을 채웠다.

휴가를 나와 그와 거하게 술을 마신 날, 생애 처음 겪어 본 취기 속에서 고태성 생각을 하다 눈물을 쏟은 전적이 있었다. 술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첫 음주 경험치고는 꽤 망신살 뻗치는 일이었기에, 그 후로는 그렇게까지 마시지 않고 조절하게 되었다.

“근데 나와서 보니까 더 감회가 새롭다.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이렇게 번듯한 놈을 찼대? 그 여성분 수준이 장난 아닌가 봐.”

“사귄 거 아니라니까.”

“사귀든 안 사귀든 어쨌든 찬 건 맞잖아. 복덩이를 그냥 후려 찬 거지. 그래 됐어, 다 지난 일 말해 뭐 하냐. 짠 해. 짠.”

짤그랑, 잔을 부딪치고는 술을 넘겼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기 연기와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시끌시끌 섞여 들었다.

“아무튼, 이제 너 좋다는 여자들 줄을 설걸?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 하고 있어라. 어떤 이상형의 여성분을 만나고 싶은지.”

“……저 그렇게 팔자 좋지 않거든요.”

“아니, 팔자 좋을걸. 보자, 보자……. 일단 피지컬 합격. 얼굴 합격. 패션 센스 합격. 성격? 음. 최종 합격. 총점 백 점 만점에 102점 드립니다.”

심오한 얼굴로 손가락질하다, 감격한 듯 박수를 쳐 대는 모습에 우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 마세요, 저 돈 없어요.”

“이 새끼, 날 뭐로 보고. 오늘 형이 풀 코스로 다 쏜다니까? 안 그래도 과외비 두둑하게 챙겨 왔어 임마.”

“이모-. 여기 삼겹살 2인분 더 주세요.”

대꾸도 없이 바로 추가 주문하는 행동에 이태평이 킬킬 웃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들은 군 복무 중 겪었던 일들을 안주 대신 곱씹으며 술을 넘겼다. 처음 입대했을 때부터 전역 때까지 함께한 추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을 되짚다 보니 숨통이 확 트였다. 익숙한 이와 같은 추억을 되새기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삼겹살집에서 1차를 끝낸 후 2차까지 끝냈다. 끊임없이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두 사람 모두 얼큰하게 술이 올랐다. 마실수록 가속도가 붙는 이태평의 주사에 우영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3월의 새벽 밤공기는 아직도 쌀쌀하고 추웠다. 이대로라면 내일도 숙취 확정이었으나, 우영의 집에서 한 잔 더 하자는 말에 함께 걸어가는 길이었다.

“아, 씨. 형, 좀 똑바로 걸어.”

찬 공기에도 미지근한 땀이 배어 나왔다. 누가 누구를 부축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얽혀 비틀비틀 걷다 보니 숨이 턱까지 가빠 왔다. 저 또한 어지러울 뿐더러 덩치가 엇비슷한 덕에 제법 힘이 들었다.

“야, 형 진짜 원래 안 취하거든? 원래 술 존나 세. 알지.”

“어쩌라고요. 지금 취했잖아, 진상아.”

“너도 취했는데?”

“그렇게 들이붓고 안 취하면 사람이냐? 짐승이지.”

“어. 그렇지. 그건 맞지.”

“아, 이러고 뭘 더 마시자고…….”

우영은 뜨겁게 달궈진 숨결을 훅 내뱉었다. 겨우 지탱한 이태평의 무게가 차츰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한 잔 더하긴커녕 가자마자 뻗을 기세였다.

“아……. 존나 취한다.”

“형, 집 다 왔어. 하아. 좀, 일어, 아!”

발을 헛디딘 이태평이 앞으로 무너지듯 쏟아졌다. 그를 덜컥 받쳐 든 우영이 밀려나며 뒷걸음질했다. 등 뒤로 차갑고 딱딱한 벽이 닿았다. 난데없는 기절에 우영이 헛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저기요. 아저씨.”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를 툭툭 쳤다. 술은 자주 마셨지만, 그가 이렇게 정신 줄을 놓은 건 또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데서 주무시면 입 돌아가요.”

읏차, 축 늘어진 허리를 붙들고 끌어 올리자, 그가 무거운 체중을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귓가로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영아…….”

“어.”

“너는…… 충분한 놈이야. 어……. 여자 하나에 ……하지 마, 이, 색……. 조올라 귀여운 새끼.”

“미친, 지금 누가 귀엽게 굴고 있냐.”

헛웃음을 흘린 우영이 그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형, 이러고 더 마실 수 있어?”

“어, 아니. 집 가야지. 나 내일……. 일찍 약속 있는데.”

“아니……. 그럼 뭣 하러 여기까지 와.”

어눌한 발음에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듯 답했다. 그냥 택시 태워 보내면 될 걸, 보채는 바람에 기껏 모셔 왔더니 딴소리를 하는 탓이다.

“너 데려다준 거지. 형이 어떻게 또 혼자 가냐. 형이 되어서!”

돌연 울려 퍼진 우렁찬 목소리에, 우영은 땀이 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장난해, 진짜?”

그는 황당한 듯 웃으며 핸드폰을 켰다. 한 손으로 어플을 켜 간신히 택시를 호출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 다음엔 삼겹살 아니고 소고기 사 줘야 돼. 나 존나 힘 뺐어.”

늘어지는 덩치를 계속 붙들고 있으니 순식간에 체온이 올랐다. 새벽이라 망정이지 다 큰 남정네의 허리를 안고 있는 것도 그림이 이상했다.

“어응, 그럼 그럼. 우리 동생, 아들, 후임. 잘생긴 권우영이. 형이 맛있는 거 다 사 주지. 그것도 못 해 줄까 봐.”

중얼중얼하는 사이로 택시가 빵, 클랙슨을 울렸다. 느릿느릿 끌고 가 택시에 태우자, 실실 웃던 이태평이 손을 휘적거렸다.

“이 형, 지금 좀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조심히 부탁드립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택시가 고요한 골목길을 가로질러 떠났다.

그제야 우영은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다시 오피스텔 입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며, 점퍼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피우고 들어가야 정신이 좀 맑아질 것 같았다.

달칵, 달칵. 불을 붙이고는 차가워진 한 손은 주머니에 넣었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연기를 들이마시곤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고 둥그런 보름달이 여전히 우영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부옇게 흘러나온 연기가 그 위로 흩어졌다. 문득 고태성 생각이 났다.

같은 캠퍼스 어딘가 그가 돌아다니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종일 은연중에 주변을 훑어보던 제 모습이 하찮기만 했다.

지겹다, 지겨워.

언제쯤이나 돼야 완전히 잊고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만큼 앓았으면 그만할 때도 됐건만, 아직은 턱도 없는 기대 같았다.

하, 헛숨을 내쉰 우영이 고개를 툭 떨궜다. 운동화 끝으로 자갈을 툭 차는 찰나, 데구루루 굴러간 돌멩이 옆 신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묘한 인기척에 그가 찬찬히 시선을 들었다.

“안녕.”

익숙한 목소리에 우영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다 내뱉지 못했던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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