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로 다른 n개 중, 중복을 허용하여 r개를 선택해서 일렬로 나열하는 경우의 수가 중복 순열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아래 표를 보자. 중복 순열과 중복 조합의 쉬운 구분법은…….”
[18:30 존나 지루해 뒤지겠다.]
[18:30 (이모티콘)]
[우영이: 3시간만참아새끼야 18:31]
[18:31 정확히는 3시간 29분.]
별 의미 없는 생일에도 즐거운 일은 있다.
10월 29일. 툭툭거리는 권우영이 유난히 제 눈치를 보며 고분고분 순해지는 날이었다. 생일이 뭐라고 쓸데없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귀엽기도 하다.
[18:31 우영.]
[우영이: ㅇㅇ? 18:32]
[18:32 나 생일 선물 받고 싶은 거 또 생겼어.]
[우영이: 미친ㅋㅋㅋㅋ뭔데 18:32]
하지만 태성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이날마다 제게 꼼짝 못 하는 우영을 보며, 그는 평상시 우영이 절대 해 주지 않았을 일들을 요구하고는 했다.
작년에는 요란한 공주 컨셉의 캐릭터 필터를 적용한 사진을 찍었고, 재작년에는 제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했다. 우영은 원래대로라면 낯부끄러워서 하지 않았을 일들을 생일에는 한 치의 거절도 없이 다 들어주곤 했다.
“17번 문제. 배고픈 뱀이 2분의 1 확률로 앞을 지나가는 개구리를……. 거기. 집중하자.”
칠판 앞에 서 있던 선생이 태성을 바라보며 힐긋 눈치를 줬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태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상 아래의 핸드폰 자판을 빠르게 눌렀다.
[18:33 생일 축하 노래 불러ㅅ]
[18:33 불러서 보내 줘.]
[우영이: 미친무슨노래를보내 18:33]
[우영이: 그냥이따만나서불러줌ㅋ반할준비해라 18:33]
빠르게 돌아온 답에 태성이 픽 웃었다. 그가 받았던 선물은 모두 권우영이 처음 해 보는 일들이었다. 이 또한 그가 어디서도 해 본 적 없는 일일 테니, 꽤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태성은 우영의 ‘처음’이란 것들에게서 특별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18:36 네 오빠.]
[18:36 기대하고 있을게요?]
[18:36 (이모티콘)]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메신저를 껐다.
오늘은 우영과 함께 제 집에서 자기로 약속한 날이다. 오래간만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둘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는 일 없이 시시콜콜한 대화나 나누며 만화책이나 보다 잠들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즐거운 생각들이 마구 피어올랐다. 정해진 수업이 끝날 때까지 칠판에 적힌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성-! 집 가냐? 너 오늘 생일이라며! 생일 축하!”
이름 모를 놈이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태성은 그를 힐긋 보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려 주었다. 평소라면 모른 척 더러운 팔을 치워 냈을 테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집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괜스레 핸드폰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우영에게서는 여섯 시쯤 나눈 마지막 메시지 이후로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도 알고 있을 테고, 10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체육관에서도 일찍 나왔을 터였다. 약속 시각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연락이 없는 걸 보아하니, 아마 또 깜짝 이벤트랍시고 어디서 버티고 있을 것이 눈에 훤했다. 우영은 평소 놀래키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물론 제대로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피식 미소를 짓고는 느릿느릿 걸었다. 혼자 걸을 때면 종종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전화해 볼까, 생각하다 그가 바라는 대로 모르는 척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찬 공기가 뺨을 스쳤다. 길게 이어진 밤거리를 걷던 태성은 곧 멀찍이 보이는 캐슬 정문을 응시했다. 예상대로라면 저기 어딘가에 우영이 서 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차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야가 또렷해졌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주황색 벽돌 위의 담쟁이덩굴과 꽃가지들을 환하게 비췄다. 태성의 눈동자가 찬찬히 굴러갔다. 혹여 어디선가 튀어나올까, 그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둘러보았으나 주변엔 움직이는 기척조차 없었다. 어디에도 우영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태성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55분. 약속 시각까지는 고작 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돌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문 앞에 도착한 태성은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 섰다.
1분, 2분, 3분……. 5분. 끝내 시계의 숫자가 10:00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이었고,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지는 세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하.”
저도 모르게 헛숨이 터졌다. 핸드폰을 꽉 쥔 태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다른 날도 아닌 제 생일이었다. 몇 시간 내내 연락도 없었던 그가 약속을 어길 리가 없었다. 필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삽시간에 불쾌한 직감이 스며들었다. 지금 상황과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는 이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었다.
태성은 짙은 숨을 찬찬히 들이마시다 길게 내뱉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멍청하게 들떠 있던 과거의 자신이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뜨끈해진 머리가 점점 차게 식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영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한참을, 자리에 박힌 듯이.
[우영이: 야 진짜미안 나일생겨서좀늦었어 금방ㄱ갈게 22:41]
[우영이: 진짜 조금만기다려 미안 22:41]
진동이 울리자마자 미리 보기로 메시지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언반구도 없던 채로 벌써 40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화면을 끈 태성은 턱을 꽉 물었다. 짜증이 나서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제야 굳은 얼굴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 수학 수업 한 타임 남았을 텐데, 왜 벌써 왔어요?”
정지철이 눈을 치켜떴다. 신발을 벗은 태성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원래대로라면 집에 없어야 할 그의 출현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불쾌했다. 그냥 다 꺼져 줬으면 했다.
터벅터벅 계단을 오른 태성은 드세게 방문을 열었다. 가방을 의자 위에 벗어 던지고,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투박한 손길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티셔츠를 벗자 탄탄한 잔근육이 박인 몸이 드러났다. 그는 거침없이 욕실로 향했다. 펄펄 끓는 머리엔 찬물로 샤워가 필요했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씻는 내내 내심 연락이 왔을 거라 예상한 것이 무색하게도 우영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미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하, 잇새로 또 헛바람이 터졌다.
[11:10 권우영 어디 갔어?]
그는 힘을 주어 자판을 꽉꽉 눌렀다. 남기혁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남기혁: ㅇㅇ? 걔학교갔어이수화 때문에 11:11]
[남기혁: 말하자면김나병원이라우영한테전화해ㅂ봐 11:12]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금세 답이 왔다. 띄어쓰기가 되지 않아 엉망으로 쓰인 문장 사이로 ‘이수화’ 세 글자만 유독 눈에 띄었다.
설마설마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제 생일에 맞춰 주지 못해 안달복달하던 그가 막무가내로 나오는 이유는 역시나 이수화였다.
태성은 신음 같은 소리로 탄식했다.
“아…….”
씨발.
와당탕! 길쭉한 팔이 책상 위의 조명과 필기구들을 다 쓸어 버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스탠드와 각종 노트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태성은 짙은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꽉 쥔 주먹으로 책상 위를 퍽, 내리찍었다. 무엇을 해도 분노가 가시질 않았다.
화가 나서 현기증이 일었다. 권우영이 제게 이렇게까지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생일을 특별하다고 여겨 오진 않았으나, 적어도 권우영은 중요하게 생각해 오던 날이었다.
그런 날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또 이수화 때문에.
침대에 거칠게 걸터앉은 태성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곳곳에 뻐근함까지 느껴졌다. 뼛속부터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일기 시작했다.
아……. 우영아, 이건 아니지. 씨발, 이건 아니잖아. 권우영. 나 많이 참았잖아.
태성은 뜨거운 숨을 뱉으며 눈가를 꾹 짓눌렀다. 주체하기 어려운 짜증에 가슴께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새카만 잡념에 잠겨 있던 태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분명 오긴 올 것이다. 그가 제게 무슨 변명을 지껄일지 우선 들어 보아야 했다.
생각하는 찰나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영이’
세 글자를 본 순간, 받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태성은 자꾸만 어긋나려는 제 이성을 붙들고 이를 꽉 물었다. 가만히 바라보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통화를 연결했다. 수화기 너머로 색색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 고태성, 나 너네 집 앞이야.
“……기다려.”
낮게 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카디건을 걸치고 계단을 찬찬히 내려갔다.
복잡하고 혼란한 감정들이 엉켜 들었지만 애써 참아 냈다.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로 밑도 끝도 없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끼익. 육중한 대문을 밀고 나가는 찰나, 시야에 권우영이 들어왔다. 태성의 시선이 찬찬히 옮겨 갔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그는 한껏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불현듯 제가 정문을 열어 주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또 헛웃음이 샜다. 이수화와 캐슬 안까지 사이좋게 걸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야, 진짜 미안해…….”
그는 짙은 눈썹을 끌어 내린 채 정말로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하나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수화 때문에 저를 내팽개친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뭐 하다 왔는데?”
태성의 낯빛이 차츰 더 싸늘해졌다. 그, 씹새끼랑 어디서 뭘 하느라 이제 왔냐고 왈칵왈칵 묻고 싶었다. 쏟아 내지 못한 분노가 입 안에서 한가득 넘실거렸다.
“아, 나 일이 좀 생겨서…….”
“무슨 일?”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줄게. 야, 생일…….”
제 물음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상체를 더듬거리던 그가 탄식했다. 그럼 그렇지, 애당초 제게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야, 진짜 미안한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라. 금방 갔다 올게. 어? 잠깐만, 잠깐 있어!”
그는 답을 듣지도 않고 부리나케 등을 돌려 달려갔다. 태성은 붙잡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그가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이제 어딜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가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5분, 10분, 15분. 억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태성에게 전화가 걸려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나타났다. 혼자 뭐가 그리 바쁘고 힘든지 엉망으로 흐트러진 얼굴을 하고서였다.
“고태성, 생일 축하해. 하아, 하.”
우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자를 내밀었다. 하나 태성의 눈에 그런 게 들어올 리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우영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권우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속속들이 파헤쳐야 했다.
“이수화 만났어?”
새파랗게 날이 선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어?”
“이수화 데려다주고 오는 거야?”
“아니, 그…….”
“아깐 정문 어떻게 들어왔는데.”
“…….”
“난 아닌데 누가 열어 줬냐고. 남기혁도 없는데.”
태성은 곤란한 얼굴의 우영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권우영은 제게 아무것도 말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손끝에서부터 저릿한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치기와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 더 해. 더 해 봐. 더 숨기고, 더 거짓말해. 그냥 씨발 다 아니라고 해.
“권우영.”
부름에 시선이 마주쳤다.
“너, 게이야?”
오기 부리듯, 준비하지 않았던 말이 튀어 나갔다. 가시를 드러낸 날카로운 눈빛이 우영을 드세게 파고들었다. 한번 꺼내 버리면 다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인 걸 알면서도 끝내 엎지르고야 말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참을 수가 없었다.
“당황하네, 우영아.”
우영은 정말로 당혹스러워 보였다. 꾹 다문 입술의 떨림이 그랬고, 일그러진 눈매가 그랬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한 번 더 확인 사살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1학년?”
작년? 재작년? 아님, 처음부터? 첫 만남부터야?
막상 꺼내고 나니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꾹꾹 압축된 분노와 질투가 그를 엉망으로 뒤흔들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면서도, 한번 터져 버린 입은 다물 생각을 않았다.
“왜 말 안 했어.”
건조한 물음은 버석했다.
“왜, 말 안 했어?”
억눌러 놓았던 숨이 차츰 가쁘게 차올랐다. 침을 삼키는 목구멍이 따가울 만큼 뜨끈했다. 연이은 물음에도 침묵만이 돌아왔다.
적막 속에서 태성의 숨결은 점점 더 짙어졌다.
“너한테 나는……. 씨발, 뭐지?”
“…….”
“도대체…….”
가슴이 저릿저릿 쑤셨다. 그를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웠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태성은 꽉꽉 억누르는 숨을 흘렸다.
“왜 답을 안 해, 존나……. 짜증 나게…….”
그가 고개를 툭 떨구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비식 비어져 나왔다. 이 모든 순간을 뒤집어엎고 싶을 정도로 불쾌하고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뭘 듣고 싶은데.”
낮은 음색이 들려왔다. 태성이 다시 찬찬히 시선을 우영에게 맞추었다. 그는 여전히 담담해 보였다. 쉴 틈 없이 불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그래, 네 말 맞아. 좋아해.”
“…….”
“나 남자 좋아한다고.”
주먹만 한 돌덩이가 목구멍에 턱 걸렸다.
“근데……. 내가 어떻게, 말하냐. 좆같다며……. 네가.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거, 소름 끼친다며……. 근데 내가 뭘, 어떻게 말해.”
“했어야지.”
“…….”
“그래도……. 했어야지. 내가 모르는 건, 없게 했어야지.”
짓씹는 입술이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 관계에 비밀은 없었어야 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저는 알고 있었어야 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꼭 그래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망가졌다. 지난 시간 동안 애써 모르는 척 덮어 두었던 것들을 전부 돌이킬 수 없게 들춰 버렸다. 단 하루를 계기로,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생일이란 이유로, 오랫동안 쌓아 왔던 것들이, 전부…….
“말하면. 말하면 이해는 할 수 있었냐?”
“…….”
“못 하잖아. 끔찍하게 봤을 거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그런, 개 같은 눈빛으로 나 보는 거잖아.”
우영은 끓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한마디에 태성의 눈동자가 열기를 띠었다.
“……개 같은 눈빛?”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헛웃음이 흘렀다.
“이 상황에 그럼 내가, 웃고 있어야 할까?”
하다못해 저에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는 눈동자에 더 불쾌한 기분이 번졌다.
더는 한계였다. 지난 시간 그렇게 제 속을 썩이고도 당당하기만 한 언행에, 비틀어져 버린 심사를 더 견딜 수 없었다.
“우영아.”
“…….”
“네가 먼저……. 변했잖아.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네가 알기나 해?”
태성이 그의 어깨를 아프게 쥐었다. 마음 같아선 제 앞에 무릎을 꿇리고 다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참아 냈다. 우영은 제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분명 아껴 주고, 예뻐해 주고, 늘 웃게 만들어 줘야 하는, 그런 소중한 존재였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죽여 버리고 싶어. 너 이렇게 만든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고.”
불현듯 이수화와 말갛게 웃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도 희희낙락대며 함께 밤길을 걸었을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생각하자 지독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처음부터 그냥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 병신 새끼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목을 졸라서라도 꺼지라고 했을 거야.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눈앞에서 쫓아냈을 거라고. 알아?”
태성은 씹어 삼키듯 말을 뱉었다. 여과 없는 말에 우영의 얼굴에도 화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수화를 적대하고 있다고, 좋아하는 놈을 모욕하고 있단 이유로 제게 그딴 눈빛을 드러내는 데에 배신감이 몰려왔다. 차츰 변하는 낯빛조차 미친 듯이 싫었다.
“그게 뭐 어때서.”
우영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개를 돌리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 지랄이냐고.”
쌀쌀한 눈빛이 다시 태성을 마주했다.
“같이 다니는 놈이 게이라니까 쪽팔려서? 창피해서 그러냐? 도대체 그게 왜, 왜 그렇게 싫은데, 왜! 씹, 내가…….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잖아!”
거친 고함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꿈틀거리는 본능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라고, 단 한 마디도 뱉지 못하게 하라고 외쳤다. 하여 태성은 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드센 힘에 우영의 몸이 흔들렸다.
“목소리 낮춰. 동네방네 네 취향 떠벌리고 싶은 거 아니면.”
우영은 찌푸린 얼굴로 바닥을 응시했다.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붙은 이마도 찌푸린 채였다.
“난……. 난 원래 이런 새끼야.”
그는 괴로워 보였다. 마치 저처럼,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비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괴로운 것이 싫었다. 상황 자체에 환멸이 났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남자 놈 생각이나 하면서 좋아하고, 가슴도 없는 밋밋한 몸 떠올리면서 온갖 상상 다 하는 그런 더러운 새끼라고! 씹, 네가 그렇게 끔찍해하는 사람이 원래 나야!”
“씨발, 닥치라고!”
태성은 버럭 고함치며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다물려 놔야 했다. 더는 단 한 글자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입, 다물어.”
짙은 숨소리가 엉망으로 떨렸다.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찾아든 분노에 이렇게까지 파괴적으로 흔들린 건 처음이었다.
“한 마디만, 한 마디만……. 더 해 봐.”
“…….”
“네가 누굴 좋아하든 말든, 그딴 좆같은 거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더, 아무 말도 지껄이지 마……. 권우영.”
태성은 간신히 입을 열어 씨근덕거렸다. 매서운 눈빛은 우영을 잡아먹을 듯 쏘아붙이고 있었다. 두 명의 거친 숨소리가 사이로 울려 퍼졌다.
“놔…….”
우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나도……. 나도,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한 건 아니야.”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느리게 시선을 든 그가 아픈 얼굴로 웃었다. 태성은 따라 같이 고통스러워졌다. 그러니까, 그런 괴로운 얼굴을 하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것이, 아니 타인으로부터 시작돼버린 어긋남이, 그냥 모든 일이 끔찍하기만 했다.
“……나, 가야겠다.”
“권우영.”
가지 마.
차마 뱉지 못한 말이 맴돌았다. 우영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고, 망설임 없이 제 시야를 벗어났다. 잡을 수도 없이 빠르게.
하아……. 씹.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태성은 갑갑한 숨을 내쉬었다. 느릿하게 몸을 숙여 바닥에 나동그라진 선물 상자를 주웠다. 달그락, 뚜껑을 열자 조각난 초콜릿과 메시지 카드가 보였다.
‘고태성, 생일 축하해.
앞으로도 쭉 내 옆에 있어.
-너의 가장 친한 친구 권우영.’
카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에 구멍이라도 난 듯,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날카롭게 쑤시는 고통이 찾아왔다.
우영아. 이런 게 친구야?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거야? 옆에 있으라면서 왜 두고 가? 이런 게, 이런 게 왜 친구야?
떨리는 숨을 내뱉은 태성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그대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
“아니, 씨발. 권태기라잖아……. 이제 겨우 100일 지났는데!”
“으응. 네 얼굴 100일씩이나 보고 있으면 질릴 만도 하지.”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태성이 뻑뻑한 눈을 감았다. 근래 계속 잠을 설쳤더니 온몸이 무겁게 늘어져 피로했다. 설상가상으로 옅은 편두통까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야, 내가 선아한테 얼마나 잘해 줬냐? 난 진짜 걔 하나에 인생을 다 걸었었다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듣기 싫게 늘어졌다. 멍청한 놈들의 영양가 없는 대화가 자꾸만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성은 감은 눈을 팔등 위에 느리게 문질렀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평소 상종도 하지 않았을 놈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전이라면 한심한 새끼라며 혀를 찼을 텐데, 지금은 왜인지 묘한 기분만 들었다.
“원래 잘해 줄수록 더 금방 질려 하는 거 몰라? 그러니까 얼굴 반반하고 성격 드러운 놈들이 인기가 많은 거야. 아, 물론 넌 얼굴에서 탈락.”
“아! 나 진짜 장난할 기분 아니라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
지난밤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아픈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생각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가슴이 묘하게 욱신거렸다.
……정말 너무 잘해 줘서 그랬나.
은연중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으나 그건 정말 그냥 해 본 것이었다.
8년간 권우영을 특별하게 대해 왔다. 다른 놈들과는 달리 그에게 화 같은 건 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고, 늘 다정하게 대했다. 남기혁이 늘 투덜거리던 차별이란 의미도 알고 있었다.
그야 권우영 같은 사람은 하나뿐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스럽고, 가벼우면서도 더없이 진중한 타입이었다. 동생 같기도, 형 같기도, 어느 땐 아버지 같기도 했다. 그러니 친구는 그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우영은 저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그가 저를 귀찮아하거나, 지겹다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건만. 저야말로 안일하게 굴고 있었다.
늘 똑같이 비례하던 마음의 크기가 점점 반비례한다. 태성은 점점 부풀었고, 우영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균열의 틈으로 시퍼런 곰팡이가 피었다. 삽시간에 번져 든 병균 덩어리들이 우영과 제 사이를 조각조각 부수고 있었다.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데?
저 바퀴벌레같이 생긴 놈과 자신은 급이 달랐다. 외모라니, 그딴 걸로 질려 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렇다면 정말로 너무 잘해 주어서 제게 권태를 느낀 걸까? 진짜 그래서일까?
“야야. 그 말 모르냐?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그걸 좀 새겨 줘야지. 네가 허구한 날 바짝 엎드려 사니까 걔가 그러는 거 아냐. 존나 뭐 로봇 청소기냐? 바닥만 쓸고 다니게.”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나는 이제 선아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아, 닥쳐! 진심 소름 돋았어. 시발.”
태성은 다시 눈을 감았다. 팔등에 얼굴을 묻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익숙해서 소중하지 않을 수 있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은 그가 익숙할수록 소중해졌다. 익숙하고 가까울수록 더, 더 많이 알고 가져야 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권우영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둘은 매우 익숙한 사이였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는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고 있었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제가 아닌 이수화를 택하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그만 떠들고 자리에 앉자!”
사념이 깊어질수록 화가 났다. 한계까지 치달은 스트레스에 골이 지끈거렸다. 평상시 잠이 많은 편임에도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더 불쾌한 일은, 엉망이 된 제 일상과는 달리 권우영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보란 듯 자리를 바꿨음에도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옆에 앉힌 찐따와 실실대며 잘도 얘기를 나누고, 멀쩡히 밥을 먹었다. 배식받은 점심을 그대로 버린 저와는 달랐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썩어 들어갔다. 틈만 나면 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놈들을 치워 버리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잘 지내는 것처럼, 자신도 잘 지내는 듯 보이길 바랐다.
학원 수업을 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쉬는 시간에도, 우영의 생각이 났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고작 단 하루뿐이었는데도 그랬다. 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보다, 그런 큰일에 관해 제게 일언반구 없었다는 배신감이 훨씬 더 컸다. 하필이면 그 상대가 이수화라는 것 또한 한몫했다.
차라리 상대가 남기혁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덜 열 받았을 것이다. 아니, 상대가 누구였든 제게 먼저 말을 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진동이 울렸다. 태성은 흠칫 놀라며 핸드폰을 열었다. 보지 않아도 우영인 걸 알았다. 그를 제외한 쓸모없는 메시지 알람은 전부 무음으로 꺼 놓은 상태였으므로.
[우영이: 너네집정문앞에서기다릴게 20:24]
화면을 누른 태성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종일 딱딱하게 뭉쳐 있던 응어리가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고작 단 한 통의 연락에 그의 낯에 슬그머니 빛이 들었다.
“자, 그럼 10분 쉬었다가 하자!”
선생이 크게 손뼉 치자, 잡념에 사로잡혀 있던 태성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멀거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그대로 의자를 밀고는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벌써 집 앞에 와 있는 걸까. 학원이 12시는 되어야 끝나는 걸 알면서도 왜 이 시간에 온 걸까. 제가 바로 오지 않았으면 자정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을까. 그만큼 제가 신경 쓰이고 급한 마음이 든 걸까.
분명히 권우영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종일 열을 냈었다. 그러나 막상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니, 한 번쯤은 봐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생각이 추를 달수록 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학교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내더니만 내심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사실 이게 맞는 일이었다.
가벼워진 다리로 성큼성큼 걷다 보니 금세 근처에 도착했다. 멀찍이 서서 눈을 굴리자, 캐슬 정문 앞에 선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성은 걸음을 멈춰 섰다. 혹시나 했으나 정말로 이 시간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때문에 제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러고 있었다.
태성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감싼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처럼 은근히 넘어가기는 싫었기에 뭐라도 할 말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슬쩍 누그러지는 눈빛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우영이 성급히 몸을 일으켰다. 날 본 건가? 생각하는 찰나 누군가 정문 안에서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태성은 그 인영이 이수화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눈가가 일그러졌다.
우영에게 다가간 이수화가 손에 든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든 우영이 내용물을 꺼내고 상체에 걸쳤다. 옷이었다.
적어도 둘이 우연히 마주친 건 아니란 소리였다. 불시에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팽팽 돌아가던 사고가 착각에 빠진 그를 비웃고 있었다.
태성은 경직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제야 그에게 답장을 전송했다. 눈동자는 끈질기게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21:22 응.]
하지만 눈앞의 우영은 제 메시지를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실실 웃으며 이수화의 등을 밀어 주기 바쁠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금 제 처지를 깨달았다.
씨발, 또 나만 호구지.
학원이 자정에 끝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 시간부터 저를 찾아온 이유가 명확해졌다. 제가 보고 싶어서, 마음이 급해서가 아니었다. 먼저 이수화와 잡은 약속에 저를 곁다리로 겸사겸사 보러 온 것이었다. 생각하자 열이 확 뻗쳤다.
이수화는 금세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태성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컵 안에 한가득 담긴 물처럼 쏟아질 듯한 분노가 찰랑거렸다.
“어, 왔냐. 빨리 왔네.”
자리에서 일어난 우영이 바지를 툭툭 털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얼굴에 질 낮은 감정이 치밀었다.
왜, 너무 빨리 왔어? 늦었으면 이수화랑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눈치 없이 빨리 처왔나?
싸한 눈빛이 우영이 입고 있는 옷에 닿았다. 조금 전에 이수화가 건네준 것이었으나,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재작년 제가 생일 선물로 사 주었던 옷이었다.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잡념들이 솟구쳐 올랐다. 권우영은 제가 준 선물을 아무에게나 뒤집어씌우는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빌려주기까지 했다. 당장 그것을 벗겨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머릿속에 잘 입력되지도 않았다.
“……거짓말하려던 건 아니야. 괜히 네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런 거지……. 그냥, 나중에 얘기하려고.”
우영은 분명 미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태성에게는 그저, 순간을 모면하려 뱉는 무성의한 사과로만 보였다. 지금 상황에 그것이 진심 어린 사과로 느껴질 리 없었다. 비틀린 심기에 우영의 낯빛이 거짓으로 비쳤다.
“나야……, 이수화야?”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저열한 집착은 제 입지를 몇 번이고 확인받길 원했다.
“나야, 이수화야?”
이미 답을 알면서도 듣고 싶은 말을 종용했다. 돌아오는 것이 그저 겉치레뿐일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물었다.
“당연히 너지, 새끼야. 물어볼 걸 물어봐라.”
“확실해?”
“뭐, 맞다고. 당연한 거 아니냐.”
회피하듯 시선을 돌리는 우영을 보며, 태성의 눈매가 차갑게 일그러졌다.
그는 거짓말하고 있었다. 제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할 정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술렁거리는 감정들이 태성의 목구멍을 조여 왔다.
아니잖아. 이수화잖아. 내가 아니라 이수화잖아. 지금도 그 새끼 보러 온 주제에, 그런 주제에 거짓말이나 하고 내 눈도 못 보고 있잖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치달은 분노에 삐이, 이명이 들렸다. 겨우 억누르던 인내의 심지 끝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이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정신에 그가 띄엄띄엄 전하는 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도 괴로워. 나도 너 때문에 괴롭다고. 그럼 똑같은 거 아니야?”
태성은 또박또박 억눌렀다. 한 치의 거짓 없는 말이었다. 이제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별 같지도 않은 놈 때문에 제게 이런 수모를 주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씨발. 말이 왜 그렇게 되는데.”
“나보다 걔가 더 중요해?”
자꾸만 내뱉는 숨이 떨렸다.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유치한 언행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사실을 알면서도 겉으로나마 확인받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꾸만 불안했다.
“아……. 고태성. 제발. 수능 이 주 남았다. 어? 좀 봐주면 안 되냐?”
“이 주 동안 내가 괴로운 건 되고, 걔가 괴로운 건 안 돼?”
그렇기에 태성은 억지를 부렸다.
이수화가 괴롭힘당하지 않는 걸 원한다면, 자신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저를 택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이수화라도 그러려고 했다. 우영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제 자존심 때문이었다. 끝끝내 제가 그 말을 뱉지 않은 이유는 그깟 전제를 깔아야 선택받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런 조건을 달지 않아도 우영이 자신을 택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생각으로 몇 번이고 그를 시험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횟수가 더해져도 그의 단단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권우영은 고태성보다 이수화를 더 좋아하니까. 고태성보다 이수화가 더 소중하니까. 제 자리를 빼앗겼으니까.
“그 새끼가 대체……. 왜 좋아?”
또다시 맞이한 패배에, 낮아진 목소리가 짙게 떨렸다.
“걔가 뭔데, 나를 이렇게 좆같게 만들어?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으니까, 그냥 막 대해도 돼?”
마지막까지 우영은 그를 선택했고, 자신은 밀려났다. 근거 없고 허튼 자신감이었으며, 오만한 오기였을 뿐이었다. 괴로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씨발…….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아.”
“……고태성.”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는 매섭게 우영을 노려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릿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여유롭던 눈동자는 평정을 찾지 못했다.
“너랑, 존나 말도 섞기 싫으니까.”
태성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활화산처럼 치미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별안간 휘말린 소용돌이 속에서 끝도 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
그날 밤도 역시나 잠을 설쳤고, 눈을 깜박일 때마다 우영 생각을 했다.
벌써 몇 번이나 휘몰아치는 배신감에 잠겼는지 모른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라앉힐 수도 없었다. 그를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제게는 그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태성-. 이제 와?”
청아한 목소리가 복도 사이로 울려 퍼졌다. 걷고 있던 태성이 시선을 들었다. 해맑게 손짓하는 이서율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응. 좋은 아침.”
“수능 준비 잘돼 가? 이제 이 주 남았는데.”
“나야 뭐.”
웃을 기분은 아니었으나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대충 웃으며 건넨 말에 그녀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함께 웃었다.
서율을 처음 본 지도 벌써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확실하고 거침없는 성정이라 그녀를 방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여 태성은 선로를 바꿨다. 그녀가 우영에게 다가가려 할 때마다 가감 없이 말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것이 그녀를 향한 묘한 질투인 듯 느끼도록 했다. 다행히 이서율은 눈치가 없는 여자가 아니었고, 계획대로 제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과 다르게 종종 수줍어한다거나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서 조금씩 마음이 기우는 것이 보였다.
잘된 일이었다. 제 견제의 대상이 우영인 것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저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꾸밈없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면 되니 오히려 쉽기만 했다.
반으로 향하는 짧은 거리 동안 그녀는 쉼 없이 말을 건넸고, 태성 또한 그녀와 걷는 속도를 맞춰 주었다. 원하던 결과를 얻었으나 귀찮은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들었을 때, 멀찍이 선 우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우두커니 선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성의 눈가가 굳었다. 밤새 낸 결론으로 당분간 우영을 아는 척 않기로 했건만, 이서율의 앞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이 상황에 우영을 마주치리란 건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차츰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그는 멀거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씨발. 태성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우영의 친한 친구로 그녀를 꾀어낸 만큼, 모르는 척 지나가다간 귀찮은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안녕.”
그렇기에 하는 수 없이 인사를 건넸다. 어젯밤 일 때문인지 그는 퍽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왔냐.”
“안녕, 우영아.”
돌연 이서율이 경쾌한 인사를 건넸다. 말꼬리를 흐리던 우영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왜인지 흔들리는 눈빛에, 불현듯 지난 기억 속 우영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뭐, 예쁘던데. 네가 눈이 존나 높아서 여자 친구 안 사귄 거 맞구나, 싶더라…….’
입이 마르도록 하던 칭찬과, 연애하냔 말에 일부러 답하지 않았던 자신 또한.
“서율아, 종 치겠다.”
태성은 부러 달래듯 말을 건넸다.
“응, 먼저 가 볼게. 이따 봐. 우영이도 안녕.”
눈치 빠른 그녀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마 제가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당치도 않는 소리였지만 무슨 생각 하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지금 권우영이 이수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거란 법은 없었다. 사춘기의 동성애는 왕왕 있는 일이라 했고, 연애 경험이 없으니 남자만 좋아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정말로 잠깐의 방황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등을 돌린 것을 확인한 후, 태성은 가던 길을 향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지난밤 결심한 대로 당분간 권우영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잔뜩 쌓인 배신감과 화도 화일뿐더러, 그 또한 제 빈자리를 소중하게 느낄 필요성이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했다.
“고태성.”
돌연 제 이름을 부르며 붙드는 행동에 눈가를 찌푸렸다. 그 짧은 손길에도 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치솟았다.
시선을 드니 눈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는 당돌한 눈동자에 괜한 반발심이 일었다. 그래, 놈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멍청한 새끼한테 코가 꿰여서 지금 정작 뭐가 중요한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내가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들쑥날쑥한 못된 감정들이 태성을 새카맣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너, 계속 이럴 거냐?”
“말 섞기 싫다고 했잖아.”
“야.”
“기억 안 나?”
태성은 제 어깨를 쥔 손을 느리게 떼어 냈다. 저를 똑바로 주시하는 낯을 마주하자, 지난밤 쌓아 두었던 감정이 빠르게 고조되었다. 분명 화를 내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분노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내 말 무시하는 게 재밌나 봐, 권우영. 아니면 씨발……. 그냥 만만한 건지.”
태성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밤새 뒤척거리며 떠올리던 잡념들이 새카맣게 변모해 그를 덮쳤다. 원망 속에서 우영은 그저 밉게만 보였다.
“뭐가 그렇게 꼬였냐?”
공격적인 어조에 태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꼬여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권우영이었다. 저는 전과 달라진 게 없었고, 그는 변했다. 변한 사람이 더 나쁜 건 당연한 말이었다. 점점 고조되어가는 대화 속에서, 우영은 기관총처럼 분노를 쏘아 대기 시작했다.
“씨발, 어떻게 그렇게 네 생각만 하고 사냐고. 난 존나 이해가 안 돼!”
열 오른 목소리와 적나라하게 드러낸 경멸에 태성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와 이런 식으로 대적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제 처지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대가리에 든 게 이수화밖에 없으니, 저는 그냥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아. 그 사실이 너무나도 좆같았다.
“하지 마, 그럼.”
“…….”
“이해하지 말라고.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태성은 무감하게 짓씹었다.
“바라지도 않아, 이제.”
툭 내뱉고는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찌푸린 눈가가 저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멀미가 나서 토할 것만 같았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아……. 씨발, 진짜.”
하지만 곧 낮게 뇌까리는 욕설에 걸음을 멈추었고.
“너 존나 질린다.”
단 한 마디 말에 끝도 없이 추락했다.
“…….”
태성은 제 귀를, 눈을 의심했다. 저를 경멸하듯 바라보는 시선과 딱딱한 어조가 너무도 뾰족하게 가슴을 쑤셔 댔다. 선명했기에 더 현실 같지 않았다.
“그래, 네 좆대로 해라. 나도 더 얘기하기 싫으니까.”
우영은 정말로 아무 미련도 없는 듯,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태성의 상체가 살짝 흔들렸다. 굳어 있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질린다고? 내가?
경직된 태성의 낯빛이 희게, 그리고 새파랗게 물들었다. 가슴 부근이 어릿하게 쓰려 와 저도 모르게 교복 셔츠 위를 살짝 감싸 쥐었다.
‘존나 질린다.’
단 다섯 글자에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질린다. 질린다. 질렸다. 설마, 혹시나 했으나 제 걱정이 딱 맞아떨어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그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우영이 내뱉은 단 한 마디가 온종일 그를 괴롭혔다. 수업 시간에도, 학원 가는 길에서도, 그림을 그릴 때도, 우영의 질린다는 소리만 수없이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질린다는 말은 싫증이 났단 소리였다. 싫증이 났다는 건, 이제 더는 저를 보고 싶지 않다는 소리였다. 생각을 마치는 순간 숨이 막혀 왔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제게 웃어 주던 권우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과거의 그는 어디에도 남아 있질 않았다. 모조리 이수화에게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생애 처음 맛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태성의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는 당혹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짐작만 하던 일이 덜컥 찾아오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날 이후로 우영은 태성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말을 걸기는커녕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주시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쳐다보지 않았고, 충동적으로 따라 나간 화장실에서도 급하게 나가 버리곤 했다.
우영은 고의적으로 그를 회피하고 있었다. 정말 그대로 친구 사이를 끝내 버릴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약 이 주간의 시간 동안 태성은 패닉에 빠졌다. 뛰어난 머리와 그간의 꼼꼼한 대비가 없었더라면 수능을 완전히 망쳐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의 컨디션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열아홉 인생에서 가장 큰 혼란을 겪은 기간이었다.
[우영이: 수능잘봐라 07:15]
그러니 수능 날 메시지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태성은 제 눈을 의심했다. 메시지를 다시 올려 보고 또 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폭풍 같은 안도가 밀려들었다. 저도 모르게 잇새로 짙은 숨이 샜다.
……그래. 권우영이 저 없이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답장하려 손을 움직이는 순간, 이성이 그를 막아섰다.
그제야 울컥 괘씸한 마음이 차올랐다. 근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생활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구는 그가 미웠다. 계속 저를 무시하고 피했으면서, 언제 연락해 올지 간만 보다 결국 수능 메시지 하나로 퉁 치려는 수작이 눈에 훤히 보였다.
하여 태성은 답장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손쉽게 화해를 받아 줬다간 다음에 또 똑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참기로 했다. 그러나 전보다는 훨씬 편안해진 마음으로 시험에 임할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는 남기혁을 닦달하여 우영의 성적을 대강 유추하였다. 가채점 점수가 뜬 새벽에도 잠든 남기혁을 깨워 그의 점수를 물어보게 시켰다.
제 점수는 예상했던 대로였고, 우영 또한 잘 봤다는 소리를 전해 왔다. 모든 일이 원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저와 우영의 틀어진 사이만 아니라면.
이제 시험은 끝났고,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그와의 사이를 전처럼 돌려놓아야 했다.
태성은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졌다. 성의 없는 메시지 한 통에 그간의 앙금을 쉽게 풀었다간, 언제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우영과 저는 평생 함께 갈 친구니까, 무엇보다도 서로를 아껴 주고 위해 주어야 할 사이였으니까. 다시는 그딴 말을 쉽게 꺼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질린다고 했다. 제게 권태를 느낀다면 그런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꺼져 주면 될 일이었다. 방학 기간 떨어져 있을 때마다 그랬듯이, 제게 자연스레 보고 싶단 소리를 할 때까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딱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때마침 어머니가 입학 전 회사 인턴십 과정에 관한 말을 건넸고, 태성은 큰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이번에 갈 곳은 뉴욕 맨해튼이었다. 시차가 반나절이나 나는 바람에 그가 가 본 곳 중 가장 최악으로 꼽던 곳이었다. 하나 이번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 있다 보면 제가 먼저 찾아갈 것 같았고, 시차가 나지 않으면 먼저 연락을 할 것 같았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우영과 했던 약속이었다. 12월 31일, 성인이 되는 날 단둘이 여행을 가자던 약속이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적어도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했다. 인고의 시간이 길고 쓸수록 열매는 달큼할 것이고, 끝은 빛을 발할 것이다. 난생처음 틀어진 이 관계가 견고하게 자리 잡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우영에게 일언반구 없이 훌쩍 떠나온 맨해튼은 지독하게 추웠다.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린 날씨가 이어졌다. 평상시 추위를 많이 타는 태성에게는 유독 더 춥게만 느껴졌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잿빛 거리는 분주했고, 바쁘게 나다니는 사람들은 무감한 시선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높은 하늘은 파랗고 쾌청했다. 노랗게 쏟아지는 햇살은 여전히 제 뒤를 따라왔고, 그는 늘어진 그림자에 종종 시선을 빼앗기고는 했다.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에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러갔다. 한 번씩 억누르기 힘든 충동이 일 때면 그와의 지난 메시지들을 읽거나, ‘권태기를 극복하는 연인들’ 따위의 서적을 진지하게 읽기도 했다. 어차피 친구든 연인이든 사정은 비슷할 거란 생각이었다.
새로 산 수십 권의 서적들은 전부 비슷비슷한 것들을 전하고 있었다. 주된 주제는 ‘애인보다 제 생활에 집중하기’였다. 읽다 보면 자신은 매우 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태성은 누운 채로 읽고 있던 책을 얼굴 위에 툭 덮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함께 뛰던 날이 떠올랐다. 꽃잎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던 벚나무 아래를 걷고, 주황빛 노을이 드리운 하굣길의 마른 공기도 따라 생각났다. 고요한 골목을 터벅터벅 가르던 발소리와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를 떠올릴수록 음울한 그늘만 얼굴에 드리웠다.
우영은 거짓말처럼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내심 한 번쯤은 연락하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는 무심하기만 했다.
권우영, 뭐 하고 살아? 내 생각은 해? 보고 싶지는 않아? 혹시 아직도 내가 질려? 그래서 연락 안 하는 거야?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아프도록 이를 악물고 있었다. 태성은 얼굴 위의 책을 툭 내리곤 덮어 버렸다.
참자, 참자. 우영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처음 맞은 위기였다. 무릇 이런 일에선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