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2/21)
  • 2.

    “남도건설 남기욱 사장, 곧 구속 영장 발부된답니다.”

    교복 넥타이를 매던 태성이 시선을 들었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정지철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대신 태성을 돌봐 주는 남자였다.

    “기혁 군 아버지요.”

    덧붙이는 말에 태성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몰라서 쳐다본 게 아니었다.

    “왜요?”

    태성의 물음에 그가 고요히 다가왔다. 시선은 살짝 삐뚤어진 넥타이에 닿아 있었다.

    “글쎄, 아직 정확한 이유까진 모르지만……. 대부분 이유는 비슷하니까. 비리, 횡령, 배임 개중에 하나겠죠.”

    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무뚝뚝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정지철이 태성의 넥타이를 느리게 고쳐 매 주었다.

    “어머니가 걱정이 많으십니다. 기혁 군이 방황할지 모르니, 당분간은 거리를 좀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순 표정을 굳힌 태성이 그의 손길을 탁, 쳐 냈다.

    “알아서 해요.”

    싸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는 등을 돌렸다. 이른 아침 등굣길은 찝찝하기만 했다.

    ***

    체육 수업,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개인기를 보여 주겠다던 남기혁이 무릎으로 축구공을 튕겼다. 고작 한 번 튀어 오른 공이 볼품없이 바닥을 굴렀다. 계단에 앉아 지켜보던 우영이 손을 휘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야, 나와 봐.”

    “아, 왜 안 돼? 집에서 할 땐 됐는데!”

    “씨발, 누가 그걸 그렇게 하냐?”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공을 발로 툭 건드리자, 빨려 들어가듯 튀어 오른 공이 우영의 발등 위에서 가볍게 통통 튀었다.

    “봐라, 디딤, 발, 새끼야.”

    뛰듯이 양발을 번갈아 쳐올리자, 위로 솟구친 공이 무릎 위에서 세 번, 가슴께에 맞고 다시 무릎으로 내려와 발등으로 떨어졌다. 남기혁이 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능숙한 동작이었다.

    “와, 씨! 존나 잘하네?”

    지켜보던 남기혁이 투덜거렸다. 턱을 치켜든 우영이 가슴께로 공을 튕기며 자신만만한 얼굴을 했다.

    “기혁아. 형이 공 가지고, 어? 못하는 거 봤어?”

    한쪽 입술 끝이 올라가 있다. 이어지는 동작에서도 공은 한 번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아! 재수 없어 권우영.”

    그가 불퉁한 얼굴로 흙바닥을 툭 걷어찼다. 가만히 우영을 지켜보던 태성의 눈길이 남기혁에게 닿았다.

    놈은 단순하다. 생각 없이 실실대는 걸 보니 아직 집안 사정을 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한 새끼.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찌푸린 시선이 문득 옆에 앉은 이수화에게 옮겨 갔다. 그는 머저리처럼 입을 헤 벌리고 우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반짝이는 커다란 눈이 묘한 빛을 뿜었다.

    일순 태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화야.”

    “으, 응?”

    우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이수화의 시선이 옮겨 왔다. 태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눈 좀 똑바로 떠.”

    말하며 생긋 눈웃음 짓는다. 다정한 미소와 상반되는 말에 이수화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 모습조차 여간 재수 없는 게 아니었다.

    금세 무표정하게 돌아온 태성이 고개를 돌렸다. 주변엔 남기혁과 이수화뿐만 아니라 멀리 앉은 다른 놈들도 우영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주변에 벽을 쳐 놓을 수도 없고.

    태성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여간 이런 곳에서 매력 발산하는 권우영이 제일 문제였다.

    ***

    정지철의 폭탄 발언 이후에도 평온한 날들이 며칠간 이어졌다. 복잡하게 얽힌 업계 어른들이 늘 그러듯, 어쩌면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순탄치 않았다. 딱 그 생각을 할 때쯤 남기혁이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일이 터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걸려 온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에서, 남기혁 집안의 분위기가 무척 좋지 않다는 걸 듣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은 걸 자꾸 알려 주려는 그녀도,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훈수를 두는 정지철도 전부 다 싫었다. 좆같은 인생에서 좋은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야. 기혁이 또 안 왔어?”

    태성이 시선을 들었다.

    “뭐, 일 생긴 거 같던데.”

    “일? 무슨 일?”

    놀란 듯 눈을 치뜬 우영이 되물었다. 태성은 책상에 턱을 괸 채 가만히 창밖을 보았다. 단순한 성격이니 티가 날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무작정 학교까지 빠질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냐니까?”

    “자 자, 그만 떠들고 자리에 앉아라!”

    선생의 고함에 우영의 얼굴이 심상찮게 굳었다.

    ‘뭔데.’

    태성은 노트 위에 글자를 적는 손가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실대로 얘기해 봐야 걱정만 할 것이 뻔했고, 그 꼴을 굳이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는 걸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 회사에 일 터졌대.’

    ‘아버지? 왜?’

    ‘나도 자세히는 몰라.’

    ‘집에 찾아가 봐야 하나?’

    ‘안 그러는 게 좋을걸.’

    ‘왜?’

    ‘지금 걔네 집 분위기 안 좋거든. 존나 구림. XX’

    글자를 읽은 우영의 얼굴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태성은 그런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 시선을 거뒀다.

    이 관계에 비밀 같은 건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제가 원하는 만큼 똑같이 하는 것이 마땅했다.

    ***

    점심시간, 태성은 밥을 먹은 이후 사라진 우영을 찾아 느릿느릿 걸었다. 비도 오고 날씨도 흐린데 어딜 간 건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교실에서 나올 때 이수화가 앉아 있는 걸 확인 했으니 함께 나간 것도 아니었다.

    교내를 한 바퀴 둘러본 그는 허탕을 치고 다시 교실로 향했다. 오늘따라 축축한 습기가 가득 찬 복도는 습했고, 창문 너머 거무죽죽한 날씨도 구리기만 했다. 역시 햇살이 필요하다.

    “남기혁이랑 이수화?”

    “왜?”

    “몰라, 뭐 존나 살벌하게 얘기하던데.”

    불현듯 귓가를 스치는 대화에 태성이 시선을 들었다. 두 명의 아이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그의 곁을 지나갔다.

    태성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교실 앞문으로 들어섰다. 시야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떠드는 벌레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창문가에 서 있는 두 놈을 보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이수화와 남기혁의 뒷모습이었다.

    “이 씨발 새끼야!”

    돌연 우렁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이수화의 멱살을 쥔 남기혁이 덤벼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태성이 눈을 치떴다. 이수화, 남기혁. 둘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드는 꼴을 보니 단단히 맛이 간 듯했다. 앞에 앉은 벌레 새끼들은 킬킬대며 구경하기 바빴다. 존나게 한심했다.

    등신들.

    눈가를 찌푸린 태성이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소리쳤다.

    “남기혁!”

    뒷문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온 우영이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걸음을 옮기려던 태성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야! 나와, 그만해! 뭐 해, 이 새끼야!”

    놀란 우영이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떼어 냈다. 거친 손길에 남기혁이 나가떨어졌다. 쿠당탕, 밀려난 그가 책상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모든 일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수화, 괜찮아?”

    우영이 창문틀에 누워 있던 이수화의 어깨를 감싸 일으켰다. 적막한 교실 안에 옅은 흐느낌이 울려 퍼졌다.

    “권우영, 비켜.”

    “뭐 하는 짓이냐?”

    “안 비켜?”

    “씨발, 내가 먼저 물었잖아. 뭐 하는 거냐고!”

    “보고도 몰라? 저 새끼랑 할 말 있으니까 비키라고!”

    버럭 소리친 남기혁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뻗은 우영이 남기혁을 온몸으로 막아 내며 소리쳤다.

    “야! 이게 지금 말로 하는 거냐? 씨발! 좀 진정해, 일단!”

    우영은 필사적이었다. 건조해진 태성의 시선이 우영과 남기혁을 스치고, 울고 있는 이수화에게 닿았다. 불현듯 아득하고 불쾌한 기시감이 찾아왔다. 지켜보는 태성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술렁거리는 패거리들의 속삭임과 교실 밖에서 수군대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우영을 향해 있었다. 권우영이 벌레 같은 놈들의 씹고 뜯는 요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재밌냐? 처앉아 있지 말고 가서 문이나 닫아, 씨발!”

    우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런 비명 같은 윽박은 살면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남기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매섭게 달려들었고, 우영이 그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과열된 둘 덕에 교실은 난장판이었다.

    “아, 좀! 하지 말라고, 씨발아!”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기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아……. 야, 정신 안 차려? 안 쪽팔리냐? 다 보는 데서 뭐 하는 짓거리냐고!”

    우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 장난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는 채였다.

    태성의 눈가가 꿈틀 움직였다.

    권우영이 남기혁을 때렸다. 분노로 일렁이는 눈동자는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두근거렸다. 별안간 벌어진 상황에 속이 메슥거리고 울렁거렸다. 삽시간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 시발……. 너 지금 이수화 편드냐?”

    숨을 몰아쉬던 남기혁이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 냈다. 순간 태성은 불쾌의 원인을 그의 말 한마디에서 찾아냈다.

    권우영이 이수화의 편을 들어 주고 있어서. 모든 일의 원인이 전부, 뒤에서 처울고 있는 이수화 때문이어서.

    벼락처럼 치달은 깨달음에 태성의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우두커니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기름칠도 못 한 사고 회로가 삐걱삐걱 낡은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왜, 이수화 편을 들지? 먼저 이야기는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싸웠는지도 모르면서, 왜 저 새끼를 패고…….

    상상 속에서 태성은 돌연 남기혁이 되었다. 그가 이수화의 멱살을 쥐었고, 뛰어온 우영이 그런 자신을 밀쳐 내며 화를 냈다. 환상은 파노라마처럼 물 흐르듯 이어졌다. 상상 속의 권우영은 제게도 화를 냈다. 우는 이수화의 어깨를 감싸고, 냉랭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 모든 상황에 이질감조차 없었다.

    태성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잇새론 하,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상상조차 진짜로 만들어 버리는 명백한 현실에 속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간 맹신해 왔던 서로의 끈끈한 우정 따윈 온데간데없었다.

    문득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영과 눈이 마주쳤다. 열이 올라 잔뜩 상기 된 얼굴이 왜인지 보기 싫었다. 한 번도 우영을 보기 싫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그랬다. 이수화와 저렇게 붙어 있는 꼴은 더더욱 꼴 보기도 싫었다.

    입을 다문 채 짙은 숨을 내쉰 태성이 뒷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영이 원하는 대로 옹기종기 들러붙은 놈들을 쫓아내기 위해 문 앞에 섰다.

    “계속 볼 거야?”

    무표정하지만 살기 어린 시선에 모두가 뒷걸음질했다.

    “안 볼 거면 닫을게?”

    태성은 망설임 없이 쾅, 문을 닫았다. 소란스럽던 주변이 적막해졌다. 등골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야, 다쳤어? 어디 아파?”

    등 뒤에서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어린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욱신 쑤셨다. 자신과 우영이 싸운 게 아닌데도 자꾸만 묘하고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왜? 더 이상 권우영한테 중요하지 않아질까 봐? 남기혁과 똑같은 그저 그런 처지일까 봐? 그것도 아니면, 이미, 이미 이수화보다 못한 존재가 됐을까 봐서?

    ……씨발.

    욕을 짓씹은 태성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훌쩍이는 이수화를 들여다보던 우영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행동엔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우두커니 선 남기혁을 그대로 등진 채,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교실을 나섰다. 그저 이수화의 팔목만을 꽉 쥐어 잡은 채로.

    우영이 나간 후에도 태성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목이 콱 막혀서 숨이 옅게 흘렀다.

    “기혁-. 괜찮아? 권우영이 너무하네.”

    남기혁에게 다가간 박진우가 능청스레 물었다. 남기혁은 답하지 않은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께를 부풀리며 심호흡하다, 곧 홱 하고 몸을 돌려 뒷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문고리를 잡는 찰나 앞에 서 있던 태성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가.”

    나직한 목소리에 남기혁이 시선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축축한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는 태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집에.”

    말하며 이를 꽉 물었다.

    태성은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빌어먹을 남기혁의 모습과 제 처지가 다를 바 없다는, 그런 좆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혼란스럽게 머리를 헤집던 가시들이 가슴으로 내려와 박혔다. 심장을 괴롭히던 것들이 명치를 쑤셔 대고, 다시 올라와 또 목구멍을 아프게 긁어 댔다.

    이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권우영의 세상에선 자신이 응당 1등이어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제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스스로 비켜 주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는 덜컥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막연하고 텅 빈, 두려운 느낌.

    가만히 서 있던 태성은 무엇에 이끌리듯 드르륵,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영이 있을 보건실로 성큼성큼 빠르게 보폭을 좁히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꽉 들어차 더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당장 그를 봐야 했다. 그래야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괴이한 감정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보건실에 다다르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여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서 세수해. 네가 매미냐?’

    시야에 들어온 건, 우영을 꽉 끌어안은 이수화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우영의 모습이었다.

    심장이 또 덜그럭 소리를 냈다. 다정한 모습에 끔찍한 기분이 몰려왔다.

    태성은 자리에 멈춰 섰다. 우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푹 파묻은 이수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교복 셔츠가 구겨질 정도로 꽉 쥔 팔이 필사적이었다. 마치 우영이 남기혁에게서 그를 지켜 낼 때와 같이. 서로가, 서로를.

    “빨리.”

    시선을 천장에 두고 턱을 젖힌 우영이 손끝으로 이수화의 뺨을 두드렸다. 곧 고개를 숙여 그를 응시한다. 스르르 고개를 든 이수화와 우영이 눈을 마주했다.

    사이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친구, 아니 그 이상의 공기가 진득하게 사방을 메웠다. 어느 누가 보아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이상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깨닫는 순간,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 나갔다.

    “수화가, 우리 우영일 많이 좋아하나 봐.”

    불현듯 뱉은 말에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는 눈을 치켜뜨곤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왔어? 기혁이는?”

    마주칠 일 없는 타인을 보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거리낌 없이 묻는 말에 태성의 낯에 반항기가 어렸다. 아무도 없는 보건실에서 남자 새끼랑 부둥켜안고 있던 주제에, 우영은 당혹의 기미라곤 없이 뻔뻔하기만 했다.

    “집 갔어.”

    “뭐? 아이씨. 그 새끼 좀 잡고 있지, 그냥 보내면 어떡하냐. 더 삐지기 전에 달래 줘야 하는데.”

    그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태성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제가 나타난 걸 알면서도, 이수화는 진드기처럼 들러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그러니까.”

    “…….”

    “기혁이 안 달래 주고 넌 뭐 하는데, 우영아?”

    딱딱하게 경직된 태성이 느릿느릿 다가갔다.

    서서히 좀먹히던 자신의 자리가 순식간에 뒤집혀 버렸다. 지금 우영에게 자신은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자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울타리 안에는 제가 아닌 이수화가 있었다. 씨발. 욕이 절로 나왔다.

    우영의 허리를 감은 희멀건 팔을 잡아 부러뜨리고 싶었다.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둘 사이를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 불안정한 충동이 막무가내로 솟구쳤다. 머릿속은 우영에게서 당장 이수화를 떼어 내란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보면 모르냐? 질질 짜는 놈 달래 주고 있잖아.”

    대수롭잖게 돌아온 답에, 꽉 쥔 주먹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감정보다 앞선 이성이 태성을 막아섰다.

    “그러니까 그걸 네가 왜, 달래는데. 씨발…….”

    화를 내는 대신 꽉꽉 눌러 담은 말을 뱉었다.

    멋대로 돌아간 상상 속에서 제게 소리치는 우영이 보였다. 겨우 지킨 손바닥만 한 자리까지 끝내 뺏기고야 마는 미래가 펼쳐졌다. 지금은 제멋대로 굴 때가 아니었다.

    “야, 이수화. 안 갈 테니까 놔 봐.”

    “…….”

    “빨리.”

    태성을 흘긋 바라본 우영이 이수화의 팔목을 쥐었다. 약하게 흔드는 다정한 손길에 아득 이가 갈렸다. 둘 사이로 피어오른 선연한 의심의 불씨는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끔찍하기만 했다.

    “오늘 수요일인데, 우영아.”

    “…….”

    “점심시간 숙어 스무 개 외우기. 했어?”

    그러니 바득바득 꼬투리를 잡아내고, 저 개 같은 놈에게서 권우영을 빼낼 방법을 떠올리는 수밖에.

    “아. 하루 정돈 괜찮아, 새끼야.”

    우영이 눈치 없이 투덜거렸다. 태성은 여전히 그를 감싸 안고 있는 이수화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내 짙은 숨을 삼켜 내곤 다시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공부도 안 하고, 남기혁도 내팽개치고.”

    “…….”

    “왜 여기서 좆같이, 이러고 있냐고. 시간 아깝게.”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일순 세 사람 사이로 묵직한 적막이 흘렀다. 마치 짜 맞춘 듯 누구 하나 말을 잇지 않았다.

    돌연 침묵을 깨부수듯 소란한 수업 종이 울렸다. 천장을 힐긋 바라본 우영이 이수화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그는 시커멓게 탄 태성의 속 따윈 모르는 듯했다.

    “야, 일어나. 가지 말라며. 같이 가자는 거 아니야?”

    우영의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이수화가 풀썩 내려앉았다. 틈을 놓치지 않은 우영이 얼른 그를 붙들었다.

    “아, 뭐 하세요. 설마 업고 가라는 거 아니지?”

    “……아, 아니…….”

    좆같이 빤한 여우 짓에 태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수화는 순진한 우영의 가장 약한 틈을 파고들어 조금씩 꾀어내고 있었다. 제 앞에서도 이따위로 구는데, 뒤에선 몇 개의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른 세수해. 기다릴 테니까.”

    우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태성은 저도 모르게 그를 노려보았다. 돌연 시선을 느낀 우영이 입을 모아 ‘왜’라고 물었다. 눈을 치켜뜬 얼굴은 저와 달리 평온하기만 했다.

    왜냐고?

    물음에 답은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저조차 알 수 없었다.

    ***

    교실에 돌아오고 나서도 태성은 난잡한 혼란 속에 잠겼다. 눈앞엔 서로를 절절하게 끌어안고 있던 권우영과 이수화의 모습만 자꾸 아른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피가 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제 감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5교시, 6교시, 7교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우영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태성 또한 우영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떤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먼저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다. 치기 어린 마음이자 반항이었다. 더 생각하기도 싫었다.

    마지막 종이 치자마자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간 내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잡념들이 거미줄을 치고 자신을 꽉 옥죄어 왔다. 숨이 막혔다. 수업 내용은 듣지도 않은 채였다.

    “고태성.”

    돌연 따라 나온 우영이 그를 붙들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던 태성이 걸음을 멈추곤 우영을 쳐다봤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이 그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남기혁 왜 그런 거라는데?”

    “나도 몰라.”

    “뭐? 아까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

    “응.”

    “왜?”

    “뭐가?”

    부러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묻고 싶은 건 우영보다 자신이 훨씬 많았으나 그는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늘 또렷이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던 그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짜증이 벌컥벌컥 솟았다.

    “진짜 아무 말 안 했어? 남기혁이? 한 마디도?”

    “응. 안 했는데.”

    “하……. 씨발, 뭐지 도대체.”

    우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태성은 가만히 생각에 잠긴 그를 주시했다. 밖으로 튀어 나가지 못한 물음들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걔네 둘이 싸운 이유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왜? 이수화 때문에? 아니면 남기혁 때문에?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데. 우영아, 권우영.

    “이수화가 뭘 잘못했겠지.”

    “…….”

    “남기혁이 괜한 일로 그럴 놈은 아니잖아.”

    “…….”

    “아니야?”

    태성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또렷하게 굳은 시선은 우영의 반응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어. 그렇긴, 한데.”

    아니나 다를까 여과 없이 드러나는 표정에, 머뭇거리며 깜빡이는 눈에, 종일 머릿속을 드세게 쑤셔 대던 의심이 윤곽을 드러냈다.

    그러니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우영아.”

    슬쩍 시선을 든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태성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수화 너무 싸고돌지 마.”

    “왜?”

    “몰라서 물어?”

    “어. 뭔데?”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에 태성의 입매가 굳었다. 종일 속으로만 하던 생각이 마구잡이로 얽히다, 입 밖으로 세차게 쏟아져 나갔다.

    “걔가 너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콜록, 뭐?”

    “걔가, 너 좋아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우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사레들린 기침을 시작했다. 찡그린 눈썹과 꾹 다물린 입술, 경직되어 가는 낯에 홀로 내린 추론이 선명해졌다.

    “아…….”

    깨달은 순간 또 덜컥 심술이 났다. 조각조각 다 부숴 버리고 싶은 파괴적인 충동이 덜그럭거렸다.

    “좀 좆같아서 상상도 하기 싫긴 하지?”

    태성은 부러 웃음을 머금었다. 떠보듯 던진 말은 벌써 몇 차례에 걸쳐 그에게 내는 문제였다. 권우영 본인은 모르고 있을, 고태성 자신만의 시험이었다.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왜?”

    “아니, 씨발…….”

    “좆같은 걸 좆같다고 하지 그럼 뭐라 그래.”

    별말이 아닌데도 가슴이 메슥거렸다. 떠올리는 순간 치닫는 불쾌한 느낌 때문이었다.

    “아까 너 끌어안고 있는 거 보니까, 존나……. 이상해 보이던데.”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왔다. 하나뿐인 친구가 남자랑 얽혀 뒹군다는 상상을 하자마자 토할 것만 같았다.

    순간 태성은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제 성향을 깨달았다. 사실 자신은, 남자 둘이 붙어먹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지독한 호모포비아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영아.”

    “…….”

    “그런 좆같은 일 벌어지기 전에, 조심하란 소리야. 응?”

    태성은 애써 목구멍을 조였다. 그의 어깨를 살며시 쥐고, 얼어붙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괜히 씨발……. 소름 끼치잖아.”

    단 한 마디 말에 권우영의 눈이 지독하게 흔들렸다. 확연하게 그늘이 드리운 낯빛 위로 상처받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왜 그런 눈을 해?

    권우영. 왜 그딴 짓을, 더러운 생각을 해?

    짧은 신음을 내뱉은 우영이 태성의 팔을 탁 뿌리쳤다. 팽개쳐진 손등이 따가웠다. 태성의 시선이 그늘진 우영을 주시했다. 그는 분명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그가 등을 돌려 빠르게 도망쳤다. 그렇기에 태성은 제 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우영이, 이수화를 진실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이수화 또한 그를……. 아, 씨발.

    ***

    태성은 잠잠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쓸모없는 놈들의 메시지가 연달아 빨간 점을 갱신했지만, 자신이 기다리는 건 그딴 새끼들의 연락이 아니었다.

    우영에게서 또 소식이 없었다. 자신도 보내지 않았으니 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교 후 이런 식으로 단 한 통의 메시지도 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정작 기다리는 이에게서 연락이 없으니, 저를 찾는 수많은 연락에도 핸드폰이 잠잠하게만 느껴졌다.

    학원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어둡게 굳은 그의 낯빛과 제 손을 내치던 따가운 손길도 덩달아 생각났다. 그는 분명 제게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러나 굳이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세게 맞지도 않은 손등이 괜스레 따끔거렸다.

    “자. 문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는 적절한 묘사와 추상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조형적으로도 폭넓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해. 지금 나눠 주는 문제지 읽어 볼까?”

    가운데에 서 있던 선생이 앞으로 다가와 시험지를 나눠 주었다. 이젤 앞에 앉아 있던 태성은 시험지를 받아 들며 검정 앞치마 주머니 안에 핸드폰을 넣었다.

    속이 이렇게 엉망인데도 빡빡하고 지루한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전부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제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이깟 일 때문에 흐트러질 순 없었다.

    태성은 빳빳한 프린트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본문엔 짜증이 날 정도로 유치한 시구절이 적혀 있었다.

    『어쩌면 나는,

    네가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꼭 맞물린 우리에겐

    어긋남이 없음을

    늘 확인하고 싶었지.

    하지만 모든 것이 틀어진 지금

    이제 와 무엇을 할까.

    쓸모없는 나라도

    새까맣게 태워

    네 가슴을 식혀 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오지 않을 이 자리에서

    차라리 타 버렸으면 해.

    언젠가

    재라도 되어

    네게 닿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한순간도 내 사랑엔

    거짓이 없었음을

    고하고 싶다.』

    시를 읽어 내려가던 태성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이딴 게 다 뭐라고.

    저를 태워 상대를 달래야 할 만큼 애틋한 감정 따윈 알고 싶지도, 해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전부 쓸모없고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더럭 기분이 불쾌해졌다. 새카만 감정들이 다시 드글드글 번지기 시작했다.

    “본문의 자체적인 심상과 분위기를 파악해 보자. 짝사랑을 주제로 쓴 시지만, 화자는 설렘과 기대보다는 체념과 그리움을 더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어. 이럴 때는 어떤 구도를…….”

    드르륵, 별안간 그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니 태성아?”

    선생이 놀란 듯 물었으나, 태성은 대꾸 없이 앞치마 끈을 풀어 벗었다. 느닷없는 행동에 수십 개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아파서요.”

    태성은 전혀 아프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묵묵히 앞치마를 의자 위에 툭 던지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학원 문을 나서는 걸음은 불쾌하기만 했다.

    ***

    목적지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졌다. 태성은 여전히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학교고 학원이고, 종일 권우영 생각만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기실 지금 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제 본능이 향하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냥, 우영의 얼굴을 보면 전부 해결될 것 같았다. 종일 속을 시끄럽게 달구는 이 감정이 가라앉으려면 권우영이 필요했다.

    시간은 이제 열한 시였다. 슬슬 우영이 체육관에서 나왔을 시간이기도 했다. 먼저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말할까, 아니면 메시지를 보낼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가는 동안에 또 마음이 변할지도 몰랐다. 사실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반대의 생각들이 이리저리 맞부딪쳤다.

    그는 자주 가던 우영 집 앞의 놀이터로 향했다. 우영과 처음 인사를 했던 곳이자 종종 밤마다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좀 더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도, 저에게도 의미 있는 곳이었으니까. 우리가 처음 말을 나눈 장소니까.

    목적지로 향하는 골목은 적막하기만 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저조해지는 기분에, 애써 머리를 비운 채 놀이터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발걸음 소리만 가득했던 사방에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두런거리던 대화가 다소 격한 어조로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곳에 이미 누군가 있었다.

    놀이터를 주시하던 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어른거렸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그들이 권우영과 남기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에! ……잖아!”

    투덕거리는 둘 사이로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지만, 가로등 아래 있는 그들과 달리 그늘진 어둠이 태성을 가려 주었다.

    “이수화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말이라도 하던가!”

    난데없는 고함에 태성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은 서로 지독하게 화만 내기 바빴다.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감정이 고양된 상태였다. 와중에 귓속을 쑤셔 댄 것은 이수화 세 글자였다.

    “씨발, 몰라. 그냥 싫어! 싫으니까 놀지 마!”

    “아!”

    쾅, 우영이 그네 기둥을 걷어찼다. 한껏 화를 쏟아 내는 둘의 고함이 고요한 동네를 가득 채웠다. 태성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쏟아지는 몇 마디만으로도 그들이 지금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너, 설마 이수화 좋아하기라도 하냐?”

    씨근덕거리는 남기혁의 말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새끼 때문에 네가. 고태성 말고는 존나 관심도 없던 놈이, 그 씨발, 애들이, 씹……. 이수화 안경 벗으면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나한테 너 얼빠 게이 아니냐고 물어보던 거, 내가 아니라고, 씹. 넌 모르잖아. 씨발,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졌다. 어차피 듣지 않아도 빤히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늘 그랬듯, 이수화 때문이었다.

    “그게 뭐! 씹, 지금 그게 왜 중요한데!”

    우영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런 거친 고함은 들어본 적 없었다.

    “너 설마, 설마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냐?”

    남기혁의 떨리는 목소리에, 툭 고개를 숙인 우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시발.”

    적막 속에 긴장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둘 중 누구보다 자신이 더 긴장하고 있었다.

    태성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별안간 귓구멍을 처막고 싶었다. 앞으로 권우영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자신은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면?”

    “…….”

    “좋아하면 안 되냐?”

    낮은 목소리에 태성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잇새로는 하, 헛숨이 터져 나갔다.

    그는 우두커니 선 채로 멀찍이 보이는 우영을 응시했다. 종일 속으로만 되새기고 곱씹던 문제가 직접 묻기도 전에 답이 되어 돌아와 버렸다.

    권우영이, 이수화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좋아하면 안 돼? 왜 안 돼? 내가 좋다는데 씨발, 그 씹새들이 뭐 보태 주기라도 했어? 그 개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내가 좋다는데! 그게 도대체! 씨발! 무슨 상관인데!”

    태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격정적인 고함에 또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하나 자신은 제 표정이 어떤지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멍청한 남기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떨어 댔다. 태성은 찬찬히 굳은 시선을 돌려 분노에 휩싸인 우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앞으로 더 다가서지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야, 너 그냥 가라.”

    별안간 툭, 뇌까린 말이 마치 제게 하는 소리 같았다.

    “꺼지라고……. 지금 진짜 무슨 짓 할지 모르겠으니까.”

    차가운 음색에 숨이 막혔다. 날카로운 것이 폐를 쑤셔 대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저를 아프게 할퀴고 긁으며 스쳐 지나갔다.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제게 하는 말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기혁이 부리고 있는 억지는, 모두 고태성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들이었으므로.

    좀 더 빨리 찾아왔더라면, 남기혁보다 제가 먼저 나타났더라면, 지금 저 앞에서 초라하게 작아지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을 테니까.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흩어졌다.

    “권우영, 존나……. 너, 진짜 너무하다.”

    애달픈 목소리와 함께 적막이 흘렀다. 태성도 따라 입을 다물었다. 무의식 속에서 깨친 생각에 머릿속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하……. 씹.”

    “…….”

    “말 심하게 한 건 미안해, 미안한데. 하아……. 나도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그러니까. 집에 들어가. 그냥 내일 다시 얘기해.”

    우영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겨우 억누른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체 못 할 화를 겨우 인내하고 짓누르는 것이 빤하게 보였다. 그의 작은 변화도 눈치채는 태성이 그런 걸 모를 리 없었다.

    “기혁아. 알았으니까, 일단……. 일단 들어가.”

    한껏 건조해진 목소리에 태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남기혁이 아니라 자신이었어도, 제게도 꺼지라고 했을까.

    문제를 제시하자마자 답을 알았다. 그러지 않을 리 없었다. 이제 고태성은 1순위가 아니었으니까.

    삽시간에 그를 덮친 억울함이 마구잡이로 들끓었다. 울컥, 또다시 토기가 몰려왔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린 태성은 주춤주춤 뒷걸음질했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새카만 골목 속으로 잠겨 들었다. 빠르게, 빠르게, 마치 뒤쫓기는 사람처럼.

    바싹 마른 해가 구름 뒤로 숨어 나올 생각을 않는다. 탁한 어둠 속을 질리도록 달리는데도, 밝아질 기미조차 없다. 틀림없이 날은 계속 흐르는데 자꾸만 밤이 찾아왔다. 절망이었다.

    ***

    태성은 잠들지 못했다. 곱씹을수록 역해지는 속에 밤새 화장실만 수십 번씩 들락날락했다. 먹은 것도 없으나 은근한 체기까지 돌았다. 새벽 내내 뒤척이다 결국 밤을 꼴딱 새워 버렸다.

    건조한 눈을 뜨고 등교 준비를 하는 와중, 정지철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남기혁의 아버지를 구속하려는 것이 이수화의 아빠라는 소리였다. 캐슬 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 그가 모르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성의 어머니가 그랬다.

    그제야 지난 일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녀석이었으니 반발심이 일었을 만도 했다. 당시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이 일로 인하여 버튼이 눌린 건 확실했다.

    돌연 우영이 떠올랐다. 이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남기혁은 자신이 유일하게 우영의 옆자리를 내준 놈이었고, 둘은 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적어도 이수화보다는 더 깊은 관계였다. 아직까지는.

    혹시라도 남기혁의 집안이 완전히 망해 버린다면, 그래도 권우영은 이수화를 따라다닐까? 지금처럼 그렇게 대놓고 싸고돌 수 있을까? 끊어 내진 못해도 지금보단 소원해지지 않을까? 친구의 집안을 망하게 한 집 아들 새끼니까?

    아무리 생각을 더 해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한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하나 태성은 곧장 학교로 향하지 않았고, 평소처럼 우영의 집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그의 집 근처 멀찍이 떨어져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짜증이 치미는 순간 등을 돌렸다. 그를 두고 먼저 가려다,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식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하나 뭘 하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간 내키는 대로 살아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일상의 궤도가 아주 엉터리였다.

    끝내 자리를 떠나지 못한 그는, 문을 열고 나오는 우영을 보고 다가갔다.

    발간 눈두덩이 티 나게도 부어 있었다. 누가 봐도 울어서 부은 게 티가 났다. 그깟 일로 남기혁과 다투고 눈물이나 짰을 그를 상상했다.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 더 기분이 상했다.

    하여 다 알면서도 일부러 이유를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게는 입을 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이 둘 사이를 가르고 있었고, 태성은 그걸 부술 능력이 없었다. 체념은 빨랐고, 감정이 썩어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권우영.”

    “…….”

    “너. 똑바로 하고 다녀.”

    태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넥타이를 세게 쥐었다. 이미 그를 제어하기엔 늦었음을 느꼈지만, 끝내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

    처음으로 옆자리의 우영이 거슬렸다. 권우영도, 눈앞에서 사탕 따위를 들이밀며 알짱대는 이수화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놈 다 치워 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우선은 눈앞에 두어야 했다.

    수업 내내 태성은 창밖만 바라보았다. 말간 햇살과 새파란 하늘조차 싫증이 났다.

    가장 친한 친구 놈이 남자를 좋아한다. 그것도 제가 싫어하는 새끼를.

    평온했던 인생에 난데없는 날벼락이 쏟아졌다. 아주 숨 쉴 틈도 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친구가 동성을 좋아하는 게 흔한 일인가? 주변 새끼들은 전부 여자에 눈이 멀어 침을 흘려 댔으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권우영이 여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 왔으나, 그것이 남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왜 내 친구지? 왜 그런 흔치 않은 놈이 하필 권우영인 거지.

    태성은 그간 자신이 쳐 냈던 11명의 여자를 떠올려 보았다. 그 많은 아이 중에 적어도 한 명쯤은 권우영의 마음에 드는 애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이서율 같은.

    제가 막지 않았다면 우영도 평범한 연애를 했을까? 여자를 사귀고, 유치한 사랑을 속삭이고, 야릇한 스킨십도 하는 정상적인 만남을 가졌으려나. 정말로 그랬다면, 적어도 게이란 이유로 이렇게 불편해지는 일은 없었을까?

    이제라도 이서율을 넘겨주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별안간 두 남녀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눈을 마주하고, 키스도 하고, 그러다가, 진짜 사고라도 치면…….

    씨발. 그건 안 되지.

    피임조차 하지 않고 정신 못 차리는 걸레 새끼들이 주변에 널렸다. 그걸 훈장처럼 전시하며 떵떵거리는 한심한 종자들이 지금도 한 트럭이다. 권우영도 남자인데 본능적인 성욕에 눈깔이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하자 또 속이 메슥거렸다.

    생각에 빠진 사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옆에서 뭐라고 떠드는 이수화와 권우영의 말은 무시했다. 이미 가득 들어찬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으니 새로운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신경한 얼굴로 식판을 들고 자리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돌연 시야 아래로 쭉 뻗어 나온 발이 보였다. 찬찬히 내려간 눈동자가 앞서가던 이수화에게 닿았다.

    우당탕! 아니나 다를까 그가 그대로 걸려 넘어졌다.

    “야, 괜찮아?”

    놀란 얼굴의 우영이 크게 물었다. 킬킬거리는 유영재의 목소리 사이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와, 미안. 못 봤다.”

    태성의 시선이 잔반 사이로 넘어진 이수화와 우영에게 닿았다. 탕, 옆 테이블에 식판을 거칠게 내려놓은 우영이 유영재를 쏘아보았다.

    “씨발 새끼가……. 야, 이 씹새야. 돌았냐?”

    그는 굳은 낯빛으로 거칠게 화를 냈다. 차츰 주변이 술렁거리며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또다. 또 시작이었다. 늘 능청스레 웃기나 하던 우영이 이수화 때문에 또 화를 내고 있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우영.”

    태성은 눈가를 굳히고 입을 열었다. 싸움을 말리고 싶은 것도, 무얼 어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이었다. 우영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좋아하는 놈이 괴롭힘을 당하는데 기뻐할 사람은 없을 테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저들끼리 절절 끓는 세기의 사랑을 하는 듯한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야야, 진짜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어쩌냐? 세탁비 줄게.”

    “고태성! 여기 와서 먹어. 권우영 이수화 씻기러 가야 할 거 아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비아냥대는 말에 열이 올랐다. 수십, 수백 개의 눈앞에서 권우영이 작아지는 게 꼴 보기도 싫었다. 이수화 때문에 저 모자란 새끼들한테 그가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 게 화가 났다. 태성은 식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야, 가서 저 개새끼들이랑 먹어라. 난 얘 좀 처리할게.”

    이수화를 부축해 일으킨 그가 순식간에 어두운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냥 혼자 가라 그래.”

    “뭐?”

    “혼자 알아서 하고 오라고 하라고.”

    “아, 뭐라는 거야. 그냥 가서 먹어.”

    “권우영.”

    “…….”

    “같이 먹자고.”

    그래서 억지를 부렸다. 아닌 걸 알면서도, 빤히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그랬다.

    “이따 봐.”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제 말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고, 자신은 이수화보다 못한 놈이 되었다. 분한 마음이 울컥 솟구쳤다.

    “씨발, 쟤네 사귀는 거 맞다니까?”

    “아냐. 이수화가 존나 혼자 짝사랑하고 있을 듯. 태성, 여기 앉아!”

    빈정거리는 말에 딱딱한 시선이 옮겨 갔다. 식판을 들고 서 있던 그는 박진우의 말대로 찬찬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야, 권우영 존나 오버하는 거 아니냐? 왜 저래?”

    유영재가 실실거렸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태성이 낮게 지껄였다.

    “그러게.”

    그리고 들고 있던 식판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유영재의 식판 위로 국과 반찬들이 후드득 떨어지며 마구잡이로 섞였다. 놀란 아이들이 몸을 뒤로 물렸다.

    “넌 왜 그렇게 오버해?”

    태성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얼굴을 구긴 유영재가 고개를 들어 당혹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

    “세탁비 줄까?”

    삽시간에 적막이 흘렀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태성은 테이블 한가운데에 제 식판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그가 등을 돌렸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밖으로 나간 태성은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었다. 손에 묻은 음식물은 지워졌으나, 더럽고 찝찝한 기분은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지질 않았다.

    마주 본 거울 속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제가 있다. 머릿속엔 이수화를 소중한 보물처럼 감싸 안고 나가던 우영의 모습만 떠올랐다. 속이 절절 끓었다. 마치 그가 작정하고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솨아, 세차게 물이 쏟아져 나오던 수전을 잠근 태성은 대충 손을 닦고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졌다. 그마저도 제대로 들어가질 않고 밖으로 튕겨 나왔다.

    씨발, 씨발…….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쏟아지는 분노에 휩싸인 태성의 걸음이 차츰 빨라졌다. 그의 눈은 하염없이 우영을 찾고 있었다. 자신이 뛰는지도 모르게 돌아다니던 그는 곧 별관에서 나오던 중인 우영을 발견했다.

    “뭐냐?”

    “…….”

    “밥 안 먹었어? 여기서 뭐 해.”

    가빠진 숨을 내쉬며 태성은 입술을 꾹 물었다. 조금도 대수롭지 않은 얼굴의 그가 밉기만 했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따위 감정 때문에 저를 후순위로 둔다는 게 이해 가질 않았다. 자신이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옆에서 누가 지랄발광을 하든, 권우영이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일평생 동등하다고 생각해왔던 마음의 무게가 삽시간에 기울어졌다. 제가 그를 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크기로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나 찾으러 온…….”

    “왜.”

    “어?”

    “왜, 내 말 무시해?”

    태성은 이를 한 번 꽉 물었다가 놓았다. 억울함에 눈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짙어진 숨이 가빠지려는 걸 애써 삼켜 냈다.

    “왜 내 말 무시해.”

    태성은 빈틈없이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또 제 앞에서 딴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시 저 머릿속엔 이수화가 가득 있을 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덜컥 또 화가 났다.

    “우영아……. 씨발, 어디 봐.”

    와락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좀 더 거칠게 굴고 싶은 가학적인 충동이 일었다. 하나 그저 손끝에 힘만 주어 볼 뿐이었다. 잇새로 짙은 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말할 땐 나를 봐야지.”

    “……왜 이래. 거기서 또 어떻게 그냥 앉아서 먹어.”

    찌푸린 우영이 그의 손목을 쥐어 떼어 냈다.

    “솔직히 좀 그렇잖아. 나이가 몇 갠데 아직 그런 좆같은 짓 하는 새끼들이 있냐? 존나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아무튼, 이수화 지금 별관 샤워실에 있어서 체육복 가져다줘야 돼. 교실 가 있어. 밥 안 먹었으면 이따 매점 같이 가자.”

    말하며 제 가슴께를 툭 쳤다. 그는 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렇지, 늘 안달 나는 건 저 혼자였다.

    마음이 폭발하기 전 화산처럼 들들 끓었다. 하여 치사한 말을 뱉어 버렸다. 남기혁의 집을 망하게 하려는 게 이수화의 집이라며 빈정거렸다. 제가 가진 마지막 카드였다. 치졸하고 옹색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것으로 우영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식길 바랐다.

    “그래서 우영아.”

    “…….”

    “다시 갈 거야?”

    고요히 묻는 말에 우영이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입술은 잘근 깨문 채였다. 그러나 이깟 일로는 그의 마음에 조금의 흠도 낼 수 없었다. 조잡한 이간질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끝내 이수화를 향해 다시 등을 돌렸다.

    “그냥 둬.”

    그러니 그냥 억지를 부리는 수밖에.

    “걔 좀 씨발……. 그냥, 그냥 두라고. 좆같아서 더 못 보겠으니까.”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좀 그만하라고.

    “소름 끼치냐? 내가 게이라도 될까 봐.”

    우영이 눈을 휘어 웃었다. 거친 언사에도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지켜보는 태성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런 말로 흠집을 내려고 애써 봐야 제 속만 다치고 있었다.

    ‘될까 봐’가 아니잖아. 너 씨발, 게이 맞잖아. 이미 앞뒤 분간 못 하고 그 새끼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잖아.

    뱉고 싶은 말들이 한가득 혀끝에서 맴돌았다. 제가 아는 걸 모르고 있을 그의 속내를 파헤치고 뒤집어 까고 싶었다. 그의 비정상적인 욕망에 상처를 주고 제 처참한 심정을 보상받고 싶었다.

    “농담이야, 새끼야. 쫄았냐?”

    “…….”

    “수능까지 이제 세 달 남았다, 세 달. 괜한 데 날 세우지 말고 공부나 하세요. 갔다 온다.”

    그는 또 등을 돌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태성은 고개를 떨궜다.

    비뚤어지고 싶었다. 반항하고 싶었다. 그의 눈 밖에 나고 싶었고, 제게 집중시키고 싶었다. 새카만 마음이 일렁거렸고, 역동적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나 제가 잘못된 선로로 몸을 트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질 것을 알았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