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3부) (11/21)

1.

비가 내렸다. 교실 안에는 습한 공기가 가득했고, 살짝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론 바람을 타고 먼지와 빗물 섞인 냄새가 들어왔다.

“자, 다음 지문 보자.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기꺼이 우산이 되어 줄 사람과 함께라면.’ 여기서 문맥상 쓰임이 적절하지 않은 것은? 1번 poured…….”

영어 선생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유난히 늘어졌다. 또박또박한 발음과는 별개로 불경이라도 틀어 놓은 듯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했다.

책상에 턱을 괸 태성은 창밖의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금씩 올라간 시선이 흐려진 잿빛 구름 위로 향했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회청색 하늘이 거무죽죽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구리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버릇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가뜩이나 별 볼 일 없는 일상에 더 싫증이 났다. 더 볼 것도 없어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이윽고 시야 끝에 누군가 닿았을 때, 금세 머리를 내민 태양이 사위를 푸르게 물들였다.

권우영.

가슴께에 달린 명찰 위 세 글자가 또렷하다. 사각사각. 노트 위에 글 쓰는 소리와 옅은 숨소리가 조곤조곤하게 울려 퍼졌다.

태성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의 얼굴을 훑었다. 하염없이 진지한 눈빛과 단단하게 당겨 문 입술이 보였다. 시원스레 뻗은 콧날, 그와 어우러지는 날렵한 턱선 아래로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다부지게 이어졌다.

샤프를 쥔 손을 교과서 위에 가지런히 둔 채로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것쯤이야 이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태성의 인생에서 따분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일상은 취소.

태성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그제야 시선을 느낀 우영이 힐긋 눈을 들었다.

“왜.”

생각보다 크게 나온 소리에 칠판을 슥 보곤, 곧 목소리를 낮춰 다시 물어왔다.

“왜 쳐다봐.”

가늘게 눈을 뜨며 묻는 얼굴에,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턱을 괸 태성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가엔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무슨 생각했어?”

나직이 묻는 말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태성은 상체를 기울여 그의 어깨에 살짝 붙였다. 그리고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눈가를 찡그린 우영이 굳은 듯 경직되었다.

“무슨 생각했냐고, 우영아.”

책상 아래로 벌어진 무릎 끝이 살짝 닿았다. 속닥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수업하던 선생이 눈초리를 보내 왔다.

“거기, 지방 방송 꺼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우영은 다시 교과서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힐긋 주변의 눈치를 본 우영이 노트 끝에 글자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부끄럽게 뭘 물어봐.’

끝에는 뺨에 빗금이 간 웃는 얼굴과 함께였다.

그제야 씩 웃으며 저를 보는 얼굴에서 환한 빛이 풍겼다. 뺨에 작게 패는 볼우물을 손가락으로 쿡 눌러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가 웃을 때만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태성은 가만히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우영이 멈추지 않고 아래 줄에 글을 이어 갔다.

‘심심하냐? 뽀뽀라도 해 줘?’

또박또박 적어 내린 글씨를 지켜보다 눈이 마주쳤다. 우영이 한쪽 눈을 감으며 윙크를 해 왔다. 휘어진 눈매와 호를 그리는 입술, 그리고 그 위에 푹 찍힌 볼우물까지. 태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존나…… 예쁘게도 생겼네.

생각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멎어 가고 있었다.

***

사실 태성과 우영의 첫 만남은 놀이터가 아니었다. 태성이 그를 처음 마주친 것은 운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일어났던 작은 싸움에서였다.

여럿의 아이들 아래 주저앉은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맞선 다른 아이가 있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캐슬에 살지 않거나, 몸집이 작고 약하거나. 아이들 사이에서도 약육강식은 존재했다. 따돌림의 이유는 대부분 둘 중 하나였다.

태성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주저앉은 비실비실한 애는 우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락바락 맞서 싸우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

그를 둘러싼 상대는 너덧이나 돼 보였으나, 아이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놈들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었다. 어깨에 힘을 주고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도 쳤다. 또래보다 큰 키와 다부진 눈빛은 조금도 기죽어 보이지 않았다.

강한 기세에 눌린 아이들이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졌다. 끝내 승리한 그는 태성을 뒤로한 채 주저앉아있던 아이를 데리고 씩씩하게 사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제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한 듯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태성은 눈을 깜박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아이에게 다가가 조급히 그의 이름을 물었다.

권우영. 입에 착 감기는 이름이었다.

홀로 중얼거린 태성은 그제야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굽이굽이 늘어진 건물을 돌아 한참을 걸었다. 온갖 곳을 다 서성이다가, 마침내 화단 옆에 쭈그려 앉은 그를 발견했다. 등을 기대고 앉은 우영은 무릎에 코를 박고 있었다.

벽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태성은, 신기한 동물을 보듯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니, 구경했다는 것이 더 알맞았다.

뭘 하는 걸까. 의아한 태성의 눈이 가늘어지는 찰나, 고개를 든 우영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의 눈가와 코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찡그린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서럽게 우는 모습에 심장이 이상하리만큼 진동했다. 벌컥 끓어오르는 감정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에 태성은 서둘러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교실로 마구 뛰어갔다.

이날, 집으로 돌아온 태성은 책상에 앉아 연필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난생처음으로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누군가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다. 복도에서 우영이 감싸 주던 이가 바닥에 널브러진 놈이 아니라 자신이었으면, 하고 바라던 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을 만큼 생경한 욕망이었다.

그와 가까워지겠다는 계획을 세운 이후, 태성은 무작정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태성은 눈치가 빨랐다. 우영이 뭘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한눈에 알아차리곤 그를 꾀어냈다. 남다른 집착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니 일은 술술 풀렸다.

하지만 자신은 방과 후 일정이 빡빡했으므로, 학원에 다니지 않는 그와 함께할 시간이 적었다. 그렇다고 다른 놈들에게 하나뿐인 친구를 빼앗기긴 싫었다.

하여 그는 우영이 저를 제외한 모든 일에 관심이 없었으면 했다. 제가 풀어 줄 수 있는 마지노선은 그나마 오랜 기간 알아 온 멍청한 남기혁까지였다. 다른 놈들은 때려죽여도 싫었다.

다행히 권우영은 남들에게 그다지 관심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저 성실히 사느라 늘 바쁘기만 했다. 축구나 공부 외에 다른 일탈은 꿈도 꾸지 않는 듯했다. 부모의 제재가 없음에도 그리 우직하기만 한 면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매일 아침 그와 걷는 등굣길이 좋았다. 늘 저만 찾고, 제게로만 향하는 눈길도 좋았다. 시야를 틀고 있을 때만 그가 자신을 오래 쳐다본다는 걸 알았다. 일부러 그의 시선을 모른 척할 때도 있었다. 우영의 관심을 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를 향한 집착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하나 그건 우영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같은 반이 되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애정을 주는 만큼 똑같이 받고 싶었다. 그에게서 어느 면이든 1순위가 되고 싶었다. 오랜 기간 잘 빚어 놓은 관계이니만큼, 그 또한 제게 집착적인 면모를 보였으면 했다.

그가 저를 남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밑도 끝도 없는 소유욕이 꺼질 줄도 모르고 불타올랐다.

태성은 생각했다. 권우영과는, 꽉 잠근 뒤 열쇠를 던져 버린 두 개의 자물쇠 같은 사이가 되고 싶었다. 둘의 사이로 누구도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못할 만큼 견고한 울타리를 단단하게 치고 싶었다.

그리고 바람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이 평온하게만 흐르고 있었다. 분명 그때까지는.

‘비키라고. 안 들려?’

태성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어떤 소리 때문에 본 것은 아니었다. 우영의 반을 지나칠 때면, 그가 안에 없는 걸 알고 있을 때도 습관처럼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Kwon Woo Young’

‘9’

흰 유니폼 위로 큼지막한 검정 글씨가 두드러졌다. 축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우영의 건장한 뒷모습이었다. 굳은 시선이 우영의 주변을 스쳤다. 하나, 둘, 셋, 넷…….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놈들과 그가 함께 말을 나누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 다른 놈들과 친해지기라도 한 걸까.

삽시간에 태성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입학하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이제 제가 통제하지 못할 선을 넘어가기 시작하는 듯했다. 불현듯 상황이 좆같게만 느껴졌다.

이래서 같은 반이 됐어야 했는데.

찌푸린 태성의 시선이 물끄러미 교실 안으로 향했다. 그제야 아래에 쭈그려 앉아 있던 왜소한 놈을 발견했다. 열린 문틈으로 얼핏 들려오는 대화와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대강 상황 파악이 됐다.

권우영은 누군가를 지켜 주고 있었다. 처음 자신이 그를 봤을 때처럼.

태성은 미동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천천히 굴러간 시선이 놈의 턱을 움켜쥔 우영의 손가락에 닿았다. 그대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모습까지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낯빛은 시시각각 서늘하게 식어만 갔다.

“뭐냐.”

문득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태성의 눈동자가 문을 열고 나오던 우영을 스치고, 뒤이어 따라 나온 놈의 명찰을 빠르게 훑었다.

‘이수화’

이름 세 글자에 미간이 굳었다. 태성은 처음으로 우영의 얼굴이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학원 안 갔어?”

물음에도 시선은 여전히 이수화의 팔을 붙든 우영의 손에 닿아 있었다.

“응. 지나가는데 보이길래 인사하러 왔지.”

표정 변화 없이 답하는 태성의 팔이 움찔거렸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어깨동무하고, 기생충처럼 들러붙은 멍청한 놈을 떼어 내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우영은 저 머저리 같은 놈을 보내고, 제게 같이 나가자고 할 것이 분명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는 늘 제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어, 잘 다녀와. 먼저 간다?”

이수화의 팔뚝을 재차 그러쥔 우영이 등을 돌렸다. 일순 태성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불편한 심기가 드글드글 살갗 위를 긁기 시작했다. 소름 끼칠 만큼 불쾌한 감각이었다.

“걔는 누군데.”

“얘?”

“응.”

“이수화.”

대수롭잖은 답에 태성이 이를 꽉 물었다. 그따위 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새끼가 뭐길래 날 두고 가느냐고, 왜 그딴 짓을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고팠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질펀한 분노였다.

“그게 누군데?”

태성은 다시 물었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날 선 목소리가 툭툭 튀어 나갔다.

“누구긴 누구야, 보면 모르냐? 우리 반이지.”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 새끼야. 간다.”

우영은 정말이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로 떠났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우두커니 선 태성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정체 모를 놈과 함께 우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한참을.

그러니까, 본디 붕괴는 작은 균열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미약한 틈은, 더 두려운 이의 눈에 먼저 띌 수밖에 없었다.

***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새끼의 짜증 나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수화. 언짢은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대로 복도를 나선 태성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학원에 조금 늦더라도, 우영이 나오는 걸 기다렸다가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17:30 우영.]

메시지를 보낸 후, 대화방을 끄지 않고 답을 기다렸다. 하나 평소와 달리 숫자 1이 바로 지워지지 않았다. 무려 3분이 지나도록 그는 확인조차 하질 않고 있었다.

[17:33 뭐 해? 가고 있어? 난 학원 가는 중.]

교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따로 할 말이 없어 일부러 덧붙였다. 하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전부 무음으로 설정해 놓은 쓸모없는 놈들의 메시지나 올라올 뿐이었다.

[17:34 권 (이모티콘)]

[17:34 우 (이모티콘)]

[17:35 영 (이모티콘)]

[17:36 왜 씹어?]

태성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보란 듯이 연달아 보내는 메시지에도 그는 확인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태성은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눈동자엔 불쾌한 빛이 스쳤다.

[17:37 보이스톡 해요]

[17:37 부재중]

[17:39 페이스톡 해요]

[17:40 부재중]

[17:40 (사진)]

[17:41 (동영상)]

[17:42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전화도, 톡도 보질 않았다. 평소 제 연락이라면 칼같이 답하던 그였다. 여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진심으로 짜증이 솟구쳐 핸드폰을 콱 움켜쥐었다. 후문은 하굣길과 정반대 방향이니 다른 쪽으로 나갔을 리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 태성. 어디 가? 학원?”

별안간 얼굴도 모르는 새끼가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교문에 비스듬히 서 있던 태성은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틀었다. 신경질적으로 투박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학원이 아니라 우영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보폭으로 걷다 보니 금세 우영의 집 앞 골목에 도착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는지는 저도 알지 못했다.

그는 우영이 돌아올 골목길 담벼락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볕이 쨍쨍한 하늘은 새파랬고, 흘러가는 구름은 희었다.

처음엔 조금만 기다리다 학원에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래 놓고 답장 한 통 오지 않는 핸드폰을 쳐다볼수록 화가 났다.

평소라면 권우영이 집에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어쩌면 제가 보지 못한 사이 이미 집에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상식적으로는 집에 가서 그가 있는지 확인하고 기다리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오기였다.

태성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우영을 기다렸다. 왜 이렇게 무작정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이를 한참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해지는 가슴을 눌러 놓고 가만히 귀를 세웠다. 권우영의 목소리였다.

태성은 소리가 들려오는 골목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니나 다를까, 허리에 손을 짚고 무어라 말을 하는 우영과 고개를 푹 숙인 이수화가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비스듬히 선 우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다. 그 앞에 선 이수화는 어쩔 줄 모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좆같은 여우 짓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제 연락을 모조리 무시하고 여태 저 새끼와 함께 있었다는 걸 눈앞에서 확인하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바깥으로 발을 내디디려던 태성은 애써 턱을 꽉 물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선 채, 딱딱해진 얼굴로 우두커니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권우영을 다른 이에게 뺏긴 짧은 순간이 이토록 불쾌할 줄은 몰랐다.

“고태성!”

코너를 돌자마자 그를 발견한 우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태성은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미친. 너 여기서 뭐 하냐? 언제부터 있었어? 뭐야, 나 기다린 거?”

마치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처럼 반갑게 걸어오는 우영이,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물어 오는 말이 하나도 달갑지가 않았다.

“너는.”

“어?”

“너는 왜 여기 있냐고.”

“뭔 소리야. 여기 우리 집 가는 길이잖아.”

“아까 먼저 갔잖아. 그것도 한참 전에.”

태성은 그의 눈동자를 빤히 살폈다. 짜증이 났다. 그가 제 전화도, 메시지도 받지 않고 딴 새끼랑 희희낙락거렸다는 사실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답장은 왜 안 해?”

“아.”

“전화는 왜 안 받아? 그럴 거면 핸드폰은 씨발, 왜 들고 다녀?”

“못 봤다. 미안.”

감정이 잘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헤집듯이 살폈다. 눈을 살짝 치켜뜬 우영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모습에 태성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잊고 있던 듯했다.

“우영아.”

“……어.”

“여태 뭐 했냐고.”

“아, 이수화 때문에…….”

“응. 그러니까 걔랑 뭐 했는데.”

태성은 우영의 어깨 위를 가볍게 짚었다. 곤란한 얼굴로 사과하는 그의 언행이 못마땅했다.

“학교에서 헤어진 지 1시간 40분이 넘었는데, 아직도 집에 안 가고 뭐 했냐니까.”

“뭐……. 말하자면 긴데.”

“말 안 해 줄 거야?”

교실 앞에서 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누구와 뭘 하다 온 건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싶었다. 대충 하는 말 따위로는 이 더러운 기분을, 누군가 꽉 쥐어짜는 듯한 이 갑갑한 마음을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친구 하자고 쫓아오길래.”

“…….”

“존나 웃겨. 너도 나한테 친구 하자고 귀찮게 했잖아. 기억은 나냐?”

능청스레 웃어 보인 우영이 어깨에 얹힌 태성의 팔을 치워 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냐니까? 왜 학원 안 갔어?”

태성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저를 밀어 내고 있다는 걸. 언젠가부터 묘하게 선을 그으려 하고 있다는 걸. 평소엔 모른 척 넘길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태성의 눈빛이 차츰 더 서늘해졌다.

“그냥.”

“뭐야. 너 그렇게 마음대로 째도 돼?”

태성은 다시금 그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저를 억지로 떼어 놓은 행동에 반항하듯이.

“……나는 우영이랑 반도 떨어지고, 놀 시간도 없는데…….”

“…….”

“권우영은 눈앞에서 모르는 새끼랑 시시덕거리면서 가니까……. 좆같잖아.”

불편한 이유를 다시금 상기하자,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누구에게도 권우영을 뺏기기 싫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신이어야만 했다.

“뭔 헛소리냐. 나 존나 열심히 하거든? 새끼야, 넌 내가 운동하니까 종일 노는 줄 알지? 너 따라 한국대 가려면 잠잘 시간도 없다. 안 그래도 오늘 늦어서 개 바쁜데.”

우영이 태성의 팔뚝을 툭 쳤다. 흘겨보는 듯, 애교 섞인 얼굴로 비스듬히 턱짓했다.

“두고 봐라. 내가 진짜 전교 1등 안 해도 붙는 거 보여 준다. 어? 형 믿지?”

우영은 주먹으로 제 가슴께를 툭툭 치며, 귀엽게 웃어 보였다. 매끄러운 뺨 위로 볼우물이 팼다.

‘너 따라 한국대 가려면.’

돌연 태성의 눈매가 살짝 풀어졌다. 같은 대학에 가는 건 둘만의 약속이자 목표였다. 그의 인생 계획엔 항상 고태성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우영은 오직 그 목표만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별안간 깨달은 현실에 묵직하게 굳었던 가슴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치솟던 분노는 단번에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어?”

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투덜거리는 그를 주시했다. 예쁘고 귀여웠다. 전국의 모든 축구부를 통틀어도 유니폼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놈은 없을 터였다. 요란하게 흔들리던 감정이 잔잔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응, 믿어.”

난 너 믿어. 너한텐 나밖에, 나한텐 너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1순위인 것도 영원히 변치 않을 테니까.

***

계획하지도 않은 날, 우영의 집에서 이렇게 잘 수 있는 건 고태성만의 특권이다. 우영은 다른 사람이 이유 없이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남기혁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은 달랐다. 무작정 학원을 빼고 자고 간다며 밀어붙였지만, 우영은 흔쾌히 제 방문을 허락했다.

고태성이니까. 권우영이 좋아하는 고태성이니까. 오직 자신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씻으러 간 우영을 두고 바닥에 누운 태성은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 놓인 액자 속에 우영과 자신이 웃고 있었다. 이미 인화된 사진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었다. 살아온 인생의 반이나 되는 시간 동안, 그와 우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몇 시간 내내 까맣게 타들어 가던 기분이 점점 말끔해졌다.

문득 시야에 우영의 핸드폰이 들어왔다. 손을 뻗은 태성이 그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우영이 처음 핸드폰을 산 날 장난삼아 비밀번호를 제 생일로 설정해 두었다. 그를 기점으로 우영은 모든 비밀번호를 다 제 생일로 해 놓고 다녔다.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한 일 치고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대강 메시지를 훑던 태성이 앨범을 눌렀다. 가장 먼저 깨진 안경을 쓰고 있는 이수화의 못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하던 일임에도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선은 이수화의 턱 끝을 움켜쥔 우영의 손가락에 닿았다.

씨발,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망설이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사진을 삭제했다. 그 외에 너구리같이 생긴 양아치들 사진은 그냥 두었다.

별안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태성은 앱을 모두 끄고 핸드폰 게임을 켰다. 재빠른 행동이었다.

“네 거 놔두고 왜 내 걸로 하냐?”

감흥 없는 얼굴로 그를 흘긋 바라본 태성이 다시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나 배터리 없어서.”

“충전해. 책상 옆에 충전기 있잖아.”

“그래?”

“뭐냐,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기종이 달라 일부러 가져다 놓았던 것이기에 모를 리 없었다. 태성의 핸드폰 배터리는 75%였다.

***

우영과 함께하는 밤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이불 위에 가만히 누운 태성은 책상 앞에 앉은 그의 등판을 응시했다. 남들은 다 잘 시간에 그는 아직도 공부하고 있었다. 저와 같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였기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새카만 흑발 아래 매끄러운 목선이 이어졌다. 헐렁한 티셔츠건만 움직일 때마다 등 뒤로 불거진 날개뼈가 슬쩍슬쩍 튀어나왔다. 태성은 마치 흥미로운 티브이를 시청하듯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문득 우영이 공부하다 말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태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까 그 새끼랑 연락하는 듯했다. 떠올린 찰나,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이제 자자, 우영아. 나 졸려.”

“어. 먼저 자.”

흥미 없는 어조로 돌아온 말에 태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빨리 불 끄고 와. 나 밝으면 못 자.”

괜한 오기가 생겼다. 그의 관심을 모조리 저에게 돌리고 싶었다. 일부러 한숨까지 내쉬며 채근했다.

“우영아, 나 진짜 졸려. 지금 자도 여섯 시간밖에 못 자는데. 너 때문에 키 안 크면 어떡해. 나 책임질 거야?”

조르는 말에 우영이 낮게 웃었다. 의도한 대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다가왔다.

“미친, 거기서 뭘 더 크겠다고. 장래 희망 농구 선수세요?”

빛이 가득했던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태성은 모로 누워 우영을 기다렸다. 새카매진 어둠 속에서 그가 조심스레 눕는 게 느껴졌다.

어릴 적엔 끌어안고 엉망으로 구겨져서 잘 잤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그가 굉장히 제게 거리를 두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다 큰 남자끼리는 싫다 이건가. 불현듯 기분이 불편해졌다.

태성은 일부러 다시 천장을 향해 누웠다. 좁아진 공간에 팔뚝이 스치자, 우영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가만히 팔을 더 붙여 보았다. 그가 조금 더 옆으로 몸을 뒤척였다. 짜증이 났다. 이따위 걸로 내외하고 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태성은 팔을 베고 우영을 향해 모로 누웠다. 천장을 보고 누운 우영 탓에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잘 자, 우영아.”

속삭이듯 중얼거렸으나 우영은 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곤하게 잠든 그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흘러나올 때가 돼서야, 태성은 겨우 잠이 들었다.

먼저 눈을 뜬 건 태성이었다. 그는 아직도 어둑한 방 안에서 느리게 눈을 굴렸다. 창밖으론 푸르스름한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푹신한 제 침대가 아닌 딱딱한 바닥에서 잤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우영이 보였다. 늘 부지런한 그에게선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제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살짝 치뜬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던 태성은, 손끝으로 그의 뺨을 꾹 눌러 보았다. 그가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패는 자리였다.

찹쌀떡처럼 말랑한 촉감과 함께 볼살이 밀렸다. 저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것이 꼭 아기 같았다.

불현듯 지난밤 제게 거리를 두려고 용쓰던 놈이 떠올랐다. 괘씸했다. 친구라면서 변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해 가질 않았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태성은, 가만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뻗었다. 팔 안에 들어오는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그 위로 뺨을 대었다. 만화책을 보다가 바닥에서 뒹굴며 잠들었던 초등학생 때처럼.

단단한 우영의 몸은 제 집의 고급 침구보다 훨씬 따뜻하고 안정적이었다. 예상 밖의 안락함에 태성은 눈을 감았다. 금세 잠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정신이 흐려지려는 찰나, 별안간 머리 위에서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아…….”

우영이 잠에서 깬 듯했다. 하나 몸을 물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이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성은 그를 무시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나 문득 제 등을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뜰 뻔했으나 모른 척했다. 제가 깨어 있는 걸 알고 장난을 치는 듯해 일부러 더 파고들었다.

반은 장난이었고, 반은 진심이었다. 혹여 제가 깨어 있는 걸 안다면 평소처럼 능청스레 굴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영은 낮은 숨만 내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를 끌어안은 팔을 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태성은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따스한 체온 속에서 평온을 찾았기에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고태성, 일어나.”

“…….”

“빨리. 할머니가 밥 먹고 가래.”

태성은 몸을 웅크렸다. 오래간만에 푹 잔 듯한 느낌에 무거워진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야. 안 일어나면 나 먼저 간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좀 더 자고 오던가.”

“……어디 가. 싫어.”

반사적인 답이 튀어 나갔다.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우영의 발목을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등교는 같이해야 했다.

“야, 넌 내가 그렇게 좋냐?”

“응…….”

“미친.”

아침부터 당연한 걸 묻고 있었다. 낮은 웃음소리에 잠결인 태성의 입매도 살짝 올라갔다. 이대로 열 시간도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삼 초 안에 안 일어나면 간지럽힌다.”

돌연 이불이 확 걷혔다.

“삼. 이. 일! 아, 빨리 일어나라고!”

태성이 몸을 웅크렸다. 어차피 일어날 생각이었다. 이미 정신은 흐릿흐릿하게 돌아왔으나 눈이 잘 떠지지 않을 뿐이었다.

“아……! 제발, 우영…….”

“안 일어나? 이래도 안 일어나?”

“아, 시발, 하지 마……. 아!”

그의 손목을 탁, 낚아채곤 홱 끌어당겼다. 아직 물기 어린 뒤통수를 가슴께에 처박자 그의 얼굴이 푹 파묻혔다. 빗장뼈 아래로 뜨거운 숨결이 훅 고였다. 코끝으로 달큰한 샴푸향이 흘러들어왔다.

“……5분만. 우영아, 5분.”

그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5분이 아니라 50분도 더 이러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알았으니까 놔 봐…….”

왜인지 부끄러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런 게 뭐라고. 불현듯 새벽의 포옹이 떠오르니 묘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우영의 채근에 눈을 뜬 태성은 욕실 문을 닫고 섰다. 주변을 물끄러미 훑으니 낡은 타일과 세면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제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깔끔한 할머니 덕에 가지런히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태성의 시선이 거울 속으로 향했다. 자신이 걸친 검정 티셔츠도, 트레이닝 바지도 모두 우영의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뜨는 듯한 기분이 몰려왔다.

차가운 벽에 비스듬히 기댄 태성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찌푸린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 칫솔 꽂이에 우영의 파란 칫솔이 보였다. 다시 거울 속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핏줄이 선 손등에 자꾸만 우영의 옷이 걸리적대며 스쳤다.

달아오른 마음이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안녕.”

태성은 교실 문 앞에 선 우영을 응시했다.

“인사 안 해?”

“…….”

“넌 새끼야, 친구 만나면 인사하는 거라고 초등학교 때 안 배웠냐.”

그의 시선은 이수화에게 닿아 있었고, 눈가엔 희미한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낯선 이에겐 잘 보이지 않는 장난스러운 얼굴이자 태성이 가장 좋아하는 미소기도 했다.

“네가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어? 이 시간에 가방은 왜 다시 들고 나가냐? 너도 땡땡이치려고?”

태성의 눈가가 꿈틀 움직였다. 가방을 죽 끌어당기는 손길도, 능청스레 건네는 말투도 스스럼없었다. 그의 눈길이 투박하게 가방을 쥔 우영의 손에 머무르는 순간, 이유 없이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그는 우영의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이수화를 훑었다. 고개를 마구 젓는 놈의 뺨이 붉었다. 지켜보던 태성의 입매가 차츰 굳어지기 시작했다. 일순, 저도 모르게 툭 입을 열었다.

“안녕, 수화야.”

“어……. 어, 안녕…….”

웅얼거리는 놈을 보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어떤 스타일인지는 눈에 훤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남 눈치 보느라 늘 위축되어 있는 찐따 새끼. 도움 없인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을 찌질이. 더 볼 것도 없었다.

“나 우영이 친구. 거의 10년 됐나.”

“…….”

“고태성.”

태성은 느릿느릿 그를 훑으며 한 번 더 웃었다. 상대가 어떤 타입인지 파악해 놔야 다루기도 쉬웠다.

“아, 난, 이수화…….”

그의 명찰 위로 시선이 꽂혔다. 또렷이 박힌 이름이 왜인지 익숙했다.

이수화. 이수화. 이수화. 이수……화.

문득 태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 돌연 머릿속을 스쳤다.

‘쟤 이름 뭐야?’

‘누구? 이수화?’

‘이름이 이수화야?’

‘아아, 권우영 물어보는 거야?’

‘권우영?’

‘응. 저기 울던 애가 1반 이수화. 때린 애가 3반 권우영. 왜?’

8년 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가 되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놈이자, 권우영과의 첫 만남에 엎어져 울고 있던 새끼.

그놈이 이수화였다.

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던 이름이 그제야 선명해졌다. 운일초등학교, 운일중학교, 운일고등학교. 캐슬 근방에 사는 놈들의 진학은 대부분 다 똑같았으니 이런 일도 흔했다.

하지만.

묘하게 연결된 과거를 깨닫자, 삽시간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우영은 몰라도 저 여우 같은 새끼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그렇기에 주제넘게 친구 하잔 소리를 지껄였다는 걸.

손톱만큼 심긴 케케묵은 열등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움찔거렸다. 별안간 불붙은 감정엔 이유도 없었다.

***

직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정확하다. 남에게 관심이라곤 없던 우영이 이수화를 옆에 달고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와 자신 사이의 미세한 틈을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히 아주 서서히,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하여 태성은 노력했다. 우영이 달고 온 그에게 살갑게 굴며 장단을 맞추기도 했고, 친절하게 웃거나 다정하게도 굴어 보았다. 종종 마음에 들지 않게 굴 때는 없는 듯 무관심하게 대했고, 우영이 보지 않는 곳에선 빈정거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결과는 원점이었다. 권우영은 여전히 그를 키링처럼 달고 다녔고, 이수화는 늘 순진한 얼굴로 가식을 떨었다. 진드기처럼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으니 무엇도 통할 리가 없었다. 이수화를 배제하려 들수록 외려 자신이 더 뒤처지고 있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는 것뿐이었다.

***

성가신 것들은 치워도, 치워도 계속 늘어났다. 딛고 선 곳은 좁아지는데, 차지하려 드는 이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아주 좆같은 일이었다.

이서율을 처음 발견한 건 우영이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뛸 때였다. 홀로 창문가에 기대어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여자아이를 두 번, 세 번, 네 번 스치듯 보았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급식실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그녀는 우영을 보고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요즘 같은 반 덜떨어진 놈들의 관심사는 여자뿐이었다. 놈들은 공부를 멀리하고 학원을 빠졌다. 격변하는 감정에 울고, 웃고, 화내며, 심지어는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하고 후회했다. 전부 다 등신들이었다.

태성은 그 한심한 짓거리를 숱하게 지켜보며 생각했다. 권우영에게는 절대로, 절대로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됐다.

그는 지금 연애 따위를 할 때가 아니었다. 남들보다 모자란 사교육을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고, 진학할 과 특성에 맞추어 운동도 해야 했다. 자신과 한국대에 가려면 하루가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니 자신이 도와주어야 했다.

멋모르고 우영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꾀어내긴 쉬웠다. 여물지 않은 풋사랑은 살살거리는 눈웃음 하나만으로도 제게 감기처럼 옮겨 왔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축구 좋아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창문에 팔을 괴고,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 운동장을 홀린 듯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태성의 입술이 모양 좋게 휘었다.

“응? 어, 어…….”

새카만 생머리를 사르륵 넘기는 얼굴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여태껏 우영에게 다가왔던 이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빼어난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다.

태성의 눈가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부류는 애초에 접근을 시키면 안 됐다. 우영의 눈에 띄기 전에 치워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신기하네. 축구 좋아하는 여자애들 별로 없던데.”

창문에 비스듬히 기댄 태성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서율. 명찰에 쓰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응, 사실. 저기……. 나 너 알아, 고태성.”

서율이 말갛게 웃으며 태성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시선에 부끄러움이라고는 없었다. 저와의 첫 만남에 눈을 피하지 않는 여자는 그다지 없었다. 그녀는 우아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고, 인상과 성격 또한 일치하는 듯했다.

“나 권우영 때문에 보고 있었거든. 너 쟤랑 친하지? 너희 둘만 같이 다니는 것 같던데.”

속삭이듯 묻는 말에, 그가 무감한 얼굴을 했다.

“우영이 좋아해?”

가감 없이 묻는 말에 그녀가 웃었다. 미소엔 당황한 기색조차 없었다.

“너 되게 돌직구다. 왜, 도와주려고?”

당돌한 눈웃음에 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런 아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잘난 집에서 사랑받고 자라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콧대 높은 부류이자. 갖고 싶은 건 뭐든 손에 쥐고 싶어 하는 놈들이었다.

태성은 빠르게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그녀는 그간 대충 웃어 주고 치워 내던 아이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이런 적극적인 타입의 잘난 여자에게 우영이 흔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음……. 그래. 번호 줘.”

살짝 웃어 보인 태성이 선뜻 핸드폰을 내밀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번호를 입력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는 혀를 내둘렀다. 또 성가신 게 생겨 버렸다.

“잘 부탁해. 고태성.”

다시 건네준 핸드폰을 쥐고, 태성은 그녀의 이름 앞에 숫자를 덧붙였다.

‘11이서율’

그간 우영의 앞에서 치워 낸 여자가 벌써 열한 명이었다.

***

“고태성! 너 부르는데?”

헐레벌떡 뛰어온 김진성의 부름에, 태성은 빠르게 교실 밖으로 향했다. 권우영과 그녀가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녀는 상당히 충동적인 면이 있었고, 생각보다 집요했으며 눈치가 빨랐다. 한마디로 존나게 귀찮게 굴었다.

“아-. 갈색 머리 좋아한대서 충동적으로 하긴 했는데, 내가 보기엔 전이 더 나은 것 같아.”

서율이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우영이 갈색 머리를 좋아한다고 일러준 다음 날이었다. 우영이 흑색을 좋아하는지 무지개색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지껄인 말이었다.

“그냥 놔둘 걸 그랬나? 괜히 건드린 것 같아.”

“예쁜데, 왜.”

“오늘 중요한 날이란 말이야.”

“무슨 날?”

“사실……. 나 이따가 고백하려고. 너 내 얘기 잘 해 놨지?”

해사하게 웃는 미소에 미간이 굳었다.

“오늘?”

“응.”

“오늘은, 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말꼬리를 흐린 태성은, 무신경하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이서율은 지나간 열 명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은근하게 꾀어내는 제게 쉽게 넘어오지도, 묘하게 자존감을 죽여도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우영에 대한 집착이 컸고, 공들인 만큼 쉽게 포기하지도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난감하고 짜증이 났다. 별안간 새치기라도 당한 듯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오늘 나 학원 수업 없거든. 우리 집에서 우영이 어릴 적 사진도 보여 주고, 옛날얘기도 해 주려고 했지.”

“아, 정말? 진짜?”

“응. 다음에 하면 안 돼?”

태성은 성의 없게 웃으며, 되지도 않는 말을 줄줄 지껄였다. 이 이상 더 할 말도 없었다.

“어, 그럼 미루지 뭐. 오늘만 날인가?”

“응, 가자.”

“바로?”

“응. 지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작정 뱉고 난 태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오늘은 우영과 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그와 시간을 보낼 생각에 저 또한 들떠 있던 참이었는데, 모든 일정이 틀어져 버렸다.

괜히 교실에 들렀다가 마주치기라도 할까, 곧장 집으로 향했다. 속으로는 욕을 곱씹었다. 이런 식으론 안 된다. 애초에 다른 방법으로 접근을 했어야 했다. 하나 그게 뭔지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17:01 난 오늘 못 갈 것 같아.]

메시지를 보낸 태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으로 좆같은 날이었다.

***

신이 난 얼굴로 앨범을 뒤적이는 서율을 보며 태성은 애써 짜증을 삼켰다. 핸드폰을 들어 우영에게 메시지를 했다. ‘어디 갔어?’, ‘뭐 해?’ 답은 오지 않았다. 심지어 읽지도 않았다. 냄새나는 새끼들과 얽혀 냄새나는 피시방에 처박혀 있을 그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앨범을 실컷 보게 두고 방에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받질 않았다. 눈앞에 손도 대기 싫은 더러운 키보드를 두드리며 정신없이 게임 하고 있을 놈이 떠올랐다. 못 본 건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건지 울컥 열이 찼다. 한 발자국도 들이기 싫은 썩은 내 나는 곳에 드나들던 이유는 전부 권우영 때문이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른 후 그녀를 집에 보낸 태성은 우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건만 그는 아직 메시지를 읽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피시방에 가지 않아서?

이건 아니었다. 권우영은 그런 일로 쪼잔하게 굴 놈은 아니었다.

[19:02 야 권우영 지금 뭐 해?]

[남기혁: 하긴몰해떡보끼먹자나~ 19:02]

[19:03 뭔 개소리야?]

[남기혁: ㅎㅎ권우영이저러케말함ㅋㅋ근데왜?? 19:03]

“하, 씨발…….”

욕을 지껄인 태성은 책상 위에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침대에 털썩 드러눕고는 당장 그를 찾아갈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했다. 하루의 일정을 망치고 기분도 잡쳤다. 그를 만나 봐야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집에 가면 연락하겠지. 연락이 올 것이다.

하지만 잠들 때까지 태성의 핸드폰은 고요하기만 했다.

눈 뜨자마자 새벽같이 찾아간 우영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선 태성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일부러 저를 엿 먹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이를 아득 깨문 태성은 짙은 숨을 내쉬었다. 권우영이 이러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제가 모르는 새에 그에게 어떤 실수를 했을지도 몰랐다. 우선은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 했다.

뛰다시피 걸어 도착한 교실 창문 너머로 우영의 모습이 보였다. 드르륵, 문을 거칠게 밀어 낸 태성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 왔냐.”

고작 무심한 시선 한 자락을 던졌다가 도로 거두는 행동에 울화가 치솟았다.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밤새 하지 못했던 말이 속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왜 혼자 갔어?”

우영은 제 물음에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책만 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 오늘 일찍 깨서. 톡 보냈잖아.”

“전화는 왜 안 받아?”

“무음 풀어 놓는 거 깜박했어.”

“톡은 왜 씹는데.”

“피시방 갔잖아. 게임 하느라 정신없었지.”

“끝나고 하면 되잖아.”

“아, 떡볶이 먹느라 까먹었어.”

“씨발, 말 서운하게 하네?”

태성은 와락 눈가를 찌푸린 채 우영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뛰어와서인지, 아니면 화가 나서인지 잇새론 씩씩대는 숨이 새어 나왔다.

“서운할 일도 많다.”

그와 달리 우영은 차분하게 답했다. 심지어 픽 웃음까지 흘렸다. 제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교과서에 얼굴을 처박고 샤프를 끄적이는 무심함에 갑갑한 기분이 몰려왔다.

들끓는 속과 달리 먼저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가 삐딱선 타는 이유를 먼저 알아야 했다. 권우영이 이런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영아.”

태성은 거칠게 그의 앞 의자를 빼내 풀썩 앉았다. 단단한 시선은 우영에게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어제부터 존나 속상하게 만든다.”

“…….”

“응?”

최대한 부드러운 말을 고르고 골랐지만, 딱딱하게 굳어 가는 눈매는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화를 내고 싶었다. 핸드폰을 눈앞에 똑바로 쥐여 주고, 제 연락을 무시하지 말라며 소리치고 싶었다. 하나 제게는 이성이란 게 있었다.

우영은 잠시 답이 없었다. 아래로 내리깐 기다란 눈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웃지 않아 냉랭하게만 보였다.

둘의 사이로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럴 거면 오지 그랬냐.”

툭, 내뱉은 말끝에 진심이 묻어 있었다.

불현듯 찾아온 적막이 그들 사이를 스쳤다. 말문이 막힌 태성은 찬찬히, 그리고 낱낱이 그를 주시했다.

우영의 손가락이 샤프를 꽉 쥐어 잡는 모양을, 읽지도 않는 교과서에서 일부러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가는 표정과, 이를 악물어 단단해지는 턱선도 시야에 담아냈다.

별안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모든 반발의 이유는 하나였다.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함께 피시방에 가지 못해서, 함께하지 못한 일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마치 항의하듯 제 연락을 무시하고 저를 두고 혼자 등교했던 것이었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한순간에 쌓아 온 응어리가 탁 깨어졌다. 마치 목을 졸리고 몰아붙이던 손길에서 확 풀려난 기분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우영을 보던 태성의 낯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러게.”

그는 다시 집요하게 우영을 눈에 담았다. 앙다문 입술과 내리깔린 속눈썹을 보았고, 샤프를 쥔 손의 어색한 움직임과 책상 아래로 미세하게 떨리는 다리의 진동을 느꼈다. 정말로 끈질긴 눈길이었다.

그리고 곧, 패기를 든 우영의 한숨을 보았다.

“뚫어지겠다.”

찬찬히 드는 시선에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심하고 냉랭한 눈매와 달리 불퉁하게 내민 입술을 보자 돌연 웃음이 났다.

우영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긴 그는 톡, 톡, 우영의 책상 위를 느리게 두드렸다. 여태 씩씩거리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가슴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눈 한 번 마주치기 힘드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정리가 끝났다. 그는 태연하게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왜 내 얼굴 안 봐? 내 눈 예쁘다며.”

“…….”

“전화도 씹고, 답장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너무해. 하도 봐서 이제 질렸어?”

“씨발, 말 좀 그렇게 하지 마.”

잘근, 아랫입술을 깨물며 노려보는 시선에 태성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가 선명해질수록 숨통이 트였다. 켜켜이 쌓였던 앙금이 살살 녹아내렸다.

“그래도 연락은 해 주라, 우영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모르는 너를 만들지 마.

창틈으로 새어든 햇살에 태성이 웃었다.

***

침대 위에 누운 태성은 눈을 감았다.

열여덟, 겨울 방학이다. 자고로 방학이란 학기가 끝난 후 쉬는 기간을 일컫건만, 태성의 삶에 그런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의 억지 탓에 늘 해외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머무는 나라는 늘 달랐다. 태성이 올 때마다 그녀는 각지의 원어민 튜터링은 물론, 안목을 높이라는 명분으로 예술 전시회, 음악회, 각종 뮤지컬 관람 등을 다니게 했다.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다 제치고 정말로 짜증 나는 일은 따로 있었다. 타지에 체류하는 동안 우영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었다. 지난여름, 시차가 반나절이나 나는 뉴욕에선 목소리조차 듣기 힘들었다. 이따금 밤을 새워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곤 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핑계를 대어 예정보다 일찍 돌아갔던 적도 있었다. 그나마 오클랜드는 세 시간 정도라 다행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침대에 누운 태성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종일 돌아다니느라 온몸이 피로했지만, 머릿속은 지난 일들로 빽빽하기만 했다. 전부 우영에 관한 생각들이었다.

‘우영. 어디 가?’

‘나 화장실.’

‘같이 가.’

‘아, 그냥 있어.’

굳은 얼굴로 저를 밀치고 혼자 나간 그를 따라 나갔을 때 목격한 장면이 떠올랐다. 뒤뜰 창문 너머에서 이수화와 화기애애 웃던 모습이었다.

바로 전 제게 보였던 무신경한 얼굴과는 달리, 그는 이수화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서늘한 무쌍의 눈매가 서글서글하게 휘어진다. 볼우물이 팰 정도로 시원스러운 미소는 제게만 보이던 것이었다. 그들은 즐거워 보였고, 또 더없이 가까워 보였다. 맞붙은 둘의 사이에 끼어들 틈이라곤 없는 듯했다.

태성은 창문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인데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리를 점점 빼앗기고 있다. 생각지도 않던 일들이 차츰 가까워졌다. 서서히 퍼져 가는 종양 덩어리처럼, 응당 자신만 있어야 할 곳에 이수화가 번져 오고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돌이켜보니 우영은 요즘 통 제게 관심이 없었다. 이서율의 출현 이후 꼬치꼬치 물어 오던 새끼들과는 달리, 그는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리 그게 이서율을 권우영에게서 떼어 놓기 위한 장치였다고는 하나 그런 무관심이 달가울 리 없었다.

연락도 없이 무작정 그의 집 앞을 찾아갔던 것은 충동적이었다. 평소와 달리 제게 전화는커녕 메시지 한 통 없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집 앞에서 기다렸고, 불현듯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우영아.’

-…….

‘여보세요.’

이게 맞는 일이었다. 권우영은 집에 가는 길에 늘 제게 전화를 했고, 틈틈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원래대로라면 서로가 뭘 하는지, 어딜 갔는지 행동반경을 전부 알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일상이었다.

-오늘 호준이 형이 그랬는데…….

귓가에 스며드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별 관심도, 재미도 없는 시답잖은 얘기들은 흘려들으며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제 일과를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그는 자신이 알던 권우영이다. 익숙한 말소리에 일렁이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나 무슨 일 있냐고, 안 좋아 보인다고 물어봐서 얘기하다가 나온 말이야.

문득 귀가 뜨였다. 넘어오는 침묵에 태성이 입을 열었다.

‘안 좋은 일 있어?’

-……어?

‘오늘 내내 기분 별로였잖아. 무슨 일인데?’

그렇지 않아도 종일 신경 쓰였던 일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우영에 관한 것들이었다.

우영은 답이 없었다. 적막이 불을 지피고, 사그라들었던 불씨는 다시 바르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뱉고 싶은 말이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무슨 일인데, 권우영. 왜 내가 모르는 네 일을 만들어? 왜 그래.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시선을 든 태성은 그가 걸어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우영아.’

핸드폰을 쥐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양새가, 왜인지 그늘진 얼굴이 축 가라앉아 보였다. 그가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짜증이 났다.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태성을 발견한 우영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마치 더는 다가올 생각조차 없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태성은 눈가를 굳혔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다가올 생각이 없는 상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러니 먼저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나는…….”

그가 우영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우영은 왜인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 감정의 출처를 제가 모른다는 사실에 또 화가 치밀었다.

“요즘 네가 너무 소홀한 것 같아서…… 서운해.”

짜증을 짓씹은 얼굴을 애써 숨겼다. 제가 말하면서도 화가 났다. 다가가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 것도, 손을 뻗지 않으면 닿지 않는 것도 전부 좆같아서.

“진짜 친구는 변하지 않는 거라는데, 우리 우영이는 왜 그럴까.”

팔을 뻗었다. 화를 삼켜 낸 손끝이 말랑한 뺨을 툭 건드렸다.

태성은 인내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거친 충동을 애써 짓눌렀다. 우영의 멱살을 쥐어 잡고, 무릎을 꿇긴 뒤 제게 집중하라며 종용하고 싶었다. 발갛게 물든 눈가로 미안하다는 말을 토해내게 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겠다고 해. 앞으로 비밀 같은 건 만들지 않겠다고 해. 우린 친구니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니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해.

태성은 턱을 꽉 물었다. 상상 속에서 눈물을 쏟는 우영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우영의 어깨를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인생에서 나를 빼지 마, 우영아.”

“…….”

“그딴 생각 자체를, 그냥 하지 마.”

홧홧한 속을 삼키고 태성은 또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덤벼 봐야 돌아오는 건 패배뿐이었다.

고태성이 권우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쯤은,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이잉.

태성은 흠칫, 눈을 떴다. 불현듯 들려온 진동 소리에 새카만 기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날카로운 두통이 스쳤다. 관자놀이도 지끈거렸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자, 우영에게서 온 메시지 알림이 떴다.

[우영이: 고태성언제와? 00:09]

느닷없는 연락에 태성이 눈을 깜박였다. 잠에 취한 눈을 제대로 뜨지도 않은 채 그는 바로 답장을 입력했다.

[00:09 다음 주 월요일?]

숫자는 곧 사라졌다. 그는 대화방을 끄지 않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기혁과 셋만 있던 채팅방에 이수화까지 낀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단둘이 시시덕대며 메시지를 주고받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우영이: 빨리와 자기^^ㅎ너없으니까 존나심심하당ㅎㅎ (이모티콘) 00:11]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태성의 눈이 차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머릿속에 햇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00:12 응. 선물 사 갈까?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픽 웃음이 샜다. 종전까지 시야를 메우던 잡다한 사념이 단 몇 줄의 텍스트로 남김없이 사라졌다. 대화방엔 저를 제외하고 두 명이나 더 있었으나, 그가 찾는 건 저 하나였다. 그 사실이 그를 들뜨게 했다. 물론 다른 놈들은 저와 댈 것도 못 됐다.

[남기혁: ㅇㅇㅇㅇ나 있어! 휘X커스 초콜릿~~~~ 거기서 파는거 존나 유명하다매ㅋㅋ 00:12]

[00:12 닥쳐 씨발]

[우영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00:13]

[남기혁: ㅡㅡ시발 진짜 너무한거아냐??? 왜나한테만 그래? 존나 상처야ㅅㅂ 00:13]

오붓한 분위기를 깨는 말에 신경질 섞인 답을 보냈다. 개인 톡으로 보내면 될 것을 굳이 왜 단체방에 보내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우영이: ㅋㅋㅋ야야 그만해 그러다 남 또 운다;; 기념품은됐고 빨리오기나하세요ㅎㅎ 00:13]

[00:14 응. 빨리 갈게 우영아. (하트)]

-남기혁 님이 나갔습니다.-

-우영이 님이 남기혁 님을 초대하셨습니다.-

“병신…….”

남기혁의 행동에 혀를 차고는, 우영의 프로필을 눌러 보았다. 유니폼을 입고 공 위에 발을 올린 채 웃고 있는 모습은 제가 운동장에서 찍어 준 사진이었다.

문득 허스키한 음색과 귀여운 눈웃음이 떠오른다. 우영과 함께 있을 때면 모든 것이 괜찮은 것만 같았다.

한국 가고 싶다.

불현듯 몰려온 생각에 잠겼다.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그와 함께 떠나고 싶었다. 단체로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갔을 때마다, 시끄러운 놈들을 전부 치우고 단둘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능했다면 이곳에라도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스무 살이 된 권우영은 어떨까. 조금 더 성숙해지려나, 아니면 여전히 귀여울까.

태성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감시 아래서 벗어나고 싶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후에는…….

어렴풋이 흩어지는 잔상에 잠기는 사이, 저도 모르게 수마에 잠겨 버렸다.

지이잉.

다시 울린 메시지에 그가 흠칫, 잠에서 깨어났다.

[ㅇ: 우영아. 혹시 지금 통화 돼? 00:54]

느릿느릿 메시지를 확인한 태성의 낯이 일그러졌다.

이름 한 글자도 적기 싫어 ‘ㅇ’으로 대강 저장해 놓았던 이수화였다. 개인적인 용건도 단체방에 보내라는 제 말을, 놈은 꼬박꼬박 잘도 지키고 있었다. 멍청한 놈이었다.

메시지를 읽어 낸 태성은 눈살을 찌푸린 채 우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심한 시각에 두 놈이 시시덕거리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고객님이 통화 중이어서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

한발 늦었다. 이미 그들은 통화 중인 듯했다.

“아……. 씹.”

진득하니 내려앉던 잠이 싹 달아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성은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라도 해야 이 불편한 심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

샤워를 마친 후 가운을 입고 나온 태성이 핸드폰을 들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우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통화 중이어서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

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통화 중이라는 음성만 흘러나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훌쩍 지났다. 아직도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해 대는 건지 부아가 치밀었다.

‘고객님이 통화 중이어서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

‘고객님이 통화 중이어서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

그는 마치 오기 부리듯 두 번, 세 번, 연달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 대기를 걸어 놓으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우영은 아직도 설정해 놓지 않고 있었다.

속이 갑갑해졌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쉰 태성은 물끄러미 창밖을 보았다.

유난한 집착이란 걸 알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커져 가는 소유욕을 절제할 수가 없었다. 그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니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권우영 말고 마음에 드는 놈은 없었다. 그는 고태성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친구이므로, 그 또한 저와 같이 자신만 봐야 했다.

지이잉.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태성은 빠르게 화면을 눌렀다.

-어. 왜 전화…….

“우영아.”

-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평한 목소리에 눈가를 찌푸렸다.

“전화 좀 잘 받으면 안 될까?”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원할 때 연락이 닿지 않는 건 싫었다. 왜 통화대기를 설정해 놓으라는 제 말을 듣지 않는 건지 열이 받았다.

-아, 미안. 통화 중이었어.

“내가 통화 중 대기 걸어 놓으라고 했잖아. 씨발, 내 말은 맨날 귓등으로 처듣지.”

-쏘리 쏘리, 깜박했어. 왜?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태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맞댄 것도 아닌데 열을 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안달 내는 건 늘 저 혼자였다.

“……누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하는데. 이수화?”

-어, 아니 이수화는 잠깐 한 거고, 남기혁이랑. 근데 왜 전화했어?

아무렇지 않게 건네 오는 우영의 말에 태성은 입을 다물었다. 오랜 시간 통화한 놈이 이수화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몰려왔다.

하아. 태성은 꽉 막힌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럼 왜 전화했냐니까.

“우리가 꼭 용건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야?”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거기 세 시간 차이 난다며. 너 지금 잘 시간 아냐?

다정하게 묻는 음색에 태성은 도로 털썩 누웠다. 몸을 뒤척여 모로 돌아눕고는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수화기 너머로 답을 기다리는 우영의 숨소리가 얕게 들려왔다.

“잠이 안 와, 우영아.”

-…….

“그래서 전화했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실은 잠들었다가 깼지만, 일부러 은근한 투정을 부려 보았다. 괜한 심술이었다.

-잠이 왜 안 와. 배고파? 음식 안 맞냐? 그러게 가뜩이나 편식도 많이 하는 놈이 거길 왜 가. 그냥 여기 있지.

걱정하는 어조에 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런 걸 듣고 싶어서.

-고태성.

“응.”

-언제 와?

“다음 주에.”

-아, 존나 멀었네……. 야, 빨리 와라.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태성이 스르르 눈을 치켜떴다.

“왜?”

-왜긴 왜야. 당연히 보고 싶으니까 그러…….

“…….”

-……지.

훅, 들어온 말에 핸드폰을 더 가까이 대었다.

-매, 맨날 보던 얼굴 못 보니까……. 존나 보고 싶네?

우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평소와 같은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가슴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태성은 픽 웃으며 목 뒤쪽에 깔려 있던 수건을 눈 위로 툭 덮었다.

“나 보고 싶어?”

-……어.

“응……. 나도.”

부드럽게 답하며 속삭였다. 아래로 드러난 입매는 가지런하게 올라가 있었으나, 그는 제가 웃고 있는 걸 깨닫지 못했다.

권우영이 저를 보고 싶어 한다. 보고 싶어 하면 보여 주면 되는 일이었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난 태성이 책상으로 걸어갔다.

“우영이가 보고 싶다니까, 최대한 빨리 갈게?”

-미친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노트북을 켜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풀어진 마음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항공 예약 홈페이지를 훑었다. 한국행 비행기 편을 안내하는 창을 이리저리 띄운 채였다.

-지랄, 난 자야 돼. 내일 경기 있어.

“경기?”

-응, 오후 경긴데 토너먼트라 아침에 나가야 돼. 아, 맞다. 나 내일 16강은 한대 운동장에서 한다? 형아가 먼저 가서 한국대 공기 맛 좀 보고 올게. 존나 신기할 듯.

갑작스러운 말에 마우스를 딸각이던 손이 멎었다.

“내일 간다고?”

-응, 왜?

날 선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태성의 눈이 비행기 시간에 머물렀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당장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긴 했으나, 한국대를 간다니. 듣도 보도 못 한 소리였다. 또 짜증이 났다.

“……씨발, 그런 건 좀 진작 말하지.”

-어? 왜?

“같이 가고 싶었다고, 처음은.”

태성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간다니. 처음은 함께 해야 했다. 수능이 끝난 후 미리 방문할 계획까지 생각해 놓은 상태였다.

“미리 얘기 좀 해, 우영아. 같이 가면 좋잖아. 나도 너 뛰는 모습 보는 거…… 좋아하는데.”

-네가 가고 싶어 하는지 몰랐지.

“아, 존나 빡친다 또…….”

그는 젖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당장 출발해도 11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오후 경기까지 도착하려면 촉박했다.

인상을 찡그린 태성은 공항까지의 거리를 계산 후, 가장 빠른 표를 예약했다. 갑작스러운 복귀로 어머니에게 댈 핑계는 생각지도 않은 채였다.

노트북을 닫은 뒤 스피커 폰으로 돌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난데없이 축구를 그만두려 한다는 우영의 말이 의외로웠으나 그 말을 제게 해 주어서 좋았다. 차분하게 낮아진 음색과 어렴풋이 들리는 웃음소리가 즐겁다. 무엇보다 당장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풀어졌다. 빨리 권우영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불현듯 준비한 말도 아닌 것을 툭 내뱉었다.

“대학 가면, 같이 살래?”

태성이 셔츠 단추를 잠그며 물었다. 종종 그와 함께 사는 걸 생각해 본 적은 있으나, 실행에 옮기려 맘먹은 건 처음이었다. 이미 졸업 후 나가 살겠다는 것은 전부터 어머니와 얘기가 된 일이었다.

“집은 내가 구해 놓을게. 넌 몸만 와라.”

-…….

“응? 같이 살자, 우영아.”

태성은 속으로 아주 커다란 집을 구할까 떠올리다가, 문득 침대와 방이 딱 하나인 좁은 원룸도 떠올렸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방 두 개 정도 딸린 집이라면 적당히 가깝게 지낼 수 있을 듯했다.

-미친. 뭐 프러포즈하세요? 황송하기 짝이 없네.

들려오는 어처구니없는 듯한 목소리에 태성이 웃었다.

프러포즈? 무심코 우영에게 꽃다발을 내미는 장면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샜다. 전화를 기다리며 화가 났던 마음은 이미 싹 가라앉은 채였다.

“왜. 나한테 시집오고 싶어?”

-…….

“그건 좀 생각해 보고. 권우영 먹는 거 감당하려면 존나…….”

-야야, 네가 잘 시간인가 보다, 헛소리하는 걸 보니.

제 말을 막는 말에 태성이 하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기다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예쁜 호를 그렸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다.

-이제 끊어, 새끼야.

“응, 잘 자 우영아.”

-어. 너도 잘자.

“내일 경기 잘하고.”

-그래.

이따 봐.

속말을 삼키며 태성은 생각했다. 이대로 권우영과 평생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