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말 좀 해 보라니까.”
끼익 끼익, 그네를 타던 남기혁이 입을 열었다. 운동화로 바닥을 턱턱 차던 우영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사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직도 머릿속은 혼란하기만 했다.
고태성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예상대로 제게 말을 걸지 않았고, 우영 또한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정말 빠르게도 흘렀다. 더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뭐 심하게 싸웠어?”
눈치 보던 남기혁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우영이 말을 하지 않자, 궁금증을 참다못한 그가 집 앞으로 찾아온 참이었다.
“어.”
우영은 대충 답했다. 자리까지 바꾸고 며칠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진심? 고태성이랑? 네가?”
“…….”
“미친, 고태성이랑 권우영이 싸웠다고?”
호들갑스레 묻는 말에 우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바라봤다. 금세 쌀쌀해진 날씨 탓에 그넷줄을 쥔 손가락이 시렸다. 우영은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아, 왜. 우린 싸우면 안 되냐.”
“어, 안 되지. 니들이 보통 사이냐?”
“뭐래.”
“살면서 고태성이랑 권우영 냉전을 다 보네. 내가 존나 오래 살긴 했나 봐.”
“지랄.”
남기혁이 신기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고태성과는 아주 어렸을 적 이후 사소한 다툼조차 없었다. 그야 늘 서로 잘해 주기만 했으니 그럴 틈이 없던 게 당연했다.
이서율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지나친 감정 과잉에 빠졌던 건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먼저 자리까지 바꾸고 아는 체도 않던 건 그 새끼다. 사과하는데도 억지 부리고 우겨댄 것도 그쪽이었다.
게다가 이름도 부르지 말고, 말도 걸지 말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태성이 제게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그냥……. 아니다.”
우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해가 생각보다 어려워졌다. 쉽사리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도 고태성을 생각하면 괘씸하고 분한 마음만 들었다.
“그냥 뭐? 뭔데.”
“몰라, 새끼야. 알아서 할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마음만 착잡해졌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우영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수능이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한풀 꺾인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요 며칠 혹사 수준으로 일상을 보내다 보니 몸과 마음 전부가 피로했다.
“어, 제발 나도.”
찌뿌둥한 신음을 내뱉은 남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시선을 둔 우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대학은 어떡하게?”
“……모르겠다. 일단 수능 끝나고 엄마랑 얘기해 보려고.”
짐짓 심각해진 얼굴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수능이고 고태성이고, 몇 안 되는 유일한 친구 놈들이 하나둘씩 흩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우영이 그네를 살살 움직였다.
“그냥 가지 마.”
“…….”
“뭔 유학이냐. 같이 대학이나 가자. 존나 말도 안 통하는 곳 가서 뭐 할래?”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남기혁이 고개를 돌려 우영을 바라보았다. 우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수화가 고맙다고 전해 달래. 저번에, 너 아니었으면 아침까지 체육 창고에 갇혀 있을 뻔했다고. 네가 맨날 그 양아치 새끼들이랑 있어서 말도 못 거나 봐.”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우영의 말에 남기혁이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뭐. 솔직히 걔네가 졸라 심했지.”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쉰다. 그 말에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하긴 심했지. 씹새끼들.”
“…….”
“하여간 우리 기혁이, 존나 멋있는 놈이야. 어?”
팔을 뻗어 주먹으로 남기혁의 가슴께를 툭 쳤다. 장난스레 웃어 보이는 표정에 남기혁이 부끄러운지 머쓱한 얼굴을 했다.
“아-. 가자 이제. 30분 지났다.”
말을 마친 우영이 다리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윤리와 사상 마저 봐야 돼.”
“아……. 좀 쉬지? 존나 빡빡한 새끼.”
그는 구시렁대면서도 우영을 따라 일어났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쉬운 시간이다. 길게 떠들 시간은 없었다.
쌀쌀한 밤 골목을 지나, 캐슬과의 갈림길에서 둘은 인사를 나누었다.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달은 여전히 밝고 환했다. 희게 따라 드는 빛무리에 심란한 마음이 흔들렸다. 우영은 일부러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등 뒤로는 새카만 그림자가 늘어졌다.
집에 돌아가 공부를 마저 끝낸 뒤, 체력 관리를 위한 팔굽혀펴기도 빼먹지 않고 했다. 딱히 한 건 없는데 모든 일과를 마치고 누우니 새벽 세 시였다.
핸드폰을 켜곤 고태성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것이 괜한 자존심 싸움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져 주기 싫었다. 굳은 치기이자 오기였다.
우영은 거친 손길로 핸드폰을 툭 내려놓고는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똑같은 아침이 시작되면 학교에 갔다. 하교 후엔 체육관에 들러 정신없이 운동하고, 집에 돌아와선 또 공부했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짧은 일상 동안 고태성은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우영 또한 똑같이 굴었다. 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밀고 당기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고태성과 이대로 영영 헤어질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저 또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을 뿐이다. 조금 가라앉으려다가도 이따금 교실 앞에 서 있는 이서율을 볼 때면 그가 싫어졌다. 괘씸하고 또 괘씸하게만 느껴졌다.
11월이 훌쩍 흐르며 날씨가 급속도로 추워졌다. 긴 기다림의 끝인 디데이가 다가왔다. 겨울 추위의 시작이라는 수능 날 아침이 막을 열었다.
새벽 동이 트고 알람이 울리기도 전 우영은 번쩍 눈을 떴다. 재빠르게 이불을 걷고 일어나 샤워를 했다. 할머니가 정성스레 만들어 준 아침을 먹고, 지난밤 챙겨 놓은 준비물들을 꼼꼼히 확인한 뒤 가방을 멨다. 떨리는 마음을 계속 가라앉히기도 어려웠다.
열아홉. 인생의 첫 번째 갈림길을 나누어 줄 일생일대의 관문이었다.
자신 있었다. 모의고사와 지난 수능 기출 문제 전부 닳도록 풀고 풀었고, 매번 성적도 전부 좋았다. 주어진 기회에 조금의 실수조차 없도록 죽을 만큼 열심히 했다. 하여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떨릴 뿐이었다.
핸드폰을 켜자 이수화와 남기혁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배정 학교가 전부 달랐기에, 잘 보고 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모든 답장을 마치고도 그는 화면을 끄지 않고 머뭇거렸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고태성의 프로필을 눌렀다 끄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씨…….
끝내 한숨을 내쉰 우영은 느릿느릿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것조차 하지 않으면 미래의 자신이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07:15 수능잘봐라]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숫자가 사라졌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데려다주겠다는 할머니에게 우영은 약방 문이나 여시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다리도 좋지 않은데 굳이 왔다 갔다 고생시키기 싫었다. 금세 추워진 날씨에 점퍼를 여미며 버스를 탔다. 배정 학교는 다행히도 근방에 있었다.
여유롭게 출발했더니 생각보다 훨씬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안내해 주는 대로 대기실에 자리를 잡자, 이미 저처럼 일찍 나온 이들이 여럿 있었다. 당연히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쵸파: 도착하면 화장실 위치 먼저 보는 게 좋대. 쉬는 시간에 늦게 가면 줄도 엄청 길다더라. 아, 의자나 책상 흔들리지 않는지 그것도 잘 확인하래. 중간에 발견하면 많이 신경 쓰인다고……. 07:41]
돌연 이수화에게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텍스트에서부터 횡설수설하는 놈이 떠올라 픽 웃음을 터뜨렸다. 말을 길게 잇지 않고 간단히 답했다.
[07:41 오냐]
[쵸파: 응, 화이팅! 07:41]
[07:41 너도잘봐]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수험장으로 올라가라는 방송에 눈을 떴다. 고사장에 입실해 핸드폰을 반납할 때까지도 고태성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개새끼. 설마 정말로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시험 1교시가 시작되었다. 시험지 위로 샤프를 쥔 손이 자꾸 덜덜 떨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긴장이 되지 않아 담담하다 느꼈는데 착각이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뺨을 탁탁 두드렸다. 오늘을 위해서 12년을 공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잡념은 치우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할 수 있다. 오늘은 내 인생의 시발점이자 한 번뿐인, 나를 위한 날이었다.
집중하듯 되뇌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토록 고대하던 수능 시험이 시작되었다.
숨 쉴 틈 없이 문제를 풀었다. 문제를 풀기 시작한 이래 계속 기시감을 느꼈다. 전부 몇 년 전부터 수백 번씩 봐 온 기출 문제들과 흡사했으니 눈에 익은 게 당연했다. 마치 수능이 아니라 모의고사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긴장감이 조금은 녹아들었다.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흘렀다. 단 1분도 허투루 남기는 시간 없이 끝까지 꼼꼼하게 최선을 다했다. 종이 치기 전에 가채점표에 답을 적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덥지도 않은데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왔다.
쉬는 시간에는 틈틈이 9월 모의고사 시험지와 탐구 개념 등을 정리해 놓은 노트를 봤다. 고태성은 잘 보고 있으려나. 괜히 툭툭 튀어나오는 생각을 욱여넣었다.
점심시간, 할머니가 정성스레 싸 준 도시락을 먹은 뒤 자꾸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딴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그렇게 1교시, 2교시, 3교시, 4교시. 끝내 모든 시험을 마쳤다.
우영은 긴 숨을 내쉬었다. 종일 문제를 푼 게 아니라 운동장이라도 뛴 듯했다. 빳빳하게 굳은 몸에 얼얼한 근육통이 일었다.
가방을 전부 챙긴 뒤 반납했던 핸드폰을 받아들고 전원을 켰다. 대화방 스크롤을 내리는 우영의 눈이 채팅방을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대강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쳤다.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구름 뒤로는 붉은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단전부터 끌어 올린 깊은숨을 끝까지 내쉬었다.
주변을 스치는 인파 사이로 웃음소리, 우는소리, 고함과 떠드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우영은 느리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허탈함이 몰려왔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속 시원하기도, 헛헛하기도 했다.
우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세수하듯 얼굴을 문질렀다. 하아, 끝났다. 이제 다 끝났어. 겨우 가라앉힌 마음을 꾹꾹 억누르며 다시 걸음을 떼었다.
“엄마!”
누군가 크게 외치며 뛰어가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기다리던 부모에게 와락 안기는 여학생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몸이 축축 처지고 피로할 뿐이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다 고개를 돌린 우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교문 끝에 서 있던 할머니가 환한 얼굴로 손짓하고 있었다. 아직 약방의 문을 닫을 시각도 아닌데 여기까지 수고스레 온 걸 보니 헛숨이 터졌다.
“아……. 오지 말라니까.”
괜스레 혼잣말하며 읊조리는 순간, 참고 있던 뜨거운 감정이 울컥, 목 뒤로 넘어왔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우영은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태성이도 한 번 오라고 혀. 고생했응께 할미가 맛있는 거 해 준다고. 응? 저 기혁이랑.”
불판 위의 소고기를 집어 먹던 우영이 부은 눈가를 찡그렸다. 운동장에서 괜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 서럽게도 울었다. 할머니 앞에서 아이처럼 운 것은 머리가 큰 이후 처음이었다.
“됐어요, 할머니 드셔. 그만 굽고.”
우물거리며 집게를 뺏어 들자, 그녀가 우영의 등을 짝 때렸다. 동시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
“줄 때 어여 먹어. 헛소리 말고.”
다시 고기 집게를 뺏어 가는 그녀를 보며 우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나이가 많아도 힘은 장사였다.
칙칙 고기 굽는 소리와 희뿌연 연기가 주방 안으로 솔솔 퍼졌다. 입 안 가득 쌈을 우물거리며 식탁 아래로 핸드폰을 몰래 켰다. 밥 먹을 때 핸드폰을 보지 말라는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슥슥 스크롤을 내려 보아도 고태성의 연락은 없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짜증이 났다.
남기혁도, 이수화도 그럭저럭 잘 봤다고 했다. 성격상 ‘이수화의 그럭저럭’이면 무시무시하게 잘 봤을 것이고, ‘남기혁의 그럭저럭’이면 생각보다는 못 봤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기왕이면 다 대박이 나서 어디든 제일 좋은 조건으로 갔으면 했다.
고기를 배불리 먹은 뒤 개운하게 씻고 자리에 누웠다. 일부러 가채점표는 펴 보지 않았다.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 입력해 놓고 자면 내일 아침 결과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었으나, 그런 허무한 방법보다 직접 제 손으로 채점하고 싶었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그간 거의 자지 못했더니 잠이 쏟아졌다. 수마와 함께 고태성의 얼굴이 함께 밀려들었다.
***
오래간만에 정말 푹 자고 일어났다. 간밤에 무슨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몸이 씻은 듯 상쾌해 컨디션이 좋았다. 아마 평생 짐처럼 짊어져 온 수능을 끝낸 탓일 터였다.
창밖을 보니 푸르스름한 동이 트고 있었다. 번쩍 눈을 뜬 우영은 이불을 헤치고 허겁지겁 책상에 앉았다. 포털 사이트를 켜는 데만 한 세월 걸리는 오래된 노트북을 붙들고서 홈페이지의 답안을 다운로드했다.
채점지를 펴 놓고선 심각한 얼굴로 유심히 모니터를 훑었다. 샤프가 사각사각 동그라미를 그렸다. 헷갈린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맞을 때마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국어, 영어, 수학, 사탐. 채점하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그렇게 마지막 문제의 채점을 끝냈다. 빈 노트에 전체 과목 점수를 적어 낸 우영은, 긴 숨을 내쉬며 무너지듯 책상에 엎드렸다.
“하아……. 씨발…….”
형광펜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손끝이 하얘졌다. 책상 위 덩그러니 놓인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98, 93, 96, 48, 47, 48]
아! 책상에 머리를 박은 우영은 저도 모르게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우렁찬 목소리에 식사를 준비하던 할머니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우영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그대로 벌떡 뛰어나가 눈이 휘둥그레진 할머니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이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점수였다.
“할머니! 씹, 나 한국대 붙었어! 안 봐도 통과야!”
격정적인 감동에 눈가가 시큰시큰했다. 몇 번이고 꼼꼼히 확인했으니 답안을 잘못 작성했을 리도 없었다.
붙었다. 합격 통지를 받지 않아도 완전히 딱 붙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굳이 체교과를 지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한국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아이고! 잘했네, 내 새끼! 어이구, 장해라. 어이구, 고생했어.”
할머니는 덩실덩실 웃으며 머리를 턱턱 쓰다듬었다. 우영 또한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를 끌어안고 웃었다.
“아, 잠깐만요!”
한참 호들갑을 떨던 우영이 방으로 다시 달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때맞춰 남기혁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신이 나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씨발, 나 붙었다!”
그는 남기혁이 채 말하기도 전 버럭 소리를 쳤다. 수화기 너머로 남기혁도 소리를 질렀다.
-미친! 그럴 줄 알았어! 와, 시발 얼마나 잘 본 거냐.
그가 꽉 잠긴 목소리로 맹맹하게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보이는데도 한껏 들떠 있는 게 느껴진다. 우영은 여전히 실실 웃는 얼굴로 얼굴을 문질렀다.
“어, 존나 잘 봤어. 하, 넌 어떻게 됐냐?”
-아, 뭐 당연한 걸 물어? 나야 프리 패스지이.
“아……. 씨발, 다행이네. 야, 나 존나 울 것 같아. 손 채점하는데 떨려서 뒤지는 줄 알았잖아. 입학하기 전에 심장 마비로 뜰 뻔했다고.”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주르륵 기대앉았다.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간 미친 듯이 공부하고 운동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독하게 힘들었던 것들을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미친 새끼. 그걸 손으로 채점했냐? 존나 용자네, 권우영. 넌 학원도 안 다니고 공부 어떻게 그렇게 했냐?
“원래 진짜 범생이는 교과서만 보고 공부하는 거야, 새끼야.”
실실 웃으며 한 말에 남기혁이 큭큭대며 웃었다. 동틀 녘 새벽부터 시작된 남기혁의 수다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심오한 주제로 이어졌다. 수능을 잘 쳤으니 한국에서 대학을 갈지, 아니면 누나들을 따라갈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우영은 웬만하면 한국에서 같이 다니자는 주의였으나, 네 뜻이 가장 중요하다며 남기혁을 응원해 주었다. 그 또한 그런 우영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30분 남짓의 수다가 이어지던 중, 문득 정적이 흘렀다. 수다스러운 말 사이로 꾹꾹 참았으나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오늘도 연락이 오지 않았던 고태성의 안부였다.
“고태성은 잘 봤대냐?”
-와. 미친, 아직도 화해 안 했어?
한껏 놀란 목소리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수능 준비로 다들 정신이 없었으니 따로 얘기할 새도 없었다.
“어.”
-뭘 물어보냐. 잘 본 것 같긴 한데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끊었다. 그 새끼 요새 존나 바쁘잖아.
우영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불현듯 저와 고태성이 이런 식으로 소식을 건너 듣는다는 게 이상하고 낯설게만 느껴졌다.
“뭐 하는데 바빠?”
조심스레 묻는 말에 목이 잠겼다. 수화기 너머로 꿀꺽꿀꺽 물을 마시던 남기혁이 입을 열었다.
-걔 이서율이랑 연애하는 거 같던데?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이 움찔 움직였다. 돌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번져 갔다. 팽팽 돌아가던 사고 회로가 뚝 하고 멈춘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그 새끼, 아마 내일인가 모레부터 뉴욕 갈걸? 그 캐슬 아줌마들 부녀회에서 정시 끝나자마자 해외로 보내는 게 좋다 어떻다 난리 쳐서 기주 누나 때부터 원래 다 보냈대. 고태성은 어머니 회사 뭐 인턴십 어쩌고 말하던데 자세히는 못 들었어. 나한테 얘기 안 해 줘, 그 개새끼.
우영은 입을 다물었다. 진공 상태 속에서 남기혁의 목소리만 줄줄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 나도 누나들이 수능 끝났으니까 잠깐 오라고 난린데, 어차피 쭉 가야 할 수도 있는데 이 기간에 가서 뭐 하나 싶어서 고민 중. 여보세요? 듣고 있냐?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래서, 나 만약에 잠깐 갔다 오게 되면 너도 같이 신청할래? 엄마한테 말해 놓을게. 돈 없어도 돼, 그냥 몸만 오면 된대. 이거 우리 엄마가 먼저 물어봤었어.
구구절절 읊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귓가엔 뭐라 말하는 소리만 윙윙 울려 댔다.
‘집은 내가 구해 놓을게. 넌 몸만 와라.’
남기혁의 말 위로 언젠가 고태성이 했던 말들이 겹쳐 들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웃기는 말이었다.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시험은 어떻게 봤는지, 서로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고 남처럼 지내는 주제에 평생 갈 것처럼 잘만 지껄여 댔다는 게 우스웠다.
딱딱하게 굳은 심장이 욱신거린다. 해외 단기 프로그램 따위를 늘어놓는 남기혁을 향해 우영은 맥락 없이 제 질문을 툭 던졌다.
“사귄대?”
겁쟁이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전에도 겪어 본 적 있는 일이었다.
-뭐, 고태성?
“어.”
-그럴걸? 그 새끼 이서율이랑 연락한 지도 존나 오래됐잖아. 안 사귀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걔 맨날 교실 찾아오는데 막지도 않고. 고태성 그러는 거 본 적 있냐고.
구시렁대는 말에 우영이 입술을 꽉 물었다. 꽉 쥔 손등 위로 핏줄이 툭 불거졌다.
-그 새끼도 모쏠인데 이제 눈떴나 보지, 뭐. 하여간 눈 높은 건 시발……. 이서율 정도 아니면 눈에 안 찬다 이거 아냐. 존나 왕자님이야 뭐야.
기억 속에 선연하게 남은 선남선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름을 부르던 다정한 음색과 표정, 교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그녀의 수줍은 얼굴까지 전부.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덮쳐 왔다. 수년간 저는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일을, 그녀는 그렇게 쉽사리 이룬 듯했다.
우영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고태성. 세 글자에 혀 아래 역한 숨결이 고인다. 시커멓게 곪은 심장이 박동을 멈췄다.
절대 그와 멀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제게 고태성은 일상이었고, 습관이었다.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믿었다. 늘 함께하던 제가 없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우리 둘은 떨어질 수 없다고. 지금 잠시 멀어지는 건 짧은 성장통일 뿐이라고.
근 몇 주간 고태성에게 매달렸던 제 모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혼자만 틈틈이 보내던 시선, 홀로만 이어 가길 원하는 관계, 상대를 헤아리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 수능 날에도 오지 않던 답까지.
그는 우영과 달랐다. 그 모든 빈자리에 또 다른 사람을 채워 넣었다. 그러니 저처럼 공허하지도, 빈자리가 우울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저를 무시할 수 있던 것이었다.
불현듯 혼자만 하는 구질구질한 짝사랑에 진절머리가 났다. 초라하게 낑낑대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이어 가려는 제 볼품없는 모습도, 전부 꼴 보기 싫어졌다.
아. 하기 싫다. 진짜 하기 싫다. 고태성 좋아하기 싫다. 너무 싫어. 존나 싫다.
-근데 너넨 화해 언제 하게?
얼떨떨하게 묻는 말에 우영은 짙은 숨을 내쉬었다.
“안 해.”
-어?
다시 눈을 감은 우영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안 한다고. 그딴 거.”
시야를 덮친 어둠 속에서 그는 홀로 자조했다. 시작부터 정해져 있던 대로 이 단막극의 끝은 새드 엔딩이어야만 했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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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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