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9/21)

4.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동이 터 버렸다. 이불 위에서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던 우영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학교 가기 싫다. 고태성을 좋아한 이래 처음으로 해 본 생각이었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곤 아무 연락 없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젯밤 일이 마치 꿈같았다. 시계 초침은 이미 평소 그와 만날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 나간 우영이 커튼을 살짝 걷었다. 늘 시간 맞춰 칼같이 제 집 앞에 와 있던 고태성은 보이질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 거짓말하고, 생일 약속에 늦기까지 했다. 그가 불러 달라던 노래는커녕 제 손으로 선물조차 전해 주지 못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나뒹굴던 초라한 선물 상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주워 갔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엉망으로 깨지고 부서졌을 것이 분명했으니 차라리 버려지는 편이 나았다.

다시 커튼을 친 우영은 평소와 달리 느지막이 준비했다. 그나마 할머니가 새벽같이 보육원 봉사에 나가고 없어서 다행이었다.

느리게 씻고, 느리게 밥을 먹고, 느리게 교복을 갈아입은 그는 한참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저 가만히 시계만 바라보다, 더는 미룰 수 없어졌을 때 즈음 집을 나섰다.

몇 번 겪어 보았듯 고태성이 없는 등굣길은 공허하기만 했다. 당연한 일이다. 권우영에게 고태성은 일상이자 습관이었다.

멀리 보이는 학교 정문을 지그시 보던 우영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묵묵히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의 눈동자는 자연스레 고태성을 찾았다. 오래 볼 것도 없이 남기혁의 책상 위에 걸터앉은 고태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희미하게 웃음기 어린 얼굴과 언뜻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낯선 행동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늘 자신을 발견하면 ‘우영-.’ 하고 부르며 곧장 걸어오던 놈이었으니까. 어젯밤 그와 싸웠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뒷문에 가만히 서 있던 우영은 가방끈을 꽉 쥐었다.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가 제 자리에 앉았다. 수시 합격한 아이들이 있느니만큼 교실은 어수선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사이로 가방을 걸어 놓고 아무렇지 않게 교과서를 폈다.

뭐가 들어올 리 없었다. 고태성과 이런 식의 감정싸움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가 제게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도, 그렇듯 요란한 감정의 기복을 보여 주는 것도 전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 와 닿지 않았다. 되새길수록 꿈인 것만 같았다. 악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최인호’. 낯선 명찰에 시선이 머문다. 오다가다 몇 번 본 적 있는 같은 반 아이였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최인호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안녕. 나 태성이가, 자리 여기에 앉으래서.”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의 시선이 고태성에게로 향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는 감흥 없는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곁에는 침 튀기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박진우와 유영재가 보였다. 그러니까, 본디 붕괴는 작은 균열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었다.

우영은 아무렇지 않게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최인호가 들어갈 수 있도록 의자를 앞으로 당겨 주었다.

이렇게 나온다고. 착잡한 속으로는 욕을 곱씹었다.

동시에 교실 안을 가득 메우는 종이 울렸다. 옆자리에 고태성이 없어도 수업은 시작되었고, 담임의 야단과 함께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중간중간 남기혁이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나중에 얘기하잔 말과 함께 넘겼다. 당장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수화 또한 결석이었다. 물론 현명한 선택이다. 오늘은 집에서 푹 쉬는 게 나을 테고, 저 또한 당장은 눈앞에 그가 없는 편이 좋았다. 따로 그를 챙길 정신도 없어 자초지종 사정을 들어 볼 틈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일부러 최인호와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싶은 오기였다. 첫 수업 시간 내내 칠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엇나가는 눈동자는 자꾸만 정반대에 앉은 고태성에게로 향했다. 그는 기다란 팔을 늘어뜨린 채 우영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하는 짓이 투명해서 어이가 없었다.

“개새끼…….”

욕을 중얼거리며 샤프로 노트 위를 죽죽 그었다. 다른 놈이었으면 진작 가서 사과했을 것이다. 하나 그에게만큼은 쉽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가 받은 상처와 별개로 자존심이 상했다. 가장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 외면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골이 띵하고 피로했다. 오만가지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한몫했다. 우영은 물끄러미 주변을 훑었다. 1차 수시 합격 발표가 끝난 뒤였고, 합격자들의 출결도 좋지 않으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손바닥으로 뻐근한 눈을 짓누르다, 양팔을 겹치고 엎드렸다. 손등 위에 뺨을 대자마자 짓누르듯 덮쳐 오는 수마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눈앞에 책을 읽고 있는 고태성의 옆모습이 보였다. 끔뻑, 끔뻑.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깜빡일 때마다 고태성은 최인호가 되었다.

아. 자리 바꿨지. 불현듯 떠오른 현실에 맥이 빠졌다.

무거운 눈을 치뜬 채 우영은 멀거니 그를 응시했다. 최인호는 특징 없는 선한 인상에 고요한 분위기를 풍겼다. 반에 이런 애도 있었나? 평소 이리저리 오지랖 부리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 낯선 게 당연하건만, 그래도 2년은 같은 반이었을 텐데 저도 참 관심 안 주고 살았다 싶었다.

불현듯 시선을 느꼈는지, 최인호가 고개를 돌렸다.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왜?”

묻는 말에 괜히 머쓱해진 우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긋 보았다. 세상모르고 잠든 탓에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밥 안 먹냐?”

“어, 응.”

무뚝뚝한 답과 함께 최인호는 다시 문제집에 시선을 처박았다. 의외의 답에 우영이 눈을 치켜뜬다. 팔뚝 위에 뺨을 붙인 채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밥을 왜 안 먹어?”

물음에 짧은 침묵을 지키던 최인호가 책장을 넘겼다.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수롭잖게 답했다.

“같이 먹을 사람 없어서.”

예상치 못한 답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저도 오늘은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왕따 신세가 된 게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이 샜다.

으으,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찌뿌둥하게 기지개를 켰다.

“가자, 그럼.”

“…….”

“나도 먹을 사람 없어.”

베고 자느라 구겨진 교과서를 덮고는 고개를 좌우로 스트레칭했다.

먹을 사람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은 건가? 그럼 매일 점심을 거르나? 매점에서 사 먹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석식은? 야자는 안 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힐끔 그를 보았다. 하기야 저도 불편할 테니 굳이 묻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어차피 수능까지는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이후론 볼 일도 없는 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둘은 한마디 말도 없이 급식실에 도착했다. 식판을 들고 선 최인호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무뚝뚝한 편인 듯했다. 외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대강 제일 가까운 식탁에 자리를 잡자, 맞은편에 그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많이 먹어라.”

“응, 너도.”

습관처럼 씩 웃으며 수저를 쥐고 시선을 드는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니 저를 보는 고태성이 보였다. 아마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중인 듯했다.

우영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고태성과 이대로 쌩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단단히 화가 났으니 사과도 제가 먼저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평소처럼 능청스레 굴기가 어려웠다. 그저 잠깐 사이가 틀어졌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말로 다 표현 못 할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우영을 혼란하게 했다. 심장을 자근자근 밟히는 기분이었다.

아……. 씨발. 그냥 빨리 지나가라.

고개를 숙이곤 묵묵히 밥을 퍼먹었다. 분명 배가 뒤지게 고팠었는데, 모래라도 씹는 양 아무 맛도 느껴지질 않았다. 기계처럼 우물거리다가 아득 혀를 씹었다. 따끔함에 와락 미간이 모였다.

“우영, 인호.”

키들대는 불길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빈 식판을 들고 가던 박진우 패거리가 멈춰서 웃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통 뒤로 멀찍이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고태성이 보인다. 사이론 당황한 얼굴의 남기혁도 보였다.

“맛있게 먹어.”

고개를 숙인 최인호의 어깨를 턱턱 쳐 대는 박진우의 손가락에 시선이 갔다.

‘이수화에서 최인호로 갈아탔냐.’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빈정거림에 우영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싸하게 식은 눈빛이 말의 출처인 유영재에게로 향했다. 불현듯 끓어오른 분노로 수저를 꽉 쥐었다. 미묘한 비아냥에 전신에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참자, 참아야 한다. 늘 그랬듯 양아치들을 상대로 난리 쳐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식판으로 시선을 내린 우영은 다시 수저질하기 시작했다.

“취향 한결같네, 권우영.”

전보다 더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대놓고 시비를 걸어 왔다. 아무렇지 않게 씹던 것을 우물거리던 우영은, 국을 후룩 떠먹으며 유영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 넌 내 취향 아니라서 어쩌냐.”

유영재가 눈을 치켜떴다. 답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그의 낯빛에 옅은 당황이 어렸다. 먹던 것을 꿀꺽 삼킨 우영이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야. 영재, 친구들한테 좀 잘해야겠다.”

영문 모를 말에 유영재가 미간을 모았다. 빈 의자에 팔을 걸친 우영이 고개를 까닥이며 슬쩍 웃었다.

“네 좆같은 면상 보니까 입맛이 뚝 떨어지는데, 밥도 같이 먹어 주고 얼마나 비위 좋아?”

“…….”

“미리미리 고맙다고 해, 새끼야.”

능청스레 웃으며 일그러진 눈을 주시하자, 정적 속에서 김진성과 이진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던 우영이 ‘왜?’ 입 모양으로 되물었다. 물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야, 좀 가자.”

“그래, 좀 사이좋게 지내, 애들아아.”

남기혁의 채근에 박진우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짜증스러워 보이는 유영재를 이끌고 그들은 웅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사이로 어느새 다가온 고태성이 보였다. 냉랭한 시선이 우영을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10년 가까이 본 적 없던 눈빛이다. 멀거니 그를 응시하던 우영은, 고태성이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시선을 내렸다.

하, 씨발…….

욕을 중얼거리며 다시 수저를 쥐었다. 유영재가 시비를 걸어올 때보다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입맛이 뚝 떨어졌으나 배가 고팠다. 기계적으로 수저질을 하다 고개를 드니, 끔벅거리던 최인호와 눈이 마주쳤다.

“왜.”

“……멋있다, 너…….”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선망의 눈길이 우영에게로 향했다. 실없는 말에 우영이 눈을 치켜뜨자, 서둘러 고개를 저은 최인호가 손을 휘적거렸다.

“아니, 칭찬인데. 칭찬.”

“어……. 그래.”

그러든가 말든가, 우영은 대강 중얼거리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릿속엔 고태성의 무감한 눈동자만이 떠올랐다. 누군가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속이 쑤시고 답답했다.

아……. 존나 짜증 나네.

그깟 양아치들 따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이 순간 그를 가장 예민하게 들쑤신 건 저를 바라보던 고태성의 냉랭한 시선이었다. 화해하고 싶은데 화해하고 싶지 않은 모순된 감정이 우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눈을 감은 우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태성, 씨발…….

조곤조곤 속삭이는 나긋한 목소리가 듣고 싶다. 저를 향해 살랑거리는 눈웃음도, 깊고 까만 예쁜 눈동자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 나 진짜……. 망했네.

우영은 홀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이런 식의 관계로는 하루도 더 버틸 수 없었다. 끝내 그는 또 한 번의 예정된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

[20:24 너네집정문앞에서기다릴게]

한참 전 보낸 메시지의 스크롤을 올리던 우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숫자 1은 사라졌으나 그에게선 답이 오질 않았다. 학원 수업이 끝나려면 최소한 열 시는 되어야 했지만, 착잡한 마음에 무작정 그의 집 앞으로 찾아와 버린 차였다.

호화찬란한 담장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 밤하늘엔 어김없이 커다란 달이 떠 있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툭 떨군다. 계절도, 밤낮도 없이 따라다니는 것이 못내 얄밉게만 느껴졌다.

돌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놀란 우영이 황급히 화면을 켰다.

[쵸파: 우영아, 옷 세탁 다 했는데 내일 학교로 가져갈까? 21:13]

기다리는 이의 연락은 아니었다. 그제야 그제 밤 제 후드 집업을 그에게 입혀 주었던 기억이 났다. 아이씨. 중얼거린 우영은 엄지로 빠르게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21:13 지금집이야?]

[쵸파: 응, 난 집에 있어. 너희 집까지 가져다줄까? 21:13]

번개같이 답이 왔다. 그 옷은 재작년 고태성이 생일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차라리 지금 받는 게 낫지, 괜히 학교에서 전해 주다 놈이 보기라도 하면 무슨 개지랄을 할지 눈에 훤했다. 안 그래도 고깝게 보고 있는 놈한테 책잡힐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21:14 ㄴㄴ나지금캐슬정문이니까갖고나와그럼]

[쵸파: 아. 그럼 잠깐만 기다려! 21:14]

답을 보내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멀찍이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드니 사복 차림의 이수화가 절뚝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 당황한 얼굴의 우영이 황급히 걸어갔다.

“야야, 아. 미안. 나 너 다친 거 깜박했다. 그냥 내일 가져오라고 할걸.”

“어? 아니야. 나 괜찮아. 그냥 하라고 해서 한 거지, 아프진 않아.”

과장되게 고개를 저은 이수화가 빳빳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안에는 비닐 포장까지 깔끔하게 해 놓은 옷이 담겨 있었다.

한 시간도 빌려주지 않은 옷을 세탁까지 깔끔히 해 온 것이 우스워, 우영은 픽 입꼬리를 올렸다. 옷을 꺼내 들고 비닐을 벗긴 뒤 쇼핑백에 넣곤 다시 이수화에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티셔츠 하나만 입고 오는 바람에 쌀쌀해지던 참이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이건 가져가. 나 그냥 입고 가게.”

“으응.”

“아버지한테 안 혼났어? 다리는 어떤데?”

옷을 둘러 입은 우영이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리며 이수화를 응시했다.

“응, 괜찮아. 조금 삐끗한 거래. 아버지는, 어쩌다 넘어졌다고 했어……. 잘 모르셔. 그냥 모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우영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도톰한 기모 후드티와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교복 차림일 때보다 더 어려 보였다.

신고라든지, 학폭위라도 열라든지, 아니면 사과라도 받아 내는 건 어떻냐든지, 수많은 말이 입 안에 맴돌았지만 하지 않았다. 제 품에 안겨 서럽게 토해 내던 울음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건 스트레스일 뿐이다. 수능을 고작 보름 남짓 앞둔 지금 그런 것들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래? 뭐, 네가 그게 편하면 됐지.”

이수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푸스스 웃었다. 새삼 무해한 얼굴에 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같은 구렁텅이에 빠져 사는 건 누구 못지않은 듯한데, 힘든 일이라곤 모르고 사는 놈 같아 보이는 게 아이러니했다.

“우영아…….”

이수화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춤거렸다. 부르는 소리에 우영이 고개를 들었다. 곧 시선을 마주친 이수화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어제 나 때문에 힘들었지……. 진짜 고마워. 꺼내준 것도, 업어 주고 도와준 것도……. 아니. 어제뿐만 아니라, 그냥, 다 고마워. 내가, 내가 나중에…… 꼭 갚을게.”

평소보다 빠른 어조로 중얼거린다. 제가 뱉은 말에 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놈을 보며, 우영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가늘어진 눈이 어렴풋한 장난기를 머금었다.

“뭐로 갚을 건데.”

“……어…….”

묻는 말에 그가 돌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생각에 잠긴 그를 보던 우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밤공기 사이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애먼 사람 사채업자 만들지 마시고 그만 들어가세요, 아저씨.”

“…….”

“또 감기 걸려서 빌빌대지 마시고.”

손을 휘적거리며 등을 살살 밀어 주자,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린 이수화가 끄덕였다.

“내일은 학교 나와라. 나 밥 먹을 사람 없을 수도 있으니까.”

“응?”

툭 던진 말에 이수화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우영은 축 가라앉은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투박한 손길에 이수화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들어가. 춥다.”

“어. 으응, 내일 봐.”

“어어. 잘 가라.”

대강 손을 휘적거리자, 그가 등을 돌렸다.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우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만 보면 저놈은 존나 씩씩한 편 아닌가. 온갖 사고를 다 당해도 혼자 다 참아 내는 것이 기특하게 보이면서도, 오늘 시비를 걸어 오던 유영재를 생각하니 괜히 또 걱정스러워졌다.

하아. 터벅터벅 걸어간 우영은 담벼락에 주르륵 기대앉았다. 목 끝까지 올린 지퍼에 코를 묻고는 고개를 툭 숙였다.

괜히 너무 일찍 왔나. 시간이 갈수록 초조한 마음만 더해졌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홀드 버튼을 눌렀다. ‘21:29’. 커다란 숫자와 함께 새로 온 알림이 떠 있었다.

‘태성’

고태성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황급히 메시지를 눌렀다.

[태성: 응. 21:22]

짧은 답이지만 작게 탄식했다. 사실 만나 주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차라 내심 안심이 된 탓이었다.

쭈그려 앉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쉰 우영은 답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딱히 답할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답을 안 하기에도 모호했다.

‘빨리 와, 자기’, ‘보고 싶으니까.’ 평소처럼 주접스러운 말들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괜히 장난스레 넘어가려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아이씨. 그냥 씹을까. 언제 오려나. 도착 시각이나 물어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찰나, 바스락, 인기척과 함께 눈앞에 익숙한 운동화 앞코가 보였다. 고태성의 신발이었다.

우영의 시선이 그의 종아리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가로등 불빛에 그늘진 고태성이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왔냐. 빨리 왔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지금은 아홉 시 반이다. 원래대로라면 수업이 끝나기까지 아직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살갑게 인사한 우영과 달리 그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짧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중간에 째고 나온 건가? 벌써 오리라 생각지 못한 탓에 말문이 막혔다. 눈치 보듯 힐긋 시선을 들자, 그가 묘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물론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우영이 고태성의 눈을 마주했다.

“미안해.”

“…….”

“생일 축하도 제대로 못 해 주고.”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제 잘못이 맞았다. 생일날 말도 없이 약속한 시각을 어긴 데다, 같이 있어 달라는 것도, 노래를 불러 달라는 것도, 심지어 준비한 생일 선물조차도 제대로 전해 주지 못했다.

모든 이유가 그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이수화 때문이었고, 사실을 숨기려다 걸리기까지 했다. 바꿔 생각해 보면 이건 난데없는 제 커밍아웃 때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일이다. 그저 타이밍이 좋지 않아 모든 악재가 한 번에 겹친 것뿐이었다.

우영은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유영재가……. 체육 창고에 이수화 가둬 놨대서 열어 주느라고 늦은 거야. 그 새끼 학교 끝나고 거기서 혼자 네 시간 넘게 있었거든. 그리고 걔, 그런 데 갇히는 거 트라우마도 있어서.”

말꼬리를 흐리며 고태성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서 괜히 말실수해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신중해야 했다.

“진짜 일부러 거짓말하려던 건 아니야. 괜히 네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런 거지……. 그냥, 나중에 얘기하려고.”

“나중에 얘기하면 기분 안 나빠?”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 직설적인 답이 돌아왔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한 건 마찬가지 아니야?”

잠시 할 말을 찾던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미리 하든 나중에 하든, 사실을 숨기려 한 건 맞으니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또 맞는 말이었다.

“아니, 그래 그건 맞지. 맞는데. 난 그래도……. 아, 뭐라 해야 되냐. 그냥 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어. 아…….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네. 이건 내가 좀, 생각이 짧았다. 미안해.”

시선을 내린 채 띄엄띄엄 중얼대는 우영을 보던 고태성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우영아.”

고개를 들자,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사이에 틈이 없을 정도로 바짝 맞붙는다. 미묘한 분위기에 조금 뒤로 물러나자, 등 뒤로 딱딱한 담벼락이 닿았다. 왜인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나야……, 이수화야?”

낮은 음색은 딱딱하고 어두웠다. 하나 심각한 목소리완 달리 세 살짜리한테나 할 법한 질문에 우영의 미간이 모였다.

“나야, 이수화야?”

짧은 적막 사이로 고태성이 재차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우영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닌 건지,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얼어붙는 것 같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서둘러 답했다.

“당연히 너지, 새끼야. 물어볼 걸 물어봐라.”

“확실해?”

고태성의 눈동자가 탐구하듯 우영을 훑었다. 우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뭐라고 숨이 바짝 조여 왔다. 시야에 고태성의 붉은 입술이 들어온다. 한 뼘 정도 나는 키 차이 때문이었다.

“뭐, 맞다고. 당연한 거 아니냐.”

그는 부러 불퉁하게 구시렁거렸다.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지만, 등 뒤에 가로막힌 담벼락 때문에 물러날 자리도 없었다. 불현듯 옅은 숨결이 뺨에 닿는 것 같았다. 와중에 눈치 없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우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종일 보고 싶던 놈의 얼굴이 코앞에 들이닥치니 빳빳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야, 좀……. 비켜 봐.”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밀어 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호흡하듯 숨을 내쉰 우영이 턱을 뒤로 물리며 시선을 들었다. 뒤통수에 딱딱한 벽이 닿았다.

“……그럼…….”

가만히 우영을 내려다보던 그가 목 끝까지 채운 집업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미묘한 손길에 우영의 얼굴이 경직되어 갔다.

“그럼 내일부터 나랑만 다녀.”

“뭐?”

“네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것들 다 치우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부드러운 음색과 달리 말투는 강압적이었다.

“싫어?”

지퍼를 만지작거리던 손끝이 우영의 턱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그는 물끄러미 우영을 응시했다. 우영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남기혁도 아니고 그가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지금 그게 싫고 말고를 떠나서…….”

고태성의 고개가 비딱하게 기울었다.

“그걸 왜 떠나?”

“하아……. 야.”

“그걸 왜 떠나.”

강조하며 묻는 말에 우영은 골치 아픈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기혁과 같은 소릴 하는 걸 보니 하나같이 다 애새끼들이었다. 전에도 겪어 본 적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번에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걔 괴롭히는 새끼들 때문에 안 돼.”

적어도 지금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놈들은 불과 어젯밤 체육 창고에 이수화를 가둬 두었다. 평소 제 눈치를 살살 보던 것들이 제게 급식실에서 한 일만 보아도 눈앞이 훤했다. 제가 이수화를 놓는 순간, 그는 우스갯거리로 전락해 버릴 터였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짓을 당할지도 몰랐다.

“나도 괴로워.”

느닷없는 말에 우영이 다시 눈을 들었다. 고태성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누구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우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너 때문에 괴롭다고. 그럼 똑같은 거 아니야?”

“……아니, 씨발. 말이 왜 그렇게 되는데.”

어처구니없는 말에 우영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나보다 걔가 더 중요해?”

꽉 다문 고태성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설마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으나 그는 정말로 진심인 듯했다. 그러나 늘 그랬듯 고태성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안 중요하다고 했잖아.”

그러나 이건 물에 빠진 둘 중 누굴 먼저 구할 거냐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고태성은 물에 빠진 놈이 아니었고, 이수화는 이미 한참 전부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다른 친구의 안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버려.”

“안 돼.”

“왜?”

단호한 답에 단호한 물음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아……. 고태성.”

우영은 느리게 눈을 감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제발. 수능 이 주 남았다. 어? 좀 봐주면 안 되냐?”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놈은 아니었는데, 지금 하는 짓은 어딘가 핀트가 나간 듯 보였다. 도저히 논리적으론 말이 통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 주 동안 내가 괴로운 건 되고, 걔가 괴로운 건 안 돼?”

하. 눈을 치켜뜬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그럴듯하게 하는 것도 그의 재주였다. 결국 돌고 돌아 또 도돌이표였다.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럴 때일수록 어물쩍거려 봐야 서로 심기만 더 불편해질 뿐이었다.

“같이 다녀 그럼.”

“싫어.”

“같이 다니든지, 이 주만 봐주든지 둘 중에 선택해.”

강단 있는 어조와 단호한 눈빛에 고태성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언뜻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열기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 새끼가 대체……. 왜 좋아?”

“…….”

“걔가 뭔데, 나를 이렇게 좆같게 만들어?”

치켜뜬 그의 눈이 붉게 물든 건 착각일까. 찌푸린 눈동자를 보며 우영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으니까, 그냥 막 대해도 돼?”

한껏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선뜻 답하지 못하는 우영을 보는 그의 얼굴에 까만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야, 내가 언제 또 막 대했다고…….”

또다시 마주한 고태성의 낯선 모습이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머뭇거리는 말에 고태성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등 뒤로 비치는 가로등 빛에 그늘져 표정도 잘 볼 수가 없었다. 왜인지 잘게 떨리는 숨결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씨발…….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아.”

시선을 든 그가 우영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우영의 눈동자가 잘근 깨물린 입술로 향했다. 어둠에 가린 그의 표정이 억울해 보였다. 눈가를 찡그린 우영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그와 언쟁하기 위해 온 자리가 아니었다.

“……고태성.”

“내 이름 부르지 마.”

낮게 중얼거린 그가 상체를 세우며 뒤로 발을 내디뎠다. 멀어지려는 듯한 모양에 본능적으로 뻗어 나간 손이 그의 팔목을 다급히 쥐었다. 탁. 잡기가 무섭게 단호히 내쳐졌다. 우영은 얼얼한 손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너랑, 말도 섞기 싫으니까.”

싸한 얼굴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다시 잡히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빠른 걸음을 옮겼다. 뺨이라도 한 대 맞은 듯, 우두커니 선 우영은 막연히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새벽을 깨우는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또다시 지긋지긋한 하루의 막이 열렸다. 지끈거리는 눈을 뜨자마자 옅은 두통이 몰려왔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게도 밤새 잠을 설쳤다. 이토록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답을 떠올려 봐도 결국은 돌고 돌아 원점이었다.

괜찮겠지. 함께해 온 세월이 거의 10년이다. 수능까진 고작 열흘 남짓이고, 시험이 끝나면 이수화는 연수 프로그램을 위해 해외로 나간다고 했다. 이수화를 보낸 뒤 고태성과도 화해하고, 이수화가 없으니 남기혁도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모든 일이 게임 끝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고태성 없이 하루도 버티기 힘든 건 저 자신이었다. 최대한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봐야 했다. 오늘도 학교에 가서 말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텅 빈 등굣길을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예상했듯 고태성은 보이지 않았고, 자리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럴 만도 하지. 제 메시지에 답도 하지 않았으니 여태 화가 나 있을 게 분명했다. 제가 아는 고태성은 이런 일로 유치하게 굴 놈은 아니었는데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평소처럼 문제집을 펴고 샤프를 쥐었다. 눈을 부릅떴지만 잡다한 잡념들로 집중력이 흐려졌다. 머릿속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돌연 우뚝 일어선 우영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가로 흘러들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다시 자리에 앉고는 글에 집중했다. 집중, 집중. 공부가 우선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하니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등교한 최인호도 일찍이 자리에 앉았다. 우영의 눈동자가 본능적으로 고태성의 자리를 향했다. 평소 등교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아직 나오질 않았다.

아…… 씹. 다시 노트에 시선을 처박던 우영이 낮게 짓씹었다. 쥐고 있던 샤프를 탁 내려놓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관자놀이에 뻐근하게 피가 몰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생전 겪어 본 적 없던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종이 치기 전 냉수라도 마실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음수대에서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물을 들이켜니 속이 조금 개운해졌다.

뒤뜰에서 바람이나 쐴 겸, 뻐근한 고개를 이리저리 스트레칭하며 걸어 나갔다. 1교시 종이 치기 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고태성은 언제 오려나. 코너를 돌며 눈을 드는 순간,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딱딱하게 굳은 시선이 앞에서 걸어오는 두 인영에게로 향했다. 웃고 있는 이서율과 그 옆에 서 있는 고태성이었다.

그녀는 입을 가린 채 수줍게 웃으며 고태성의 팔뚝을 두드렸다. 멀리서도 고태성이 살짝 웃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서 있는 바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목구멍에서 울컥 뜨거운 숨이 넘어왔다. 혼란한 감정들이 명치 끝에서부터 짜르르 번져 갔다. 순식간에 그를 잠식한 건 칠흑 같은 질투였다.

미동 없이 선 우영은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복도에 가만히 서서 그들을 쳐다보는 게 이상해 보일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발 밑창이 끈적하게 눌어붙은 듯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불현듯 걸어오던 이서율과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따사로운 미소에 심장이 훅 얼어붙었다.

느리게 움직인 눈동자가 어느새 가까워진 고태성에게 닿았다. 그 또한 우두커니 선 우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멀끔한 모습임에도 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안녕.”

우영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고태성이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 왔냐.”

우영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모른 척 지나갔더라면 정말로 상처받았겠지만, 지금 이 상황도 딱히 달갑지는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눈이 두 선남선녀를 응시한다. 고태성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문득 저를 보는 이서율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또 사르르 웃어 보였다.

“안녕, 우영아.”

이서율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내 이름까지 알려 줬나 보지. 우영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우영을 응시하던 고태성이 이서율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우영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위에 얹힌 고태성의 손으로 향했다.

“서율아, 종 치겠다.”

부드럽고 다정한 음색이었다. ‘우영아.’ 하고 늘 제 이름을 부르던 때와 같았다.

“응, 먼저 가 볼게. 이따 봐. 우영이도 안녕.”

고개를 끄덕인 이서율은 곧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흔들었다.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던 제게 그녀는 친근하게도 굴었다. 바보처럼 말문이 막힌 우영이 턱을 까닥였다. 고태성을 향해 한 번 더 웃어 보인 그녀가 등을 돌렸다.

이따 봐. 이따 봐. 이따 봐.

사근사근한 마지막 말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들은 자연스레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둘이 계속 저러고 다녔던 거지. 계속 연락하고 있었던 건가? 2학년 때 잠깐 그러고 끝난 거 아니었나? 순식간에 피어오른 집착과 잡념이 빠르게 우영을 덮쳤다.

그런 우영을 두고 고태성은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에 우영이 다급히 손을 뻗었다.

“고태성.”

느닷없이 제 어깨를 잡는 손길에 고태성이 멈춰 섰다. 빤하게 보내오는 시선은 무정하기만 했다. 조금 전 다정했던 모습과 상반되는 냉랭함에 우영의 말문이 막혔다.

“내가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다소 귀찮은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짜증스러워 보이는 언행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첫 만남이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은 뜨겁기만 한데,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삽시간에 기분이 저조해졌다.

“너, 계속 이럴 거냐?”

쏘아붙이듯 뱉은 말에 고태성의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서율에게는 다정하게 웃다가 제게 이딴 식으로 구는 행동에 더럭 기분이 더러워졌다. 차별받는다는 건, 적어도 고태성에게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우영의 말에 고태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말 섞기 싫다고 했잖아.”

“야.”

“기억 안 나?”

옅은 숨을 길게 내쉰 그가 제 어깨를 짚은 우영의 팔목을 잡고 느리게 떼어 냈다.

“이제 내 말 무시하는 게 재밌나 봐, 권우영.”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니면 씨발……. 그냥 만만한 건지.”

늘 느른하게 웃어 보이던 얼굴은 베일 듯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빈정거리는 말에 우영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본 적 없는 이질적인 눈빛에 심장이 매 순간 긁혀 나가는 듯했다.

도대체, 넌……. 뭘 잘했다고.

불현듯 속에서 뜨거운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종전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낯빛에 심사가 뒤틀렸다.

“뭐가 그렇게 꼬였냐?”

억눌린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라 더 짓씹으려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종일 고태성을 신경 쓰느라 며칠 밤을 꼴딱 새웠다. 저는 공부에 온전히 집중도 못 하고 일상이 전부 흐트러졌는데, 그는 양아치 새끼들이랑 붙어 다니는 것도 모자라 팔자 좋게 연애질까지 하려고 들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내가, 씨발……. 내가 뭐 어려운 거 해 달래? 이유가 있잖아. 그거 잠깐 좀 봐 달라는데 그게 어려워? 그게 그렇게 좆같이 나올 일이냐?”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선 고태성은 더 해 보라는 듯 우영을 빤히 응시했다. 그 당돌한 눈빛에 우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며칠 밤새 스트레스받으며 잠까지 설치고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게 전부 헛짓거리 같았다. 저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서 제 행동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게 이해 가질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너 원래 이런 새끼야?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 안 하냐? 어떻게 그렇게 네 생각만 하고 사냐고. 난 씨발 이해가 안 돼!”

억울한 마음에 목구멍이 콱 막혔다. 점차 차오른 감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 마, 그럼.”

신경질적으로 돌아온 답에 우영이 말을 멈췄다. 하, 잇새론 헛숨이 터져 나왔다. 고태성의 싸늘한 시선이 우영의 얼굴 위로 스쳤다.

“이해하지 말라고.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

“바라지도 않아, 이제.”

말하며 그가 걸음을 내디뎠다. 무심한 얼굴로 툭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순간 등줄기가 저릿할 정도의 분노가 몰려왔다. 쾅, 일시적으로 폭발한 감정에 관자놀이가 띵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아……. 씨발, 진짜.”

떨리는 숨과 함께 우영이 툭 내뱉었다. 낮게 뇌까리는 욕설에 고태성이 걸음을 멈췄다. 우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짓누르듯 쓸어내렸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 입가로 헛바람이 샜다.

“너 존나 질린다.”

우영은 경직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비뚜름하게 올라갔던 입술 끝이 빠르게 굳어 갔다. 묵묵히 저를 보는 고태성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저 얼굴이 오늘만큼 미워 보일 때가 없었다.

우영은 심호흡하듯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복도 한가운데에서 드세게 악쓰고 싶은 걸 애써 참아 내고, 전에 없이 차가운 얼굴을 했다.

“그래, 네 좆대로 해라.”

“…….”

“나도 더 얘기하기 싫으니까.”

싸늘하게 내뱉곤 멈춰 서 있는 그를 먼저 지나쳤다. 성큼성큼 교실로 향하는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타오르는 분노에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씨발, 씨발……. 개 같은 새끼……!

속으로 엉망진창 욕을 하며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투박하게 걷는 소리와 의자를 빼는 거친 손길에 둔탁한 마찰음이 났다. 옆에 앉아 있던 최인호가 힐긋 시선을 주었다.

서랍에서 문제집을 꺼내 펼쳐 놓은 우영은 노려보듯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쓰린 속이 들들 뭉그러진다. 뻐근할 정도로 안압이 찼다.

됐어. 씨발, 할 만큼 했잖아. 할 만큼 했어, 권우영.

더는 그에게 쓸모없는 기력을 쏟지 않을 것이다. 턱에 꽉 힘을 준 그가 곱씹듯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