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8/21)

3.

체육복으로 갈아입힌 이수화를 데리고 빵과 우유를 사 한적한 벤치에 앉았다. 고태성은 보이질 않았고, 우영도 굳이 그를 찾지 않았다. 지금 그를 마주했다간 또 괜한 말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갓 사춘기라도 맞이한 소년처럼 감정의 기복이 널뛰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으나 속이 늘어진 반죽처럼 착잡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로써 고태성이 이수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이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태성과 이수화.

선택하라면 당연히 고태성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수화를 놓을 수는 없었다. 제가 등 돌리는 순간 그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훤했으니까. 버려졌다고 생각했을 때에 그가 느낄 감정까지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저 자신 때문에 그런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수화.”

“응?”

“넌 제일 무서운 게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수화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 쥔 크림빵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어둡고, 깜깜한 데서……. 혼자 있는 거.”

의외의 답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뭐야. 애냐? 그럼 혼자 못 자?”

“아니……. 스탠드 키고 자는데…….”

그가 커다랗게 빵을 베어 물며 웅얼거렸다. 어두운 곳에서 혼자 있는 거? 어감은 이상하지만, 그와 퍽 잘 어울리는 두려움이었다. 생각지 못한 단순함에 우영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건 뭔데?”

우유 빨대를 쭉쭉 빨던 우영이 그를 대수롭잖게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수화가 우물거리던 빵을 꿀떡 삼켰다. 어렴풋이 뺨이 붉어졌다. 우영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냥……. 빨리…….”

“어.”

“대학, 가고 싶어.”

중얼거리는 말에 우영이 설핏 웃었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똑같은가. 저도 그렇고, 고태성도 그렇고, 이수화도 그렇다. 지긋지긋한 운일동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은 듯했다.

“그래-, 빨리 좀 가자.”

우영은 길게 늘어뜨린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며 중얼거렸다. 성인이 되면 유치한 서열 놀이나 남 괴롭히는 걸 즐기는 놈들도 사라지겠지. 그러면 이수화도 평범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착실히 자리 잡고 지내면 된다. 어차피 이제 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할 터였다. 남기혁도, 고태성도, 그리고 권우영 자신도.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빨대를 질겅거리던 우영이 물끄러미 이수화를 응시했다. 그는 식량을 비축하는 다람쥐처럼 입 안 한가득 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진즉 빵 세 개를 해치운 우영과 달리 고작 한 개 먹는데도 속도가 느렸다.

입이 작아서 그런가? 괜스레 자식 키우는 아버지처럼 웃음이 샜다. 우영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맛있냐? 존나 맛있게도 먹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이수화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눈을 깜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손에 쥔 크림빵을 응시하더니 문득 그것을 천천히 내밀었다.

“줄까……?”

“됐으니까 너 많이 드세요.”

손을 휘적거리자, 눈치를 보며 다시 열심히 입을 오물거린다. 우영은 턱을 살짝 젖히곤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대낮인데도 구름 뒤로 반쪽짜리 흰 달이 어렴풋이 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자.”

툭, 우영은 별것 아닌 양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그랬는데, 우리 나이 때 문제들은 어른 되면 기억도 안 난대. 나 철딱서니 없게 쌈박질하고 다닐 때 해 준 말이거든. 아, 얼마 전에 체육관 관장 형도 비슷한 말 했었다. 어른들이 다 똑같은 말 하는 거 보면 진짜 시간이 다 해결해 주긴 하나 봐.”

중얼거리며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을 응시했다. 언뜻 돌려 이야기했으나 권우영 나름의 위로였다.

처음 깨진 안경을 쓰고 쭈그려 앉아 벌벌 떨던 놈이 떠올랐다. 복도에서 쓸데없이 시비가 걸리고, 은근히 부리는 반 아이들의 잔심부름을 떠맡아서 하고, 별것 아닌 일도 늘 제 일처럼 심각하게 생각해 주는 놈이.

“그러니까 적어도 여기 있는 동안은…….”

“…….”

“내가, 네 편 해 줄게.”

우영은 속으로 되뇌던 말을 고요히 중얼거렸다.

천성이 순하고 맹해서 그렇지 티끌 없는 아이다. 그저 그런 그를 괴롭히며 즐기는 것들이 나쁜 놈들일 뿐이었다. 이수화, 그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너도 누가 괴롭히면 말하고. 대놓고 패 주는 건 못해도 욕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형아 믿지?”

능청스레 말하며 어깨 위로 팔을 얹자, 이수화가 고개를 살짝 떨궜다. 다갈색 머리칼이 그의 눈가 위로 살랑였다. 그를 바라보던 우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짓궂게 말했다.

“어쭈, 대답 안 하냐?”

“응……. 알겠어. 말할게.”

“야. 말할 때 크게 하라고 했지. 어휴, 이 소심한 새끼를 어떻게 뜯어고치냐. 쪼그만 걸 쥐어박을 수도 없고.”

인상을 찡그린 우영이 딱밤 놓는 시늉을 하자, 이수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슴 같은 눈망울과 마주치자, 그가 우영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옅게 번지는 미소에 우영이 멈칫 그를 응시했다. 말간 미소를 따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뿌듯함이었다. 나 참, 진짜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괜한 생각에 또 웃음이 샜다.

“야. 다 먹었으면 가자.”

툭툭 바짓단을 털고 일어섰다. 주섬주섬 쓰레기를 정리하는 이수화를 데리고 다시 교실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뒷문을 드르륵 열자 와글거리던 교실 안에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다시 아무렇지 않게 제 할 일을 하는 아이들 사이로 우영이 자리를 찾아갔다. 둘러보니 고태성은 자리에 없었고, 남기혁도 없었다.

어디 간 거지. 점심도 먹지 않은 듯한데 매점도 같이 가지 못해 내심 신경이 쓰였다. 우영은 바지 주머니 속 초콜릿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매점에서 고태성에게 주려고 사 온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수업 시작까진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허투루 보내기엔 아까운 시간이었다.

잡생각을 지우고 교과서를 폈다. 오늘 자투리 시간은 고전과 윤리 과목을 복습할 차례였다. 그는 수업 시간에 꼼꼼히 적어 두었던 필기를 다시금 훑기 시작했다.

아, 집중되질 않는다. 이상하게도 내용이 머릿속에 빠릿빠릿 들어오질 않았다. 소란스러운 사위로 시계 초침 소리만 똑딱똑딱 들려왔다. 고태성의 자리, 남기혁의 빈자리로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둘이 같이 나간 걸까. 나갔다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박진우 패거리가 이수화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 남기혁의 의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어울리지 않게 붙어 있던 이수화를 평소 눈엣가시로 보아 왔을 테고, 교실에서 한바탕 일이 벌어진 직후 자연스레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가 원인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급식실에서 남기혁이 내키지 않아 하며 방관 중이었다는 건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별개로 그의 아버지의 일은 심각한 사안이었다. 이수화와 남기혁을 화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고태성이 말해 준 일을 무작정 아는 척할 수도 없었다. 두 명 다 이수화를 좋지 않게 보고 있는 건 확실했고, 우영 자신은 이수화를 모른 척 버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또 원점으로 돌아간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씹,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일순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와글거리는 소음이 한층 더 커졌다. 고개를 돌리니 시끌벅적한 무리가 교실 안으로 소란스레 들어서고 있었다. 박진우, 김진성, 유영재. 그 꼴 보기 싫은 얼굴들 뒤로 남기혁과 고태성이 보였다. 우영은 순간 눈가를 굳혔다. 괜히 모른 척 교과서에 시선을 처박았다.

뚜벅뚜벅. 수많은 소음 사이에서 제 자리로 걸어오는 고태성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우뚝 멈춰 선 그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이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어디 갔다 와?”

“밖에.”

눈을 내리깐 고태성이 보였다. 일순 그에게서 낯선 냄새가 풍겨 나왔다. 우영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단번에 그것이 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설핏 풍기는 향은 분명 그에게서 나선 안 될 냄새였다.

“밖에 어디?”

“그냥.”

자리에 앉은 그는 답도 하지 않고 책상에 붙여 놓은 시간표를 만지작거렸다.

“고전과 윤리 복습했어? 오늘 할 차례잖아.”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모른 척 건네 오는 물음에 점점 굳어지던 우영의 눈가가 곧 일그러졌다.

“왜 담배 냄새가 나?”

“그냥.”

“씨발, 뭐가 자꾸 그냥이야.”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고태성은 물끄러미 우영을 쳐다보았다. 이내 손을 뻗어 샤프를 쥔 우영의 손을 덮듯이 감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가 흠칫 등을 굳혔다. 시선을 들어 고태성을 바라보자 그가 늘 그렇듯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안 피웠어.”

“…….”

“그냥 잠깐 옆에 있다 왔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가 엄지로 우영의 손등 위를 느릿느릿 문질렀다. 묘한 손길에 자연스레 등줄기로 찌릿한 소름이 돋았다. 딱딱하게 굳은 우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천천히 눈을 들자 그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도저히, 잡힌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야자가 끝난 후 우영은 남기혁이 다니는 학원으로 향했다. 그가 우영의 연락을 피한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고태성은 별다른 말 없이 전처럼 우영과 함께 다녔지만, 중간중간 자리를 비우며 박진우 패거리와 어울렸다. 묘하게 태도가 달라진 그는 화해를 붙일 기미라곤 보이지 않았고, 우영 또한 그가 해결해 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었다. 남기혁은 수업 시간 외에 늘 박진우 패거리와 붙어 있었고, 어쩌다 혼자 남겨졌을 때 다가가면 피하기 급급했다. 그러니 우영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다가가 봐야 전처럼 무시당할 것이 뻔했으니까. 강경한 태도로 밀고 나갔다간 죽도 밥도 될 수 없었다.

수능을 몇 달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냥 하루빨리 모든 걸 털어 내고 싶었다.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 차에 고태성이고 남기혁이고 이수화고, 과다한 신경을 쓰다 보니 이것도 스트레스였다.

가만히 담벼락에 기댄 우영이 운동화 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찼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오늘은 체육관도 가지 않았다. 사내놈들 쌈박질은 주먹다짐 몇 번이면 끝난다는데, 이놈은 정말 저를 손절이라도 하려는 생각인지 피하기 바쁘니 도리가 없다.

이제 나올 때가 됐는데.

핸드폰 시계를 힐긋 보는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다니는 입시 학원 입구에서 새카만 인파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무리를 훑는 우영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여러 개의 머리통 사이로 덩치 좋은 남기혁이 비죽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우영은 조급한 걸음을 내디뎠다.

“남기혁!”

부르는 소리에 남기혁이 등을 돌렸다. 우영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티가 나게 움찔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를 향해 우영이 소리쳤다.

“야, 남기혁!”

우영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가까워진 그의 팔목을 탁 잡아채고는 낮게 말했다.

“그만 좀 피해.”

행여 놓칠세라 그의 손목을 꽉 쥔 우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찾아왔다지만 대놓고 저를 피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인상이 굳었다.

“이렇게 나랑 쌩깔 거냐?”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물었다. 이렇게 죽도 밥도 아닌 상태로 지내는 건 제 성미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진짜 그런 거면, 네 말대로 해 줄 테니까 마지막으로 얘기라도 하고 끝내. 할 말 있으니까.”

단호한 어조에 시선을 피한 남기혁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손에 힘을 주어 한 번 더 끌어당기자, 그가 못 이기는 척 조용히 걸음을 옮겨 왔다. 우선 첫 번째 관문은 통과였다.

오랜만에 남기혁과 걷는 길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요란한 간판이 다닥다닥 붙은 복잡한 학원가를 나와, 학생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버스 정류장을 지난 뒤,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인도에 올랐다. 평소에 그는 학원에서 집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기에, 걷기에는 제법 긴 거리였다. 우영은 오히려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

“네 말 안 들어 준 거.”

갑작스러운 사과에도 그는 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차도 위 차량이 빠르게 지나갈 때마다 세찬 바람이 쌩쌩 일었다. 정적 사이로는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짧게 울렸다.

“운일초 때, 나 리버캐슬 안 산다는 이유로 존나게 괴롭히려는 놈들 있었어. 그때 나 하루 건너 하루 쌈박질하고, 할머니 매일 학교에 찾아오시고 그랬는데. 너 모르지?”

우영은 담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였다.

“내가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 정도로 그쳤지, 아니었으면 존나 짜증 나게 살았을 거야. 나 말고 다른 놈들 왕따 조장하는 새끼들도 맨날 패 줬어. 그 이후로 학폭 같은 거, 같잖은 놈들이 약한 애들 괴롭히는 거 그냥 꼴 보기 싫더라.”

혀를 찬 우영이 대수롭지 않게 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현운가 뭔가 그 새끼가 뭔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모르지만……. 1학년 때도 그래. 축구 끝나고 교실 갔다가 이수화 맞고 있던 거 보고 빼 줬고, 걔 안경 깨트렸길래 안경값 가져오라고 한 거야. 뭐, 내가 걔네 돈 뺏어서 이수화 줬겠냐? 말하고 보니 네 말대로 과하게 신경 쓰는 것도 맞는 거 같긴 하다만.”

남기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영은 멈추지 않았다. 딱히 답을 바라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서운해하는 게 뭔지는 아는데……. 이건 나한테 누가 더 중요하고 누가 덜 중요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야. 그걸 말하고 싶었다고.”

눈썹을 찌푸린 우영이 그의 팔뚝을 잡았다. 따라 남기혁의 걸음도 멈췄다.

“내가 이수화를 챙긴다고 해서, 너를 안 아낀다는 게 아니야. 어? 씨발, 나 너 존나 좋아해. 기혁아.”

“…….”

“옛날부터 나한테 치대는 새끼들 존나 많았던 거 모르냐? 그 새끼들이랑은 한 번도 친구 안 먹었어. 네 말대로 너랑 고태성 빼면 놀지도 않았잖아. 기억 안 나?”

우영은 눈을 마주치려 집요하게 그를 응시했다.

“기억 안 나냐고.”

잡은 팔뚝을 흔들며 채근하는 손길에 남기혁이 꾹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나.”

작게 새어 나온 답에 우영도 멈춰 섰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무작정 걷다가 도착한 골목은 캄캄했고, 환한 가로등 불빛을 제외한 주변에는 인적도 없었다.

“이수화 지금 나 없으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 수능까지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그 새끼들 날뛰면서 괴롭히는 꼴은 못 봐. 네가 누구 괴롭히고 그럴 놈 아니라는 거 알아. 네 옆에 있는 새끼들이 문제인 것도 알고. 나 너 믿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는 남기혁을 보며 우영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눈을 내리깔며 잠시 말을 멈추곤 숨을 골랐다. 이내 다시 남기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

“네 말 못 들어줘. 그건 미안해. 근데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진심이 가득 섞인 어투였다. 서서히 고개를 든 남기혁이 우영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낯빛 위로는 혼란함이 스쳤다. 우영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팔뚝을 더 꽉 쥐었다.

“남기혁.”

“…….”

“계속 친구 하자, 우리.”

그렇게 시선을 마주한 채로, 내내 전하고 싶던 진심을 뱉었다.

“어?”

씩 웃으며 잡은 팔을 두어 번 흔들자, 그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또 적적한 침묵이 이어졌다. 눈을 치켜뜬 우영이 고개를 숙여 그를 들여다보았다.

“어어?”

보채듯 묻는 말에 남기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별안간 허공을 노려보듯 고개를 쳐든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행동을 멈춘 우영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내 홱 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남기혁이 눈을 감자, 뺨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래로는 입꼬리를 쭉 늘어뜨린 채였다.

“아, 야. 야. 잠깐만.”

당황한 우영이 그를 연달아 불렀다. 옆모습이지만 잔뜩 찡그린 얼굴에 흐르는 건 분명한 눈물이었다.

“왜, 왜 울어……. 미친놈아.”

입을 꽉 다문 남기혁이 팔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커다란 덩치가 위아래로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내 고요한 골목 사이로 소매에 가로막힌 훌쩍임이 울려 퍼졌다.

“……씨발……. 흑.”

여전히 당혹스러운 얼굴의 우영이 널따란 등을 턱턱 두드렸다. 덩치는 산만 한 주제에 울고 있는 것 또한 퍽 그다워 보여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렀다.

“아이씨……. 야아. 알았어, 알았어. 울지 마. 미안해. 이리 와.”

팔을 뻗은 우영이 그의 목을 와락 감싸고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셔츠 가슴께가 빠른 속도로 축축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요즘 왜 이렇게 제 앞에서 우는 놈들이 많은지. 하나를 처리하면 하나가 터지고, 하나를 처리하면 또 하나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야아. 뭘 울고 그러냐. 그렇게 서운했어?”

“끄윽, 흑. 개, 새끼야……. 이 배신자 새끼.”

“어어. 쌩은 지가 까 놓고.”

“씹…….”

“그래, 개새끼는 맞다 쳐. 근데 양심적으로 배신자는 아니다. 난 계속 너랑 말하려고 했어. 아니다. 빡치면 한 대 칠래?”

달랠수록 그의 훌쩍임이 커졌다. 투덜거리던 우영이 그의 등을 와락 감싸 안자, 그가 팔꿈치로 우영의 아랫배를 퍽 쳤다. “윽!”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뒤로 뺀 우영이 능청스레 웃었다.

“와, 치란다고 진짜 치냐.”

“네가 저번에, 먼저, 쳤잖아. 씨발…….”

눈을 꽉 감은 남기혁이 울음을 참으려 끅끅댔다. 저번에? 아마 교실에서 때린 일을 말하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다. 그랬지. 와, 이 새끼 그걸 담아 두고 있었네. 그럼 죽빵 칠래? 한 대 더 맞아 줄게.”

그의 손을 덥석 감싸 쥐어 제 얼굴로 끌어당기자, 남기혁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빼냈다.

“꺼, 져……! 윽, 씨발…….”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며 우영은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진작 찾아올 걸 그랬나. 그러잖아도 아버지 일로 맘고생이 많을 텐데, 며칠 내내 속을 썩였을 걸 생각하니 더 미안해졌다. “아이씨…….” 중얼거리다 남기혁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칼 위에 뺨을 문지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기혁이 서운했어?”

“뭐래, 개, 씹, 새끼가……. 윽.”

하나 그는 서러운 듯 쉽사리 울음을 그치질 않았다.

“울지 마 자기. 형아 마음 아파…….”

“닥, 쳐라. 씹, 씨발. 하아, 씨발…….”

그는 쉼 없이 욕을 지껄이며 훌쩍거렸다. 그나마 인적 없는 골목이라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눈치 많이 보는 놈이 실컷 울지도 않았을 테니까. 차라리 이렇게라도 묵은 감정을 뱉어 내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혁. 조만간 날 잡아서 고태성이랑 셋이 놀러 가자. 오락실 갔다가 떡볶이 먹고, 농구 한판 콜? 저번에 존나 재밌었잖아.”

그 말에 남기혁이 고개를 홱 쳐들었다. 울먹거리던 눈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또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달래 주려고 한 말에 더 서럽게 우니 당황스러웠으나, 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등을 팍팍 두드렸다. 우선은 그의 울음을 멈추는 게 먼저였다.

“씹, 농구, 너네 둘만, 잘하잖아. 씨발…….”

그가 가슴께를 들썩이며 우영을 노려보았다. 아. 그제야 우영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 뭐 할래. 너 잘하는 거, 아니 하고 싶은 거 하러 가자.”

딱히 잘하는 게 생각나지 않아 말을 바꾸자, 여전히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윽……. ……피시방, 가.”

코를 훌쩍이며 하는 말에 우영이 실실 웃었다.

“너 학원 뺄 수는 있고? 주말에 가던지, 그럼. 아, 고태성 생일에 갈까? 이제 곧이잖아. 그때까지 빡세게 공부하다가 하루 날 잡자. 나 요즘 너네 신경 쓰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 했어, 나쁜 새끼들아.”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또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우영은 여전히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아버지 이야기는 안 하려나, 끝까지 안 할 작정인가. 남기혁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위로를 해 주고 싶었으나 그에겐 제가 모르는 것이 외려 위로일지도 몰랐다.

“……그건.”

“뭐?”

“……해서 도와준 거냐고.”

“뭐라는 거야.”

웅얼거리는 말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돌연 고개를 휙 쳐든 남기혁이 우영을 노려보았다.

“아, 이수화, 씹.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냐고!”

아. 그제야 말의 의미를 깨달은 우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탓이었다.

“아……. 나 여자 좋아해, 미친놈아.”

픽 웃음을 지어 보이곤 남기혁의 어깨 위로 어깨동무를 한다.

“이 얼굴로 남자 좋아하겠냐? 지금은 공부하기도 바빠서 그래요. 대학 가서 존나 사귈 거니까, 별 같잖은 생각 그만 하세요. 찔찔이 씨.”

“…….”

“가자, 늦었다. 오늘은 특별히 형이 집까지 데려다줄게.”

고개를 까닥거린 우영이 실실 웃었다. 남기혁은 그제야 젖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둘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건네며 천천히 걸었다.

우영은 일부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둘러 더 먼 길로 돌아 걷자고 했다. 왜 이리로 가냐는 남기혁의 말에 그저 조금 더 걷고 싶다고 했다. 두 아이는 좁은 골목을 지나, 구불구불한 언덕을 오르고, 마른 풀숲을 헤쳤다. 아무도 찾지 않아 닦아 놓지 않은 길은 평탄치 못했다.

“잘 가라. 내일 봐. 이제 톡 답장하고, 새끼야.”

“어, 들어가.”

리버캐슬의 정문에 다다른 우영이 웃으며 손을 휘적거렸다. 코가 빨개진 남기혁이 겸연쩍은 얼굴로 손짓하고는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온 우영이 우뚝 멈춰 섰다. 고지가 높은 리버캐슬 앞 언덕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저 아래 어딘가 제가 사는 집이 있을 텐데 보이지가 않았다. 종착지가 코앞인데도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

[202X년 10월 29일 AM 11:30]

슬슬 찬 기운이 스미는 10월 끝자락, 남기혁의 아버지는 징역 2년 3개월로 끝내 법정 구속되었다. 사실이 뉴스 기사로 터질 때까지도 남기혁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우영은 그저 괜찮냐는 말 한마디로 위로를 대신했다.

고태성은 아버지가 구속되었다고 해서 남기혁네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번엔 운이 좋지 않았을 뿐, 어느 기업에서나 비리, 횡령, 배임 등의 문제는 벌어지며 출소 후엔 아마 어떻게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란 말을 했다.

남기혁은 생각 외로 의연했다. 오히려 전보다 공부에 더 매달리는 듯했다.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둘째 누나와 셋째 누나는 해외 유학을 결정했으며, 선택권이 주어진 남기혁은 우선 수능을 본 이후에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개중에 다행인 것도 여럿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추진 중인 패션 사업이 해외에서 성황인 점, 열 살 차이 나는 큰누나가 꽤 큰 규모의 사업을 시작한 점 등이었다. 이로써 그의 집은 망하지도, 또 살아가는 데에 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기사가 터진 이후 그가 혹여 또 이수화와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닐지 염려했으나,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그저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였던 듯 이수화와 아는 척 않고 지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영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반 아이들이 사실을 전부 알게 되었다는 부분이었다. 정확히는 남기혁의 아버지인 남진욱 사장을 구속한 이수완 검사가 이수화의 아버지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이었다.

흐릿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실체화되었다. 어느새 이수화는 친한 친구에게 캐낸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일러바쳐, 친구 아버지를 감방에 처넣은 개자식이 되었다. 그들은 좋은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양 틈만 나면 이수화에게 비아냥대기 바빴다. 물론 우영이 옆에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 우영이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또한 공부에 전념하기에 바빴고, 수능까지 이제 한 달 남짓 남은 시간에 이수화에게 신경 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여 그는 이수화의 옆에서 그저 같이 밥을 먹고, 필요할 때 옆자리를 지켜 주었다. 간혹 그가 음울한 얼굴을 할 때면 수능까지 남은 기간을 되새겨 주며 위로했다.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평온하게 넘어간 셈이다. 그것으로 위안 삼아야 했다.

문제집을 끄적이던 우영이 옆자리에서 필기 중인 고태성을 흘끔 보았다. 그는 같은 반이 된 내내 2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우영의 짝꿍 자리를 사수했다. 뽑기나 이름순으로 자리가 배정되었을 때도 부득부득 우기며 우영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하여간 하는 짓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놈이었다.

‘야.’

우영이 노트 귀퉁이에 글씨를 끄적였다. 책상에 턱을 괸 채 교과서를 읽고 있던 고태성이 흘긋 시선을 주었다.

고요히 내리깐 눈매와 단정한 옆선에서 우아한 여유가 풍겨 나왔다. 고태성은 늘 그랬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늘 누군가의 머리끝에 서 있는 듯한 우월함이 느껴졌다.

‘응.’ 또 예의 그 기다랗고 예쁜 손으로 구불구불한 글씨를 적는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10월 29일. 오늘은 고태성의 생일이었다. 참 저다운 계절에 태어나기도 했다. 바삭하게 마른 바람이 불지만 쾌청한 하늘과 햇볕이 따사로운, 다 끝나간 가을 자락에서 시린 겨울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요즘. 딱 고태성다운 날이었다.

‘생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당일에 묻기엔 늦은 감이 있었지만, 어차피 치레뿐인 말이었다. 해 줄 수 있는 건 늘 한정적이었다.

그는 우영의 생일에 비싼 운동화나, 가방, 유행하는 점퍼 등을 사 주었으나 우영에겐 그럴 돈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놈이니 서운해하지는 않겠지만, 받는 처지엔 똑같이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번다면 가장 먼저 고태성에게 선물하고 싶단 생각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끄러미 우영을 응시하던 고태성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길쭉한 손가락이 다시 글자를 적어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나중에? 우영이 의아한 얼굴로 고태성을 응시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뜨자 그가 살짝 웃었다.

‘올해 소원은 권우영 한국대 합격.’

힘을 주어 또박또박 굵게 적어 내려간 글씨를 보며 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 원하는 건 한결같다 싶은 생각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아래 칸에 글씨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또 있어.’

‘뭔데?’

‘오늘 같이 있어 줘.’

의미심장한 말에 샤프를 쥔 우영의 손이 멈추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가’ 글자 끝부분엔 별표까지 두 개 그리며 강조를 한다. 그를 흘끔 쳐다보던 우영이 조심스레 답을 적었다.

‘너 학원은?’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수능과 실기가 코앞이니만큼 그들은 늘 자정까지 학원에 묶여 있었다. 2학년 때처럼 은근슬쩍 쨀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남기혁과 떡볶이를 먹고 피시방에 가는 날은 주말인 토요일로 잡은 참이었다.

‘수학 뺄 거라 10시에 끝나. 두 시간 남아.’

‘어 개꿀이네? 기혁이는?’

‘오늘 엄마 때문에 못 나온대.’

‘ㅇㅇ너네 어머니한텐 허락받은 거?’

‘어차피 집에 없어서 상관없어.’

‘깨비는?’

‘상관 X’

망설임 없이 죽죽 긋는 X자를 보던 우영이 피식 웃었다.

‘ㅇㅋ그럼 체육관 갔다가 10시까지 집으로 갈게.’

오늘은 야자 없는 날이었다. 실은 수업이 끝난 후에 체육관에 가는 대신 집에 가서 할 일이 있었다. 생일 선물로 고태성에게 줄 초콜릿을 만들 계획이었다. 동그란 틀에 녹인 다크초콜릿을 붓고, 화이트초콜릿 펜으로 고태성의 얼굴을 그린 초콜릿.

사탕이나 초콜릿처럼 달콤한 군것질을 좋아하는 고태성은 당연히 좋아할 테고, 제 선에서 무리 가지 않으면서 적당히 성의 있어 보이는 선물 같았다.

그러잖아도 오늘 열두 시가 지나기 전 몰래 찾아가 전해 주고 올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일이 잘 풀렸다. 어쩐지 제가 괜히 더 들뜨는 기분이었다.

***

수업을 마친 우영은 다소 조급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부엌 앞에 섰다.

어제 미리 마트에서 사 둔 초콜릿 봉지와 틀, 포장지 등을 마구 늘어놓았다. 녹이고 붓는 것이 끝인 간단한 방법이었으나 막상 시작하려니 막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리라곤 라면 끓이는 것 외에 해 본 적이 없었다.

냄비에 초콜릿을 와르르 부어 넣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멀뚱히 선 우영은 핸드폰으로 검색한 캐릭터 초콜릿을 꼼꼼히 둘러보며 초콜릿이 녹기를 기다렸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선 채, 괜스레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덜덜 떨었다. 처음 만드는 것이어도 최대한 예쁜 얼굴을 그려 주고 싶었다.

고태성, 좋아하겠지? 단 걸 좋아하는 데다 제가 주는 선물이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동그란 초콜릿 틀과 재료들을 보니 완성도 전에 뿌듯한 마음부터 들었다.

“어, 씹. 뭐야.”

순간 냄비에서 치지직 소리가 났다. 당황한 우영이 안을 들여다보자 까만 초콜릿이 냄비에 눌어붙고 있었다. 급하게 불을 줄이고 숟가락으로 안을 휘저으며 후후 입김을 불자, 탄 냄새가 살짝 올라왔다. 우영이 와락 눈가를 찡그렸다.

“아, 씨발…….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

급하게 다시 핸드폰을 켠 우영은 포털 사이트에 초콜릿 녹이기를 검색했다.

“초콜릿을 그릇에 넣고……. 중탕……. 가열……. 중탕?”

화면을 조급하게 훑어 내려가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그제야 냄비에 그냥 넣고 녹이면 금방 타버린다는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욕을 중얼거린 우영이 불을 끄고 시계를 보았다. 기본도 모르면서 캐릭터 얼굴이나 찾고 있던 제가 한심해졌다.

그러나 아직 열 시까지는 아직 4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우선은 탄 냄새가 배는 바람에 먹지 못할 초콜릿을 다시 사 오는 게 문제였다.

대강 옷을 걸친 우영은 헐레벌떡 마트로 뛰어갔다. 다 만든 뒤에 미리 사 놓은 작은 카드에 짤막한 편지도 써야 했다. 그냥 초콜릿만 주기에는 성의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생각을 하자 왜인지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만들걸, 괜히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간 할머니가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일로 미룬 게 조금 후회가 됐다.

빠르게 뛰어 마트에 도착한 우영은 어제 샀던 초콜릿과 똑같은 것을 계산하며 알림이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고태성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태성: 존나 지루해 뒤지겠다. 18:30]

[태성: (이모티콘) 18:30]

라X언이 머리 위에 쓴 왕관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픽 웃은 우영이 거스름돈을 받는 동안 빠르게 답장했다.

[18:31 3시간만참아새끼야]

[태성: 정확히는 3시간 29분. 18:31]

[태성: 우영. 18:31]

거스름돈을 받고 주머니에 넣는 사이 또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빠르게 인사를 한 우영이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18:32 ㅇㅇ?]

[태성: 나 생일 선물 받고 싶은 거 또 생겼어. 18:32]

[18:32 미친ㅋㅋㅋㅋ뭔데]

답을 보내기가 무섭게 답장이 왔다.

[태성: 생일 축하 노래 불러ㅅ 18:33]

[태성: 불러서 보내 줘. 18:33]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우영이 혼자 실실 웃었다. 선생 몰래 책상 아래로 급하게 자판을 누르는 그가 눈앞에 떠오른 탓이다.

[18:33 미친무슨노래를보내]

[18:33 그냥이따만나서불러줌ㅋ반할준비해라]

[태성: 네 오빠. 18:36]

[태성: 기대하고 있을게요? 18:36]

[태성: (이모티콘) 18:36]

고깔모자를 쓴 라X언이 하트를 날리는 모양을 보며 우영은 낮게 웃었다. 간만에 고태성의 집에서 함께 잘 생각을 하니 또 설레는 바람에 마음이 붕 떴다.

헐레벌떡 집에 도착한 우영은 다시 초콜릿 봉지를 풀어 놓았다. 오늘 할머니는 아홉 시쯤 온다고 했으니 그 전에 모든 일을 다 끝내야 했다.

새 냄비를 꺼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초콜릿을 부어 놓은 스테인리스 그릇을 냄비 안에 조심조심 넣은 우영이 불을 올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물이 끓으면서 초콜릿이 부드럽게 녹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제 성공인 듯했다.

다 녹인 초콜릿을 꺼내 그릇 위에 올려놓고 동그란 틀에 부었다. 주변에 이리저리 묻긴 했으나 완성품만 깔끔하면 될 일이다. 그릇째로 일회용 봉투에 넣어 묶은 후 냉동실에 넣었다. 빨리 굳히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는 화이트초콜릿 펜을 끓던 물에 넣어 녹였다.

이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대로 방으로 달려간 우영은 미리 사 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뭐라고 적지? 좀 그럴듯한 말 없을까? 고심하며 연습용으로 펼쳐 놓은 노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너무 길면 구구절절해 보일지도 모르니, 짧고 굵게 적을 생각이었다.

고태성, 생일 축하해. 화이팅!

……뭐냐 이게. 써 놓고 보니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보였다. 적어 놓은 글자 위에 두 줄로 죽죽 줄을 긋고는 다시 정성스레 적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해 자기,

앞으로도 천년만년 축하해 줄게!

사랑해^^♥

이건 좀……. 개오반가.

인상을 찡그린 채 손에 쥔 샤프를 돌리던 우영이 노트를 찢었다. 대강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지고는 다시 심각한 얼굴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책상 옆 휴지통이 구겨진 종이로 가득 찰 때까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9시 10분 전이었다. 부랴부랴 설거지하고, 주방을 정리한 뒤 예쁘게 굳은 초콜릿을 같이 사 온 투명 포장지에 넣어 끈으로 묶었다. 작은 상자 안에 그것을 넣고 적어 둔 생일 카드까지 넣으니 완벽했다. 세 시간을 내리 끙끙댄 보람이 있었다.

다행히도 딱 할머니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냈다. 깔끔하게 모든 정리를 마친 우영이 땀을 닦으며 핸드폰을 열었다. 생일 선물 만들기에 집중해 있는 사이 부재중 전화 알림이 와 있었다.

‘남기혁’

남기혁? 뭐지? 생각하는 찰나 연달아 진동이 울렸다. 남기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남기혁: 사진을 보냈습니다. 20:58]

[남기혁: 사진을 보냈습니다. 20:58]

우영이 그가 보낸 스크린샷을 누르려는 순간, 또 알림이 울렸다.

[남기혁: 씨발 나엄마병원이라지금봤어 20:58]

[남기혁: 혹시모르니까연락해봐 20:58]

다급해 보이는 메시지에 그는 망설임 없이 사진을 눌렀다.

[유영재: (사진) 16:55]

[유영재: 졸라웃김ㅋㅋ권우영이 부른다고 하니까 바로 쪼르르 튀어감ㅋㅋ 16:55]

우영은 인상을 찡그린 채 남기혁이 보낸 캡처 속의 사진을 확대했다. 건물 밖에서 찍은 듯한 창문 속에 흐릿한 인영이 있었다. 화질이 좋지 않아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빠르게 원본으로 돌아온 우영이 굳은 얼굴로 대화를 읽기 시작했다.

[박진우: ㅅㅂ이수화 진짜 권우영 사랑하는거아님???? 16:55]

[김진성: ㄷㄷ와 미친놈들아 그러다 일커지면 어칼라고 가둬놓음??;;; 16:56]

[유영재: ㄱㅊ폰있으니까 꺼내달라하겠지ㅋㅋ권우영한테ㅋㅋㅋ 16:56]

[이진호: 아씨발더럽; 16:56]

[유영재: 그리고 이수화 애비 존나 무서워해서 안꼬지름ㅋㅋ일학년 때도 조현우박지환이 존나괴롭혓잖아 저멍청한새끼ㅋㅋ 16:56]

[김진성: 아 권우영존나불쌍하다;;;괜히 저새끼 때문에 게이취급;;; 16:57]

[박진우: ㅅㅂ김진성 이새끼도 권우영 좋아하는 듯 16:57]

빠르게 대화를 훑어 내려가던 우영이 핸드폰을 꽉 쥐었다. 모든 이야기의 주제가 이수화와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김진성: ㅇㅇ난좋은데? 걔 공 존나 잘차서 중학교 때도 유명했어 박진헌도 걔랑 축구 한번 같이해보고싶다고 ㅈㄴ지랄 났었는데ㅋ철벽 시발 16:57]

[이진호: 맞다 걔 원래 졸라 싸가지없었다고 했지ㅋㅋ 16:57]

[박진우: 야야 기혁이도 잇는데 권우영 얘기 그만해라ㅎㅎㅎㅎ기혁이 우영이한테 맴매 맞아서 화나짜나 16:57]

[김진성: 아맞다ㅈㅅㅈㅅ 16:58]

[유영재: 저새끼그냥뒤졌으면좋겠다 16:58]

[김진성: 넌 왜케 이수화한테 지랄이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적당히해 ㅁㅊ새끼야 16:58]

[유영재: 그냥존나마음에안들어 16:59]

[박진우: 영재도 수화 좋아해?????비틀린 사랑???ㅋ? 16:59]

[유영재: 씨발뒤진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좆같은 소리ㄴㄴ;; 16:59]

[박진우: 뭐수화정도면 한번 비벼볼만하지 작고 예쁘자나 왜그랭ㅋ 16:59]

[유영재: 씨발니나비벼 17:00]

[박진우: 함ㅎㅐ봐???? 17:00]

[이진호: ㅅㅂ개또라이새끼들 더러워서 톡방 나간다 17:00]

[김진성: (이모티콘) 클린하게좀살자 17:01]

[김진성: 화법과 작문 7월 모고셤지 잇는분 나사진한장만 17:30]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우영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씹, 욕을 지껄인 그는 곧바로 이수화의 번호를 눌렀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초침은 정확히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야자 없는 날이다. 놈들의 말대로라면 저 대화 직후 벌써 4시간이나 흐른 뒤였다. 핸드폰이 있다면 어떻게든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제게는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지나가던 누군가 열어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뚜르르. 뚜르르.

통화를 기다리는 얼굴 위로 초조한 빛이 어렸다. 우영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통화가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되오니…….’

익숙한 안내음에 헛숨을 내쉰 우영이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이수화는 평소 전화를 기가 막히게 잘 받는 놈이었다.

“아, 씨발…….”

시계를 힐긋 보는 우영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고태성을 만나기 전까지 이제 고작 한 시간 남짓이다. 학교까지 전력으로 뛰어가면 약 10분, 학교에서 고태성의 집까지 대략 15분. 오며 가며 시간을 계산하면 빠듯했다.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우영이 급하게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내일 입을 교복과 옷가지들을 대강 욱여넣고, 챙겨 둔 선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살짝 열어 보니 고태성의 얼굴이라기엔 우스꽝스러운 초콜릿이 웃고 있었다. 일자 눈썹 두 개, 동그란 눈 두 개, 그 밑에 점 하나, 휘어진 입술. 그래도 언뜻 보면 닮았다. 잠시 바라보던 우영은 뚜껑을 닫고 교복 사이로 상자를 넣었다. 혹여 집까지 들릴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 전부 챙겨 가야 했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며 남기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고, 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우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수화 전화 안 받아. 어디에 가둬 놨다는 건데.”

급하게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묻자, 고요한 실내 사이로 남기혁이 속삭이듯 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한참 뒤에 봐서.

“그럼 물어보, 하. 아니다, 됐다.”

하려던 말을 겨우 집어넣었다. 그로선 제게 이수화의 위험을 알린 것 자체가 아량을 베푼 일이었다. 대화 주제가 한참 지나간 지금, 우영과 화해한 줄도 모르는 놈들에게 다시 물어보기엔 그 또한 곤란할 터였다.

-……사진 보니까 체육 창고 같은데. 창문 창살 비슷한 거 같아.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의 남기혁이 중얼거렸다. 한숨을 내쉰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학교에 갇힐 만한 곳은 창고밖에 없었다.

“어, 일단 끊어 봐. 이따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은 우영은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밤공기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머릿속에는 아까 보았던 박진우 패거리들의 대화가 윙윙 섞여 들었다.

‘권우영이 부른다고 하니까 바로 쪼르르 튀어감ㅋㅋ’

‘ㄱㅊ폰있으니까 꺼내달라하겠지ㅋㅋ권우영한테ㅋㅋㅋ’

우영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쩌면 제가 이수화를 도와준 것이 역효과가 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든 탓이었다.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나 지금 해 봐야 하등 쓸모없는 생각들이었다.

학교 정문에 다다른 우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집에서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간만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명치께가 쿡쿡 쑤셨다.

“하아, 하…….”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당연히 정문은 닫혀 있었다. 어떻게 들어갈지 막막했다.

우영은 이수화에게 스피커 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잠이 들었거나 씻느라 받지 못한 걸지도 모르니 확인차 거는 전화였다. 담장 앞에 선 그가 욕을 지껄였다.

“하, 씹. 별짓을 다…….”

제 가슴께보다 높은 담장을 짚은 뒤, 손과 발끝에 확 힘을 주어 단번에 뛰어넘었다. 평소 운동을 하던 몸이니 이 정도쯤은 쉬웠다.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탁탁 털며 주변을 훑었다. 불이 다 꺼진 학교는 쌀쌀하고 스산하기만 했다. 우영은 가장 먼저 별관 근처에 있는 체육 창고로 뛰었다.

얼마 가지 않아 건물 뒤편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작은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향해 빠르게 거리를 좁히면서도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수화.’

‘응?’

‘넌 제일 무서운 게 뭐야?’

불현듯 언젠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급식실에서 넘어진 날, 빵 포장지를 부스럭거리며 작게 중얼거리던 이수화의 음울한 얼굴과 목소리였다.

‘어둡고, 깜깜한 데서……. 혼자 있는 거.’

우영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수화가 저곳에 있다면 그는 4시간 동안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서 머문 셈이다. 적어도 지금은 저 안에 이수화가 없기를 바라야 했다.

“이수화! 안에 있어?”

쾅쾅쾅! 덜컹거리는 철문을 두드리며 철컥철컥 손잡이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굳게 잠긴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우영은 더 세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수화! 안에 있으면 대답해!”

사위로 우영의 목소리만 크게 메아리쳤다. 돌아오는 답은 없고,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없나? 우영은 다급하게 창고 뒤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유영재가 찍었던 똑같은 창문이 보였다.

이 안에 이수화가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차라리 여기에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빨리 해결해야 고태성에게 갈 수 있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급하게 다가선 우영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새카만 어둠이 가득한 창살 사이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어렴풋이 비치는 무언갈 발견한 우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잠긴 창문 아래, 끌어안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이수화의 정수리였다.

“아, 씨팔. 야!”

그는 거친 목소리와 함께 창문을 퍽퍽 두드렸다. 그는 우영의 부름에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미동 없이 있었다. 순간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이수화! 야! 아, 미친…….”

기절이라도 한 건가? 혹시나 했으나 정말로 지금까지 갇혀 있을 줄은 몰랐다. 핸드폰이 없었나?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어? 왜 아직 저기에, 하…….

우선은 안에 있는 걸 확인 했으니 문을 열어야 했다. 체육 창고 열쇠는 교무실에, 그리고 예비 열쇠는 행정실에 있다. 그러나 지금 학교 문이 열려 있을 일도, 열릴 일도 없었다. 짜증이 솟구친 우영은 거칠게 창고 벽을 걷어찼다.

“아!”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경찰서에 전화해야 하나, 담임한테 전화해야 하나? 119? 어떡하지?

‘이수화 애비 존나 무서워해서 안꼬지름ㅋㅋ그래서 일학년 때도 조현우박지환이 존나괴롭혓잖아 저멍청한새끼ㅋㅋ’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불현듯 떠오른 유영재의 말이 신경 쓰였다. 일단 일 벌이기 전에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머리를, 머리를…….

“야! 잠깐 기다리고 있어!”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 창문 아래에 내려놓았다. 체육관 옆 부속 건물인 축구부 휴게실에 따로 체육 창고 열쇠를 보관하고 있던 것이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바뀌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곳에 열쇠가 있을 것이다.

운동부 휴게실은 창고와 정반대 편 구석에 있었다. 우영은 또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씨발, 씨발……. 속으로는 하염없이 욕을 지껄였다.

번개처럼 뛰어간 그는 금세 휴게실에 도착했다. 우영은 문 옆에 커다랗게 난 창문을 익숙하게 흔들었다. 덜컹 소리와 함께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이곳은 중요하게 보관하는 물건도 없거니와, 늦은 밤에도 수시로 훈련하는 탓에 부원들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도록 허술하게 관리 중이었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우영은 창문 안으로 팔을 뻗었다. 더듬더듬 벽을 타던 손이 턱 잡히는 문고리를 돌렸다. 덜컹 소리와 함께 스르륵 문이 열렸다. 손을 빼고 문을 열고 들어간 우영이 터벅터벅 걸어가며 플래시를 비췄다.

“아, 있다.”

1년 전 그대로 안쪽 벽에 창고 열쇠가 걸려 있었다. 서둘러 그것을 집어 든 우영은 들어온 문을 닫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씻고 나온 데다 날씨도 서늘했으나 쉼 없이 달린 탓에 온몸에 끈적하게 땀이 배었다.

“하아, 하. 씨발, 존나 힘드네…….”

짓씹듯 중얼거리며 창고 문고리를 잡고 열쇠를 꽂아 넣었다.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먼지가 자욱한 체육 창고에선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났다. 한 손에 핸드폰 플래시를 든 우영이 안을 비추며 들어갔다. 여전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파묻고 있는 이수화가 보인다. 가쁜 숨을 길게 내쉰 우영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후우, 이수화.”

살며시 어깨를 쥐고 살살 흔들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영은 심각한 얼굴로 플래시 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야, 괜찮아?”

“…….”

“야……. 야, 나 좀 봐 봐.”

우영은 그의 뺨을 약하게 톡톡 쳤다. 그 손길에 이수화가 느리게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이 없는 눈빛이었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야, 왜 그래. 말을 해 봐. 어디 아파? 병원 가?”

주섬주섬 제가 입고 온 후드 집업 지퍼를 내리곤 그의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고태성이 사 준 것이었다. 이 날씨에 이곳에서 외투도 없이 4시간을 버텼다면 추운 게 정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쥐어 보니 차게 굳어 있었다. 체온도 확연히 내려간 상태였다.

“아……. 미치겠네. 일단 일어나. 가자. 감기 걸려.”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우자 그가 힘없이 고개를 툭 떨궜다. 놀란 우영이 그의 턱을 움켜쥐곤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멍한 눈을 깜빡였다.

“야! 아, 씨발. 놀래라. 기절한 줄 알았잖아.”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했다. 이건 병원에 데려가야, 아니, 집에 알려야……. 저도 어떡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수화. 나 봐 봐. 괜찮은 거 맞아? 어떡할래. 집에 갈 거야? 부모님한테 연락해 줄까? 아니면 병원에 데려다줘?”

양어깨를 단단히 쥔 우영이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제야 이수화가 한 번, 두 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달싹인다.

“나 괜찮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맥이라곤 없는 모습에, 우영이 축 늘어진 그의 어깨를 더 꽉 붙들었다. 시선을 내리깐 그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응……. 괜찮아.”

그는 배터리가 다 닳은 인형처럼 고개를 서서히 다시 떨궜다. 그 모습에 눈을 치켜뜬 우영이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괜찮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축 처진 어깨도 떨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머리칼에 가려진 눈매는 보이지 않았으나, 입술 끝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니, 너 존나 안 괜찮아 보여. 안 괜찮아 보인다고. 그냥 병원을…….”

“응…….”

제 말을 끊고 흘러나온 작은 음색에 우영이 말을 멈췄다.

“나, 안 괜찮아…….”

작은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잔뜩 잠겨 갈라졌다.

“안 괜찮아. 나…….”

“…….”

“하나도, 안 괜찮아.”

잔뜩 떨리는 울먹임에 우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야…….”

“흐으. 나, 하나도, 안 괜찮아!”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양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울었다. 잔뜩 찡그린 울음 속에는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아이처럼 서럽게 헐떡이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윽, 무서워, 무서웠어……. 무서워서, 흑, 전화, 신고, 하려고 했는데에, 핸드폰도, 교실에, 두고 와서! 그래서, 흐윽. 으!”

얼음처럼 굳어 버린 우영이 입술을 꽉 다문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큰 소리로 우는 건 처음 보았다.

속으론 쌍욕을 곱씹었다. 안일하게 위험한 일을 벌인 새끼도, 그걸 또 그대로 당해 버린 이수화도, 또 거기에 저를 핑계 삼았다는 것도 모두가 좆같게만 느껴졌다.

“하아, 씹…….”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린 우영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뻗어 나간 팔이 이수화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가슴팍으로 당겨 왔다. 등을 도닥여 주는 손길은 투박하지만 다정했다.

***

섧게 우는 이수화를 달래는 데 시간을 한참 썼다. 그를 뚝 끊어 내지 못하고 기다려 준 것은, 품 안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던 그가 횡설수설 제 얘기를 꺼내던 탓이었다. 지난 2년간 그에게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개인적인 일들이었다.

이수화는 외동아들로, 엄격한 아버지 아래서 위축된 채 컸다. 어릴 적부터 작은 잘못에도 크게 혼이 났고, 그럴 때마다 좁은 곳에 갇혔다. 장롱, 팬트리, 불 꺼진 욕실, 좁은 다락방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어머니는 대부분 방관하였다고 했다.

그제야 캄캄한 공간에 혼자 있는 게 싫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부잣집들은 번지르르한 겉보기와 달리 콩가루 집안이 많다던 고태성의 말이 따라 떠올랐다.

아, 고태성.

번뜩 떠오른 이름에 화들짝 놀란 우영이 다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놀란 마음에 정신없이 그를 찾고 달래 주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10시 40분. 이미 약속 시각은 훨씬 지난 차였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꿈에도 몰랐다.

“하, 씨발…….”

예상외로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욕을 지껄이던 우영이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동작을 멈췄다.

특별히 티를 내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는 이수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외려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다. 약속을 어긴 지금으로선 같이 있는 걸 알려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눈치가 빠른 놈이니 전화를 하는 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상해 있을 테니 먼저 달래 준 뒤 차후 따로 이야기해야 할 듯했다.

[22:41 야 진짜미안 나일생겨서좀늦었어 금방ㄱ갈게]

[22:41 진짜 조금만기다려 미안]

늘 번개처럼 사라지던 숫자 1이 지워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여전히 훌쩍대는 이수화의 등을 두드렸다.

“이수화, 가자.”

조급한 목소리에 화단에 앉아 있던 이수화가 부은 얼굴을 들었다. 그나마 이수화의 집이 고태성과 같은 리버캐슬이라 다행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이런 놈을 혼자 그냥 보내기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수화가 움찔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따라 시선을 내리니 그가 왼쪽 다리를 살짝 들고 있었다.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하, 헛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털썩 쭈그려 앉았다. 가느다란 발목을 쥐고 바짓단을 걷어 내니 퉁퉁 부어오른 발목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그새 다리를 접질린 듯했다.

“아이씨, 이거 병원……. 하, 아니. 너네 집에 의사 있다고 했지.”

미간을 좁힌 우영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병원까지 데려다줄 시간은 없었다.

“걸을 수 있어?”

묻는 말에 이수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건 눈가엔 아직도 눈물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응, 괜찮아.”

“일단 가자. 너 이거 좀 많이 부었는데, 넘어졌냐?”

그러고 보니 교복 이곳저곳에 먼지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응……. 뒤에서 갑자기 밀어서. 엎어졌어.”

창고 안으로 무지막지하게 밀어 넣었을 유영재와 앞으로 고꾸라진 이수화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우영은 혀를 차며 그를 부축했다.

“하아, 일단 가자.”

리버캐슬까진 15분. 다친 이수화의 걸음이 느린 걸 고려해도 생일이 끝나기 전까지 도착하기엔 충분했다. 뭣하면 그냥 둘러업고 가면 될 일이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걸음을 빨리할 수는 없었다.

“씨발, 너는 아무리 그래도 그 새끼들이 오란다고 그걸 따라가냐. 걔들 하는 짓 몰라서 그래?”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우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인 이수화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는 네가 오늘 인사 없이 가서……. 전에는, 매일 인사하고 갔으니까. 그래서…….”

“됐고, 사과받으려고 한 소리 아니야.”

“…….”

“오늘은……. 아, 오늘은 일이 있어서 그랬어.”

그러고 보니 오늘 이수화한테 인사도 안 하고 집에 갔나. 확실히 종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구시렁대며 정문 앞에 우뚝 멈춰 선 우영은 둘의 앞을 가로막은 담벼락을 보며 미간을 모았다.

“아, 씨. 진짜 가지가지…….”

“…….”

“올려 줄 테니까 그냥 앉아 있어.”

그는 답도 듣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이수화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화들짝 놀란 이수화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대수롭잖게 그를 붕 들어 담벼락 위에 얹어 놓은 우영은 한 손으로 담장을 짚고는 손쉽게 담을 넘었다.

“야. 다리 이쪽으로 넘겨.”

손을 탁탁 턴 그가 담장 위에 앉아 있는 이수화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우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얼빠져 있지 말고 이리 와, 빨리.”

고개를 끄덕인 이수화가 팔을 뻗었다. 우영이 허리 양쪽을 잡고 힘을 주자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수화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단단하게 붙든 우영은 차분하게 그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가자.”

멀거니 서 있는 이수화의 팔뚝을 잡은 다시 조급한 걸음을 옮겼다.

혼자 전력으로 뛰어가면 십여 분 정도 걸릴 거리다. 그러나 다리도 성치 않은 놈을 데리고 가려니 평소보다 배는 시간이 드는 듯했다.

한참 걷던 우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켰다. 고태성에게 답이 와 있었다. ‘응’이라는 단순한 메시지였다. 예상외로 놈은 별생각 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1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야, 안 되겠다. 그냥 내가 업어 줄게. 업혀.”

“어? 아니…….”

“빨리. 나 열두 시 전까지 고태성 집에 가야 돼.”

머뭇거리는 이수화의 앞에 우영이 하체를 구부리고 등을 보였다.

“오늘 그 새끼 생일인데, 늦으면 네가 책임질래?”

채근하는 어조에 눈을 크게 뜬 이수화가 반항 없이 우영의 등 뒤로 업혔다. “잘 잡아라.” 그의 허벅지를 꽉 쥔 우영은 성큼성큼 뛰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를 꼭 끌어안은 이수화가 고개를 숙였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인적 없는 밤거리를 뛰는 우영의 거친 숨소리가 골목길에 한참 울려 퍼졌다.

호화로운 리버캐슬 정문을 지나친 우영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11시 25분. 초조한 마음이 더 커져만 갔다. 그는 평소보다 빨라진 어조로 물었다.

“야, 집 어디야. 어느 방향.”

“여기, 바로 앞이야. 나 내려 줘. 이제 혼자 가도 돼. 여기부턴 경비 아저씨도 있고, 아주머니가 문 열어 주셨으니까……. 그리고 바로 앞이야. 빨리 태성이한테 가 봐. 미안해…….”

목 뒤에서 이수화가 안절부절 중얼거렸다. 우영은 한 번의 거절 없이 그를 내려놓고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안 그래도 좆같이 힘들었다.

“어, 아버지한테 알아서 잘 말하고. 말해서 혼날 것 같으면 그냥 하지 말든가. 알지? 일단 내일 얘기하자. 연락해라. 나 늦어서 먼저 간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수화를 뒤로하고 우영은 또 뛰었다. 뒤에서 자그맣게 고맙단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다행히 고태성의 집은 캐슬 정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들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다 통화가 연결되었다.

“하아, 하. 고태성, 나 너네 집 앞이야.”

-……기다려.

“어어.”

전화를 끊은 우영은 뻐근한 허리를 뒤로 젖히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대문 앞에 주렁주렁 달린 조명과 길 위의 가로등을 흘긋 보았다.

그러고 보니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과 흐트러진 옷차림이 추레했다. 망할, 이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거의 혼이 빠진 채로 커다란 대문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끼익 문이 열렸다. 흰 티셔츠 위에 검정 카디건을 걸쳐 입은 고태성이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후줄근한 제 꼴과는 달리 한눈에도 부잣집 도련님 태가 풀풀 났다. 우영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야, 진짜 미안해…….”

정말로 미안했다. 고태성의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찬찬히 내리훑었다. 그리고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우영을 가만히 주시했다. 정적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샜다.

“뭐 하다 왔는데?”

“아, 나. 일이 좀 생겨서…….”

“무슨 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무감했다. 우영은 직감적으로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약속 시각에 한참 늦은 것도 모자라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아, 씹. 뭐라고 하지. 난감한 얼굴의 우영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수화의 얘기를 지금 꺼냈다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과 다름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줄게. 야, 생일…….”

선물……. 부랴부랴 말을 꺼내던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가슴께를 몇 번 더듬거리고 나서야 등 뒤가 허전한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가방을 창고 뒤에 놓고 온 것이 퍼뜩 떠올랐다.

하, 홀로 탄식한 우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땀이 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씹, 이 멍청한 새끼. 오늘 유난하게도 일이 꼬이고 있었다.

서둘러 핸드폰 시간을 확인한 우영이 고개를 홱 쳐들었다. 아직 그의 생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25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꼭 그의 생일이 끝나기 전에 주고 싶었다.

최대한 빨리 뛰어갔다 오면 충분히 세이브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서 오만 생각에 빠진 우영을 고태성은 말없이 응시했다.

“야, 진짜 미안한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라. 금방 갔다 올게. 어? 잠깐만, 잠깐 있어!”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뒷걸음질하던 우영이 등을 돌려 또 뛰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온 후부터 몇 시간을 내내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영은 정말로 한 번도 쉬지 않고 학교까지 뛰었다. 또다시 담을 넘은 뒤, 체육 창고로 달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백팩을 어깨에 걸치곤 다시 고태성의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번지고 칼칼한 목에서는 피 맛이 났다. 축구부 시절 리그를 준비하며 좆 빠지게 훈련할 때도 몇 번 겪어 본 적 없던 고통이었다.

겨우 정문 앞에 도착한 우영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캐슬 정문은 방문 세대가 열어 주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못했다.

11시 58분. 문이 열리자마자 우영은 또 뛰었다. 고태성의 집 앞에 다다르자 마지막에 보았던 그대로 서 있는 고태성이 보였다. 젖 먹던 힘을 다해 그의 앞까지 뛰어간 우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 쑥 내밀었다.

“고태성, 생일 축하해. 하아, 하.”

가쁜 숨을 몰아쉬던 우영이 찡그린 채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그러나 고태성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가만히 우영을 응시했다.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끝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수화 만났어?”

날 선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어?”

“이수화 데려다주고 오는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우영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사고 회로가 정지된 양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

“아깐 정문 어떻게 들어왔는데.”

“…….”

“난 아닌데 누가 열어 줬냐고. 남기혁도 없는데.”

딱딱한 어조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아……. 씨발. 좀체 정신이 없어 그것까진 차마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만 대강 넘긴 뒤에 얘기하며 풀어 주려던 그의 계획은, 놈의 예리한 성격 탓에 전부 꼬여 버렸다.

우영은 아직도 그가 받아들지 않은 선물 상자를 손에 꽉 쥐었다.

“권우영.”

평소와 달리 건조한 부름이었다. 눈을 들자 시선이 마주친다. 늘 그렇듯, 제 모든 걸 꿰뚫고 낱낱이 발라 버릴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우영을 파고들었다.

“너, 게이야?”

느닷없이 날아온 말이 가슴에 푹 꽂혔다. 우영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물감처럼 똑 떨어진 당혹의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삽시간에 번졌다. 고태성의 눈가가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당황하네, 우영아.”

시선을 내리깐 그는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무표정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언뜻 웃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몇 시간 내내 온 체력을 다 끌어 써서일까, 아니면 저를 보는 그의 눈빛이 시리도록 냉랭해서일까. 우영은 평소처럼 능청스레 받아칠 수도, 표정을 굳히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

“…….”

“1학년?”

딱딱하게 날아드는 어조에 혀가 굳어 버렸다. 심장이 뜨겁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 멋모르고 무서운 영화를 봤을 때처럼 울렁거렸다.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고태성의 앞에서 둘러썼던 껍데기가 뒤집혀 숨김없이 까발려지고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

“왜, 말 안 했어?”

불그스름한 조명 빛에 드러난 고태성의 얼굴은 이질적이었다. 지금 순간이 꿈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건조하고, 메마른, 희미한 경멸의 빛이 스쳤다.

악몽 속에서나 봤던 얼굴이었다.

“너한테 나는……. 씨발, 뭐지?”

짓씹듯 억누르는 목소리가 목구멍을 턱턱 죄어 왔다.

“도대체…….”

한쪽 눈가를 찌푸린 얼굴은 짜증스럽기도, 또는 어딘가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혼잡하게 드리운 낯이라는 건 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될 만큼.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고태성이 어처구니없는 듯 픽 웃었다.

“왜 답을 안 해. 존나…… 짜증 나게…….”

살랑이는 부드러운 머리칼 아래로 가지런한 입매가 보기 좋게 휘었다. 또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묵묵히 고개를 숙인 우영은 손에 쥔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온몸에 불쾌하게 스며들던 진득한 땀이 심장으로 엉겨 붙었다. 지나간 침묵은 암묵적 긍정으로 되돌아갔다. 순간을 돌이킬 짧은 기회는 이미 놓쳐 버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뭘 듣고 싶은데.”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밋밋한 상자에 시선을 둔 채, 우영은 낮게 체념했다.

“그래, 네 말 맞아.”

그리고 그의 앞에서 꺼내 보이리라 생각지 못했던 제 시커먼 속내를 인정했다.

우습게도, 너무 쉽게.

“좋아해.”

좋아해, 너를.

“나, 남자 좋아한다고.”

일그러진 고태성의 얼굴이 차츰 선명해졌다. 반대로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하아. 우영은 목에 걸린 듯한 숨을 뱉어 냈다. 깊은 물 속에 빠진 양 귀가 먹먹하고 숨이 막혔다.

“근데……. 내가 어떻게, 말하냐.”

꽉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좆같다며……. 네가.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거, 소름 끼친다며……. 근데 내가 뭘, 어떻게 말해.”

느리게 눈을 내리깐 우영이 턱에 힘을 주었다. 매끄러운 뺨에 불룩 단단한 심줄이 섰다. 여전히 가슴속에선 고태성이 전했던 형체 없는 말들이 따갑게 쑤셔 박히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부정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모두 엎질러진 물이었으니까. 이제는 제가 쏟아 버린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했어야지.”

물끄러미 그를 주시하던 고태성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했어야지.”

“…….”

“내가 모르는 건, 없게 했어야지.”

끊길 듯 말 듯 아슬하게 이어지는 말에 우영이 눈을 들었다. 짙은 눈빛은 평소와 같이 흔들림 없었으나 어딘가 불안정했다. 그 차이가 지켜보는 우영의 마음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말하면. 말하면 이해는 할 수 있었냐?”

고태성은 답이 없었다. 우영은 시큰거리는 눈을 깜박였다. 무거운 침묵과 그의 혼란한 낯빛이 우영을 더 아프게 짓눌렀다. 여과 없이 드러낸 자신을 그가 반겨 주리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러나 홀로 오랫동안 묵혀 왔던 상처를, 권우영 자신을 부정하는 그를 보니 불현듯 억울함이 빗발쳤다.

“못 하잖아. 끔찍하게 봤을 거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그런, 개 같은 눈빛으로 나 보는 거잖아.”

신음처럼 끓기 시작한 혼잣말은 점점 거세어졌다. 시시각각 빠르게 식어 가는 적막 속에서 우영의 심장 또한 돌처럼 굳어 갔다.

“……개 같은 눈빛?”

고태성은 어처구니없는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이 상황에 그럼 내가, 웃고 있어야 할까?”

겨울비처럼 싸늘해진 눈길이 우영의 위로 내리꽂혔다. 바스락. 그가 우영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우영은 물러서지 않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바짝 맞붙어 선 둘의 시선이 좁은 틈에서 얽혔다.

“우영아.”

익숙한 세 글자가 목을 죄어 왔다. 와중에도 살랑이는 밤바람을 타고 그의 샴푸 향이 코끝에 닿았다.

“네가 먼저…… 변했잖아.”

그는 평소보다 낮아진 음색으로 뇌까렸다. 찬찬히 손을 들어 올린 고태성이 우영의 어깨를 아프게 꽉 쥐었다. 어릿한 고통에 우영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네가 알기나 해?”

금방이라도 코끝이 닿을 듯한 좁은 거리에서 그가 우영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죽일 듯이 쏘아본다는 것이 더 어울렸다.

“죽여 버리고 싶어.”

“…….”

“너 이렇게 만든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고.”

날 선 목소리에 우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만든 그 새끼.’ 의도가 확연한 말이 창칼보다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그냥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 중얼거렸다. 높낮이가 일정한 어투는 여전히 고요했다. 하나 흔들리는 눈동자와 억눌린 음색에, 우영은 그의 감정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 병신 새끼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목을 졸라서라도 꺼지라고 했을 거야.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눈앞에서 쫓아냈을 거라고. 알아?”

일렁이는 새카만 눈동자엔 혐오가 가득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낯을 마주하던 우영은 참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한 번 벌어진 미성숙한 상처는 삽시간에 뻗어 나갔다. 곱씹을수록 울컥울컥 설움이 솟구쳐 올랐다.

이수화를 좋아한다 착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경멸을 드러내는데, 제 상상 속의 상대가 자신이란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끔찍해할까. 얼마나…… 소름 끼쳐 할까.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절망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게 뭐 어때서.”

그러나 우영은 두려움 앞에서 더 용감해졌다. 제가 쥔 무기가 하나도 없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양 더 드세게 반항했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 지랄이냐고.”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화가 났다. 화를 낼 처지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걸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화가 났다.

“같이 다니는 놈이 게이라니까 쪽팔려서? 창피해서 그러냐?”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 자각도 없었다.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그저 흘러나오는 대로 줄줄 읊어 댈 뿐이었다.

“도대체 그게 왜, 왜 그렇게 싫은데, 왜! 씹, 내가…….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잖아!”

커다란 고함을 채 끝맺기도 전, 고태성이 거칠게 우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악력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삽시간에 나락 끝까지 처박힌 제 마음처럼 덩그러니.

“목소리 낮춰.”

꽉 쥐인 손목에 다시금 거센 힘이 느껴졌다.

“동네방네 네 취향 떠벌리고 싶은 거 아니면.”

떨어진 상자를 막연히 바라보던 우영이 눈을 들어 고태성을 응시했다. 초점이 엇나간 그의 눈동자는 막 타오르는 불씨처럼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콘크리트 바닥에 나뒹구는 제 선물 따윈 관심도 없는 듯했다.

이게 현실이다. 껍데기를 씌워 놨던 속내를 까발렸을 때 제게 닥쳐올 투명한 현실. 10년이고 20년이고 절친했던 친구조차 진저리치게 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일.

권우영이 고태성을 좋아하는 일.

가슴이 푹 꺼진 기분이었다. 의도치 않게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난…….”

“…….”

“난 원래 이런 새끼야.”

우영은 부릅뜬 눈으로 고태성을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이성을 잠식한 것은 울분 섞인 치기였다. 수년간 감춰 온 제 본모습을 고태성에게 전부 드러내 버리자는, 그렇게 차라리 전부 일말의 희망도 없이 뿌리부터 잘라 내버리자는, 악랄하고 이기적인 충동이 벌컥벌컥 치솟았다.

“똑같은 남자 놈 생각이나 하면서 좋아하고, 가슴도 없는 밋밋한 몸 떠올리면서 온갖 상상 다 하는 그런 더러운 새끼라고! 씹, 네가 그렇게 끔찍해하는 사람이 원래 나야!”

“씨발, 닥치라고!”

커다란 손바닥이 우영의 턱을 와락 움켜쥐었다. 거친 손길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고태성은 우영을 잡아먹을 듯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아니, 노려보고 있었다.

“입, 다물어.”

짙게 내쉬는 숨소리에서 확연한 떨림이 전해졌다.

“한 마디만, 한 마디만…… 더 해 봐.”

씨근덕거리는 숨결과 함께 잡힌 손목이 아프게 죄어 왔다. 입을 다문 우영은 가만히 그의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토록 화가 난 얼굴의 고태성은 처음이었다. 특히나 제게로 향한 분노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네가 누굴 좋아하든 말든, 그딴 좆같은 거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

“더, 아무 말도 지껄이지 마……. 권우영.”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우영은 그 성난 얼굴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누군가 심장 양 끝을 묶어 한꺼번에 당기는 듯 아팠다. 괴롭다. 고통스러웠다. 깨닫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깐 우영이 젖은 숨을 내쉬었다.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놔…….”

작게 중얼거린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선물 상자로 향했다. 초라하다. 분명 만들 때는 반짝반짝 빛이 났는데, 뚜껑이 반쯤 열린 채 뒤집힌 상자가 그렇게 볼품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주지도 못하고 바닥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이, 꼭…….

우영은 찬찬히 시선을 들었다.

“나도…….”

벌게진 눈가가 시큰거려 저도 모르게 찡그렸다. 고태성 앞에서는 절대 울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씰룩이는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나도,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한 건 아니야.”

진짜야.

우영은 말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은 눈을 하고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늘 그래왔듯이.

심호흡하듯 숨을 들이켜던 우영이 커다란 손바닥을 잡아 뜯듯 떼어 냈다. 목과 턱을 한 번에 잡혔던 바람에 전체가 얼얼했다. 지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고태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속상하다. 속상한 마음이 제일 컸다.

“……나, 가야겠다.”

깔깔한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우영은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고태성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쳐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권우영.”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잠시 기다려 보았으나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우영은 다시 조급한 걸음을 내디뎠다. 헐떡이며 올라왔던 언덕은 내리막길조차 한없이 가파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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