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7/21)

2.

다시 돌아온 교실은 어수선했다. 흘긋 곁눈질을 해 보니 박진우와 김진성이 속닥거리며 쪽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더럭 인상을 찡그렸다. 종전에 이수화와 남기혁의 싸움을 말리긴커녕 MMA 경기라도 시청하듯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으로 혀를 차고는 다시 교과서에 시선을 두었다. 이수화는 몸이 안 좋다며 조퇴를 했고, 우영이 보기에도 그게 나을 듯했다. 아무래도 제 딴엔 많이 놀랐을 테니 오늘 하루는 집에서 안정을 찾는 것이 좋을 터였다.

쉬는 시간에도 고태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영 또한 말을 꺼내지 않고 참았다. 자신은 따로 과외나 학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니 일단은 본수업에 충실해야 한다. 고작 10분 가지고는 충분히 대화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칠 교시 후 석식 시간에 물어보자. 고태성 또한 학원에 가기 전 저녁을 먹고 가곤 했으니 그때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보면 될 것 같았다.

남기혁에게는 여럿의 메시지를 보내 놓았으나, 예상대로 답은 오지 않았다. 자꾸만 잡생각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마인드맵처럼 번져 가려는 잡념들을 억지로 끊어 놓고 수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고태성을 따라 우영이 빠르게 일어났다.

“고태성.”

“응.”

“남기혁 왜 그런 거라는데?”

둘러 얘기할 것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던 고태성이 지그시 우영을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뭐? 아까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

“응.”

“왜?”

“뭐가?”

의아한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자, 고태성은 또 답도 않고 되물어 왔다. 늘 그렇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진짜 아무 말 안 했어? 남기혁이? 한 마디도?”

“응. 안 했는데.”

“하……. 씨발, 뭐지 도대체.”

눈살을 찌푸린 우영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적어도 고태성에겐 뭐라도 말했을 줄 알았건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에 갔다니 지난 세 시간 꾸역꾸역 참아 온 것이 헛수고가 되었다.

“이수화가 뭘 잘못했겠지.”

흘리듯 들려온 말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고태성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정면을 보고 걷고 있었다. 그는 우영을 보지도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남기혁이 괜한 일로 그럴 놈은 아니잖아.”

“…….”

“아니야?”

눈이 마주치자 고태성이 살짝 웃어 보였다. 우영은 왜인지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어. 그렇긴, 한데.”

답하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남기혁은 평소 단순 무식한 놈이니 괜한 꼬투리를 잡아 남들 앞에서 패악질을 부릴 새끼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이수화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 피해를 봤으면 봤지, 되레 줄 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된 생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근데 우영아.”

정적 속에서 그가 우영을 불렀다. 가만히 따라 걷던 우영이 고개를 들었다.

“수화 너무 싸고돌지 마.”

말하며 걸음을 멈춰 섰다. 동시에 우영 또한 멈춰 섰다.

“왜?”

“몰라서 물어?”

“어. 뭔데?”

의아한 눈동자로 고태성을 보았다. 잠시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다물고 있던 고태성이 우영과 눈을 마주했다.

“걔가 너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콜록, 뭐?”

어처구니없는 말에 사레가 들렸다.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던 우영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다. 하나 고태성은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얼굴로 우영을 보고 있었다.

“걔가, 너 좋아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말문이 막혔다. 별안간 날아온 돌에 영문도 모르고 맞은 기분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답할 말을 찾는 찰나, 고태성이 낮게 탄식했다. 입가엔 비뚜름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아…….”

“…….”

“좀 좆같아서 상상도 하기 싫긴 하지?”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켠 공기가 심장에 뚝 걸렸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자,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웃으려고 해 봤으나 쉽게 웃어지지는 않았다.

“왜?”

그의 말에 고태성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씨발…….”

단호한 답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뭐라고 대꾸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었다. ‘설마, 남자가 남자 좋아한다는데 괜찮은 거 아니지, 우영아?’ 그런 말들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뜨겁게 쿵쿵대던 맥박 소리가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좆같은 걸 좆같다고 하지 그럼 뭐라 그래.”

쿡, 심장이 쑤셨다. 가지런한 입매를 휘어 웃는 얼굴이, 왜인지 하나도 웃는 것처럼 보이질 않았다. 굳어 있는 우영을 빤하게 응시하던 고태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너 끌어안고 있는 거 보니까, 존나…… 이상해 보이던데.”

우영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빈정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영아.”

나긋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든다. 고태성이 손을 뻗어 우영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친밀하고, 허물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좆같은 일 벌어지기 전에, 조심하란 소리야. 응?”

“…….”

“괜히 씨발……. 소름 끼치잖아.”

쾅. 돌연 우람하고 강고한 벽이 둘의 사이로 떨어졌다. 마치 신호를 받고 추락한 교수대의 칼날처럼 빠르게.

딱딱하게 굳은 우영의 시선이 내려갔다. 제 어깨를 감싸 쥔 고태성의 손으로 향했다. 한 번쯤 꽉 쥐어 보고 싶던, 기다랗고 예쁜 손가락이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모르고 있을, 친구의 가벼운 어깨동무였다.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그를 탁 쳐 냈다. 그리고 신음했다. 몸을 죄어 오는 손길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접촉이 더없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심장은 도둑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뜨겁게 뛰건만,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멈칫, 걸음을 멈춘 고태성의 까만 눈동자가 우영을 응시했다. 우영은 찡그린 채 짙은 숨을 내쉬었다. 아프다. 웃어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야 하는데,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쑤셨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우영은 그대로 등을 돌려 빠른 걸음을 내디뎠다.

새빨간 화마가 등 뒤를 쫓아왔다. 메마른 가물철에 불씨는 빠르게 번졌고,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길을 잃고 도피하는 자에게 퇴로란 없는 법이다. 그저 아가리를 벌린 또 다른 폐허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종일 정신이 없었다. 치매 걸린 사람처럼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체육관에서 뭘 하다 온 건지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머리가 온통 고태성으로 잠식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좆같은 일 벌어지기 전에, 조심하란 소리야.’

‘괜히 씨발……. 소름 끼치잖아.’

소름 끼친다. 저를 향한 것이 아니었으나, 제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오늘 고태성은 손을 쓸 수도 없이 빠르게 번져 가는 암세포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팠으니까. 담으면 담을수록 내내 괴롭게만 했으니까.

집에 돌아가는 길,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터벅터벅 걷던 우영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생각인지도 모른 채 멍한 정신으로 사전을 뒤적거렸다.

‘소름 [ 소ː름 ] 춥거나 무섭거나 징그러울 때 살갗이 오그라드는 것.’

춥거나, 무섭거나, 징그러운 것. 제 마음을 들켰을 때 그가 느낄 감정들이었다. 춥고, 무섭고, 징그러운 일. 연관 검색어로 공포, 충격 따위가 떴다. 새카만 어둠 사이 빛나는 희뿌연 화면을 보자 그냥 웃음이 흘렀다.

텅 비어 버린 속으로 메신저 채팅방을 누르자, 네 명이 속해 있던 채팅방 숫자는 3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남기혁 님이 나가셨습니다.-

얼추 예상은 했으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는 없었다. 우영은 묵묵히 그와의 채팅방을 눌렀다. 오늘 종일 저 혼자서 보낸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19:35 야자끝나고얘기좀해]

[20:15 기혁아전화받아]

[21:21 대답좀해 언제까지씹을거야]

[22:30 나안볼거냐??]

전화도 수십 번 했으나 받질 않았다. 사실 이런 정신으로 남기혁을 챙기는 것도 벅차기만 했다. 스크롤을 올리며 제가 보낸 메시지를 읽던 순간 한꺼번에 숫자가 사라졌다. 마치 제가 보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바로 답장이 왔다.

[남기혁: 운동끝낫으면 니네집앞놀이터로와 23:31]

[남기혁: 지금 23:31]

[남기혁: 기다리는중 23:32]

예상치 못한 답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핸드폰을 꽉 쥔 우영이 놀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눅눅한 공기에 달빛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

멀리서도 남기혁의 인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가로등 불빛 아래 그네에 앉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개는 살짝 떨군 채였다.

잠깐 멈춰 선 우영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터덜터덜 걸어가 빈 그네에 털썩 앉았다.

“청승은.”

인기척에 남기혁이 흘긋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 이내 그넷줄을 잡은 채 불퉁한 얼굴로 바닥을 툭툭 차며, 다시 바닥으로 눈길을 두었다.

“뭐.”

“말없이 찾아오는 게 유행이냐? 자꾸 연락도 없이 오고 지랄들이야. 톡은 종일 씹더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우영은 묵묵히 눈을 내리깐 남기혁을 가만히 응시했다.

“턱 괜찮냐?”

그의 턱 부근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딱히 붓거나 상처가 난 건 아닌 듯했다.

“아까 때린 건 미안. 네가 눈 돌아간 것 같아서 그랬어. 안 그러면 정신 놓고 계속 달려들 것 같아서.”

입을 꽉 다물고 있던 남기혁이 퉁명스레 답했다.

“존나 아팠어.”

“…….”

“쪽팔리고.”

작게 중얼대는 말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쪽팔린 걸 아는 놈이 거기서 그 지랄을…….”

“…….”

“하, 됐다.”

대강 말을 얼버무렸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었다. 여기서 잘잘못 따져 봐야 좋을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학교는 왜 자꾸 빠지는데. 엄마한테 안 혼났어?”

“어.”

“기주 누나도 집에 있지 않아? 뭐라 안 해?”

“어.”

그가 짤막하게 답하며 그네를 탔다. 싸해진 분위기에 우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답하지 마라, 새끼야.”

“…….”

돌아오는 침묵에 우영은 잠자코 기다렸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당장은 말을 이어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거면 이유가 있을 테니, 그가 말을 먼저 꺼낼 때까지 편히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선뜻 말하기 곤란한 일일지도 몰랐다.

끼익 끼익, 녹슨 그네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이로는 정적만 흘렀다. 대낮부터 우중충했던 날씨 때문인지 하늘엔 별빛 한 점 없었다.

“야.”

그넷줄을 잡고 움직이던 남기혁이 툭 내뱉었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한 채였다. 우영은 답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불그스름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남기혁의 표정은 오늘 낮에 봤던 먹구름처럼 우중충했다.

“나 이수화 싫어.”

“…….”

“걔랑 이제 같이 안 다닐 거야.”

직설적인 말에 우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은 제가 들으려 했던 것과는 다른 말이었다.

“왜?”

우영의 물음에 그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넷줄을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우영은 그의 표정 변화를 빤하게 주시했다. 종일 이 일로 속을 썩인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뭔데, 새끼야.”

“…….”

“왜 그러냐고.”

낮은 목소리가 놀이터 안에 고요히 울렸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뜬 남기혁이 입을 다문 채 코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말하기 싫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요히 중얼거렸다.

“그냥 전처럼 우리끼리 놀자. 이수화 빼고.”

어처구니없는 말에 우영이 헛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또 뱅뱅 돌아 또 원점이다. 종일 혹사당한 머리가 또다시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아, 진짜 지랄하지 좀 마.”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였다. 이수화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필요 없는 걸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듯 쉽게 말하는 태도에 짜증이 치밀었다. 인간관계가 무 자르듯 싹둑 썰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겨 대는 치기 어린 말들이 그저 억지처럼만 들렸다.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묻잖아. 말을 해야 내가 생각이라도 해 볼 거 아니야. 뭐 다짜고짜 놀지 말래. 씨발 네가 뭐 엄석대세요?”

다소 거칠게 튀어 나간 말에 남기혁이 얼굴을 구겼다. 이내 홱 고개를 들어 우영을 쳐다보았다.

“아, 그냥 싫어. 내가 싫다는데 그것도 못 들어줘?”

그의 말끝이 떨렸다. 평소 그가 욱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우영은 미간을 좁혔다. 교실에서의 일이 미안해서라도 남기혁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들어 볼 생각이었다. 혹여 이수화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똑바로 인정하고 사과하도록 만들려 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저러는 건 막무가내식 생떼에 불과했다.

“억지 부리지 마, 남기혁.”

“억지가 아니라 진짜 싫다고.”

“그러니까 왜 싫은데.”

“그냥 싫어. 싫으니까, 그냥 그 새끼랑 놀지 말자고! 짜증 나니까!”

“아, 씨발, 그만 좀 해!”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쳤다. 일순 울컥 달아오른 우영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가 한두 살 먹은 애새끼냐?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갑자기 쌩까라는 게 무슨 개소리야! 네가 말하면서도 유치하단 생각 안 들어?”

고요한 놀이터 안에 둘의 목소리가 바락바락 퍼졌다.

붉은 신호등이 점멸한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찾아온 남기혁까지 이런 억지를 부리니 속상하고 짜증이 났다. 종일 터질 듯 대가리를 굴려 댄 탓에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어, 안 들어. 존나 듣기 싫어. 그냥 내가 싫다잖아, 같이 놀기 싫다고! 우리가 몇 년 친군데 그런 것도 못 들어줘? 그깟 일이 년 본 애 때문에?!”

“그러니까 씨발! 왜 싫냐고 묻잖아!”

우렁찬 고함에 남기혁이 말을 뚝 멈췄다. 두 아이의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넷줄을 꽉 쥔 우영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들이켰다. 종일 시달리느라 배가된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네가 양아치 새끼들이랑 다를 게 뭔데. 왜! 이수화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말이라도 하던가!”

“씨발, 몰라. 그냥 싫어! 싫으니까 놀지 마!”

“아!”

벌떡 일어난 우영이 그네 기둥을 발로 후려 찼다. 양손으로 허리를 짚고는 고개를 젖혀 까만 허공을 응시했다. 하아. 하. 애써 심호흡을 내쉬는데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좆같은 기분이 빠르게 올라와 목을 감고 숨통을 죄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뭐라도 다 때려 부수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씨발……. 너, 너 왜 그렇게 화내는데?”

까만 정적 사이로 남기혁이 낮게 잠긴 목소리를 냈다.

“너, 설마 이수화 좋아하기라도 하냐?”

눈을 부릅뜬 그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우영을 노려보았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 이건 또 뭔 쓰레기 같은 소리지.”

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종일 별 개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유난히 일진이 좋지 않았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으나, 한껏 진지해진 남기혁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조현우한테 다 들었어.”

그는 꽉꽉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수화 때문에 네가 애들한테 돈 걷어 오라고 했다며. 걔한테 말 한마디만 걸려고 해도 네가 막았다며. 씨발, 너 때문에 애들이 이수화한테 말도 못 걸었다고, 축구 말고 관심도 없는 권우영이 존나 싸고돈다고, 찐따 새끼 뒷배라고, 둘이 뭐 있는 거 아니냐고 나한테 허구한 날 지랄해댔어! 네가 알기는 하냐?”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뱉어 낸 말에, 우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갔다.

“나는 그 새끼 때문에 네가. 고태성 말고는 존나 관심도 없던 놈이, 그 씨발, 애들이, 씹……. 이수화 안경 벗으면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나한테 너 얼빠 게이 아니냐고 물어보던 거, 내가 아니라고, 씹. 넌 모르잖아, 씨발,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난 네가 그런 소리 한 번이라도 들을 때부터 걔 마음에 안 들었어! 근데 씨발, 네가 좋다고 하면 그래도, 나는! 상관없으니까 같이 다닌 거라고!”

눈이 벌게진 남기혁이 숨을 색색거렸다. 그넷줄을 더 꽉 쥐며 우두커니 선 우영을 노려보았다. 우영 또한 싸하게 경직된 눈매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는 주제에 뒤에서 그딴 개 같은 소리나 지껄이는 놈들이나, 그걸 아니라고 실실 웃으며 변명하고 있었을 남기혁을 떠올리니 복장이 터졌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낯설었던 고태성의 말도 그랬다. 그놈의 이수화, 이수화, 이수화! 남기혁이나 고태성이나 다들 한결같은 말만 하고 있었다.

그게 왜.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 친구가 친구 좋아하면 안 돼? 남자가, 남자 좋아하면 안 돼? 징그럽고 소름 끼치니까? 상상만 해도 좆같은 일이니까? 씨발, 그래서 숨겨야 하는 거니까? 아는데, 나도 아는데. 나도 알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그게 그렇게…….

“그래서.”

헤집어진 속과 달리 우영은 짜증스럽게 답했다. 여차하면 울분 섞인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아 얼굴을 더 일그러뜨렸다.

“아, 그래서어. 씨발. 그게 뭐 어쨌다고. 나보고 어쩌라고. 그게 뭐! 씹, 지금 그게 왜 중요한데!”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사납게 정적을 갈랐다. 턱 끝까지 올라온 뜨거운 덩어리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꽉 쥔 주먹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왜……. 왜 아니라고 안 하는데?”

매서운 고함에 굳은 얼굴의 남기혁이 우영을 응시했다. 그는 마치 어딘가 찔린 사람처럼 한쪽 눈을 찡그렸다. 평소 같았으면 능글거리며 웃었을 우영의 적나라한 분노에 불현듯 급소를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너 설마, 설마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냐?”

남기혁의 동공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툭 고개를 떨군 우영은 저도 모르게 또 헛웃음을 흘렸다. 눈매는 싸늘하게 굳어진 채였다.

“하……. 시발.”

그리고 결국, 간당간당 걸쳐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좋아하면?”

“…….”

“좋아하면 안 되냐?”

예상치 못한 답에 말문이 막힌 남기혁이 입을 다물었다. 부릅뜬 우영의 눈가가 벌갛게 물들었다. 시큰거리는 눈자위가 흐린 달빛에 반짝였다. 머릿속은 이미 몇 시간 전 고태성이 했던 말들로 터질 듯 차올라 있었다.

소름 끼치고, 좆같은 일.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일, 친구가 친구를, 네가 너를, 권우영이 고태성을…… 좋아하는 일.

아슬하게 덮어 두었던 불씨가 피어올랐다. 끝내 심지 끝까지 타고 올라간 그것이 쾅,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좋아하면 안 돼? 왜 안 돼? 내가 좋다는데 씨발, 그 씹새들이 뭐 보태 주기라도 했어? 그 개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내가 좋다는데! 그게 도대체! 씨발! 무슨 상관인데!”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묵직한 파편들이 온몸으로 내리꽂혔다. 우영은 아픈 것도 잊을 만큼 서러운 분노에 휩싸였다. 활화산처럼 솟구친 억울함이 그를 무릎 꿇린 패잔병으로 만들었다. 발악해봐야 어쩔 수 있는 게 없었다.

“너……. 너, 존나.”

갑작스러운 분노에 남기혁이 말을 더듬었다. 한 번도 이만큼 우영이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당혹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우두커니 선 채로 미간을 찌푸린 우영은 더듬거리는 남기혁을 주시했다. 저도 이런 식으로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종일 머릿속을 들쑤시던 고태성의 말과 남기혁의 말이 수년간 억지로 눌러 놓던 상처를 단번에 헤집어 대고 있었다. 누군가 명치께에 불을 지핀 것처럼 홧홧했다.

“야, 너 그냥 가라.”

우영은 짓씹듯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함과는 별개로 신경질이 났다. 그는 아주 짜증스럽고, 성가시다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꺼지라고……. 지금 진짜 무슨 짓 할지 모르겠으니까.”

“…….”

돌아오는 침묵에 느리게 시선을 들자, 상처받은 남기혁이 보였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우영을 보고 있었다.

“권우영, 존나……. 너, 진짜 너무하다.”

꾹꾹 눌러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내 남기혁의 눈가 끝이 축축이 젖었다. 그 눈물을 발견한 우영이 눈가를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알고 있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그에게 화풀이할 일이 아니라는 걸.

“하……. 씹.”

우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느리게 문질렀다.

차라리 오늘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두었어야 했다. 괜한 욕심이 더 큰 화를 불렀다.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도, 자신이 상처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상황이 자꾸만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껍질째 들춰낸 제 분노가 후회스럽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말 심하게 한 건, 미안해. 미안한데. 하아…….”

“…….”

“나도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그러니까. 집에 들어가. 그냥 내일 다시 얘기해.”

우영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달래 주어야 할 사람은 저였는데, 제 기분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있으니 좋아질 길이 없다. 지금으로선 같이 있어 봐야 해결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기혁아. 알았으니까, 일단……. 일단 들어가.”

한 꺼풀 내려앉은 목소리가 다시금 그를 달랬다. 여전히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누르고 그를 보지 않은 채였다. 불현듯 바스락,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미동 없이 서 있던 남기혁이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흙바닥을 밟고 뛰어가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그 뜀박질 소리가 저 멀리에서 사라졌을 때쯤, 그제야 우영은 찬찬히 손을 내렸다. 잇새론 벅찬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씨발.”

텅. 우영은 힘없이 그네 기둥을 걷어찼다. 그대로 등을 대고 바닥에 털썩 쭈그려 앉았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 뜯듯이 쥐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솟구치는 파괴적인 감정이 벅차기만 했다.

남기혁에게로 향한 말들은 양날의 검이었다. 상처를 주면서 자신도 상처받고 있었다. 그러나 갈기갈기 찢어져도 다시 기워 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인과응보. 이 또한 제가 감당할 일이었다.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먹먹한 구름에 가려진 달을 보자니 고태성이 떠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환히 머리를 내밀고 있을 때도, 눅눅한 비구름에 가려져 있을 때도, 낮에도, 밤에도, 그는 늘 항상 저를 따라 다녔다. 그게 싫었다. 싫으면서 좋았다.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흰 달이 지독하게 미웠다. 하나 이 순간에도 죽을 만큼 그가 보고 싶었다.

***

“왔냐.”

쭈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묶던 우영이 힐긋 시선을 들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어제와 달리 아침부터 햇볕이 창창했다. 고태성의 뒤로 쨍하게 내리비치는 햇살에 우영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유난히 눈이 부셨다.

단단하게 매듭을 묶고는 한쪽 어깨에 걸쳐 놓은 가방을 고쳐 매며 일어섰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평소처럼 쉽사리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가자.”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쳐 지나갔다. 이른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간밤에 뒤죽박죽 눌어붙은 제 속과는 달리 들이켠 숨결에서는 청량한 향기가 났다. 앞서가는 우영의 뒤를 고태성이 말없이 따라왔다.

“우영.”

묵묵히 뒤를 따라오던 고태성이 불현듯 우영의 어깨를 쥐었다. 멈칫, 자리에 선 우영이 시선을 들자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부었네.”

고태성의 눈동자가 지그시 우영의 얼굴을 응시했다. 단단한 검지의 끝이 우영의 눈가에 닿았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

또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무엇도 감추지 못하도록 옥죄어 오는 눈초리. 언제고 제 안을 까발려 버릴 듯 보내오는, 무언의 압박.

버겁다. 감정이 느껴지는 찰나 우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간신히 한 점 숨겨 놓은 치부를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 어제 늦게 라면 먹고 잤더니 존나 부었네. 두 개 끓여서 그런가? 국물이 좀 짜긴 했어.”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기분 탓인지 뒤통수로 진득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지난밤 집에 들어온 우영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그냥, 전부 좆같아서, 모든 게 싫어서, 자신에게 죽도록 환멸이 나서.

쌓아 온 모든 걸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아니, 권우영 제 자체를 부정당한 듯했다. 홀로 끝없는 괴로움 속으로 빠져들며 허우적댔으나, 다 해진 끄나풀조차 쥘 수 없었다. 어젯밤 그 칠흑의 나락에서 우영을 끌어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을 거의 새다시피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동이 텄다. 아주 잠깐 얕은 잠에 빠진 찰나 알람 소리가 울렸고, 눈을 떴다. 거울을 보니 눈두덩이 조금 부어 있었다. 예민한 고태성이 모를 리 없을 거라 생각은 했으나 역시는 역시다. 예리한 놈. 그는 단번에 우영의 변화를 알아챘다.

“라면 먹고 자서 부었어?”

묻는 말에 우영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 입술 끝을 살짝 올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어. 앞으론 야식 먹지 말아야지.”

“근데 왜 눈만 부어?”

고요한 목소리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곧은 눈빛이 우영의 위로 빤하게 쏟아졌다. 새카만 속내를 끄집고, 겹겹이 감춰 놓은 비밀을 벗겨 내려는 짙은 시선에 불현듯 숨이 막혔다.

“아, 먹다가 눈에 국물 튀어서 존나 비볐더니.”

“…….”

“너도 라면 먹을 때 조심해라. 눈에 들어가면 개 따가워.”

우영은 괜스레 두리번거리며 길 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초조한 속과 달리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묵직한 침묵이 이어졌다. 믿지 않겠지. 제가 생각해도 어설픈 변명이었다. 하나 딱히 떠오르는 수도 없었다. 맞설 자신이 없으니 회피하는 수밖에 없다.

“권우영.”

낯선 목소리에 우영이 등줄기를 굳혔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비스듬히 선 고태성이 보였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저를 내려다보는 고태성의 무감한 눈빛에 우영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왜, 새끼야.”

우영은 애써 눈을 휘어 웃었다. 매끄러운 뺨 위로 장난스러운 볼우물이 패었다. 느닷없이 번지는 미소에 고태성의 동공이 동요하듯 일렁였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우영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온 고태성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대강 매어 놓았던 우영의 넥타이 상단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미동 없이 선 우영의 눈동자가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너.”

“…….”

“똑바로 하고 다녀.”

느슨하게 매어져 있던 넥타이를 목까지 죽 당겼다. 겉보기론 꼭 맞도록 바로 해 준 것이었지만 별안간 목을 졸린 기분이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우영은 묵묵히 제 넥타이를 정리하는 그의 손길을 응시했다.

권우영. 익숙하고도 낯선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

돌아온 학교는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교실 안에서 공을 튕기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웅성대며 떠드는 소리와 투박한 웃음소리. 막 개장한 시장 바닥처럼 부산스럽고 어수선하기만 했다.

간밤에 고민했던 문제들에 답은 없었다. 어제 제게 닥친 일들은 마치 저를 바싹 태우려는 불쏘시개 같았다. 괜한 억하심정에 이수화를 좋아한다는 듯이 뱉어 버렸고, 험한 말도 해 버렸다.

실상 남기혁과는 싸운 것과 다름없었으나, 무얼 화해해야 하는 건지조차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가 바라는 일은 맹목적인 이수화와의 절교다. 우영의 성격상 이유도 막론한 채 그럴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남기혁은 수업 시작 전 등교했다. 먼저 눈을 마주쳐 보았으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우영은 남기혁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빈정거리는 놈들 사이에서 속상했을 놈의 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만큼 함께 지내 온 시간이 있었으므로.

생각하니 또 머리가 터질 듯이 쑤셔 왔다. 마음 같아선 조현우인지 김현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놈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한 대 날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제게는 일을 처리해 줄 부모도 물어 줄 깽값도 없으니 참아야 했다.

어차피 지나가면 잊힐 일이다. 이제는 마구잡이로 굴던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혼자서도 잘 이겨 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

수업 내내 앞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는 남기혁을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내내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았다. 틈틈이 보냈던 메시지조차 읽질 않으니 직접 부딪히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4교시 후 점심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우영이 남기혁에게 다가갔다. 그는 박진우와 김진성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여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

짤막한 부름에 아이들의 시선이 우영에게로 향했다. 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얘기 좀 해.”

말하자 남기혁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짧은 정적 속에서 우영이 한 번 더 말했다.

“얘기 좀 하자고.”

입술을 다물고 우영을 바라보던 남기혁이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박진우의 어깨를 밀며 등을 돌렸다.

“할 말 없는데. 야, 밥 먹으러 가자.”

주변에 서 있던 놈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밖으로 향했다. 눈가를 찡그린 우영은 무리가 문을 벗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어렵게 되었다.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뒤를 돌자 비스듬히 기대앉은 고태성이 보였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손에 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성큼성큼 돌아온 우영이 털썩 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미 진즉에 남기혁과 제 기류를 전부 눈치챘을 터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이미 남기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들은 걸까. 왜인지 먼저 물어 오질 않으니 내심 더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고태성은 제가 먼저 얘기하기를 기다려 주고 있을지도 몰랐다.

우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태성이야 어차피 제 일 말고는 관심 없고 무심한 타입이었다. 그보다 우선 남기혁과 이야기를 마저 나누는 게 나을 듯했다. 오늘 그의 태도를 보아서는 쉽사리 일이 풀릴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떻게든 해야 했다. 점심을 먹은 후, 잠깐 데리고 나가서 어제 일을 사과하고 대화를 갈무리하자고 마음먹었다.

또 머리가 아파 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찰나, 책상 앞에 하얀 손이 내밀렸다.

“이거……. 먹어.”

포도 맛과 딸기 맛. 두 개의 막대사탕이었다. 우영이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사탕 중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지 않아도 이수화였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봐도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의 이수화가 눈을 내리깐 채 양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 땡큐.”

사탕을 손에 쥔 우영이 일부러 장난스레 윙크해 주었다. 저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를 채근해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으나, 어차피 자신이 남기혁과 허심탄회하게 속을 터놓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일이었다.

우영은 단념하기로 했다. 이수화를 캐며 골머리 썩기보다는 원스톱으로 남기혁과 얘기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갑작스러운 윙크에 이수화의 얼굴이 당황한 듯 붉어졌다. 책상 위에는 한 개의 사탕만이 남았다. 늘 그랬듯 고태성의 몫이었다. 우영이 사탕을 집어 고태성에게 건넸다.

“야.”

그러나 책을 보던 그는 사탕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말 뿐, 받아 들 생각을 않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뭐 해, 먹으래.”

여전히 책에 시선을 둔 고태성이 입을 열었다.

“나 사탕 안 좋아해.”

말하며 살짝 웃는다. 뭔 개소리지. 고태성만큼 사탕을 좋아하는 놈도 없었다. 우영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이수화가 머뭇거렸다. 힐끔 눈치를 본 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왜. 충치 생길까 봐?”

“…….”

“그럼 두 개 다 내 거. 고맙다? 야, 앞으로 이 새끼 거 사 오지 마.”

장난스러운 말에 굳어 있던 이수화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조용히 이수화의 표정을 살핀 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고프다.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

고태성의 팔을 툭툭 건들자 그가 읽던 책을 덮고는 느릿느릿 일어났다. 앞서 걷던 우영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우두커니 선 이수화를 보며 턱짓했다.

“이수화. 뭐 해.”

우영의 말에 우물쭈물 서 있던 그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조금 위축된 듯 보이긴 했지만 상태는 양호한 듯했다.

세 명은 요란스러운 복도를 지나 급식실로 향했다. 늘 주도적으로 떠들던 남기혁이 없어 평소보다 조용했다. 우영 또한 별로 능청 떨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세 사람 사이에 이어지는 침묵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이수화.”

“으응.”

“넌 무슨 과 지원할 거냐?”

묻는 말에 이수화가 눈을 마주쳐 왔다. 늘 공붓벌레처럼 성적에 매달리는 건 알고 있었으나, 돌이켜 보니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나…… 법학과.”

그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로 중얼거렸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오. 법대생 되시게?”

“……그냥, 아버지가…… 가래서.”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워낙 여린 성격 탓에 여느 부잣집 도련님으로 어화둥둥 자라지 않았을까 짐작하던 것과는 달리 엄격한 집안인 듯했다. 별말이 없는 고태성의 반응을 흘긋 살핀 우영이 다시 이수화를 응시했다.

“그게 뭐야. 네가 가고 싶은 과는 없냐?”

“응……. 딱히.”

하기야. 주변에도 제가 진짜 원하는 진로를 모르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그저 입시 준비에 치어 아등바등 되는 대로 사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영 또한 체대 입시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급식실에 도착한 그들은 줄을 섰다.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으며 안을 쭉 훑자, 남기혁과 박진우 패거리가 보였다. 자리를 두 개씩 차지하고 식판을 널어놓은 것이 퍽 불량해 보였다.

마뜩잖은 얼굴로 혀를 찬 우영은 시선을 돌렸다. 친구 같지도 않은 놈들 데리고 뭐 한다고. 가만히 앞에 선 이수화의 정수리를 쳐다보던 그는 곧 생각을 접었다.

“맛있게들 먹어~.”

“감사합니다.”

하필 사람이 딱 많은 시간에 오는 바람에 급식실 안이 바글바글했다. 제법 넓은 규모인데도 빈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셋이 앉을 자리를 훑어보던 우영이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이수화에게 턱짓했다.

“쵸파, 저기로 가자.”

고개를 끄덕인 이수화가 우영이 가리킨 자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고 소란하게 일어나는 아이들을 조심조심 피해 길을 가로지르는 때였다.

우당탕. 잡을 새도 없이 이수화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놀란 우영이 눈을 크게 떴다. 바닥에 엉망으로 쏟아진 잔반 사이로 이수화가 널브러져 있었다.

“야, 괜찮아?”

홱 고개를 돌리자 이수화의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발이 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시선이 교복 바지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와, 미안. 못 봤다.”

킬킬대던 유영재가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박진우와 김진성, 이진호 또한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우영의 굳은 시선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 끝에는 소란에도 이쪽 한 번 보지도 않은 채, 식판에 머리를 박고 묵묵히 수저질하는 남기혁이 있었다. 입 안이 가득 찰 정도로 퉁퉁하게 튀어나온 볼이 보인다. 한눈에도 억지로 꾸역꾸역 먹고 있는 듯했다.

탕. 우영은 들고 있던 식판을 옆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수화의 팔을 잡아 올리며 유영재를 내려다보았다.

“씨발 새끼가…….”

살벌한 눈빛과 마주치자 유영재가 회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괜히 옆에 앉은 이진호를 마주 보며 이죽거렸다. 속에서 뜨끈한 분노와 함께 더운 숨이 왈칵 쏟아졌다. 절로 눈가가 일그러졌다.

“야, 이 씹새야. 돌았냐?”

“우영.”

등 뒤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영이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고태성이 무감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나가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씹. 욕을 지껄인 우영이 반찬으로 교복이 엉망이 된 이수화를 일으켰다. 동시에 유영재가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야, 진짜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어쩌냐? 세탁비 줄게.”

짓궂게 건네는 말에 우영의 표정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진우가 빈자리를 툭툭 치며 목을 쭉 빼 들었다.

“고태성! 여기 와서 먹어. 권우영은 이수화 씻기러 가야 할 거 아냐.”

오묘한 뉘앙스의 말에 아이들이 숨죽여 킬킬거렸다. 우영은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당장 놈의 멱살을 쥐어 잡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우영, 우영아…….”

조그맣게 흘러나온 소리에 시선을 내린 우영이 이수화를 응시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맹수 앞의 초식 동물처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시선은 우영의 말아 쥔 주먹을 향한 채였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수십, 수백 개의 눈동자가 제 주변으로 몰리고 있었다. 주변의 수군거림 또한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이 자리에서 소란을 피워 봐야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어서 이수화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나았다.

생각을 마친 우영이 비틀거리는 이수화를 부축해 일으켰다. 왜소한 몸이 드센 악력에 붕 뜨듯 올라왔다. 우영은 줄곧 떨리는 그의 어깨를 달래듯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괜찮아.”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이리저리 솟구치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은 숨을 찬찬히 내쉬었다. 이윽고 표정 관리를 마친 우영이 식판을 든 채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는 고태성을 쳐다보았다.

“야, 가서 저 개새끼들이랑 먹어라. 난 얘 좀 처리할게.”

그에게 눈짓하며 슬쩍 웃어 보였다. 일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었다.

어차피 저놈들은 고태성에게 잘 보이려 안달 난 놈들이고, 저는 이 상태로 밥을 먹기는 글렀다. 자리에 남기혁도 있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냥 혼자 가라 그래.”

그러나 메마른 답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뭐?”

“혼자 알아서 하고 오라고 하라고.”

낮게 뇌까리는 고태성의 시선이 이수화의 위로 느리게 가닿았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 뭐라는 거야. 그냥 가서 먹어.”

우영은 아무렇지 않게 고태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쩌면 고태성에겐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지금 상황에서 저까지 그러면 안 될 일이었다. 그를 지나치는 찰나, 다시 한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걸음이 붙들렸다.

“권우영.”

냉랭한 음색에 우영이 박힌 듯 멈춰 섰다.

“같이 먹자고.”

고태성의 눈길이 우영에게 닿았다. 시선이 얽힌 짧은 순간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이어졌다. 주변을 스쳐 지나가던 낯선 이들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제 갈 길을 갔고, 그 중심에는 고태성과 우영, 그리고 엉망으로 더럽혀진 이수화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온갖 혼란한 생각들이 섞여 든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할 만큼 여유롭지도 못했다.

“이따 봐.”

우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와글와글 웃고 떠드는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우영, 같이 가. 안 그래도 오늘 급식 메뉴 존나 구려.’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들려왔을 목소리가 귓가로 따라 들었다. 어쩌면 실제가 아닐까 했던 막연한 기대는 잔상만 남겨 둔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

운일 고등학교 별관 1층 구석엔 운동부를 위해 마련된 샤워실이 있었다. 그러나 본관 1층에도 샤워실이 있는 데다, 외진 곳이다 보니 운동부조차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우영은 이수화를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본관에 갔다간 이수화가 오늘 온몸에 반찬을 뒤집어쓴 걸 전교생이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착한 샤워실은 아니나 다를까 개미 한 마리 없이 조용했다. 옅은 숨을 내쉰 우영이 이수화를 응시했다. 흰 와이셔츠 소매가 벌건 국물에 젖어 지저분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 데진 않았어?”

“……응.”

이수화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곳은, 하 씨발. 뭘 똑같은 말을 계속 묻냐.”

“…….”

“다친 데는 없어?”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흐트러뜨린 우영이 그에게 턱짓했다. 며칠째 같은 말을 묻고 있는 듯해 괜히 더 짜증이 났다. 이쯤 되니 주변 모두가 작정하고 이수화만 괴롭히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조끼부터 벗어. 교실에 체육복 있냐?”

꼴이 엉망이었다. 소매는 물론이고 가슴께부터 바짓단까지 전부 지저분해진 탓에 갈아입어야 할 듯했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안 가져왔는데.”

“대강 지우고 있어. 가지고 올 테니까.”

우영은 그곳에 그를 넣어 두고 다시 교실로 향했다. 터벅터벅 보폭을 좁히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거의 다 맞춰 놓은 큐브가 마지막 고비에서 비틀렸다. 풀어 보고자 열심히 돌리면 돌릴수록 처절하게 어긋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별관을 나와 생각 없이 걷던 우영은 문득 앞을 가로막는 인영에 툭 멈춰 섰다. 고개를 드니 옅은 숨을 몰아쉬는 고태성이 보였다. 마치 뛰어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뭐냐?”

느닷없는 놈의 출현에 잠시 사고 회로가 멎었다. 급식실에서 헤어진 게 고작 몇 분 전이었다. 먹는 속도가 느린 그가 벌써 밥을 다 먹고 나왔을 리는 없었다. 본관에서 별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기에 그가 이 곳을 지날 일도 없었다.

“밥 안 먹었어? 여기서 뭐 해.”

나를 찾으러 온 건가. 문득 의문이 든 우영이 다시금 고태성과 눈을 마주했다. 묻는 말에도 그는 가만히 우영을 쳐다보기만 했다.

“나 찾으러 온…….”

“왜.”

“어?”

고태성의 눈가 끝이 움찔 움직였다. 언뜻 보면 찌푸린 듯한 모양새였다.

“왜, 내 말 무시해?”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우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시라니, 제게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한 번도 고태성의 말을 무시해 본 적은 없었다.

“왜 내 말 무시해.”

재차 건네는 말에 우영이 눈을 깜박였다. 그의 말을 거절하고 이수화를 데리고 온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놀림당하는 놈을 버리고 강자 쪽에 붙는 비열한 짓이 하긴 싫었으니까. 하물며 그들은 우영에게 강자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치졸하고 더러운 양아치들일 뿐이었다.

“우영아……. 씨발, 어디 봐.”

짓씹는 목소리와 함께 그가 우영의 턱을 움켜쥐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저도 모르게 아래로 내려갔던 시선이 강제로 들렸다.

“내가 말할 땐 나를 봐야지.”

고태성의 새까만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얼굴엔 화가 어려 있었다.

“……왜 이래.”

느닷없는 행동에 우영이 눈썹을 찌푸렸다. 드센 악력에 턱이 다 얼얼했다.

“거기서 또 어떻게 그냥 앉아서 먹어.”

우영은 그의 팔목을 쥐어 억지로 떼어 냈다. 기분이 나쁠 만한 이유는 알겠으나 이렇게까지 화를 낼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솔직히 좀 그렇잖아. 나이가 몇 갠데 아직 그런 좆같은 짓 하는 새끼들이 있냐? 존나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제가 아니었더라면 진즉부터 이수화를 괴롭혔을 놈들이다. 어쩐지 내내 정이 가질 않더라니, 하는 짓을 보면 깡패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이수화 지금 별관 샤워실에 있어서 체육복 가져다줘야 돼. 교실 가 있어. 밥 안 먹었으면 이따 매점 같이 가자.”

우영은 그의 가슴께를 툭 쳤다. 우영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고태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 좀 심해.”

“어?”

“심하다고.”

“뭐가?”

느른하게 번지던 눈빛이 싸하게 빛났다. 불현듯 스며든 긴장감에 우영이 눈을 깜박였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어디선가 짹짹 새소리가 울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끝을 모르게 드높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사위는 청명했다. 그 아늑한 평온 사이로 고태성의 매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왜 그렇게 이수화를 못 지켜 줘서 안달인데.”

미지근한 어조에 우영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또 같은 소리였다. 며칠 새 몇 번 들었다고 아주 진절머리가 나는 말이었다.

“아…….”

끓는 소리를 낸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수화가 아니고.”

잠깐 말을 끊으며 또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수화가 아니고 다른 놈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이수화라서가 아니라, 너나 남기혁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거라고.”

“똑같이?”

“어. 똑같이.”

단호한 답에 고태성이 턱에 힘을 주었다.

“이수화랑 나랑 똑같이? 씨발, 말이라고 해?”

불현듯 고태성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꽂힌 그를 보며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왜 또 이상한 데서 급발진이세요. 알았어, 알았어. 안 똑같아. 안 똑같아. 아니, 같겠냐? 너였으면 씨발, 뒤집어엎었지 거기서. 그냥 다 내 손에 뒤졌어. 내년에 한국대가 아니라 깜빵에 가야 됐을걸.”

장난스레 그의 팔뚝을 툭툭 치며 올려다보았다. 어딘가 잔뜩 비틀려 보이는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어떻게 모른 척해. 이수화 성격 몰라서 그러냐. 저거 물렁물렁 약해 빠져 가지고, 그냥 두면 유영재 같은 새끼들은 또 가만 안 둔다고. 더하면 더했지.”

우영의 말에 고태성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심기 불편한 얼굴이었다. 풀어질 줄 모르는 얼굴에 우영이 곤란한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이내 답답한 듯 제 머리를 헝클며 ‘아!’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며칠간 과부하 됐던 머리 탓에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야야. 아무튼, 있어 봐. 체육복 가지고 올게.”

걸음을 옮기는 찰나, 고태성이 중얼거렸다.

“이수화네 아빠.”

“…….”

“걔네 아빠 검사야. 중앙지검 특수부 이수완 검사. 남기혁 아버지 회사 지금 그 새끼 아빠가 들쑤시고 있고, 곧 구속 영장 나와.”

느닷없는 말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불현듯 종전에 이수화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오. 법대생 되시게?’

‘……그냥, 아버지가…… 가래서.’

아버지가 가라고 했던 법학과. 검사. 별생각 없이 물었던 말들이 이어졌다. 담담한 어조와 달리 내용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태성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 새끼 존심 상해서 나한테도 말 안 했어. 이제 기사 뜰 거고, 누나들은 유학 갈 준비하고 있대.”

우영의 눈이 서서히 벌어졌다.

“아니. 갑자기. 뭘, 뭘 잘못한 건데. 확실한 거야?”

놀란 우영이 그의 팔을 붙들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버지 진짜 구속된대? 그럼, 남기혁네 망하는 거야?”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운 반응에 고태성이 찬찬히 우영의 얼굴을 훑었다.

“대기업이니까 망하는 건 아니지만, 집안엔 당연히 안 좋겠지. 정확한 건 판결 나와 봐야 알 수 있고.”

“하, 미친……. 갑자기 무슨.”

혼란에 빠진 우영이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제야 교실에서 나사 빠진 듯 굴던 남기혁이 떠올랐다.

‘수능 코앞에 두고 일 벌이고 싶냐? 이 빡대가리 새끼야?’

‘닥쳐. 그딴 개 같은 거 씨발, 상관없으니까……. 놔.’

교실에서 제게 으르렁대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말 그대로 수능이 이제 코앞이었지만, 그 정도로 큰일이 생긴 거라면 입시 준비는커녕 제정신도 아닐 터였다.

그제야 벌어진 모든 일의 퍼즐이 하나둘씩 들어맞기 시작했다. 저나 고태성과는 달리 남기혁의 가족은 화목했다. 그의 아버지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 한들, 가정의 행복을 파탄 낸 이수화의 아버지가, 그의 자식인 이수화가 미웠을 것이다.

우영은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고태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난 며칠간 그가 어떤 괴로움 속에서 살았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우영아.”

혼돈에 빠진 우영을 두고 고태성이 입을 열었다.

“다시 갈 거야?”

감정의 동요라곤 없는 얼굴이었다. 고요한 물음에 우영이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입술은 잘근 깨문 채였다. 고태성의 물음과는 별개로 머릿속이 남기혁의 생각으로 혼잡했다.

이럴 게 아니라 남기혁에게 억지로라도 찾아가서 말을 해야……, 아니, 자존심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하니 모른 척해 줘야 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어떡해야…….

“아, 잠깐만. 씨발…….”

그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별관에서 이수화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 뒤늦게 떠오른 탓이다.

“일단, 일단. 어, 이수화 옷 좀 먼저 가져다주고 올게. 이따 다시 얘기하자.”

우영은 심각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갑자기 고태성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이수화가 제법 오래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홀로 벌벌 떨며 빗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조급해졌다.

옷을 가져다주고, 그다음에는 남기혁에게 가서, 모르는 척 사과를 하고, 아니 사과 아닌 위로를 하고……. 아니, 사과를…….

“그냥 둬.”

혼란한 정신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던 우영이 멈춰 섰다.

“걔 좀 씨발…….”

“…….”

“그냥, 그냥 두라고.”

고개를 돌리자, 새카맣게 그늘진 고태성이 보였다. 울창한 나무 그늘에 가렸을 뿐인데 한없이 어둡게만 보였다.

“좆같아서 더 못 보겠으니까.”

우영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늘 가지런히 올라가 있던 그의 입술 끝이 아래로 비뚜름하게 휘어져 있었다.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한, 새카만 얼굴이었다.

왜 그런 얼굴로 그런 뾰족한 말을 뱉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려야 할 수 없는 빤한 진실이었다.

‘괜히 씨발……. 소름 끼치잖아.’

멈췄던 숨을 들이켜자, 심장이 우지끈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우영은 볼 안쪽 살을 꽉 씹었다. 머리 위 드리운 나무 사이로 파드득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뺨을 스친다. 저도 모르게 살짝 끌어 올라간 입매 사이론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왜 좆같은데?”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피하는 것이 상책임을 알면서도 자꾸 들이받게 되는 건 단순한 치기였다. 그래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쓸데없이.

“소름 끼치냐?”

“…….”

“내가 게이라도 될까 봐?”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고태성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우영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까마득하게 깊은 눈동자가 천천히 고태성의 얼굴을 훑는다. 기다랗고 느른한 눈매, 나붓하게 뻗은 속눈썹과 그 아래 작은 점, 곧고 오뚝한 콧대, 희고 고운 피부와 새카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늘 저를 향해 있는 흔들림 없는 시선.

손 한 번 대어 보기 어려우리만큼 예쁘고, 소중한…… 첫사랑.

“농담이야, 새끼야.”

“…….”

“쫄았냐?”

능청스레 그를 툭 쳤다. 볼우물이 움푹 파일 정도로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속은 마구잡이로 헤집어지는데 자꾸만 웃음이 흘렀다.

“수능까지 이제 세 달 남았다, 세 달. 괜한 데 날 세우지 말고 공부나 하세요. 갔다 온다.”

답은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정적과 함께 제 눈을 마주하던 눈빛이 잔상처럼 남았다. 늘 무심하고 변화 없는 낯빛에 어린 감정은, 분명한 당혹감이었다.

2권에 이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