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X년 09월 01일 AM 08:50]
열아홉. 한차례 불볕더위가 지나가고, 습한 공기와 축축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이 찾아왔다. 한창 입시 준비에 힘써야 할 예민한 시기다. 운일 고등학교는 2학년 학급 그대로 3학년에 올라가는 체계였다.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우영은 로또라도 맞은 듯 환호했다.
3학년에 올라가며 그는 예정대로 축구를 그만두었다. 혜성같이 나타난, 유일무이한 에이스를 잡으려는 담당 코치와 감독의 적극적인 만류가 이어졌다. 우영은 깍듯한 사과의 말로 대신했다. 축구는 재밌었으나 한국대로 진학하기 위한 발판이었을 뿐, 선수로 생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 삼이 된 우영은 전보다 훨씬 더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했다.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호준의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선생으로서도 자질 있고 능력 있는 남자였으며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무일푼으로 체육관에 드나들려니 당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할머니를 보채 체대 입시 학원에 다니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실기는 걱정 없었다. 어차피 근력이나 지구력에 있어 누구에게 뒤지는 수준도 아니었고, 잘할 자신도 있었다. 진 빚은 그의 말대로 당당히 입학 후 성인이 되어 갚자는 생각을 했다. 우선은 제 합격이 먼저였다.
작년에 종종 들락거리던 피시방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간혹 주말에 놀러 가자는 남기혁의 꼬드김도 무시했다. 대학이 먼저다. 이제 수능까지 몇 달 채 남지 않았으니 농땡이 피울 시간 따윈 없었다.
중간고사, 모의고사, 기말고사, 수행 평가. 수능은 물론 내신도 신경 써야 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평일 주말 예외 없이 잠자는 다섯 시간을 빼고는 공부와 운동만 했다. 기본 체력이 있으니 좀 덜 자도 버틸 만했다. 말 그대로 숨만 쉬며 살았다.
정말로 힘이 들 때는 한국대 앞에서 고태성과 찍었던 사진을 봤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거짓말처럼 기운이 났다.
예상외로 고태성은 이서율과 사귀지 않았다. 간혹 그녀가 종종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모든 나날이 고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며 목표를 향해 막힘없이 달리던 차였다.
그러나 사고는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었다. 삽시간에 타오른 산불의 발화점이 무심코 지져 끈 담뱃불인 것처럼,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뜻밖의 사건 또한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야. 기혁이 또 안 왔어?”
우영이 텅 빈 책상을 보며 물었다. 어제 아프다던 남기혁이 이틀째 학교에 나오질 않은 탓이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노트를 끄적거리던 고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우영의 시선을 마주하며 별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뭐, 일 생긴 거 같던데.”
“일?”
되묻는 우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
우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 명의 단체 채팅방은 어제 아침에 주고받은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숫자 1이 계속 남아 있었다. 고태성은 책상에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창밖을 보았다. 우중충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어제보다 온도가 급격하게 쌀쌀해진 날씨였다.
“무슨 일이냐니까?”
돌아오지 않는 답에 우영이 재차 물었다. 남기혁과 고태성은 옆집에 살고 있었다.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으니 뭐라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 자, 그만 떠들고 자리에 앉아라!”
다시 한번 물으려는 찰나, 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잠히 칠판을 바라보는 고태성을 응시하던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노트를 펴고는 사각사각 글씨를 써냈다.
‘뭔데.’
턱짓하며 노트를 들이밀자, 책상에 팔을 괸 고태성이 시선을 내렸다. 우영의 정갈하고 어른스러운 필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손을 뻗었다. 샤프를 쥔 기다랗고 고운 손가락이 노트 위에서 움직였다.
‘아버지 회사에 일 터졌대.’
‘아버지? 왜?’
‘나도 자세히는 몰라.’
고운 생김새와는 달리 구불구불 눌러쓴 글씨체를 보며 우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엔 종종 잊고 살지만, 남기혁도 리버캐슬에 사는 놈이다. 그의 아버지가 여느 건설사의 사장인 건 알고 있었으나 자세한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다른 놈들처럼 부모 잘 만난 주제에 허세를 부리거나 가진 티를 내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장점이었다.
근데 아버지 회사에 일이 생겨서 학교에 나오지 않을 정도면 큰일 아닌가? 심각한 걸까? 원체 소심한 놈이니 별일 아니라도 세상 다 끝난 듯 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 삼인데, 학교를 이틀이나 빠지는 건 좀 이상했다.
‘집에 찾아가 봐야 하나?’
‘안 그러는 게 좋을걸.’
‘왜?’
‘지금 걔네 집 분위기 안 좋거든. 존나 구림. XX’
엑스를 죽죽 연신 덧그리는 고태성의 손가락을 보며 우영은 괜한 걱정에 잠겼다.
***
사 교시 후, 점심을 다 먹고 교실에 돌아올 때까지도 남기혁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여전히 톡은 읽지도 않은 채였다.
뒤뜰로 혼자 나온 우영은 핸드폰을 들어 ‘남기혁’ 이름을 눌렀다. 종일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놈이 없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뚜르르, 뚜르르…….
일정한 전자음이 이어졌다. 얼마간의 신호가 이어진 후 익숙한 안내 음성이 흘렀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09:10 기혁왜학교안나와]
[10:30 아직도아프냐?]
[12:10 밥먹음??전화ㄱ]
[12:40 ㅡㅡ무슨일있어??]
[12:51 전화왜안받아]
[12:52 연락좀해ㅁㅊ놈아잠수타고지랄대학안가냐???]
답이 없는 채팅방에 메시지를 줄줄이 보낸 후 벤치에 철퍼덕 앉았다. 양팔을 기다랗게 뻗곤 비스듬히 기댄 채 턱을 젖혔다. 대낮임에도 해가 먹빛 구름 뒤로 숨었다. 눅눅한 하늘은 그늘이 드리운 듯 어두컴컴했다. 오전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멈췄으나 왜인지 우울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우영은 상체를 일으켰다.
“아이씨…….”
낮게 지껄이며 핸드폰을 쥐고는 포털 사이트를 켰다. 왜인지 마음이 영 불편한 것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는 수년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도종합건설’
키워드를 입력하자 각종 연관 검색어와 뉴스가 떴다. 언젠가 지나가며 들었던 남기혁 아버지의 회사였다.
‘건축, 토목, 플랜트, 전기, 에너지 사업 등을 하는 종합 건설업체. 남도종합건설은 1958년 8월 대구에서 남도토건(주)로 출발하여…….’
우영의 눈동자가 스크롤을 따라 움직였다. 이리저리 알아듣기 힘든 말들로 가득한 페이지를 넘기며 뉴스 탭을 클릭했다. 집안에 큰일이 있는 거라면 몇 줄 기사라도 떴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하나 줄줄이 펼쳐진 기사들에는 영업 이익이나 주가 변동, 기부 기사 등이나 뜰 뿐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뭐야…….”
뉴스 기사에도 없는 일이면 별일 아니지 않을까.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우영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나저러나 저보다는 수십, 수백 배 잘살 놈인 걸 알지만, 여태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기에 마음이 찝찝했다.
[13:01 읽으면연락해 계속씹으면집찾아간다]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내고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의미 없는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찹찹하고 서늘한 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아침을 먹으며 봤던 뉴스에서는 강수 확률이 60%라고 했다. 고작 반 넘는 확률이었으나 꼴을 보아하니 금세 또 비가 내릴 듯했다. 교복 바짓단을 툭툭 털고 일어선 우영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막간을 이용해 단어 몇 개를 더 외울 생각이었다.
3학년 교실은 개중 가장 꼭대기인 3층이다. 우영이 속한 3학년 1반은 1반이라는 숫자와는 다르게 복도 가장 끝 구석에 있었다. 우영은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 시끌벅적한 복도를 지나쳤다. 괜스레 답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껐다 켜며 고개를 드는 순간,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교실 뒷문에 개미 떼처럼 둥그렇게 모여 웅성거리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뒷문 앞에 불구경하듯 모여 있는 놈들을 보니 무언가 일이 난 모양이다. 기껏해야 쌈박질 정도겠지. 얼마 전에도 복도에서 두 놈이 엉켜 치고받고 하던 걸 본 일이 있었으니 비슷한 일일 것이다. 벌써 고 삼인데 언제 철이 들는지, 누군지 보지 않아도 한심스러웠다.
짧게 혀를 찬 우영은 느릿느릿 걸었다. ‘3-1’ 뒷문과 창문을 중심으로 겹겹이 쌓인 무리 뒤에 우두커니 섰다. 안으로 들어가질 않는 걸 보니 다른 반 놈들도 섞여 있는 듯했다. 쯔,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 마당에. 하여간 남 일엔 어지간히 관심 많은 것들이다.
다른 아이들보다 훌쩍 큰 우영은 여러 개의 머리통 위로 남의 반 구경하듯 힐긋 안을 들여다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교실 창문 쪽에 두 놈이 붙어 서 있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 싸움이 난 듯했다.
등을 보이고 선 놈에게 멱살이 잡힌 아이는 열린 창문 뒤로 허리가 꺾여 눌려 있었다.
저건 좀 위험한데. 우영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1년간 오다가다 한 번씩 말을 나눠 본 이들이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이 씨발 새끼야!”
걸걸한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직감적으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욕지거리하는 어투가 퍽 익숙한 목소리였다.
“개자식이!”
그건 남기혁의 목소리였다. 우영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제야 그 익숙한 뒷모습이 남기혁이라는 걸 깨달았다. 놀라서 와락 눈가가 일그러졌다.
“야. 씹. 비켜, 나와 봐.”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인파 사이를 조급히 비집고 들어갔다. 소심하고 욱하는 면이 있어도 다짜고짜 누굴 붙들고 싸울 놈은 아니었다. 아프다고 이틀째 학교도 나오질 않던 놈이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건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남기혁!”
창문 커튼이 찬 바람에 팔랑팔랑 나부꼈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간 우영이 그의 어깨를 탁 붙들었다. 덩치가 좋은 놈이니 괜히 누굴 다치게 했다간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수능이 몇 달 남지도 않은 시기에 교실에서 싸움판을 벌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집에서도 혼쭐이 날 게 분명했다.
“야! 나와, 그만해!”
크게 소리치며 돌아 서 있는 그를 떼 내는 순간, 어깨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우영의 시선이 창틀에 눕혀지다시피 한 놈에게 닿았다. 그곳에 있어선 안 될 얼굴이 드러났다. 희게 질려 눈물범벅이 된 이수화였다.
“뭐 해, 이 새끼야!”
우영이 거칠게 그의 어깨를 잡고 뜯어냈다. 힘 조절에 실패한 우영의 악력에 남기혁이 우악스레 떨어져 나갔다.
쿠당탕, 뒤로 밀쳐진 남기혁이 책상과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우영은 뒤로 꺾이다시피 누워 있던 이수화의 어깨를 감싸 들어 올렸다. 잡은 어깨에서부터 덜덜거리는 떨림이 전해졌다.
“이수화, 괜찮아?”
“우윽, 으, 흑…….”
우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잔뜩 찡그린 이수화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아, 씨발…….”
우영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느꼈다. 당하고 있던 상대가 이수화고, 때리던 놈이 남기혁이라서가 아니었다. 이수화는 누가 봐도 작고 약한 놈이었고, 남기혁은 저와 엇비슷한 등치에 우락부락한 몸집을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한 손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상대를 다들 보는 앞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이 싫었다. 1학년 때 이수화를 괴롭히던 놈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 놈이 남기혁이라는 사실에 더없이 짜증이 났다.
“권우영, 비켜.”
등 뒤에서 남기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수화의 마른 팔목을 쥐고 제 뒤로 숨긴 우영이 휙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기혁이 보였다. 일그러진 얼굴 위로 붉으락푸르락한 낯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우영은 뜨겁게 올라오는 숨을 삼켰다.
“뭐 하는 짓이냐?”
“안 비켜?”
눈가를 벌겋게 물들인 남기혁이 거친 목소리를 냈다. 어깨엔 잔뜩 힘이 들어간 채였다.
“씨발, 내가 먼저 물었잖아. 뭐 하는 거냐고!”
“보고도 몰라? 저 새끼랑 할 말 있으니까 비키라고!”
남기혁이 소리치며 우영에게로 달려들었다. 순간 우영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팔을 쫙 뻗어 달려드는 그를 온몸으로 막아 냈다. 거세어지는 몸부림에 우영은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야! 이게 지금 말로 하는 거냐? 씨발! 좀 진정해, 일단!”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우영이 소리쳤다. 일순 남기혁의 뒤로 불구경하듯 서 있던 박진우 패거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책상에 옹기종기 걸터앉은 놈들의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누가 봐도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재밌냐?”
매서운 눈으로 버럭 고함을 쳤다.
“처앉아 있지 말고 가서 문이나 닫아, 씨발!”
놈들이 하나둘 시선을 회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 보듯 슬금슬금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더러웠다. 저런 것들도 친구라고 끌고 온 남기혁이 한심해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잠시 방심한 찰나, 몸을 홱 돌린 남기혁이 이수화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재빠르게 손을 뻗은 우영이 거칠게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앞뒤 안 가리고 이수화에게 달려드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아, 좀! 하지 말라고, 씨발아!”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기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순간 사위로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우영은 흥분으로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인두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아……. 야, 정신 안 차려?”
힘을 주어 그의 멱살을 단단히 쥐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이수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쪽팔리냐? 다 보는 데서 뭐 하는 짓거리냐고!”
고개가 돌아갔던 남기혁이 찬찬히 얼굴을 들었다.
“하, 시발……. 너 지금 이수화 편드냐?”
잔뜩 탁해진 시선이 우영의 위로 내려앉았다. 어처구니없어하는 얼굴이었다. 입꼬리는 비뚤게 내려간 채였다. 이 상황에도 그런 말을 하는 꼬락서니가 퍽 남기혁다웠다.
“편이고 자시고, 하……. 씹, 교실에서 이럴 일이냐? 너 씨발, 이거 학폭이야, 학폭. 수능 코앞에 두고 일 벌이고 싶냐, 이 빡대가리 새끼야?”
헛숨을 내쉰 우영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었건 간에, 전교생이 나다니는 점심시간 교실 중앙에서 이러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이수화가 무언갈 잘못했다면 둘이서 따로 해결을 봐야 했다.
“닥쳐. 그딴 개 같은 거 씨발, 상관없으니까……. 놔.”
우영을 노려보던 남기혁이 제 멱살을 쥔 팔목을 거칠게 붙들었다. 잡힌 손목에 어릿한 악력이 느껴졌다.
“상관없기는, 씹……!”
무어라 말하려던 우영이 턱을 꽉 물었다. 여기서 더 시간 끌어 봐야 머리 빈 놈들 입방아에만 오르내릴 뿐이다.
우영은 간신히 차오르는 숨을 눌러 앉혔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참아야 했다. 더 시간을 끌다간 누군가 선생을 부를 것이다.
“하아. 됐고. 그만해라, 진짜.”
“…….”
“상황 더 좆같아지기 전에.”
짓씹듯 지껄인 우영이 남기혁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짙은 눈빛은 전에 본 적 없을 만큼 서늘했다. 여전히 쥔 멱살은 놓지 않은 채였다.
“진짜 그만해.”
우영이 낮게 뇌까렸다. 한풀 꺾인 채 씩씩대는 남기혁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시야가 트였다.
고태성. 고태성은 어디 갔지.
그가 있었다면 말렸을 것이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칠판 옆에 우두커니 선 고태성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우영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언제 온 거지. 설마 원래부터 있던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가만히 서서 우영을 바라보던 고태성이 느릿하게 걸어갔다. 수군대며 구경하던 아이들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계속 볼 거야?”
턱을 비스듬히 들고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무 표정 변화도 없는 평온한 어조였다. 웅성거리던 앞줄 아이들이 머뭇머뭇 물러서며 서로 눈치를 봤다.
“안 볼 거면 닫을게?”
답도 듣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문을 끌어당겼다. 사이에 끼어 있던 아이 하나가 헐레벌떡 팔을 뒤로 뺐다. 그제야 앞문을 열고 고개를 빼 든 박진우가 휘적휘적 손짓했다. ‘야야, 우리 반 아닌 애들 다 꺼져~’ 한마디에 열댓 명의 아이들이 술렁거리며 흩어졌다.
우영은 그제야 손에서 힘을 풀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남기혁의 일렁거리는 눈을 응시했다. 그의 가슴께가 위아래로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쉽사리 감정이 정리되질 않는 듯했다.
정적 사이로 둘의 시선이 오갔다. 우영의 팔목을 꽉 붙들고 있던 남기혁이 그제야 그를 놓았다. 별안간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우영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야, 다쳤어? 어디 아파?”
허리를 숙인 우영이 고개를 떨군 이수화의 뺨을 어루만지며 들어 올렸다.
“윽, 흐으. 으…….”
이수화는 두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서럽게 훌쩍거렸다. 갸름한 턱 끝에 맺힌 눈물이 교실 바닥으로 연달아 떨어졌다. 입술까지 파르르 떨었다. 한숨을 내쉰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하……. 씹.”
입술을 깨물곤 이수화의 손목을 탁 쥐었다.
“일단 나와. 보건실 가자.”
이수화는 우영이 이끄는 힘에 주춤주춤 끌려갔다. 화가 난 듯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던 우영이 우두커니 서 있던 남기혁을 쳐다보았다.
“넌 이따 얘기해.”
다소 사나운 어투에 시선을 내린 남기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우영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
훌쩍거리는 놈을 잡고 복도를 걷자 주변이 술렁였다. 뭐라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마 종전까지 구경하던 놈들이 섞여 있을 터였다. 흘끔거리는 시선 속에서 우영은 불편한 기분을 애써 억눌렀다.
점심시간 보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손목을 잡은 채 터벅터벅 이수화를 끌고 온 우영이 그를 침대에 앉혔다.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속이 얹힌 듯 답답했다.
“야, 이수화.”
“으, 응. 윽, 흐으.”
“이수화.”
다소 강해진 어조에 이수화의 훌쩍임이 조금 더 커졌다.
“응, 흐윽, 흡, 윽…….”
뭐가 서러운 건지 답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또 울기만 한다. 푹 한숨을 내쉰 우영이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얼굴을 가린 그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눈을 치켜떴다.
“어디 다쳤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붉게 부푼 눈가와 흠뻑 젖은 속눈썹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 공연히 기분이 저조해졌다.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 보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픈 데는, 없어?”
나직이 묻는 말에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숨을 내쉰 우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없다고?”
재차 묻는 말에 이수화가 훌쩍이며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였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뻗어 헐렁한 조끼와 교복 셔츠를 한 번에 움켜쥐곤 망설임 없이 위로 끌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손짓에 놀란 이수화의 허리가 움찔 튀었다.
“읏…….”
“씨발, 아까 그렇게 뭉개 놓고 없긴 뭘 없어.”
가만히 들여다보던 우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희멀건 피부 곳곳이 까지고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점점이 피가 몰린 걸 보니 곧 멍이 올라올 듯했다.
“손목 한 번 잘못 잡혀도 멍드는 놈이…….”
낮게 중얼거린 우영이 혀를 찼다. 쥐고 있던 옷깃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요한 보건실에 훌쩍이는 소리와 우영의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엎드려서 누워.”
우영은 익숙하게 손을 씻으며 선반을 뒤적거렸다. 훈련하다 생긴 자잘한 상처 때문에 2년 내내 보건실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다 보니, 웬만한 건 알아서 찾아 쓰던 차였다.
“누우라고, 새끼야. 약 발라 줄 테니까.”
“…….”
“보건 선생님 점심시간에 농땡이 치느라 안 와.”
단호한 말에 훌쩍거리던 이수화가 머뭇머뭇 침대에 엎드렸다.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자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달칵. 연고를 찾아 꺼낸 우영이 손바닥에 쥔 연고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씨발……. 진짜.
욕을 중얼거리며 엎드린 이수화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이런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나 제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밝아진 모습을 보며 그때의 기억은 완전히 잊고 살던 중이었다. 그런데 다른 새끼도 아니고, 남기혁과 트러블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우영이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저 평범한 남자애들의 사소한 싸움박질일 뿐인데 속이 갑갑했다. 아무래도 저도 모르는 사이 이수화에게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듯했다.
“그만 좀 울어. 넌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찐따처럼 울기만 할래? 같이 때리던가, 씨발 못 패겠으면 소리라도 지르라고 했잖아. 내가 알려 준 거 다 까먹었어?”
나무라며 교복을 걷어 올리자, 희고 가느다란 허리가 드러났다. 근육이라고는 하나 없는 말랑한 피부 위로 죽죽 그어진 상처가 보였다. 쓸리고 까진 상처 옆에 붉은 멍이 비쳤다.
물끄러미 그것을 주시하던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엔 잔뜩 짜증이 섞였다.
“너는, 이게 안 다친 거냐?”
“…….”
“하아. 됐다.”
인상을 찌푸린 우영이 상처 위로 살살 연고를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지 손끝에 닿는 피부가 말랑말랑했다. 그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이수화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당연히 따가울 수밖에 없었다.
“아……. 흐.”
“아파?”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이수화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힐긋 쳐다보니 베개 끄트머리를 꼭 말아 쥐고 있다. 짧게 혀를 찬 우영이 인상을 썼다.
“아, 존나 피멍 들겠네, 이거.”
“우으…….”
“이 정도 가지고는 흉 안 질 것 같긴 한데……. 집에 의사 있댔지? 가서 제대로 해 달라고 해, 병원을 가든가.”
기다랗게 그어진 상처를 따라 꼼꼼히 약을 바른 우영은, 잠시 약이 마를 동안 그의 교복 셔츠를 살살 흔들어 주었다. 낯빛엔 어두운 그늘이 한껏 드리워 있었다.
“무슨 일인데.”
“…….”
“말하기 어려워?”
건조한 눈을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기혁도 그럴 놈이 아니었고, 이수화 또한 그런 시비가 걸릴 만한 짓을 할 놈이 아니었다. 우영의 시선이 이수화의 뒤통수에 닿았다.
“아니, 하……. 씨발, 네가 남기혁이랑 얽힐 게 뭐가 있어? 저 새끼 다혈질이긴 해도 저렇게 막 나가는 놈 아닌데.”
엎드려 있던 이수화가 베개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더 파묻었다. 그 모습을 보며 헛숨을 뱉은 우영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래도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첫 만남에도 겪어 봤듯이 그는 평소 순한 성격과 달리 고집이 있었다. 골이 지끈지끈했다.
“됐고, 일어나. 목 봐 봐.”
“…….”
“아, 아까 잡혔잖아. 보라고. 그 새끼 힘 존나 센데.”
우영은 미동 없이 엎드려 있는 이수화를 응시했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일으켜 앉히고 싶었지만 거칠게 대하기 싫어 참았다. 속으론 이수화에게도 한 소리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일어나서 앉아.”
“…….”
“빨리.”
낮은 음색에 고개를 푹 숙인 이수화가 주섬주섬 옷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이내 침대 위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주먹을 얹었다. 우영의 눈동자가 다소곳이 앉은 그를 느리게 훑었다.
“고개 들어.”
마주 앉은 우영이 한쪽 어깨를 쥐자 이수화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우영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잡아먹냐? 쫄고 지랄.”
“…….”
“가만히 있어.”
단단한 손바닥으로 그의 목을 조르듯 가볍게 감싸 쥔다. 가느다란 목이 한 손에 들어왔다. 우영은 엄지와 손끝으로 여린 피부 위를 슬며시 꾹꾹 눌렀다. 가끔 목 부근에 통증이 있을 때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아파?”
물으며 이수화의 얼굴을 살폈다. 칠칠찮은 성격이라 다쳐도 모를 놈인데 놀라기까지 했으니 확실히 봐 두는 것이 좋았다.
“지금 불편한 곳 없지?”
묻는 말에 이수화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랑 목은 딱히 다친 데 없어 보이네. 집 가서 아픈 곳 있으면 어른들한테 바로 얘기해. 괜히 병 키우지 말고.”
이수화는 답 없이 주먹을 말아 쥔 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대롱대롱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뚝 흘러내렸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우영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 주었다. 다소 투박한 손길이었다.
서럽겠지. 마음은 이해했다. 과거에 어떤 짓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으니 더 그랬다. 괜히 속이 더 갑갑해졌다.
“점심시간 20분 남았으니까 쉬다 와라. 그냥 오지 말고 저기서 세수하고 와, 동네방네 질질 짠 티 내고 다니지 마시고.”
한숨을 내쉰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남기혁에게 갈 차례였다. 그 소심한 성격에 적잖이 삐져 있을 텐데. 아니지, 삐진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연을 끊자고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자마자 또 골이 지끈거렸다.
등을 돌리는 순간, 교복 셔츠 자락이 붙잡혔다. 한쪽 눈을 치켜뜬 우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이수화가 제 옷깃을 쥐고 있었다.
“왜.”
이수화는 벌겋게 부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자그마한 입술은 꽉 다문 채였다.
“아, 왜.”
“…….”
“하아. 또 시작이네, 이수화.”
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저라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남기혁이 워낙 드세게 날뛰긴 했지만, 욱해서 주먹을 날린 것도 조금 후회가 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긴 했으나 아무래도 뒷감당이 힘들 것 같아서였다.
힐긋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안 해도 되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우영은 제 셔츠 자락을 붙든 이수화의 팔목을 쥐곤 살짝 흔들었다.
“놔 봐. 남기혁한테도 가 봐야 돼. 그 삐돌이 새끼 지금 내가 네 편 들었다고 존나 삐져 있을걸. 씨발, 또 언제 달래 주냐…….”
그리고 한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돌아가면 무슨 개지랄을 할지 안 봐도 훤했다. 왜 저를 두고 이수화 편을 드냐든지, 어떻게 자기를 때릴 수가 있냐든지, 벌써부터 바락바락 난리 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간다.”
이어지는 침묵에 다시 등을 돌리려는 찰나, 우영의 등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의 시선이 찬찬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제 허리를 끌어안은 이수화의 정수리가 보였다.
“뭐…….”
다소 당황한 얼굴의 우영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얇은 교복 셔츠 아래로 뜨거운 숨결이 스며들었다. 그가 뿜어내고 있을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지 마, 우영아…….”
이수화를 내려다보는 낯빛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할 말을 잃은 우영이 열 오른 손바닥으로 입가를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이수화가 이런 식으로 제 의견을 피력한 건 처음이었다. 뒤늦게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뭐, 왜 그러…….”
“……흐으…….”
“야야. 아니 씨발, 왜 또 우는데.”
울음소리와 함께 그의 등이 들썩였다. 기껏 멎었다 싶더니 또 시작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영이 엉거주춤 상체를 숙이며 이수화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 안 갈 테니까 일단 뚝 그쳐. 이제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너 그 꼴로 교실 들어갈래? 어?”
그가 우영의 허리를 더 끌어안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칭얼대는 듯한 모양이었다.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놈을 매몰차게 두고 가기에도 신경이 쓰이고, 그냥 있자니 또 두고 온 남기혁이 신경 쓰였다.
하아. 고개를 툭 떨구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산 넘어 산이었다.
“돌겠네, 진짜…….”
우영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열아홉 먹고도 아이처럼 우는 놈은 이수화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 이수화가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는 순한 생김새와 평소 행동과는 달리, 은근히 강단 있고 고집 있는 성격이었다. 괴롭힘당하며 안경이 깨져도 꿋꿋이 참다 제 앞에서 눈물을 쏟던 것만 보아도 그랬다.
“야, 쵸파.”
“응, 흐윽……. 으.”
“그럴 거면 말을……. 하, 아니다, 됐다.”
말꼬리를 흐리던 우영은 포기한 듯 툭 내뱉었다.
“그만 붙어 있고 가서 세수해. 네가 매미냐?”
부드러운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혀를 찼다. 다 커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남기혁이고 이수화고 애새끼가 따로 없었다. 아무래도 속사정은 다른 놈들에게 들어야 할 듯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태성도 자리에 있었으니 뭐라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빨리.”
포기한 듯 천장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말랑한 뺨을 툭툭 치자, 그가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들어 촉촉해진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영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우물거리는 입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수화가, 우리 우영일 많이 좋아하나 봐.”
우영을 끌어안고 있던 이수화가 움찔 몸을 떨었다.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고태성이 문가에 비뚜름하게 기대선 채, 묘한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눈을 치켜뜬 우영이 고태성을 의아하게 응시했다. 한창 남기혁을 달래 주고 있어도 모자랄 시간에 여길 찾아온 것이 의외로웠던 탓이었다.
“왜 왔어? 기혁이는?”
“집 갔어.”
“아이씨. 그냥 보내면 어떡하냐. 더 삐지기 전에 달래 줘야 하는데, 그 새끼 좀 잡고 있지.”
우영은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심한 성격에 이대로 보내면 일분일초마다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 것이 뻔했다. 한시 빨리 무슨 일이 있는지 들어 보고 그와 대화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뭐?”
“기혁이 안 달래 주고 넌 뭐 하는데, 우영아?”
우영은 느릿느릿 걸어오는 그를 응시했다. 뭐 하는지 보면 모르나. 당연한 물음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보면 모르냐? 질질 짜는 놈 달래 주고 있잖아.”
그의 말에 고태성의 얼굴이 차츰 굳어 갔다.
“그러니까 그걸 네가 왜, 달래는데. 씨발…….”
억누르는 어조에 입을 열려던 찰나, 제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자 이수화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헛숨을 내쉰 우영이 그의 팔을 쥐었다. 벌벌 떠는 주제에 더 꽉 붙드는 건 또 뭔지. 애초에 왜 떨고 있는 건지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야, 이수화. 안 갈 테니까 놔 봐.”
“…….”
“빨리.”
가볍게 쥔 팔목을 흔들자 이수화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오늘 수요일인데, 우영아.”
뚜벅뚜벅 걸어온 고태성이 우영의 앞에 섰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고태성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었다. 늘 그렇듯 내리깔아 보는 듯 감흥 없는 시선이었다.
“점심시간 숙어 스무 개 외우기. 했어?”
“아. 하루 정돈 괜찮아, 새끼야.”
난데없는 잔소리에 우영이 투덜거렸다. 평소 그는 늘 계획을 정해 놓고 틈틈이 공부했다. 일별로 빼곡히 적어 놓은 일정을 고태성은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정작 저는 하지도 않는 주제에 제 성적에 집착하는 건 담임보다 심했다.
“공부도 안 하고, 남기혁도 내팽개치고.”
서서히 내려간 짙은 눈길이 우영의 허리께에 맞닿은 이수화의 머리칼에 닿았다. 연이어 그의 팔목을 쥔 우영의 손까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왜 여기서 좆같이, 이러고 있냐고. 시간 아깝게.”
평소와 달리 그가 말을 더 얹었다. 기분 탓인지 어투 또한 점점 더 강해지는 듯했다. 느닷없는 말에 우영이 미간을 모았다. 이수화를 앞에 두고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말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점심시간의 막을 알리는 예비 수업 종이 요란스레 울렸다. 문득 정신을 차린 우영이 이수화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야, 일어나.”
“…….”
“가지 말라며. 같이 가자는 거 아니야?”
팔을 잡고 일으키자 이수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을 내딛다 힘이 풀렸는지 풀썩 내려앉는 그를 우영이 다시 단단히 붙들었다.
“아, 뭐 하세요. 설마 업고 가라는 거 아니지?”
“……아, 아니…….”
젖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입술을 꾹 다문 발그레한 얼굴에 창피함이 드러났다. 벌겋게 물든 눈이 축축했다.
“얼른 세수해. 기다릴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화가 머뭇머뭇 세면대로 향했다. 수전을 틀고 손에 물을 담아 어푸어푸 세수하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우영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저를 빤하게 보고 있던 고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까닥 턱짓했다. 입 모양으로 왜,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