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2X년 01월 15일 PM 09:08]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우영이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힐긋 바라보았다. 다들 바쁜 건지 한 번 울릴 기미가 없었다.
열여덟. 벌써 겨울 방학이다. 몇 년 전부터 고태성은 방학마다 어머니가 계시는 해외에서 머물다 오곤 했다. 지역은 해마다 바뀌는 듯했으나, 이번에 간 곳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라는 곳이었다. 여태 제주도조차 가 보지 않은 우영에겐 듣도 보도 못 한 세계였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태성을 못 본 지 벌써 보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 존나 보고 싶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우영이 벽에 툭 머리를 기댔다. 고작 2주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진다. 일상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공허했다. 이제는 하루라도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것만 같았다.
우영은 핸드폰을 들어 채팅방을 켰다. 인원이 총 네 명인 톡 방에는 고태성과 남기혁, 그리고 이수화가 있었다. 원래는 쭉 셋이서만 이어 오던 대화방이었으나, 몇 달 전 우영이 이수화와 따로 메시지하던 걸 발견한 고태성이 그를 초대했다.
웃기는 놈. 아무래도 이수화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21:09 고태성언제와?]
생각에 잠겨 있던 우영은 참지 못하고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시차는 약 세 시간 정도라고 했으니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태성: 다음 주 월요일? 21:09]
아니나 다를까 칼 같은 답장이 왔다. 그저 텍스트일 뿐인데 우영의 입매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깔아 놓은 이불 위에 털썩 엎드려 베개를 끌어안고는 진지한 얼굴로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21:11 빨리와 자기^^ㅎ너없으니까 존나심심하당ㅎㅎ (이모티콘)]
짓궂은 장난처럼 꾸며 보냈으나 여느 때보다도 강렬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벌써 며칠째 고태성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기운이 죽죽 빠지는 것 같았다.
[태성: 응. 선물 사 갈까?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21:12]
글자를 읽으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화면을 바라보며 나붓이 내리깔려 있을 속눈썹과 살짝 올라간 입술까지 자연스레 떠오른다. 생각하니 진짜 보고 싶어 뒤질 것만 같았다.
[남기혁: ㅇㅇㅇㅇ나 있어! 휘X커스 초콜릿~~~~ 거기서 파는거 존나 유명하다매ㅋ 21:12]
[태성: 닥쳐 씨발 21:12]
[21:1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몇 초 되지 않아 돌아온 답에 우영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저러다 또 빡세게 삐지지. 생긴 건 누구보다도 쾌남인 남기혁은 트리플 에이형이다. 웬만하면 삐질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속 편했다.
[남기혁: ㅡㅡ시발 진짜 너무한거아냐??? 왜나한테만 그래? 존나 상처야ㅅㅂ 21:13]
[21:13 ㅋㅋㅋ야야 그만해 그러다 남 또 운다;;; 기념품은됐고 빨리오기나하세요ㅎㅎ]
[태성: 응. 빨리 갈게 우영아. (하트) 21:14]
-남기혁 님이 나갔습니다.-
“아 이 새끼, 그만하라니까…….”
못 말리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우영이 남기혁을 다시 초대했다. 누르기가 무섭게 바로 전화가 왔다.
[남기혁]
“어.”
-씨발!
“왜 다짜고짜 욕질이세요.”
잔뜩 상기된 목소리에 우영이 피식 웃었다.
-고태성 씹새끼, 개새끼! 존나 나만 싫어해! 아! 존나 빡쳐. 하……. 진짜 야, 우영아. 우리가 지낸 세월이 얼마냐? 어? 어떻게 나한테만 그래? 씨발,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수화기 너머에서 바락바락 악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영은 천장을 보고 털썩 돌아누우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넌 뭐 맨날 장난 가지고 그러냐, 새끼야.”
-장난도 한두 번이어야지! 시발! 아!
“네가 반응이 그 지랄이니까 재밌어서 그러는 거지. 한두 번 겪어?”
-아, 뭐래 또! 고태성이 너 빼고 존나 차별하는 거 몰라? 씨발! 구라 좀 보태서 전교생이 다 알걸? 너네 진짜 사귀기라도 하는 거 아니냐?
시끄러운 목소리에 큭큭대던 우영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 개소리한다 또.”
-아 진짜, 야. 솔직하게 말해. 진심 너네 뭐 있음? 그러지 않고서야 이 존나게! 명확한! 차별이! 말이 되냐고오! 심지어, 씨발. 고태성 개새끼 너보다 나랑 더 오래 알았다고!
숨 쉴 틈 없는 발악에 우영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미친……. 시끄러워. 작게 좀 말해라.”
-아, 그럼 뭐냐고!
찡그린 우영이 귓가에서 핸드폰을 살짝 뗐다.
나도 사귀고 싶거든, 이 새끼야…….
“네가 그딴 소리나 하고 다니니까 고태성이 지랄하지. 헛소리할 거면 끊는다. 나 바빠.”
-아! 왜 끊어! 나 전화하려고 집 나왔단 말이야!
투정 부리는 말에 하, 숨을 내쉬었다. 눈가는 살짝 찡그린 채였다.
“다시 들어가면 되잖아요. 뭐 가출이라도 하셨어요?”
-아니……. 아! 존나 정 없는 새끼들. 니들 그러는 거 아니야. 와, 나 진짜 상처받아서 눈물 난다고……. 허엉, 나만 왕따시켜 왜. 씨발.
징징대는 소리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고태성이야 어릴 적부터 늘 저런 식이었으니 대강 들어 주고 넘기려 했건만, 남기혁은 또 진심이었다. 그는 과거에도 같은 이유로 몇 번 토라진 전적이 있었다. 삐져서 아는 체도 않는 걸 겨우겨우 달래느라 아주 개고생을 했다.
“아이씨. 무슨 왕따를 시켰다고 그래, 미친놈아. 이수화도 있잖아.”
-와. 이수화랑 나랑 급이 같냐?! 고작 1년 본 놈이랑? 나 또 졸라 상처받으려고 하네?
바락바락 소리치는 뒤로 하아, 입김을 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밖이 제법 추운 듯했다.
-야. 그리고 고태성은 이수화 거들떠보지도 않거든? 존나 너만 챙기잖아! 너는 씨발 가끔 고태성 볼 때 멜로 눈깔 되는 거 모를 줄 아냐? 와, 시발 소름 돋았어. 잠시만. 아냐, 나 편견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진심이야. 할머니한테 안 말할게. 아, 존나 춥네.
숨도 안 쉬고 쏘아붙이는 말에 우영이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기혁아, 너 그거 지랄도 병이다. 병.”
-왜, 아니야? 진짜 아니야?
“쓰레기 같은 질문 안 받아요.”
한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귀찮아 보이는 음색에 남기혁이 입을 딱 다물었다.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에 속이 불편해졌다. 급작스레 피로감이 몰려왔다. 잠시 말을 멈췄던 우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징징거리니까 고태성이 만만해서 그러는 거지. 걔는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 떨었는데 그럼 난 씨발, 걔랑 벌써 몇 년을 사귄 거냐? 헛소리 지껄일 거면 가서 공부나 하세요. 또 사십 점 맞고 엄마한테 혼나서 질질 울지 말고. 어?”
-아, 그때는 답 밀려 써서 그런 거라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억울하게 보채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골이 다 지끈거렸다.
“그럼 답안지 안 밀려 쓰는 연습이라도 하시던가요. 할 말 다 했으면 끊어, 이제.”
-아, 진짜 권우여엉!
“아, 왜.”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자, 남기혁이 주눅 든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나랑 전화 좀 하고 있어 줘…….
“이유.”
-아……. 나 큰누나한테 다희랑 사귀는 거 걸렸단 말이야. 지금 거실에 가족들 다 모여서 과일 먹는데 끼면 처까일 각임. 존나 무서워. 엄마 아빠보다 누나들이 더 무섭다고…….
후우, 옅은 한숨을 쉰 우영이 눈을 감았다. 자연스레 화제 전환이 됐다. 오랜 기간 아주 가까이서 둘을 지켜본 놈이니 아무래도 조심해야 했다.
“너는 뭔 애가 비밀이 없냐? 너네 부모님은 아들 인생 투명해서 참 좋으시겠다.”
-씨발, 어감이 좀 이상하다?
반박하는 말에 우영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남기혁은 집안의 일남삼녀 중 막내아들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놈이다. 종종 그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살갑게 챙겨 주던 누나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살면서 그의 가족만큼 화기애애한 곳은 보질 못했다.
“그래서 뭐, 기주 누나가 뭐라 해?”
-아니 그건 아닌데, 자꾸 데리고 와 보라고 하고, 사진 보여달라고 하고 존나 귀찮게 구니까 그러지……. 보여 줬다가 큰누나보다 훨씬 예쁘다고 질투라도 하면 어떡하냐. 혹시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꼬투리 잡힐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진짜……. 지랄은……. 미친 새끼야.”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사귄 지 고작 열흘도 안 된 주제에 결혼 소릴 해대는 건 여전했다.
-야, 진심. 요즘 여자들은 결혼할 때 누나 많으면 싫어한대. 씨발, 어떡하냐 없는 척할 수도 없고…….
“또 일주일도 안 가서 헤어질 거면서 김칫국 작작 처드세요. 남기혁 씨.”
-아이씨, 너 말이 씨가 된다? 빨리 퉤퉤퉤 해, 개새끼야!
한숨을 내쉰 우영은 전화기를 붙든 채 모로 누웠다. 눈을 치켜뜨고는 책상 위 액자 속 졸업식 사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즐거워 보이는 권우영과 환한 얼굴의 고태성이 있었다. 품 안의 만개한 꽃다발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쇳덩이를 삼킨 듯 속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다희가 나한테, 오빠 같은 남자 만나서 좋다고…….
남기혁은 신이 난 듯 제 여자 친구 이야기를 이어 갔다. 우영은 그의 연애사에 종종 맞장구를 쳐 주며 웃었다. 이성과 평범한 연애를 하니 저런 생각도 쉽게 할 수 있는 거겠지. 어쩐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는 성인이 되어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걸 알았으므로.
전화를 끊고 뜨끈뜨끈해진 핸드폰을 바라봤다. ‘58분 35초.’ 어찌나 수다스러운지 대화가 끊이질 않는 탓에 잠들기 전 자유 시간을 다 날렸다.
[ 쵸파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 온 전화입니다.
12/13 21:55]
[ 태성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 온 전화입니다.
12/13 21:56]
뜨거워진 화면 위로 두 개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찍혀 있었다. 눈을 치켜뜬 우영이 채팅방을 열었다. 한참 말이 없던 이수화가 뒤늦게 보낸 톡이 올라와 있었다.
[쵸파: 우영아. 혹시 지금 통화 돼? 21:54]
[쵸파: 아니야! 해결했어! 잘 자! (이모티콘) 21:57]
물끄러미 스크롤을 내리던 우영이 먼저 급해 보이는 이수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쯤 울렸을 때 달칵, 통화가 연결되었다.
“어. 왜 전화했어?”
-아, 어! 아니……. 찾아볼 문제가 있었는데, 9월 모의고사 시험지가 사라져서……. 근데 괜찮아, 바로 찾았어!
“칠칠찮기는. 잘 챙기고 다녀라.”
-으응. 고마워.
“더 물어볼 건 없어?”
-응…….
“오냐, 끊는다.”
-저, 저녁 먹었어?
조급히 물어 오는 말에 우영이 벽에 걸린 시계를 힐긋 바라보았다.
“열 시 반에 묻는 말치곤 좀 이상하지 않냐?”
-……미안.
“미안할 것까진 없고요. 공부 그만하고 일찍 자라.”
-으응…….
“답만 하지 말고 지금 가서 누워. 너 그러다 진짜 키 안 큰다? 대학 가서 또 찔찔이 되기 전에 관리하세요.”
-……나 그래도, 한 달 만에 0.5센티 큰 건데…….
변명하듯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우영이 피식 웃었다. 이수화는 첫 만남 탓인지 늘 물가에 내놓은 자식같이 느껴져 늘 잔소리가 나왔다.
“뭐, 매일 아침 자로 재셨어요?”
-…….
“됐고. 자기 전에 스트레칭하고 우유 한 컵 마시고 자. 저번에 알려 준 거 기억하지?”
우영이 하품하며 나직이 말했다. 남기혁의 하소연을 듣다 보니 진이 다 빠져 잠기운이 솔솔 몰려왔다.
-응……. 알겠어. 하고 잘게.
“그래. 잘 자라.”
-응, 잘 자……. 우영아.
“어어. 내 꿈 꾸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헛웃음을 흘린 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으로 고태성에게 연락해야 했다. 누운 채로 손을 쭉 뻗어 화면을 누르는 찰나, 또 새 메시지 알림이 떴다.
[ 태성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 온 전화입니다.
01/15 10:27]
[ 태성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 온 전화입니다.
01/15 10:28]
[ 태성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 온 전화입니다.
01/15 10:29]
“뭐야…….”
연달아 뜨는 메시지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한 번의 신호가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어. 왜 전화…….”
-우영아.
“어?”
단호한 어조에 괜히 뜨끔했다. 평소에 고태성은 연락이 안 되는 걸 싫어했다.
-전화 좀 잘 받으면 안 될까?
다소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낮게 잠긴 목소리와 함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 통화 중이었어.”
-내가 통화 중 대기 걸어 놓으라고 했잖아. 씨발, 내 말은 맨날 귓등으로 처듣지.
“쏘리 쏘리, 깜박했어. 왜?”
우영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 그다지 전화 통화를 나누는 사람이 없던 탓에 매번 까먹은 탓이다.
-……누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하는데. 이수화?
잠시 정적을 지키던 고태성이 조용히 물어 왔다. 방 안에 혼자 있는 건지 수화기 너머가 고요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영이 터벅터벅 걸어가 형광등 스위치를 끄고 다시 누웠다. 사방이 새카매졌다.
“어, 아니. 이수화는 잠깐 한 거고, 남기혁이랑.”
-…….
“근데 왜 전화했어?”
하아. 또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선명한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묘한 분위기에 우영이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럼 왜 전화했냐니까.”
털썩, 이불 위에 누운 우영이 음량을 키우며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달착지근한 목소리를 좀 더 가까이서 듣고 싶었다.
-우리가 꼭 용건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야?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
“거기 세 시간 차이 난다며. 너 지금 잘 시간 아냐?”
내내 남기혁의 하소연을 들어 주다 보니 시간이 벌써 열한 시였다. 고태성이 있는 곳은 최소 새벽 두 시가 넘었을 터였다.
-잠이 안 와, 우영아.
“…….”
-그래서 전화했어. 목소리 듣고 싶어서.
평소보다 약간 낮은 목소리는, 꼭 지친 듯 보였다. 직설적인 말에 잠시 굳어 있던 우영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진짜 무신경한 새끼. 다 늦은 새벽에 그런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반칙 아닌가.
제가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건 전부 다, 저 자식 탓이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자꾸자꾸 홀리니까 안 반하려야 안 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천장을 바라보며 대자로 드러누운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잠이 왜 안 와. 배고파? 음식 안 맞냐?”
-…….
“그러게 가뜩이나 편식도 많이 하는 놈이 거길 왜 가. 그냥 여기 있지.”
눈을 감은 우영이 구시렁거렸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얼굴 보는 것뿐이었건만, 그것조차 못 하니 짜증이 났다.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누군 존나 보고 싶어 뒤지겠는데. 딱딱한 바닥에 눌린 가슴이 갑갑하기만 했다.
“고태성.”
-응.
“언제 와?”
-다음 주에.
“아, 존나 멀었네…….”
미간을 좁힌 우영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았다니. 남은 시간이 너무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야……. 빨리 와라.”
베개에 뺨을 댄 우영이 힘없이 투정 부렸다. 보고 싶다고 생각할수록 정말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영상 통화라도 걸어 볼까 생각하다, 얼굴을 보면 더 그리워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왜?
“왜긴 왜야. 당연히 보고 싶으니까 그러…….”
필터 없이 툭 내뱉은 말에 제가 더 놀랐다.
“……지.”
꼬리를 흐리며 말을 맺었다. 짧은 침묵이 무겁게 이어졌다. 미친. 미친.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았다.
“매, 맨날 보던 얼굴 못 보니까……. 존나 보고 싶네?”
심장은 덜커덩 아래로 처박힌 주제에 애써 능글거리며 웃었다. 놀래서 현기증이 다 일었다.
-나 보고 싶어?
걱정과 달리 부드러운 물음이 돌아왔다.
불현듯 눈치 없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혀 선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별 의미 없이 나누는 말들에 다시 유난 떨 준비를 하는 자신이 또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
잇새로 낮은 진심이 흘러나갔다. 유독 고요한 사위에 제 심장 소리가 수화기 너머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응……. 나도.
“…….”
-우영이가 보고 싶다니까, 최대한 빨리 갈게?
귓가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조곤조곤 섞여 들었다.
“미친놈.”
애교 섞인 말투에 경직되어 있던 입가가 풀어졌다. 마치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이 잠들기 전 나누는 통화 같았다. 눈을 찡그린 우영은 괜스레 베개 끝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 이 새끼랑 진짜 연애하고 싶다.
주어진 상황에 만족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그 또한 저와 같은 감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끊임없이 밀려든다. 충동의 발화점은 늘 다정한 연인처럼 구는 고태성의 태도였다. 생각하는 순간 또 잡념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우영이 천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귓가론 고태성의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달콤한 연애 같은 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인데.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아는 주제에 자꾸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감정의 골이 끝을 모르게 깊어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답답한 속에 깊은숨을 들이켰다. 성마른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린 우영이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 자라 얼른.”
-싫어.
투정하는 어조에 모로 돌아누우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머릿속에 그의 삐딱한 표정이 어른거렸다. 고태성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안 잘 거야?”
-……응.
“뭐 할 건데 그럼.”
-우영이랑 노가리.
하아. 우영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도 좋고, 모두가 잠든 새벽의 간질거리는 통화도 좋았다. 별 의미 없는 말들조차 고태성과 나눌 때면 벅차고 들뜨기만 하다. 이 정도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아, 나 진짜 얘 너무 좋아하나 봐. 미치게 좋다. 진짜.
“지랄, 난 자야 돼. 내일 경기 있어.”
끊기 싫었지만 끊고 싶었다. 자정이 다 돼 가는 시간이었고, 공연히 예민해진 감수성이 심장을 터뜨릴 듯 차올라 버거웠다. 캄캄한 방 안에 누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끝도 없는 사념으로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경기?
“응. 오후 경긴데 토너먼트라 아침에 나가야 돼. 아, 맞다. 나 내일 16강은 한대 운동장에서 한다?”
-…….
“형아가 먼저 가서 한국대 공기 맛 좀 보고 올게. 존나 신기할 듯.”
-내일 간다고?
“응. 왜?”
-……씨발, 그런 건 좀 진작 말하지.
“뭐? 왜?”
-같이 가고 싶었다고, 처음은.
금세 날이 선 목소리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막연히 한국대에 가자는 말은 자주 했으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러고 보면 고태성은 처음 하는 것들에 관하여 은근히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 말해 봤자 너 뉴질랜드니까. 어차피 못 올 거고.”
-같이 가는 애 있어?
“어? 아니. 그냥 부원들이랑 코치님, 감독님.”
이어지는 정적에 우영은 괜히 솜이불 끝을 만지작거렸다.
-미리 얘기 좀 해, 우영아. 같이 가면 좋잖아. 나도 너 뛰는 모습 보는 거…… 좋아하는데.
“네가 가고 싶어 하는지 몰랐지.”
-아, 존나 빡친다 또…….
짜증 섞인 목소리에 우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운 새끼. 가끔 하는 짓을 보면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다음부터 말할게. 뭘 짜증을 내. 형 뛰는 모습 보고 반하기라도 했냐?”
-그래, 반했으니까 묻기 전에 좀, 말 좀 해. 좆같이 집착하게 만들지 말고.
불퉁한 답에 우영의 입매가 슬며시 따라 올라갔다. 자글자글한 개미들이 팔뚝 위를 타고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단순히 단짝 친구를 향한 유별난 집착인 건 알지만 고태성이 저럴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슬슬 내년부터는 그냥 그만둘 생각 하고 있었는데, 뭐.”
-왜?
“축구 전형으로 입시 넣을 것도 아닌데, 요즘 체대 실기 비중도 좀 낮아졌대서……. 이젠 뭐, 기초 잡는 법도 대강 알고. 괜히 자리 차지하는 것도 미안하고. 지금은 그것보다 성적에 더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내일이 마지막 경기야?
“어.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마지막이 되려나. 토너먼트는 시즌제였기에 아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고태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뭘 해도 무조건 붙을 거니까.
“어. 당연하지.”
무조건. 그의 말에서 맹목적인 신뢰가 느껴진다. 별말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든든해졌다. 재지 않고 믿어 주는 내 편이 있다는 건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제 감정만 정리한다면 평생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견고한 인연이었다.
빠듯한 충족감 뒤로 씁쓸함이 따라 들었다. 정리는커녕 한 톨 떨어낼 수조차 없으니, 당장은 덮어 두고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참다 보면 언젠간 나아질 것이다. 그 생각 하나 붙들고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버틸 만했다.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가면, 같이 살래?
우영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집은 내가 구해 놓을게. 넌 몸만 와라.
“…….”
-응? 같이 살자, 우영아.
느닷없는 말에 심장이 뚝 떨어졌다. 두근, 두근. 두근.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솟구치려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아, 씨발…….
불현듯 눈가가 시큰거려 눈을 꽉 감았다. 스며드는 다정한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좋아한다는 말을 뱉고 싶은, 이 구질구질한 마음이 죽도록 저주스러웠다.
“미친. 뭐 프러포즈하세요? 황송하기 짝이 없네.”
부러 건조하게 내뱉은 답에 나긋한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새카맣고 고요한 방 안에 달큰한 기운이 가득 흐르는 것만 같았다.
-왜. 나한테 시집오고 싶어?
“…….”
-그건 좀 생각해 보고. 권우영 먹는 거 감당하려면 존나…….
“야야, 네가 잘 시간인가 보다, 헛소리하는 걸 보니.”
불퉁한 어조에 고태성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따라 우영이 픽 웃음을 흘렸다. 얼굴은 전혀 웃지 않은 채였다.
“이제 끊어, 새끼야.”
-응, 잘 자 우영아.
“어. 너도 잘 자.”
-내일 경기 잘하고.
“그래.”
혹여 말이 이어질세라 냉큼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직한 목소리와 낮은 웃음소리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망할, 같잖은 병세는 어째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우영은 긴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눈가 위에 팔목을 툭 올려놓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내 신음 같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
“아……. 좆같다…….”
짝사랑에도 기승전결이 있다면 아마 저는 ‘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절정으로 치달은 뒤, 영원히 결이 오지 않는 빌어먹을 ‘전’ 말이다.
***
‘한국대학교’
처음으로 발을 디뎌본 한국대학교는 손꼽히는 명문대답게 으리으리했다. 버스에서 내린 우영은 가만히 선 채로 정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약 1년 뒤면 제가 수없이 드나들 곳이다. 입학한 것도 아닌데 소풍이라도 가는 양 기분이 들떴다. 핸드폰을 꺼내 정문 사진을 커다랗게 찍고는 고태성이 있는 채팅방에 보냈다.
조경을 잘 꾸며 놓은 캠퍼스 내에는 방학일 텐데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문득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화기애애한 두 남자에게 시선이 갔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까만 피어싱을 한 화려한 남자와 단정한 흑발 미남이었다.
잘생겼다. 고태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절로 감탄이 나왔다. 확실히 명문대학교라 그런지 외모부터 수준 높은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멀거니 그들을 바라보던 우영은 그 자리에 자신과 고태성을 그려 넣었다. 등판에 ‘HANKUK UNIVERSITY’가 적힌 체육과 점퍼를 입고, 화통을 맨 고태성과 떠들며 캠퍼스를 걷는 상상이었다. 생각만 해도 좋아 죽을 것 같았다.
대학에 가면, 같이 살자고 했지.
비록 과는 다르겠지만, 같이 지내면 지금보다 훨씬 더 함께할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함께 살면 생활 방식도 닮을 테니, 비슷한 시각에 눈을 뜨고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잠들 거다.
밥을 해 먹어야 하니 둘 다 할 줄 모르는 요리를 투덕투덕 만들어 먹겠지?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 놓고, 소파에 누워 오순도순 티브이를 보다 그대로 깜박 잠이 들지도 모른다. 마치 오래 사귄 연인들처럼 평범하게. 제가 원하는 관계와는 간극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갑자기 시작된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성인이 되면 무슨 맛일지 궁금했던 술도 같이 마셔야지. 알딸딸한 취기에 젖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강의가 끝난 후에 만나면 집에 돌아가는 길을 함께 걸을 테고, 지금처럼 노을 지는 갈림길에서 아쉽게 헤어질 일도 없다. 그가 같은 집에 살자고 했으니까.
도움만 받을 수 없으니 빈 시각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자. 직접 번 돈으로 고태성이 좋아하는 것들을 선물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렜다. 혹여 장학금을 받지 못해도 학자금 대출을 이용하면 된다. 원래 다들 그렇게 산다고 했다. 어차피 명문대를 졸업하면 괜찮은 직장을 얻을 것이고, 빚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조금씩 갚아 나가면 될 터였다. 이 정도면 할머니에게 손을 뻗을 일도, 더 미안해할 일도 없을 듯했다.
운일동을 벗어난 이후의 인생 계획은 면밀히 짜야 했다. 어렵겠지만 그것마저도 재밌을 것 같았다. 권우영의 옆에는 고태성이 늘 함께일 테니까. 그와 함께라면 완벽한 인생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태성: 우영. 다치지 말고, 잘하고 와. 14:05]
[태성: (이모티콘) 14:05]
탬버린을 들고 엉덩이춤을 추는 사자 캐릭터를 바라보던 우영이 픽 웃었다. 태성은 각종 사자 이모티콘을 종류별로 모았다. 하여간 덩치랑 안 어울리게 하는 짓이 존나 귀엽기도 했다.
“권우영. 준비됐어?”
감독의 말에 의자 위에 놓인 패딩 주머니에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 그라운드 잔디밭에 앉은 우영이 축구화를 단단히 고쳐 맸다.
찬 공기 사이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얀 유니폼 아래로 적당히 그을린 피부와 길쭉하고 단단한 체격이 드러났다. ‘권우영’, 검정 글씨의 등 번호는 9번이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던 우영이 비장한 눈빛으로 발을 내디뎠다. 왜인지 몰라도 예감이 좋았다.
삐익! 시작을 알리는 강렬한 휘슬이 울려 퍼졌다.
경기는 시작 십여 분 만에 상대 팀의 실점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슈팅 기회가 올 때마다 쏜살같이 튀어 나간 우영은 쟁쟁한 상대 선수들을 제치고 득점을 했다. 중간중간 다소 난폭해진 분위기에 심판의 휘슬이 몇 번 울리긴 했으나, 운일 고등학교의 실책은 아니었다.
후반전부터는 상대 팀 선수가 몇몇 교체되며 골을 내줬다. 기세가 조금 기우는 듯했으나, 핵심 스트라이커인 우영의 공격적인 플레이로 득점을 만회해 끝내 이길 수 있었다.
최종 스코어는 4:2. 운일 고등학교의 깔끔한 승리였다. 부원들의 우렁찬 함성과 감독의 즐거운 고함이 한국대학교 축구장을 한가득 메웠다. 실컷 서로를 격려하며 웃고 떠들던 우영은 간만에 승리감에 도취 되었다.
“어! 고생했어! 다들 수고했어!”
우영은 이날의 엠브이피였다. 엄격한 훈련 때와는 다르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그 또한 싱글벙글했다. 경기 센스가 타고났다느니, 이길 사람이 없다느니 등의 과분한 말들과 잔뜩 상기된 분위기에 벅찬 감동까지 밀려왔다.
“야이, 권우영. 왜 이렇게 잘해? 아주 우리 감독님 어깨가 하늘을 찌르시겠어!”
호들갑스럽게 다가온 박 코치가 우영의 젖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직 숨을 몰아쉬던 우영이 장난스레 웃었다.
“아, 다 잘 가르쳐 주신 코치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이 새끼 벌써 사회생활 할 줄 알어, 아주?”
“괜찮았어요?”
눈을 치켜뜨며 웃자 박 코치가 으이그, 하며 우영의 등을 때렸다. 짓궂은 얼굴로 장난을 치던 우영은 제 가방이 놓인 곳으로 가볍게 뛰었다. 빨리 고태성에게 오늘의 활약을 자랑하고 싶었다.
“맞다, 권우영. 네 친구 봤어?”
“예?”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제 패딩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곧 뒤를 따라온 박 코치가 하회탈처럼 싱글벙글 웃었다.
“아까 경기 시작쯤에 왔는데? 하-얀 롱 패딩 입은 멀대 같은 놈. 우영이 친구라고 구경하겠다고 저, 어디냐, 저쯤에서 보고 있었는데. 아, 저기 있네. 얼굴이 무슨, 연예인 해도 되겠더라.”
놀란 우영의 눈이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계단참으로 향했다.
그제야 멀찌감치 떨어진 계단에 앉아 저를 보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설핏 굳어 있던 우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이 절로 죽 찢어졌다.
멀리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 어디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고태성!”
활짝 웃음을 머금은 우영이 힘차게 소리치며 그를 향해 마구 뛰었다.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난 고태성이 우영을 향해 느릿느릿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도 가지런한 미소가 빛났다. 종전까지 그렇게 달려 놓고 또 한껏 뛰는 우영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야! 씨발, 뭐야! 온다고 말을 하지!”
헐레벌떡 뛰어간 우영이 주먹으로 그의 가슴께를 퍽 쳤다. 난데없는 주먹질에 가슴이 살짝 밀린 고태성이 씩 웃었다.
“말하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지.”
“아니, 언제 왔는데? 비행기 열 시간 넘게 타야 하잖아!”
“어제 새벽에, 네 말 듣고 바로 왔어.”
생각지도 못한 일에 소름이 돋아 양팔을 슥슥 문질렀다. 웃음이 실실 새는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역전 골을 넣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뻤다.
“와……. 씨. 진짜? 뭐냐, 전혀 생각도 못 했어.”
오랜 시간 추운 곳에서 앉아 있었을 그의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가뜩이나 추위에 약한 놈인걸,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래도 적잖이 감동을 받은 듯했다.
“안 추워? 내 패딩 줄까? 잠도 안 자고 온 거야? 뭐야. 야, 나 지금 감동받아서 울어야 하는 타이밍 아님?”
“응. 이왕이면 소리 내서 울어 주라.”
주머니에 손을 꽂은 고태성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예쁜 얼굴에 우영은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흰 패딩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남자도 없을 것이다. 새하얀 첫눈 그 자체 같았다.
“아, 진짜 또라이……. 그럼 너 경기 다 봤어? 형 어땠어? 나 오늘 개 잘했지?”
“네에, 존나 멋있었어요, 형아.”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주머니에서 꺼낸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시야에 기다랗고 매끈한 손가락이 들어왔다.
“사인해 주세요.”
“미친.”
슬쩍 바라본 우영이 장난스레 웃으며 주먹으로 그의 손을 툭 쳤다. 또 심장이 떨렸다. 차마 아무렇지 않게 잡을 수가 없어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이제 일정 다 끝난 거지?”
“어? 응. 오늘은 끝.”
“그럼 밥 먹으러 가자. 고생했으니까 내가 밥 사 줄게.”
“나 이러고?”
우영이 눈을 치켜뜨며 손가락으로 제 모습을 가리켰다. 흰 유니폼에 축구화, 가지고 온 거라곤 검정 롱 패딩과 까만 백팩이 다였다.
고태성의 눈동자가 우영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느릿하지만 빠짐없이 닿아 오는 시선에 우영은 저도 모르게 등을 굳혔다. 왜인지 부끄러운 기분을 느꼈다.
“뭐 어때. 난 좋은데.”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어, 잠깐. 그럼 말씀드리고 올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우영이 헐레벌떡 자리로 뛰어갔다. 원래대로라면 타고 온 단체 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으나, 사정을 잘 말하면 될 것이다.
감독과 마주 보고 선 우영이 이리저리 손짓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는 단독 행동은 금물이라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뉴질랜드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급히 찾아온 오랜 친구의 이야기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날 우영이 유독 에이스로 활약한 데다 팀 내의 분위기도 아주 좋았기에 유하게 허락한 면도 있었다.
“야, 씨. 진짜 생각도 못 했다. 난.”
“그랬겠지.”
“존나, 대단한 새끼. 나 뛰는 게 그렇게 보고 싶었냐? 잠도 안 자고 뉴질랜드에서 여기까지 날아오고.”
“응.”
“졸라 미친놈 같아.”
우영은 큭큭 웃으며 그의 허리께를 툭 쳤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근 보름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바짝바짝 말라 가던 속이 촉촉해지고 있었다.
“처음은 같이 해야지.”
별안간 길을 걷던 고태성이 단조롭게 말했다.
“뭐라고?”
“처음은 같이 하자고.”
“뭔 소리냐, 그게.”
느닷없는 말에 우영은 괜스레 뺨을 긁적였다. 불현듯 어젯밤 그와 했던 통화가 떠올랐다.
‘같이 가고 싶었다고, 처음은.’
불퉁하고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그래서 온 건가? 처음 한국대에 같이 가고 싶어서?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힐긋 시선을 내린 고태성이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영아. 처음 뜻 몰라? 처음 보는 거, 처음 가는 곳, 처음 하는 거, 처음…….”
“야야. 시발,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누가 처음 뜻 몰라서 묻냐?”
“…….”
“하여간 이 새끼, 이상한 데서 집착해.”
그를 흘겨본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의도가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던 놈이 앞에 있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우영, 넌 나밖에 없지.”
고태성은 금세 찡그린 얼굴로 흰 입김을 내쉬었다. 오뚝한 콧대를 따라 날카로운 턱선이 유려하게 이어졌다.
“어. 존나 너밖에 없지.”
고요한 물음에 우영이 픽 웃었다. 대수롭잖게 답하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능청스럽게 구는 데는 도를 텄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툭툭 던지는 그나, 그걸 또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자신이나 웃기는 놈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 존나 얼마나 헌신적이야? 씨발, 나 같은 건 돈 주고도 못 사, 넌 진짜 이거 알아야 돼.”
터벅터벅 걷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예에. 슈퍼스타 고태성 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친히 행차해 주셨는데, 저도 당연히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와, 열 시간 비행이라니. 존나 감개무량해서 눈물이 다 나는데.”
“정확히는 열한 시간 반이야.”
“어어, 그니까. 야, 봐 봐. 나 눈 빨개짐.”
검지로 부릅뜬 눈을 죽 내리며 실실 웃자, 무표정한 얼굴로 힐긋 시선을 준 고태성이 다시 정면을 보았다.
“앞으로는 미리 얘기해. 아니, 그냥 평소에 네 얘기를 다 해. 왜 자꾸 말 안 해? 처음부터 경기 있어서 한국대 간다고 했으면 내가 잠 안 자고 아등바등 올 필요도 없잖아. 왜 너는, 씨발……. 사서 고생을 하게 만드냐고.”
돌연 빨라진 어조에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가가 찌푸려져 있다. 하여간 하고 싶은 말을 안 하고는 못 사는 놈이었다.
“말이 또 그렇게 되는 거냐?”
“응.”
표정 변화 없는 단호한 답에 우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그래, 내가 대역 죄인이다.”
“…….”
“원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 새끼야. 아프니까 청춘이다 모르냐? 너도 청춘이라고 생각해.”
말도 안 되는 갖다 붙이기에 그가 마뜩잖은 시선을 보냈다. 겸연쩍게 웃어 보인 우영이 눈을 휘며 그의 팔뚝을 잡았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 장난. 앞으로 안 그럴게. 뭐 먹으러 갈 건데?”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 너는?”
“고기 먹으러 가자. 너 뛰느라 고생했으니까, 단백질 보충해야지.”
“오케이. 좋아. 나 존나 많이 먹을 거야.”
장난스레 웃은 우영이 중얼거렸다. 몇 시간을 뛰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밥은 안 먹고 살아도 고태성 없이는 못 사나 보다.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며 실실 웃었다. 주접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너른 운동장을 벗어나는 패딩 두 개가 흑백으로 대비되었다. 언덕에 올라서니 아까 혼자 보았던 한국대 정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영은 주머니를 뒤져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야, 우리 여기서 기념사진 찍자. 입학하고 다시 보면 기분 이상할 것 같아.”
답도 듣지 않고 카메라를 켰다. 종전에 홀로 서서 했던 생각이었다. 고태성과 함께 와서 사진을 찍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나중에 좋은 추억이 될 것만 같았다.
“찍는다?”
팔을 쭉 뻗자 뒤에 선 고태성이 자연스레 상체를 기울이며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아이의 뒤로 한국대학교 정문과 조형물이 보였다. 우영은 화면 속 고태성과 한국대학교를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태성, 한국대학교.
사진 한 장에 제 희망이 모두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