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1)

4.

“권우영. 슬슬 실기 준비해야지? 선수 전형으로는 안 넣을 거라며?”

이호준이 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제자리 멀리 뛰기로 한바탕 근력 운동을 마친 우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네. 그러려고요.”

“방학 때 괜히 학원 같은 거 등록하지 말고 체육관으로 와. 형 한체대 출신인 거 알지? 종목 트레이닝 해 주는 건 빠삭하니까.”

받아든 수건으로 땀을 닦던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그래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공짜로 해 주는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

“나중에 성공한 어른 돼서 갚으란 말이야, 인마.”

성실한 청년의 얼굴에 우영이 실실 미소 지었다. 그나마 좀 든든해졌다. 안 그래도 올해 방학부터는 남들 다 다니는 학원 정도는 끊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조금은 걱정이 되던 차였다.

“운동 끝나니까 엔도르핀 좀 돌지? 아까는 죽상을 하고 있더니.”

물으며 차가운 이온 음료를 던진다. 둥그런 호를 그린 음료수 캔이 우영의 손안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툭 받아 든 우영이 고개를 들자 이호준이 뚜껑을 따며 의자에 앉았다. 별 답 없이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던 우영이 손등으로 입술을 훑었다. 미간은 살짝 좁힌 채였다. 땀을 빼며 잠시 잊고 있던 고태성이 또 떠오른 탓이다.

“보자, 어디서 맞고 다닐 놈은 아니고 말이야. 쪽지 시험이라도 망쳤나?”

우영은 힐긋 이호준을 바라보았다. 대화가 잘 통하긴 하지만 그는 어른이다. 학교나 친구들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진짜 어른.

“형은 첫사랑이랑 사귀었어요?”

당돌한 물음이 튀어 나갔다. 이호준이 이놈 봐라, 하는 눈빛을 했다.

“어허, 그쪽이었단 말이지.”

“…….”

“보자, 보자.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형도 첫사랑이 있었지. 열여섯…… 일곱이었나? 아주 인기 많은 애였는데. 초등학교도 같이 나온 친한 친구였고.”

먼 산을 보던 그가 머쓱하게 코끝을 찡그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못 사귀었어. 대차게 차였지.”

우영은 가만히 추억을 담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는 즐거운 듯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냥 한 방에 까였어요?”

“친구 놈이랑 이미 사귀고 있는 걸 몰랐어. 나만 친구의 여자 노린 세기의 나쁜 놈 됐었고.”

“…….”

“한동안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말하지 말걸, 그럼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런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이호준은 다 마신 캔을 종잇장처럼 구기곤 쓰레기통에 툭 던졌다.

“그때 그 친구 놈이랑 거하게 쌈박질도 하고 방황도 엄청나게 했어. 그때마다 너희 할머니가 그러고 가면 엄마한테 혼난다고 약도 발라 주시고, 밴드도 붙여 주시고. 학교 끝나면 가서 손발 검사 맡고 그랬는데.”

사뭇 진지해졌던 이호준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우영을 보았다.

“웃기지? 아저씨가 이런 말 하니까.”

“……하나도 안 웃겨요.”

문득 그의 눈동자가 슬퍼 보였다. 오래전 무뎌져 지금은 하나도 슬프지 않을 걸 알면서도 괜히 그랬다. 그의 위로 자신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근데 우영아, 좀 더 살아 보니까 말이지. 사실 그런 것들이 별거 아닌 게 되더라.”

장난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까닥인 이호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는 막 그 아이 하나로 세상 다 무너진 것 같고, 죽을 것 같고 그랬는데. 지나고 나면 그냥 다-.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게 되더라고. 그것도 아름다운 추억. 아무리 모나고 괴로운 순간도 세월에는 못 당해. 다 닳고 닳아서 둥글게 변하게 되어 있어.”

“…….”

“왜 거친 물살에 이리저리 깎인 바닷가 몽돌이 동글동글 이쁘겠냐. 죽을 만큼 괴롭던 순간도 지나고 나면 다 해결되더란 말이지. 시간이 약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혼자 말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우영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너. 자식아. 쓸데없는 데에 힘 빼지 마라?”

그가 생각에 잠긴 우영을 향해 손가락을 펼쳐 삿대질했다.

“다 커서 첫사랑 떠올릴 때면 그땐 그랬지, 하고 넘길 수 있지만. 대학, 아니지 아니지, 직장 다니면서 학창 시절 생각하면 아, 시발. 내가 왜 그때 공부를 안 했지?”

“…….”

“이거 이거. 이게 진짜 완벽한 후회거든. 몽돌은 무슨, 나중에 마누라한테 짱돌로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그런 후회는 암만 시간이 지나 봐야 둥글둥글 깎이지도 않아요. 죽어라 미련만 족족 남는 거지.”

“…….”

“공부에 집중하고. 운동 열심히 하고. 학생이 학교생활에 충실해야지. 어? 형도 말야, 지나고 나선 그 애 쫓아다닐 시간에 책이나 한 장 더 볼걸 싶더라니까? 그럼 체육관이 아니라…….”

난데없는 꼰대의 출현에 우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뭉클하게 떠오르던 감수성이 별안간 하수구로 처박혔다.

“저기요. 얘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흘러요?”

“왜긴 인마. 존경하는 분 손주 녀석이 사랑 때문에 죽상을 하고 다니니까 그러지. 조언이다, 조언. 이런 건 돈 주고도 못 듣는 거야. 자식아. 연애는 대학 가서 해.”

나무라는 어조에 우영이 입술을 다물었다.

“자자, 쉬었으니까 다시 뛰어 볼까?”

그럼 그렇지. 어른들은 다 꼰대였다.

***

훈련보다 더한 강도의 테스트를 끝낸 우영은 맥 빠진 걸음으로 체육관을 나섰다.

어느새 해가 진 새카만 밤하늘에는 둥그런 보름달이 떠 있었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젖혔다. 가만히 희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니 그 안에 고태성의 웃는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진짜 지랄이다, 지랄이야.

우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핸드폰을 켜니 남기혁과 고태성의 시답잖은 대화들이 쌓여 있었다. 슥슥 넘기던 우영은 괜스레 고태성의 프로필을 눌러 보았다.

‘태성’

보고 싶다. 목소리도 듣고 싶다. 고태성이랑 같이 있고 싶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와는 공부하다가도, 훈련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도, 자기 전에도 문득문득, 원하면 전화를 걸어 시시껄렁한 말을 나누다 끊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싫었다. 고태성이 미웠다. 그가 잘못한 건 없는 걸 알면서도 괜한 심술이 났다.

찹찹한 밤공기 속에 서서 사진을 끄고 켜기를 반복하다 손이 미끄러졌다. ‘보이스톡 해요~’ 발랄한 글자가 뜨자마자 익숙한 통화 멜로디가 울렸다. 놀라서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끊어야 한다. 하지만 끊으면 기록이 남을 것이다. 우왕좌왕하는 찰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응, 우영아.

“…….”

-여보세요.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우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괘씸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 나긋한 목소리가 너무도 좋았다. 여자를 만나는 고태성보다 이런 자신이 더 재수 없고 싫었다.

“……호준 형 체육관 가서, 뺑이 치다 이제 집 가는 중인데…….”

어쩔 수 없었다. 우영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했을 이야기들로 입을 열었다.

-응. 지금 끝났어?

“어, 존나 힘들다.”

수화기 너머론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눌렀다.

-살살 하지. 어쩐지 답장 없더라.

“어. 나 요즘 좀 살기 바쁘네.”

-그러게. 짜증 나게.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우영이 웃음을 흘렸다.

“짜증은 무슨, 네가 더 바쁘잖아. 새끼야.”

조금 들뜬 목소리로 능청스레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니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만 같았다.

-내가?

고태성이 감흥 없이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 이서율이 나타난 이후, 그와 몇 마디 말조차 섞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권우영이 고태성의 가장 친한 친구라면, 그를 성애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진짜 친구라면, 이 시점에서 한 번쯤 말을 꺼내야 할 일이 있었다.

“……응, 연애하느라.”

제가 뱉은 말에 우지끈 심장이 내려앉았다. 오래전부터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고태성의 연애에는 아직 대비하지 못했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늘 호준이 형이 그랬는데.”

답을 듣지 않고 또 제 말을 했다. 이 정도 아는 척해 줬으면 됐겠지. 아무 말이라도 하다 보면 화제 전환이 될 것이다. 그에게서 뒷말까진 듣고 싶지 않았다.

“형도 고등학교 때 첫사랑이 친한 친구였대. 근데 고백했다가 바로 까였다더라. ……방황하다가 그 사람 애인이랑 싸우고, 우리 할머니한테 몰래 치료받고 그랬대.”

우영은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킬킬거렸다. 실상은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다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응. 근데 형이…….”

툭, 발로 찬 돌멩이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목구멍이 따끔거려 괜히 침을 삼켰다.

“형이, 지금은 좋아 죽을 것 같아도, 시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대. 그러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연애는 대학 가서 하라고…….”

-…….

이어지는 정적에 우영이 하던 말을 멈췄다.

“아, 미안. 너한테 하는 얘기 아니다? 오해하지 마.”

-…….

“야. 진짜야. 그냥 형이 나 무슨 일 있냐고, 안 좋아 보인다고 물어봐서 얘기하다가 나온 말이야. 넌 어차피 대학 안 봐도 합격인데 뭐, 연애질 좀 해도 되지.”

변명하듯 조급히 말을 덧붙였다. 말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버렸다. 연애 같은 건 대학 가서 하라며 둘러 말한 듯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괜한 말실수를 한 것 같아 코끝을 찡긋거렸다.

-안 좋은 일 있어?

“……어?”

-오늘 내내 기분 별로였잖아.

“…….”

-무슨 일인데?

고요한 어조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선은 땅바닥에 처박은 채였다.

안 좋은 일은…….

……너한테 여자 생긴 거.

내가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잖아. 우영은 쓰게 웃었다. 한숨을 삼키며 입술을 여는 찰나였다.

-우영아.

생생히 들리는 목소리에 우영이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나는…….”

-나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와, 눅눅한 공기를 가르는 또렷한 음색이 동시에 들려왔다. 어느새 도착한 집 담벼락 앞에는 단정한 사복 차림의 고태성이 서 있었다. 교복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이는 그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우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요즘 네가 너무 소홀한 것 같아서…… 서운해.”

고태성이 찬찬히 걸어왔다. 눈이 마주친다. 달빛이 드리운 얼굴을 보자 놀람보다 속상함이 울컥 몰려왔다.

우뚝, 그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우영 또한 여전히 핸드폰을 쥔 채로 스르르 시선을 올려 그를 보았다. 저를 향한 단단한 눈빛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신발 밑창에 접착제라도 붙여 놓은 양, 우영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짜 친구는 변하지 않는 거라는데, 우리 우영이는 왜 그럴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말하는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는 건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핸드폰을 쥔 손을 찬찬히 내린 그가 다시 우영을 주시했다.

고태성의 단단한 손끝이 우영의 볼을 툭 쓸고 지나갔다. 까만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형형했다.

“네 인생에서 나를 빼지 마, 우영아.”

“…….”

“그딴 생각 자체를, 그냥 하지 마.”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고태성이 우영의 어깨를 살짝 감싸 쥐었다. 손길은 더없이 부드러웠으나 마치 경고처럼 느껴졌다.

입을 다문 우영은 그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적막 사이로 고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칠흑 속에서도 여전히 밝고 찬란하다. 그늘은 오로지 제 몫이었다.

깨닫는 순간 도망치고 싶었다. 다가갈수록 대비되는 그의 곁에서 뒷걸음질하고 싶었다. 둘을 감싼 공기가 가뭄을 맞은 땅처럼 건조하게 갈라졌다. 정신 차려야 했다.

“나 참. 뭐라는 거야. 또 잘 시간이냐?”

겨우 입매를 끌어 올린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내려 종료 버튼을 누르곤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멀쩡한 낯과는 달리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웬 서프라이즈야?”

“…….”

“뭐, 내 생일 아닌데? 꽃이라도 숨겨 놨냐?”

팔뚝을 툭 치며 묻자, 물끄러미 우영을 주시하던 고태성이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왔다. 바스락. 흙바닥을 밟는 소리에 우영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체육관에서 씻고 오지 않은 탓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면 이 새끼는 꼭 이럴 때 더 마주치곤 했다.

“야야, 가까이 오지 마. 나 운동하고 와서 땀 냄새 나.”

“안 나.”

단호한 손짓에 별안간 팔목이 탁 잡혔다. 눈을 치켜뜬 우영이 잡힌 손목을 응시했다.

“냄새 안 난다고, 우영아.”

은근히 압력을 가하는 손길에 등이 굳었다. 바짝 마른 티셔츠에 식은땀이 배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갑자기 분위기 잡고 난리야. 너야말로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우영이 팔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떨어냈다.

“있으면?”

“뭔…….”

“관심 가져 줄 거야?”

어둠 속에서 고태성의 새카만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시선은 집요하게 우영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너 요즘 나한테 관심 없잖아.”

정적이 흘렀다. 우영은 애써 입매를 딱딱하게 올렸다.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태성은 늘 이런 식이었으니까. 익숙한 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영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씨발 뭔, 또 헛소리야. 내가 너한테 관심이 왜 없어. 존나 많지.”

“…….”

“나 네 생각밖에 안 하는데. 몰랐어, 자기?”

슬슬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능청스레 상황을 넘기는 우영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난 이 행동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소홀하고, 밖으로 나돌고, 변한 권우영과 서운한 고태성.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하나였다. 오늘 마주쳤던 여자에 관하여 묻지 않아서일 테다. 남기혁이고 박진우 패거리고 종일 그 문제로 그를 들들 볶아 댔으나, 저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제 행동에 관심이 없다고 느낄 만도 하기는 했다.

여전히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저를 응시하는 고태성을 보며, 우영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을 내리깔아 제 손목을 쥔 고태성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정말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관심 없는 게 아니라.”

“…….”

“네가 먼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린 거야.”

우영은 낮게 중얼거렸다.

“아까 애들한테도 답 안 해 줬잖아. 네가 혹시 말하기 싫어할까 봐 그런 거지. 넌 새끼야, 나만큼 네 생각 해 주는 놈이 있는 줄 아냐? 이거 네가 아니라 내가 서운해야 할 일 같은데.”

곧 눈을 들어 저를 보는 고태성을 느리게 훑었다.

살짝 걷어 놓은 소매 아래로 탄탄한 팔목의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티셔츠는 주름 하나 없이 말끔했다. 길쭉한 다리를 알맞게 감싸 주는 베이지색 면바지도 참 잘 어울렸다.

그런 단정한 차림이 희고 고운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맨날 교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오래간만에 사복 차림의 그를 보니 성인 같았다.

“근데 갑자기 웬 사복이냐. 학원 째고 데이트라도 하고 왔어?”

장난스레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릴 툭 쳤다. 저렇게 멋있게 차려입고 어딜 다녀왔을지는 안 봐도 훤했다. 그 애를 만났겠지. 돈도 많은 놈이니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 울창한 산책길을 걸었을 것이다.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는 손도 잡았겠지? 한 번은 꽉 쥐어 보고 싶었던 고태성의 손. 저는 쥐어 볼 기회도 없을 손이었다. 생각하니 속이 쑤셨다.

팔목을 타고 내려가 손끝에 머물던 시선이 황급히 떨어졌다.

“팔자 좋네, 고태성-. 합격은 따 놨다 이거지.”

비스듬히 서 있던 고태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턱을 살짝 든 채 묘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진득하게 늘어졌다.

새카만 흑발이 살랑거렸다. 찹찹한 기운이 서린 밤공기가, 그와 퍽 어울리는 짙은 눈빛이 심장을 간질였다. 그 순간, 우영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서둘러 회피하듯 눈길을 돌렸다.

“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별안간 고태성이 우영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예상치 못한 손길에 별다른 반항 없이 몸이 끌려갔다. 바짝 붙어 선 고태성이 우영의 어깨 위에 이마를 툭 떨궜다.

“나는…….”

“…….”

“나는 그냥 우리 둘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공기에 섞인 차가운 향기가 코끝으로 흘렀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묘한 분위기에 우영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망할 놈의 심장은 눈치 없이 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뭔 소리야. 지금도 잘 지내잖아.”

부러 볼멘소리를 내자, 고태성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둘이라고, 우영아.”

고요히 중얼대는 말에 열이 올랐다. 심장 박동이 과하게 빠르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제 심장 소리를 들킬지도 몰랐다.

우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달빛은 여전히 희었고, 어깨에 닿은 이마는 따뜻했다. 코끝으론 고태성의 찬 향기가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그 향기에 우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득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한 번쯤은 안아 봐도 될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오해를 사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성을 앞선 욕망이 터지기 전, 퍼뜩 정신을 차린 우영이 그의 어깨를 와락 쥐었다.

“야야, 헛소리 그만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오랜만에 동네나 한 바퀴 걸을래?”

“…….”

“날씨도, 존나 시원하고.”

느리게 떨어져 나간 고태성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딘가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혹여 그가 거절할세라 우영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간만에 호준이 형 때문에 운동 빡세게 했더니 찌뿌둥해. 아, 그 아저씨 생각보다 더 꼰대더라. 그리고……. 이거 자기 전에 풀어 줘야 돼. 안 그러면 내일 존나 배길 걸. 아. 또, 원래 안 그래도 좀 더 걸으려고 했어.”

어깨를 이리저리 과장되게 돌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횡설수설하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우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뒤따라 터벅터벅 거친 발소리가 골목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나마 어둠에 열오른 뺨을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둘은 한참을 정적을 지키며 걸었다. 오르막길과 언덕을 지나 살살 가쁜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쯤, 멈춰 선 우영이 놀이터 벤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와 처음 만났던 추억의 장소이자, 밤마다 몰래 나와 종종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었다.

“야, 좀 쉬었다 가자. 또 덥다.”

우영은 벤치 위로 팔을 걸친 채 뒤로 철퍼덕 드러누웠다. 고태성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집에서 대체 뭘 하는지 운동을 하는 저보다 체력이 좋은 듯했다.

둘은 별말 없이 가만히 밤하늘을 보았다. 이제는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와는 별 얘기하지 않고 있어도 시간이 잘 갔다.

“빨리 졸업하고 싶다.”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던 고태성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응. 이 동네 뜨고 싶어. 존나 답답해.”

“어, 여기가 좀 구리긴 해.”

투정 섞인 어조에 우영이 실실 웃었다. 그 말은 저도 동의하는 바였다.

“우영아.”

“응.”

“스무 살 되는 날……. 우리 둘이 여행 갈래?”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렀다. 느닷없는 말에 우영이 멈칫, 고개를 돌렸다. 긴 속눈썹을 나붓이 내리깐 고태성의 옆모습이 보였다.

“여행?”

“응. 12월 31일에 가서 해돋이 보고 오자. 소원도 빌고.”

“둘이?”

“응.”

“남기혁은?”

“버리고.”

“이수화는?”

“…….”

“엉?”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에 우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턱을 비스듬히 든 고태성이 내려다보듯 우영을 응시했다.

“수화 데리고 가고 싶어?”

“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지…….”

우영은 뺨을 긁적였다. 고태성과 운일동을 떠나본 것은 학기 중 수학여행이 고작이었다. 아무리 친하게 지냈다지만 겪어 본 적 없는 일을 하려니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둘이 가.”

“…….”

“난 둘이 가고 싶어.”

단호한 말에 우영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보다 제가 훨씬 더 클 터였다. 고태성과 여행이라니,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았다.

“돈은 신경 쓰지 마. 나 존나 많으니까. 알지? 쓸데도 없는 거.”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길게 뻗은 고태성의 다리가 느릿느릿 흔들거렸다.

“와. 진짜 재수 없는데 좋다.”

힐긋 그를 바라본 우영이 기가 찬 듯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 그가 베푸는 호의가 별것 아니라 생각할 만큼 그의 집안에 돈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서로의 집안 사정을 제일 잘 아는 둘이었다.

“공부 열심히 해, 우영아. 딴짓거리 하지 말고.”

짧은 정적 후에 고태성이 입을 열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매는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한국대 떨어지면 진짜 죽일 거야.”

“예에. 너나 잘하세요. 너나.”

우영은 불퉁하게 답했다. 왜인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딴짓 제일 많이 하는 놈은 따로 있었다.

고태성이 이유 없이 웃었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번져 갔다.

풀벌레 우는 소리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밤공기는 상쾌했고 하늘은 새카맸다. 드문드문 보이는 별빛이 반짝거린다. 셔츠 사이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살짝 배어난 땀을 한 김 식혀 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우영은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평생 아름다운 순간순간을 고태성과 함께하고 싶었다. 아니, 제 마음만 정리한다면 쭉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귈 거냐?”

그래서일까. 이 완전무결한 순간을 부수려 툭, 금을 그어 버렸다.

“이서율인가, 뭔가. 걔랑 사귈 거냐고.”

물음에 지그시 고개를 돌린 고태성이 우영을 바라보았다. 영롱한 눈동자에 우영의 옆모습이 담겼다.

“왜?”

답은 않고 또 물어 오는 말에 우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 왜긴 왜야,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거지. 네가 관심 가져 달라며?”

하, 헛숨을 내쉬고는 괜스레 거친 말투를 뱉었다.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데?”

“아까 급식실에서 인사할 때 명찰 보고.”

“그래? 어땠는데?”

물어 오는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봄기운처럼 해사하게 번지던 그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짜증이 났다.

“……뭐, 예쁘던데.”

“…….”

“네가 눈이 존나 높아서 여자 친구 안 사귄 거 맞구나, 싶더라…….”

시선은 바닥에 두었다. 말꼬리를 늘이며, 괜히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찼다. 확실히 예쁘긴 했다. 개중에 실없이 감탄하던 놈처럼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외모의 아이였다.

“그 정도였어?”

“어.”

“그랬구나.”

담담한 답에 우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모든 것이 무결한 찰나에 낸 흠집이었다. 저런 반응을 원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랬구나’?”

“…….”

“그게 끝? 질문에 대한 답은요?”

“몰라.”

“…….”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우영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는 또 제가 원하는 말만 했다. 매번 겪어도 적응되질 않는 화법이다.

“야,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하여간 불리할 때마다 동문서답하는 버릇 좀 고치세요. 듣는 사람 존나게 빡치니까.”

툴툴 짜증을 내뱉었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듣지도 못하니 괜한 오기가 샘솟았다. 알쏭달쏭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남길 때마다 재수 없게 느껴졌다.

“걔한텐 관심 꺼, 우영아.”

그를 힐긋 바라본 고태성이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신경 쓰랬지, 나한테 관련된 사람까지 신경 쓰란 소린 아니었어.”

정적을 깨는 말이 참으로 단호하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답에 우영의 입매가 비뚜름해졌다.

설마 질투하는 건가. 내가 예쁘다고 해서? 그 여자애에게 관심 두는 게 싫어서?

“……씨발, 나도 관심 없거든요?”

태도는 투명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을 향한 관심이지, 제 여자 친구를 향한 관심이 아닐 테니까. 짧은 생각에도 심장이 콕콕 쑤셨다.

“너도 남기혁 따라가냐? 하여간 주접은.”

벤치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젖힌 우영은 애써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속상한 마음과는 달리 짜증 섞인 목소리만 나왔다. 평소 학습의 결과였다.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이다. 더 잘하려는 노력도, 못하려는 노력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의 곁에 누가 있든 없든 관계의 종착점은 같을 테니까. 어차피 우리는 ‘친구’라는 족쇄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둘도 없는 친구. 그걸로 만족하자. 그거면 됐다. 더 욕심낼 필요도 없었다.

순간을 영원히 얼리고 싶던 찰나, 우영은 스스로 깨부순 파편에 날카롭게 찔렸다. 어차피 아픈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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