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꿈을 꿨다. 꿈에는 고태성이 나왔다. 다 삭혀 내지 못한 분노와 반가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무어라 소리를 질렀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굳은 얼굴로 답하던 고태성의 목소리 또한 희미하기만 했다.
멱살을 잡고 그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화를 내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처연한 얼굴이 우영을 미치게 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우영은 마음껏 굴었다. 지독한 순간의 찰나,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번쩍. 잠들어 있던 우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겁을 먹은 사람처럼 눈동자를 굴리자 눈에 익은 천장이 보인다. 제 방 안이었다. 그러니까, 제 방에서 나긋하게 웃던 고태성과……. 그런 그를 바라보던 저 자신도 전부……. 꿈이었다.
헉. 벌떡 상체를 일으킨 우영이 빠르게 이불 속을 더듬었다.
아, 씹…….
눈을 질끈 감은 우영이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아주 어릴 적 고태성이 꿈에 나온 적은 있었다. 성에 대해 막 눈을 뜨던 시절, 단 한 번뿐이었다. 제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하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우영은 고등학교 졸업을 목전에 둔 열여덟이었고, 그런 마음 하나 주체 못 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제정신으로 그를 상상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완전히 갈 데까지 가 버린 것이다. 정신이 돌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우영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씨발!”
“허이구. 아침부터 또 왜 욕질이여!”
“악!”
찰싹! 등으로 따갑게 들이닥친 손찌검에 우영이 와락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할머니가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빨리 가서 씻어! 학교 안 가?”
“아야……. 아직 안 늦었어, 할머니.”
“시계도 계속 울렸어, 이놈아!”
“으……. 아냐. 오늘 일부러 한 시간 일찍 맞춘 거라 괜찮아.”
“괜찮기는. 어여 정신 차리고 씻어.”
일어날 수가 없어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렸다.
“아까 저기, 저. 호준이한테 전화 왔다. 오늘 심사인가 뭐시기 한다며?”
우영의 방 창문을 홱 열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아. 별거 아냐. 형이 실기 평가 봐 준대서 그냥 가 보는 거야.”
이호준은 근방에 작은 종합 체육관을 운영 중인 남자였다. 어릴 적부터 약방에 자주 들락거려 할머니가 아주 예뻐했다고 했다.
덕분에 우영은 그의 체육관에 드나들며 공짜로 운동도 하고 코칭도 받았다. 그는 매일 와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으나, 돈도 내지 않는 처지에 자주 가는 것도 눈치 보여 아주 가끔만 찾아갔다.
“열심히 하구 와.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 아니여. 이제 대학까지도 얼마 안 남았으니께. 자, 어여 씻고 나와. 밥 차려 놨어. 아침밥 먹어. 밥.”
“아아. 알겠다니까요…….”
이불을 걷지 않고 눈치를 보던 우영은 할머니가 나가자마자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뜨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한숨을 삼킬 수가 없었다. 축축한 아래가 걸리적댈 때마다 불쾌한 자괴가 속절없이 몰려들었다.
***
샤워를 마치고 시계를 보았다. 계획했던 대로 평소보다 알람을 한 시간 일찍 맞춰 둔 덕에 여유가 있었다. 밥을 먹고 깨끗한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고태성에게 오늘은 먼저 간다는 메시지를 보내곤 화면을 껐다. 물론 돌아오는 답은 읽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혼자 걸어가는 등굣길은 이상할 정도로 썰렁했다. 홀로 걷는 길이 마치 고태성이 없는 제 인생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공허하고 허전하다. 생각하니 혀끝에 쓴맛이 돌았다.
문틀에 숨겨진 열쇠를 찾아 교실 문을 열었다. 창문을 살짝 열고는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무슨 내용인지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앉자마자 고태성 생각으로 머릿속이 또 혼잡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르륵, 문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고태성이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교복 셔츠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조금 흐트러진 채였다. 숨을 몰아쉬는 걸 보니 뛰어온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살짝 찌푸린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눈에도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 드러났다.
“어, 왔냐.”
까닥 고개를 돌려 짧게 시선을 주고는 다시 교과서 위로 처박았다. 앙금처럼 쌓인 울화와 밤사이 벌어진 요란한 꿈이 우영을 뒤흔들었다.
“왜 혼자 갔어?”
긴 보폭으로 걸어온 고태성이 우영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쏘아붙이는 어조에 다 보지도 않은 책장을 넘겼다.
“오늘 일찍 깨서. 톡 보냈잖아.”
애써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유지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한껏 성이 난 목소리였다. 어제 이후 연락도 받질 않았고, 아침엔 먼저 가겠다고 통보까지 했으니 짜증이 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소심한 복수심 따위에 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런 기분으로 대화해 봐야 좋은 말이 나갈 것 같지 않아 그랬다. 솔직하게 꼴도 보기 싫었다.
“무음 풀어 놓는 거 깜박했어.”
“톡은 왜 씹는데.”
“피시방 갔잖아. 게임 하느라 정신없었지.”
“끝나고 하면 되잖아.”
“아, 떡볶이 먹느라 까먹었어.”
“씨발, 말 서운하게 하네?”
거친 어조에 샤프를 끄적이던 우영의 손이 멈췄다. 저도 모르게 눈가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서운? 지금 서운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제 마음도 모르고 되레 씩씩대고 있는 걸 보아하니 뻔했다. 고작 피시방 가는 일이 뭐 대수냐며 우습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가 속상했던 건 피시방을 함께 가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게 몇 달 만에 겨우 잡은 약속이라서도 아니었다.
약속을 깼다는 사실보다, 고태성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생각이 속을 상하게 했다. 이유를 되짚자마자 목구멍에 뜨끈한 것이 울컥 차올랐다.
감정을 담지 않은 시선을 들었다. 우영의 기다란 눈매가 매섭게 빛났다. 그러는 너는 어제 뭘 했기에 내 약속을 제치고 다른 사람을 만났느냐며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선을 넘는 짓이었다.
“서운할 일도 많다.”
겨우 한 김 삭혀 낸 우영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를 향한 말이자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우영아.”
우영의 앞 책상 의자를 빼낸 고태성이 풀썩 마주 보고 앉았다. 책상 끝에 양팔을 툭 겹쳐 얹곤 그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눈빛이 싫다. 보고 싶지 않았다.
“어제부터 존나 속상하게 만든다.”
“…….”
“응?”
나긋한 어조에 심사가 뒤틀렸다.
속상하다고.
그런 거로 속이 상하면 이미 제 속은 썩어 문드러져 형체도 없을 터였다. 입맛이 없어 아침도 거의 먹지 않다시피 하고 왔건만 속이 얹힌 듯 답답했다.
정적과 함께 우영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그럴 거면 오지 그랬냐.”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진심에 고태성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샤프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표정 관리를 실패한 얼굴이 차츰 더 경직되어 갔다.
씨발, 실수였다. 얘길 꺼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돌아올 말은 뻔했다. 누굴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고, 무엇을 했었는지, 왜 가지 못했는지 줄줄이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딴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로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그를 상상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러나 짧은 정적 끝엔 예상과 다른 답이 돌아왔다.
“그러게.”
잠시 굳어 버린 우영은 입술을 다물었다. 고태성 또한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책상 위에 양팔을 겹쳐 괴고는 교과서에 시선을 푹 담근 우영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또 긴 적막이 이어졌다.
온몸을 짓누르는 침묵이 무거웠다. 손톱만 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했다. 아니다. 그랬다. 했었다. 영양가 없이 문장의 어절을 훑어 내려가던 우영은 끝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가 떴다.
“뚫어지겠다.”
샤프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든다. 여전히 저를 주시하고 있는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모양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눈 한 번 마주치기 힘드네.”
기다란 손가락이 우영의 샤프를 툭툭 건드렸다.
“왜 내 얼굴 안 봐? 내 눈 예쁘다며.”
“…….”
“전화도 씹고, 답장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너무해. 하도 봐서 이제 질렸어?”
사람을 꾀듯 야살스러운 어조에 급작스러운 피로가 몰려왔다. 한순간에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넘기려는 화법에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씨발, 말 좀 그렇게 하지 마.”
툭 내뱉곤 턱을 꽉 물었다. 불여우 같은 새끼. 철철 흘리고 다니는 주제에 제가 하는 짓이 뭔지 쥐뿔도 모르는, 천하의 나쁜 새끼.
날렵한 턱선 위로 굳은 심줄이 섰다. 천천히 시선을 드는 무쌍의 눈매가 고태성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네가 먼저 약속 어겼잖아. 여자 때문에 나를 뒤로 미뤘잖아. 네가 잘했으면 없었을 일이었잖아. 씨발, 네가 나 속상하게 만들었잖아…….
분이 섞인 속마음을 잘근잘근 씹었다. 자칫하단 부메랑처럼 돌아와 날카롭게 박힐지도 모르는 말들이었다. 보지 않아도 매서워져 있을 시선을 다시 내렸다. 손바닥으로 열 오른 눈가를 꾹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 답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연락은 해 주라. 우영아.”
고요한 교실 속으로 고태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우영의 책상 위를 톡, 톡 느리게 두드렸다. 우영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손가락이었다.
“내가 네 이야기를 남기혁한테 들어야겠어?”
“…….”
“존나…… 빡치게.”
짓씹는 듯한 음색에 우영이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딱딱한 어조완 달리 웃음기 묻은 우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까만 눈동자에는 뜨끈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낯선 눈빛에 우영은 단번에 그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껍데기 같은 미소였다. 그가 지금 매우 속이 불편한 상태라는 소리였다.
“연락 안 될 때마다 기분 개 같아.”
일렁이는 동공과 마주하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몰려왔다.
“새벽에 너네 집 찾아가려다가 겨우 참았어. 아침에 일부러 30분이나 일찍 갔는데, 씨발, 먼저 갔더라?”
고태성은 지금 화가 나 있었다. 그 모습에 켜켜이 쌓인 앙금이 살살 녹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우영아. 이거 나 열 받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
“응?”
우영은 괜스레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 말 없이 고태성의 성난 눈매를 바라보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낯빛과 달리 희고 뽀송뽀송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화난 얼굴도 그저 예쁘기만 했다.
그의 이목구비를 느리게 훑던 우영이 시선을 툭 떨궜다. 잇새로 하,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왜 웃지?”
난데없는 실소에 고태성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잠 못 잤냐?”
담담한 물음에 고태성은 답이 없었다. 그러나 답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됐고. 어젠 진짜 정신없던 데다 피곤해서 그랬어, 미안해.”
“…….”
“앞으로 연락 잘 할 테니까 가서 공부해라.”
고개를 저어 보인 우영이 다시 샤프를 쥐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다. 그를 적으로 둔 우영은 어차피 이길 생각조차 없는 패배론자였다. 백전백패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쯤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빨리. 형아 어제 놀아서 오늘 할 거 많아요.”
우영이 장난스레 그의 팔을 툭 쳤다. 멍청했다. 이렇게 얼굴만 봐도 누그러지는데 그에게 화 같은 걸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손쉬운 사과에 침묵을 지키던 고태성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수업 시간에 들을 거 지금 왜 봐.”
“예에. 저는 머리 좋으신 누구 씨랑 달라서요, 빡대가리라.”
교과서를 넘기며 건들건들 답하는 말에, 고태성이 빤하게 우영을 응시했다. 정적과 함께 속 끝까지 파헤치는 듯한 눈빛이 이어졌다. 이제는 익숙했다.
“빡대가리 형아.”
별안간 교과서 위로 나타난 뽀얀 얼굴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좆같은 한국사 그만 보고 내 얼굴이나 봐 주세요.”
“…….”
“나 아직 화 안 풀렸으니까 더 달래 줘.”
책상 위에 뺨을 붙인 고태성의 눈매가 가지런히 휘었다. 목을 뒤로 빼고 그를 내려다보던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덩치는 산만 한 주제에 칭얼거리는 모습은 꼭 아이 같았다.
“……지랄.”
“아. 빨리.”
졌다는 듯 책을 덮은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를 따라 고태성의 입술 끝도 올라갔다.
***
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교실은 소란했다. 어제 나타난 고태성의 여자에 관하여 떠드는 놈들 탓이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다.
쉬는 시간 종이 치기 무섭게 우영은 자는 척 엎드렸다. 듣고 싶지 않았고, 듣는 척조차 하기 싫었다. 하나 본능적으로 귀는 바짝 세운 채였다. 어떤 여자애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3교시가 끝나도록 우영은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었다. 고태성이 별다른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묻는 족족 무시하거나 욕을 지껄이며 대화의 주제를 넘겼다.
아쉽긴 했으나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번 듣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애를 두고두고 곱씹을 제가 훤했다. 그런 구질구질한 짓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우영아.”
양팔에 파묻었던 고개를 돌리자 오른뺨이 손가락에 쿡, 찔렸다. 시야로 고태성의 기다란 손가락이 보였다.
“하지 마.”
시답잖은 장난에 우영이 반쯤 감은 눈을 찌푸렸다. 책상 위로 턱을 괴고 보던 고태성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짜증이 났다. 고태성과 짝이 된 것만큼 기쁜 일도 없었는데, 오늘따라 그가 옆에 있는 게 불편하기만 했다.
“그만 자. 나 심심해.”
“싫어.”
불퉁하게 답하자, 곁눈질하는 시야에 도톰한 입술이 들어왔다.
“왜. 너도 잠 못 잤어?”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왔다. 가까워진 거리에 우영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럴 때마다 제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저 또렷한 시선이 싫었다. 모조리 다 들킬 것만 같았다.
우영은 괜히 상체를 일으켰다. 모른 척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굴리자, 마침 다가오는 이수화가 보였다. 반장인 그는 방금 걷었던 프린트물을 품에 한가득 들고 있었다.
“이수화. 어디 가.”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팔을 뻗어 옆을 지나던 그의 팔목을 탁 붙들었다. 느닷없이 손목이 붙들린 이수화가 움찔 놀랐다.
“……나 교무실…….”
“같이 가자.”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책상을 밀었다. 꽉 잡은 이수화의 손목은 놓지 않은 채였다.
“응? 교무실을?”
“응. 우리 승현 씨 보고 싶어서.”
느닷없는 말에 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은 그대로 그를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보지 않아도 뒤통수에 고태성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고태성, 같이 갈래?”
이수화의 어깨에 팔을 턱 올린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책상에 팔을 괸 고태성이 고개를 저었다. 우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장대 같은 남자아이들이 그득한 점심시간 복도는 늘 정신 사납기 짝이 없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놈들을 피해 우영이 이수화의 어깨를 끌었다.
“야, 땅에 고개 처박고 다니지 말고 앞 좀 봐라. 그래 봐야 백 원짜리 하나 못 주워요.”
나무라는 말에 이수화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난 습관 돼서…….”
1년간 지켜본 결과, 그는 이리저리 넘어지고 부딪치며 칠칠찮게 다니는 타입이었다. 왜소한 몸집 탓인지, 복도를 걷다가도 시비가 걸려 우영이 나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쳐. 또 애먼 놈한테 어깨빵 당하고 울지 말고.”
“……으응…….”
“어깨도 좀, 피고 다니고. 어? 그러다 너 키 쪼그라들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펴 준 우영이 혀를 찼다. 그는 생긴 대로 잔병치레가 많고 병약했다. 키는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았지만, 이러나저러나 파리해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이수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그래도, 나…….”
“어.”
“나 이제, 한국 남성 평균 키인데……? 작년보다 더 컸어.”
은근슬쩍 허리를 펴며 힐끔 우영을 쳐다보는 표정은 다소 뿌듯해 보였다. 뜬금없는 말에 우영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평균 키가 얼만데요.”
“……백칠십삼…….”
오. 우영은 감탄하며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존나 크다. 평균 키.”
“…….”
“그래그래, 아주 잘 컸어? 더 쑥쑥 크세요?”
냉랭한 눈매가 장난스레 휘어졌다. 진즉 백팔십을 넘은 우영이 실실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말아 올라간 입매를 보며 이수화 또한 작게 웃었다.
“선생님. 설문지 가져왔어요.”
“어. 고마워. 전부 거둬 온 거 맞지?”
“……네.”
“고생했다, 반장. 우영인 왜?”
프린트물을 받아들던 담임 정승현이 옆에 선 우영에게 눈짓했다. 젊은 나이에 부임한 그는 성격이 세심한 데다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하여 우영 또한 그를 꽤 좋아했다.
“저 고생하시는 쌤 마사지 좀 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래? 어디 손맛 좀 볼까?”
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승현의 뒤에 섰다. 단단한 손바닥에 힘을 주어 티셔츠 위로 드러난 목과 어깨를 따라 주무르기 시작했다. 몇 번 오가지 않아도 능숙한 손길이 돋보였다. 날이 갈수록 천연덕스러워지는 우영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어우. 시원하다. 권우영.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저 그냥 타고났죠. 저희 할머니도 맨날 해 드려요.”
“그랬어? 할머님 진짜 좋으시겠네. 든든한 손주 두셔서.”
다정하게 웃던 정승현이 문득 부스럭부스럭 서랍을 뒤적였다.
“보자……. 자, 이거 나눠 먹어.”
“어, 감사합니다.”
손바닥에 한 움큼 알사탕 네 개를 건네받은 우영이 싱글싱글 웃었다. 깍듯이 경례 후 교무실 문을 나섰다. 복도를 걷다 말고 멈춰 선 우영이 이수화의 팔목을 들어 올렸다.
“대한민국 남성 평균 키 이수화 씨, 많이 먹고 평균 이상 되세요.”
말하며 손바닥 위에 사탕 두 개를 툭 떨어트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우영은 사탕 포장을 까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었다. 남은 한 개는 손바닥에 쥐었다. 손에 쥔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리던 이수화가 시선을 들었다.
“……사탕 좋아해?”
“나? 아니.”
은근한 질문에 우영이 대수롭잖게 고개를 까닥였다. 예상했던 답이 아닌지 이수화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날씨 좋네. 축구 한 판 뛰면 좋겠는데.”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걸친 우영이 복도 창밖으로 멀리 시선을 던졌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스쳤다. 교실 안에서는 종일 고태성의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이제야 좀 숨을 쉴 것 같았다.
“그러게……. 좋다.”
이수화가 덩달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흘러들어 온 바람에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그를 힐끔 쳐다본 우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까 너 축구 해 본 적은 있냐? 씨발, 전반전 뛰다가 응급실 실려 가는 거 아니야?”
혼자 말하고 혼자 웃음을 터뜨린다. 그다지 재미도 없는 말이건만, 낮은 웃음소리에 이수화의 입매도 스르르 올라갔다.
“아냐, 그 정돈 아닌데…….”
“아니기는. 너 운동장 한 바퀴 다 뛰어 본 적은 있어?”
묻는 말에 그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관자놀이 옆으로 말풍선이라도 띄워져 있을 듯한 모양새였다.
“응. 옛날에…….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때?”
“초등학교?”
“응.”
“아아. 혹시 돌잔치 때는 안 뛰셨어요?”
“…….”
“야, 안 되겠다. 주말에 날 잡고 운일 공원 좀 뛰자. 거기 존나 넓어서 지루하지 않게 뛰기 딱 좋거든? 너 평소에 비실대는 거 다 운동 부족이야, 인마. 형이 스파르타로 교육해 줄게.”
느닷없는 말에 이수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원?”
“어. 너네 집 근처에.”
담담한 얼굴의 우영이 창밖을 향해 턱짓했다. 그는 공부도 공부지만 체력 관리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응, 좋아……. 나도 산책 좋아해.”
배시시 웃는 이수화를 보며 우영이 기가 찬 듯한 웃음을 흘렸다.
“미친. 팔자 좋게 뭔 산책이야, 뛰자니까. 머리엔 뭘 붙이고 다니냐?”
문득 손을 뻗은 우영이 이수화의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냈다. 흠칫 어깨를 떤 이수화가 물끄러미 그의 손길을 응시했다.
“우영아.”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고태성이 서 있었다. 결 좋은 흑발에 새카만 눈빛이 올곧다. 넓은 어깨와 완벽한 비율은 저대로 교복 모델을 나가도 손색없을 듯했다.
스치며 보아도 잘생긴 얼굴에 우영이 헛숨을 내쉬었다. 저러니 여자들도 가만두질 않는 게 당연했다.
“어. 고태성, 손 줘 봐.”
속과 달리 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향해 손짓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고태성이 느릿느릿 걸어왔다. 손가락을 까닥이자 별다른 말 없이 손바닥을 펴 보인다. 우영은 그 위에 사탕 하나를 올려놓았다. 담임에게 받은 청포도 맛 사탕이었다.
“먹어.”
“담임이 줬어?”
“응.”
고태성은 사탕이나 초콜릿 등 군것질거리를 좋아했다. 그리고 담임은 맘에 드는 짓을 할 때마다 사탕을 줬다. 우영은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그를 찾아가 칭찬받을 짓을 했다.
“고마워.”
사탕을 받아 든 고태성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껍질을 깠다. 가지런한 입매가 살짝 끌어 올려졌다. 우영은 벌어진 입 안으로 사라지는 동그란 초록색 사탕을 응시했다. 혹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에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우영은 살며시 고태성의 어깨를 붙들었다. 살짝 발을 들어 턱을 비스듬히 들고는, 천천히 입술을 맞붙여 본다.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단 향이 풍겼다.
“고태성-! 권우영-! 이수화-!”
등 뒤를 와락 덮치는 남기혁의 외침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여기 서서 뭐 하냐. 아, 나도 사탕 줘!”
멀거니 선 우영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말도 안 되는 상상 속에서 빠져나오자 등 뒤로 자글자글한 소름이 돋았다.
고태성의 빤한 시선이 느껴진다. 자칫 넋을 놓았다간 또 홀린 듯 잠겨 버릴 것만 같아 얼른 걸음을 옮겼다.
***
정신을 좀 환기하려고 했건만, 결국 또 고태성 옆이다. 일상 깊숙이 그가 스며들어 좋았던 만큼, 그를 피할 길도 없었다.
복도에서 사탕 먹는 놈을 보고 그딴 파렴치한 상상이나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영의 속을 모르는 고태성은 자꾸 장난을 걸어 왔다. 필기 중인 손가락을 만지작대거나, 교복 셔츠 자락을 쥐며 물끄러미 쳐다볼 때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여 우영은 평소보다 더 그에게 불퉁하게 대했다. 그의 행동에는 관심 없는 듯 굴었다.
간신히 4교시를 버틴 후, 일부러 이수화에게 붙어 쓸데없는 말을 줄줄 지껄였다. 고태성 피하기에 이만한 상대도 없었다. 그는 상대가 앞에서 구구단을 외워도 끝까지 진중한 태도로 들어 줄 놈이었다.
급식실에 앉아 깨작거리던 우영은 옆자리에 앉은 고태성을 힐긋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꿈부터 시작하여 이름 모를 고태성의 여자까지, 이러저러한 것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우영을 혼란스럽게 했다.
짜증이 났다가, 화가 났다가, 설렜다가, 좋았다가, 또 우울해졌다가. 이리저리 날뛰는 심장 탓에 종일 정신이 없었다. 수업 내내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발……. 변태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질투에 집착에, 이젠 상상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고 있었다. 없던 밥맛도 뚝 떨어졌다. 속으로 욕을 지껄이는 찰나, 어디선가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성아.”
다 먹은 식판을 올려둔 채 떠들고 있던 십수 개의 눈동자가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와…….”
누군가 감탄사를 뱉었다. 느리게 시선을 올리자, 낯선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단아한 분위기의 예쁜 여자애가 수줍은 듯 서 있었다. 어제 그 소문의 애인 듯했다. 우영의 눈가가 단번에 굳었다.
진즉 식사를 마치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고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우영의 눈길 또한 저절로 고태성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평소 우영이 아는 고태성의 움직임치고는 빠른 반응이었다.
“야, 정리 좀.”
김진성의 어깨를 툭 친 고태성이 제 식판을 향해 턱짓했다.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김진성이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빳빳이 굳은 시선이 고태성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서율. 명찰을 확인하고 다시 눈길을 들자 그녀가 우영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예쁘다. 봄기운같이 향긋한 미소였다. 그 따스한 온기에 우영의 심장이 차게 식었다.
두 명의 선남선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사위가 술렁거렸다. 우영은 차가운 물잔을 꽉 쥐었다. 몇 술 뜨지도 않은 밥이 목구멍에 콱 막힌 듯했다. 찬물을 벌컥벌컥 넘겨도 뜨겁게 달궈진 속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우영의 눈동자는 교실 벽에 높게 달린 시계 위에 꽂혀 있었다. 우영의 무리가 교실에 돌아오고,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도 고태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야, 권우영. 너 오늘 상태 왜 그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기혁이 툭 물었다. 종일 그늘진 얼굴에 호기심이 든 탓이다. 불퉁한 얼굴의 우영이 힐긋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늘진 답에 남기혁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넋이 빠진 게, 눈깔이 꼭…….”
“…….”
“시험지 밀려 쓴 놈 같애.”
엉뚱한 소리에 우영이 미간을 좁혔다.
“지랄. 내가 너냐?”
“뭔데. 왜 그러는데? 또 뭐 있어? 김유희? 이지혜?”
남기혁이 싱글벙글 능청을 떨었다. 인상을 찡그린 우영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또 시작이다. 그놈의 여자, 여자, 여자. 여자!
좆같다. 여자고 남자고 고태성이 아니라면 한 트럭을 가져다줘도 싫었다. 하필이면 왜 말도 못 꺼내 볼 친구 새끼를 좋아해서 그딴 더러운 꿈이나 꾸고 구질구질한 질투까지 하는 건지 자신이 혐오스럽게만 느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짜증이 팍 치밀어 올랐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쥔 주먹을 책상 위로 퍽 내리쳤다.
“아이씨!”
“왁! 깜짝이야!”
“하아. 시발…….”
가지런히 놓여 있던 샤프가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고개를 숙인 우영이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댄 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주변으로 새카만 기운이 펄펄 흘렀다. 누가 봐도 괴로운 듯한 모양새였다.
“뭐냐 진짜? 왜 그래?”
돌연 진지해진 남기혁을 한 번 쳐다본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갔다 온다.”
드르륵, 책상을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에서 열이 펄펄 나는 것 같았다. 햇볕 좀 쬐고 물 한잔 마시면 나아질 것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교실 문을 여는 찰나, 툭. 누군가와 부딪쳤다. 고태성이었다.
“우영. 어디 가?”
우영의 입술이 단단하게 굳었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 회피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내 뭘 했기에 지금 기어들어 오는 건지. 짜증이 났다.
“나 화장실.”
“같이 가.”
“아, 그냥 있어.”
저도 모르게 굳은 얼굴로 고태성의 팔을 붙들며 저지했다. 오늘만큼은 그와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굳이 아무렇지 않은 척 능청 떨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새카만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온갖 감정들이 투명하게 드러날 게 분명했다.
우영의 손길에 멈칫 걸음을 멈춘 고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아.”
뒤뜰에 도착한 우영은 눈을 감고 고개를 툭 젖혔다. 쨍쨍한 햇볕이 따갑기도 따가웠다. 화창한 하늘을 보고 있는데도 바짝 마르기는커녕 더 눅눅해지기만 했다. 별 볼 일 없는 상사병 탓에 혼란스러워 뒤질 지경이었다.
“우영아. 혹시 어디 아파?”
조그맣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쪽 눈을 지그시 떴다. 제 키보다 조금 작은 마대를 쥔 이수화가 보였다. 혹여 고태성일까, 굳어 있던 우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
“으응. 아니, 아까부터 계속 엎드려 있길래……. 어디 아픈가 해서.”
걱정 어린 얼굴의 이수화가 우영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아파……?”
심각하게 물어 오는 얼굴에 우영이 고개를 툭 떨궜다. 동성 친구를 좋아한다. 아침에는 기어코 그놈 꿈까지 꿨다. 그것도 모자라, 여자 만나는 모습을 보며 존나게 질투까지 하고 있었다, 차라리 몸 어딘가가 뒤지게 아픈 거였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어. 나 아파. 씨발…….”
“…….”
“진짜 좆같이 아픈 놈이야.”
우영은 신음처럼 말하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꽉 눌렀다. 흠칫 놀란 이수화가 우영의 교복 셔츠를 살짝 쥐었다.
“어, 어디가 그렇게……. 그러면 병원을 가야지.”
안절부절못하는 말에 우영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씹…….”
병원에 가서 나을 수 있는 거였으면 진즉 치료를 받으러 갔을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병은 어느 병원엘 가도 나을 길이 없었다. 생각하니 또 골이 뻐근해졌다.
“우영아, 선생님은 아프다고 말하면 바로 조퇴시켜 주셔…….”
“…….”
“아니면 내가, 대신 물어봐 줄까……?”
우영이 고개를 들었다. 눈썹을 끌어모은 이수화가 우영을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병원 가기 무서워서 그런 거면, 우리 집에 갈래? 우리 집에, 상주하시는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무섭지도 않고, 되게 친절하신데…….”
“…….”
“그리고, 주사도 안 아프게 놔 주시고……. 효과도 좋은데…….”
그가 말꼬리를 흐리며 웅얼거렸다. 하얀 미간에 실금이 간 것이 평소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우영이 저도 모르게 헛숨을 흘렸다.
“걱정되냐?”
“응?”
“내가 아플까 봐?”
그가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렇지…….”
희멀건 얼굴은 온갖 근심이 가득한 낯빛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이수화가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막 내뱉은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그래, 네가 뭘 알겠냐…….
“새끼, 형님 걱정도 해 주고. 다 컸어, 아주?”
동그란 머리통을 끌어안곤 마구 헝클어뜨렸다. 움찔 놀란 이수화가 어깨를 움츠렸다.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 놈을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수화야. 나 말고 네 걱정이나 해라…….”
비스듬히 그에게 기댄 우영이 한탄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널 보면 말야. 어디 가서 존나 등 처맞고 다닐 게 훤해서 형아가 마음이 아주 무거워요. 응?”
“……아니. 나 그러진, 않는데…….”
“으응. 지금은 그러진 않겠지이. 말 좀 씨발, 귀엽게 하지 말고.”
따라 하듯 말꼬리를 늘이던 우영이 약하게 딱밤을 놓았다.
“똑바로 말해 봐. 남자답게.”
“……어, 어떻게…….”
“아! 복식 호흡 몰라? 어? 따라 해 봐. 말끝에 힘주고. 입 크게 벌리고!”
난데없는 교관의 출현에 이수화가 머리를 문지르며 울상 지었다.
“아?”
조그마한 입을 벌리며 우영의 눈치를 본다. 기도 차지 않았다. 우영은 배에 힘을 주며 깊은 소리를 냈다.
“‘아?’ 말고 아!”
“아!”
“다시.”
“아!”
“옳지. 그대로 아무 말이나 해 봐.”
“…….”
“빨리!”
“내, 내가 오늘 맛있는 거 사 줄까?!”
불현듯 튀어나온 씩씩한 목소리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뭐라고?”
입가엔 미약한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눈을 끔뻑 감았다 뜬 이수화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그가 또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아, 아플 땐……. 맛있는 거, 좋아하는 거 먹으면 좋다고 해서…….”
우영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존나……. 가지가지 해라. 진짜.”
하찮아도 이렇게 하찮을 수가 없다. 원래도 귀여운 놈이었지만 오늘따라 당황스러우리만큼 귀여운 짓을 했다. 이수화는 동갑인데도 남동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미안.”
“그놈의 미안 소리 그만하시고. 나 오늘은 끝나고 체육관 가야 돼.”
“……으응…….”
작게 답한 이수화가 마대를 꼭 쥐었다. 다소 풀죽은 모습에 우영이 그를 힐끔 보았다.
“왜 그냥 넘어가려고 하냐.”
“…….”
“다음에 사 줘, 무르기 없다. 알지? 나 존나 많이 먹는 거. 너 용돈 거덜 날 준비 하고 와라.”
팔꿈치로 슬쩍 허리를 치니, 그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마대를 힐긋 본 우영이 그의 어깨에 다시금 팔을 걸쳐 당겼다.
“가자. 너 청소 당번 주제에 농땡이 까고 있었네?”
“아니……. 난 네가, 안 좋아 보여서…….”
“으응, 그랬어?”
실실 웃으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가지 않아 시선 끝에 익숙한 발이 보였다. 눈을 들자 고태성이 서 있었다. 웃고 있던 우영의 표정이 슬그머니 굳었다.
“화장실 간다더니.”
“…….”
“밖에서 쌌어?”
고태성의 까만 눈동자가 우영과 이수화를 느리게 훑었다. 빈정거리는 말끝에는 냉랭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금세 표정 관리를 한 우영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뭔 개소리야. 잠깐 바람 쐬러 나왔다가 이수화 만나서. 왜?”
미동 없이 둘을 내려다보던 고태성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머금었다.
“둘이 하도 즐거워 보이길래.”
“…….”
“무슨 얘기를 하길래 그렇게 신이 났어?”
천천히 우영과 이수화의 뒤로 다가온 고태성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양팔을 뻗어 자연스레 어깨동무했다. 달큰한 향기와 묵직한 무게에 우영의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별 얘기 안 했어.”
“별 얘기 아닌 게 뭔데?”
우영의 귓가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고태성이 낮게 속삭였다.
“응? 존나 질투 나게.”
나긋한 숨결에 귓바퀴가 간질거렸다.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정하고 들러붙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설레발치는 제가 멍청하고 미련한 놈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