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늘 하루는 완전히 망했다.
계획대로라면 진즉 집에 돌아가 정해둔 페이지를 복습해야 했고, 어제 보다 만 숙어 마흔 개를 외우고 있어야 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걸림돌 덕에 모든 일정이 틀어져 버렸다.
우영은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저 때문에 우는 놈을 그냥 두고 갈 만큼 양심 없지도 않았다. 하여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그만 울라는 말 외에는 더 해 줄 말이 없었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표정을 살피다 보니 시간은 잘도 흘렀다. 한참 뒤에야 겨우 울음이 멎은 그에게 교실로 돌아가라며 일렀으나, 그는 잔뜩 부푼 눈두덩으로 우영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하긴 돌아가 봐야 갈굼이나 당할 테니 싫을 만도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무단결석은 안 된다는 말을 꺼내려던 우영은 타박 대신 쯧, 혀를 찼다. 풀 죽은 얼굴을 보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걸음이 빠른 편인 우영은 일부러 걷는 속도를 맞춰 주었다. 다리가 짧아 그런지 쫓아오는 걸음도 더럽게 느렸다.
리버캐슬에 사냐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문을 벗어나 10분쯤 걸어가면 제 집과 그의 집을 가르는 갈림길이 나올 터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집으로 가는 길에 말동무나 하잔 생각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그는 말동무는커녕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우영 또한 딱히 말을 얹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정적 끝으로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였다. 등을 돌리고 손을 휘적이던 우영의 뒤를 이수화가 급히 따라왔다.
“뭐야, 안 가냐?”
“…….”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이수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따라왔느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진짜…….”
황당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던 우영이 헛숨을 뱉었다.
“……네 좆대로 하세요.”
눈가를 찡그리곤 고개를 절레 저었다. 초면에 울린 것이 내심 미안해서 뭐라 하기도 어려웠다.
한참을 앞서 걷던 우영이 끝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인 채 슬금슬금 따라오던 이수화의 이마가 그의 등에 부딪혔다.
“아, 왜.”
“…….”
“왜 따라오냐고, 새끼야.”
뒤를 돌아본 우영이 미간을 좁혔다. 어디까지 오는지 보자 싶은 생각에 그냥 두었으나, 벌써 길을 건너면 집 앞이었다. 마지막 골목 앞에서까지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처음 보는 놈한테 집을 알려 주기는 싫었다.
“저기요, 이수화 씨.”
“…….”
“우리 집 화장실까지 쫓아오시려고?”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이수화의 귀 끝이 붉어졌다.
“말씀을 좀 해 주시죠?”
빈정거리는 물음에도 이수화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벌겋게 부은 눈가와 대조되는 낯빛은 희게 질려 있었다. 유순한 눈꼬리는 툭 건들면 눈물을 떨굴 듯 보였다.
삐뚜름하게 선 우영이 허, 헛숨을 내뱉었다. 아무 짓도 않았는데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게 티가 난다. 그런 주제에 또 꿋꿋이 따라오는 꼴도 황당했다.
하아. 고개를 툭 떨군 우영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다시 힐긋 시선을 들어 이수화를 본다. 그는 무서워서 꼬리를 잔뜩 말아 넣은 주제에 밥 좀 달라며 쫓아오는 강아지 같았다. 한마디로 존나 하찮아 보인단 뜻이었다. 살면서 이런 유형은 처음 보았다.
“아……. 씨.”
우영은 제 뒷머리를 벅벅 헝클어뜨렸다. 이런 일에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따라오는 놈을 그냥 두고 볼 생각도 없었다. 자신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 간다.”
툭 내뱉곤 지그시 그를 내려다봤다. 이수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여기서부턴 따라올 생각 하지 마라. 이거 프라이버시 침해야.”
“…….”
“말했다, 난.”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찰나, 그가 유니폼 끝자락을 살짝 쥐어 왔다. 걸음을 멈춘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내리깐 이수화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깨진 안경이 처량한 분위기마저 더했다.
“……워.”
“뭐?”
“……고, 맙다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함께 말꼬리가 점점 흐려졌다.
“미친,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왔냐?”
우영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리고 짧게 혀를 찼다. 무단으로 야자까지 째고 쫓아오기에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나 싶던 참이었건만, 정말 별것 아니었던 탓이었다.
“……응…….”
이수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는 여전히 잔뜩 움츠러든 채였다.
“와…….”
우영은 감탄했다. 정확히는 초면에 욕을 할 수 없어 억지로 삼켰다. 많은 심한 말이 떠올랐지만 참기로 한다. 그는 귀찮은 듯 시선을 멀리 던졌다. 산등성이 너머로 벌써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예에. 괜찮고요. 여기까지 쫓아와서 사과도 해 주시고 씨발,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나네…….”
“…….”
“할 말 다 하셨으면 가세요, 이제.”
대수롭잖게 내뱉곤 그를 흘긋 보았다. 웬만큼 소심한 놈이 아닌 듯하니 적당히 맞춰 주고 보내는 것이 속 편할 것 같았다. 덕분에 오늘 한국사 복습은 패스해야 할 판이었다.
적막이 이어졌다. 가는 걸 보고 돌아갈 생각에 잠시 기다려 주고 있었건만 낌새가 이상했다.
“뭐냐.”
“…….”
“왜 또.”
고개를 떨군 꼴이 영 찜찜하다 싶더니, 놈의 양 뺨이 불안정하게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제 옷자락 끝을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우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앞에 훤하게 보이는 듯했다.
“아-, 제발.”
툭 고개를 젖혀 하늘을 한 번 쳐다본 우영이 다시 이수화를 내려다봤다. 기껏 수평을 이루던 눈썹이 또 사선으로 내려가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봤던 얼굴이었다. 우영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지한 얼굴로 그의 손목을 탁 낚아챘다.
“또 울면 욕한다, 진짜. 말했다.”
“…….”
“하……. 미친. 야.”
허리에 손을 짚은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속을 알 수가 없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뭐지. 이 새끼? 집에 가라니까 우는 건가? 가기 싫어서? 학교 폭력에 이은 가정 폭력? 학교에서도 맞고, 집에 가선 존나 맞고 그런 거?
리버캐슬에 사는 놈들도 집안 속사정은 콩가루 같은 것들이 대다수라던 고태성의 말이 떠올랐다. 유난히 소심한 성격이나, 반사적으로 겁을 먹는 행색을 보아하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또 찝찝해졌다. 갖가지 잡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왜 그러는데. 말을 해 보든가.”
하아. 한숨을 내쉰 우영이 귀찮은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안한데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3초 준다.”
“……서.”
한 번에 답이 돌아오길 바라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웅얼거림이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빠른 반응에 우영이 금세 되물었다.
“뭐?”
“나……. 해서.”
서서히 고개를 든 이수화가 축축한 눈망울로 우영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말해.”
목소리가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작았다. 하지만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했다. 한 번 더 인내한 우영이 살짝 허리를 숙여 그의 앞에 귀를 대주었다.
“나랑……. 줘.”
얇게 가늘어진 우영의 눈이 일그러졌다. 씨발, 당최 뭐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인내심이 점점 한계까지 치닫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크게 말해 줄래.”
“…….”
“뭐라고 했어.”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에 이수화가 우물쭈물했다. 눈을 내리깔고는 안절부절못하며 제 손가락끼리 얽고 매만지기를 반복한다. 솜뭉치로 목구멍을 틀어막은 듯 속이 꽉꽉 막혔다.
“와……. 나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네.”
거친 목소리에 이수화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랑…….”
커다란 눈이 소처럼 느리게 끔뻑였다. 우영은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랑.”
“친…… 구.”
“친구.”
“해, 해 줄, 래…….”
나랑 친구 해 줄래.
“친구?”
예상치 못한 말에 우영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겪어 본 적 있던 기시감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하는 거야?’
‘응? 친구 하자.’
불현듯 어린 고태성이 떠올랐다. 맥락도 없이 친구 하자고 조르던 놈의 어릴 적이.
기다랗고 매서운 눈매가 이수화를 찬찬히 훑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붉은 노을에 물든 뺨에 놀이터에서의 어린 고태성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나 참, 어느 한구석 닮은 곳도 없건만……. 기가 찼다. 숨 쉴 틈도 없이 그 새끼 생각만 하는 것도 이 정도면 병이었다.
“친구……. 해 주면…….”
“…….”
“좋을, 것…… 좋아서…….”
먼저 당돌하게 말을 꺼낸 주제에 이수화는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그를 가만히 주시하던 우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친구. 그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들 좋아하는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는 게 바쁘고 다른 이들에게 무관심해 그랬지 사회성이 없는 성격도 아니었다. 힐긋 시선을 내린 우영이 귀찮은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알았으니까, 가라.”
“……정말……?”
이수화가 주춤주춤 손을 뗐다.
“어어. 친구 해 줄 테니까 가라고.”
후, 한숨을 내쉰 우영이 걸어온 골목 끝을 향해 턱짓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이수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늘진 낯빛이 조금씩 밝아지는 듯 착각이 일었다.
“가, 빨리. 너 때문에 지금 존나 늦었으니까.”
“……응…….”
“씹. 짜증 나니까 뛰어서 가.”
신경질 섞인 말투에 이수화가 좀 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몇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등을 돌려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타닥거리는 뜀박질 소리가 골목 안을 갈랐다.
“참나…….”
뛰란다고 헐레벌떡 뛰어가는 놈의 뒷모습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턱을 살짝 젖히곤 손바닥으로 제 뒷덜미를 주물렀다.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코너를 돈 이수화의 뒤통수가 사라졌다. 우영은 그제야 등을 돌렸다. 팔자에도 없는 짓을 했더니 진이 다 빠졌다. 하여간 괴짜 같은 놈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를 툭 걷어차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붉은 장막이 드리운 하늘의 채도가 차츰 낮아지고 있었다.
아이씨, 망했네.
오늘은 한 시간쯤 늦게 자야겠다. 생각하며 골목 끝을 도는 찰나, 우영은 또 누군가를 맞닥뜨렸다. 이 시간에 여기 있을 리 없는 고태성이었다. 그가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었다. 학교에서 마주쳤던 단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고태성!”
우영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생각지 못한 만남에 놀람보다 반가움이 더 컸다. 조급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우영이 그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미친, 너 여기서 뭐 하냐?”
씩씩한 목소리에 고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오뚝한 콧대를 따라 얼굴 반쪽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희고 매끄러운 뺨이 지는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우아한 이목구비가 불그스름한 빛과 참 잘 어울렸다.
“언제부터 있었어? 뭐야, 나 기다린 거?”
앞뒤 재지 않고 실실 번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내일 새벽이나 되어야 볼 수 있었던 그를 오늘 또 볼 수 있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이수화를 보며 그와의 어릴 적을 떠올리는 바람에 더 그리워지던 참이었다.
그러나 삐딱하게 선 고태성은 다가오지 않고 가만히 우영을 주시했다. 평소와 달리 그다지 반가워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다. 어쩐지 조금 딱딱하게 굳은 듯 보이기도 했다.
“너는.”
건조한 답에 실실 웃던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틈 없이 돌아온 말이 답이 아닌 물음이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
“너는 왜 여기 있냐고.”
고태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그의 운동화 끝에 채인 돌멩이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것을 힐긋 바라본 우영이 의아한 눈길로 고태성을 쳐다보았다.
“뭔 소리야. 여기 우리 집 가는 길이잖아.”
“아까 먼저 갔잖아.”
뚝 자르듯 단호한 말에 입을 다문다. 우영의 시선이 고태성의 목울대를 타고 올라가 눈동자에 닿았다. 왜인지 그의 낯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한참 전에.”
바짝 앞에 선 고태성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눈동자가 우영을 직시했다.
“답장은 왜 안 해?”
“아.”
“전화는 왜 안 받아? 그럴 거면 핸드폰은 씨발, 왜 들고 다녀?”
우영은 그제야 핸드폰이 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보통 하교 후에는 집에 도착했다거나, 공부한다는 등의 연락을 일상처럼 주고받았지만, 오늘은 갑작스러운 이수화의 출현에 정신이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기는커녕 무음을 풀어 놓는 것도 깜박한 참이었다.
“못 봤다. 미안.”
짧은 답에 고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우영은 괜히 핸드폰 화면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화방 위의 빨간 동그라미에는 이미 수십 개의 알림이 쌓여 있었다.
[태성: 우영. 17:30]
[태성: 뭐 해? 가고 있어? 난 학원 가는 중. 17:33]
[태성: 권 (이모티콘) 17:34]
[태성: 우 (이모티콘) 17:34]
[태성: 영 (이모티콘) 17:35]
[태성: 왜 씹어? 17:36]
[태성: 보이스톡 해요 17:37]
[태성: 부재중 17:37]
[태성: 페이스톡 해요 17:39]
[태성: 부재중 17:40]
[태성: (사진) 17:40]
[태성: (동영상) 17:41]
[태성: 선물과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17:42]
엄지로 스크롤을 내리던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기프티콘은 항아리 모양 바나나 우유였으며, 심지어 사진과 동영상은 페이크였다.
연락 두절된 시간이라 봐야 고작 한 시간 반 정도였으나, 그의 메시지로 가득 찬 대화방을 보니 의도치 않게 무시한 듯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영아.”
“……어.”
“여태 뭐 했냐고.”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아, 이수화 때문에…….”
낱낱이 꿰뚫어 보는 듯한 직설적인 눈빛에 괜스레 민망해졌다. 우영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제 껍데기를 들춰 보는 듯한 그의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혀 왔다. 별일도 아닌데 귀 끝이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응. 그러니까 걔랑 뭐 했는데.”
새카만 눈동자가 우영의 얼굴을 느리게 훑어 내렸다.
“학교에서 헤어진 지 1시간 40분이 넘었는데, 아직도 집에 안 가고 뭐 했냐니까.”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어딘가 위압적이었다.
그가 우영의 어깨 위를 가볍게 짚었다. 우영의 시선이 제 어깨 위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뭐……. 말하자면 긴데.”
“말 안 해 줄 거야?”
제 일도 아닌데 구구절절 말을 얹을 수도 없어 대강 얼버무렸다.
별안간 어깨를 쥐어 오는 악력이 강해졌다. 그 손길에 제 추레한 꼴이 불현듯 또 떠올랐다. 걸어오는 동안 버석하게 마른 유니폼과 별개로 냄새가 날까 봐 신경 쓰였다.
“그냥, 친구 하자고 쫓아오길래.”
대수롭잖은 얼굴로 자연스레 그의 손을 치워 내는 데에 성공했다. 저를 빤하게 바라보는 그와 마주하며 괜스레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존나 웃겨. 너도 나한테 친구 하자고 귀찮게 했잖아. 기억은 나냐?”
그러니까 갑자기 네 생각 나던데. 덧붙이려던 말은 굳이 삼켰다. 킬킬거리며 고개를 까닥이자, 고태성은 별 반응 없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괜스레 머쓱해진 우영이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며 물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냐니까? 왜 학원 안 갔어?”
“그냥.”
살포시 눈을 내리깐 고태성이 다시금 우영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뭐야. 너 그렇게 마음대로 째도 돼?”
성의 없는 답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달싹이는 입술을 보아하니 무언가 할 얘기가 있는 듯했다.
“……나는 우영이랑 반도 떨어지고, 놀 시간도 없는데…….”
그가 고요히 중얼거렸다. 까만 눈동자는 어딘가 음울한 빛을 띠었다.
“권우영은 눈앞에서 모르는 새끼랑 시시덕거리면서 가니까……. 좆같잖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잡힌 어깨에 힘이 들어왔다. 드센 악력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뭔 헛소리냐.”
우영이 그의 팔뚝을 툭 쳤다. 아무래도 그가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나 존나 열심히 하거든? 새끼야, 넌 내가 운동하니까 종일 노는 줄 알지?”
“…….”
“너 따라 한국대 가려면 잠잘 시간도 없다. 안 그래도 오늘 늦어서 개 바쁜데.”
저를 빤히 보는 예쁜 눈을 흘기며 구시렁거렸다. 그는 항상 빡빡한 일정에 치여 사는 놈이었고, 비교적 자유분방한 저를 부러워하곤 했다. 오늘도 아마 같은 맥락에서인 듯했다.
진짜 놀고 있던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놀 시간 따윈 없었다. 같은 대학에 가잔 말은 고태성이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였다. 학교생활과 성적 관리에 충실해지자는 건 그들의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다.
“두고 봐라. 내가 진짜 전교 1등 안 해도 붙는 거 보여 준다.”
“…….”
“어? 형 믿지?”
우영이 주먹 쥔 손으로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능청스러운 얼굴에 굳어 있던 고태성의 눈매가 살짝 풀렸다. 그 변화를 단번에 눈치챈 우영이 실실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허리를 쳤다.
“어? 대답 안 하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고태성의 눈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응, 믿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영이 머리를 좌우로 까닥이며 웃었다. 그러잖아도 온몸이 뻑적지근하고 피로했는데 고태성을 보니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았다.
“그래, 형만 따라와라. 그래도 수석 자리는 너한테 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형아.”
그가 우영의 어깨 위로 와락 팔을 걸쳐 어깨동무했다. 드센 힘에 몸이 휘청 흔들렸다. 살짝 미소 띤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미친놈.”
우영은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제 속도 모르고 또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해 온 고태성 탓이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그의 향기에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았다.
“아이씨, 무거워. 고태성.”
일부러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팔을 밀어 냈다. 아닌 걸 알지만, 짧은 순간 혹시 그가 질투라도 해서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미친 상상. 미친 상상. 괜한 설렘에 귓가에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몰라, 나 힘들어. 업어 줘.”
“왜 힘든데. 아니, 너 학원 왜 안 갔냐니까? 진짜 그냥 쨌어?”
“응. 가기 싫어서.”
단호한 답에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유려한 옆모습에 또 헛숨을 삼켰다. 주책도 이런 주책이 따로 없었다.
“존나 막 나가시네?”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몸에 힘을 뺀 고태성이 그에게 늘어지게 기대 왔다.
“형이 나 교육 좀 시켜 주라. 우영이 혀엉.”
“아. 진짜 또라이…….”
괜스레 욕을 중얼거렸으나 올라가는 입매는 감출 수가 없었다.
“왜에.”
우영의 입술을 힐끗 바라본 고태성이 말꼬리를 늘였다. 이제 완전히 휘어진 눈가에는 웃음이 잔뜩 어려 있었다. 우영이 어처구니없는 듯 웃었다. 눈을 감으며 대강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이씨, 뭐부터 시켜 줘. 씨발, 말만 해. 다 해 준다.”
천연덕스럽게 되받아치자, 고태성이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 왔다.
“내년엔 존나 멋있는 축구부 형이랑 같은 반 되게 해 주세요.”
“…….”
“남기혁 새끼 빼고요.”
그가 한숨을 내쉬며 우영의 어깨에 눈가를 비볐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우영이 눈을 깜박거렸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깨문다. 제 맘도 모르고 쉴 새 없이 치대는 행동에 멀미가 다 났다.
“우영아.”
“어어.”
“오늘 같이 잘래?”
툭, 새어 나온 물음에 우영이 걸음을 멈췄다. 경직된 눈매로 시선을 들자,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는 고태성이 보였다.
“오랜만에 할머니도 보고 싶고.”
우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태성은 매번 생각 없이 내뱉는 새끼였다. 그러므로 그의 언행이 제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 리 없었다. 이건 겪어도 겪어도 적응하지 못 하는 멍청한 제 심장이 문제였다.
“깨비한테 안 혼나?”
시끄러운 속과는 달리 그는 별일 아닌 듯 물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는 서로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고태성이었다. 그에게는 해외에 나가 있는 어머니 대신 성적과 학원, 식단과 건강 관리까지 전반적인 생활을 돌봐 주는 선생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남자는 도깨비의 줄임말인 깨비라고 불렸다. 고태성은 그 로봇 같은 남자를 끔찍이도 혐오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부터는 집에서 상주하며 전보다 그를 빡빡하게 조이는 듯했다. 듣기만 해도 까탈스럽고 피곤한 타입이었다.
“괜찮아. 이러다가 권우영 뺏기는 것보다 낫지.”
“그건 또 뭔 개소리세요.”
인상을 찡그린 우영이 목에 팔을 걸어 꽉 죄어 오는 그의 가슴께를 밀어 냈다. 그러나 고태성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하여간 눈 하나 깜짝 않고 들러붙는 건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우영이 옆자리는 태성이 거.”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딴 놈 주는 순간……. 그 새끼 뒤지는 거야.”
따끈한 숨결이 귀 끝을 간질거렸다. 난데없는 말에 심장이 덜거덕거렸다. 괜히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지이랄.”
“응? 대답해야지.”
우영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툭 기댄 고태성이 낮게 웃었다.
진짜 미친, 미친 새끼.
쓸데없는 생각은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는 천성이 구미호 같은 놈이었다. 의미 없는 말에 혼자 설레거나 좋아해서는 안 됐다.
“예에. 님 다 가지세요. 뭐 팔다리라도 잘라 드릴까?”
우영은 일부러 불퉁하게 답했다. 그저 단순한 집착이라고, 소꿉친구를 향한 과한 애정일 뿐이라며 묘한 기분을 억눌렀다. 자각 이후 양심에 찔릴 만한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해 왔다. 이 이상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선을 넘는 생각들로 자괴감에 빠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돌연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시선을 돌리니 의미심장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고태성이 물끄러미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린 그가 우영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반사적으로 흠칫 손을 떨어낸 우영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 닿았을 뿐인데 소름이 올라왔다.
“뭐냐, 진짜 잘라 가시게?”
어처구니없는 얼굴에 고태성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요즘 좀 뜸하다고 깜박하는 것 같은데……. 나를 우선순위에 둬야지, 우영아.”
“…….”
“자꾸 태성이 속상하게 할 거야?”
애교 섞인 어투에 우영이 헛숨을 터뜨렸다.
“미친, 지랄 그만.”
억지웃음으로 입매를 씰룩였다. 그러나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가는 딱딱하게 굳었다.
우선순위.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지키고 있는 약속이었다. 별 뜻 아닌 말에 의미 부여하려는 치졸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괜스레 주변의 공기마저 무겁게 늘어지는 것 같았다.
“……치워, 애교는 남기혁한테나 부리시고요.”
우영이 툭 어깨를 털었다. 그의 팔이 쇳덩이 같았다. 대강 웃고 있는 껍데기와는 달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좋아할 수 없는 존재를 좋아하게 만든 건 반칙이었다. 이 사랑이 리그였다면 고태성은 시작과 동시에 퇴장당해야 했을 놈이었다. 따지고 보면 권우영이 이렇게 된 건 전부 그의 탓이었다.
“그 수준 낮은 새끼를 어디다 끼워, 우영아. 안 그래도 걔 때문에 너랑 떨어진 것 같아서 존나 짜증 나는데.”
고태성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빼고 남기혁과 저만 같은 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러우니까 빨리 졸업하고 버리자. 그 양배추 같은 새끼.”
커다란 손바닥으로 우영의 어깨를 살짝 움켜쥐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양배추를 못 드세요. 철 좀 들어라.”
나긋한 어조와 상반되는 투박한 말투에 우영은 기가 찬 듯 대꾸했다. 고태성은 양배추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오십 살 먹어도 양배추는 안 먹을 거야.”
“애냐? 존나 웃기네.”
우영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웃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 떠올린 명제는 늘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해답은 명쾌했다. 속이 들들 뭉그러졌다.
***
“네 거 놔두고 왜 내 걸로 하냐?”
샤워를 끝내고 나온 우영이 방바닥에 누워 있는 고태성을 힐긋 흘겼다. 그는 우영의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 배터리 없어서.”
정말 집에 함께 와 버렸다. 머리가 큰 후로 이렇게 단둘이만 집에 있던 적은 없었다. 서로의 집은 자주 놀러 갔으나 그럴 때마다 늘 남기혁이 함께였었다. 감정 자각 이후 일부러 둘만의 약속을 열심히 피한 탓도 있었다.
“충전해. 책상 옆에 충전기 있잖아.”
“그래?”
“뭐냐,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반팔 티에 와이셔츠를 풀어 헤치고 누운 고태성을 힐끔 바라본 우영이 책상 앞에 철퍼덕 앉았다. 이유 없이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나도 씻고 올래. 옷 줘. 속옷도.”
“어. 새것 없는데. 집 가서 가져오지?”
“뭐 어때. 네가 입던 것 줘.”
인상을 찡그린 우영이 서랍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안을 뒤적이며 티셔츠와 바지, 그리고 가장 최근에 산 속옷을 꺼내 들었다.
곱게 개 놓은 옷가지는 부드러웠고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도 났다. 그러나 우영은 굳은 얼굴로 속옷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그저 깨끗한 검정 드로즈일 뿐인데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몇 개는 뜯지 말걸.
하. 홀로 한숨을 삼킨 우영이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옷을 건넸다. 잠시 그걸 바라보던 고태성은 곧 문을 열고 욕실로 향했다. 달칵. 문이 닫혔다. 우영은 벽에 기댄 채 주르륵 앉아 하, 긴 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진짜…….
눈을 감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낡은 욕실 한 칸에서 씻고 있을 고태성의 뒷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까지 들릴 리 없는 물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괜히 발끝이 저릿저릿하고 목이 탔다. 망했다. 이래서는 공부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
“걔 어떤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고태성은 할머니가 펴 준 이불 위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가 씻고 나온 이후에도 우영은 한참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물론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누구?”
“아까 걔.”
“아, 이수화?”
“응.”
갑작스러운 물음에 우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고작 하루 봤을 뿐이라 딱히 아는 건 없었다.
“그냥, 착한 것 같은데.”
“착해?”
“응. 착하고……. 뭐 닮았어.”
“뭘 닮아?”
“쵸파. 안경 벗으면 개 닮았어. 나중에 보여 줄게.”
우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별안간 떠오른 기억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근데 걔 앞에서 그 말 하면 안 된다. 한 번 놀렸다고 존나 울던데……. 좀 소심한 듯?”
자판을 두드리던 고태성의 손가락이 멈췄다.
“울었어?”
짐짓 굳은 눈초리가 우영을 응시했다.
“어.”
“네 앞에서?”
“응.”
“달래 줬어?”
“그럼 그냥 두냐, 나 때문에 우는데. 하여간 맹하긴 한데 존나 피곤한 스타일이었어.”
그를 한참이나 달래던 기억을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샤프를 돌렸다. 이수화. 좀 귀엽긴 했는데……. 아무래도 좀 강하게 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병신이네.”
“뭐?”
작은 중얼거림에 우영이 고태성을 쳐다보았다. 이불 위에 기다랗게 누워 있던 고태성이 핸드폰을 툭 내려놓았다.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는 다시 말해 주지 않았다.
“나도 걔랑 친구 해야겠다.”
그가 깍지를 낀 손을 뒤통수에 받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가 미동 없이 생각에 잠겼다. 우영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갑자기?”
“권우영 친구가 내 친구지. 왜, 싫어?”
“아니, 뭐……. 그러시든가.”
느닷없는 말에 우영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전교에서 이래저래 유명한 고태성과 친해진다면 놈을 괴롭히던 것들도 눈치를 좀 볼 것이다.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자자, 우영아. 나 졸려.”
우두커니 책상 앞에 앉은 우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치 목표했던 분량은 개뿔, 단어 한 개조차 외우지 못했다.
“어. 먼저 자.”
고태성이 잠든 이후에 누울 예정이었다. 방은 좁았고, 둘은 전처럼 작지 않았다. 깔아 놓은 이불에 누우려면 착 붙어 자야 했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빨리 불 끄고 와. 나 밝으면 못 자.”
채근하는 어조에 우영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좁은 방은 책상 등 하나만 켜 놓아도 안을 환하게 비췄다.
……아, 씨발. 어떡하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우영이 머뭇거렸다.
“우영아, 나 진짜 졸려. 지금 자도 여섯 시간밖에 못 자는데.”
“…….”
“너 때문에 키 안 크면 어떡해. 나 책임질 거야?”
조르는 어조에 우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왜 그리로 흐르는지. 하여간 고태성을 이길 재간이 없다.
“미친, 거기서 뭘 더 크겠다고. 장래 희망 농구 선수세요?”
하품하는 그를 보며 우영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불을 끄자 방 안이 온통 새카매졌다. 이불을 걷고 그의 옆자리에 눕는다. 언뜻 뒤척이는 그의 팔이 스친 것 같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일자로 누운 우영은 다소 긴장한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랬다. ‘좋아하는’의 기준이 좀 모호하긴 하지만.
***
반짝, 눈을 뜬 우영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살랑거리는 머리칼과 함께 고태성의 흰 뺨이 보였다. 가지런한 속눈썹과 붓으로 찍은 듯 또렷한 눈가의 점. 날카롭고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고태성이다.
불현듯 어젯밤 함께 잠들었던 게 떠올랐다.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굳어 있다가, 곤하게 잠든 그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겨우 눈을 감았던 기억이 스멀스멀 생각났다.
그러니까, 꿈이 아니었다.
깨닫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거의 자지 못한 데다 막 깼는데도 불구하고 잠기운 하나 없는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우영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더 내렸다. 저를 꽉 끌어안은 채 잠든 고태성의 기다란 팔이 보였다. 허리 위에 맞닿은 팔의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삽시간에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미친…….
우영은 저도 모르게 낮게 침음했다. 입술을 깨물고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고태성에게서 제가 쓰는 샴푸 냄새가 나고 있었다. 분명 평소 제가 쓰던 것과 같은 향인데도 왜인지 훨씬 달콤하고 묘하게 느껴졌다. 불현듯 목 끝까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인지한 순간 심장이 빠른 속도로 쿵쿵대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제 심장 소리에 놀라 고태성이 깨어날 것만 같았다. 밀어 내야 하는 걸 아는데도 그럴 수가 없었다.
10초만, 아니 30초만 더…….
우영은 천천히 심호흡하듯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따라 그의 가슴께가 느리게 움직였다. 까만 눈동자가 순하게 잠든 고태성의 얼굴을 훑었다. 자연스럽게 눈가를 가린 새카만 머리칼과 대조되는 희고 고운 피부가 매끄러웠다.
으……. 존나 예쁘다.
괴롭히고 싶었다. 인형 같은 얼굴을 콕콕 찔러 보고 말랑한 볼살을 죽죽 늘여 보고 싶었다. 안아 보고 싶었다. 이대로 딱 한 번만 안아 보고 싶었다. 돌연 팔을 뻗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몸 위에 아무렇게나 얹혀 있던 우영의 손이 꿈틀거렸다. 몸뚱이에 로봇의 팔이라도 이어 붙여 놓은 듯 움직임이 어색해졌다.
이러다 깨면 어쩌려고.
미친 새끼, 안 돼. 절대 안 돼.
우영은 이를 꽉 물고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불씨처럼 피어오른 욕망이 흐물거리던 이성을 조각내고, 남아 있던 찌꺼기조차 잘게 부쉈다.
너무나도 쉽게 본능에 져 버린 팔이 고태성의 단단한 등 위를 살짝 감싸 안았다. “으음.” 잠결에 뒤척이던 고태성이 그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하지만 등을 감은 손을 풀지는 않았다. 잠시 뒤척이는 듯했던 고태성은 팔 아래에서 다시 고요히 잠들었다.
와……. 씨발, 미쳤다. 미쳤어, 권우영. 미친 변태 같은 새끼.
속으로 미친 듯이 호들갑을 떨며 이를 꽉 물었다. 다리라도 덜덜 떨고 싶을 정도의 초조함이 몰려왔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그는 짙은 숨을 내쉬었다.
들키면, 혹시 들키면 자고 있던 척하면 돼.
불안과는 별개로 까마득히 벅찬 감정이 몰려온다. 내쉬는 숨마저 바르르 진동하는 것 같았다.
아니, 씨발……. 존나 좋잖아…….
우영은 헛숨을 터뜨렸다. 멀대 같은 친구 놈 한 번 안아 봤다고 이렇게나 설렐 수 있는 일인가 싶었다. 품 안에 잠자코 감겨 오는 것이 고태성이라는 게 믿기지도 않았다.
찡그린 채 눈을 감은 우영이 그를 꼬옥 안았다. 맨살도 아니건만 맞닿은 모든 곳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빵빵, 경적 소리와 함께 콧구멍과 귓구멍 사이로 허연 김을 씩씩 뿜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태성, 미안……. 잠깐만, 잠깐만 더 이러고 있을게. 한 번만.
전해질 리 없는 애틋한 사과를 곱씹으며 살랑이는 머리칼에 뺨을 맞댔다. 향긋한 향기가 흘러나와 양심의 가책을 살살 녹여 주었다. 아. 좋다. 진짜, 진짜 너무 좋아. 벅찬 감정의 늪에 빠진 그는 이대로 고태성이 하루쯤 기절해 있었으면 하는 못된 소원도 빌었다.
***
“고태성, 일어나.”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지르던 우영이 발로 고태성을 툭툭 건드렸다.
“빨리. 할머니가 밥 먹고 가래.”
발바닥에 힘을 주어 흔들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고태성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문득 찌푸린 눈썹과 잠기운 잔뜩 묻은 순한 얼굴이 귀여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야. 안 일어나면 나 먼저 간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좀 더 자고 오던가.”
“……어디 가. 싫어.”
불현듯 툭 뻗어 나온 커다란 손바닥이 우영의 발목을 약하게 쥐었다. 눈도 뜨지 않은 주제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대는 그를 내려다보던 우영이 하,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떨어지기 싫어하는 건 여전하지. 어릴 적부터 유난히 제게만 도드라지던 저 집착이 미치도록 좋았다. 그것이 제가 가진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감정임을 알면서도.
목에 수건을 건 우영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야, 넌 내가 그렇게 좋냐?”
“응…….”
“미친.”
잠기운 섞인 목소리에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마저 닦으며 킬킬거린다. 답이 돌아오리라 생각지 못한 탓이다.
귀여워, 존나 귀여워. 미친놈. 왜 저렇게 태어나서 사람 마음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지. 어디가 좀 덜떨어졌으면 얼마나 좋아? 하다못해 좀 못생기기라도 하던가. 씨발, 왜 이딴 식으로 흠잡을 곳 없이 태어나서 사람 마음을 괴롭게 하냐고, 진짜…….
쯧, 혀를 찬 우영은 털썩 무릎을 꿇곤 이불을 홱 걷었다. 여전히 눈을 꾹 감은 고태성이 콩 벌레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영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3초 안에 안 일어나면 간지럽힌다.”
그의 위로 짙은 장난기가 번졌다. 잠이 많은 그를 깨울 때 종종 써먹던 방법이었다.
“삼. 이.”
“…….”
“일!”
허리께로 단번에 손을 가져가자 고태성이 몸을 홱 웅크렸다. 와락, 그의 위를 덮친 우영이 드센 손길로 그의 옆구리를 간질거렸다.
“빨리 일어나라고!”
“아……! 제발, 우영…….”
괴로운 듯 몸을 웅크린 고태성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늘 느긋하고 여유로운 편인 그가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일 때는 자다 깰 때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볼 수 없을 고태성의 무방비한 모습이다. 그에게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안 일어나? 이래도 안 일어나?”
“아, 시발, 하지 마……. 아!”
돌연 고태성이 그의 손목을 탁 낚아챘다. 그리고 홱 끌어당겼다. 뒤통수를 감싼 단단한 손바닥 탓에 우영의 얼굴이 가슴께에 푹 파묻혔다. 어. 강한 악력에 무너지듯 끌려간 우영이 엉거주춤 자세를 낮췄다.
뺨에 맞닿은 살갗이 단단했다.
“……5분만. 우영아, 5분.”
그가 애원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숨결이 귀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귓가에 뭐가 닿지도 않았는데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야, 알았으니까 놔 봐…….”
우영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잠든 그를 몰래 꼬옥 껴안고 있던 게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문득 단호한 악력이 뒤통수를 짓눌러왔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향기에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그저 잠결에 내지르는 손길인 건 알고 있었으나 눈치 없는 심장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아……. 미쳤다.
우영은 자꾸만 작아지려는 인내심을 강하게 앞세웠다. 삼, 이, 일. 그로부터 딱 3초를 센 후에야 우악스러운 몸부림으로 그에게서 홱 떨어져 나갔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쁜 마음을 애써 삼키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건으로 벅벅 문지를 뿐이었다.
***
비몽사몽한 고태성을 겨우 깨운 후 같이 밥을 먹었다. 우영의 할머니는 고태성이 몰라보게 쑥쑥 자랐다며 늘 그렇듯 고봉밥을 퍼 주었다. 평소 입이 짧은 편인 고태성은 희한하게도 그녀가 주는 건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먼저 등교 준비를 끝낸 우영은 짧은 운동을 위해 앞마당에 나왔다.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문득 담벼락 너머에 고요히 주차된 검정 세단을 발견했다.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차였다. 의문이 이어지기도 전, 그의 눈길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녹색의 낡은 대문, 어깨만큼도 오지 않는 낮은 콘크리트 담벼락과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사람이었다. 그가 쇳소리 나는 대문을 끼익 열고 발을 내디뎠다.
“우영 학생.”
몸을 풀던 우영의 앞에 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손에 든 빳빳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새 교복과 비타민, 오전에 먹어야 할 셰이크와 점심, 저녁치 영양제입니다. 전해 주면 알 거예요.”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고태성을 돌봐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집 앞에 나타나리라 생각지 못했던 우영은 굳은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힐끔 들여다보니 깨끗한 교복과 약통 등이 들어 있었다.
침묵 속에서 우영을 응시하던 남자가 곧 입을 열었다.
“태성이는 정해진 루틴 안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이제 입시까지 몇 년 남지 않은 만큼 잘 지켜 온 흐름이 깨지면 안 돼요.”
얼굴과 퍽 잘 어울리는 건조한 말투였다. 서론이라곤 없는 딱딱한 어조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어릴 적부터 오다가다 마주친 적은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말을 섞은 건 처음이었다.
“사모님은 아드님이 막무가내로 구는 일을 무척 싫어하십니다. 이런 식의 무단 행동이 반복되면 좋은 일 없을 거란 소리예요.”
냉랭한 시선이 우영을 훑듯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태성이가 돌아오면 저도 단단히 주의시키겠습니다. 다음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우영 학생도 조심해 주세요. 필요하면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셔도 되고요.”
남자는 아무 답이 없는 우영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품 안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가 내민 명함을 가만히 지켜보던 우영이 그것을 느리게 받아 들었다.
“우영 학생은 똑똑하니 잘 알겠죠. 지금은 반항할 때가 아니라는 걸.”
남자는 재킷을 툭툭 당겨 정리했다. 할 말을 마쳤는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영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고태성이 그를 여기까지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평상시 그의 일상을 통제한다고는 들었으나, 새벽같이 찾아와 훈수를 둘 줄은 몰랐다. 느닷없이 벌어진 불편한 상황에 불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학생이 가끔 친구 집에서 잠 좀 잘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손에 든 쇼핑백을 가만히 응시하던 우영이 고요히 중얼거렸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입술 끝은 비뚜름하게 올라간 채였다.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걔네 엄마는 뭐가 그렇게 까탈스럽대요? 얼굴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으면서. 아니, 상식적으로 아들이 걱정되면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졸업식에도 안 왔잖아요.”
우영이 운동화 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찼다. 뼈대 있는 말에 남자가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그러잖아도 표정 없는 얼굴이 조금 더 경직되었다.
“불필요한 참견이 심하군요.”
“제가 좀 그렇긴 해요.”
천연덕스러운 답에 그가 눈가를 찌푸렸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듯 등을 돌리는 찰나, 우영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아저씨.”
낮은 목소리에 그가 다시 우영을 주시했다. 툭 건들면 부러질 듯 딱딱한 분위기가 그대로 굳어졌다.
“고태성은, 그냥 둬도 알아서 잘해요.”
우영이 말했다. 입술을 다문 남자가 물끄러미 우영을 응시했다.
“진짠데.”
가볍게 웃어 보인 우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대꾸 없이 자리를 지키던 남자가 그대로 등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부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차가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우영은 낮은 담벼락 너머에서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
“야.”
등굣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던 우영이 그를 툭 불렀다. 나란히 걸어가던 고태성이 고개를 돌려 우영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린 교복과 말간 얼굴이 티끌 하나 없이 단정하다. 우영은 괜스레 시선을 내려 바닥을 응시했다.
“너 어제처럼 그렇게 막 땡땡이쳐도 되냐?”
“아니, 안 되지.”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 답에 우영이 헛숨을 내쉬었다. 워낙 당당하기에 허락이라도 받고 왔나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던 탓이다.
“그럼 어제는 왜 그랬는데?”
괜히 짜증이 나 신경질적인 말투가 나갔다. 돌아오면 단단히 주의시키겠다는 남자의 말 때문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그가 혼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스트레스에 의한…… 충동적 일탈?”
고태성은 느릿느릿 웃었다. 속도 모르고 웃는 얼굴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갑자기 네가 무슨 스트레스야?”
우영은 괜스레 불퉁해졌다. 고태성은 남자에게 잔소리 듣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가 찾아와 새 옷을 주고 갔다고는 이야기했으나, 대화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어서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었다.
“왜, 난 스트레스 받으면 안 돼?”
우영의 맘을 알 리 없는 고태성이 나른하게 말했다. 스윽 다가와 또 어깨에 팔을 걸친다. 오늘도 그에게서 제가 쓰는 샴푸 냄새가 났다.
“나 존나 예민하고 감수성 넘치는 거 몰랐나 봐.”
“뭐래,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가.”
얼굴을 찡그린 우영이 그의 가슴께를 밀쳤다. 묵묵히 성큼성큼 더 앞서 걸어가자, 뒤따라오던 고태성이 건들거렸다.
“와. 존나 무심하다, 무심해.”
“…….”
“우영이가 날 전혀 모르네. 씹서운하게.”
다소 진심이 담긴 말에 우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제 마음도 모르는 주제에 속 편한 소릴 하고 있다. 새벽 댓바람부터 기분이 착잡해졌다.
“말이 또 왜 그렇게 가냐? 나는 깨비가 너 갈굴까 봐 그러는 거지. 말 안 들으면 존나 괴롭힌다며.”
우영이 찌푸린 눈가로 그를 쏘아보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등발도 쩔더만. 씹, 한 대 맞으면 그냥 피멍 드는 거 아니냐?”
고요한 교내 복도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숨을 내쉰 우영이 짧게 자른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태성은 타고났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놈이었다. 그것이 숨 쉴 틈 없는 교육 체계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조금만 지켜봐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정말 알아서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태성이 저 아닌 다른 놈의 집에서 잤을 리는 없었다. 그가 제 집에서 마지막으로 밤을 보냈던 것도 거의 반년 전의 일일 것이다. 애먼 사람을 잡는 모양에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고태성이 장난스레 웃었다.
“괜찮아. 맞고 쫓겨나면 또 우영이 집에서 잠도 자고, 할머니가 해 주는 밥도 먹고. 꿩 먹고 알 먹고지.”
“지랄. 욕이나 처먹지 마세요.”
툭 내뱉으며 드르륵, 교실 문을 열자 화들짝 놀라는 인영이 보였다. 이수화였다.
“어.”
우영은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 아래에 이수화의 동그란 정수리가 드러났다. 굳은 듯 서 있던 이수화가 찬찬히 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우영을 발견한 이수화가 눈을 크게 떴다. 안경을 쓰지 않아 커다랗고 끝이 처진 눈망울이 더 도드라졌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모른 척 옆으로 그냥 지나가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야.”
한쪽 눈을 치켜뜬 우영이 저를 지나치려는 이수화의 어깨를 붙들었다.
“으, 응?”
그는 누가 봐도 바짝 굳은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가더니 한 번 더 움찔거렸다. 가방끈을 꽉 쥔 양 손가락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쩐지 또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우영이 그 손을 힐긋 바라보았다.
“안녕.”
허스키한 음색이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이수화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기가 찬 듯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인사 안 해?”
“…….”
“넌 새끼야, 친구 만나면 인사하는 거라고 초등학교 때 안 배웠냐.”
말하며 그의 가방을 뒤로 죽 잡아당겼다. 강한 악력에 이수화가 속수무책으로 끌려왔다. 가방이 위로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마치 어미에게 목덜미를 물린 고양이 같은 꼴이었다.
“네가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어? 이 시간에 가방은 왜 다시 들고 나가냐? 너도 땡땡이치려고?”
“아, 아니. 그런 거 아닌데.”
이수화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라도 줄줄 흘리고 있을 법한 꼴이었다.
“안녕, 수화야.”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흠칫 시선을 올렸다. 우영의 등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고태성이 살갑게 웃어 보였다. 휘어지는 눈웃음을 멀거니 보던 이수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안녕…….”
이수화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의 어깨에 턱을 살짝 걸친 고태성이 이수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나 우영이 친구. 거의 10년 됐나.”
“…….”
“고태성.”
고오, 태애, 서엉. 이렇게 들렸다. 느릿느릿 말을 늘인 그가 한 번 더 웃어 보이자, 이수화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난, 이수화…….”
“응. 얘기 많이 들었어. 우영이한테.”
난데없는 말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개팅하세요?”
꽉 쥐고 있던 가방을 놓으며 묻자, 천천히 상체를 핀 고태성이 장난기 어린 얼굴을 했다.
“아, 수화 소개팅 좋아해? 여자 소개해 줄까?”
등 뒤에서 조곤조곤 묻는 소리에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여자는커녕 제 앞에서조차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놈한테 밑도 끝도 없는 소리였다. 하여간 넉살 좋은 건 알아줘야 했다.
“미친. 이 샌님한테 무슨 여자야.”
“왜, 좋아할 수도 있지. 여자 안 좋아하는 남자가 어딨어.”
“…….”
“그렇지, 수화야?”
대수롭지 않은 듯 건넨 말이 부드럽게 스쳤다. 이수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우영이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여자 안 좋아하는 남자, 네 옆에 있는데.
괜한 생각을 지우며 이수화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입술을 꾹 당겨 물고 있었다. 누가 대답하라고 협박한 것도 아니건만 바짝 언 모습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캐릭터 존나 확고하네. 우영이 혀를 내둘렀다.
“됐고. 이수화, 너 안경은?”
눈앞에 손바닥을 휙휙 저으며 묻자, 그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거……. 다시 주문했는데. 맞춤이라서……. 시간이 좀…….”
“알 존나 두껍던데, 지금 뭐 보이긴 하냐?”
이십 얼마였더라…….
보아하니 못사는 집안 자식은 아닌 듯하나, 그를 괴롭힌 놈들이 안경값을 가져오지 않으면 바로 문제 삼아 일러바칠 생각이었다.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 못된 놈들은 초장부터 뿌리까지 뽑아야 했다.
지잉. 지잉.
뭐라 말을 꺼내려던 찰나,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영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핸드폰 화면에 ‘할머니’ 세 글자가 떴다.
이 시간에 웬 전화지?
“어, 할머니. 왜? 무슨 일 있어?”
눈을 치켜뜬 우영이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화기 너머로 드센 목소리가 어렴풋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돌린 우영이 고태성에게 대강 손짓했다. 알아서 가라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남겨진 둘의 사이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비스듬히 선 고태성의 시선이 이수화를 낱낱이 꿰뚫었다.
“어제 도와줬다고 너무 미안해하거나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수화야.”
가지런한 입술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샜다.
“쟤 원래 그러거든. 아무한테나.”
고태성이 생긋 웃어 보이며 팔짱을 꼈다.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이수화가 가방끈을 꼭 쥐었다. 등 뒤에선 여전히 우영이 통화하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저러니까 허구한 날 착각하는 놈들만 한 트럭이었지. 앞에선 티도 못 내고, 쩔쩔매면서 부끄러워하고. 존나 웃기는 새끼들 많았는데.”
흐음, 숨을 내쉰 고태성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우리 우영이가 좀 독특해?”
웃음기 어린 말투는 장난 같기도,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특유의 여유로움이 풍겨 나왔다.
또다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침묵에 이수화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아. 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수화야.”
문득 그가 이수화의 어깨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설마 오해한 거 아니지? 난 혹시 네가 우영이 때문에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려고.”
“아……. 아니, 나는…….”
이수화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고태성이 눈가를 살살 휘어 웃었다. 예쁜 눈웃음이었다.
“아무튼, 또 보자.”
웃음기 어린 눈매 아래에 작게 찍힌 점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제 할 말만 하고 등을 돌리는 그를 보며 이수화는 흐릿한 눈을 감았다 떴다.
***
우영은 이수화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하여 같은 반이었던 남기혁은 물론이고 고태성까지 자연스레 이수화와 친분을 트게 되었다.
운일 고등학교에서 고태성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소위 좀 논다는 애들은 물론이고 전교권을 드나드는 애들까지 다 그랬다.
어디서 주먹질 좀 하다 왔다는 소문이 파다한 축구부 권우영과, 반에 한 명씩은 꼭 인맥을 터놓은 발 넓은 남기혁까지 합세하니 이수화를 괴롭히던 놈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원래도 상위권이던 이수화의 성적은 안정적인 일상을 보낼수록 점점 더 좋아졌다. 늘 바짝 굳어 있던 전과는 달리 차츰 편안해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영은 내심 뿌듯해했다.
고태성은 이수화에게 유난히 살갑게 굴었다. 다른 애들을 대할 때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예상 밖이긴 했지만, 이러나저러나 긍정적인 결과였으므로 한시름 놓았다.
전과 다름없는 학교생활이 이어졌고,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다. 각종 시험과 모의고사, 기말고사까지 보고 나니 1년이 훌쩍 지나갔다. 운일동엔 다시 시린 겨울이 찾아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살던 아이들은 긴 겨울 방학을 맞았다.
우영은 방학이 싫었다. 아무 이유 없이도 매일 고태성을 볼 수 있던 일상에 핑곗거리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를 향한 감정은 조금도 마를 줄을 몰랐다. 세월에 따라 성장할수록 그릇된 욕망은 더욱더 짙어졌다.
열일곱. 남성의 성욕이 통계적으로 가장 왕성해지는 나이라고 했다. 그러니 곧 열여덟을 맞는 권우영이 고태성에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별생각 없이 감싸 오는 어깨동무에 아랫배가 뭉근해질 때, 어쩌다 스친 손가락에 가슴이 간질거릴 때, 눈앞에서 달싹이는 도톰한 입술을 꾹 눌러 보고 싶어질 때, 핏줄이 불거진 손등 위를 쓸어 보고 싶을 때. 눈, 코, 입, 귀, 목선, 팔뚝, 손가락, 흰 양말 위로 툭 불거진 복숭아뼈까지…….
서서히 그를 끌어들이는 늪은 차츰 더 깊고 녹진해졌다. 욕심 한 자락 낼 생각 없던 우영은 종종 참기 힘든 충동을 느끼곤 했다.
기다란 손가락을 꽉 쥐어 보고 싶었다. 언젠가처럼 그를 바짝 끌어안고 싶기도, 나아가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맞대어 보는 상상까지 했다.
떠올릴 때마다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살갗 위로 소름까지 돋아났다. 오랜 외사랑의 길에 이런저런 경험이 없지는 않았으나 고태성을 상대로 한 적은 없었다. 그건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파도처럼 덮쳐 오는 후폭풍에 허탈한 자괴까지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열병 같은 짝사랑도 끝내 자신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영은 툭하면 그를 떠올렸다.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결국 그뿐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몰래, 혼자 하는 일이었다.
상상은 횟수를 더할수록 짙어졌다. 샤워를 하다 말고도 그가 생각났다. 남기혁이 킬킬대며 보여 주던 동영상을 보다가도 고태성을 떠올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늘어졌다. 눈을 감은 고태성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였다.
고태성도, 고태성 또한 저와 같이…….
미친 짓이었다.
풋내 나고 순수했던 짝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농밀해졌다. 권우영은 고태성이 갖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
[202X년 02월 22일 AM 09:30]
“제발, 제발…….”
우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핸드폰 스크롤을 내렸다. 새해를 맞아 열여덟 이팔청춘이 된 그들에게 처음 닥쳐온 가장 중요한 일은 반 배정이었다.
운일 고등학교는 과별 성적대로 반을 섞어 나누는 체계다. 총 아홉 개의 반 중에 문과는 고작 네 개뿐이었다. 수학을 지독하게 싫어했던 우영은 문과를 지망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암산과 숫자에 능하던 고태성은 당연히 이과를 택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우영과 같은 문과를 선택했다. 수포자인 남기혁도 마찬가지였다.
잠도 많은 주제에 새벽같이 일어난 고태성의 전화로 막 깬 참이었다. 그의 반은 1반이라고 했다. 지난 1년 동안 우영은 수도 없이 깨달았다. 쉬는 시간 짬을 내 그를 잠깐잠깐 만나는 거론 턱없이 부족했다. 무조건 같은 반이 되어야 했다. 등수를 놓고 보면 가능한 일일 것 같긴 했으나, 혹시 모를 상황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 이번엔 진짜 같은 반 되어야 하는데. 2학년 1반. 2학년 1반. 제발. 제발. 속으로 염불을 외며 나X스 어플에 들어가 조회 버튼을 눌렀다.
우영의 눈동자가 하얀 화면 위를 빠르게 훑었다. 고작 이런 일에 우습게도 심장이 다 뛰었다.
[202X학년도 2학년]
[권우영] [1반]
“와씨!”
거칠게 손가락을 튕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기에서 막 승리한 선수처럼 함박웃음을 띤 채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미친. 같은 반이라니!
물끄러미 화면에 뜬 숫자를 바라본다. 벅찬 감격까지 따라 밀려왔다. 1년 내내 떨어져 감질나게 지냈더니 들뜬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신이 난 우영이 실실 웃으며 대화방을 켰다.
[09:35 ㅇㅑ야 1반 새끼들 모여봐라ㅋㅋㅋ (이모티콘)]
전송을 누르기가 무섭게 숫자 하나가 줄어들고, 바로 고태성에게 전화가 왔다. 우영은 실실 웃으며 통화를 연결했다.
-1반?
“어. 같은 반.”
-아……. 존나 다행이다.
한숨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우영은 괜스레 코끝을 문질렀다.
“새끼, 형이랑 같은 반 하니까 좋냐?”
-응. 또 떨어졌으면 자퇴할 뻔했잖아. 좆같아서.
“미친놈이세요?”
고태성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웃음소리를 들으며 우영 또한 웃었다. 막 잠에서 깨 찌뿌둥했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근래에 했던 고민 중에 가장 큰 일이 해결된 기분이었다.
“남기혁이랑 이수화는 확인했나? 들은 거 있어?”
-몰라, 알 게 뭐야. 씨발, 좀 떨어지면 안 되나…….
“야야. 그러지 좀 마라. 남기혁 새끼 삐지면 달래 주기 존나 힘들어. 이수화보다 소심한 놈이야, 그 새끼.”
-왜 달래 줘? 그냥 꺼지라고 해.
“시발, 무슨 말을 못 해요. 말을.”
전화기를 붙든 우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고태성과 같은 반이다. 왜인지 공부도 더 잘 되고, 시험도 더 잘 볼 것 같았다. 이대로 한국대까지도 문제없이 철썩 붙을 것만 같았다.
지긋지긋한 운일동에서 벗어나 명문대에 가자, 고태성과 함께.
우영의 첫 번째 인생 목표는 그것뿐이었다. 열여덟의 시작이 좋았다. 순조롭게 입시 발판을 딛고 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일 것만 같았다. 그야 고태성과 함께니 당연한 일이었다.
***
2학년이 되면서 운일 고등학교 교내엔 좀 더 구체적인 유명 인사들이 생겼다. 그 중심에 고태성과 권우영이 있었다. 둘은 늘 그랬듯 꼭 붙어 다녔다. 혼자 있어도 눈에 띄는 타입인데, 둘이니 더했다.
함께 복도를 걷기만 해도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을 때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배우 지망생이다, 아이돌 연습생이다, 알음알음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뒤에서 수군수군 흘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따금 모르는 여자애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들은 부끄러움이라곤 없는 얼굴로 뚫어지게 눈을 마주 보거나, 살살 웃으며 팔뚝을 살짝 잡는 등의 터치를 했다. 과거 초콜릿이나 쪽지 등을 수줍게 건네준 뒤 도망치듯 사라지던 중학생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였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영은 그저 능청스레 받아쳤다. 애당초 관심이 없었으니 제게 하는 행동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하나 사랑에 빠진 얼굴로 고태성을 대하는 여자를 지켜볼 때면, 슬금슬금 올라오는 짜증을 참기가 어려웠다. 고태성의 단호한 거절 뒤에도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숱하게 반복되다 보니 일종의 노이로제에 걸렸다. 매점 가는 길에도,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낯선 여자아이가 다가올 때면 우영은 저도 모르게 등을 빳빳이 굳혔다.
결 좋은 생머리, 아담한 체구, 유난히 디자인이 예쁜 교복과 곱게 칠한 화장까지. 고태성이 처음 만난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할까 봐 매번 안달이 났다. 학기 내내 그런 일들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열여덟, 당연히 이성에게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교내 어딜 가나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붙어 있는 커플들이 보였다. 3년 내내 분반임에도 그랬다. 가장 가까운 남기혁도 줄줄이 여자 친구를 사귀어댔다.
덧없는 초조는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고태성은 잘났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사귈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예쁜 여자 친구가 생길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 개 같은 일이 곧 닥쳐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도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그저 전과 다름없이 공부했고, 남는 시간엔 친구들과 함께했다. 걱정과 달리 이성을 사귀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왜일까. 도대체 어떤 타입을 좋아하기에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지? 잘난 만큼 눈이 지지리도 높은 걸까?
우영은 그간 고태성에게 다가오던 수많은 여자를 떠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취향이 궁금해졌다.
처진 눈매와 단발이 잘 어울리는 순하고 귀여운 인상?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붉은, 그런 섹시한 쪽이 타입이려나. 그도 아니면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청순한 여자?
취향은 어떨까. 연하? 동갑, 그것도 아니면 연상? 평소 성격을 유추해 보면 연하보다는 누나, 누나 하며 귀여움을 받는 연상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니지, 생각 외로 아이처럼 순하게 구는 연하가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오랜 친구처럼 야 태성아, 하며 털털하게 장난을 치는 여자도 잘 어울릴 듯했다.
생각의 늪에 잠겨 있던 우영이 탄식했다. 어느 타입의 여자를 옆에 갖다 놓아도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고태성이니까. 고태성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걸 다 커버하니까,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쓸데없이 크고, 투박하고, 예쁜 맛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권우영. 그 자신이었다.
어리숙한 질투에 분노하며 엇나간 감정을 에둘러 떠올릴 때와는 달랐다. 현실과 바짝 맞닿아 있던 상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졌다. 고태성 옆의 가느다랗고 아담한 예쁜 여자. 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상대를 상상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한 기분이었다.
“고태성.”
“응?”
“넌 여자 친구 안 만들어?”
“응.”
“왜?”
“왜 만들어야 하는데?”
순진무구하게 답해 오는 까만 눈동자에 우영의 말문이 막혔다.
“그거야……. 너 좋다는 여자애들 많으니까.”
눈가를 살짝 찡그린 우영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책상 위에 턱을 괸 고태성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밀도 높은 눈빛에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럼 너는?”
“뭐?”
“너도 너 좋다는 애들 많은데 안 만나잖아.”
“…….”
“어? 우영아. 너는 왜 안 만나는데.”
예상치 못하게 허를 찌르는 말에 우영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가 이런 질문을 제게 던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 나는.”
“응.”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생선 가시처럼 목구멍에 턱 걸렸다.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잡고 있던 샤프를 더 꽉 쥐었다. 공연히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른 우영이 입술 끝을 올려 씩 웃어 보였다.
“눈이 존-나 높은가 봐. 성에 안 차네?”
능청스레 실실 웃어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풀고 있던 문제집의 장을 넘겼다.
창문 틈 사이로 상앗빛 커튼이 휘날렸다. 유월의 끝자락, 따스한 기운이 완연한 바람 한 줄기가 우영의 귓가를 스쳤다.
김이 샌 듯 픽 웃어 보인 고태성이 책상 위에 양팔을 겹치고 엎드렸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물끄러미 우영을 올려다보았다.
“하긴, 예쁜 고태성만 보고 살았으니 네 눈도 높아졌을 만해.”
천연덕스러운 말에 피식 웃음이 샜다.
“또, 또 지랄이다.”
“왜, 아니야? 우리 학교에 나보다 예쁜 애 있어?”
진중한 눈빛과 상반되는 깜찍한 질문에 우영이 흘긋 시선을 내렸다. 와중에 답을 기다리는 심각한 얼굴이 새삼 귀엽게 보였다. 주책도 이런 주책이 따로 없었다.
“미친……. 예 예. 너 다 해 먹으세요.”
그러니 실실 웃음을 흘리는 수밖에 없다. 재수 없게도 자기 객관화 하나는 빠삭한 놈이었다.
“왜? 나 안 예뻐?”
말꼬리를 늘이며 웃는 모습에 고태성이 미간을 좁혔다. 기다란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아니이. 존나 예쁘지.”
“근데 말투가 왜 그래 우영아?”
“아, 또 뭐가.”
“반응이 왜 그러냐고. 응?”
상체를 일으킨 고태성의 손가락이 우영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우영이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입술 끝에는 미소를 매단 채였다.
“야! 하지 마. 나 점심 시간 끝나기 전에 이거 다 풀어야 돼.”
“씨발, 방금 존나 마음에 안 들었어. 다시 말해 봐.”
“아! 씨, 하지 말라고!”
푸흐, 웃음을 터뜨린 우영이 손을 내저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 고태성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주 연애를 해라, 연애를.”
혀를 차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남기혁이 보였다. 점심 메뉴가 맛없다더니 입 안 한가득 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아아. 이미 존-나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계시는걸요? 남자 1호, 남자 2호.”
옆에서 킬킬대는 놈은 남기혁과 중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던 박진우였다. 새로 배정된 2학년 1반에는 남기혁과 안면을 튼 놈들이 많았던 탓에, 원치 않게 무리가 늘어났다.
고태성, 권우영, 이수화, 남기혁. 그리고 박진우, 김진성, 유영재, 이진호. 총 여덟 명이었다. 난데없이 네 명이나 불어난 바람에 종종 이름마저 헷갈렸다. 한 번씩 말을 섞을 때면 명찰을 보고 얘기하곤 했다.
우영의 시선이 느리게 미끄러졌다. 그리고 박진우의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이수화에게 닿았다.
“야, 쵸파.”
“응?”
“이리 와 봐.”
생뚱맞은 부름에 이수화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손에는 초콜릿과 막대 사탕을 든 채였다. 언젠가부터 안경 대신 렌즈를 끼고 다니는 바람에 우영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모습도 더 도드라졌다.
“너 요새 좀 빠진 거 아니냐?”
그는 학교생활에 확실히 적응했는지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그러나 속내를 잘 알지도 못하는 시커먼 놈들 옆에 붙어 다니는 걸 보는 게 그다지 맘에 드는 광경은 아니었다. 맹해 빠진 탓에 또 괜히 저 없는 사이에 욕이나 먹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어딜 빨빨 싸돌아다녀.”
미간을 찡그린 우영이 눈을 치켜뜨자, 앞에 선 이수화가 푸스스 웃었다. 커다란 눈꼬리가 귀엽게 휘어졌다. 말간 미소에 우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쭈. 이제 대꾸 없이 웃을 줄도 아는 게 제법 기특했다.
“이거……. 먹어.”
고사리 같은 손이 우영의 책상 위에 두 개의 막대 사탕을 올려놓았다. 우영이 사탕을 집어 들었다. 포도 맛과 딸기 맛이었다.
“사 와도 꼭 저 같은 걸 사 오네.”
“잘 먹을게, 수화야.”
“으응.”
사탕을 집어 든 고태성이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곤, 볼록 튀어나온 볼로 살짝 미소를 짓는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하얀 막대가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우영은 곧 고개를 돌렸다.
***
매주 수요일은 야자 없는 날이다. 한 달에 한 번, 야자 없는 수요일에는 훈련이 없었다. 일종의 자유 시간이었다. 우영은 이날 새로 사귄 무리와 어울리며 간간이 팀을 짜 농구나 족구를 즐기곤 했다. 물론 공부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했다.
“야야. 이따 롤 내기, 햄버거 말고 떡볶이 어떰? 애들한테 파랑파랑 가자고 할까?”
우연히 맛을 알게 된 것은 피시방이었다. 성적에 그다지 관심 없는 박진우와 그 외 패거리들의 꼬드김 탓이다. 평상시 승리욕이 강한 그에게 안성맞춤인 종목이었다.
우영은 팀을 짜 전략적으로 승패를 가리는 MOBA 게임의 매력에 빠졌다. 작전과 각종 전술로 승리를 거둘 때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몇 번 하다 보니 슬슬 자신감도 붙었다. 축구보다 더 재미있는 건 처음이었다.
하여 훈련 없는 날엔 나머지 놈들과 종종 피시방에서 게임을 했다. 생전 그런 건 관심도 없을 것 같은 고태성도 아주 가끔 우영을 따라 피시방을 드나들었다. 그래 봐야 학원과 과외에 치여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잠깐이라도 함께 있으니 좋았다.
같이 하면 진짜 재밌을 텐데.
늘 탐탁지 않은 얼굴로 돌아서는 고태성을 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고태성이 조금만 덜 바빴다면 얼마나 좋을까. 옆자리에 앉아 손수 게임 플레이 방법을 가르쳐 주고, 같이 컵라면도 먹고, 웃고 떠들며 승리감에 취하고 싶었다.
재밌다고 느껴질수록 같이하고 싶단 생각만 든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걸 하고 싶은 건 당연했다.
그렇기에 오늘은 꽤 특별한 날이었다. 박진우 패거리들과 게임 내기를 하기로 한 날이자, 고태성까지 함께 놀기로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무려 일주일 전부터 고태성과 남기혁은 간신히 만든 핑계로 학원 한 타임을 뺐다. 이수화는 집안에 일이 있다며 학교를 나오질 않았다.
고태성과 피시방이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들떠 수업 내내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야, 나 주말에 수정이랑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저번에 산 스마일 반팔 입을까, 아니면 해골 브이넥 티 입을까? 뭐가 더 멋있어? 아, 바지는 면 반바지.”
핸드폰 카메라로 이리저리 저를 비춰 보던 남기혁이 호들갑을 떨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필터를 바라보던 고태성이 무심하게 답했다.
“까이기 싫으면 둘 다 갖다 버려.”
맞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우영도 그 옷을 보았다. 사귄 지 22일 되는 기념일을 위해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옷이라는데 구려도 그렇게 구릴 수가 없다. 하여간 패션 감각은 지지리도 없는 놈이었다.
책상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던 우영이 팔을 뻗어 남기혁의 어깨를 홱 끌어안았다.
“걔를 또 왜 만나는데.”
“악!”
“만나지 마. 나랑 만나. 나랑 연애해.”
우영이 능청스레 치근덕거렸다. 그는 언젠가부터 감정의 방향을 모두에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태성 때문에 이리저리 천연덕스럽게 굴던 것이 성격으로 굳어진 것이다.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과정은 길고 성가셨으나, 제법 유연하게 적응했다. 애당초 평소 성정이 능청스러웠던 탓이었다.
원래 그런 권우영. 원래 이런 권우영. 친구들 모두에게 집착하고, 좋아하는 권우영.
“미쳤냐?”
“응. 미쳤어. 기혁이한테 미쳤어.”
“으. 시발……. 권우영 이 새끼 요즘 외로운가 봐.”
남기혁이 어깨를 떨며 질색했다.
“미안한데 난 수정이밖에 없어. 고추 달린 놈은 사절임.”
“난 좋은데.”
그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댄 우영이 슬쩍 웃었다. 힐긋 시선을 들다 고태성과 눈이 마주친다. 기다란 눈매와 작게 찍힌 점을 응시하던 우영이 혀로 볼 안쪽을 꾹 눌렀다.
“왜.”
묻는 말에 고태성이 말없이 시선을 마주쳐 왔다. 까만 눈동자가 동글동글 예쁘기도 하다. 우영이 웃음기 머금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우리 둘이 사귈까?”
침묵을 지키던 고태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가 끝 모르게 깊고 잔잔했다. 또 숨이 막혀 왔다. 더 깊숙이 잠겨 허우적댈까, 우영은 웃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첫 교시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하교 시간이 찾아왔다. 부산하게 청소를 하고 가방을 챙기는 놈들 사이, 턱을 괸 우영은 손에 쥔 샤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곱게 뻗은 고태성의 손가락이 자판 위를 오가는 걸 떠올렸다. 그는 손가락이 참 예뻤고, 우영은 그의 손을 좋아했다. 보고 있으면 종종 깍지를 얽어 꽉 쥐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고는 했다.
게임을 처음 해 볼 그가 우왕좌왕하다 킬 당할 모습을 떠올리니 귀여워서 웃음이 샜다. 플레이 방법을 잘 모를 테니 친절하게 팁을 전수해 줄 생각이었다.
일단 옆자리에 앉히고 어떤 챔피언이 제일 좋은지 알려 줘야지. 아, 불X볶음면하고 짜X게티를 섞어 먹으면 존나 맛있다고도 알려 줄 거다. 편식은 심한 편이지만 애들 입맛이니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떠올릴수록 빨리 가고 싶었다.
“고태성! 너 부르는데?”
별안간 문 앞에 서 있던 김진성이 손짓했다. 모여 앉아 있던 남자아이들의 시선이 뒷문으로 향했다. 끄트머리에 알록달록한 실내화와 살랑이는 교복 치맛자락이 보였다.
순식간에 소란스럽던 사위가 뚝 멈췄다. 자리에 앉아 있던 고태성이 시선을 들었다. 누군지도 묻지 않고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우영의 눈동자가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고태성의 뒷모습을 따라 굴러갔다.
“졸라 예쁨. 쟤 누구지?”
“…….”
“와씨, 분위기 존나 심상치 않은데.”
헐레벌떡 뛰어온 김진성이 너스레를 떨었다.
“뭔데! 명찰 못 봤어? 이름?”
교실 뒤편에서 빗자루질하던 박진우마저 뛰어와 김진성을 채근했다.
“어. 안 달고 있던데?”
“까비. 이따 오면 물어보자. 걔 아님? 박주희? 모델 준비한다는 애?”
“몰라. 긴 갈색 머리에 눈 졸라 크던데. 쌍꺼풀 있고.”
저도 모르게 눈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우영은 괜스레 책상 위에 얹어 놓은 주먹을 쥐었다 폈기를 반복했다.
별일 아닐 것이다. 몇 년간 숱한 고백 속에서도 여자 친구 한 번 사귄 적 없던 놈이었다. 오늘은 2학년에 올라온 후 거의 처음으로 고태성과 학교 밖에서 노는 날이었다. 쓸데없는 잡념으로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생각과는 달리 쩍 벌린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화장실 가는 척이라도 해 볼까. 그대로 따라 나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괜히 너스레를 떨며 방해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질투가 벌겋게 차올랐다. 부러 입매를 비스듬히 올린 우영이 고개를 까닥였다.
“아이씨. 왜 이렇게 고태성 노리는 것들이 많아.”
“와, 씨. 고태성 뭔데?”
남기혁이 뒤늦게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우영의 책상에 털썩 걸터앉은 그가 뒷문 쪽으로 고개를 쭉 빼 들었다.
“존나 이쁘던데. 분위기 뭐냐?”
“나도 몰라.”
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리며 핸드폰 게임을 켰다. 형형색색으로 나열된 전투기 종류를 선택하고 다음 버튼을 눌렀다. 제 마음처럼 시뻘건 전투기가 이리저리 총알을 쏘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 그야 늘 그랬듯 거절하고 금세 대수롭지 않게 돌아올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딴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권우영.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찌질한 질투 따위 할 필요 없다고.
“뭐, 또 고백이라도 받나 보지.”
“야. 아냐, 아냐! 들어오면서 보니까 아는 사이 같던데? 여자애 눈에 하트가 졸라 뿅뿅이었음. 미친. 고태성이 그렇게 웃어 주는 것도 처음 봤다. 뒤뜰로 가는 것 같던데?”
남기혁이 눈치 없이 떠들었다. 우영의 눈가가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뭐. 연애질이라도 하려나 보네.”
의도치 않게 낮게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불현듯 느려진 로딩 화면을 손가락으로 괜히 꾹꾹 눌러 댔다. 할머니가 입학 선물로 사 주신 핸드폰은 벌써 성능이 뒤처지고 있었다.
“뭐야, 권우영. 표정 존나…….”
고개를 숙인 남기혁이 우영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봤다. 순간 아차, 현실을 파악한다. 부랴부랴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아! 고태성 내 건데 씨발. 다 연애질하면 누구랑 노냐고……. 우리 남기혁이라도 자주 까여서 다행이지.”
우렁찬 목소리가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왔다.
“뭐래. 나도 좋다는 애들 존나 많거든요?”
버럭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기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볼래? 야, 빨리 봐 봐. 수정이랑 썸 타기 전에 얘도 나 좋다고 난리였어.”
그가 고양이 수염이 그려진 여자애의 사진을 눈앞에 들이댔다. 그러나 눈길도 주지 않은 우영은 총알을 뿌려 대는 비행기만 주시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고 있었다.
좆같다. 게임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머릿속에선 고태성과 이름 모를 여자애의 모습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야야, 가자! 영재랑 진호는 준피씨 먼저 가 있대!”
어느새 다가온 박진우가 가방을 챙겼다. 그 말에 남기혁이 신이 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다리를 쫙 벌린 채 의자에 늘어지게 기대 있던 우영은 가로로 쥔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먼저 가 있어. 고태성 오면 데리고 갈게.”
화면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린다. 냉랭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길쭉한 다리는 덜덜거리며 초조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오께이! 빨리 와라!”
“어! 우영! 떡볶이 쏠 준비 하고 와라!”
싱글벙글한 남기혁과 박진우 패거리가 투덕거리며 교실을 나섰다. 우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진즉에 부서진 비행기가 초라한 흑백 화면 속에 갇혀 있었다.
‘Defeat. 다음 기회에!’
[다시하기]
재도전 버튼 위로 엄지를 올려놓은 채, 우영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 기회에. 다음 기회에. 다음 기회에.
다음 기회가, 오기나 할까.
째깍째깍,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억겁 같은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10분, 15분, 30분…….
텅 빈 교실에는 결국 우영 홀로 남았다. 작게 벌린 잇새로 낮은 숨이 터진다. 축 늘어진 빨래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린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씨발……. 뭔 짓을 처하길래 여태 안 와.
짜증이 났다. 입 안을 혀로 볼록하게 누르며 천장을 응시하다 고개를 툭 떨궜다.
시야에 손에 쥔 핸드폰이 눈에 들어온다. 구질구질하게 굴기 싫어 참았지만 더는 한계였다. 이대로라면 저뿐만 아니라 애들도 뭐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굳이 변명을 덧붙였다.
끝내 다이얼을 켠 우영이 고태성의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였다.
[태성: 난 오늘 못 갈 것 같아. 17:01]
메시지 알림이 떴다.
‘못 갈 것 같아.’
다섯 글자에 딱딱한 시선이 박혔다.
“아……. 씹.”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 우영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이 핸드폰을 부술 듯 꽉 쥐었다. 뜨거운 감정이 훅 솟구쳤다.
처음이었다. 그가 먼저 저와의 약속을 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게 된 지 고작 몇 달도 되지 않았을 여자애 하나 때문에, 그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버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자존심이 상했다.
약속이잖아. 나랑 먼저 한 약속이잖아, 고태성. 들키면 작살 날 각오하고 학원도 겨우 뺀 주제에. 그런 주제에, 고작 여자 때문에 그걸 깨? 그렇게 걔가 그렇게 중요해? 나보다 더?
화마처럼 덮쳐 오는 배신감에 손이 떨렸다. 종일 떠올리던 상상이 초라하게 뭉그러졌다. 막연하게 덧그려 보던 것들이 차츰 현실로 닥쳐오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던 우영이 눈을 감았다. 열 오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짙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를 낼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진정해야 했다.
[좋은시간보내고있냐?잘놀다와라ㅎㅎ]
신중하게 자판을 누르던 손가락이 뚝 멎었다. 물끄러미 제가 쓴 문장을 응시하던 우영이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왜??무슨일인데??]
쓰다 말고 아랫입술을 질근 씹었다.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씨발배신자새끼이쓰레기같은개씨팔씹새끼야]
……이건. 정말로 아니었다.
“하, 씨발…….”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분노가 층층이 쌓인 숨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전화를 걸어 화를 내고 싶었다. 좆같은 짓 그만하고 오라고, 쓸데없이 여자 같은 거 만나지 말라며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벌컥벌컥 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떠올리는 찰나, 불쾌한 낯빛의 고태성이 보였다. 그는 본 적도 없는 냉랭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한 줌의 경멸을 담은 시선이 우영을 아프게 짓눌렀다.
“아…….”
신음한 우영이 뜨끈해진 눈가를 찌푸렸다. 역하게 고인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휘발된 모난 마음이 시꺼먼 매연을 콸콸 뿜어냈다. 하나 알면서도 불을 끄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질식해 버리고 싶을 만큼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
미로 속에서 헤매던 손가락이 더듬더듬 진심을 찾아 눌렀다. 당당하게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처지가 죽도록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그냥 오면 안 돼?]
지워 내지 못한 글자 뒤로 커서가 깜박였다. 차마 전송을 누르지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던 우영이 눈을 감았다. 잇새로 낮은 한숨이 새 나갔다.
“하…….”
상체를 숙여 무릎에 대고 턱을 괴었다가, 이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포기가 어렵다. 그를 향한 집착의 윤곽은 뚜렷해지고만 있었다. 견고하게 쌓아 온 다짐은 같잖은 시샘에 쉽게도 흩날렸다. 자각을 거듭할수록 돌아오는 건 비참한 패배뿐이었다.
우영은 답을 보내지 않은 채 대화창을 껐다. 지난 3년간 나름의 방법으로 강고하게 다져진 자신이었다. 솟구치는 파고에 휩쓸려 실수를 저지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완전히 엇나갈 뻔했던 시행착오는 진즉에 겪어 보았다.
[17:07 나일생겨서먼저간다]
남기혁의 이름을 찾아 누르곤 툭툭 메시지를 입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우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남기혁의 전화였다.
“어.”
-뭐냐? 갑자기 뭔 소리?
“할 일 생겼어.”
귀찮은 듯 툭 내뱉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간만에 기분이 무척 저조했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게임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 그런 게 어딨어!
남기혁이 수화기 너머로 바락바락 악을 썼다. 귀 따가운 비명에 우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존나 어떻게 학원 짼 건데! 고태성은 그렇다 치고 넌 갑자기 왜 가냐! 씨발!
“나 빼고 니들끼리 해. 어차피 그래야 인원 맞잖아.”
담담한 답에 남기혁이 기가 찬 듯 헛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빡빡한 집안 탓에 학원 째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을 테니, 저렇게 난리 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답답한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아씨, 그래도 와! 와서 구경해 그냥!
“싫어. 귀찮아.”
-와! 이건 아니지! 씹, 졸라 배신자 새끼!
분을 삭이지 못한 목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인상을 찡그린 우영이 핸드폰을 꽉 말아 쥐었다. 머리가 찡하게 울린다. 지금 제일 좆같은 건 자신이었다.
“됐고, 끊는다.”
-고태성 빠져서 그러냐?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얼굴이 굳었다. 짧은 정적을 지키던 우영이 책상다리를 퍽 발로 찼다. 힘에 밀린 의자가 우당탕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씨발, 뭐래냐.”
물끄러미 넘어진 의자를 응시하던 우영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었다. 수화기 너머론 여전히 분한 듯 씩씩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맞잖아! 시발, 넌 고태성 없으면 못 사냐?
“뭐?”
우뚝, 걸음을 멈춘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고태성 없으면 못사냐고 미친놈아! 갑자기 나만 빼고 그러는 게 어딨어! 아!
그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가시 돋친 말에 속이 턱 얹혔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세요…….”
우영은 저도 모르게 이를 꽉 물었다가 뗐다.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바꿔 쥐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이러면 안 돼, 티 내면 안 돼. 권우영…….
“고태성 빠져서 인원 안 맞으니까 니들끼리 하라는 거지, 기혁아. 안 그래도 오늘 할머니가 일찍 오라 했었어. ……씨발, 다음에 하자, 다음에. 오늘만 살고 뒤질 거냐?”
우영은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누그러진 말투와 함께 겨우 비뚜름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악! 존나 짜증 나! 씨발, 끊어!
끝까지 성질부리는 목소리 뒤로 통화가 뚝 끊겼다. 종료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미지근한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우영이 목을 졸라 오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냈다. 숨구멍은 느슨해졌으나 내딛는 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고태성 빠져서 그래?’
분노만 가득했던 남기혁의 일침이 조롱 섞인 비아냥으로 변질되었다.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 왔다.
‘시발, 넌 고태성 없으면 못 사냐?’
그게 뭐. 어쩌라고…….
누구도 듣지 못할 답을 지껄이며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벅찬 감정을 인내하려 했다. 아니, 인내하는 법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고태성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었고, 여자 친구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르는 애가 불러냈고, 잠시 따라 나갔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불현듯 다시 깨달은 제 처지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찐따 새끼. 말 한마디 속 시원히 못 하는 주제에 무슨 심술을 부리겠다고.
요란한 기복이 지긋지긋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이 좆같은 기분은 사람을 늘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난 감정은 옅어지기는커녕 겹겹이 쌓여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우뚝,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춰 선 우영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티를 안 내야 하는데. 티를.
착잡한 마음속에 툭 떨궜던 고개를 들고는, 남기혁이 있을 피시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딸랑. 문을 밀자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텁텁한 공기 사이로 들어선 우영이 느릿느릿 주변을 훑었다. 익숙한 뒤통수 여러 개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 보였다.
긴 숨을 내뱉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조용히 남기혁의 의자 뒤에 멈춰 섰다. 상체를 숙인 우영이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자기.”
“아 씨발! 깜짝이야!”
키보드를 확 밀쳐 내며 진저리친다. 겁 많은 남기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예상했던 반응에 우영이 큭큭 웃었다. 우영을 발견한 남기혁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냐? 안 온다더니?”
화를 낸 게 멋쩍은지 당황한 기색의 남기혁이 되물었다. 천성이 착한 놈이라 민망해하는 게 보였다. 비어 있는 의자를 빼낸 우영이 털썩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아, 고태성 핑계 좀 대려고 했더니, 누가 아주 개-지랄을 하셔서.”
“뭔 핑계? 뭐, 뭔데?”
“너 존나 잘 짖더라. 귀 터지는 줄 알았네.”
“무슨 핑계냐니까?”
집요한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우영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됐고. 너도 나 좋아하냐? 거의 울던데.”
“아, 지랄!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말을 하다 마냐고!”
“뭐, 말하면 아세요?”
괜스레 구미가 당길 법한 말을 던지며 의자를 앞으로 끌어 앉았다. 이성에 관한 일은 놈들의 제일 큰 관심사였다. 먹이를 던지면 덥석 물 것이 훤했다.
“뭔데! 너도 여자야?”
“몰라.”
“뭐, 진짜야? 누군데?”
게임을 정지시킨 남기혁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했다.
“있어, 새끼야.”
“아, 누군데! 졸라 비밀 만들지 마라! 치사하게.”
단순한 반응에 우영이 웃었다. 역시는 역시다. 그간 연락처를 받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니니 적당하게 둘러 핑계를 대면 될 일이었다. 꿍얼거리는 남기혁의 뒤로 헤드폰을 귀 옆으로 넘긴 박진우가 소리쳤다. 시선은 모니터로 향한 채였다.
“어, 김유희 아님? 권우영 소개해 달라고 했다는 애?”
“헐. 진심?”
남기혁의 눈이 커졌다. 우영은 답 없이 입가만 씩 올렸다.
“미친. 맞나 보네. 이 새끼 여자 만나려고 고태성 핑계 댔네. 와……. 조온나 약아 빠진 놈. 여자 때문에 나라 팔아먹을 놈. 이완용 같은 새끼야!”
“시발, 그건 너무 간 거 아니냐.”
우영이 눈가를 일그러뜨리자, 그가 우영의 팔뚝을 잡고는 마구 흔들었다.
“와씨. 진짜 너 그렇게 살지 마라. 어? 나 존나 열 받을 뻔. 그럼 걔랑 약속 깨고 온 거? 진짜? 나 때문에? 진심? 권우영 용자였네?”
“그래, 이 울보 새끼야. 알면 앞으로 형한테 잘해라.”
어깨를 으쓱해 보인 우영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행히 대강 고비를 넘긴 듯했다. 저도 저지만 참으로 단순한 놈이었다.
다시 싱글벙글해진 남기혁이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우스를 쥐고 딸각거리던 우영이 책상 위의 핸드폰을 흘끔 응시했다. 고요한 핸드폰엔 연락은커녕 잠잠하기만 했다.
하,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삼킨다. 그대로 화면을 뒤집어엎었다.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
피시방에서 약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이 빠지는 바람에 인원이 맞지 않아 홀로 랜덤 게임을 했다. 대신에 패배한 남기혁 팀에게 떡볶이를 실컷 얻어먹었다.
플레이 도중 고태성에게 메시지가 왔다. 한참 영혼의 한타 중이었건만, 진동이 울리는 순간 빠르게 핸드폰을 집어 미리 보기 알림을 확인했다.
‘어디 갔어?’, ‘뭐 해?’
단순한 물음이었다. 알림창을 누르지 않고 껐다. 안읽씹이었다.
떡볶이를 먹는 중에는 전화가 왔다. 빠르게 음량 버튼을 눌러 무음으로 만들곤 받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기대했던 하루는 이미 다 끝나 버렸다. 짜증이 나서 그와 말도 섞기 싫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권우영. 고태성이 너 뭐 하냐는데?”
떡볶이를 우물거리며 핸드폰을 만지던 남기혁이 말했다.
“하긴 뭘 해. 떡볶이 먹잖아.”
그를 힐긋 바라본 우영이 콜라를 마시며 툭 내뱉었다. 남기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핸드폰을 만졌다. 고태성에게 답장하는 듯했으나 그의 소식 따위 하나도 듣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우영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래간만에 기대했던 훈련 없는 날은 시시하게 막을 내렸다. 눈을 감자 부서진 비행기와 흑백 화면이 어른거렸다. 다시 하기, 다음 기회에. 품은 적 없던 희망마저 으스러진다. 제게 그런 행운은 없을 것 같았다.
지긋지긋하다, 권우영.
읊조리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