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 권우영! 이 새끼 있어? 이지혜랑 잤대?”
책상에 엎드려 자던 우영이 소란스러운 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조급하게 뛰어온 남기혁이 우영의 등을 마구 흔들었다.
“권우여엉! 너 이지혜랑 잤냐고 시발놈아!”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우영이 부스스 눈을 떴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눈꺼풀을 열자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흔들렸다.
“아……. 뭔 개소리야. 또.”
점심시간을 틈타 잠깐 잠들었을 뿐인데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쯤 뜬 눈으로 느리게 주변을 훑자, 교실 뒤편에 모여 떠들던 놈들이 소란스레 킬킬거렸다.
“야야야야, 이 새끼 지금 모른 척한다. 둘이 밤에 이지혜 집으로 들어가는 거 김민재가 봤다는데?”
“시발, 권우영 능력자 새끼. 여자 관심 없는 척하면서 존나 후리고 다녀. 인정?”
열여덟. 슬슬 풍선처럼 부푸는 소문에 면역이 생길 때도 됐건만, 무릇 학교생활에 별다른 재미가 없는 놈들에겐 남 얘기를 씹고 뜯는 것이 제일 즐거운 일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좋겠다.”
잡음 속에서 고태성이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사물함에 느슨하게 기대어 농구공을 툭, 툭 튕기는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도 우영이랑 자고 싶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아, 씨발!”
“미친 새끼!”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주변 놈들이 과장되게 킬킬거렸다. 거친 단어들을 허공에 흩뿌리며 희희낙락 웃기 바빴다.
“우리 우영이……. 존나 큰데.”
퉁, 퉁. 느리게 공을 튕기는 소리가 둔탁했다.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킨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우영에게로 찬찬히 다가왔다.
담담한 얼굴로 헛소리하는 그를 보며 우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뭔 씨발, 그냥 데려다준 게 다야.”
잠이 덜 깬 눈으로 입매를 말아 올리곤,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우영의 고등학교는 남녀 분반이다. 간혹 교내를 걸어 다닐 때면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녀도 그중 하나였다.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데다 가는 길이 같았다. 무거운 책과 화통 등을 한 아름 지고 힘들게 끙끙대기에 집 앞까지 들어 준 것뿐이었다.
“나도 데려다주라.”
우영의 앞에 선 고태성이 농구공을 툭 던졌다. 느닷없이 날아든 공을 자연스레 받아든 우영이 픽 웃었다.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음 사이에서 우영과 고태성 둘만 우뚝 남았다.
“줄 서시던가요. 미친놈아.”
까닥, 손목의 스냅으로 가볍게 튕긴 공이 정확히 고태성의 복부로 향했다. 턱, 안정적으로 공을 받아 든 그가 웃으며 턱을 비스듬히 들었다. 반쯤 감긴 듯 보이는 눈매와 눈가에 찍힌 점이 오늘따라 더 느른하게 빛났다.
“네, 오빠.”
농구공을 들고 우영의 옆자리에 털썩 앉은 그가 가슴께로 늘어지게 등을 기대 왔다. 턱 아래에서 저를 물끄러미 보는 고태성을 보며 우영이 짧게 웃었다. 덩치는 산만 한 주제에 치대는 걸 보면 아주 구미호가 따로 없었다.
“권우영.”
부름에 시선을 내리자 도톰한 입술이 달싹였다. 문득 짧은 틈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우영은 괜스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잤어?”
노곤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영이 다시 눈길을 내렸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가느스름하게 눈을 좁혔다. 입술 끝에 맺힌 옅은 미소는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우 같은 새끼.
창밖으로 흘러들어 온 한 줄기 바람에는 쾌청한 여름의 냄새가 났다. 언뜻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향이 코끝에 스몄다. 고태성의 향기였다.
우영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창문 한가운데 파랗게 흔들거리는 잎사귀를 가만가만 응시하다, 이내 입술을 열었다.
“아니.”
난 너랑 자고 싶은데.
***
우영의 할머니는 조그마한 약방이 딸린 운일동 전원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지내던 곳이었다. 비개발 노른자 땅으로 불리던 운일동은 오랜 추진 끝에 우영이 유치원에 입학할 때쯤 재개발이 완료되었다.
선대부터 운일동의 소문난 유지였던 우영의 집안은, 할머니가 물려받은 농토 덕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보상을 받았다. 하나 우영의 집은 통장에 돈이 입금된 이후에도 여전히 낡고 오래된 전원주택에 머물렀다. 작고 한갓진 한약방의 간판도 내리지 않은 채로.
우영의 어머니는 미혼의 몸으로 임신 후 운일동에 돌아왔다. 그리고 추진된 보상 문제로 할머니와 몇 날 며칠을 끊임없이 다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다툼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았다. 어린 우영은 카랑카랑한 고함과 눈물 속에서 눈을 뜨고 감는 나날 속에서 한참을 살았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어느 겨울밤, 그녀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마도 할머니가 받아 놓았던 보상금 대부분을 들고서.
남겨진 건 할머니와 우영, 약방과 낡은 전원주택이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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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면 운일동은 언덕 하나를 가로질러 빛이 뜨고 진다. 창 너머로 푸르른 한강이 멋들어지게 보이는 ‘리버파크캐슬’은 손에 꼽히는 고급 주택 단지였다. 부와 명예를 쥔 상류층들만 거주할 수 있는 신축 부촌은 호가의 웃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만큼 인기가 좋았다.
하여 어린 우영은 그곳에 사는 놈들이 싫었다. 개발, 보상금, 리버파크……. 낡은 주택이 방음 따위 될 리 없었으므로 밤낮없이 귀가 터지도록 듣던 말들이었다. 자연스레 모든 원망의 화살은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다 싫어.
열 살쯤의 우영은 과격하고 불퉁했다. 주택, 아파트, 월세, 전세, 임대. 그런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나이에 그는 반 아이들의 조롱 대상이 되었다. 리버캐슬에 살지 않는 이는 우영뿐이었으므로 화제의 중심도 늘 그가 되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너, 너네 약초방 할매 거지 맞잖아!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 악!”
“거지한테 죽어 볼래?”
하나 타고난 정신은 그런 것 따위에 무너질 만큼 나약하진 않았다. 귓가로 흘러든 매질은 꽉 쥔 주먹으로 갚아 주었다.
우영이 팔을 걷고 나서면 빈정거리던 놈들도 풀 바른 듯 입을 딱 붙이곤 했다. 또래보다 발육이 좋았던 탓이었다. 이따금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도와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먹 몇 번 휘두르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래서인지 우영이 속한 반에는 내내 따돌림이 없었다. 가끔 분을 이기지 못해 치고받고 피라도 흘릴 때면, 할머니는 뜨겁게 달궈 놓은 방 한 칸에서 묘한 향이 나는 약을 발라 주었다.
그녀는 무뚝뚝했으나 늘 따뜻한 손길로 우영을 어루만졌다. 냉랭한 침묵 속에서도 우영은 그녀가 저를 달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교 후 잠들 때까지 학원이고 과외고 들들 볶이다 잠드는 놈들보단 자신이 백배 나았다.
따뜻한 할머니와 평화로운 집.
초등생 우영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데없이 벼락이 떨어지듯 문제가 생겼다. 학교에서 미술 숙제로 아빠가 타는 차를 그려 오라고 한 것이다. 우영에겐 곤란한 일이었다. 그에겐 아빠가 없었다. 그러니 없는 아빠가 타는 차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심통이 난 우영은 하교 후 놀이터에 처박혔다.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 봐야 애꿎은 할머니에게 성만 낼 것이 분명했다. 짜증이 났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네에 앉아 한참을 툭툭 땅만 걷어차던 찰나였다.
“우영아.”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처음 보는 아이가 서 있었다.
“왜.”
시선을 든 우영이 다시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애가 제 이름을 알든 말든 관심 없었다. 머릿속은 자동차 그림 위로 꺼멓게 엉켜 버린 낙서뿐이었다.
“우리 미술 숙제 같이할래?”
“…….”
“차, 우리 아빠도 차 없거든.”
“…….”
“근데 집에 차 사진 많아. 미니카 모형도 있어.”
그네를 멈춘 우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저보다 한참은 작아 보이는 키, 왜소한 체구, 희멀건 얼굴과 그늘진 속눈썹, 눈을 뜰 때 또렷해지는 얇은 쌍꺼풀 아래로 그린 듯 작은 점이 찍혀 있었다.
어스름한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그네 앞에 선 그 애의 얼굴은 마치 주황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교실에서 숱하게 치고받던 놈들과는 달리 단아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회피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선뜻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와 같은 처지에 처한 놈이란 생각에 동질감이 들어서였다.
“넌 누군데?”
괜스레 바닥을 찬 우영이 거칠게 발을 디뎠다. 녹슨 그네가 끼익, 끼익 흔들렸다. 그 말에 아이의 도톰한 입술 끝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나 태성이. 고태성. 우리 같은 반인데.”
“…….”
“1학년이랑, 3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
빽빽대는 또래들과는 다른 나긋한 말투가 우영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빠에게 차가 없다는 말 또한 제법 구미를 당겼다.
그래서였을까. 처음이었다.
이름도 모르던 낯선 아이의 집을 쫄래쫄래 따라간 것은.
우영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고태성. 입 안에 동그랗게 맴도는 글자를 삼키며 터벅터벅, 투박한 걸음으로.
처음으로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기분은 묘하게 설레고 들떴다. 하여 오밀조밀한 골목을 지나, 눈앞에 드러난 리버캐슬의 호화로운 정문을 맞닥뜨렸을 땐, 어린 마음에 감당하기 벅찬 배신감이 몰려왔다.
“씹……. 장난치냐?”
우영은 상기된 얼굴로 도끼눈을 떴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고태성은 담담한 얼굴을 했다.
“왜?”
“여기 살면서 아빠 차가 왜 없는데?”
제대로 엿을 먹었다는 생각에 절로 욕이 나왔다. 참지 못하고 주먹이라도 내지를까 봐 겨우 꽉 움켜쥐었다. 열이 받았지만 곱상한 얼굴 위에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야.”
“구라치지 마! 내가 속을 줄 알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생처음 겪는 배신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이는 우영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했다.
“아빠가 없으니까.”
예기치 못한 답에 우영이 입을 다물었다.
“뭐?”
툭 내뱉은 우영은 가만히 그를 주시했다.
“아빠 없어, 나. 엄마만 있어.”
“…….”
“근데……. 지금은 엄마도 없어. 미국 가셔서 다음 주에 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아빠가 없어서 아빠 차가 없다니. 말이 안 되지만 말이 되는 말이었다.
아이는 음울한 얼굴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유리알 같은 까만 동공이 금방이라도 울 듯이 반질거렸다.
우영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뽀얀 얼굴에 드리운 그늘에, 괜한 미안함이 스멀스멀 몰려온 탓이었다. 저 또한 아빠가 없는 신세인 건 잠시 잊어버린 채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다시금 차분히 시선을 들었다.
“같이 숙제하자. 응?”
우영은 조심스레 제 손목을 쥐어 오는 하얀 손가락을 응시했다. 은근한 손길과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맛살이 좁아졌다. 확 패 주고 가도 모자랄 판에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아이씨…….
왜인지 맞닿은 손목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시선을 들어 다시 그 음울한 눈매를 마주하는 순간, 우영은 저도 모르게 쳇,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손길에 따라 못 이기는 척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태성.
권우영 인생에 처음 만들어 본 친구였다.
***
처음 발을 디뎌 본 리버파크 캐슬은 정문부터 호화찬란했다.
화단에 예쁘게 핀 꽃, 푸릇푸릇한 나무, 한 땀씩 정성스레 엮어 놓은 듯한 담벼락과 훤칠한 벚나무에선 꽃잎이 하늘하늘 눈처럼 떨어졌다. 큼지막한 타운하우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만화 속에서나 보던 인형 마을 같았다.
길을 따라 걷던 아이가 멈춰 섰다. 제 키보다 서너 배는 높은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니 커다란 철문이 덜컥 열렸다.
찡그린 얼굴로 주변을 찬찬히 훑던 우영은 그를 따라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당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도 한참을 걷고 난 후에야 그의 집이 드러났다.
현관문이 열리자 아주머니 한 분이 살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집에 없다고 했으니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인 듯했다. 뻣뻣하게 인사한 우영이 아이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친구는 고사하고 다른 사람의 집에 발을 들여 본 것이 처음이라 어색하기만 했다.
안은 바깥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가구들은 한눈에도 번쩍번쩍 값이 나가 보이는 것들뿐이었고, 거실은 우영의 집 전체만 했다. 너무 넓어 그런지 휑한 느낌마저 났다.
그의 방은 2층이었다. 먼저 계단을 뛰어 올라간 그가 방문을 열어 주었다.
커다란 창문과 상아색 커튼이 눈에 들어온다.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랗고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커다란 책장에는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수납함 위로는 자동차 피규어와 각종 로봇이 줄을 서 있었다.
우영의 방보다 세 배, 아니 네 배는 커 보이는 넓은 공간은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희고 고운 아이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우영을 앉혀 놓은 아이는 잠시 기다리라며 밖으로 나갔다. 허리를 세우고 앉은 우영이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방을 구경하는 동안, 아이는 금세 주스와 과자 등을 쟁반에 쌓아 직접 들고 왔다.
“이거 먹고 하자.”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가 부산하게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서랍에서 스케치북과 크레용 등을 한 아름 꺼내 품에 안고 와선 주섬주섬 늘어놨다.
크레용, 사인펜, 고체 물감, 72색 파스텔과 열댓 개의 붓까지. 미술실이 따로 없었다.
우영은 멀뚱히 앉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제게 친근하게 굴었던 이가 없었던 탓에 앉은 자리가 어색하고 민망했다. 괜히 따라왔나 싶은 생각에 가만히 무릎 위의 주먹을 말아 쥐자, 조용히 옆자리에 앉은 그가 우영을 빤히 응시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는 곧 고사리 같은 하얀 손으로 바스락바스락 봉지를 까고, 쿠키를 집어 들었다. 곧 우영의 눈앞에 동그란 초콜릿 쿠키가 내밀렸다.
“아.”
“…….”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여전히 입술 앞에 쿠키를 내민 아이는 새카만 눈동자로 미동 없이 우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하라니까?”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우영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딱딱하게 굳었다. 아이는 꾹 다물린 입술 앞에서 힘주어 쿠키를 든 손가락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먹어 봐, 맛있어.”
코끝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우영은 마치 소동물을 감시하는 맹수처럼 그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온 딱딱한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얼른 우영의 턱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와 남은 쿠키 조각을 제 입에 털어 넣은 그가 씩 웃었다.
우영은 쓰레기라도 집어 먹은 얼굴로 쿠키를 우물거렸다. 혀끝에 맴도는 달콤한 과자를 씹을 때마다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간식으로 요기를 한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영은 아이가 늘어놓은 자동차 중 하나를 골랐다. 투박하고 멋있는 오프로드용 검정 지프였다.
크레용으로 대충 슥슥 사각형을 그리던 우영이 그의 그림을 흘깃 응시했다. 그는 천장이 뚫린 납작한 스포츠카를 그리고 있었다. 강렬한 붉은색이 돋보이는 아이의 그림은 초등학생이 그린 것 치고 아주 섬세했다. 초라한 제 것과 비교되는 것 같아 팔뚝으로 스케치북을 가렸다.
“나는 미술 학원 다녀.”
우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아이가 귀신같이 말했다.
어쩌라고.
대꾸 없이 속으로 생각만 한 우영은 묵묵히 하얀 도화지를 채웠다.
숙제만 끝낸 후 금방 집에 가려고 했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과자며 주스며 입에 계속 들이대던 아이는 그림을 다 그린 후에도 저녁을 먹고 가라며 채근했다. 각종 고기반찬과 맛있는 메뉴들을 줄줄 읊던 그는 우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자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왜인지 식은땀이 났다.
한 번만이다. 우영은 하는 수 없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간다고 전하자 화들짝 놀라는 그녀를 뒤로하고, 아주머니가 차려 준 성대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그림을 챙겨 집에 가려는 우영을 아이는 또 붙들었다. 새로 나온 거라며 형형색색의 만화책을 눈앞에 들이댔다.
평소 그다지 본 적 없던 만화책은 재미있었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둘 사이로 책장 넘기는 소리만 사그락거렸다. 책 속에 코를 박고 흥미롭게 빠져들던 우영이 5분만, 10분만, 하는 사이에 또 시간은 훌쩍 지나 버렸다.
“우영아.”
난데없는 부름에 우영이 시선을 들었다. 바닥에 턱을 괸 고태성이 고개를 까닥이며 우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숙제도 하고, 밥도 같이 먹었으니까…….”
“어.”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하는 거야?”
다시 시선을 만화책에 둔 우영은 별 답 없이 책장을 넘겼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따라왔으나 딱히 친구 같은 걸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리버캐슬에 사는 놈이라면 더더욱.
“나 친구 하나도 없는데.”
시무룩한 아이의 말에도 우영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시선은 에너지를 마구 쏴 대는 만화 속 주인공에게 가 있었으나, 빼곡히 적힌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았다.
“응? 친구 하자.”
고요히 덧붙이는 말에 우영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책장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끄트머리가 작게 구겨졌다.
“우영아.”
“…….”
“우리 친구 하는 거 맞아?”
이어지는 묵묵부답과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우영의 반응에도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는 소맷자락까지 살짝 쥐고는 흔들기 시작했다.
“응?”
“…….”
“우리 친구 사이야?”
“…….”
“응?”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린 우영이 만화책을 탁 덮었다.
“아이씨.”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아이를 홱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뒷머리를 벅벅 긁은 우영이 대강 소리쳤다.
“아. 친구, 친구 해!”
원하는 답을 듣고 나서야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응. 좋아. 친구 하자.”
어딘가 간질거리는 말에 우영은 미련 없이 그림을 챙겼다. 그대로 등을 돌려 거칠게 그의 집을 나섰으나, 아이는 잘 가라는 인사만 건넬 뿐,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 후부터 우영은 고태성과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고태성이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화장실, 방과 후, 학교에 나가지 않는 주말까지 끈질기게 우영을 따라다녔다. 열한 살의 고태성은 아주 집요한 성격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들이 사는 운일동에 배정된 중학교에 함께 입학했다. 우영은 이때 두 번째로 친구를 사귀었다.
남기혁은 고태성의 옆집에 사는 놈이었다. 둘의 어머니는 오랜 친구였고, 교류가 잦았다. 둘은 하교 후 과외부터 학원까지 모든 일정을 함께했다. 고태성과 붙어 다니기 시작한 우영이 또 다른 리버캐슬 놈과 친해진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까무잡잡하고 작은 남기혁은 보이는 것과는 달리 유하고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우영 또한 그가 마음에 들었다. 둘 사이에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무리에 속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셋은 어느 순간부터 늘 함께였다. 고슴도치 같았던 우영은 이들과 가까워지며 조금씩 성격이 바뀌었다. 반항심과 선입견을 버리고 차츰 둥글고 유해졌다. 늘 사납게 굳어 있던 눈매는 졸업 후 중학생이 되던 무렵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하여 우영은 이제 재수 없는 리버캐슬 놈들과도 곧잘 놀았다. 별일 없어도 잘 웃었고 무리 없이 친구도 잘 사귀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하교 후에는 일정이 갈렸다. 고태성과 남기혁은 학원을 가야 했고, 방과 후에도 별다른 일정이 없던 우영은 선생님의 추천으로 축구부에 들었다.
우영은 또래보다 체격이 좋고 달리기도 잘했다. 배우는 것마다 흡수력도 빨랐다.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운일중학교 축구팀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3학년이 돼서는 주장 완장도 찼다. 팽팽한 경기 내내 승부를 판가름할 만한 골도 뻥뻥 잘 차 넣어 친구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고태성은 우영과 같이 운동부에 들고 싶어 했다. 하나 전교권에서 노는 그가 각종 과외와 미술 학원을 끊고 우영과 함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쉬운 대로 그는 종종 하교 후 저녁 시간을 빼, 빵이나 우유를 들고 앉아 우영이 공 차는 모습을 구경하고는 했다.
우영은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고태성과 함께였다. 아침에 무슨 반찬으로 밥을 먹었는지,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시험 문제는 몇 개를 틀렸고, 몇 점을 받았는지 서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인생 전반에 고태성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도 당연한 절차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견고하게 다져진 시간 속에서 우영이 처음 기이한 감정을 느낀 건 중학교 2학년, 고태성과 친구가 된 이후 정확히 4년이 흐른 열다섯 살 때였다.
“미친. 고태성 고백받는 거 아냐? 저거 봐.”
껌을 씹으며 킬킬 웃는 남기혁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눈에 들어온 건 교문 앞에 멀거니 서 있는 고태성과 수줍게 고개를 숙인 여자애였다. 입고 있는 교복이 달랐다. 같은 학교가 아니었다.
고백. 여자 친구.
두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솟구친 분노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야!”
주먹을 꽉 쥔 우영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도 모르게 씩씩대며 고함을 쳐 놓곤,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보는 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뻘겋게 뒤집힌 머릿속은 혼잡하기만 했다.
화가 났다.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지 몰랐다. 입 밖으로 딱히 꺼낼 말도 없었다.
우영은 그대로 멈춰 섰다. 이제 저보다 키가 커진 고태성을 분한 듯 노려보다가, 그대로 홱 스쳐 걸어갔다.
그는 씩씩대며 집으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고태성은 따라오지 않았다. 하긴 정신이 나간 놈이 아니고서야, 예쁜 여자애를 앞에 두고 패악을 부리는 시커먼 놈을 따라올 리 없었다.
씨발…….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화가 났다.
방구석에 처박힌 우영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 분한 눈물을 흘렸다.
짜증 나, 죽여 버릴 거야. 개새끼, 존나 싫어…….
각종 욕을 지껄이며 고태성을 원망했다.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그저 쏟아지는 감정을 뱉어 낼 뿐이었다.
“우영아, 어제 왜 혼자 갔어?”
그러나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난 고태성은 여전히 다정했다. 그는 여전히 우영의 일상에 관해 물어 왔고, 여전히 우영의 삶을 차지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영은 이성이 뚝 끊어졌던 어제의 기이한 경험을 얘기하지 않았다.
이건 전부 고태성 탓이었다. 텅 비어 있던 욕망의 길을 터놓은 것도, 그것이 그를 향해 흐르게 만든 것도 전부 고태성이 한 짓이었다.
그러니까, 친구를 향한 집착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영에게 고태성은 이미 반쯤 걸어간 하굣길에 마주친 소낙비였다. 다시 돌아갈 수도, 금세 집까지 뛰어갈 수도 없어 흠뻑 젖어 버릴 수밖에 없는 드센 빗줄기. 가방에서 급히 꺼낼 우산조차 없던 우영에겐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
1. 고태성은 착하다. 싸가지도 없다.
2. 고태성은 이상한 부분에서 빡쳐 한다. 완전 싸이코. (+또라이)
3. 고태성은 다정하다. 존나 여우 새끼!
4. 고태성은 공부를 잘한다. 인기가 많다. 재수 없다. 짜증 난다.
5. 고태성은 알 수가 없다. 고태성은, 고태성은 나를…….
「좋아―」
끄적이던 우영의 손이 노트 위에서 우뚝 멈췄다.
「좋아한다? 좋아해?」
샤프로 꾹꾹 눌러쓴 물음표 위로 슥슥 줄을 그어 지웠다. 옆 칸에 온점을 찍어 봤다.
「좋아한다. 좋아해.」
덧붙이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친구로.」
친구.
구불구불 휘갈겨 쓴 글씨 위로 툭 이마를 떨궜다. 자각하지 못한 괴로움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아, 씨발…….”
깜박, 깜박. 엎드린 우영의 등 위로 노란 책상 등이 힘없이 점멸했다.
***
우영은 그 이후로도 그 기이한 기분을 몇 번 더 겪었다. 밸런타인데이에 옆 반 김수정이 고태성에게 주고 간 초콜릿을 발견했을 때였다. 제가 받은 초콜릿이 두 개 더 많았음에도 기분이 더러웠다.
왜. 고태성이 받은 건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이라서?
괜한 시기에 제가 받은 초콜릿이 더 맛있을 거라며 한 통을 우적우적 다 씹어 먹었다. 며칠 새에 다섯 상자를 다 씹어 삼키고 난 후로 한동안 초콜릿은 입도 대지 않았다.
수업 중 시시덕대며 쪽지를 주고받는 고태성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하라는 필기는 안 하고 떠드는 짓거리가 꼴도 보기 싫어 교과서에 얼굴을 처박았다.
왜. 저렇게 공부하고 성적은 만년 1등인 게 배알이 꼴려서?
고태성은 좋은 유전자를 타고났다. 게다가 부잣집 도련님이기까지 했다. 집에서 학원이다 과외다 모조리 등 떠밀어 주니 학교 수업을 저렇게 뒷전으로 밀 수도 있는 거였다.
그래서 기분이 좆같은 거야. 저 안일한 새끼.
배식 담당이 고태성에게만 초코우유를 하나 더 건넬 때, 책상에 엎드린 애의 등에 덮인 마이 명찰에서 고태성 세 글자를 발견했을 때, 시답잖은 일로 다른 놈들에게 쓸데없이 환하게 웃어 줄 때, 지나가던 여자애들 무리에서 고태성의 이름이 들려올 때.
고태성, 고태성, 고태성…… 고태성!
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제는 더 갖다 붙일 이유도 부족해졌다. 자글자글 끓는 심장이 타들어 가다 못해 휘발되고 있었다.
열다섯의 여름. 반 애들은 시시각각 건들면 터질 것 같은 권우영이 무섭다며 섣불리 말도 걸지 않았다.
“좋아하는 거 아냐?”
하복 셔츠를 손에 쥔 채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던 남기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미간을 좁힌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그거 질투잖아.”
그는 대수롭잖게 말하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렸다.
남기혁은 셋 중 유일하게 여자 친구를 몇 번 사귀어 본 놈이었다. 간간이 고백을 받던 고태성과 우영과는 달리 딱히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탈하고 호쾌한 성격 탓인지 주변에 여자 친구들이 많았다.
“질투하면 좋아하는 거야?”
“좋으니까 질투하는 거지.”
“씨발, 그런 게 어딨어.”
“얼렐레.”
파랗게 물든 혓바닥을 죽 내민 남기혁이 질색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 둘러 얘기했으나 결론적으로 ‘누군가’에게 남이 엮일 때 짜증이 난단 소리였다. 질투 말고는 딱히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권우영에게 관심 가는 여자가 생긴 것이다!
“누구한테 그렇게 빠지셨어어.”
우영의 어깨에 턱을 걸친 남기혁이 능청스레 말꼬리를 늘렸다.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우영이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내 얘기 아닌데.”
질투라니, 좋아한다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누군데에.”
“내 얘기 아니야.”
“누군데에.”
“아이씨, 내 얘기 아니라고 좀……!”
와락 찡그린 우영이 징그럽게 들러붙는 그를 떨어낼 때였다.
“권우영-.”
깊게 목을 울리는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태성이다. 그는 늘 말꼬리를 느릿느릿 늘이는 버릇이 있었다. 변성기로 걸걸대는 다른 놈들과는 달리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남기혁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야, 고태성! 권우영이 지금 나한테 연애 상, 웁!”
“아. 닥쳐!”
우악스레 그의 입을 틀어막은 우영은 한껏 인상을 굳혔다. ‘뒤진다.’ 입 모양만으로 달싹이자, 살벌한 눈빛에 남기혁이 입을 꽉 다물었다. 우영의 심기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기혁아, 형이 까까 사 줄게. 가자.”
금세 표정을 바꾼 우영이 대강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걸어오는 고태성을 쳐다봤다.
“고태성, 매점 갈래?”
잠시 멈춰 선 채 가만히 둘을 주시하던 고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이 가.”
눈짓을 해 보인 우영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쭉쭉 빠는 남기혁을 흘겼다. 애써 웃고 있었으나 심란해진 속은 타들어 갔다.
친구, 질투. 친구, 질투.
무언가 잘못되었다. 멋대로 이리저리 튀어 나가던 감정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고태성에게 느끼는 감정이 친구로서의 집착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라니.
절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교실에 돌아온 우영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난 이후 공을 차다가도 헛발질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하루를 정신없이 보냈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우영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교과서와 문제집을 꺼냈다. 내일은 영어 단어 시험이 있었다.
머리가 커 가며 생긴 목표는 하나였다. 한국대학교에 입학해 지긋지긋한 운일동을 벗어나는 것. 아직 대학 입시를 생각하긴 이른 나이였으나 착실히 준비해야 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업.
리버캐슬 언덕 아래의 낡은 주택을 떠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러나 한국대는 손꼽는 일류대학이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적 하나만으로 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우영은 예체능을 택했다. 담임은 축구부에서 활약한 경력이 있으니 실기를 잘 보면 체육과는 어렵지 않게 붙을 수 있을 거라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우영은 제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깟 조그마한 약방에서 할머니의 벌이가 얼마나 될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여 따로 입시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하고 싶다고 조르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수업 시간에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집에 와서는 예습과 복습을 반복했다.
훈련이나 경기가 있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방바닥에 누워 뻐근한 다리를 풀어 가며 숙어를 외웠다. 가끔 고태성이 가져다주는 기출문제집이나, 학원 수업에서 꼼꼼히 필기해 놓은 노트들이 그렇게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괜한 자존심에 거절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 그럴 처지도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뛰어야 한다. 경쟁자들과는 애당초 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했다. 그러므로 남보다 더 시간을 아껴 써야 했다. 쪼개고, 또 쪼개야 했다.
“어피-어.”
에이, 피, 피, 이, 에이, 알.
“나타나다, 보이기 시작하다…….”
방 안 책상에 앉아 영어 단어를 꾹꾹 눌러쓰던 우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책상에 팔을 댄 채로 앞머리를 꽉 움켜쥐자,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나타나다. 보이다. 나타나다. 보이다. 나타나다…….
하아. 신경질적인 한숨과 함께 우영은 샤프를 집어 던졌다. 남기혁의 폭탄 발언 이후, 무슨 짓을 해도 고태성이 떠오른다. 참으로 좆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오늘의 상식iN]
제목: 고민입니다. 제가 남자인데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요?ㅎ
글쓴이: 비공개입니다.
제목대로에여 저랑 친한 친구가 있는데 친하게지낸건 초등학생때부터였구요 걔가 여자애랑 놀거나 고백받거나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낼때마다 짜증나여ㅡㅡ 그냥 짜증이 아니고 존나 답답하고 화가나요;; 생각해보니까 질투하는거 맞는거같은데; 이게 좋아하는건지 잘모르겟어요..제가 여자친구도 사겨본적이 없어서;
근데 걔가 워낙 생긴것도 예쁘게 생겼고 어릴땐 저보다 훨씬 키도 작았는데 요새 좀 크긴햇는데.. 하여튼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거든요 그리고 성격도 다정하고(가끔 좀 미친놈 같을 때도 있어요) 웃을 때 귀엽고 둘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하고 숨만 쉬어도 재밌고 편하고 좋아요;; 이게 친구끼리의 질투일까여? 아니면 진짜 조아하는거에요? 형님들 제발 별점 마니 걸어놓을게요!!!! 저심각하니까 빠른답변 부탁드려요 댓글은 꼭 달게요ㅠ
[답글 6개]
└ㅇㅇ게이
└마지막에 써있네 재밌고 “좋아요”ㅋㅋ
└삐빅. 사랑입니다. 파이팅~
└사랑에 빠지셨군요ㅎ 고백해봐요.
└당신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나랑 사귀자ㅋ
사랑이 뭔데…….
포털 사이트의 댓글들을 살피는 우영의 까만 눈동자가 부산스레 움직였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니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하지 않을까.
사춘기 허세에 찌들어 친구의 일상까지 손에 쥐려는 정신 이상자. 제 생각대로 안 되는 게 싫은 성격 파탄자. 이상한 놈. 또라이.
내심 걱정했으나 돌아온 것은 남기혁과 같은 말들뿐이다. 뒤바뀐 세상은 생각보다 편견이 없었다.
‘└사랑에 빠지셨군요ㅎ 고백해봐요.’
물끄러미 글자를 읽던 우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애 처음 만든 친구라서. 친구라곤 쥐뿔 한 명도 없던 권우영한테 처음으로 소속감을 준 놈이라서. 소유욕, 질투, 시기, 집착, 그 모든 감정을 알려 준 놈이라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고 사랑이라니.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다.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부풀어 가는 심란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고태성, 고태성, 고태성.
입 안에 맴도는 세 글자를 곱씹어 보고, 나긋하게 제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를 되새겨 보았다. 떠올리기가 무섭게 심장이 울렁거렸다.
아.
우영은 다시 책상에 이마를 툭 떨궜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잔상들을 꾸역꾸역 밀어 두고, 켜켜이 쌓아 놓은 머릿속 책장의 정리를 끝낸 찰나,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좋아한다.
고태성을, 권우영이.
불안정한 마음을 속속들이 헤집던 그는 끝내 패기를 들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했다. 열다섯 우영은 제 굴복을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마음 한 자락쯤 자각했다 하여 달라질 건 없었다. 이깟 어설픈 감정에 고태성을 멀리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때의 우영은 잠시라도 그가 시야에 없으면 눈알 굴리기 바쁜 사람이었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잖아?
하여 우영은 ‘좋아한다’의 정의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자와 남자가 사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고태성은 남자였고, 저 또한 고추 달린 놈이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더듬어 볼 가치도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고태성과 사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별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손만 뻗으면 닿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도 매번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쉬지 않고 서로의 일과를 교환했다. 늘 함께 웃고 떠들었다. 고태성에겐 권우영이 첫 번째였다. 우영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친한 친구.
그거면 충분했다.
***
고태성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한 이후에도 전과 다름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아침잠이 없는 할머니 덕에 어릴 적부터 새벽같이 기상하던 우영은 늘 수업 시간보다 한 시간 더 일찍 등교했다. 그래야 했다. 자신은 남들보다 시간이 두 배는 더 필요했으니까. 아무도 없는 고요한 교실 안에서 홀로 하는 공부는 집중력 향상에도 좋았다.
그러나 이른 등교를 친구들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게 싫었다. 잠이 많은 고태성과 남기혁은 늘 느지막이 등교하곤 했으니 들킬 일도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별것 아닌 비밀은 금세 밝혀졌다. 집 앞에 기사까지 대동해 저를 기다리던 고태성을 발견한 날이었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왈칵 화를 냈다.
허름한 골목, 낡은 주택가와 번쩍번쩍 빛이 나는 그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몰랐다. 그냥 싫었다.
차 타기를 거절한 뒤로 태성은 늘 우영의 집 앞까지 걸어왔다. 걸어서 30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으나, 마음이 불편했다. 고태성은 기사가 운전해 주는 번쩍번쩍한 차를 타고 편히 등교해야 하는 놈이었으니까.
생각과는 별개로 단둘이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좋았다. 아침 등교는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아침에도 눈이 번쩍번쩍 떠졌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흐르는 무더운 여름이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추운 겨울에는 그가 저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착잡했다.
하여 너무 추운 날이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고태성이 추위를 많이 탔기 때문이었다.
“우영아, 너무 추워.”
중학교 3학년. 방학과 졸업식을 앞둔 겨울은 한없이 추웠다. 어느새 훌쩍훌쩍 자란 고태성은 초등학교 때 반에서 키가 제일 컸던 우영보다 무려 한 뼘이나 더 커졌다.
훌쩍 큰 키와 더불어 떡 벌어진 어깨가 직각을 이뤘다. 문득문득 손에 잡히는 살갗도 단단했다. 미술 학원이나 다니는 주제에 체육 특기생인 우영보다 몸이 탄탄했다. 그것이 괘씸하게 느껴질 때마다 우영은 팔굽혀펴기를 했다.
“우영. 안 추워?”
어깨를 움츠린 고태성이 우영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아이씨, 영하 이십 돈데 안 춥겠냐. 개 추워. 존나 추워.”
정류장에 선 우영이 양 팔뚝을 비벼 댔다.
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한겨울이었다. 뉴스에선 날씨가 이례적인 최저 온도를 찍었다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아무리 패딩과 목도리로 무장했어도 춥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우영을 보며 고태성이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붙어 있으면 덜 추워.”
자연스레 뻗어 나간 손이 우영의 팔뚝을 감싸 끌어당겼다.
“나 손 뜨거운데. 잡아 줄까?”
그가 나직이 물었다. 하얀 입김과 대조되는 붉은 입술이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굳은 듯 얼어붙어 있던 우영이 시선을 홱 내렸다.
“아니.”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툭 차고는, 금세 표정 관리를 했다.
이제 이런 일엔 익숙했다. 고태성은 자각 없이 끼를 부리는 데에 타고났다. 어떻게든 적응해야 했으므로 그럴 때마다 되려 더 천연스럽게 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네 패딩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
고개를 쳐든 우영이 장난스레 킬킬대자 고태성이 눈을 치켜떴다. 우영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어깨로 그의 가슴팍을 툭 밀었다.
“좀 벌려 봐. 자기.”
능청스러운 말에 고태성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덩달아 웃음을 터뜨린 우영이 대수롭잖게 도로 끝을 주시했다. 하마터면 모른 척 잡아 버릴 뻔한 손가락은 주머니 속으로 꽉 말아 쥐었다.
“아, 버스 왜 이렇게 안 오냐. 존나 춥네.”
달아오른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옆에서 투둑, 단추 끄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영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미친…….”
이번엔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고태성이 패딩을 양옆으로 활짝 벌리고 있었다. 네이비색 니트 조끼와 흰 와이셔츠 칼라가 드러났다.
“왜.”
그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아래로 까닥, 턱짓했다. 담담한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짧은 정적 끝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졌다.
“또라이냐?”
“네가 벌려 달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고태성이 우영을 따라 느슨하게 웃었다.
눈이 쌓인 희뿌연 길에 우뚝 선 그가 하염없이 빛을 뿜어 댔다. 현기증이 났다. 멀미라도 하는 듯 심장이 또 울렁거렸다. 애써 입매를 쭉 끌어 올린 우영이 담담하게 시선을 돌렸다.
“지랄 말고 닫으세요, 추워.”
속으론 패딩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단단한 허리를 꽉 끌어안는 상상을 했다.
***
졸업식이 훌쩍 다가왔다. 재학 내내 전교 1등을 도맡았던 고태성은 강단에 나가 몇 개의 상장과 트로피를 받았다. 어느새 백팔십을 훌쩍 넘는 커다란 키가 든든하기도 했다. 멀찍이서 우뚝 솟은 고태성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우영은 혼자 뿌듯해했다.
졸업이라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고생했다는 교장의 인사말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교가를 들을 땐 묘한 설렘에 기분이 들떴다.
우영의 할머니는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남기혁도 누나들과 화기애애 사진 찍기 바빴다. 그러나 고태성은 혼자였다. 해외에 있는 어머니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아저씨 하나가 꽃을 내밀었으나, 고태성은 대수롭지 않게 그를 보내 버렸다.
하여 셋은 진짜 가족처럼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는 인파 속에서 찾아온 이라곤 할머니뿐인 둘의 졸업식은 단출하기만 했다. 고태성에게는 미안할 일이지만 특별한 날을 함께 보낼 수 있어 좋았다.
“자, 하나, 두울, 셋!”
꽃을 한 아름 든 둘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핸드폰 카메라지만 선명하게 잘 나왔다.
밝게 웃는 고태성과 꽃.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우영은 사진을 한 번 더 힐끔 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등학교는 거리순으로 배정되었다. 운일중학교와 마찬가지로 운일고등학교 또한 대부분 리버캐슬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무늬만 운일동에 사는 우영 또한 운일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우영은 처음으로 운일동에 살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제 주제에 고태성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셋은 전부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어쩌면 고등학교도 같은 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영은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하나 기대와는 달리 배정표에는 남기혁과 같은 3반이 떴고, 고태성은 1반에 배정되었다. 좆같았다.
담임과 상담 끝에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축구부에 들었다. 딱히 축구 선수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명문대를 가기 위해 제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축구 외에 다른 종목들은 돈이 많이 들었다. 필요한 건 유니폼이나 축구화 정도가 다인 운동부에서 노력한다면 입시에 보탬이 될 것이다.
체력도 좋고, 체격도 좋았다. 지난 몇 해간 운일중학교에서 쌓아 온 성적도 있었으니 입부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우영은 중학교 때보다 더 바빠졌다. 사 교시까지만 수업을 듣고, 고된 훈련과 학교별 리그를 뛰었다. 학교에서 고태성과 마주칠 수 있는 시간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이었다. 수업 내내 간간이 훔쳐보던 얼굴도 보질 못하니 영 힘이 나질 않았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표정 관리에 힘을 써야 했다. 그의 양옆으로 득실득실 선 시커먼 놈들이 꼴도 보기 싫어서였다. 매번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함께 있기만 해도 고태성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예상했던 일이었다. 모두 고태성의 옆자리를 갖고 싶어 했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떠받들어 주었다. 인기가 많다는 말로는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타고난 아우라가 그를 빛냈다. 중학교 3년 내내 우영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았던 건 순전히 고태성의 노력 덕분이었다.
고태성이 자신을 ‘친구로서’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받아들여야 함을 알면서도 기분이 저조한 건 숨길 수 없었다.
남기혁이 아니라 고태성이 같은 반이 돼야 했는데. 옆에서 종알거리는 그를 보면 한숨만 푹푹 나왔다.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여전히 우영은 새벽같이 집을 나섰고, 고태성과 함께 등교했다. 전보다 가까워진 학교는 걸어서 겨우 15분 거리였으나, 함께 걷는 그 짧은 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도착해 일찌감치 문제집을 펼칠 때면 그는 얌전히 우영을 지켜보다 갔다. 전에는 매번 놀아 달라며 방해하곤 하더니 이제 조금 철이 좀 든 듯했다. 집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으나 억지로 교과서를 덮다 슬쩍슬쩍 스치던 손이 그립기도 했다.
그가 떠나면 사 교시 내내 수업에만 집중했다. 점심을 먹은 뒤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찼고, 집에 돌아가서는 복습과 예습을 반복했다. 고태성보다 작아진 키와 그의 단단한 몸통이 떠오를 때면 물구나무를 서거나 팔굽혀펴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쳇바퀴처럼 도는 삶 덕에 다른 친구들을 사귈 새도 없었다. 정확히는 사는 게 바빠 사귈 생각이 없었다.
필요할 때만 눈을 마주치고 말을 건넸다. 편하게 말을 튼 놈들은 축구부원들뿐이었고, 그마저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놈이 없었다. 원체 타고난 성격이 주변에 무심한 편이었다. 단 하나, 고태성만 제외하고. 그를 변화시켰던 건 오로지 고태성이었다.
하여 우영은 중간고사가 끝난 후에도 남기혁을 제외한 반 아이들의 이름조차 잘 몰랐다. 남기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가 없어도 알아서 잘 몰려다녔다.
입학 때만 해도 추운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벚꽃이 지고 따스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막 석식이 시작된 시간이었다. 드르륵, 연습 경기를 마친 우영이 교실 문을 열었다. 깜박하고 놓고 온 한국사 교과서 때문이었다. 오늘치 복습 분량이었다.
아, 존나 찝찝하네. 구시렁거리며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입고 있는 흰 유니폼이 땀에 젖어 불쾌했다. 학교에도 공용 샤워실이 있긴 했으나, 집이 코앞이었기에 늘 가서 씻곤 했다.
고개를 좌우로 뻗으며 걸음을 내딛는데, 사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이질적인 분위기에 시선을 든 우영의 눈동자가 뱀처럼 주변을 훑었다. 교실 뒤편 구석 에어컨 앞에 등을 돌리고 선 애들이 보였다.
우영의 눈길이 찬찬히 내려갔다. 놈들의 발아래에 쭈그려 앉은 놈이 보였다. 무슨 상황인지는 안 봐도 훤했다. 하여간 개짓거리를 하는 놈들은 나이를 처먹어도 변함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딱 질색하던 부류들이었다.
인상을 찡그린 우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머리칼을 대강 헝클어뜨리며 터벅터벅 걸어가 그들 뒤에 멈춰 섰다. 우영은 이런 놈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야, 나와 봐.”
축구화 한 켤레를 든 손을 휘적거리자, 둥그렇게 모여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우영에게로 향했다. 고태성보단 작아도 그의 키 또한 백팔십이었다. 꾸준히 운동해 온 몸이니 체격 또한 도드라졌다.
“비키라고. 안 들려?”
낮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놈들이 얼떨떨하게 길을 내줬다. 쭈그려 앉은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야. 일어나.”
“…….”
“일어나라고.”
강압적인 어조에 아이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서도 우영의 가슴께에 겨우 오는 키였다.
한눈에도 작고 약해 보이는 놈이었다. 뭘 뿌려 놨는지 색이 옅은 머리칼은 젖어 있었다. 쓰고 있는 안경에는 금까지 가 있었다. 흘긋 시선을 내리니 ‘이수화’라는 명찰이 보였다.
우영이 낮게 혀를 찼다.
“안경은 왜 깨고 지랄들이세요…….”
나무라는 말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니들이 다시 사 줄 거냐?”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수선한 시선만 자꾸 오갔다.
쌍꺼풀 없는 무쌍의 눈매가 주변 놈들을 매섭게 훑었다. 괴롭힘당하는 건 혼자 참을 수 있어도, 안경이 깨지면 부모의 돈을 주고 새로 사야 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만큼 좆같은 일도 없었다. 생각하니 열이 확 뻗쳤다.
“사 줄 거냐고, 씹새야.”
그중 한 명에게 축구화를 든 손을 확 추어올렸다. 갑작스러운 위협에 이름 모를 놈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미간을 좁힌 우영이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야. 이거 얼마야.”
“…….”
“안경 얼마냐고. 이수화.”
이수화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낯선 이에게서 제 이름이 불릴 줄 모른 탓이다. 하나 길게 찢어진 냉한 눈매가 무서웠다. 한껏 웅크린 그가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이시, 십…… 육만 원.”
우영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쉬었다. 무슨 안경이 이십육만 원씩이나 하냐며 속으로 질색했다.
찌푸린 채 금이 간 안경을 응시하던 우영이 멀뚱히 선 놈들을 찬찬히 훑었다.
“김정호, 박지환……. 아, 비켜 봐, 하민준, 조현우.”
툭, 툭, 한 명 한 명의 가슴께를 쳐 가며 중얼거렸다. 가벼운 손짓에도 아이들의 몸이 뒤로 조금씩 밀렸다. 잔뜩 짜증이 난 얼굴들이었으나, 위압적인 태도에 모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일까지 이십육만 원 걷어 와라.”
우영이 사물함 위에 축구화를 턱, 올려놓았다. 유니폼 반바지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싹 다 일러바치기 전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이수화의 턱을 망설임 없이 쥐고 들어 올렸다. 찰칵, 소리와 함께 희고 동그란 얼굴과 젖은 머리, 깨진 안경이 화면에 담겼다. 쯔쯔, 혀를 찬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대로 목을 뒤로 물리며 팔을 위로 쭉 빼 든다. 이수화를 중심으로 뒤에선 아이들의 전체 샷을 한 번 더 찍었다. 선명하게 잘 나왔다. 우영은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는 축구화를 집어 들었다.
“나 그냥 한 말 아니다.”
대수롭잖게 중얼거리며 제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으차, 쭈그려 앉아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검정 백팩 안에 대강 욱여넣고는 한쪽 어깨에 걸쳤다.
경기 중에 태클이 잘못 들어간 탓에 허벅지가 쓸려 뻐근했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할머니 표 수제 연고를 좀 발라야 할듯했다.
뚜벅뚜벅 뒷문을 향해 걸어가던 우영이 걸음을 멈췄다. 눈치만 오가는 정적 속에서 뒤로 힐긋 고개를 돌렸다.
“이수화. 안 와?”
짧게 시선을 주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입학한 지 반년 만에 처음 보는 아이의 이름을 잘도 불러 댔다.
뒤에서 후다닥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 제 옆으로 찰싹 붙은 정수리가 보인다. 우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옆을 졸졸 따라오는 놈을 마뜩잖은 눈길로 보았다.
에휴, 씨발…….
그리고 드르륵, 뒷문을 여는 순간, 고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뭐냐.”
생각지 못한 얼굴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조끼와 넥타이, 목 끝까지 깔끔하게 채운 셔츠 깃이 보였다. 그는 이제 막 교실을 나서던 참이었는지 어깨에 검정 백팩을 단정하게 메고 있었다.
오늘 또 볼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반가운 마음에 괜히 멋쩍어져 코끝을 찡그렸다.
“학원 안 갔어?”
굳어 있는 이수화의 팔을 잡아 끌어내곤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드르륵,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응. 지나가는데 보이길래 인사하러 왔지.”
이수화를 스친 시선이 다시 우영에게로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인 우영이 축구화를 든 손으로 땀이 맺힌 이마를 슥슥 닦았다. 운동이 막 끝난 후에는 고태성과 만남을 피하는 편이었다. 흐트러진 얼굴은 물론이고 유니폼에 밴 땀 냄새가 날 것 같아 싫었기 때문이었다. 의식하니 갑자기 제 땀 냄새가 훅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이씨. 우영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땀에 전 모습만 아니었다면 교문 밖까지 같이 갔을 텐데. 고태성에게는 조금도 추레한 꼴을 보이기 싫었다.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어, 잘 다녀와. 먼저 간다?”
급히 이수화의 팔뚝을 붙들고 아쉬운 마음을 억눌렀다.
“걔는 누군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얘?”
“응.”
제 옆에선 이수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고태성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닷없는 물음에 우영은 이수화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이수화.”
“그게 누군데?”
표정 변화 없는 고태성이 가만히 우영을 응시했다. 기다란 눈매 아래 콕 찍힌 점이 오늘따라 싸한 인상을 풍겼다. 말문이 막힌 우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 또한 이수화를 오늘 처음 본 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게다가 본인을 눈앞에 두고 하기엔 이상한 질문이었다.
우영은 다시 이수화의 팔을 붙들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고태성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누구긴 누구야. 보면 모르냐? 우리 반이지.”
우영은 덤덤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니 땀 냄새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짧지만 잔뜩 흐트러져 있을 머리도 신경이 쓰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 새끼야. 간다.”
그를 뒤로한 채 손을 휘적거렸다. 발걸음이 미묘하게 빨라졌다. 그러나 고태성 또한 더는 우영을 붙잡지 않았다.
복도 끝 화장실로 향하는 동안 이수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두기는 신경 쓰여 데리고 나왔건만 풀 죽어 있는 것이 영 찜찜했다.
반에 이런 놈이 있었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하나 도드라지는 특징 없이 평범하다. 유난히 존재감이 없을 만도 했다.
어릴 적부터 우영은 따돌림에 예민했다. 부모의 부로 우열을 나누려는 리버캐슬 놈들에게 신물이 난 탓이다. 중학생이 되고 고태성과 어울리며 차츰 잊고 지냈건만, 입시 준비에도 바쁜 고등학생 주제에 아직도 이런 걸 즐기는 놈들이 있다니 한심했다.
화장실에 도착한 우영이 세면대 앞에 섰다.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손을 씻다 말고 문득 시선을 든 그가 거울 속 이수화를 응시했다. 그는 뭘 묻힌 건지 모를 머리를 푹 숙인 채 움츠리고 있었다.
“뭐 하세요, 머리라도 대강 감지?”
“…….”
“그러고 야자 할 거냐?”
불퉁한 말에 이수화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수전을 틀고 허리를 숙이며 고분고분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뽑아낸 티슈로 손을 닦던 우영은 그제야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백칠십 초반쯤이나 될 법한 작은 키, 뽀얗고 하얀 피부에 왜소한 체구, 가느다란 팔뚝, 손가락.
……남자 새끼 맞나.
저러니 아무나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 거다. 우영 또한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골격이 아니었다면 진즉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약한 것들만 골라 괴롭히는 놈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가를 찌푸린 우영이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졌다.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정적 속에서 물소리만 났다.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이수화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젖은 머리칼에서 뚝뚝 흐른 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칼라 깃을 적셨다.
기대있던 우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딱딱한 싸구려 티슈 한 뭉텅이를 대강 뽑아 그에게 건네자, 입술을 꾹 다문 이수화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받으라는 듯 한 번 더 손짓하니, 그가 엉거주춤 티슈를 받아들었다. 안경을 코밑으로 내리고 허옇게 드러난 이마와 젖은 머리를 분주히 닦기 시작했다.
다시 팔짱을 낀 우영은 지그시 그를 주시했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고등학교까지 와서 왕따에 괴롭힘이라니.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세상 참 힘들게 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괜찮냐?”
물음에 이수화의 시선이 서서히 들렸다. 알이 두툼한 안경을 코끝에 걸쳐 놓으니 제법 멀쩡한 얼굴이 드러났다. 커다란 눈, 동그란 콧방울. 전체적으로 순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상이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펴보던 우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뭐야, 너.”
“응……?”
갑작스러운 말에 이수화가 흠칫 시선을 들었다. 우영은 심각한 눈동자로 이수화를 주시했다. 흔들림 없는 시선에 겁을 집어먹은 이수화가 머뭇거렸다.
“존나…….”
“…….”
“쵸파 닮았네.”
흐려진 말끝에 웃음 한 자락이 묻어났다.
X피스는 우영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그곳에 나오는 순록 캐릭터와 닮아 있었다.
“졸라 귀엽다.”
우영은 비스듬히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한 발자국 그의 앞으로 다가가 우뚝 선다. 바짝 굳어 있는 이수화의 마음도 모르고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야, 안경 벗고 다녀.”
두 손가락으로 안경다리를 잡았다. 장난치듯 위아래로 움직여 보며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눈동자를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그럼 X피스 좋아하는 새끼들이 놀아 줄 거 아니야.”
“…….”
“인정?”
가지런한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능글대며 웃는 찰나, 느리게 올라간 이수화의 시선이 우영의 미소에 닿았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이수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눈썹도 사선을 그리며 아래로 쭉 내려갔다.
급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우영이 눈을 치켜떴다. 희뿌연 눈물이 이수화의 눈자위에 빠른 속도로 차오르고 있었다.
“뭐…….”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혀 멀거니 있던 그가 조급한 손길로 티슈를 뽑아 댔다.
“야, 왜…….”
찡그린 우영이 허리를 숙여 그를 들여다보았다. 당황스러웠다. 친구가 몇 없으니 우는 놈도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재작년 OMR 카드를 밀려 쓴 남기혁의 발악이 마지막이었다.
흰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좋아하던 캐릭터라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 아무래도 상처를 준 듯했다. 시커먼 새끼들 사이에서 안경이 깨져도 꿋꿋하던 놈이, 만화 캐릭터 닮았단 소리에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니 조금 억울해졌다.
“아. 왜 울고 그러냐…….”
“우으…….”
난감한 얼굴로 손에 쥔 티슈를 뭉친 우영이 요령 없이 그의 눈가를 눌러 댔다. 그런데 더 당황스럽게도, 내려간 입꼬리와 축 처진 눈썹으로 우는 얼굴이 더 닮아 보여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샜다.
“씨발, 야, 울지 마……. 미안해.”
우영은 찡그린 채 입술을 꽉 물었다. 달래 주진 못할망정 웃고 있으니 제가 생각해도 개새끼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새빨간 코끝과 억울하게 우는 얼굴이 정말로 비슷했다.
“으흑, 윽. 우으…….”
그가 바르르 떨리는 눈을 꾹 감았다. 푹 젖은 속눈썹이 꿈틀거린다. 깨진 안경을 코에 걸친 이수화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아……. 왜 그러는데.”
허리를 짚고 선 우영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황당한 웃음을 속으로 삼켜 내고 심호흡하듯 긴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 아래로 힐긋 그를 내려다보니 오만상을 찡그린 채 울고 있었다. 억울한 눈썹 아래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렇게 싫었나. ……쵸파 귀여운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난감했다. 훌쩍이는 소리가 화장실 안을 메울수록 우영은 더 곤란해졌다. 난데없는 날벼락이었다.
으. 낮게 침음한 우영이 다시 그를 응시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선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씨.”
에라 모르겠다, 되는 대로 티슈를 뽑아 정수리 위를 대강 꾹꾹 눌러 주었다. 고작 휴지로 머리 좀 닦는다고 젖은 것이 마를 리는 없었으나, 권우영 나름대로 사과의 표시였다.
“이런 거로 울고 지랄…….”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적막한 화장실에 낮게 울려 퍼졌다. 우영이 세면대 옆 티슈를 모조리 다 뽑아 쓸 때까지 이수화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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