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뺨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친구들끼리도 흔하게 할 수 있는, 가벼운 인사 정도였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 커졌다. 몇 가지는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역시 헛소문이었네, 하는 이야기를 듣자 놀라서 뛰던 가슴이 좀 가라앉았다.
며칠 전, 그녀의 방에서 얘기할 때처럼 뺨을 맞댄 루시아에게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얼떨떨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에 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어머.”
뺨을 떨어뜨린 루시아는 내 얼굴을 잡고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만큼 발그레한 미소였다.
“확실히 해야지, 르웰린.”
경쾌한 답이었다.
모두가 우리를 주목하는 와중에 긴 얘기를 할 수는 없어 한 번 더 손등에 입을 맞추고 내 이전에 서약을 마친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앞을 바라보면 내 다음 순서로 단에 올라온 기사와, 그의 어깨에 검을 올린 황태자가 보인다. 같은 사람들 앞에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해야 하는 건 고역이겠지. 그럼에도 그는 능숙하게 맹세를 받고 있었다. 단정한 입술은 황가의 영광 앞에 무릎 꿇은 기사에게 용맹해질 것을, 정의로워질 것을, 무고한 이들을 보호할 것을 재차 명했다. 엄숙하지만 고요하지 않은 홀에서 그가 고개를 돌린다.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 눈이 마주쳤다.
싸늘한 눈은 아까와 달랐다. 감정 없이 가라앉은 게 아니다.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머무르다 사라진 시선에 뺨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
연설이 끝나면 또 연설. 어딜 가든 나이 많고 직위 높은 이들이 전통대로 진행하는 건 고리타분하고 쓸데없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서약을 할 때까지만 해도 긴장감에 굳어 있던 동기들은 끝날 줄 모르는 연설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레오가 서임식이라고 하면 왜 그렇게 질색을 했는지 알겠다. 아주 절절하게 느꼈다. 숫자를 보면 기사단 전부가 와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기준으로 뽑는지는 몰라도 내년에는 내가 저기 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벌써 죽을 맛이었다. 레오는 부단장이라 빠질 수도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안타까웠다. 나는 절대 감투 같은 건 쓰지 말아야지.
사실 서임식이 힘들어 봤자 바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거나, 며칠 굶고 괴수와 싸우는 일만큼 힘들 리 없다. 체력은 충분한데 정신력이 바닥났다. 루시아의 웃음과 황태자의 싸늘한 눈이 머리를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정식으로 출근하기 시작하면 한동안 휴가는 꿈도 꾸지 못할 거라는 현실이 떠오르자 한숨만 나왔다. 마지막으로 며칠 정도만 침대에 몸을 묻고 뒹굴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임명장을 받고, 각자 배정된 기사단을 찾았다. 옹기종기 어수룩하게 모인 게 신입생들 같았다. 다른 기사단이 모두 깃발을 정리했지만 라리트 세르이어스는 꿋꿋하게 들고 이동했다. 그 뒤로 룩베론의 기사들이 따랐다.
중앙홀에서 내내 동상처럼 서 있던 기사들은 관사에 도착하자 앓는 소리를 냈다. 허리가 아프다, 다리도 아프다, 목도 굳은 것 같다…. 우는소리를 주워들으며 룩베론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동안 세르이어스가 깃발을 바닥에 꽂았다.
푹, 하는 가벼운 소리와 달리 깃발은 한 뼘 이상 땅에 박혔다. 튼튼한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천이 그제야 아래로 쳐졌다. 저런 걸 내내 들고 있다가 한 손으로 땅에 박다니. 대단한 근력이었다. 차라리 괴력이라 부르는 게 어울릴 정도다. 세르이어스가 즐겨 쓰는 검이 규격보다 훨씬 큰 클레이모어라더니, 과연.
단장이 깃발을 꽂고, 옆에는 부단장인 아드리안 로먼이 섰다. 상관이 앞에 나서자 흐트러져 한탄을 늘어놓던 기사들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환영한다. 룩베론의 단장 라리트 세르이어스다.”
올리브색의 눈이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넣겠다는 듯 천천히 훑었다. 굳이 낯선 얼굴을 찾지 않아도 바짝 굳어있는 건 새로 들어온 신입들뿐이었다.
하나같이 뻣뻣하게 선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은 세르이어스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꼬깃꼬깃 접힌 걸 편 그녀는 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게 연설문임을 알아본 이들이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을 흘렸다. 지나치게 긴장하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신입들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우선, 경들의 성공적이고 알찬 기사 생활을 위해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준비해 봤다.”
세르이어스의 옆에 선 로먼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나는 저 연설문에 로먼의 입김이 작용했음에 첫 월급을 걸 수 있었다.
“열심히 준비하기는 했는데 이걸 다 읽었다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어차피 옆에 있는 로먼 경이 열심히 잔소리해 줄 거다. 부단장께서 세심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병아리들을 챙겨 줄 테니 나는 걱정할 게 없지.”
룩베론의 기사들이 맞춘 것처럼 와하학,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못하는 건 병아리들과 그런 병아리를 챙기게 생긴 부단장뿐이었다.
“…단장.”
“규정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척 봐도 하지 말아야겠다, 싶은 것들이니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원래 좀 어기면서 외우는 거지. 신입 때 아니면 언제 그렇게 막 살겠어.”
로먼은 많은 말을 삼키고 대신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아드리안 로먼입니다. 규정문은 관사 복도, 연무장을 비롯해 곳곳에 걸어 두었으니 숙지해 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검을 드는 게 아니라 제국과 제국의 태양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며, 명예를 지키기로 약속한 기사이니. 모쪼록 자신이 어떤 위치로 이곳에 와 있는지 언제나 기억하고, 자신의 행동이 곧 가문의 명성으로 이어짐을 늘, 매번 생각하길 바랍니다.”
‘늘, 매번’ 하는 부분에서 로먼이 말을 씹어 먹을 것처럼 끊어 뱉었다. 신입들을 골라 눈에 넣을 듯 바라보는 눈이 흉흉했다.
어지간히도 많이 뎄나 보다. 나는 로먼의 예민한 얼굴을 보며 한껏 불편해하던 칸딜하스 단장을 떠올렸다. 어디든 하나씩 속 앓는 사람이 하나씩은 있구나. 칸딜하스가 단장, 룩베론이 부단장. 여유롭게 굴던 비시온 단장을 생각해보면 그쪽은 아닌 거 같고, 거기도 부단장이 스트레스를 받을까? 카힐름은 키시아르 테사와 체르시온 수에닐을 상관으로 둔 기사들의 스트레스가 더 심하지 않을까.
어차피 아직은 짐작뿐이다. 차라리 지금 찔끔한 얼굴로 웃음을 흘리는 몇을 잘 주시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들과 엮였다간 조용한 기사 생활 같은 건 날아갈 테니까.
“그럼 이만 해산!”
맥 빠질 정도로 짧은 연설이었다.
기존 룩베론 기사들은 “부단장, 병아리들 겁먹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노려보세요.” 하며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로먼은 성질을 내며 그들을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잠깐 확인한 것만 봐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무게감이 좀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빡빡한 것보다는 이게 낫다.
“어이, 병아리들.”
여기가 황성이 아니라 평민들이 드나드는 술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가벼운 말투였다. 기사가 아니라 용병처럼 껄렁했디. 그는 다가와 멍청하게 서 있는 신입들을 둘러보다 내 손에 주머니를 올려 주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묵직함으로 예상해 보건데 금화였다. 이걸 왜…. 영문을 몰라 멀뚱거리고 있자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한동안 함께 뒹굴 동기들인데. 오늘 서로 얼굴 좀 트고 얘기하라고 단장이 주셨다.”
“저희… 끼리요?”
“병아리들 짹짹거리는 데 낄 수는 없지. 우리는 단장과 술내기가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얼마나 비장한지. 누가 보면 술내기가 아니라 목숨을 건 결투라도 하러 가는 줄 알겠다. 나는 멀리서 머리를 다시 묶으며 눈을 빛내는 세르이어스와, 그의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로먼, 그리고 술내기를 위한 체력을 급하게 키우느라 으쌰으쌰 입으로 소리를 내며 팔을 돌리고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제국 최고라 손꼽히는 기사단의 첫인상은 양파 같았다. 한 겹 깔 때마다 새롭다.
기사는 황성 근처 괜찮은 술집 목록까지 읊어 주고 떠났다. 아직 해가 창창한데. 무슨 술이야…. 내 표정을 뭐라고 읽었는지 그곳들은 기사단이 자주 찾는 곳이라 일찍부터 문을 연다는 얘기도 덧붙여 주었다. 설명을 들으며 회의감에 젖었다. 입단 첫날부터 연무장 구를 각오는 했어도 술을 퍼부을 각오는 못 했다.
금화 주머니를 든 채 동기로서 앞날을 함께할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2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 넷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어색하다. 이걸 풀라고 돈까지 쥐여 준 건 알겠는데, 그래서 더 어색하다. 이 어색한 사이에 어두운 가게에 들어가 술을 홀짝일 생각을 하면 속이 더부룩해질 지경이다. 그냥 안에 든 금화를 인원수에 맞게 나눠 가지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에드윌이지? 난 메이빌이다.”
잘 부탁한다, 하면서 어색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깬 건 갈색 머리였다. 끝으로 갈수록 색이 빠져 연하게 보이는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일어나 있었다. 그 아래 보이는 얼굴은 대단한 미형은 아니었지만 서글서글하니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스물 중반 정도로 짐작하며 내민 손을 잡자 상대도 긴장을 풀려는 듯 웃었다. 아래로 처진 눈꼬리가 휘며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그게 어색하지 않았다. 같이 들어오는 동기들의 신상을 일단 머릿속에 넣어 두기는 한 덕분에 그의 소개를 듣고 어렵지 않게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압니다. 조슈아 메이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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