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스스로에게 분별력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무엘은 종종 로즈를 말괄량이라고 불렀다. 애정 어린 별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로즈는 그 말을 들을 때면 입술을 비죽거리곤 했다. 그건 사무엘이 뭘 몰라서 하는 말이니까. 뮈헬의 여자 중 로즈는 아주! 얌전한 축에 속했다.
로즈의 일탈은 요즘 유행한다는 로맨스 소설을 몰래 구매한다거나, 수도까지 잘생겼다는 소문이 났다는 피에반의 차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얼굴을 확인하러 인근 영지에 간 정도에 그쳤으니까.
하지만 결국 사무엘의 말이 맞았던 걸지도 몰라.
마음 같아서는 구석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고개를 푹 숙이지 않고 눈만 얌전히 깐 것은 마지막 이성 때문이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 영애로 자라며 교육받은 상식들이 허리를 꼿꼿하게 들고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외쳐댔다. 자신이 어떤 신분으로 수도에 와 있는지 되새기도록! 그러자 로즈의 허리가 저절로 반듯하게 섰다.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들고 왔다는 건 그곳의 손님으로 왔다는 뜻. 무려 아이센의 신세를 지면서 귀족답지 못하게 굴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미 충분히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마차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고, 상대도 가만히 로즈의 말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얼굴이 저렇게 황홀하다면 얼굴값을 해도 괜찮을 텐데. 세상이 불공평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람이 어떻게 얼굴과 인성을 다 가질 수 있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의 성격까지 칭찬한 로즈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티 나지 않게 슬쩍 눈을 올렸다가, 셔츠 깃 위로 보이는 목선과 턱에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여기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비대가 금세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직접 달릴 생각만 했지, 경비대의 존재는 생각지 못한 로즈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는 로즈가 정신을 차린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살짝 웃었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로즈의 심장 상태를 고려한다면 그랬다.
로즈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발견하자마자 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도 잊고 홀린 듯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냉랭해 사람 같지 않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인상이 확 달라졌다. 진하고 끝이 올라가 있던 눈꼬리는 살짝 접히며 본래의 차가움을 잃었고,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입술은 남자애들 것 같지 않게 붉었다. 모르긴 몰라도 로즈의 뺨만큼은 붉은 것 같다.
“짐을 잃어버리셨으니, 우선 가는 곳까지 태워 드리겠습니다.”
로즈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거절하려고 했다. 염치가 없어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손사래 치려던 손이 굳었다.
여기서… 아이센 저택까지 마차비가 얼마나 나오더라?
로즈의 눈이 데구루루 구르며 계산을 마쳤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숫자가 떠올랐다. ‘절대 안 돼!’에 가깝던 추가 ‘이 정도는….’ 쪽으로 훅 기울었다. 염치가, 없기는 한데. 이미 부끄러운 모습을 잔뜩 보였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사람에게 자존심은 중요하지만, 그것도 때와 상황이라는 게 있다. 지금은 위급 상황이다. 따져 본다면 로즈의 인생에서 제일 험난한 구간을 지나고 있다. 가방을 잃어버렸으니 아이센 저택에 도착한 후에도 소매치기를 잡을 때까지는 꼼짝도 할 수 없다. 물론 그보다는 차라리 집에 연락해 도움을 받는 게 빠르겠지만.
제발 도와 달라고 매달려도 모자란데,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하는 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아집에 불과한 거지.
스스로에 대한 설득을 마친 로즈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그는 되묻지 않았다.
*
마차는 멈추지 않고 아이센의 문을 넘었다. 당연한 일이다. 수도는 오히려 동부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하니까. 가문 인장이 더 큰 힘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수적인 도시에서, 아이센의 문도 열어젖힐 만한 가문의 마차에 탄 로즈는 그나마 빳빳하게 유지하고 있던 고개를 떨궜다.
‘완전 망했어. 진짜, 완전, 진짜 망했어….’
아마 상대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창문에 머리라도 박았을 것이다.
수도에서 한참 먼 뮈헬은 그만큼 소식도 느렸다. 로즈가 알고 있는 수도의 가문도 손에 꼽는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손에 꼽는 가문들은, 그만큼 관심이 없는 로즈조차 알 만큼 유명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에드윌은 그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였다.
마차에 탈 때 정신이 없어 밖에 그려진 인장을 보지 못한 게 실책이었을까. 아니, 봤어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래도 눈치를 챘어야지.’
로즈는 자책하며 치마를 최대한 밑으로 내려 구두를 가렸다. 처음 신을 때만 해도 귀여웠는데. 어느새 구두는 여기저기가 까이고 패 내놓기에 영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자기소개를 할 때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정신을 차린 로즈는 체면을 챙겨야 하는 자리에서 평생 얌전히 교양만 교육받은 영애처럼 행동할 줄 알았다. 비가 내린 흙길을 달리느라 치마가 온통 진흙으로 엉망이 된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그렇게 해도 좋아요, 허락하죠.’ 하고 우아한 척 말하면 웃음을 꾹 참은 사무엘이 손등에 입을 맞추고 ‘영광입니다.’라고 답해 주는 건 남매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모양 좋은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리고 그 이름이 동남부 토박이인 자신도 아는 유명한 것임을 깨달은 순간. 로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뭔가를, 그러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종류의 기대를 가졌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당장 바뀌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잘 순응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활기차고 작은 영지를 사랑했고, 가족들을 사랑했으니까. 책에나 나오는 화려한 생활을 꿈꿔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게 책에나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인 건 알고 있다. 언젠가 자신과 결혼하게 될 고만고만한 남자애들을 ‘얼간이와 반푼이들, 그리고 애송이들.’이라고 부르면서도 누가 제일 나은지 재 보는 게 로즈의 최선이었다.
그곳에서 하지만 사무엘과 베로니카의 결혼부터, 아이센의 초대까지. 로즈의 열여덟은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아주, 아주 작고 못 써먹을 기대가 어느새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데뷔탕트에서 꿈에 나올 법한 멋진 남자를 만나서 춤을 추고, 음악과 웃음소리로 온통 시끄러운 홀에서 둘만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집중하는 순간 따위의 기대.
그러니까 척 봐도 귀한 가문의 영식일 게 뻔한 상대를 보고도 얼굴에 홀려 넋을 놓고, 에드윌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지. 이래서야 데뷔탕트에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다가 수확 하나 없이 영지로 돌아가게 될지도. 르웰린 에드윌처럼 화려한 얼굴이 흔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게 아닌가.
자책하는 사이 마차가 멈췄다. 헉, 하고 함께 숨을 멈췄던 로즈는 먼저 내린 상대, 그러니까 에드윌이 내민 손을 덜덜 떨며 잡았다. 이끌어 주는 힘이 단단해 꽤 높은 계단도 비틀거리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늦어진다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로즈는 그대로 바짝 굳었다.
로즈를 마저 내려 준 남자는, 그러니까 뮈헬에 그의 이름만 유명하고 얼굴은 유명하지 않은 게 이상할 얼굴을 가진 에드윌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볍게 뺨을 맞대고 떨어지는 모습이 친근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도 로즈를 안심시키기 위해 짓던 미소와는 다르게 자연스러웠는데, 로즈는 차라리 뒤쪽에서 그의 얼굴을 완전히 보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얼굴을 정면에서 봤다면 간신히 붙잡은 이성의 끈이 다시 느슨해질 게 뻔했다.
장식이 적고 길게 내려와 허리끈을 조인 얇은 드레스 덕에 드러난 날씬한 허리와 곧은 어깨선. 그리고 그 위로 풍성하게 내려온 금발.
베로니카는 로즈가 수도에 가기 직전까지 주의해서 대해야 할 사람에 대해 말해 주었다. 로즈가 신세 지게 될 아이센가에 대한 내용이 길고 자세한 건 당연했다. 다행히 로즈 또래라는 아이센 영애는 아카데미를 나온 덕에 초상화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초상화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믿어지니. 마리아, 세실. 내가 지금 루시아 아이센을 보고 있어.
“어쩌다 보니.”
“어머니 성화에 머리를 미리 해 두길 잘했지. 하마터면 장식을 고르는 중 손님을 맞을 뻔했어.”
“그건, 미안해.”
“특별히 용서할게.”
이쯤 되면 연애 경험이라곤 없는 로즈라고 해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르웰린 에드윌 같은 남자는 어떤 여자랑 연애를 하나 했더니. 그 상대가 루시아 아이센 정도는 돼야 하는 모양이다.
눈이 높다고도 못하겠다. 둘은 그림으로 그려도 될 만큼 완벽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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