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과연. 실제로 그런지는 몰라도 제국 상권을 틀어쥐고 있다는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 그냥 오른 건 아니라서, 평소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버린 엘리엇은 별것도 아닌 주제로 시간을 끌며 교장의 혼을 쏙 빼놓았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마탑과 아카데미 수장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는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언변도 필수다. 교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루이스에게 오래 붙잡혀 있던 교장은 슬슬 대화를 끝내고 싶어 했다. 여유로워 보이는 한 쌍의 커플을 보며 루이스만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물론 둘을 믿고 싶지만, 더없이 믿음직한 얼굴이지만, 아직 졸업도 못 한 후작가 여식과 차기 가주라는 이름으로 붙잡아 두기에는 피사 테콘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다. 엘리엇이 아니라 백작이 왔다고 해도 무리였을 것이다. 황태자 정도라면 모를까.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엘리엇의 팔을 루시아가 잡아당겼다. 엘리엇은 기꺼이 얼굴을 숙여 그녀에게 귀를 대 주었다. 루시아가 뭐라고 속삭이자 “아.” 하고 허리를 편 엘리엇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교수님을 뵌 기쁨이 큰 나머지 중요한 걸 잊고 있을 뻔했군요. 이번에 제가 아카데미 학부생이 발표한 상품에 투자를 한 게 있는데…. 이게, 음.”
“투자라고 하면 어떤….”
“교수님도 주목하고 있으실 것 같은데. 원격 통신 장비입니다.”
“아, 아아. 그.”
교장의 평정이 잠깐 깨졌다.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그가 허허 웃었다.
“상용화된다면 제국을 뒤집을 대단한 상품이다 싶어 크게 투자했죠.”
“그럼 혹시 레프슨 상단이.”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입니다. 지금은 제가 맡고 있죠.”
당장이라도 대화를 끊을 것처럼 보이던 교장의 태도가 달라졌다. 엘리엇이 대화를 나눌 가치가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교장의 태도가 급격히 누그러졌다.
“이럴 게 아니라 앉아서 얘기라도 나누는 게 어떤가.”
“그게, 사실….”
엘리엇이 난감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웬만한 일로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그렇다 해도 저런 표정을 지을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아는 루시아와 루이스는 그걸 가증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교장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게 표절이라는 얘기를 들어서요.”
작은 목소리가 위험한 단어를 담았다. 교장은 크게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지켜보는 눈은 없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지. 그는 급하게 주변에 차단 마법을 둘렀다. 손짓 한 번으로 대단위 마법이라니. 대단하긴 하구나.
아무튼 루이스조차 귀가 솔깃할 이야기긴 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가. 엘리엇이 말한 통신 장비를 누가 만들었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사실 답이야 뻔하다. 차석인 자신이 만들지 못할 물건이라면, 수석인 세드릭 클라인 외에는 답이 없다.
“표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런 걸 발견했는데요.”
“이건….”
엘리엇이 꺼내 든 것은 가죽 커버의 노트였다.
세월이 묻어난다는 것이 그나마 특이한 점일까. 노트는 평범했다. 교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노트를 받아 훑어보았다.
“그냥 평범한 노트인 것 같은데.”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어요.”
“아이센 양.”
“도서관에서 발견할 때까지만 해도요. 책 사이에 왜 빈 노트가 들어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별생각 없었죠. 가끔 다른 학생의 과제물이 끼어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루시아가 짧은 한숨을 삼키며 노트를 바라보았다. 불길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 조금 전까지 엘리엇의 뒤에서 따분하게 바닥을 바라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동안 들여다볼 일도 없었죠. 굳이 이런 낡은 노트를 쓸 일은 없으니까요. 그러다 책장에 오래 방치되어 있는 노트가 다시 눈에 들어왔고, 마침 가지고 있는 빈 종이가 없길래 그곳에 필기를 했어요. 그런데….”
루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엇은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글자가 사라지더군요. 거기까지만 해도, 마법부 학생이 장난을 친 줄 알았어요. 글이 사라지는 종이라니.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마법이 많다는 것을 주워들을 정도의 지식은 있으니까요.”
“글자가?”
“예, 그리고….”
진짜는 이다음이라는 듯.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사라진 글에 대해, 답이 돌아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장이 마법을 펼쳤다. 다급한 손길이었다.
옅은 녹색의 빛이 노트 위로 가라앉았다. 반응이 없었다. 교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 위에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하나, 둘, 셋…. 낡은 노트 위로 현직 마탑주의 마법이 쌓였다. 종이가 그걸 버텨내기 어렵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저 중첩이 무슨 의미인지 교장을 제외하고 셋 중 제일 잘 아는 루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사용된 마법 수식을 밝혀내는 마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사용하는 건 처음 본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이 복잡할수록 중첩하기는 더 어렵다. 웬만한 수준으로는 두 개를 겹치는 것도 완벽하게 하지 못한다. 대단히 고위의 마법으로 알려진 수식 해제 마법을 저렇게 여러 겹 쌓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저렇게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무언으로 하다니. 교장이 대단하긴 하구나….
일곱 개의 마법을 겹치자 그제야 노트에 쓰인 수식이 펼쳐졌다. 빠르게 확장되는 마법 중 대부분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간신히 받아들인 것도 낯선 개념이었다.
아마 자신보다 더 아는 사람이라면, 더 놀랐겠지. 이건, 이제껏 없던 종류의 마법이었다. 사람 좋게 웃던 교장의 얼굴이 마탑주의 것으로 변했다. 루이스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당장이라도 이 노트를 가지고 연구실로 가고 싶겠지. 자신의 손도 근질거렸다.
“이걸, 도서관에서 발견했다고 했나?”
“네.”
“이게 다른 사람과 연락을 할 수 있는 도구라면 문제가 됩니다. 저는 아카데미에서 출품한 상품이 제국 최초라는 말을 듣고 돈을 지불했으니까요.”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하자 교장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교장실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황망한 교장의 얼굴을 보며 루이스는 잠시나마 품었던 의심을 내려놓았다. 고작 저 두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교장을 붙들어 둘지 따위를 고민하던 조금 전이 거짓말 같았다. 그래, 저 둘이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봐.
*
어두워 바닥을 찾을 수 없었지만, 언제 떨어지더라도 바닥에 착지할 자신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발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났다. 나는 그대로 몸을 굴려 충격을 줄였다. 딱딱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푹신한 바닥이 몸을 받았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꾸욱꾸욱 눌러 보았다. 물이 찬 고무호스처럼 탄력 있는 표면이 느껴졌다. 천장에서 빛이 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워낙 희미한 탓에 정체를 파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덕분에 타격 없이 착지할 수 있으니 됐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급했다. 초상화 문제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다 피사 테콘이 교장실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저편을 향해 외쳤다.
“세드릭!”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울리기만 할 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젠장, 일단 되는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최선일 듯싶었다. 어느 쪽이든 걷다 보면 나갈 방법이 나오겠지.
그때 바닥이 흔들린다 싶더니, 곧 기우뚱 기울었다. 중심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몸을 피해야 했다. 무언가 바닥에서 치솟았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한 눈으로 살펴 봤자 큰 성과가 없었다. 귀를 기울였다. 뻑뻑한 것이 문질러지는 소리, 질척거리는 소리.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소리는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까지 이어졌다. 한 곳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이 아니었다. 바닥이 온통 들썩거리는 중이었다. 바닥은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명백히 나를 노린 움직임이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발이 바닥에 닿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감으로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망할….”
초상화 문제를 통과하자마자 홀에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리가 울리길래 안심했는데, 멍청한 짓이었다. 웬 친절인가 했더니. 침입자를 안심시켜 놓고 긴장이 풀린 순간을 노리는 고도의 전략이었던 모양이다.
꾸물거리던 바닥은 넝쿨처럼 생긴 생물의 일부였다. 흐린 빛에 두껍고, 가느다란 몸체가 드문드문 비쳤다. 바닥에 엉켜 있던 것이 어느 정도 몸을 풀었는지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다가오는 것을 발판 삼아 몸을 띄우고, 이전에 부딪친 경험으로 천장의 높이를 가늠한다. 천장에 발을 붙이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가, 다시 펴며 아래로 돌진. 한 번 아래로 내려가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딱딱한 바닥이 드러날 만큼 넝쿨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계산 오차도 점점 줄어들었다. 몸 상태가 멀쩡하다면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겠지.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