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처음에는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인 줄 알았다. 잘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럿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만 더 들으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것은 더 이상 작은 속삭임이 아니었다.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웅장하고 신성한 목소리. 신을 찬양하는 듯 아름다운 것만을 담은 소리가 서서히 익숙해졌다. 정원을 비추던 빛이 실체를 가진 것처럼 손짓했다.
돌아, 가자….
나이도, 성별도 짐작하기 힘들고 하나인지 여럿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목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 ‘어디로 돌아가자는 거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다시 가라앉았다.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저곳에 가면 될 것 같다. 내가 찾던 게 저곳에 있다. 내가, 찾던 게 뭐였더라. 하지만 저곳에 가면…. 모두 해결될 것 같다. 강렬한 유혹이었다. 반발심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돌아가면, 저곳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고, 평온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파삭!
무언가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언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나는 회랑에서 벗어나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정원은 여전히 눈이 멀 만큼 아름다웠지만, 전처럼 환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절벽을 앞에 두면 나도 모르게 오싹해지는 것처럼 당연한 두려움이 들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왔다. 단단한 돌바닥을 밟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후에야 조금 전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드릭이 걸어 둔 보호 마법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가 변덕으로 내준 선의가 없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주변을 보자 조금 전까지 빛이 넘치던 회랑이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고 아득해졌다.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 속에 내가 침입한 듯한 감각이었다. 한 번 끊어낸 뒤에도 소리는 포기하지 않고 귓가에 들러붙었다.
빠르게 걷다가, 나중에는 거의 뛰듯이 회랑을 벗어났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 다행히 길이 길지 않았다. 나는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내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혔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 막혀 소리는 들어오지 못했다.
건물 내부는 돔 형태의 4층짜리 홀이었다. 벽에는 장식과 석상이 자리했고, 곳곳을 신과 인간을 그린 벽화가 곳곳을 메우고 있었다. 짙은 청록색의 벽과 금색 장식의 조화가 화려했다. 기둥을 감싼 포도 덩굴 조각, 천장에서 내려온 거대한 샹들리에.
황성처럼 거대하고 화려했다. 아니, 황성처럼이 아니라…. 정말 흡사했다. 황성의 수많은 궁 중 하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조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얼어붙은 두 개의 방을 지나면 어둡고 눅눅한 길, 사람을 홀리는 정원, 그다음은 황성을 연상시키는 홀인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는 길이 갈라지기는 해도 확실했는데. 이전과 달리 ‘문’이 출구가 아닌지, 내부에는 문이 많았다. 저것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어딘가에 힌트가 있을 법도 한데. 내부가 워낙 화려해 무언가 하나를 집어 수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부 신경 쓰였다.
3층까지 뒤졌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대부분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몇 개는 열 수 있었지만 텅 빈 창고였다. 처음에는 혹시 몰라 문을 억지로 뜯어 보기도 하고, 방을 뒤지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건 그냥 꽝이었다. 그나마 돌아다니다 보니 열리는 문과, 열리지 않는 문을 구분할 수는 있었다.
손잡이 옆의 장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문을 뜯어내 봤자 벽이 드러났지만, 작은 거울이 붙은 것은 창고라도 나왔다.
거울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단서인 것 같기는 한데. 더 위로 올라가 보면 거대한 거울이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4층을 마저 뒤져 보자는 생각으로 올라가던 중, 분수가 눈에 들어왔다.
1층에 있는 분수 중앙에는 여인상이 있었는데, 그 키가 2층 난간에 닿을 정도로 컸다. 석상이 어깨에 짊어진 물병에서 물이 쏟아졌고, 하체는 긴 치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팔과 목덜미, 허리에는 비늘이 돋아 있었다.
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 졸졸 흐르는 정도라 여인상 근처가 아니면 수면이 잔잔했다. 홀을 비치는 물을 보던 나는 계단에서 훌쩍 뛰어내려 분수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저것도 거대한 거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으로 여인상의 비늘을 건드려 보기도 하고, 분수 바닥을 눌러 보기도 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괜히 바지만 젖었다 싶어 투덜거리며 빠져나오는데,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연극은…!]
놀라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어디에서 난 소리인지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딱히 말을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혹시 싶어 다시 첨벙거렸다. 물이 튀자 분수대 끄트머리에 장식된 물고기의 꼬리가 파닥거렸다.
[연극은 두 개의 달이 뜨는 밤에!]
물고기는 짧은 문장을 뱉은 후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멈췄다. 물고기 상은 네 개 있었다. 나는 어차피 젖은 발을 다시 분수에 담그고 나머지도 작동시켰다.
*
물고기 네 마리는 각각 다른 문장을 뱉었다.
연극은 두 개의 달이 뜨는 밤에, 시작을 알리는 장송곡, 준비된 자리에 안주하지 말 것, 나아갈 수 없을 때는 돌아간다.
처음에는 뭐라는 건가 싶었다. 포춘 쿠키를 열어 나오는 격언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없다는 점에서.
일단 고개를 들어 천장부터 살폈다. 문제가 나왔으니, 근처에 해결법도 있지 않을까. 달이라면 둥글거나, 빛을 반사하거나, 하늘에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분수대 위쪽 천장이 종 모양으로 동그랗게 솟아 있고 그곳에 하늘 그림이 있었다.
처음에는 달을 물에 비춰 두 개처럼 보이게 하라는 뜻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분수대의 여인상에 가려 그림이 제대로 닿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림을 뚝 떼어 오라는 뜻도 아닐 테고.
우선 직접 확인이라도 해 봐야겠다. 나는 4층으로 올라가 장식을 붙잡고 벽을 탔다. 붙잡을 게 많이 올라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착잡하기는 했다. 마법사가 아닌 이상 나처럼 기어 올라가야 할 텐데. 정말 이게 맞는 방법이라면 지나치게 마법사 위주였다. 부유 마법이 없으면 몸으로 고생하라는 거야, 뭐야.
하긴. 애초에 거대한 문을 넘어올 때도 세드릭이 아니었다면 못 열었겠지. 세드릭은 지하의 마법을 보고 피사 테콘이 만든 게 아니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대체 누가 이런 것들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성격이 꼬일 대로 꼬인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 힘들게 올라간 보람은 있었다.
해와 달, 낮과 밤을 함께 그린 천장화. 그림에서 이어지듯 내려오는 스테인드글라스. 돔의 아랫부분은 열 개의 조각상이 빙 둘러 장식하고 있었다.
위에 올라와 보니 제법 아찔한 높이였다. 떨어진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잘못하면 다칠 수는 있겠다. 아래로 내려갈 때 충격을 줄이기 위해 어디를 밟아야 할지 재고 있는데 분수대 여인상이 보였다. 머리는 잘못 밟으면 목이 부러질 거 같은데. 물병이야 더할 테고, 위로 뻗은 손은….
여인상은 어딘가를 가리키듯 물병을 잡지 않은 손을 길게 뻗고 있었다. 자연히 시선이 따라갔다. 돔의 테두리를 두른 열 개의 조각상 중 하나가 보였다.
암벽 등반을 하는 기분으로 그곳으로 이동했다. 당장이라도 넘실거릴 것처럼 생생한 파도로 장식된 것을 건드리자 그것이 말려 들어가듯 빙글빙글 돌아 벽 안쪽으로 사라졌다. 철컥,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나머지 아홉 개도 벽 안으로 사라졌다.
뭐가 달라지는 건가 싶은 중 높은음으로 시작하는 오르간 소리가 울렸다. 더 큰 무리에 속하소서. 제국의 장송곡이었다.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장이 움직였다. 낮과 밤이 공존하며 이것이 여명인지, 황혼인지 알 수 없던 붉은 빛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연회장을 채우는 바이올린 소리, 그 속에서 삼삼오오 떠드는 목소리.
드문드문 ‘왕자는’, ‘왕께서’ 하는 소리가 들린다. 굳이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곧 소란을 뚫고 나팔 소리가 울린다. 왕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였다.
샹들리에마저 꺼진 홀, 달빛이 어딘가를 비추고, 그 아래 초상화가 드러난다. 그림 속 왕관을 쓴 늙은 남자는 수척한 얼굴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 불빛을 받은 왕이 한숨을 쉰다.
[왕자의 죽음이 내게 큰 슬픔을 주었소. 이는 실로 불행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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