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17)
  • #94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끌어들일 생각으로 찾고 있기는 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가 문을 잠그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면 문을 부수려고 했는데, 그러면 이목을 끌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세드릭의 얼굴을 보며 주머니에 넣어 둔 엘리자베스 룩스틸의 목걸이를 떠올렸다. 몇 년 전. 내가 ‘씨씨’에게 선물을 준 날. 내게 곧바로 씨씨의 정체를 말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낀 엘리자베스가 내게 준 것이다.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거래’를 할 만큼 중요한 거라는 건 확실했다.

    “너….”

    완전히 닫히지 않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호흡 탓에 손바닥이 뜨끈하고 축축했다. 아래층에서 거기 뭐가 있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의 러그가 두꺼워 넘어지는 소리 자체는 크지 않았는데,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반동으로 움직인 탓인 듯했다.

    세드릭이 차분한 얼굴로 입을 막은 내 손을 잡았다. 늘씬한 손가락은 평생 무거운 건 들어본 적 없다는 듯 우아했다. 나는 괜한 반발심에 세드릭 클라인의 가슴과 팔을 각각 짓누른 무릎에 힘을 줬다. 억눌린 신음 소리가 났다. 모른 척 시침을 떼며 그가 쓴 안경을 건드렸다.

    “놔줘도 조용히 할 거야?”

    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에 잡혀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손을 뗐다. 세드릭 클라인은 약속대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호흡만 골랐다. 나는 좀 전의 평가를 넣어두었다. 그는 여전했다. 행동이 느릿하고 굼떠 어린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게 내 앞에서 ‘씨씨’처럼 구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알 수 없, 지는 않았지. 나는 루이스가 질색 팔색 하며 늘어놓은 세드릭 클라인의 험담을 떠올렸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아래층은 곧 잠잠해졌다.

    나는 귀를 기울여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위로 올라오는 다급한 발소리도 없었고, 목소리가 이어지지도 않았다. 이곳에 관심을 끄기로 결정한 듯했다. 어쩌면 세드릭 클라인이 있는 곳이라는 걸 늦게나마 인식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세드릭의 위에 올라탄 채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의 방은 클로이와 같은 층 복도 끝에 있다고 했으니, 이곳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곳인 듯했다. 실내가 어둡고 조용했으며, 길고 두꺼운 커튼이 테라스 바로 앞까지 둘러싸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 소리만 채워진 고요한 방 안에 액체가 끓어오르다 거품이 터지는 소리가 가끔 더해졌다. 맹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다소 놀랐는지 가슴팍이 급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짓누르긴 했는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민망한 자세라는 생각에 천천히 그 위에서 내려왔다.

    세드릭은 여전히 누운 채 나를 보며 비뚤어진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오래 머무르다, 손을 얹은 검으로 옮겼고, 곧 가슴 근처로 이어졌다.

    “검술부?”

    그의 질문에 따라 나도 시선을 옮겼다. 웰트 포켓 위쪽에 동그란 씰이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동그란 원형 코인 안에 새가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있었는데, 매인 것 같았다. 교복이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구분하나 했더니. 이게 표식이었던 모양이다.

    검을 차기 위해서는 검술부 교복을 입어야 했으니 맞을 거다. 나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응.”

    “처음 보는데….”

    “나도 너 처음 봐.”

    그 말에 세드릭이 손을 꼼질거리며 셔츠 위에 걸치고 있던 로브 자락을 만졌다. 저것도 어릴 때 그대로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이름이 뭐야?”

    질문을 듣는 순간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나는 저 녀석이 어디까지 머리를 굴리나 싶어 답을 고민했다. 세드릭 클라인의 성질이 여간 꼬인 게 아니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다. 꼭 그게 아니어도 이렇게 낯선 상대가 몸을 누르고 있으면 반항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가 내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나를 모르는 척, 새초롬하게 굴고 있다는 가설에는 더 이상의 증거도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 한번 해 보자 이거지. 나는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고 평온을 가장했다.

    에르켈의 취향대로, 그가 쓴 공이라는 것들은 사람을 빡치게 하는 데 뭐가 있는 놈들이었다.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디멘시온이 루크나 세드릭 클라인보다 비중이 크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엘리엇 딜런.”

    ‘씨씨’와 주고받은 편지에도 자주 언급했던 이름이니, 그가 모를 리 없다. 자기가 모르는 새 이름이 팔리게 된 엘리엇에게 속으로 짧게 사과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너머 까만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세드릭 클라인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작게 말했다.

    “엘리엇이라고 불러도 돼?”

    “아니, 안 돼.”

    이번에도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는지, 가만 다문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왜?”

    어린애처럼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아예 작정하고 모른 척하는 그를 보며, 나는 원래 계획대로 엘리자베스 룩스틸의 목걸이를 들이대는 대신 다른 걸 던져보기로 했다.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잖아.”

    “…….”

    “내가 왜 허락해 줘야 하는데?”

    싸늘하게 선을 긋는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조곤조곤하고 다정했다. 그걸 눈치챈 세드릭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음이 분명하다.

    “너랑,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한 사이가 되고 싶어.”

    19. 씨씨, 아니 세드릭과의 재회

    세드릭 클라인이 세기의 천재라는 말은 과장이 섞였을지언정 거짓은 아니었다.

    계획대로 루이스가 미리 열어 둔 교장실에 들어갈 때도 큰 기대는 없었다.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나는 형제인 아벨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세드릭 클라인에 대한 찬사도 붕 뜬 이야기처럼 느껴진 것이다. 남들이 대단하다고 하니 대단한 모양이다,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겉으로 티 내지는 못했지만, 세드릭이 함정을 해제하는 걸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더 대단한 일이다. 아카데미 교장은 몇십 년간 마탑주의 자리를 지키며 현존하는 최고의 마법사라는 찬사를 받는 피사 테콘이었다. 그런데 그가 만든 함정이 한참 어린 제자의 손에 쉽게 깨졌다.

    설마하니 피사 테콘이 허술한 마법을 걸어 뒀을 리도 없고. 전에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아벨에게 전해 들은 말만으로도 교장은 꼬장꼬장한 노인이었다.

    작은 것도 잊지 않고,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그러니 교장실의 방범 마법은 고난도일 확률이 높고, 그걸 해낸 세드릭 클라인은 대단한 게 맞다. 정말 별게 아니었으면 먼저 들른 루이스가 전부 처리해 뒀겠지.

    나는 그냥,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인 거다. 저 녀석이 진짜 상식 밖의 천재라는 걸.

    “열었어.”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세드릭이 돌아보며 말했다. 하얀 얼굴에는 기대감이 비쳤다. 칭찬을 해 달라 이거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칭찬 몇 마디 내뱉는다고 내 혀가 망가지지도 않고, 속이 쓰리지도 않다. 어디서 고용하기도 어려운 인력을 고작 말로 써먹을 수 있다면 대단히 싼값이라는 계산에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잘했어.”

    그러나 바라던 칭찬을 들었음에도 세드릭은 기뻐하지 않았다. 연신 이쪽을 보며 다음을 기다리던 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나는 그걸 모른 척 무시했다. 영혼 없는 빈말이 대가의 전부라는 걸 안 것이다.

    “뭐 해. 다음 거 열어야지.”

    “이거 되게 어려운 건데.”

    목소리가 불퉁하다. 보기에는 천을 구겨 주름을 만드는 것보다 쉬워 보였지만,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그래. 대단하네.”

    “이거 되게 어렵고… 힘든 거야.”

    “되게 어렵고 힘든 건데 쉽게 했네. 대단하다.”

    박수까지 쳐 줬는데 표정이 펴지지 않는다. 도리어 울컥한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 이름을 부르고 싶다고 조르는 세드릭 클라인에게 나는 친절을 베풀었다. 원래 친분은 시간을 통해 쌓는 거라 통상적으로 처음 만난 우리는 친분이라 부를 관계를 쌓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지만, 그것을 한 번에 엎을 수 있다는 말에 세드릭이 얌전히 웃었다.

    ‘그게 뭔데?’

    ‘원래 나쁜 짓을 함께 하면 친해진대.’

    ‘나쁜 짓?’

    ‘하면 안 되는 일, 남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일의 공범이 돼서 비밀을 공유하는 거지.’

    목소리를 죽이며 말하자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그 모습에서 어릴 때의 얼굴을 찾아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라든지, 짙고 어두운 머리색에 대비되는 흰 얼굴과 얌전히 다물린 입술, 순하고 둥근 눈과 무방비해 보일 정도로 말랑한 분위기 같은 것. 확실히, 세드릭 클라인 또한 그 성격과 재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눈에 띌 만큼 화려한 외모였다.

    인간 같지 않게 화려한 황태자나 어린 나이부터 척 봐도 위험하고 날카로워 보이던 루크보다는, 꾸며낸 모습이라고 해도 저쪽이 그나마 취향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아니, 부정해야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비엘 소설에 들어왔다고 나도 동화된 게 아니고서야 이럴 리가. 아주 잠깐 남자를 상대로 취향이니 뭐니를 떠올린 스스로가 어이없어 입 안을 깨물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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