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17)
  • #88

    둘의 대화를 듣고서야 자신의 친구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한 에이든의 입이 크게 벌어진 것과, 루이스의 손이 에이든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엘리엇은 그 모습을 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황실 모독죄로 잡혀가기라도 바라는 거야?”

    “에이든, 나야 네가 눈치 없는 게 귀엽긴 한데…. 가끔은 좀 걱정된다. 응?”

    둘의 타박에 에이든이 입이 막힌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나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태도인지, 엘리엇은 그걸 보며 ‘이러다 숨 쉬지 말라고 하면 숨도 멈추고 있겠네.’ 하고 생각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언제쯤 숨을 쉬어도 된다고 해줄까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무리한 생각도 아니라는 게 제일 무서웠다. 셋 중 제일 덩치가 큰 녀석이 몸으로 반항해 볼 생각도 하지 않는 점도 웃기고.

    그래도 어릴 때에 비하면 낫긴 한데. 긴장해서 말을 더듬으며 주위 눈치를 심하게 봤던 에이든은 여전히 멍청하고 순박하지만 전처럼 툭하면 우는 찌질이처럼 굴지는 않았다. 산에서 검 하나만 들고 마수들을 베며 수련했다는 르웰린에 비하면 확실히 정석대로 교육받은 사람답게 서 있는 자세도 ‘기사’의 것에 가까웠고.

    “사실 이 얘기가 중요한 건 아니고….”

    루이스가 웃음을 흘렸다. 샐쭉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가늘게 빛나는 눈이 복도를 쭉 둘러본 후 마지막에 닿은 건 엘리엇의 얼굴이었다.

    “사실 네가 올 줄은 알았는데, 르웰린이 이렇게 달려올 줄은 몰랐거든.”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며 엘리엇은 짧게 웃었다. 어린 시절에도 루이스가 자신을 떠볼 때면 잔머리가 잘 굴러가는 편이라고 판단하기는 했지만, 나이에 맞는 순진함이 있었는데. 그간 시간이 많이 지나긴 한 모양이었다.

    확실한 것은, 둘이 서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쯤 되면 누가 먼저 입을 여나 타이밍을 재고 있을 뿐이다. 이왕이면 상대가 먼저 운을 떼 주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네가 함께 나온 게 더 놀라운데.”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 이거지. 루이스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 저 녀석이 순순히 져 줄 리 없다. 결국 먼저 약점을 보이는 건 제 일이다. 양보는 맞지만, 패배감은 들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 참을성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지만, 먼저 말한다고 꼭 졌다고 할 수도 없는 거니까. 결론을 내린 루이스가 에이든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에이든, 네 방 좀 빌리자.”

    “응? 그건, 어렵지 않은데.”

    철없던 열한 살에서 세상의 고단함을 아는 열일곱으로 자란 루이스와, 원래도 열두 살 같지 않은 애늙은이였던 엘리엇이 멀리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눈빛을 나눴다.

    ‘안에서?’

    ‘안에서.’

    둘이 왜 고개를 끄덕이는지도 모르는 에이든만 불안해하며 눈동자만 굴렸다.

    18. 조력자와 방해자

    루이스와 엘리엇은 에르켈과 르웰린이 대화하는 동안 우리도 확실한 결론을 짓자는 대화를 나눴다. 결심한 두 사람은 에이든을 끌고 자리를 옮겼다. 도착한 곳은 에이든의 방이었다.

    사실 그들이 서 있던 복도에서 더 가까운 건 루이스의 방이었지만, 루이스는 자신의 방으로 가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바로 근처에 괴짜 녀석이 있다는 이유였다. 루이스는 마법부의 괴짜로 이름 높은 세드릭 클라인에 대해 설명하며 투덜거렸다.

    “나는 걔가 진짜 끔찍해. 대놓고 욕하는 건 아닌데, 그보다 질이 나쁘다니까.”

    “힘들었겠네.”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대충 맞장구쳐 준 엘리엇이 코를 막은 채 창문부터 열었다.

    검술부 특유의 퀴퀴한 냄새에 코 쨍한 약초 냄새가 섞인 공기는 언제나 예민하게 구는 엘리엇이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날것 그대로였다. 깔끔 떠는 엘리엇을 보자 루이스도 그제야 인식했다는 듯 정화 마법을 남발했고, 에이든은 민망한 얼굴로 곳곳에 떨어진 세탁물을 주워 통에 넣었다.

    아침에 볼 때는 나름 깨끗해 보였는데. 왜 지금 보니까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엉망일까. 오랜만에 보는 엘리엇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에이든의 귀가 빨개졌다.

    잠시의 소란 끝에 한층 쾌적해진 공기에 만족한 루이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제 방인 양 편한 자세로 허리를 기댄 루이스가 발표라도 하는 것처럼 한쪽 손을 높게 들었다.

    “좋아. 그러면 나 먼저 고백할게.”

    “잠깐.”

    엘리엇이 그를 제지한 후 뭔가를 꺼내 들었다. 돌돌 말려 있던 양피지는 고정한 리본을 풀자 두께감 있는 천이 펴지듯 부드럽게 펼쳐졌다. 드러난 뒷면의 색이 독특했는데, 꼭 액체가 움직이듯 넘실거리는 금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마법학도 루이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철두철미하구나….

    “단시아 포엘의 계약서야. 조건과 기간을 명시하고 서명하면 강력한 제약이 걸리지. 나는 지금 여기에 ‘루이스 클로이, 엘리엇 딜런, 에이든 루스터는 이 서약의 당사자이며, 위 셋을 포함해 르웰린 에드윌과 에르켈 아카레온을 제외한 자에게 서약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한다.’라는 항목을 넣기를 원해.”

    에이든의 이름을 말하며 엘리엇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는 것 같지 않게 냉랭한 눈길에 에이든은 어깨를 움츠렸다. 엘리엇이야 오랜만이라 그렇다고 쳐도, 루이스는 내내 함께 지냈는데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제약 단계는?”

    “최대로 해야지. 아니면 의미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최, 최대 제약이라는 게 뭔데…?”

    아마 그렇게 질문한 것은 에이든 딴에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일 테다. 그걸 알고 있기에 코를 훌쩍이며 묻는 에이든을 보는 루이스의 표정은 따스했다.

    “어기면 죽는 거야.”

    내용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콧물이 나는 거야.’ 따위를 말하듯 가벼운 말투로 죽음을 논하는 루이스 덕에 에이든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 사이 루이스와 엘리엇은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다. 엘리엇은 바짝 굳은 에이든을 달랬다. 에이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얄짤 없었겠지만, 엘리엇은 나름 옛날의 친분을 고려했다.

    “자신 없으면 빠져도 돼. 굳이 네가 무거운 짐을 질 필요는 없지. 부담 가지지 말고 싫으면 싫다고 해.”

    “오… 엘리엇, 말하는 게 제법 스윗한데? 너야말로 연애하는 건 아니지?”

    “헛소리 말고.”

    “아니면 얘기를 듣고 결정해도 돼. 이렇게 아무 설명 없이 그만둬도 된다고 하면 에이든이 섭섭하잖아.”

    거기까지 들은 에이든이 미약한 희망을 싹틔울 즈음 루이스가 웃으며 그걸 밟아 버렸다.

    “듣고도 안 할 거면 기억을 지워 버리면 되니까.”

    결국 에이든의 입에서 우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루이스는 어릴 때에 비해 장난이 심해지긴 했지만, 저런 무서운 소리를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짓궂게 구는 녀석들을 쫓아내고 잘 챙겨 주는 편이었지. 그러니까 저건 진심이라는 뜻이다. 엘리엇이야 말할 것도 없다.

    상황 파악을 조금도 못 했지만, 에이든은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루이스와 엘리엇이 저렇게 무섭게 나오는 이유가 있을 거다. 아까… 르웰린과 에르켈 님 이름을 말했으니까, 둘과 관련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럼, 그럼… 무려 저 둘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비밀 유지가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나름대로 추리 끝에 결론에 도달한 에이든이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가 생각을 마치길 기다려준 루이스가 쓰게 웃었고, 엘리엇도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에, 에르켈 전하께서… 좋은 분인 건 알아.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하고… 황족뿐 아니라 귀족 중에서도 그분만큼 따뜻한 사람은 드물 거야. 무, 물론 루이스와 엘리엇 너네도 좋은 친구지만… 하지만… 그렇, 그, 그래도 이미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고….”

    “잠깐.”

    엘리엇이 말을 끊었다.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찌푸린 얼굴이었다.

    “나는 에르켈 전하를 다음 황제로, 후… 만들자는 게 아니야.”

    “아, 아니, 아니….”

    “아니야.”

    반역의 가능성에 에이든이 덜덜 떨고 있자 엘리엇이 단호하게 답했다.

    “나는 단지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배팅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누구를 반역자로 몰고 가려는 거야. 난 목숨이 소중하다고.”

    “나도.”

    “내가 할 짓 없는 한량이면 다른 생각을 해 볼 여유라도 있었겠지. 하지만 난 가주가 될 거라고. 가문과 함께 불 속에 뛰어들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그게 가당키나 해?”

    “맞아, 맞아.”

    자신이 할 말까지 엘리엇이 다 해 주자 루이스가 할 일은 맞장구치는 것뿐이었다.

    둘의 만담에 조금 누그러진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어쩔 줄 모르고 가슴 쪽에 대며 방어 자세를 취하긴 해도 좀 전처럼 방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는 아니었다.

    “이 중에 제일 겁 없는 건 오히려 에이든 아니야? 중간 단계를 너무 뛰어넘었잖아.”

    “아마… 우리가 너무 겁줘서?”

    죽음이니 뭐니. 일부러 강한 단어부터 꺼낸 건 맞았기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인걸. 차라리 미리미리 알아 두는 게 낫지. 나중에 알게 되면 에이든은 분명 겁에 질려서 사고가 정지될 테니까.

    루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엇의 옆구리를 찔렀다. 계속되는 무시에 힘을 주어 쿡쿡 누르자 짜증 내며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푼 엘리엇이 포기하고 설명을 맡았다.

    “폐하의 건강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어. 곧 큰 변화의 시기가 오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거기서 빠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 잘못 선택하면 모든 걸 잃을 테고, 옳은 쪽을 택해도 피를 볼 테니까.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야. 도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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