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17)
  • #87

    “응.”

    “그걸, 왜 지금 말해.”

    “미안해. 사실 성물이라고 해도 원작에 제대로 등장하는 건 한 가지뿐이라…. 다른 것들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괜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그렇지.”

    나는 차오르는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해는 할 수 있다. 희망을 주입해놓고 불가능하다고 알리는 건 잔인한 짓이다. 그걸 나와 같은 처지인 에르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에르켈의 선택이 맞다. 그런데도 ‘아니, 근데!’ 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울컥하게 되었다.

    “나머지도 찾았나 보네.”

    “다행히. 정확한 위치 파악은 못 했지만, 존재한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에르켈이 웃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진심으로 미안한 듯 아래로 처진 눈썹을 보자 화를 낼 수 없었다.

    “네가 왜 말 안 했는지는 알아. 그래도,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나한테 숨기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응, 응.”

    “온전히 믿어야 할 사이잖아.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는데… 괜한 오해 생기는 거 싫다고.”

    투덜거리는 말에 에르켈이 또 “응,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약속도 했으니 꼭 지키겠다고도 덧붙였다.

    나를 달랜 에르켈이 책을 넘기며 뒤적거리더니, 원하는 페이지를 찾자 그대로 찢었다. 돌발 행동에 놀라 헉 소리를 내는데, 에르켈은 아무렇지 않게 찢어진 페이지를 흔들었다.

    더 기겁할 광경은 그때부터였다. 에르켈이 흔드는 대로 함께 출렁이던 글자들이 녹아내리듯 아래로 가라앉았다. 본래 빽빽하게 채워졌을 부분이 깨끗해지자 그때부터는 물 위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번지더니 다른 글씨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글씨체가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직 실험 단계라 수도로 보낼 수는 없었는데, 보안이 확인되면 앞으로 편지는 이걸로 보낼게.”

    반가운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세드릭 클라인이 이동형 통신 기구 만들기를 기대하며 그레도르의 편지까지 포기했는데. 아직도 그게 안 나왔다는 얘기니까.

    “세드릭 클라인은?”

    “음… 아직인가 봐.”

    에르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온다고 해도 한동안은 힘들 거야. 사용자가 적어서 외부에서 감시하기 쉬우니까.”

    에르켈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두 개는 확실하지 않고, 하나는 확실히 파악했어. 또 하나는…, 그러니까 원작에 등장했던 건, 아마 수도에 있는 거 같아. 경매장에 가끔 ‘영혼을 담는 병’이라는 골동품이 등장했다는 기록을 찾았거든. 이게 우리가 찾는 성물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선 유물이라고 하니 조사해 볼 가치는 있겠지.”

    “보면 확인할 수는 있어?”

    “음, 아마도.”

    아마도라니. 그 병이 다시 경매장에 올라온다는 법도 없는데. 그나마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현재 주인이 절대 못 넘긴다고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렇게 얻어서 우리가 찾던 물건이 맞으면 모를까,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면 한참 밑지는 장사였다.

    “원래는 이게 전쟁이 일어나는 후반이 돼야 등장하는데, 우연히 얻는 거라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나마 외형 묘사는 해 봤으니 보면 감이 올 거 같아.”

    “다른 것들은 아직 파악 못 했다고?”

    “쓰면서 워낙 성물 설정을 여러 번 수정했거든…. 외형도 확실하지가 않아. 그나마 처음부터 못 박아 둔 게 검 정도?”

    에르켈이 아득한 것을 떠올리듯 허공을 보았다.

    “좀 유명하다 하는 검은 다 훑었는데도 아직 못 찾았어. 일단 조사 중이야.”

    “하나는, 아카데미에 있겠고.”

    아마 그게 에르켈이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일 것이다. 아카데미에 있는 성물을 가져가기 위해 도움이 필요했던 거겠지.

    “정확해. 내가 혼자 가져가 보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무리더라.”

    “어디 있길래?”

    웬만하면 알아서 해결했을 에르켈이 나를 부를 정도면, 웬만하지 않은 곳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제일 경계가 삼엄할 법한 곳들을 떠올렸다. 황자인 그가 꺼내 오는 게 무리라고 표현할 정도면, 학생 신분으로는 드나들기 힘든 곳이겠지. 위험해서 출입이 금지된 장소거나, 시험 기간 교수들의 연구실 같은.

    “교장실 안쪽 방.”

    “…어디?”

    “다른 입구도 있긴 한데, 살아서 통과하기는 힘들 거 같고. 그나마 제일 안전한 게 교장실의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가는 거야.”

    ‘살아서 통과’한다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벌렸다. 아카데미에 그런 위험한 통로가 왜 있는지는 둘째치고, 이곳의 교장이라면… 마탑주인 피사 테콘이 아닌가.

    현자의 눈을 피해 그의 방 너머로 간다는 발상이 어떻게 나온 건지 의심스러웠다. 간이 큰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피사 테콘이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그 안에 설치된 마법 장치는 나와 에르켈의 힘으로 풀 만한 수준이 아닐 것이다.

    “너 미쳤어? 거기 있는 걸 어떻게 빼 오겠다는 거야? 교장이면 수업도 없을 테니 정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는 시간도 없을 거 아니야. 마탑주쯤 되는 사람이 안전장치 하나 없을 리도 없고.”

    내 말에 에르켈은 으하하, 소리 내 웃었다.

    “그 부분은 도와줄 사람이 더 있어.”

    발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간 에르켈은 문에 귀를 기울이더니, 곧장 손잡이를 당겼다. 당연히 텅 비어 있어야 할 복도에서 뭔가 쏟아지듯 바닥에 굴렀다. 에이든이 쪼그린 채 자세를 버티고 있었고, 루이스는 그 위에 있다 굴러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둘과 함께 문 앞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엘리엇이 머쓱한 표정으로 무릎을 펴며 고개를 돌렸다.

    “너네… 거기서 뭐 하냐?”

    *

    “혹시 둘이….”

    교수님의 부름이 생각났다며 급하게 나온 것 치고 느긋하게 걷던 루이스가 뭔가 알아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말하는 건 혹시인데, 표정은 이미 확신이었다.

    루이스의 손에 이끌려 나온 에이든은 생략된 뒷말을 계속해 주길 기다리며 소처럼 까맣고 둥근 눈동자를 끔뻑였다. 고만고만한 핑계를 대고 나온 엘리엇 딜런은 코웃음을 쳤다. 순진해 보이는 에이든과 달리 세상만사를 부정하듯 시니컬한 웃음이었다.

    “연애 소설이라도 읽고 왔어? 세상이 전부 로맨틱하게 보이는 모양인데.”

    “그렇지만!”

    아직 복도를 걷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루이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귀를 기울여야 알아들을 수 있게 소곤거리는 정도였다.

    “에르켈 님이 그렇게 반가워하며 눈물까지 보이는 걸 보면… 보통 사이는 아닌 거잖아. 르웰린은 어떻고? 넌 그 애가 누구랑 연애하는 걸 본 적 있어? 하다못해 좋아하기라도? 일단 에르켈 님은 없어.”

    “르웰린이 수도에 돌아온 지 두 달도 안 지났어. 성 밖에 나온 건 한 달도 안 됐고. 첫눈에 반했다는 게 아니고서야 연애는 무리가 있지 않겠냐. 에르켈 님은, 글쎄. 네가 모르는 거 아니고?”

    “아카데미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지 말해 줘? 학생 둘이 식당 끝과 끝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수줍게 웃기만 해도 시선이 몰려. 소문이 빠르게 돈다는 얘기는 해 봤자 입만 아프고. 그런데 제국의 황자가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고? 아무도 모르는 채로? 상대가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게 아니고선 들키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고.”

    루이스의 말에 정설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엘리엇도 같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예전부터 둘이서만 붙어 다니는 일이 많긴 했지. 둘만 남는 일이 많았던 걸 생각해 보면, 그렇게 허무맹랑한 가설은 아닐지도 모른다.

    르웰린이 제게 털어놓지 못한 게 많다는 건 알고 있다. 에르켈 전하도 순진한 얼굴을 한 것치고는 제법 숨기는 게 많은 편이고. 가끔 르웰린이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 없다고는 못 해도 재능이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둘이 작정하고 입을 다문다면 자신이라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르웰린과 4황자가 연애하는 건 아니라는 쪽으로 배팅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보기에 에르켈은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둘이 정말 눈이라도 맞았다면 황자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일 텐데. 그러면 벌써 6년 전이다. 르웰린은 놀이 친구로 입성하기 전에 따로 궁에 들어온 적 없으니, 사랑, 혹은 그 비슷한 걸 했다고 해도 고작 1년 남짓이다.

    어린 시절의 풋내나는 연애로 시작된 연정으로 소식 한 장 전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버틴다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에르켈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르웰린 쪽이면 모를까. 그 녀석은 의외로 마음이 약하니까. 끝이 처져 순하고 다정해 보이는 에르켈의 눈과 대비되듯 올라가 성질 있어 보이는 르웰린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린 엘리엇이 이죽거렸다. 사람은 생긴 것만 봐선 모른다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에르, 에르켈 님과 르웰린이 여,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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