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굳게 닫힌 라히드의 문을 열고 나온 피사 테콘은 임시 인장을 받은 자도 라히드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고, 임시 인장은 마법사가 아닌 자에게도 발급되었다. 그래 봤자 까다로운 조건 탓에 아무나 받을 수는 없었지만, 이 작지만 작지 않은 변화는 많은 바를 시사했다.
물론 마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호칭이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룬칸델은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폐쇄적인 도시로 들어가는 방법이 늘어났다고 해도 여전히 룬칸델과 라히드를 잇는 육로는 활발했다. 게이트 이용료는 워낙 비쌌고, 신분을 보증하는 마법사가 없으면 방문자 확인을 받기 힘들었으니 상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더불어 아카데미도 있다. 사실, 마탑으로 가는 길이라는 점보다 이제 이쪽이 더 중요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어린 귀족들이 돈을 펑펑 써대는 만큼 룬칸델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한창 과도기에 서 있는 도시는 아벨의 말대로 수도나 로베누스 같은 대도시와 달랐다. 척 봐도 역사가 오래된 가게부터, 혀를 내두를 만큼 화려한 가게까지. 한 골목 안에서도 정신없이 달라지는 풍경에 정신은 없었지만, 그만큼 보는 재미는 있었다.
심지어 길의 폭도 들쭉날쭉했다. 어떤 곳은 휑할 정도로 탁 트인 대로였고, 어떤 곳은 골목길보다 좁고 굽어 있었다. 그런데도 음침한 곳 없이 활력 넘친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동물 가게 앞을 지나면 악취가 나고, 낡아 빠진 간판이 새로 올라간 간판에 기대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어깨동무를 포기한 대신 허리춤에 찰싹 붙은 아벨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화색이 되어 나를 끌고 갔다. 곧 “쨘!” 하고 효과음을 입으로 내뱉으며 뭔가를 내밀었는데, 다름 아닌 각기 다른 맛을 4단으로 올리고, 그 위에 초콜릿 시럽을 잔뜩 뿌린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거 좋아했지? 어릴 때 아이스크림을 사 주면 표정이 달라졌는데.”
확실히 어릴 때라면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일 만큼 좋아했을 텐데. 실제 몸이 아니더라도 성장을 통해 입맛이 바뀌는지, 이제 그때만큼 단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좋아해요.”
그래도 기대감이 서린 얼굴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내가 반갑게 받아 들자 아벨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며 올라갔다. 뿌듯한 얼굴로 나를 보는 아벨을 보자 나도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웃는 동시에 어딘가에 치워 둔 줄 알았던 양심이 쿡쿡 찔렸다.
속으로는 아벨을 떨어뜨려 둘 생각을 하는 주제에, 겉으로만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게 걸렸다.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엘리엇과 움직이기 전에 아벨을 어디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찔끔하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벨은 또 한참 걸었다.
아벨은 아카데미라면 질색을 했는데, 평생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던 그가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단체 생활을 하며 대단히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본인은 모범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 그래도 뛰어난 성적과 재능으로 기대를 받은 건 사실이었다.
지금도 위로 많은 상사를 두고 있지만, 그들조차 마탑의 질서가 귀찮아서 황궁으로 피신 나온 마법사들이니 아벨과 성향이 비슷한 듯했다. 아마 룬칸델 근처에는 졸업 이후 발도 디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막힘없이 걷는 걸 보면 신기했다.
룬칸델이 빠르게 변하는 도시라는 걸 생각하면 더 그랬다. 간판이 내려진 곳, 새로 달고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향료 거리를 비롯한 몇 개의 오래된 거리를 제외하면 1년 이상 같은 풍경을 유지하는 곳이 많지 않을 것이다.
*
내가 잠시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막힘없이 걷는다고 모두 길을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가는 동안 이 레스토랑이 아마 룬칸델에서는 제일 괜찮을 거라며 떠들던 아벨의 입은 아무리 봐도 식당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외관의 가게 앞에서 멈췄다. 잠시 말을 잃고 “어….” 하는 소리만 내던 아벨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왜 없지?”
그러게.
정작 나는 놀라지 않았는데, 아벨은 당황해 옆 가게부터 가게 사이 좁은 틈까지 빠짐없이 뒤졌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없는 식당이 마법처럼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마법 용품 상점 앞에는 훌륭한 음식 냄새가 나기는커녕, 감자 껍질조차 굴러다니지 않았다.
한참 거리를 뒤적거리던 아벨이 충격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분명 여기였는데. 이게 왜 없지?”
자신의 기억력이 틀렸다는 것이 못내 경악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렇게 자주 가게가 바뀌는 동네에서 레스토랑 정도야 없어졌을 수도 있고, 자리를 옮겼을 수도 있는데. 그런 건 고려하지 않는 게 참 그다웠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식당을 찾아가자고 아벨을 달래려는데, 그보다 가게 주인이 나오는 게 빨랐다.
“가판 옆에 너무 다가가지 마요. 위험하다고.”
실험용 마법 도구. 지나치게 간결하고 정직한 간판 하나를 달아 둔 것만 봐도 성격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사가 잘되든, 안 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정한 룰만 고집하는 타입. 예상과 달랐던 건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성질을 내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는 까칠했고, 미간 사이 주름이 깊게 패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손님을 대하는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몰찬 반응에 머쓱해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렇게 가까이 붙어 있지도 않았던 거 같은데.
투덜거리며 가판에 올라간 물건들을 미세하게 조정하던 주인은 멀뚱히 서 있는 아벨을 보며 눈을 갸름하게 떴다.
“아벨… 에드윌?”
본인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 의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걸 듣자 나는 지금이라도 아벨의 손을 잡고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닐까 싶어졌다.
졸업하기 전까지 아벨은 여러 의미로 아카데미의 유명 인사였다. 내내 천재 소리를 듣다 갑자기 무단으로 뛰쳐나가질 않나, 여기저기 쏘다니며 재능을 낭비하는가 싶더니 아카데미 역사에 세 번째 조기 졸업자로 이름을 올리지 않나. 그뿐일까. 자기 잘난 걸 숨길 줄 모르는 성격에 더해 제가 좋아하는 것만 기억하는 버릇은 반감을 사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주변에 사람은 많고, 친화력이 떨어지는 편도 아닌데 깊게 사귀는 사이가 없었다. 본인이 흥미를 가지는 몇 가지 주제를 제외하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벨은 친구가 많은 만큼 적도 많은 타입이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하면 장벽이 낮아 보여 그렇지, 이쪽도 여간하지 않다니까. 내가 없는 동안 레오와 아벨이 틈만 나면 싸웠다는 이야기는 웃어넘기기 힘들었다.
다행히 가판의 주인은 대뜸 아벨의 멱살을 잡는 대신 수염이 파르스름하게 올라온 턱을 긁적거렸다. 찌푸린 얼굴도 뭔가를 고민하며 습관적으로 일그러진 것이지, 반감이 더해진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아벨이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친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날 알아?”
“말하는 거 보니 맞군.”
아벨이 눈을 굴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놀란 얼굴이지만, 내 눈에는 입술이 비죽 나온 게 보였다. 짜증 1단계였다.
“기억도 못 하는 거냐. 몇 년이나 지났다고….”
주인은 투덜거리면서도 반가움이 섞인 얼굴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놀랍게도 주인은 아벨의 아카데미 동료였다. 나는 등록금이 어마어마한 아카데미를 졸업한 인재가 이런 작은 가게의 주인이라는 것보다도, 저 얼굴로 아벨과 동년배라는 것에 더 놀랐다. 머리를 넘기지만 않았어도 나았으려나.
하지만 주인의 노력에도 아벨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결국 속이 터진다는 듯 한숨을 뱉은 주인이 신경질을 냈다.
“너는 어떻게 몇 년간 바로 옆 방을 쓴 사람도 못 알아보냐!”
그 말에 아벨이 늦게나마 깨달았다는 얼굴로 “아아!” 했다.
“그러니까… 한스?”
“한스가 아니라 룩스.”
“어, 그래. 룩스.”
“됐다…. 또 등만 돌리면 까먹고 ‘제임스?’ 해댈 놈이 무슨.”
아벨은 웃으며 연신 내게 시선을 주었다. 입꼬리가 비틀리는 게, 슬슬 짜증 2단계로 넘어갈 기미가 보였다. 나는 매몰차게 돌아서지 않고 상대하는 아벨의 노력이 가상해 그의 옆에 가서 손을 잡아 주었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손바닥을 지나 손목까지 꽉 잡고 나서야 만족했다는 듯 멈췄다.
그제야 아벨 옆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는 듯 관심을 준 룩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무언가 말하려고 달싹이던 입술을 다문 룩스는 못 박힌 듯 가만히 있다가, 이내 눈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굴렸다.
“어, 그. 이쪽은.”
귀 끝이 벌게진 채로 더듬거리는 룩스를 보자 뭔가 떠오르려다 말았다. 정확히는 그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감이야 처음부터 잡았다. 그냥, 남자가 내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황태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까지 거북하지 않았는데. 열린 마음을 가졌다면 성별 따위 중요하지 않을 만큼 화려한 미인과 수염을 정리하지도 않은 아저씨의 차이는 컸다. 내가 이렇게 외관을 중요시하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내 동생이야.”
“동생?”
부끄러워하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룩스가 뭔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나를 다시 훑었다.
“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