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17)

#77

얼핏 콧대 높고 붙임성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성격도 까 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잔뜩 벽을 치고 있더니, 볼 때마다 어울리는 무리도 많아졌다. 형제에게 암살당할 뻔하고 도망쳐 나왔는데 살갑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다.

“하루에 세 번 이상 꼬박꼬박 바르고, 이틀 동안 경과를 본 후 상처가 가라앉지 않으면….”

“그래. 고맙다.”

치료사가 말해 준 주의사항을 그대로 다시 읊으려고 드는 디멘시온의 말을 끊어내고 약병을 받았다. 자신의 할 일을 끝냈으면서도 그는 휑하니 돌아가는 대신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자세히 보면 입술이 달싹거렸다. 사과를 하려고 머뭇거리는 게 분명했다.

피를 닦고 확인하자 상처는 크지 않았다. 눈꺼풀을 다쳤다면 몰라도 뺨에 상처가 남는 건 큰 문제도 아니고. 포션을 쓴다면 그마저도 남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얼굴에 흉이 남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지난 5년간 이보다 심하게 다쳤던 적이 수두룩한데 새삼스러운 반응에 나까지 민망해졌다.

“사과할 필요 없다.”

“미안하다.”

사과할 필요 없다니까 그제야 사과를 뱉는다. 됐다며 다시 손을 저었다.

“부러질 거 알고도 안 피한 건 난데 네가 왜 미안해.”

“…….”

“괜찮으니까 들어가서 자라.”

나야 곧 떠나는 손님 신분이지만, 훈련생들의 일정은 빡빡했다. 침대가 간절한 건 나보다 저 녀석일 거다. 이런 깊은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디멘시온은 그답지 않게 계속 말을 꺼냈다.

“수도로 돌아가나?”

“그렇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갈 예정인가?”

“아마.”

스펠먼이 추천서를 써 뒀다고 하니 ‘아마’가 아니겠지만. 은퇴했다고는 해도 제국의 영웅이자 전 총 단장의 추천이다. 감히 에드워드 스펠먼이 밀어 넣겠다는 걸 반대할 인물은 없을 것이다.

원작에서 버려야 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최대한 비슷하게 진행하기 위해 황실 기사단이 되는 건 필요한 일이다.

잠깐의 침묵 후 디멘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왜. 너도 들어가고 싶으면 추천서라도 써 달라고 하지. 그러면 내가 선배 된 기념으로 굴려 줄 수 있는데.”

“황실 기사단은 기수를 따진다고 들었다. 같은 기수끼리는 선후배를 나누지 않는다.”

농담이라곤 통하지 않는 새끼와 계속 얘기하려니 피곤해졌다. 굳이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그래. 너도 잘 자라.”

훈련생들과 부대껴 살면서도 개인의 공간을 철저히 분리하고 존중하는 미래 공작께서는 내가 미는 대로 밀려났다. 문을 닫고 잠시 후에야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고 나서야 침대로 달려들었다. 잘 먹고, 잘 자야 훈련에 집중할 수 있다는 가풍 덕에 이불은 영원히 파묻히고 싶을 정도로 푹신하고 따뜻했다.

열여덟의 생일을 앞둔 열일곱. 이제 다시 수도로 돌아갈 때였다.

*

“너는 정말 개자식이다.”

한참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노려보던 엘리엇이 내뱉은 첫마디는 욕이었다.

“화났….”

“화가 났냐고?”

말을 채간 엘리엇이 후우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허튼소리를 했다. 화가 났냐니. 당연히 엄청 났겠지.

내 얼굴을 본 엘리엇이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떠올려 웃었는데, 그게 도리어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어쩌면 팔짱을 끼고 있는 것도 단순한 기선 제압을 위해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손을 억지로 붙들어놔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내가, 어떻게 화가 나겠어. 네게도 급한 사정이, 미리 말조차 해 줄 수 없는 아주, 매우, 급한 사정이 있었을 텐데. 내가 이해해야지.”

끊어 뱉는 마디 사이에 끓어올라 넘칠 것 같은 화가 넘실거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시선을 피했다. 가족들에게도 편지하지 못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상황을 나아지게 하기는커녕 악화시킬 게 뻔하다.

“네게 깊은 뜻이 있는데, 내가 그걸 파악하지도 못한 채, 화를, 시발, 내는 건. 너무 섣부른 일이잖아. 그렇지?”

“…….”

“비록 나는 네가 수도를 떠나서 제국 국경을 벗어날 수도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난 후에야 네가 떠났다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야. 그마저도 다른 곳에서는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에드윌 성까지 가야 했고, 그곳에서도 흉흉한 기세의 너희 가족들과 마주쳤을 뿐이지만. 어쩌겠어. 네게 아주, 시발, 존나, 급한 사정이… 후.”

한바탕 욕을 쏟아내려던 입을 꾹 다물자 목에 핏대까지 섰다. 잔뜩 찌푸린 미간을 잡고 숨을 고르는 엘리엇을 보자 고개가 끝을 모르고 아래로 향했다.

“그, 잘못했다….”

사실 엘리엇이 화를 낼 줄은 알았어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격할 줄은 몰랐다.

내가 본 엘리엇은 천성이 사업가였다. 정에 얽매이는 것보다 이익을 취하는 쪽이 어울렸다. 그 과정에서 후회는 있을지언정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서 수도에 홀로 남은 게 에이든이나 헬레나 같은 애들이면 몰라도, 엘리엇이라면 당장 이용할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부끄럽지만 그가 에드윌 다음으로 친분을 만들 누군가를 골라 친해졌다 해도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마음의 준비도 해 뒀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거다. 미안하고 민망한 와중에 조금 기뻤다.

새삼스럽게 몰려오는 감동에 나도 모르게 올라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얼굴을 봤다면 엘리엇이 팔짱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온 후에도 바로 연락도 없었지만, 그것도 이해해야지 내가.”

“그건, 진짜 미안하지만 네가 이해 좀 해 줘라.”

돌아온 직후 예상했던 대로 가족들에게 격한 환영을 받았다. 좋게 표현하면 환영인데, 진지하게 따지고 들자면 감금이었다. 그나마 어릴 때는 하녀들이 지켰지, 이제 직접 나섰다.

가족 중 제일 기척을 잘 잡는 레오와 늦게까지 업무를 보는 케일이 각각 내 옆방에 자리를 잡았고, 아벨은 집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걸 감지하는 마법을 걸었다.

덕분에 내가 방에서 나오기만 해도 옆방 문이 벌컥 열렸다. 5년 전, 일하느라 나를 놓친 레오는 휴가도 냈다. 그러고 있으면 곧 케일이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는 얼굴로 달려왔다. 이런 상황에 외출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케일이 다가오는 내 열여덟 살 생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짧은 감금이 끝났다. 엘리엇에게 연락을 해도 되나 고민하다 사람을 보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기는 했는데, 도저히 찾아갈 짬을 낼 수는 없었다.

생일을 기점으로 늦어도 한 달 안에 데뷔해야 했고, 서임식도 준비해야 했다. 스펠먼이 강경하게 밀어붙인 끝에 바로 기사 작위를 받게 됐으니 견습 생활을 할 필요가 없어 좋아했는데. 연예인 수준으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약간 후회가 되었다.

이 정도면 나름 빠르게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생일까지 4개월이나 남았다고 여기는 건 나밖에 없는지, 가족들은 고작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루에도 수십 번 옷을 갈아입으며 연회용 정장을 맞췄고, 어릴 때 배우고 한참 써먹지 않아 까먹은 춤을 급하게 익히기 위해 선생도 초빙했다. 다른 연회라면 모를까. 내가 수도에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비추는 자리이자, 일생에 한 번뿐인 데뷔이니만큼 아무렇게나 진행할 수 없다는 게 케일의 주장이었다.

물론… 나도 데뷔를 대충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마땅한 파트너를 찾기 위해 산더미처럼 몰려든 편지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초상화까지 마법으로 띄워 놓고 가문, 형제 관계, 외모, 성격에 더해 연회 당일 내가 입을 옷과 컨셉이 잘 맞을 것인가까지 고려하고 있는 케일과 아벨을 볼 때면 좀 당혹스러웠다.

내 고집대로 오래 떠나 있다가 돌아왔으니 웬만한 건 맞춰 주자고 다짐하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역시 아직 내가 입을 옷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상대의 머리카락이 금발인지, 은발인지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입 밖으로 그런 생각을 꺼내 봤자 아벨이 절망적인 얼굴로 ‘이래서 검 드는 사람들이란!’ 하고 슬퍼할 게 뻔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이미 비슷한 타박을 받은 레오는 기가 한풀 꺾인 채 ‘막내 데뷔 연회 컨셉 고르기’에서 쫓겨났다.

덕분에 숨을 좀 돌리기까지 꼬박 이 주가 걸렸다. 나름대로 최대한 빠르게 엘리엇을 찾아온 거라 그 부분을 지적하면 조금 억울하다.

내 긴 변명을 들으며 간신히 화를 추스른 엘리엇이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는 그런 모습이 새삼스러워 엘리엇을 살폈다. 5년 사이 그는 더 이상 소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크더니, 지금도 남들보다 반 뼘은 커서 머리가 튀어나와 보일 정도였고, 조금 날 선 얼굴은 처음에 호감이 갈 만큼 서글서글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믿음을 주기 수월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것 정도가 단점일까. 그것마저 마른 뺨과 단단한 턱, 짙은 눈매에 잘 어울려 우아했다.

내 자식도, 동생도 아닌 엘리엇이 그렇게 잘 자란 걸 보니 내가 다 뿌듯할 지경이었다.

“이상한 표정 짓지 마.”

엘리엇이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상한, 표정 뭐.”

“대견하다는 듯 보는 늙은이 같은 얼굴 말이야.”

찔끔한 내가 그런 적 없다고 부정하자 엘리엇은 더 따지고 드는 대신 뭔가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툭, 가벼운 소리를 내며 안착한 것은 편지였다.

“이게 뭔데?”

“아카데미 졸업 무도회 초대장. 에르켈 전하께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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