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때려치우고 싶다, 진짜.”
조금 전까지 노곤하게 풀어졌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인상적이었던 첫 만남부터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모습까지 차례로 되짚자 스트레스에 속이 쓰렸다. 진저리치며 어깨를 떨던 나는 물에 좀 더 깊이 들어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물속에서 몸을 웅크리자 억지로나마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스펠먼가에 눌러앉고 싶었다.
황태자의 전적으로 인한 거부감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반응을 짐작도 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컸다. 짐작할 수 없으니 대비할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황태자라면 나를 소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스펠먼이 버티고 있다 한들 신하의 신분이다. 황태자의 명령이라면 그대로 행해야 한다. 설사 명령의 형식이 아니라 툭 던지듯 내뱉은 말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태껏 조용했다는 건, 그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는 의미다.
매주 불러대던 건 언제고.
짧게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하더니. 당시 충격이 너무 커 허우적거리느라 의심해 볼 생각도 못 했는데, 그 얼굴이 흐릿해질 즈음 돼서 다시 떠올려보자 그마저도 연기가 더해진 건 아닐까 싶어졌다.
황태자의 성격이나 전적을 떠올려 보면 아주 가능성 없는 일도 아니다. 그 속내를 알 수 없으니 의심만 쌓였다.
원작의 억지력이 발동된 건 맞고, 덕분에 사랑에 빠진 것도 맞기는 할 거다. 그런데 옆에 두려는 노력이 없다. 보통 그 정도 지위에 있으면, 아니 보통의 경우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으려고 하지 않나?
자신이 언제든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불리한 상황을 길게 유지하지 않으려 드는 게 사람 마음이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감에 고민이 깊어졌다.
나는 이제 완전히 성장해, 노약한 황제를 대신하고 있을 그와의 재회를 떠올려 보았다. 10대 중반 때만 해도 사람을 홀릴 듯 아름답던 얼굴이 성인이 된 후에는 어떻게 됐을까.
마주치면 상냥하게 웃을까? 아니면 냉정하게 굴까? 갑작스레 찾아온 첫사랑에 놀라 정신 못 차리다 퍼뜩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 그래서 냉철한 이성이 자꾸 멋대로 날뛰는 감정과 나를 향하려는 마음을 억누르게 된 걸까? 그게 가능한 건가?
똑똑.
생각이 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는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방 제일 안쪽에 있는 욕실에서 문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 터라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다행히 풀이 스치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잡아냈다.
착실한 모범생께서 요청한 약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배스 가운을 걸쳤다가, 르웰린의 얼굴과 상대의 역할을 고려해 셔츠와 바지를 꿰입었다. 발끝으로도 남자를 꼬신다는 원작자의 표현답게 르웰린은 화려한 얼굴로 자랐다.
햇빛 아래에서 아무리 굴러도 잠깐 빨갛게 달아오를 뿐 타지 않는 피부도, 옅은 색으로 반짝이는 금발도 여전하다. 형제들의 것과 닮은 보라색 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크게 변한 게 있나 싶지만, 어릴 때는 대충 귀엽다 정도로 퉁 칠 수 있던 것을 이제 그럴 수 없게 되긴 했다.
장밋빛 뺨, 길게 늘어진 속눈썹, 섬세한 이목구비 따위의 미를 논할 때 붙는 상투적 표현들이 빠짐없이 맞아떨어졌다. 나였어도 이 얼굴을 처음 봤다면 감탄했을 것 같다. 그게 내 얼굴인 게 문제지만.
운동을 열심히 한 것에 비해 근육이 제대로 붙지도 않았고, 케일이나 레오를 보며 기대한 만큼 키가 크지도 않았다. 유전자의 힘으로 반 뼘 정도는 더 자랄 줄 알았는데. 매일 방에 박혀 햇빛을 볼 일도 없이 연구만 한 아벨의 키도 넘지 못했다는 건 좀 씁쓸했다. 그나마 눈매가 제법 날카로운 덕에 볼살이 빠지며 예민한 인상이 됐다는 게 위안이었다.
문을 열자 단정한 차림의 디멘시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흔들림이라곤 없는 눈과 언제나처럼 냉랭한 얼굴. 열기 넘치는 곳에서 구르면서도 그에게서는 매번 겨울을 매달고 온 것처럼 삭막하고 건조한 냄새가 났다.
이러니 처음 디멘시온을 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밖에.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벼락같은 예감이었다. 이놈이다. 이 녀석이 공작이구나.
네 명의 주연 중 아직 만나지 않은 게 한 사람뿐이라는 건 제쳐 두더라도, 당시 디멘시온은 누가 봐도 평범한 출신이 아니었다. 너희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여는 일이 드물었고, 검은 머리카락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은 곱상한 도련님의 그것이었다. 그야말로 알아채지 못하면 그게 등신인 상황이었다.
처음 스펠먼 저택에 대련하러 가서 디멘시온을 만난 후 고민하다 스펠먼을 떠봤다. 정확히는 떠보려고 했는데 그가 받아 주지 않아 매달려 닦달했다. 내 미래가 걸린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외치며 매달리자 스펠먼은 어린 제자를 이기지 못해 언질을 해 주었다.
원작의 서브였던 카르윈 디멘시온은 공작가의 막내아들이었다. 사실 이건 예상 못 한 부분이라 조금 놀랐다. 나중에 공작이 된다길래 당연히 장자인 줄 알았는데.
공작령은 워낙 다른 지역과 교류가 적은 폐쇄적인 영지인 데다, 제국의 국경 중 유일하게 외부 세력과 마찰이 일어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국법으로 정해진 귀족 사병보다 더 많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상 제국과 분리된 국가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외국이라면 꾸준히 교류하고, 정략혼을 통해 핏줄이 섞이기라도 하지. 디멘시온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나마 현 공작 부인이 외부 출신이라는 얘기가 있긴 한데,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미 장성한 형제들이 있는 상황에서 재능 넘치는 막내란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한참 어린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던 형제 몇은 기어코 그를 죽이려 들었다. 다행히 공작 부인이 아들을 빼돌렸다. 마침 스펠먼은 디멘시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검술 명가인 데다, 그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재능에 따라 가르치겠다는 이념으로 훈련생 모두의 성을 은닉하는 대단위 마법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스펠먼이 일러 주기로는 디멘시온가의 장자와 막내인 카르윈의 나이 차이가 나와 케일보다 더 많이 났다. 에드윌이 이례적으로 형제간의 사이가 좋은 편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른을 앞둔 놈이 10대 초반 어린 동생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게 좀. 황가도 개판이라지만 그나마 거기는 형제마다 어머니가 다르기라도 하지. 이쪽은 부모가 모두 같았다.
하다못해 애가 좀 커서 두각을 드러낸 후 견제하거나, 제대로 실력을 겨뤄 보기라도 했으면 덜 추했을 텐데. 이제 막 진검을 들기 시작한 어린애를 죽이려고 드냐. 나는 얼굴도 모르는 공작가 장남을 떠올리며 질색했다.
그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가문을 이어받는 건 그들이 쫓아낸 막내라는 미래를 알고 있어서 더 가소로웠다. 나는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디멘시온을 바라보았다.
장차 형제들을 제치고 공작이 될 남자는 내가 문을 제대로 열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는 상황에서도 재촉조차 않고 얌전히 있었다.
늦은 시간에, 침실이라는 점을 고려해 다른 놈이었다면 손만 뻗어 약을 받았겠지만…. 아니, 반대지. 다른 놈이면 몰라도 디멘시온은 경계해야지.
나는 순간적으로 풀어진 경계에 놀라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르웰린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든 주역이라는 걸 알고 있다. 분명 인식은 하고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라는 듯 자꾸 믿음이 샘솟았다. 하여간 얼굴이 문제다. 르웰린이 된 후 저렇게 덤덤하다 못해 감정을 덜어낸 듯 보이는 시선을 받은 건 처음이라 자꾸 근거도 없는 친밀함이 튀어나온다.
아무리 잘 갈무리한다고 해도 한번 지닌 욕망은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게 어떤 종류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디멘시온의 눈이 무언가를 열망하며 반짝일 때는 검을 맞부딪치는 순간뿐이었다.
혼자만의 직감이었다면 무시했을 것이다. 그래 봤자 그를 보는 시간은 1년에 몇 번 되지도 않는데, 그것만으로 믿음을 가지기에는 무리가 있다. 겉으로만 보면 세드릭 클라인도 순하고 귀여웠다. 하지만 그를 아는 모두가 내린 결론은 한 가지였다. 카르윈 디멘시온은 눈앞에서 나체로 춤을 춘대도 성적으로 흥분하기는커녕 자신의 옷을 걸쳐 줄 새끼였다.
친해진 훈련생 중 하나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알려 준 일화였다. 제 딴에는 웃긴 얘기라고 꺼낸 것은 내 호감도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 이런 놈이 기사를 해야지.
디멘시온은 은근히 본인을 호구 취급하는 순간에도 담담하게 식사나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날이 경계가 완전 허물어진 날이었을 거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긴 한데, 하는 짓이 영 정붙이기 어려운 나머지 셋과 달리 디멘시온은 정말 담백해서 곁에 있어도 불편하고 껄끄러운 게 없었다.
그나마 최후의 보루로 벽 하나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씨씨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흑역사 덕분이다. 세드릭 클라인이 성별과 이름을 숨기고 앙큼하게 굴었던 전적이 없다면 투닥거리는 사이 디멘시온과 친구 따위로 묶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꽤 괜찮은 녀석이긴 한데. 아쉬움이 있기는 했다. 이쪽이 메인이었다면 원작을 따라가 틀어짐을 줄여 보겠다고 결심하기가 좀 쉬웠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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