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상대도 나를 알아봤는지 발을 굴렀다.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나는 나보다 작은 녀석이 발버둥 친다고 놓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곧 도망치려는 시도를 그만둔 꼬맹이가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자, 잘못했어요.”
내가 베리넌처럼 경비대에 넘겨 손을 자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녀석은 덜덜 떨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덜덜 떨리는 작은 손에 들린 건 돈도 아니고 빵 봉투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또 착잡해졌다. 내가 뭐라고 얘를 동정할 수 있겠나 싶으면서도, 아무것도 해 줄 생각이 없는 스스로가 저열하게 느껴졌다.
내가 답하지 않자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다 결국 얼굴을 푹 숙였다. 붙잡은 옷을 놔주었는데도 쉽게 달아나지 못하고 다리가 주춤거렸다. 저번처럼 돈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지고 나온 게 별로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주머니에서 로켓을 꺼냈다.
“미안하면 부탁 하나 해도 돼?”
“네, 네?”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 아니면 너 가져.”
언젠가 루크 손에 들어갈 물건이 이게 맞으면 어떻게든 들어갈 테고, 아니면 말겠지. 사실 이대로 꼬맹이가 이걸 들고 가서 판대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당장 루크에게 전해 줄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주인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로켓을 받은 소년의 눈이 불안하게 굴렀다.
“어떤 사람, 이요?”
“검은 머리에 눈은 노란…. 아냐, 그냥. 혹시 오면.”
지금 이걸 보고 있지 않은 이상 루크가 딱 맞춰서 이 녀석 앞에 나타날 일은 없었다. 차라리 꼬맹이가 팔아서 끼니라도 해결하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빵 봉투를 끌어안은 채 로켓이 밖으로 비치지 않게 두 손으로 쥔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
돌아와서는 편지를 완성했다. 미리 써 두었길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여럿에게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 있는 애들이야 어차피 내가 돌아올 즈음에야 수도에 올 테니 우선순위에서 뺐다. 그러자 명단은 빠르게 추릴 수 있었다. 비슷한 말을 단어만 바꿔 가며 쓰다 보니 가족들에게는 한 번에 보내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서운해할 걸 뻔히 알면서 그러기는 어려웠다. 이제 아벨이 창문틀에 기대 청승을 떨어도 달래 줄 수 없으니까.
황태자를 목록에 넣어야 할지 오래 고민했지만 역시 뺐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지만, 편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에드윌 성에 있을 때는 매주 꼬박꼬박 초대장을 보내더니, 정작 내가 로베누스에 오자 입을 싹 닦은 게 괘씸한 탓도 컸다. 첫사랑이라더니. 고작 그 정도의 정성으로 사람 마음을 얻으려고 했냐?
대신 세드릭 클라인은 잊지 않았다. 얄미워도 계획에 필요하기는 하니까.
부디 잘 지내길 바란다는 말 뒤에 씨씨를 쓰는데 순간 분노로 손이 좀 떨렸지만, 그 정도는 급하게 썼다고 이해해 줄 것이다. 사실 지가 이해를 안 하면 어쩔 건가 싶었다.
몇 년의 부재로 그가 나를 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갑작스레 돌변해 달큼하게 구는 황태자나, 속을 통 모르겠는 루크에 비하면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세드릭 클라인이 차라리 갸륵했다. 나에 대한 그의 호감만큼은 진심일 것이다.
하녀에게 내가 떠난 뒤 편지를 보내 달라 전해 두고 마지막 여유를 즐기며 침대 위에 늘어졌다. 이제 정말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정말 그 고생길을 걸을 거냐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더 쉬운 길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혹하지 않은 건 아니다. 차라리 정말 황태자를…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보다 정신은 한참 어리고, 성격은 더러운 데다, 심지어 달릴 거 달린 놈과 입 맞추고 배 맞추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15. ‘서브’ 등장
뭔가 다가온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몸을 굴렸다. 찰나의 차이로 피하자마자 검이 내 다리가 있던 곳을 스쳤다. 흙이 깊게 파이는 걸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인정사정없는 새끼. 저걸 그대로 맞았다면 훈련용 검이라고 해도 뼈가 부러졌을 거다.
나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크게 움직인 직후에는 조금이나마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기껏 잘 피해 놓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몸을 낮추며 거리를 좁혔다.
상대는 취향껏 검날의 길이와 무게를 늘려 둔 상태다. 지금까지의 속도를 고려한다면 가능하다. 다리를 축 삼아 허리를 틀어 베면….
끼기긱.
어느새 올라온 묵빛의 검이 내 것을 가로막으며 마찰음을 냈다. 언제 봐도 괴물 같은 반응속도였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성장한 건 당연하고, 처음보다도 빨라진 것 같았다. 훈련 중에 각성하는 타입인 건지, 지금까지 봐준 건지.
어느 쪽이라고 해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다.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자 조급한 마음에 짜증이 일었다. 침착하자고 되새기는 말도 큰 효과가 없다.
속도가 빠르면 힘이 좀 약하든가. 힘이 셀 거면 속도가 느려야 정상 아닌가? 둘 다 가질 거면 노력이라도 좀 덜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재능을 믿고 노력하지 않는 천재 따위는 그에게 적용되는 수식어가 아니었다. 저놈은 노력하는 천재니까.
확실히 최고가 될 몸은 다르다는 건가. 짧게 숨을 돌리며 반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겨울을 연상시키듯 시린 푸른색의 눈은 그의 성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공작이 될 몸이 성을 숨긴 채 스펠먼가의 훈련생으로 들어와 있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어차피 내가 맞붙을 건 현재 최고라고 불리는 조슈아 브레티가 아니라 그 자리를 차지할 미래의 디멘시온 공작, 즉 눈앞의 상대니까. 스토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서브’와 미리 안면을 터서 나쁠 것도 없고.
물론 원래 수도에 잠깐 들렀을 때 르웰린과 만나야 하는 그가 이렇게 등장했다는 건, 원작이 비틀려 발동했다는 뜻이니 착잡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예상보다 실력이 대단하니 더 그랬다.
하다못해 상대가 당황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땀만 닦으면 그대로 연회장에 내보내도 될 만큼 멀쩡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잡념이 일었다.
검이 하나 더 있으면…. 양손을 번갈아 가며 검을 잡는 것에는 익숙해졌으니 쌍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잠깐 올라왔다. 하나가 막혀도 다른 하나로 공격해 저 상판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면 좀 괜찮을 것 같은데.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스승이 들었다면 차마 말로는 못 하고 표정으로 ‘이런 한심한….’ 했을 것이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힘을 줘도 간신히 밀려나지 않을 정도로 맞붙으며 검날이 쟁쟁하게 마찰하는데, 한 손을 빼다간 그대로 힘에 밀려 나가떨어질 거다.
“집중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불퉁한 목소리였다.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는 한눈팔 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공격이 이어졌다. 막고, 쳐내고, 끊어내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캉!
횡으로 날아오는 검을 막아냈지만, 몸이 비틀거렸다. 그대로 몰아붙이겠다는 듯 그가 힘을 주자 버티고 서 있던 발이 죽 밀렸다. 힘을 빼고 몸을 뒤로 젖히며 땅을 박차 거리를 벌리고, 다시 파고들었다.
안압이 높아질 만큼 예민해진 감각에 상대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왼쪽 위, 허벅지, 그대로 이어져 허리. 막기 번거로운 곳만 골라 날아오는 검은 확실히 날카롭고 빠르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간 제국 최고 기사라는 스펠먼의 검을 지겨울 정도로 봐 왔는데, 저 어린놈한테 공격을 허용했다간 그간 먹은 밥을 토해내야 할 거다.
흘려낸 검을 다시 쥐고 그대로 베었다. 막히면 다시. 다시. 기회를 노리며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도통 빈틈을 내주지 않았다. 딱 한 번만 틈이 난다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마에 땀과 함께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거슬려 대충 털어내며 숨을 골랐다.
조급해하지 말 것, 틈을 봤다면 공격하지만, 물러날 때를 알 것.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조언이 스펠먼의 엄한 목소리 그대로 재생되는 기분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거리를 유지했다. 옅은 푸른색의 눈이 내 움직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왔다. 하얗고 서늘한 얼굴에는 아까 내가 만든 생채기가 길게 나 있었다. 차분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도 숨이 거칠어져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대련이 시작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지쳐 가는 것도, 슬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응원하는 소리가 컸던 처음과 달리 주변도 조용했다. 손에 땀을 쥐고 보고 있을지, 지루해진 대결에 떠난 것인지 알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는 대신 얌전히 검을 다시 쥐었다.
스펠먼은 꼭 생긴 대로 완고한 검사였다. 아티펙트의 도움을 받는 건 실력 향상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그의 고집에 따라 일찍 든 진검의 무게는 이제 몸의 일부처럼 익숙했다. 검 끝까지 감각이 이어진 것처럼 검날의 위치, 그 위를 스치는 공기까지 고스란히 느꼈다.
이렇게 집중이 잘되는 순간은 많지 않은데. 나는 후, 숨을 불어 앞머리를 날렸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저 얼음 인형 같은 녀석과의 대결이 도움이 되는 건 맞는 것 같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