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17)

#73

14. 전략적 후퇴와 자발적 고난

몸을 흔드는 감각에 눈을 떴다.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했는지 깨우던 손길은 물러났다. 아직 방이 어두운데…. 일정한 기상 시간이 몸에 밴 뒤에 늦게 일어나는 일은 드물었기에 하녀가 나를 깨우러 올 일은 없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몸을 틀어 창을 확인했다. 암막 커튼을 친 것도 아니었다. 커튼이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미약해 아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몽롱하게 잠에 취한 채 눈만 깜빡였다. 내가 늦게 일어난 게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을 시간인 게 분명했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나를 깨운 하녀가 난감하게 이유를 말했다. 손님이라는 말에 일단 상체를 일으키기는 했으나 고개가 자꾸 꾸벅꾸벅 기울었다. 이 아침부터 손님이라니.

“꼭 지금 만나 봐야겠다 하시는데, 역시 돌려보낼까요?”

그쯤이 돼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택으로 찾아오는 것은 상당한 무례다. 찾아가는 일도 별로 없지만, 찾아간다 해도 만남을 허락받는 경우는 드물다. 황실 기사단 부단장쯤 되는 인사가 주인인 저택이라면 더 그렇겠지.

고용인들이 차마 내치지 못하고 들일 정도면 웬만한 신분이 아니라는 거다. 그중 차남이 아닌 르웰린을 찾아올 만한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 적은 사람 중에서도 수도에 묶여 있을 사람, 미리 연락을 주고 예의를 갖춰 줄 사람을 빼면 떠오르는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손으로 두 뺨을 때리며 잠을 몰아냈다.

“형님은?”

“일찍 나가셨습니다.”

벌써 출근한 모양이었다. 공무원이면 칼 같은 출퇴근 시간이 매력인 건데. 몇 년 후에는 그처럼 기사가 되어 근무할 미래를 떠올리자 착잡했다.

지금 상황에서야 다행이긴 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손님이 가져온 소식은 그에게 전혀 달갑지 않을 테니까.

*

응접실의 손님은 역시 에드워드 스펠먼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빠르게 옷만 갈아입고 내려온 나를 발견한 그의 수염이 씰룩거렸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내 편지의 답을 알 수 있었다. 답장이 늦길래 혹시 거절할까 봐 걱정한 게 무색해졌다.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진심이냐?”

스펠먼은 근황을 묻는 사소한 질문 대신 대뜸 정곡부터 찔렀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문관과 무관은 다른 듯했다. 노 기사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엄숙해 보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드물게 기쁨과 흥분이 차 있었다. 여기서 그의 기대를 배신하는 대답을 했다간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호기심을 누르며 답했다.

“네.”

“다시 생각해 봐라. 정말 진심이냐?”

“네.”

이어지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적당히, 모자라지 않는 실력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내 한 몸 지킬 수준은 돼야 하고, 남을 지키겠다고 나설 수 있는 정도면 만족스럽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좋은 스승과 혹독한 수련이다.

그걸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게 황태자에게 유일하게 감사하고 있는 점이다. 만약 스펠먼이 없었다면 나는 언젠가 백작이 그랬던 것처럼 조슈아 브레티라도 스승으로 삼겠다고 북부로 향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스펠먼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택한 겁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지 오래다. 나는 그에 대응하듯 단호하게 답했다.

사실 후회를, 하기는 하겠지. 입에 단내가 나도록 구르다 보면 따뜻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가 그리워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폐는 터지도록 숨이 차는 일상을 겪으면 곧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들 것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고, 한 달만 지나도 눈물과 함께 잠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 달도 안 걸릴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얌전히 앉아 가족들이 챙겨 주는 간식이나 받아먹을 거라면 장르를 틀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나마 원작의 르웰린 에드윌은 미래를 모르기라도 하지.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두 손 놓고 있다면 그보다 더 멍청한 것 아닌가.

몸 좀 편하자고 나태해졌다간 지금 이 순간은 두고두고 미련이 되어 후회로 남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그나마 원작에서 아카데미 생활이 자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세드릭 클라인과 편지를 나눈다는 묘사 외에는 별게 없었다고 하니까. 에르켈의 기억력을 믿기는 힘들었지만 원작자가 아카데미물 자체는 취향이 아니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만약 그곳에서 중요한 사건이 더 일어난다면 후폭풍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그걸 따라가야 했을 것이다.

“오후에 다시 오마. 짐은 간단하게 챙겨라.”

“바로 갑니까?”

나도 수도에 들르지 않고 바로 그를 따라갈 각오를 하기는 했지만, 설마 당일에 출발할 줄은 몰랐다. 당황해서 묻자 그는 이미 다 식은 차를 물처럼 들이켰다.

“네 형들 정도야 문제가 안 된다만, 백작이 직접 오겠다고 하면 일이 커진다.”

바로 납득했다. 가족들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않고 갈 생각을 한 건, 그만큼 그들의 반발이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어쩌면 그것보다 길어질지도. 그때 가서 몰래 나가려고 해도 이미 가드가 올라갔으니 난이도가 훨씬 높아진 상태일 거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 뜻에 꺾여 주기야 하겠지만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며칠 시간을 끌다 저번에 레오가 한 것처럼 백작이 마법석을 타고 게이트로 온다면 일이 커진다. 설마 기사도 아닌 은퇴한 문관이 군용 게이트를 탈까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미 르웰린에게 반한 황태자 입장에서도 내가 몇 년이나 멀리 떠난다는 게 달가울 리 없으니, 옳다구나 하고 허가를 내릴지도.

하지만 여전히 로베누스에는 제일 강적이 남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살고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하고 그냥 가 버리기에는 좀…. 그렇다고 관사로 가서 ‘형님. 저는 스펠먼 경과 함께 떠납니다.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했다간 어떻게 될지 뻔했다. 케일 정도의 권력과 아벨 수준의 결단력을 가진 레오라면 기사들을 이용해 내가 나가지 못하게 잘 ‘보호’하려 들 것이다.

내가 고민하며 앓고 있자 스펠먼은 한숨을 삼킨 채 결단을 내렸다.

“레오폴드에게는 내가 가마.”

“네.”

해 준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되묻지도 않고 밝게 대답했다.

*

포장되지 않아 흙이 드러난 땅을 발로 밀자 흙먼지가 일었다. 평소처럼 갈색 머리로 염색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채였다면 당장에 그만두지 못하겠냐는 고함이 울렸겠지만, 비싼 옷을 입고 금발을 잘 정돈한 어린 도련님은 뒷골목에서 불가침의 대상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교환하기 위해 구매한 빵 봉투를 구기며 신발 끝을 노려보았다. 골목을 걸을 때면 흐물거리고 끝이 딱 맞지 않는 낡은 신발을 신곤 했는데. 지금 신은 것은 딱딱했다. 흙먼지가 묻어 광택을 잃기는 했지만 닦아내면 또 번지르르한 빛을 낼 것이다.

루크와는 그날, 그가 협박 같은 경고를 한 저녁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골목을 기웃거리는 일을 그만뒀고, 그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후자에 대해서는 기대가 없기도 했다.

루크가 그렇게까지 위협적으로 굴었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순간 장난기를 담고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가지고 있던 신뢰마저 증발할 것 같은 미소였다. 나는 억지로 루크에 대한 믿음을 다시 세웠다. 그가 그렇게까지 멋대로 구는 놈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정말 내게 흥미가 식었든, 다른 일이 생겼든. 그의 말대로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설사 아무 일도 없다 한들 그렇게 가시를 세우고 있는데 경고를 무시하고 침범해봤자 좋은 꼴을 보기 힘들 테고.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해결법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 정도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이미 떠나기 위해 짐을 챙겨 두고 나왔는데,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에 매달리느라 미룰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예 이렇게 대놓고 찾아오면 나타날 줄 알았는데.

거리 출신인 척 얄팍하게 속이던 걸 그만두면 나타날 거라 기대했는데, 이것도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루크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꺾이자 속이 심란했다. 그냥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게 맞나? 질문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체온에 닿아 미지근해진 로켓이 만져졌다. 겉이 매끈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거리의 싸구려와 헷갈리지 말라고 일부러 비싼 걸 골랐는데.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가려 하는데 무언가 몸을 치고 지나갔다. 실루엣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며 발을 걸었다.

“악!”

넘어지기 전에 옷을 잡아챘다. 목이 졸렸는지 켁, 하는 소리가 났다. 이 꼬질꼬질한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가만히 얼굴을 살피던 나는 눈물 맺힌 검은 눈을 보고서야 그가 루크를 만난 날 내 지갑을 털어 간 그 소매치기라는 걸 알아챘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