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목소리는 여전히 사근사근했고, 녹아 눌어붙은 것처럼 끈적하게 귓가에 닿았다. 귀가 간지러워 긁고 싶을 정도였다.
“헛소리, 마.”
억울함에 목소리가 뭉그러졌다. 지가 데려와서 보여 줘 놓고, 집중하니까 내 탓을 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적어도 그의 의도가 내 시선을 끌기 위한 거였다면 성공이다. 요란하게 울리던 음악 소리는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설마하니 갑작스럽게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루크의 키워드를 떠올리며 눈을 굴렸다. 아직 제대로 달성한 게 없는데. 그러면 반하지 않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퍼즐을 들고 이게 빈칸에 들어갈지, 아닐지 한참 재던 중 덜컥 깨달았다. 꼭 반해야만 몸을 붙이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특히나 이렇게 목숨이 값싼 곳에서는 사랑 따위 없는 관계가 더 흔할 것이다.
지나치게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여기서 이 새끼가 덤비려나? 그러면 내가, 그걸 뿌리칠 수 있나?
성인은커녕 아직 뭐가 제대로 크지도 않은 나이에 이런 걸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갑자기 추위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바짝 얼어 있는 나를 보던 루크가 손목을 놔주었다. 붙잡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마자 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그래 봤자 벗어날 공간이 별로 없었지만, 더 이상 그의 옆에 붙어 있고 싶지 않았다.
루크는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거리를 좁혔다. 바짝 다가온 얼굴에 장난기가 보였다. 이번에는 입을 맞추려 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상체를 뒤로 젖혀 최대한 피했다. 그는 내가 곤혹스러워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딱딱하게 말했다.
“저리 비켜.”
“그렇게 날 세우니까 괜히 건드려 보고 싶어지잖아.”
개소리하지 마. 차마 뱉지 못한 욕을 삼키며 노려보자 루크의 얼굴이 멀어졌다.
“왜 그렇게 노려봐.”
“…….”
“다른 짓이라도 할 거 같았어?”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시근덕거리며 몸을 좀 더 떨어뜨렸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단 얼굴을 보자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웠다. 내가 느낀 위협이 너무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진 탓이다. 지레 겁먹은 건 맞지만, 아예 가능성 없는 일로 놀란 것도 아니었다.
애써 그를 무시하며 다시 공연을 바라봤다. 물론 그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신경이 자꾸 옆으로 쏠렸다. 결국 포기한 나는 한쪽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기댔다. 차라리 대놓고 보면 장난질이 줄어들까 싶었다. 애써 무시하면 할수록 더 건드려 보고 싶은 모양이니까.
낮의 끝, 밤을 향하며 붉게 남은 태양의 흔적도 사라져 갈 시간, 하나둘 켜지는 등불이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을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분명히 나뉜 얼굴은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웃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상처 위에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나도 모르게 그걸 걷어내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루크는 그런 나를 보며 바닥에 손을 짚고 느슨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나는 조금 전까지의 짜증도 잠시 미뤄 두고 눈앞의 풍경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원작자의 엄선된 기준을 넘고 주역을 맡은 놈들이니만큼 얼굴 하나는 정말, 남달랐다. 한 명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무려 서브니까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황태자가 보석 같았고, 세드릭 클라인이 인형처럼 잘 다듬어진 느낌이었다면 루크는 오래된 명화 같았다. 자주 웃음을 달고 있는 주제에 음울한 빛이 시선을 끈다는 점이 그랬다. 흉터가 남을 게 뻔한 상처가 좀 걸리긴 했지만, 원체 본판이 우아해서 그마저도 부기가 빠지고 나면 썩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렇게 넋을 놓고 쳐다보면 오해하는데.”
“…오해?”
내가 멍청하게 되묻자 루크의 얼굴이 좌로 기울었다. 느긋한 웃음을 띤 얼굴은 얼핏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다 할 감투를 쓰지 않은 지금도 이런데, 몇 년 후에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나는 괜히 루크를 건드린 게 아닌가 후회되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역시 조금이라도 어릴 때가 낫지. 그러는 사이 금색 눈이 집요하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루크는 이번에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데려다줄게. 또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
그래 봤자 만나는 곳에 데려다준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루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바깥까지 나왔다. 골목의 낮과 밤은 풍경이 전혀 달라 낯설 지경이었기에 거절하지는 않았다.
옷자락도 스치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루크의 옆얼굴을 흘끔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계산했다.
그는 오늘따라 이상했다. 평소에는 만나서 시답지 않은 대화나 나누다, 갑자기 공연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도 그랬고, 내가 따라가지 못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앞서 나가 버리더니, 느긋하게 걷는 것도 그랬다. 꼭 내 걸음에 맞춰 주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그 탑도. 입구가 막혀 아까처럼 지붕을 타고 넘어가야 들어갈 수 있는 탑은 아마 루크의 아지트쯤 되지 않을까. 그런 곳에 나를 데리고 간 것도 평소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루크는 나긋한 목소리로 친절을 흉내 내기는 했지만, 선을 확실하게 그었으니까. 칼부림을 한 줄 알았더니, 어디서 머리라도 얻어맞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오늘 왜 이러냐고 묻는 건 간지럽고, 고마웠다고 말하기에는 반발심이 올라온다. 어차피 질문에는 답해 주지 않을 게 뻔했고, 감사에는 또 이상한 답이나 늘어놓을 텐데 알면서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는 사이, 대로에 가까워졌다. 루크는 두 번째 골목을 앞두고 포장된 도로가 나오자마자 멈춰 섰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길이 넓어졌고, 건물 두어 개만 넘어가면 바로 치안이 좋은 중앙 거리였다. 자신이 나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꼼짝도 않는 그를 보며 물었다.
“다음에는 언제 봐?”
약속을 정하는 건 언제나 루크의 일이었다. 나는 그가 말해 준 날에 맞춰 골목으로 찾아간다. 설령 내가 발길을 끊는다 해도 그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지만 반대는 불가능하다. 이번에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며칠이나 허탕을 치지 않았나.
제일 열 받는 포인트는 어차피 루크는 아쉬울 게 없다는 거다. 그가 나를 밀어내면 나는 발을 구르며 애를 태워야 하는데, 반대 상황에서 그는 미련 따위 없이 나를 잊어버리면 된다. 결국 관계의 키를 잡고 있는 건 루크였고, 나는 거기에 매달려 간신히 엮은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크는 “흐음….” 하고 말을 끌더니 물었다.
“계속 나오게?”
“…그래.”
자존심이 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 담담하게 답했다. 틈을 보이면 루크는 그걸 더 비집고 벌리려 할 새끼였다.
“당분간은 안 돼.”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인데? 나는 입술이 바짝 말라 혀로 축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변덕에 맞춰 주고 싶었다. 모든 관계에는 적절한 줄다리기가 필요하고, 특히 루크 같은 타입은 예측에 엇나가게 행동하는 걸 흥미롭다고 여길 거라는 걸, 알긴 알았다.
문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에드워드 스펠먼에게 답이 오기까지 며칠이나 남았을까. 확답을 받자마자 바로 스펠먼 저택으로 들어갈 셈이었다. 집에 들를 여유도 없는데 루크를 찾아 헤매고 다닐 수 있을 리 없다.
이렇게 어정쩡한 관계로 헤어졌다간 그동안 들인 노력 따위 허사가 될 것이다. 몇 년 뒤에야 재회할 루크는 아마 나를 기억도 못 할 테고.
“왜?”
루크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이것도 답할 생각이 없냐, 새끼야? 속이 타는 이쪽과는 달리 여유가 넘치는 얼굴을 보자 성질이 올랐다.
애써 속을 가라앉히며 머리를 굴렸다. 조금 더 친밀함을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역시 당장 떠오르는 것은 로켓이었다. 루크의 키워드가 ‘로켓’일지, ‘분실물’일지 몰라 아직 서랍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대로 선물이라고 줘 봤자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걸 어떻게 해야 잃어버리고, 또 루크의 손까지 들어가게 될지 감이 안 왔다.
이런 건 내 전문이 아닌데. 도움을 주던 에르켈의 부재가 컸다. 나는 아직도 열 살에 멈춰 있는 세드릭 클라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연락 수단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카데미까지 찾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세드릭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잘 들어가, 린.”
루크는 다정하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곧바로 등을 돌리지 않고, 나를 바라본 채 멀어지는 그의 몸이 거리를 낮처럼 밝힌 가로등과 적막한 어둠 사이, 보이지 않는 장벽을 통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곧 어두운 곳으로 사라지겠지.
왜인지, 이대로 그를 보내면 로베누스에서 루크를 다시는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마음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팔을 붙잡힌 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흥미도 생겼고, 마음에도 든다면서.”
“…….”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데?”
“겁은 잘 먹으면서, 겁이 없는 것처럼 군단 말이야.”
루크는 내가 잡은 손을 툭 털어내듯 떨어뜨렸다.
“위험한 걸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