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17)
  • #62

    어처구니가 없었다. 얼굴 때문이 분명하다. 반박을 위해 입을 벌렸지만 끅끅거리는 소리가 흉하게 튀어나올 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목을 졸린 기억 때문에 몸이 반응하나 했는데. 정말 제대로 조인 게 맞았다. 시발. 간신히 호흡을 찾아가는 와중에도 속이 끓었다.

    저게 어떤 과정을 거쳐 도출된 생각인지는 대충 알겠다. 살인, 폭력이 익숙한 거리에서 예쁘장한 어린애는 성별을 가리지 않겠지. 마땅한 보호자도,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애들이 그나마 덜 맞는 법, 입에 뭐라도 넣고 배를 채울 수 있는 법은 얌전히 구는 것뿐이었을 테니까.

    루크는 해명도 없이 내 머리 위에 다시 모자를 씌워 주고 있었다. 눈을 부라리자 무표정하던 얼굴에 뭔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누군가를 달래기보다 조르고, 부수는 것에 익숙한 손이 여자에게 붙잡혔던 목을 건드렸다. 손톱이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 오싹한 감각이 등을 지나갔다. 찰싹, 소리 나게 그 손을 쳐내자 그제야 루크가 익숙한 미소를 달았다.

    “그렇게 해.”

    “오웬!”

    난리 중에도 취한 듯 늘어져 있던 오웬이 허락을 내렸다. 여자가 따지듯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이상 반박하지는 못했다.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대신해 내가 말했던 엘리엇의 외형을 설명한 루크가 눈빛으로 그를 뚫어버릴 듯 노려보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질투가 심한데.”

    “잘 때 입 조심해. 그 재수 없는 혀가 사라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임무에 실패해서 짜증 나는 건 이해하는데, 그걸 나한테 풀면 어떡해. 나는 혀를 자르는 걸로는 만족 못 할 텐데.”

    결국 다시 붙는 둘 사이에 끼어든 남자가 루크와 나를 내보냈다. 바짝 약 오른 여자는 허벅지에 고정된 검을 꺼내 들었지만 허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남자를 완전히 떼어내지는 못했다. 루크는 그런 둘을 비웃듯 나를 둘러업고 방을 나왔다. 내려놓으라고 발버둥 칠까 생각했지만 이제 그럴 힘도 없었다. 오늘 지나치게 일이 많았다.

    “왜 그렇게 여기저기 시비야.”

    몇 번의 시도 끝에 목소리가 나왔다. 내 귀로 듣기에도 영 엉망이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루크의 실력이 좋다는 건 알겠다. 자기보다 훨씬 덩치 크고, 나이 많은 사람도 어렵지 않게 넘겨 버리는 것을 봤으니 그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다. 그는 녹스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대단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지. 나는 여자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벌써부터 녹스가 제 것인 양 헤집고 다니면 기존의 권력자는 그 꼴이 아니꼬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생 기사로 살아온 스펠먼조차 일대일로 맞붙는, 정의로운 결투를 실전에서는 기대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녹스의 경우는 더할 것이다. 뒤에서 칼이 날아와도 막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고, 여럿이 하나를 덮쳐도 그것을 추하다 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고, 패자는 그 실력이 어쨌든 진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렇게 여기저기 적을 만들고 다닌다니. 그가 성공적으로 녹스를 집어삼키는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내가 고분고분했으면 렐은 망설임 없이 나를 죽였을 거야.”

    루크는 또 차분히 설명했다. 조곤조곤하고 상냥한 목소리, 친절과는 거리가 먼 손, 그럼에도 호의를 베푸는 중인 행동. 그는 하나로 정의내리기 힘든 인간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아까의 난리는 없었던 일인 것처럼 여전히 시끄러운 주점을 빠져나오고, 더러운 길을 걷는 내도록 별 대화는 없었다. 시선이 꽂히는 것도 이제 그러려니 했다. 오웬의 옆에 있던 둘이 거리에서 제일 강한 사람들일 확률이 높은데, 그 둘에게조차 숙이는 법 없는 루크였으니 이 정도는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얌전히 안겨 있는 나를 개천을 넘고도 골목 두 개를 지나고서야 내려 준 루크가 칭찬하듯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역시 너무 작은데.”

    “열두 살한테 얼마나 대단한 키를 바라는 거야?”

    짜증을 냈지만 그는 그것을 화내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녹스에 어린애가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개념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나름 또래에 비해 성장이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연달아 지적받자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루크는 그 화를 달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가 있어. 네 친구를 찾으면 돌려보내 줄게.”

    어물거리다 “고마워.” 했다. 확실히 그의 도움이 컸다. 녹스에서 개죽음을 당하지도 않았고, 거리를 이 잡듯 뒤지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급한 불은 껐으니 나가서 경비에게 도움을 요청할 시간을 벌었다. 루크는 “로젠은 아닐 거야. 얼마 전에 사람이 다 찼는지, 푸른 문이 닫혀서 굳이 그쪽에 팔지는 않을 테니까.” 하고 한 가지 가능성을 차단해 주었다.

    제대로 대가를 치르지도 못하고, 도리어 그가 건드리는 족족 성질을 냈던 것에 비하면 과한 친절이었다.

    그제야 밀려오는 민망함에 돌아서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내 등을 루크가 떠밀었다. 신뢰받는 동료는 개뿔. 폐기한 계획이긴 하지만 실행하려고 마음먹었어도 실패했을 것이다. 엘리엇의 일로 정신이 반쯤 빠져 있었다. 괜히 무거운 발걸음을 몇 번 떼지 못했는데 루크가 아, 했다.

    “깜빡한 게 있어.”

    “그게 뭔데?”

    몸을 돌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뒤에 있던 루크가 허리를 잡아끌어 몸을 붙였다. 뒤통수를 감싼 손이 너무 자연스러워 하마터면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그의 입술, 코, 호흡이 그대로 닿았다. 윗입술을 살짝 깨문 이의 감각이 비현실적이었다. 입맞춤은 짧았지만 세드릭 때처럼 뽀뽀라고 귀엽게 부르기에는 노골적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보는 눈이 선명했다. 속눈썹, 홍채, 동공. 가까이 본 루크의 눈은 녹은 금을 가둬 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인간의 것 같지 않은 눈을 바라보았다. 허리와 머리를 감싼 손을 푼 루크가 뒤로 물러났다.

    “금발도 잘 어울리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오른손에 끼웠던 반지가 루크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나는 화를 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통 감을 잡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르웰린이 된 후 남자한테 입술을 빼앗긴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그때에는 세드릭 클라인이 여자인 줄 알았으니 지금처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건 아주, 정말 귀여운 뽀뽀였다. 어린애들 사이에서 오갈 수 있을 만큼. 절로 힘이 들어간 주먹을 어쩔 줄 모르고 쥐었다 풀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무슨 짓이냐고 후려치는 게 맞는 건가?

    고민하는 사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 사이로 빠져나간 루크가 손을 흔들었다.

    “잘 돌아가, 린. 다음부터는 조심하고.”

    그가 개천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야 소매로 거칠게 입술을 훔쳤다.

    “시발….”

    *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골목만 넘어가도 크게 달라지는 배경 덕이었다. 번듯한 건물이 있는 곳으로, 길이 넓어지는 곳으로, 사람이 많아지는 곳으로 움직이면 중앙으로 나갈 수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 큰길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화려해진 주변 의복들 사이에서 낡은 셔츠와 바지는 초라했다. 그나마 빈민가 어린애인 편이 낫지, 폭력까지 당한 걸 보이는 건 부끄러워 셔츠를 한 손으로 붙잡아 목 부분을 가렸다.

    지나가다 눈을 마주치면 노골적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며 옷에 코를 박았다.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정말 냄새가 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움직였다. 어차피 시선이 꽂혀도 납치, 살인 따위가 일어나는 곳은 아니니까. 그것보다는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는 게 급했다.

    레오를, 블로젯을 찾아야 했다.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움직였음에도 거리가 워낙 멀었다. 로베누스 중앙 기사단 본부는 가장 중심부에 있었다. 그나마 이전에 몇 번 방문해 길을 헤맬 리 없어 다행이다. 가끔 고개를 들어 길을 확인하면 제국의 문장을 새긴 깃발이 도시 전역에서 보일 만큼 거대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낡은 신발의 밑창이 덜거덕거리는 게 거슬려 걸음이 느려지려는 즈음에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에 경비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그들의 연락망을 이용하면 훨씬 빠르게 상황을 전할 수 있을 텐데.

    설마 모든 경비들이 업무 태만일 리는 없고. 단체 훈련 시간이라도 되는 건가?

    하필 그렇다면 내 운이 지독하게 없는 거다. 쏟아지려는 욕을 간신히 삼켰다. 눈에 익은 거리를 한참 걷고 나서야 허리에 검을 찬 경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신이 지쳤는지,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숨이 찼다.

    “저기….”

    “예? 뭐야.”

    친절한 얼굴은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확 구겨졌다. 귀족도, 부르주아도 아닌 놈이 본인에게 말을 건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했다. 그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검집을 성의 없이 휘저으며 “저리 꺼져 있어.” 했다. 에드윌로 살면서 한 번도 당해 본 적 없는 무시였다.

    기사 작위를 받은 게 아니더라도 공무를 볼 때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맹세는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아는 상식은 내가 아는 세계에서만 통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실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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