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17)

#60

루크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골격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훌쩍 큰 키 탓에 걸음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보폭 차이가 제일 많이 나는 차남은 나를 들고 다녀서 이런 적 없었는데. 루크에게 천천히 걸어주는 배려를 기대하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개천에 다가가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며 다시 시선이 따라붙었다. 녹스에 들어간 사람 중 대부분은 사냥감이 된다는 것을 상기하며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이름이 뭐야?”

“린.”

급하게 튀어나온 것은 헬레나 외에는 쓰지 않는 애칭이었다. 실수했다 싶었지만 정정하기에는 늦었다. 제임스 정도로 할걸. 그래도 본명을 말하지 않을 만큼의 정신은 있어 다행이지만, 좀 더 흔한 이름인 게 나았을 것이다.

“예쁜 이름이네. 잘 어울려.”

“고마워.”

“내 이름은 루크야.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 거리에서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반쯤 넘겨짚은 말이지만 틀리지 않았는지 반응은 미미했다. 그는 불쾌해하는 대신 내 입을 여는 방법을 택했다.

“친구에 대해 말해 봐.”

“엘이라고. 키는 나보다 좀 크고, 머리는 검은색이야. 눈은 파랗고. 딱 봐도 성질이 더러워 보여. 욕도 잘하는데. 혹시 욕하다 맞진 않았겠지.”

개천을 거슬러 올라가던 루크가 멈추는 바람에 등에 코를 부딪칠 뻔했다. 낡은 판자를 몇 개 덧댄 다리는 오래되어 부식된 부분과 새로 덧댄 부분이 섞여 있었다. 차라리 제대로 된 것을 다시 만드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루크는 먼저 다리를 건너며 밟아야 하는 부분을 알려 줬다.

“살아 있다면 맞지는 않았을 거야. 녹스에 있는 게 맞으면.”

무슨 말인가 생각하다 그게 ‘녹스에서 그렇게 굴면 때리느니 죽였을 것이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을 중얼거리다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다리를 건너던 루크가 웃었다.

“어쩌다 여기에서 길을 잃어?”

잠시 망설였지만 한 번 물꼬를 트자 이야기가 쉽게 나왔다. 익명으로 소개된 베리넌은 빌어먹을 악마 새끼쯤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그 새끼는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처먹어도 할 말이 없다. 루크는 생각 외로 얌전히 내 말을 들어주고, 가끔은 호응도 했다.

“죽여 줄까?”

그래서 그 질문에도 쉽게 대답할 뻔했다. 어찌나 평화로운 말투인지, 나는 그가 식사는 했는지 물어보는 줄 알 뻔했다. 진심이냐고 물어보려다, 그게 얼마나 우스운 질문인지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것도 나한테 흥미가 생겨서야?”

“비슷해. 호의를 베푸는 중이니까,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해. 원한다면 방법도 고르게 해 줄게. 수장은 좀 까다로워. 시체가 부패하면 잘 뜨거든.”

그는 그것 외에도 몇 가지를 나열했다. 둔기로 머리를 깨는 게 제일 쉽고, 칼로 찌르는 건 급소를 노리지 않으면 생각보다 어렵고. 오래 고통 받기를 바란다면 어디를 잘라서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고. 지가 유명 강사라도 되는지. 세세하고 유쾌한 설명에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아니. 됐어.”

“왜? 네 친구를 위험하게 만들고, 너도 이 안쪽까지 오게 만들었잖아.”

“엘이 멀쩡하면 괜찮아. 가만히 두지는 않겠지만.”

“네 친구가 이미 잘못됐으면.”

“그러면.”

나는 지나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 만약 베리넌의 그 웃기지도 않는 장난 때문에 엘리엇이 잘못됐으면.

“그러면 그 새끼는 내가 죽일 거야. 다른 사람이 죽이게 두지 않아.”

*

루크는 그 대답을 듣더니 지금까지 중 제일 크게 웃었다. 본성이 어떻든 내 앞에서 얌전한 척 굴던 세드릭 클라인이나, 품위가 곧 목숨인 줄 아는 황태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던 웃음이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고 강조하더니, 오히려 코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루크 덕에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웃을 일이야?”

“마음에 들어서.”

어떤 게 마음에 든다는 건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네 대답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괜찮지만,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예민하게 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낫다. 그런데 루크는 이런 내 다짐을 알기라도 했는지 본인이 나서서 성질을 긁었다.

“그런데 가능하겠어?”

“무슨 뜻이야?”

“사람을 죽이기에는 너무 가늘고 작잖아.”

“나 정도면 또래에 비해 큰 편이야.”

내 투덜거림에 루크는 대단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아.” 했다. 재수 없는 새끼. 키 차이가 난다고 해도, 나이 차이 때문이다. 몇 년 지나면 나도 저만큼은 될 거다. 지도 나만 했던 시절이 있는 주제에. 성질을 눌러 담으며 반응하지 않자 그도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하게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라지만 그의 뜻대로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루크는 기대보다 상냥하고, 예상보다 제멋대로였다. 에르켈이 말한 대로 대화하기에는 제일 편했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상대였다. 상대에 맞춰 태도를 바꾼다더니. 내게는 호감을 사려고 사근사근 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걸까. 그가 작정하고 나를 꾀려 들었대도 기분이 나빴겠지만, 뭣 모르는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도 달갑지는 않았다.

개천을 건넌 후에도 거침없이 걸어가던 루크는 내가 버겁게 따라가다 거리가 벌어지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아예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의 옆구리에 붙어 끌려가는 형태가 되자 거리가 벌어질 일은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야?”

“조용히 굴어.”

제대로 걷게 해 달라고 하려던 나는 본격적으로 들어서자 펼쳐진 녹스의 풍경에 다음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가 왜 나를 옆에 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도 아닌데, 골목을 하나 더 들어오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로베누스의 지도에 녹스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누구도 이곳을 지면 위에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순간의 방심으로 살인당하는 미친 동네에서 거미줄처럼 복잡한 길을 파악하고 그릴 만큼 정신이 나간 놈은 없었으리라.

건물 하나를 두고 옆으로, 위로 확장한 공간이 어설프게 이어져 있었고, 골목 사이도 빼곡했다. 벽의 칠은 벗겨진 지 오래라 온통 회색빛이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어 붙인 판자 탓에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아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곳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지만, 지도를 보고 외웠다고 해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곳에도 사람은 있었다. 어떤 목적도 없이 풀린 눈으로 시체와 구분할 수 없게 골목에 널브러진 사람들은 회색 풍경 중 하나였고, 실체가 보이지 않는 시선은 선명했다. 그들은 지금 상대를 재 보고 있었다. 이게 사냥감인지, 건드리면 안 되는 동류인지.

긴장감에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 루크를 믿고 안쪽으로 들어가도 되는 걸까. 그가 갑자기 돌변해 나를 던져 버릴 것 같지는 않지만, 누군가 공격해 온다면 아무렇지 않게 나를 버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루크의 옷을 붙잡자 그가 웃느라 몸이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역한 냄새가 나는 웅덩이에 코를 박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기고 도착한 곳은 그나마 녹스치고 번듯한 건물이었다. 루크의 얼굴을 확인한 문지기는 옆에 붙은 내게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건물의 1층은 주점이었다. 반쯤 취한 사람들은 평소보다 거칠었고, 한쪽에서는 이미 여럿이 엉겨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저것이 그들의 일상일 것이다.

법과 도덕의 사각지대에 사는 인간들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자신보다 어리고 약해 보이는 상대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부류가 널렸을 것이다. 굳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폭력을 오락으로 삼는 것만 봐도 예측할 수 있었다.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루크의 뒤로 바짝 붙었지만 이미 나를 발견한 무리가 루크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 녀석은 뭐야?”

“잘난 척하더니, 사내새끼랑 붙어먹는 게 취향이었나 보지.”

갈색 머리 남자의 말에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의 수위가 한껏 올라갔다.

“만질 것도 없는 어린애 데려다? 좆이 작아서 구멍을 좁혀야 한다는 그런 거냐?”

급기야 허리를 흔드는 흉내를 내며 “이왕 헐값에 댈 거면 만족이라도 하는 건 어때? 내가 저놈보다는 나을 텐데.” 하는 모습이 역겨웠다. 천박한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루크가 상냥하게 말했다.

“신경 꺼.”

어떤 감정도 없는 말이 도리어 그들을 건드렸는지 남자 하나가 잔을 던지며 일어났다. 갈색 머리는 앉아 있을 때도 덩치가 커 보였는데, 일어선 것을 보니 루크보다 훨씬 컸다. 팔과 목은 두꺼워 칼에도 잘 찔리지 않을 것 같았고, 보란 듯 쥔 주먹은 어린애 머리통만 했다. 다리를 절고 있는 그는 의족을 하고 있었는데, 바닥에 의족이 닿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벽에 부딪혀 깨진 잔이 바닥에 구르다 신발에 닿았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나갈 수 있길 바라는 건 너무 큰 꿈이겠지.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벽에 붙었다. 상대는 성인이고, 이쪽을 도와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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