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17)

#56

경비대 소리에 바닥에 깔린 녀석이 버둥거렸지만 무게를 온전히 실은 몸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손을 자르겠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부터, 사람을 “저거”라고 부르는 것까지 전부 경악스러웠지만, 놀라는 건 나밖에 없는 듯했다. 엘리엇은 질색하며 소매치기를 더러운 것 보듯 경멸하고 있었다.

슬슬 이곳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싶다가도 동시에 내가 완전히 현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아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이런 거북함이 내게 르웰린 에드윌 이전의 삶이 있었다는 증거 같았다.

“됐어. 그렇게까지… 그냥 보내 주자.”

내 말에 나를 빤히 쳐다보던 베리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또 뭔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왜? 불쌍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솔직히 내가 그렇게 대단히 정의롭고 시혜적인 인간도 아니고. 만약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소매치기가 경비대에 붙잡혀 손이 잘린다고 한다면 그가 어린 나이라는 걸 알고 잠깐 불쌍하다고 생각할 뿐. 구하려고 노력하거나, 이후 생활에 도움을 주겠다고 다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내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대단한 걸 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내 줄 뿐이다. 은화 몇 개 정도야 잃어버린 셈 치면 된다.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일 베리넌이 저런 말을 하니까 우스웠다. 그야말로 잘못에 대해 책임지는 게 없는 인간 아닌가.

“아직 어리잖아. 대단한 범죄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척 봐도 가난이 드러나는 소년이 소매치기를 하기까지 과연 선택지라는 게 존재했을까 생각해 본다면, 마냥 소년의 잘못이라고 다그칠 수도 없었다. 그에게 소매치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었는데도 그걸 저버렸다면 모를까.

빈민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어린애가 고를 수 있는 돈벌이야 뻔했다.

“그렇게 어쭙잖게 동정하면, 기분은 좀 나아져?”

“뭐.”

대놓고 날을 세우는 베리넌의 눈이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경비대 얘기를 꺼낼 때부터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해 가며 나를 도발했다는 걸 확신했다. 계약을 맺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약발이 떨어졌는지 내가 어디까지 받아 주는지 확인해 보려는 거다.

내가 그를 ‘화가 나 있는’ 어린애로 대해야 할지, 화가 나 있는 ‘어린애’로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엘리엇이 먼저 짜증을 냈다.

“왜 허튼 데다 화풀이야? 너야말로 그렇게 어쭙잖게 자존심 세우면, 기분은 좀 나아지고?”

“화풀이라니.”

“그럼 네가 하는 게 화풀이지, 뭐야? 매번 적당히 넘어갔더니 만만해? 그따위로 부족한 자존감 채워 가며 피해 주고 다닐 거면 집어치워.”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흔하게 보기 힘든 귀족 도련님들의 싸움이 흥미로웠는지 시선이 몰렸다.

엘리엇과 베리넌은 대놓고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우선 소매치기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얌전히 있으라고 속삭인 후 종아리를 가볍게 밟았다. 소매치기는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달아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달리려고 하면 다리가 부러지는 건 아닐지 겁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그만 손이 꽉 쥐고 있는 주머니를 빼냈다. 이렇게 시선이 모였는데 이걸 가져가 봤자 곧 빼앗길 게 뻔했다. 대신 슬쩍 꺼낸 은화 두 개를 그가 입고 있는 재킷 앞주머니에 요령 좋게 넣었다.

“쟤네 싸울 때 얼른 가라.”

여기저기 검댕이 묻어 더러운 얼굴이었지만 눈만큼은 소처럼 둥글고 예뻤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이던 소매치기는 바르르 떨다 도망쳤다.

약간의 기대를 가져 봤지만 엘리엇과 베리넌의 대립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둘 다 선을 넘길 만큼 멍청한 녀석들은 아니니 열이 식으면 괜찮아지겠지. 어쨌든 당장 끼어들어 억지로 떼어 놓느니, 차라리 자기 입장을 주장하며 속을 털어놓는 게 나아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곧 돌아갈 엘리엇과, 안내가 끝나면 볼 생각 없는 베리넌의 싸움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좀 조용한 곳에서 싸우면 더 좋겠지만…. 저러다 제풀에 지치겠지.

마실 거라도 사 올 참이었다. 마침 봐 둔 가게가 있었다.

*

“오렌지 주스로.”

가판에서 파는 주스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래 봤자 질 낮은 과일즙에 물을 타고 설탕을 섞었거나, 대용량 시럽을 사용했겠지. 이럴 때는 제일 만만한 메뉴가 최선이었다. 처음에는 두 잔을 주문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유치한가 싶었다. 어린애를 먹을 걸로 차별하는 건 조금 양심에 걸렸다.

“제일 인기 없는 걸로 한 잔 더.”

“제일 잘 나가는 걸로….”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년이 “주세요.”를 뒤늦게 이었다. 짧은 갈색 머리, 푸른 눈. 고급은 아닌 셔츠와 멜빵.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너… 엘리, 읍.”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엘리자베스 룩스틸이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얘가 왜 여기 있어? 저 모습은 또 뭐고? 아니, 룩스틸이 로베누스에 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긴 했다. 그녀의 고모인 레베카 룩스틸은 로베누스에서 유명인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였으니까. 그런 고모와 가깝게 지낸다는 엘리자베스 룩스틸을 어쩌면 이곳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저런 모습으로 만날 줄은 몰랐다.

내 입을 막은 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자 화들짝 놀란 룩스틸이 내 손을 잡고 구석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민첩하던지, 스펠먼이 봤다면 분명 감탄했을 것이다. 건물 사이 틈으로 들어오자 손을 놓은 룩스틸은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접힌 모자를 꺼내 썼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아니, 그.”

“진정해. 그보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지나치게 놀라고 당황한 그녀를 진정시키며 이 모습을 어디에서 본 적 있지 않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연회에서도 룩스틸은 나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엘리엇과 여행 왔어. 베리넌이 안내해 준다고 해서 함께 돌아보는 중이었고.”

“베리넌이면, 설마 또라이 베리넌, 아니, 카일 베리넌을 말하는 거니?”

“어… 맞아.”

또라이 베리넌이라니. 노골적인 별명이었다. 그가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게 신분 탓만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유명할 줄은 몰랐는데. 자작 부인이 아직도 아들의 실체를 모른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보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세상에….” 하던 룩스틸이 헙,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뭘 말하는지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알게 됐구나.”

고개를 푹 숙인 룩스틸이 작게 ‘미안해….’ 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지만, 본인의 책임도 있다고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 말해 주지 않았던 거야?”

“네가, 씨씨, 그러니까… 세드릭에게 청혼했잖아. 그래서 나는 네가 정말 진지한 줄 알았어. 그렇게 중요한 얘기를 내가 해도 되나 싶었고….”

“잠깐, 뭐라고?”

빠르게 쏟아지는 말 중 있으면 안 되는 단어가 있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그녀의 말을 멈췄다. 룩스틸은 의아한 얼굴로 눈만 굴렸다.

“지금 청혼이라고 했어? 결혼하자고 고백하는 그 청혼?”

“혹시 수도에서 청혼은 다른 뜻으로 사용되니?”

“아니. 내가 아는 청혼도 그 뜻이 맞는데. 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거든. 내가 대체 언제 씨…, 세드릭 클라인한테 청혼을 했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씨씨가 세드릭 클라인인 것을 몰랐을 때도 나는 맹세코 그 애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 물론 마음 맞는 친구라고 생각하긴 했고. 풋풋한 호감을 가졌던 것까지도 인정하겠다. 하지만 청혼이라니. 무게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경악하는 나를 보며 룩스틸은 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그 애한테 네 눈 색을 닮은 보석을 선물했잖아.”

“뭐?”

‘눈 색을 닮은 보석을 선물하다니, 로맨틱하시네요.’

2년 전 들어 지금은 목소리도 생각나지 않지만, 놀랍게도 내용이 똑똑히 기억났다. 왜 지금에서야 내가 목걸이를 살 때 점원이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왜 목걸이를 받은 씨… 아니, 세드릭 클라인이 그렇게 기뻐했는지도. 그리고, 시발, 왜 내게 뽀뽀했는지도.

“미친…….”

나는 내가 땅만 판 줄 알았는데, 아예 관 안에 들어가서 뚜껑까지 닫았던 모양이다.

제국에서 눈 색을 닮은 보석이 특별한 의미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엘리엇이 협상을 하겠다고 찾아왔을 당시 백작 부인이 괜히 청보라색 브로치를 선택한 게 아니다. 상대의 눈을 닮은 보석은 대체할 수 없는 상대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누가 봐도 어른들의 입김이 들어간 화려한 보석 브로치. 그것을 본 사람들은 딜런과 에드윌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눈은 영혼을 뜻하잖아. 눈을 닮은 보석을 준다는 건 자신의 영혼을 주겠다는 고전적인 청혼 방법이란 말이야. 네가 모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눈이 영혼을 뜻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아무리 지역이 달라도 그렇지. 애들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는데 내가 모르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혹시 자신의 친척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게 타당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룩스틸이 억울하다며 가슴을 쳤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