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17)

#55

상인은 순간 땡잡았다는 얼굴을 내비쳤지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튕겨댔다.

“이건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도련님.”

그러면 이제 또 거기에 “얼마면 되지? 응?” 하고 옥신각신하는 모양이 이제 익숙했다. 정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나흘 정도 반복하다 보면 이제 저 조악한 시나리오에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날 때도 됐다.

“엘리엇! 르웰린!”

아. 결국.

흥정을 끝낸 카일 베리넌이 흥분에 찬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엘리엇이 작게 “시발.” 했지만 베리넌은 보지 못한 것인지, 보지 못한 척하기로 한 것인지 순진하고 얼빠진 호구 연기를 이어 갔다.

“내 일행에게 어울릴 물건들도 있을까?”

“아이구, 아이구! 물론이죠!”

땡을 잡은 상인이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돈 많은 호구, 아니, 손님께서 하나, 둘, 무려 셋이나 남았다. 오늘 제대로 한밑천을 당겨야겠다는 생각이 만연한 듯 보였다.

카일 빌어먹을 베리넌의 빡침 포인트는 그의 호구 짓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호구든 등신이든. 스테이크보다 싼 짝퉁을 진짜 보석을 살 수 있는 돈에 금화 몇 개를 더 얹어서 사든.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일 베리넌은 호구 따위가 아니다. 알맞은 표현을 찾아보자면 차라리 작은 악마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럼에도 카일 베리넌은 순간 이동을 하면서 봐도 싸구려임이 확실한 물건에 기꺼이 돈을 뿌리는 호구를 흉내 냈다. 베리넌 부인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고한대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다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눈물을 글썽이면 넘어갈 만한 방법을 쓰는 것이다.

지금의 그는 운 좋게 발견할 수 있었던 이 엄청난 물건을 사는 즐거움을 사랑스러운 친척 엘리엇 딜런과, 엘리엇의 절친 르웰린 에드윌과 나누고 싶어 할 뿐이니까.

가이드를 자처한 베리넌은 하루에 한 번, 일부러 가판과 허름한 가게를 돌아다녔다. 그러고는 싸구려 물건에 엄청난 값을 주며 그들에게 호구라는 인상을 확실히 준 후 일행을 소개했다. 호구의 친구는 호구지. 입은 옷과 장식, 잘 관리된 머리와 깨끗한 피부로 우리의 값어치를 파악한 상인들은 좀비처럼 달려들었다. 온갖 상술과 사기가 판을 쳤다.

당연히 이런 것에 돈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은 한 번의 거절에 물러날 만큼 교양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덥썩 팔을 잡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고, 가끔은 반협박이 섞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비화와 감성팔이 서사를 듣고 있느니 차라리 돈을 내어주는 게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몸에 손을 대기에 놀라서 뭣 모르고 검집째로 휘둘렀다가 상대가 스친 팔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는 통에 치료비까지 물어 준 후에는 그냥 얌전히 지갑을 열었다.

처음에는 팔짝 뛰던 엘리엇은 이제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고 흘러가는 구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말릴 수 없는 거, 괜히 성질을 부려 봤자 본인만 손해라는 걸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다. 나는 이미 첫날에 포기하고 바닥의 나뭇결이 한 칸에 몇 개 들어가는지 세고 있었다.

오늘은 헛웃음을 지으며 낡아 빠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미줄과 먼지가 엉켜 위생 상태가 끔찍한 수준이었다. 오늘은 뭐 때문에 심기가 상하셨는지, 가게 상태가 심각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계약을 넘지는 않는 정도로 열 받게 굴었다. 그러다 보니 매번 해소되지 못한 짜증이 쌓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로베누스에 와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얼굴을 쓸어내린 엘리엇이 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작 부인께서는 언제 오신다고?”

“이틀 뒤.”

엘리엇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 뒤에 따라붙는 건 욕이다.

이런 식으로 한창 성질을 부리다 우리가 대응하지 않으면 또 얌전해지는 것의 반복이었다. 슬슬 엘리엇은 그냥 계약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베리넌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확실히 얻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을 벗어나 서쪽으로 여섯 골목 들어온 후 세 번째 문을 끼고 돌았다. ‘녹스’까지는 서쪽으로 세 골목 더 가서 작은 개천, 그리고 다시 네 골목.

호구 짓을 하며 털리던 중 운 좋게 로베누스의 골목이 그려진 지도를 손에 넣었다. 제대로 만든 지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지리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린 것임은 확실했다. 나는 호텔에 돌아가 내내 그것을 붙들고 머리에 쑤셔 넣었다. 나흘간 끌려다니며 확인한 결과, 베리넌이 다니는 곳의 마지노선은 그나마 번잡한 여섯 번째 골목까지였다.

온갖 문화가 몰려든 화려한 중심가. 그다음은 귀족들의 대저택, 그다음은 부르주아와 부유한 예술가들. 로베누스는 정말 장미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곳이었다.

중앙에서 한 겹, 한 겹 벗어날수록 그 모양을 달리했다. 그나마 주택가가 형성된 동쪽은 치안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북서쪽으로 이어진 개천을 기준으로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중앙에 몰린 화려함의 찌꺼기들은 서쪽으로 내몰렸다. 가난한 예술가, 빈민, 고아. 그림자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 끝에 녹스가 있었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무법지대. 가장 화려한 도시가 뱉어낸 쓰레기. 존재하지만 모두가 입에 담지 않는 금지된 곳.

막연하게 멀던 도시가 조금 가까워지자 긴장감도 한층 구체화되었다.

“더 안쪽은 안 돼.”

실컷 분풀이를 하고 나자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으며 다가온 베리넌이 중요한 비밀을 알려 주듯 속삭였다.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귀족을 건드리지 않는 건 여기까지야.”

“여기까지?”

“응.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게 룰이니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로베누스의 다른 귀족들이라고 뒷골목의 생태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수도였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귀족은 그들과의 공생을 선택했다. 굳이 힘들여 도려내 봤자 완전히 없애 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 잡은 극단적 경제 구조가 이제 와서 단번에 정상적으로 굴러가기도 힘들 테고.

게다가 로베누스의 북쪽에는 대규모 사창가가 있었다. 돈 되는 사업 앞에서 양심을 지키는 사람이 많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크든 작든 줄을 대지 않았을 리 없다. 깨끗하게 청소하기 위해서는 그것까지 도려내야 한다. 당연히 불가능할 수밖에. 신분이 높고, 혜택을 많이 받을수록 세상이 불공평하기를, 그래서 자신에게만 이롭기를 바란다.

“여기까지가 그러면, 더 넘어가면?”

“거기는 귀족이라는 이유로 큰일 나는 곳.”

자작 부인을 닮은 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면 얘가 ‘반쪽’이라면, 그건 자작 쪽일까, 부인 쪽일까 하는 의문이 짧게 들었다.

“그런데 르웰린, 네가 대화를 해 줄 거라는 기대는 없었는데. 사흘 내내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도 주지 않더니.”

응.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 그러려고. 어차피 듣고 싶은 답을 들었기에 미련은 없었다. 나는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다시 베리넌의 말을 무시하며 먼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하하, 너무하네.”

네 존재가 더 너무해.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로다. 저기 흘러가는 구름은 어디로 가나. 일부러 넋을 놓자 빠르게 흥미를 잃은 베리넌이 지쳐서 널브러진 엘리엇 쪽으로 다가갔다. 그나마 반응이 있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칭찬해 주고 싶지 않지만 현명하다.

‘리히트의 보물’을 강제로 산 엘리엇이 얼굴에 짜증을 덕지덕지 달았다. 물건 보는 눈이 좋은 만큼, 이딴 것에 돈을 썼다는 게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내 개인적 용건을 위해 희생되는 엘리엇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어떻게든 보답하겠다고 저녁마다 달래는 것에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얇아진 지갑과 더불어 가벼워진 동전 주머니에서 얼마 남지 않은 은화들끼리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그나마 상인들도 마지막 양심으로 주머니를 전부 털어 가지는 않았다. 양심이라기보다는 분풀이를 하러 올까 걱정돼 남겨 둔 것에 가깝겠지만. 엘리엇을 달래기 위해 마실 것이라도 사 오겠다고 나서려는데, 누군가 몸을 치고 지나갔다.

심신이 지쳐 있는 상황에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자 몸이 휘청이며 짜증이 일었지만, 그 상대가 이제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꼬맹이라는 걸 알고는 맥이 풀렸다. 그나마 키는 조금 컸지만 덩치로는 나보다 한참 못 미쳤다. 펑퍼짐한 바지 아래로 드러난 발목이 빼빼 말라 있었다.

“에드윌! 잡아!”

버럭 소리를 지른 건 베리넌이었다.

멍하게 서 있던 몸은 그 소리에 반응하듯 일어나 달렸다. 좋은 음식을 먹고 체력을 키운 나와 작달막한 꼬맹이의 속도 차이는 확연했다. 좀 더 복잡한 골목이었으면 지리를 알고 있는 쪽이 유리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다섯 번째에서 네 번째 도로로 들어가는 길목은 제법 넓어 숨을 곳이 없었다.

꼬맹이를 덮치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일단 자신을 부르고, 잡으라길래 잡긴 했는데.

“소매치기야.”

베리넌이 웃으며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짤랑거리던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나는 떨떠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고맙다.”

감사 인사를 했는데도 베리넌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곧 그의 고개가 기울었다.

“경비대에 넘겨야지. 수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로베누스에서는 물건을 훔치다 걸리면 손을 잘라. 이제 저건 소매치기는 못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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