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17)
  • #52

    처음에 몇 번이나 거절해도 그는 굴하지 않고 친절하게 굴었다. 성인이라고 해도 민망할 텐데,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지 변함없는 태도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선의를 받아들이며 다른 녀석들과 달리 땀 냄새 하나 나지 않는 보송한 얼굴을 살폈다. 거절에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 리가. 차라리 정말 성인이었다면 여러 권력관계를 생각하고 움직이는구나 싶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어린애가 지나치게 어른처럼 굴고 있자 거부감이 들었다.

    엘리엇이 말한 찝찝함이 뭔지 대충 감이 왔다.

    “그냥, 궁금해서. 큰 거리는 웬만하면 가 봤는걸. 로베누스는 넓은데 전부 가 보지 못하는 건 아쉽잖아.”

    “그러면 가 볼래?”

    꼬드기듯 살살 웃는 베리넌과 내 사이를 막아선 건 블로젯이었다. 제 삼촌처럼 타오르는 선명한 적발을 가진 꼬맹이가 제법 위협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수작 부리지 마. 왜 자꾸 와서 깔짝거리는 거야?”

    “수작이라니. 나는 그냥 르웰, 아, 미안. 에드윌과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야.”

    블로젯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의 뒤에 있던 패거리들도 하나같이 카일 베리넌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여럿이 하나를 괴롭히는 것 같은 그림에 내가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둘 다 진정….”

    “이 녀석도 네가 불편한 티를 내고 있는데? 왜, 다른 애들이랑 어울릴 자신은 없는데 다른 도시에서 온 녀석을 보니까 기회다 싶냐?”

    “비약이 지나쳐, 세스.”

    “네가 그런 식으로 의뭉스럽게 굴다가 뒤통수치는 걸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저기, 얘들아.”

    “뒤통수라니? 네 말을 들으면 내가 배신이라도 한 줄 알겠어. 서운하게 한 점이 있다면 사과하겠지만 없는 사실을 실제인 것처럼 말하는 건….”

    “아, 씨발! 그 말투 좀!”

    내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블로젯이 기어코 베리넌의 멱살을 잡았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녀석이 위협적으로 구는데도 베리넌은 여유롭게 웃었다.

    “왜? 주먹이라도 휘두를 거야? 이번에는 네 아버지가 막아 주기 힘들지도 몰라.”

    “그래? 어디 두고 보면 알겠지. 반쪽짜리를 위해 부인께서 얼마나 힘써 주시는지….”

    그 말에 내내 여유롭게 웃던 베리넌의 얼굴이 싹 굳었다. 블로젯도 아차 싶었는지 어물거렸지만, 곧 입술을 꽉 다물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보다 못해 둘 사이에 몸을 끼워 넣으며 강제로 떨어뜨렸다.

    “둘 다 적당히 해 둬.”

    블로젯은 시근덕거리다 휙 몸을 돌렸다. 자신의 친구들과 사라지는 뒷모습을 확인한 후 베리넌을 확인했다. 평소의 얌전한 미소를 내던진 베리넌은 얼굴은 딱딱하게 굳히고 상처 입은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반쪽짜리라고 하는 거에 예민한 반응을 보면 역시 ‘그거’지? 어렵지 않게 떠오른 사생아라는 단어에 그의 눈치를 보았다. 생각지 못한 순간의 남의, 그것도 어린애의 치부를 알게 된 기분이 영 찝찝했다.

    “저기, 베리넌. 나는 그런… 그,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기에도 웃긴다. 그게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고.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베리넌은 한쪽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곧 원래의 미소와 비슷한 모양이 되기는 했지만, 눈은 이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

    “어…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내내 그를 신경 쓰고 거리를 두던 주제에 어깨를 툭 치며 친한 척 말하는 것도 민망하기는 하지만 본능적으로 여기서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리넌이 골목을 가리키며 가 보겠느냐 물은 것도 크게 작용하긴 했다. 블로젯 같은 외골수보다는 베리넌 같은 녀석을 통해 더 깊게 들어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상처 받은 애를 앞에 두고 이따위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비웃음이 났다.

    “에드윌은 참, 상냥하네. 왜 엘리엇이 너와 친하게 지내는지 알겠어.”

    “전에 잘라 말한 건 미안해. 그냥, 르웰린이라고 불러도 돼.”

    입술을 달싹이던 베리넌이 천사 같은 얼굴로 답했다.

    “그래. 알겠어, 르웰린. 사과해 줘서 고마워.”

    전혀 고마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

    베리넌 부인은 자신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나와 엘리엇이 기꺼웠는지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했다. 나는 죄를 지은 기분으로 매번 응했다.

    엘리엇은 내 태도를 보고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짐작했는지 대부분 동행했다. 캐묻지 않아 다행이다. 어설프게 둘러댔다간 티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내 친구고, 베리넌의 친척이라고 해도 카일 베리넌이 사생아인 것 같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자고 가는 게 어떠니? 시간이 늦었구나.”

    생각보다 식사가 길어지자 베리넌 부인은 우리에게 자고 갈 것을 권했다. 곧 엘리엇이 다시 수도로 돌아가면 또 당분간 보기 힘들 거라는 이유였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닦고 있는 카일 베리넌을 보며 수락했다. 엘리엇도 거절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일을 치를 것 같던 카일 베리넌은 생각보다 얌전하게 굴었다. 그 탓에, 그간 그를 너무 경계했던 건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블로젯에 맞서 멱살이라도 함께 잡았으면 모를까. 현재까지 카일 베리넌은 완벽하게 피해자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우울함이 달리면 위로를 해 줘야 할 것처럼 가련해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저 녀석이 찝찝한 건 또래 애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어 방어 기제를 세우기 때문은 아닐까.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며 로베누스에 있는 동안 친하게 지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차피 내가 밑질 건 없기도 하고.

    그러나 그게 아주, 시발, 아주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악! 시발!”

    막 잠이 들려던 시점에 들려온 고함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잠옷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엘리엇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뭐야?”

    “너…, 너는 아무 일 없냐?”

    “무슨 일?”

    “시발, 시발. 미친 새끼가 진짜.”

    짜증을 내고, 화를 내기는 해도 웬만하면 놀라지는 않던 엘리엇이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침대에서 나와 엘리엇에게 다가가는데 그 뒤로 인영이 보였다.

    “많이 놀랐어, 엘리엇?”

    목소리가 상냥했지만 절대 선의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곤조곤한 말투와 천사처럼 웃는 얼굴인데도 이전에 본 모습과 달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또라이 새끼야.”

    “응?”

    “뭔데 그래?”

    엘리엇을 방 안으로 끌어당기며 베리넌과 엘리엇 사이에 끼어들자 베리넌이 소리 높여 웃었다. 저건 또 뭐야. 진심으로 기뻐서 웃는 것 같은 해사한 얼굴을 보자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황태자와 아네트를 비롯한 황가 사람들부터 세드릭 클라인까지. 원작 공인 또라이, 미친놈, 좆같은 성격을 만나 왔지만 이런 유형은 처음이었다.

    “미친놈이. 침대에 가죽을 벗긴 쥐를 넣어 놨어.”

    “뭐?”

    놀라서 베리넌을 쳐다봤지만 웃는 소리가 높아졌을 뿐이다. 새처럼 맑은 목소리였지만 미친놈 같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 목소리에 어깨를 떠는 엘리엇을 나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사실 나도 무서웠다. 이런 유형의 또라이는 처음이었다.

    “많이 무서웠어?”

    “뭐라는 거야.”

    “걱정 마. 가짜니까. 설마 내가 쥐처럼 더러운 걸 직접 만졌겠어?”

    “장난이었어. 오랜만에 같은 곳에서 자니까 반가워서.” 하며 웃는 베리넌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친척을 반가워하기보다는 오랜만에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 기뻐하는 악마 같았다.

    당황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에게 생기려던 호의와 동정심 따위가 뒤엉켜 바닥에 굴렀다.

    “또라이 새끼….”

    “아. 역시 이런 반응이 재미있다니까.”

    이건 또 무슨. 따지고 들려다 미친놈과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대신 발소리에 집중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 아무도 올라와 보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아무도 안 올 거야. 괜히 미친놈 눈에 들어서 좋을 게 없잖아?”

    본인이 미친놈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있구나.

    엘리엇과 나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미친놈에게서 두 발자국 떨어졌다. 저러다 돌변해 무슨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놀랍지 않겠다. 지금까지 봐 온 미친놈들은 적어도 미친 짓의 앞뒤 맥락이라도 이해가 됐는데, 베리넌은 그냥 또라이처럼 보였다.

    차라리 황태자가 덜 무섭겠다. 그가 목을 조른 일은 한동안 꿈에 나올 만큼 충격적이었긴 했지만, 그것도 지금의 베리넌에 비하면 동화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그가 나타나서 ‘그대.’ 운운하는 80년대 드라마 같은 대사를 날려도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카일 베리넌의 똘끼가 무서웠다.

    “어머니는 나가셨어. 오늘 돌아오지 않으실 거고. 로베누스에는 연회가 많거든.”

    자작 부인에게 죄가 없는 걸 알면서도 원망하고 싶었다. 저런 놈과 우리를 함께 내버려 두고 나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맙소사. 나는 엘리엇의 떨리는 팔에 몸을 바짝 붙이며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 이 세계에도 신이 존재한다면 부디 인간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엘리엇이 좋아. 저렇게 세상 무심하다는 얼굴을 한 애들이 괴롭히는 맛이 있지. 평소에도 달달 떨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미친….”

    “그런 점에서 르웰린, 너도 합격이야.”

    꼭 제 금발처럼 화사하고 예쁜 미소였지만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라도 불합격 처리해 주면 안 될까? 나는 그따위 것에 합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