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17)

#51

“뭐가?”

내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자 늘어져 있던 엘리엇이 몸을 일으켰다.

모든 마법의 근원지가 마탑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것도 제국 내부 이야기다. 제국인들은 마법이 제국에만 허락된 특별한 능력이며, 제국을 벗어나면 모든 문명이 사라지고 야만적인 땅이 드러난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그럴 리가.

최서단과 최북단의 산맥을 넘어 이종족의 땅으로 가거나, 최동단 국경을 넘거나, 최남단의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가면 그곳에서는 자신들만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다.

개중에서도 엘-세벳은 모든 이에게 마법을 나눈다는 이념을 토대로 한 마도 공학이 대단히 발전한 나라였다. 실용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대륙에서 최고라고 들었고, 무기의 위력도 대단해 매년 관련 규약을 새로 갱신하고 있었다. 비록 마탑이 존재하는 제국에 비해 마법 수준은 조금 떨어진다는 평이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 제국 마법사의 시점이니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석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건 제국에만 있는 형태라고 들었거든. 보석에 인챈트 하는 것보다 높은 등급의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기는 하지만 제작비용을 생각하면 워낙 가성비가 떨어지기도 하고, 애초에 보석처럼 보일 정도로 순도 높은 걸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상급 마법사는 흔한 게 아니니까.”

재료와 기본적인 마력이 있다면 레시피에 맞춰 누구나 제작할 수 있는 게 마석이지만, 아카데미 저학년에게 상급 재료를 쥐여 줘 봤자 돌덩이 같은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투명하게 빛을 머금는 마석을 제작하려면 마탑에 연구실을 둘 정도는 돼야 했다.

그나마 제국이니까 그 정도 실력의 마법사가 만든 마석을 보석처럼 꾸며 팔 생각을 하지, 다른 나라에서는 무리다. 특히나 엘-세벳은 작은 나라였다. 위협적인 무기를 제작하는 데도 제국이 전쟁을 감행하는 게 아니라 몇 가지 규제로 끝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엘-세벳은 부품 단위로 인챈트를 한다고 들었는데.”

“나도 엘-세벳에서 들어온 물건들을 본 적 있어.”

엘리엇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인이 사기를 친 건 아닌지 고민하는 눈치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식으로 만든 마석 액세서리가 많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 다른 곳은 더 알아봐야겠지만, 일단 로베누스는 그래.”

외부와 교류가 제일 활발한 로베누스가 그렇다면 다른 도시의 사정도 크게 다를 것 없을 것이다.

“뭐, 교류가 활발하니까 서로 비슷해졌나 보지. 나도 얼핏 들은 데다 오래전이라 확실하지 않아.”

“확실히, 화려한 걸 좋아하는 고객들을 위해서는 가성비를 버리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납득한 엘리엇이 노트를 펼쳤다. 대충 휘갈긴 듯 잉크가 옆으로 밀려나게 갈겨 놓은 필체는 잘 봐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악필이었다. 장부를 쓰는 그에게 은근슬쩍 얘기를 꺼냈다.

“네가 말했던 걔 생각나? 베리넌 부인의 아들이라던.”

“카일 베리넌?”

펜이 우뚝 멈춘다. 엘리엇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블로젯과 아는 사이인가 봐. 오늘 대련하러 가 보니까 있더라.”

“씨팔.”

“별 얘기는 안 했어. 생각보다 얌전하던데.”

어찌나 질색하는지, 엘리엇의 움츠린 어깨가 떨릴 지경이었다. 다시 보더라도 알은척하지 말라고 잔소리하던 엘리엇은 뭔가 생각났는지 우뚝 멈췄다.

“그 새끼가 설마하니 알고 그랬을 거라 믿고 싶지는 않은데….”

“뭘?”

엘리엇은 대답 대신 서류를 뒤적거려 그 사이에서 초대장을 찾아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걸 보낸 사람을 추측할 수 있었다.

“베리넌 부인께서 보낸 거야?”

“이틀 후 저녁 식사에 너와 나를 초대했어.”

“설마 카일 베리넌이 그걸 알고 오늘 미리 나를 보러 왔다, 그런 뜻이야?”

나는 낮에 본, 꿀처럼 달큼한 금발을 가진 천사 같은 외모의 소년을 떠올렸다. 속이 투명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속이 시커메서 피해야겠다는 수준도 아니다. 찝찝하기는 해도 굳이 내쳐낼 필요는 없는 정도.

사실 뭐, 여자애인 척 나와 몇 년이나 편지를 주고받은 세드릭 클라인이나, 검을 휘두르고 목을 졸라 놓은 후에 입을 싹 닦은 황태자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니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 그 새끼는 어릴 때부터 특이했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좀.”

특이한 게 아니라 이상했다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나마 베리넌 부인과의 친분 탓에 단어를 신중하게 고른 것 같았다.

지금이라고 딱히 어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엘리엇이 저렇게 치를 떨 정도면 정말 어린 나이부터 남다르기는 했던 모양이다. 입을 꾹 다문 모습이 과거를 훑는 것 같았다.

“좀?”

“5년 전이었나. 그쯤에도 유별나게 자기 거에 집착하고, 장난을 못 넘겨서 다른 애들이랑 사이 안 좋았어. 나야 오래 붙어 있던 게 아니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곱 살 정도면, 그맘때 어린애들이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시기이니 특별한 일은 아니다. 가까운 예로는 헬레나도 그랬으니까. 매번 사랑받으며 양보해 본 적이 없어 또래 애들과 마찰이 있었고. 루시아 외에 특별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지만 그녀가 모나고 나쁜 성격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아카데미에 진학한 이후 잘 지내고 있었다.

5년 전의 카일 베리넌이 호감 가지 않는 녀석이었대도 강산이 절반 바뀌는 세월이면 인간도 많이 변한다. 나는 이질적으로 무리에서 겉돌던 카일을 떠올렸다.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지는 않아도, 애들 사이에서 특별히 반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싫으면 적당히 거절하는 건?”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괜히 신경을 건드릴지도. 게다가 로베누스에서 베리넌 부인의 영향력은 상당해. 이왕이면 친분을 유지하는 게 좋지. 기껏 블로젯과 인연을 만들었는데, 똥 하나 피하겠다고 그것도 놔 버릴 수는 없잖아.”

우리는 어차피 만나야 한다면 베리넌 부인이 있는 곳에서 만나는 게 최선일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저택으로 향했다. 로베누스의 모든 곳이 화려했지만, 중심부 저택가는 유독 그랬다.

황성을 익숙하게 들락거리던 내 눈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한 장식들을 지나자 저택의 주인이 우리를 맞았다.

“안녕, 엘리엇….”

다시 만난 카일 베리넌이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전에 본 유약하고 의연한 모습과는 달랐고, 엘리엇이 치를 떨며 싫어하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금발 벽안에 예쁘장한 얼굴은 흔한 표현으로 천사 같았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는 모습은 수줍어 보였다. 집에서 공주, 왕자 취급받으며 과보호 속에서 살던 애들 한두 명 보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소심해 보이는 모습에 안심이 될 정도다. 저 정도면 크게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후로 식사도 아주 평화로웠다. 베리넌 부인은 웃으며 엘리엇에게 말을 걸고, 나를 칭찬했다.

로베누스 사교계에서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는 절대적인 왕좌를 차지한 사람은 레베카 룩스틸이다. 베리넌 부인이 그 레베카 룩스틸과 친분을 유지하며 제법 영향력을 발휘한다더니. 순하고 천진해 보이던 외견과는 달리 화법은 상당히 화려해 진이 빠졌다.

나는 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며 엘리엇을 툭, 쳤다.

“조용하다고 했잖아.”

“그사이 철들었나 보지.”

뚱한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그도 카일 베리넌에 대한 인상을 수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이후로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엇은 종종 자리를 비우며 바쁘게 지냈고, 나는 블로젯들과 어울리며 친해졌다. 카일 베리넌은 가끔 나타나 얼굴을 비쳤다. 처음에는 긴장하곤 했지만 매번 얌전히 웃고 있다 가는 녀석에게 계속 날을 세우기도 좀 그랬다.

문제는 양아치 같은 외견과 달리 세스 블로젯이 아주 착실한 녀석이었다는 것뿐이다. 그는 집과 연무장, 기사단 본부 외의 루트를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블로젯과 친분을 쌓아 로베누스 뒷골목 안내를 좀 받아 볼까 했던 계획은 실패했다. 대련에 신이 난 것과는 별개로 속이 착잡했다. 엘리엇이 수도로 돌아간 후에는 호텔에서 머무르지 못할 텐데. 제공되는 관사도 거절하고 저택을 구매해 버린 레오를 모른 척하기 힘들었다.

젠장, 골목을 쏘다니며 거들먹거릴 것처럼 생겨서는.

오늘도 뚱한 얼굴로 입꼬리만 씰룩거리는 블로젯의 검을 쳐내며 건물들 사이를 바라보았다. 로베누스는 동부의 수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다. 그러나 겉이 화려하면 속이 구린 법. 장밋빛 화려함 뒤에는 향락의 찌꺼기들이 오물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왕처럼 군림하게 될 녀석도 있고.

나는 에르켈이 알려 준 정보를 토대로 루크의 이미지를 상상해 보았다.

세드릭 클라인 못지않은 쾌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이득에 철저한 편, 황태자처럼 사람을 끄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편, 몸을 낮추고 있지만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사냥꾼, 원작에서 제일 위험한 놈.

말로만 들으면 어마무시한 녀석이 튀어나올 것 같기는 한데. 그런 놈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자 긴장감에 입술이 말랐다. 다짐을 하고 왔으면서도 자꾸 망설이며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적색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는 기분인데, 이걸 무시하고 강행하는 게 좋을지, 본능에 따를지 감이 안 잡혔다.

“저쪽에 흥미가 있어?”

나긋한 목소리. 카일 베리넌이 손수건을 내밀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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