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17)
  • #49

    레오는 내뱉은 말을 지켰다.

    “다음.”

    세 합이나 겨뤘나. 허리를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군 기사는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벌써 일곱 번째다. 처음에는 사정을 봐주는 건지 열 합 정도는 받아 주던 레오는 세 번째부터 막힘없이 상대를 쳐냈다.

    제크 블로젯의 얼굴에는 웃음기만 간신히 남아 있었고, 칸딜하스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는 듯 들썩거렸다. 종종 “우리가 만날 얻어맞고 구른 보람이 있다!”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나는 듣지 못한 척했다.

    저렇게까지 사정 안 봐주고 패 버리니, 처음에는 통쾌했는데 점점 눈치가 보인다. 하다못해 내가 기사였으면 순수하게 기뻐했을 텐데. 엄연히 남의 직장에 손님으로 와 있는데 이렇게 되자 가시방석이다.

    그나마 나는 레오의 동생이기라도 하는데, 그 친구로 따라온 엘리엇은 더 그렇겠지.

    “저렇게 끌 거 있나? 검을 한 번만 휘둘러도 이길 것 같은데. 네 형님도 마음이 약한 편이네.”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작지 않은 목소리에 작은 블로젯 패거리가 이쪽을 주시했다.

    나는 애써 그쪽을 외면하며 엘리엇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쪽을 자극해서 좋을 게 뭐라고 이러는지. 하지만 내 뺨을 맞았으면 상대의 명치를 치겠다는, 되로 받았으면 말로 갚아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엘리엇을 말리기에는 부족했다.

    “검술로 유명한 곳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유명한 기사를 배출한 적 없잖아. 그래도 바이올린 솜씨는 이곳이 더 훌륭할 거라 기대해. 끝나면 오늘은 새벽 나무 홀에 가볼래? 공연이 있다던데.”

    “엘리엇….”

    “너무 실망 마. 공연은 괜찮을 테니까. 레인 크릭이 나온다는 얘기도 있거든.”

    몇 년 전 무대에서 스스로 현을 끊으며 은퇴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얘기까지 꺼내며 아닌 듯 저쪽을 먹이자 미끼를 문 블로젯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말로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대화일 것 같지만.

    블로젯은 제집인 양 거침없이 본부 건물을 가로질러 다른 연무장으로 향했다.

    쪽수가 많은 상대는 전부 나오지는 않고 블로젯을 포함한 네 명만 나왔다. 그렇다고 해도 다들 한 덩치 하는 놈들이다 보니 모여 있으면 꽤 위협적인 그림이 된다. 저들에 비해 꺽다리처럼 보이는 엘리엇과 딱 열두 살 평균 키인 내가 상대라 더 그렇기도 했다.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검에 대해 잘 아나 보지?”

    블로젯의 말에 엘리엇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에이든이 봤다면 기겁하고 물러났을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명백한 실력 차이 아니었냐?”

    둘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꼭 아까의 제크 블로젯과 레오를 보는 것 같았다.

    “아, 그러니까. 문외한이면서 그렇게 입만 살아서 놀렸다는 거지.”

    “제대로는 몰라서 입 하나 벙긋 못 하는 것보다는 낫지. 검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나여도 성년이 되자마자 황실 기사단에서 부단장이 됐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아는데. 안타깝게도 너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블로젯 왼쪽의 덩치1이 콧김을 세게 뿜으며 달려들려고 했다. 블로젯은 무리의 리더답게 손짓 하나로 그를 진정시키고 앞으로 나섰다.

    “결투 신청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내가 연약한 애들 건드리는 악당 역할이잖아.”

    연약한 애1이 된 엘리엇이 친절하게 방안을 제시했다.

    “나는 검 같은 거 모르는 거 맞는데, 얘는 좀 해.”

    시선들이 이쪽으로 몰렸다. 나는 ‘우리 애가 이렇게 잘났어.’ 하는 극성 학부모처럼 구는 엘리엇 탓에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낯이 온통 화끈거렸다.

    “그래? 뭐, 형에게 배웠으면 기대해도 되겠네.”

    레오에게는 배운 적 없지만, 정확히는 그가 가르치려다 실패했지만 굳이 그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시 떠올려 봐도 달갑지 않은 기억이다. 아직도 내가 휘적거리며 검을 긋자 충격 먹고 몇 번이고 시범을 보여 주던 레오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호흡을 고른 블로젯이 장갑을 대신해 보호대를 던졌다.

    “한 수 배울 수 있겠네. 잘 부탁한다.”

    “한 수만 배우게? 욕심이 없네.”

    제발, 좀. 엘리엇의 등을 찰싹 때리며 뒤를 돌았다. 물론, 그동안 블로젯처럼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타입은 없었어도 비슷한 유형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때마다 무시로 일관하며 상대해 주지 않던 엘리엇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무슨 생각이야? 저거 눈 빛나는 거 안 보여?”

    “저게 어쩌겠어. 이곳이 아무리 블로젯의 영역이라고 해도, 목 위에 달린 게 머리가 맞다면 너를 크게 상처 입히지 못할 텐데.”

    “뭐?”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엘리엇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에 보지 못할 만큼 승부욕으로 이글거리는 얼굴이었다.

    “물론 이기면 좋지. 승부에 의혹을 품지도 못할 만큼 확실하게 꺾어 버리면, 제일 좋지.”

    “…너는 나를 믿냐?”

    “에드워드 스펠먼이 선택한 제자를 믿는다.”

    미친 거 아냐? 이성적인 판단을 최우선으로 하던 친구는 어디 갔을까. 나는 혹시 엘리엇도 어디서 빙의당해 온 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아까 그게, 이 정도로 자존심에 금이 갈 말이었나?

    “저런 건 한번 기를 꺾어 둘 필요가 있어.”

    “네가 자신 있는 걸로 하면?”

    “네가 보기에는 세스 블로젯이 체스에 졌다고 머리를 숙일 것처럼 보여?”

    음. 절대 아니지.

    “네 형님께서 괜히 저렇게 무력을 보여 주고 있겠어? 적당히 해서는 반발만 커지니까, 초장에 확실하게 하겠다는 거잖아.”

    “형님이야 계속 얼굴을 볼 사이니까 그러는 거잖아. 우리가 이후에 블로젯을 볼 이유가 뭐가 있겠어.”

    엘리엇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나는 아니어도 너는 계속 봐야지. 쟤네랑 같이 다녀야 하는데.”

    “내가?”

    “블로젯 패거리와 붙어 다녀야 자유롭게 돌아다닐 거 아니야.”

    네 목적이 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시큰둥한 말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딜, 돌아다닌다고.”

    회귀, 환생, 빙의. 제일 먼저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들에 혹시나 싶어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별일도 없는데 동부까지 올 인간은 아니니까. 뭔가 목적이 있었을 테고, 눈치를 보니까 어딜 가야 하는 것 같은데.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가기 힘든 곳, 그렇다고 혼자 갈 수도 없는 곳, 내게 함께 가자고 하기 힘든 곳이라고 하면 몇 곳 없잖아. 그러면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얻는 게 좋을 테고, 이왕이면 또래인 게 편하겠지.”

    차라리 회귀나 환생이나 빙의라고 하는 게 덜 소름 끼칠 것 같다.

    “원래는 베리넌 부인께 소개받아 살롱에 참가해 볼까 했는데, 마침 세스 블로젯이 먼저 빌미를 주잖아. 놓치기에는 아까운 기회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벙긋거리다 말았다. 나는 가끔, 얘가 무서웠다. 솔직한 심정을 고하자면 적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회의는 끝났냐?”

    블로젯이 검을 풀며 연무장으로 뛰어내렸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만, 일단 엘리엇의 말대로 겨뤄 보기라도 할 셈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끼어들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맞으며 구르고, 피하고, 찌르는 건 몸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일 정도로 질리게 해 왔다. 내가 블로젯을 따라온 덩치 1, 2, 3을 보자 나와 마주보고 선 빨간 머리 소년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와 내 친구들을 모욕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생각 마. 결투 중 끼어들 만큼 뇌 빠진 놈은 없으니까.”

    본인이 저렇게 펄쩍 뛰니 말을 얹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조용히 검을 들고 상대를 겨눴다. 익숙한 무게감에 불안정하게 뛰던 심박도 진정되어 간다.

    자신 있게 나서기에는 상대가 그리 좋지 않았다. 당장 나와 블로젯을 나란히 세워 둔다면 모두가 블로젯의 승리를 점칠 정도로 덩치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상황이 복잡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있어도 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은 없었다. 질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블로젯이 먼저 달려들었다. 기사를 준비하는 게 맞는지 정석에 가까운 자세였다. 피하기에 충분했으나 흘려낼 수 있을 것 같아 검을 맞대고 손을 돌렸다. 힘차게 내리친 것이 본인의 의도와 다른 타이밍에 이어지며 블로젯의 몸이 기우뚱했지만 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잡이로 손목을 가격했다. 고통이 상당했을 텐데 검을 놓지 않는 걸 보니 근성이 대단하다. 나는 처음 이걸 당했을 때 연무장 바닥을 굴러다녔는데.

    “어디서, 씨발, 그 좆같은 매너는 뭐야?”

    대신 얼굴이 시뻘개지긴 했다. 콧구멍이 확장될 정도로 거친 숨을 뱉어내는 블로젯 덕에 조금 당황했다. 에드워드 스펠먼은 어떻게든 상대를 족치, 아니, 이기는 것이 제 일의 목표라고 가르쳤다. 수단과 방법은 선을 지킬 수 있으면 좋지만, 필요에 의해 어겨도 된다는 방침이었다.

    “미안. 안 되는 건 줄 몰랐어. 다시 할래? 아니면 너도 때릴래?”

    블로젯은 대답 대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집어치우라는 뜻인 듯했다.

    조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함인지 한층 힘이 실린 검이 횡으로 갈랐다. 피할까. 눈으로 제대로 보기도 힘든 스펠먼의 것에 비해 한참 느린 검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말해 준 대로면, 이런 타입은 내가 피해 다니다 이겨 봤자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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