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17)
  • #48

    “호텔에 머무를 바에야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떠니?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역시 여럿을 상대하는 곳이니 부족함이 있지 않겠니?”

    엘리엇이 하하 웃었다. 별로 기쁘지는 않지만 억지로 웃어야 할 때 보여 주는 얼굴이다. 그가 내게 “이 호텔 오너가 저 부인이야.” 하고 속삭였다.

    베리넌 저택이 있는 곳은 건물을 금화로 지은 만큼 땅값이 비싸다는 로베누스의 한복판. 몇 없는 저택가 중 한 곳이었다. 낯선 곳에 머무르게 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는 배려는 상냥했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화려한 로베누스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는 할 일이 있었다.

    엘리엇이 일행과 함께 왔으니 무리일 것 같다고 부드럽고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녀는 식사라도 같이하고 싶다고 재차 초대했다.

    그것마저 거절하기는 좀 그랬다. 승낙하자 화사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자작 부인을 보자 따라서 웃음도 나왔다. 뭐, 거기까지도 나쁘지는 않았다. 남편과 사별한 후 로베누스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자작 부인은 바쁜 사람이었으니까. 마침 연줄이 있었으면 하던 엘리엇의 목표에도 부합했다.

    자작 부인이 날짜를 정해 호텔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자 엘리엇이 질색하며 몸을 떨었다.

    “친해 보이던데, 왜 그렇게 싫어해?”

    “자작 부인까지는 괜찮아.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지기는 해도 가진 건 잘 지켜낼 수준이고.”

    엘리엇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했는데, 열셋, 한국 나이로 쳐 봤자 고작 중학생이 가지기에는 꽤나 현실적인 기준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재능이 있는지, 걸맞은 노력을 하는지, 그래서 쓸모가 있는지 따위였다. 살롱에서 친해진 애들 중 태반은 엘리엇의 기준으로 ‘쓸모없는데 가문만 믿고 거들먹거리는 멍청이들.’이었고, 그중 최고봉은 2황자였다. 사실 저 기준을 넘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나나 에르켈이야 진짜 어린애가 아니었으니 넘어가면, 남는 건 루시아 정도.

    딜런가 차기 가주의 평가가 매우 박한 걸 고려한다면 베리넌 부인은 훌륭하게 경영을 잘해 나간다는 뜻이다.

    “문제는 저 집 꼬맹이야. 카일 베리넌이라고, 우리 또래가 하나 있거든.”

    “돈이라도 뜯겼냐.”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감이 존나 안 좋아. 그런 사람 있잖아. 첫인상부터 이놈은 구리다 싶은 거.”

    나는 수긍하며 조용히 카일 베리넌을 머릿속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 물론 감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엘리엇의 감은 제법 쓸 만했다. 사실 나도 첫인상에 거는 게 많았고. 쎄쎄쎄의 법칙이라고, 보통 내게 쎄한 놈은 다른 사람에게도 쎄하고, 알고 보면 모두에게 쎄한 놈일 때가 많다.

    *

    로베누스는 살롱 문화가 아주 발달한 곳이었다.

    수도 귀족들이 자녀를 아카데미에 많이 보내는 추세인 데 반해 이쪽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룹을 만들어서 선생을 붙였다. 비슷한 걸 찾자면 황자의 놀이 친구로 지내던 시절 단체로 강의를 듣던 것과 비슷한데, 로베누스에서는 그룹과 그룹이 합쳐지는 경우도 많고, 친한 가문끼리 새로운 그룹을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정규적인 수업 커리큘럼이 있는 게 아니라 때에 맞춰 진행하는 식이다 보니 개인의 진도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기는 좋았고, 추진력은 부족했다. 아카데미가 말 그대로 학교라면, 이곳은 학원과 그룹 과외를 섞어 둔 느낌이랄까.

    일타 강사에게 돈이 몰리는 것도, 인기 있는 과목에 학생들이 쏠리는 것도 심했는데, 많은 남자애들이 꿈꾸는 건 역시 검이었다. 나는 로베누스 중앙 기사단 본부에 들어와 있는 애들을 보며 아연해졌다.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소년들은 모두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고, 수도에서 온 기사들을 보며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레오를 필두로 한 수도 출신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당황하고 있었는데, 로베누스 소속 기사들은 태연하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여기가 무슨 탁아소냐.”

    엘리엇이 작은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황실 기사단의 대표로 로베누스에 온 칸딜하스 부기사단장의 동생과 동생 친구의 자격으로 와 있던 우리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수도에서는 생각도 못 한 장면이었다. 나야 가끔 기사단 연무장과 관사로 찾아갔지만, 그건 레오가 퇴근할 즈음에 맞춰간 정도였고. 저렇게 일반인이 자리를 잡고 훈련을 구경하는 일은 황제가 승인한 큰 축제 따위의 경우를 제외하면 없었다.

    “제 조카와 그 친구들입니다. 기사가 되기 위해 검을 배우고 있는데, 오늘 에드윌 경께서 대련을 도와주신다기에 불렀습니다. 훌륭한 검을 보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되니까요.”

    자신을 제크 블로젯이라 소개한 기사가 앞으로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붉은 머리를 가진 블로젯은 짙은 피부색과 대비되는 옅은 녹색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꼬맹이들 중 그와 똑 닮은 붉은 머리가 있으니, 저게 그의 조카인 모양이지.

    하지만 호감 가는 얼굴과 달리 썩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니었다. 나와 엘리엇에 대해서는 레오가 미리 얘기해 뒀다고 들었는데, 저쪽은 이제 와서야 통보하고 있었다. 다행히 군기가 바짝 든 기사단에서는 군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표정이 썩 곱지는 않았다.

    개중 제일 앞에 나와 있던 레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 미리 얘기해 주셨다면 곡예라도 준비했을 겁니다.”

    일말의 여지없이 완벽한 비아냥거림이었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는 와중 블로젯 경이 크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기분을 상하게 만든 모양이군요.”

    “제 기분은 크게 상하지 않았습니다만, 경의 체면은 상할 것 같습니다.”

    네가 곧 내게 처참하게 발려서 조카 앞에서 망신을 당할 거라는 뜻이었다.

    “과연. 황실을 수호하는 네 개 기사단의 일원다운 자신감입니다.”

    우리는 국경이 가까워 진짜 적과 싸우지만, 황실 기사단이 하는 거야 황족을 수호한답시고 멋 부리는 것 외에 뭐가 있겠냐는 말로 들리면 너무 비약일까.

    정말 기분이 크게 상한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비꼬는 레오와, 사람 좋은 얼굴로 긁어대는 블로젯 경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행동거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기사들마저 자존심을 겨루고 있으니, 애들에게 그게 전염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 삼촌 못지않게 반질반질한 얼굴로 이쪽을 보던 꼬맹이 블로젯이 나와 엘리엇을 보다 코를 차며 비웃었다.

    “저 새끼가 우리를 비웃은 것처럼 보이는데.”

    “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비웃은 게 맞지.”

    블로젯은 나이가 많은 건지, 나이에 비해 성장이 빠른 건지 무리 중 키가 제일 컸다. 허리에 찬 것도 끈이 아래로 내려올 정도로 묵직한 무게감을 볼 때 진검인 것 같았고. 어렵지 않게 그가 우리를 비웃은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괜찮은 가문에, 괜찮은 얼굴. 말하는 건 아직 못 들어 봤지만 무리의 리더인 듯 보이니 애들을 장악하는 능력도 있는 것 같고. 재능에 대한 믿음도 넘치는 듯 보였다.

    그에 반해 엘리엇은 체력을 위해 딱 정해 둔 만큼의 운동만 하는 정도인 데다 키가 훅 크며 살이 찔 새가 없었고, 나는 체력과 별개로 워낙 근육이 안 붙는 체질이었다. 슬쩍 봐도 덩치로 게임이 안 될 정도니 비웃음이 나올 만했겠지.

    엘리엇이 내 쪽을 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내 몫까지 부탁한다.”

    “부탁하긴 뭘 부탁해.”

    “저거, 눈 이글거리는 걸 봐. 당장이라도 시비를 걸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이잖아.”

    확실히. 당장 이쪽으로 다가와서 장갑을 던지며 결투를 신청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호승심에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이쪽을 보며 웃어댔는데, 들리지 않아도 썩 좋은 말이 오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꼬맹이 블로젯이 들으라는 듯 우리를 향해 말했다.

    “황실 기사단 부단장과 그 동생이라기에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 저렇게 비실비실한 녀석도 검을 들겠다고 하는 걸 보면. 수준이야….”

    안 그래도 일정 이상 살과 근육이 안 붙어서 키가 안 클까 걱정인데.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엘리엇을 잡았다. 저런 녀석들 근처에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 똥은 밟아 봤자 내 기분만 더러우니 피해 가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엘리엇의 생각은 다소 다른 듯했다. 표정을 지운 채 블로젯의 빨간 머리를 한 올 한 올 새길 기세로 쳐다보던 엘리엇이 하, 웃었다.

    “오랜만에 빡치네.”

    호승심이 끓어오른다는 듯 이를 악문 그를 보며 눈을 굴렸다. 여기서 왜 네가 그렇게 열을 받고 그래.

    “너, 저거 이길 수 있어?”

    나는 일단 그가 가리키는 대로 블로젯을 보긴 했다. 키는 엘리엇과 비슷한데, 덩치는 완전 달라서 훨씬 위협적이었다. 서 있는 자세와 손, 검 상태까지 꼼꼼히 살핀 내가 속삭였다.

    “뭐…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래?”

    그래도 나름. 에드워드 스펠먼이 직접 가르친 제자인데. 꼬맹이 하나 못 넘기면 스승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겠지. 물론 확신은 없다. 스펠먼 외에 다른 사람과 대련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타인과 검을 맞대 본 게, 축제 때 골목에서 그 녀석들과 정도. 그마저도 다대일로 맞붙은 개싸움이라 실력을 재 보기에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해도 싸우거나 할 생각은 없어. 조용히 있다 가고 싶다고.”

    “조용히 좋지.”

    어떻게든 조용하지 않게 만들 얼굴이면서. 말만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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