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17)
  • #43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시종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긴 것은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왜 그때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뭐에 놀랐는지, 자신의 행적이 들킬 수도 있는데 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뒀는지, 레오를 통해 소식을 전한 게 아니라 굳이 초대장을 보낸다는 방법을 택했는지.

    황태자는 정원이 보이는 야외 테라스에 있었다. 햇빛, 바람, 풀. 그 순간의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된 배경처럼 보일 정도로 완벽한 그림이었다. 역시 그는 달보다는 태양이 어울린다. 시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

    혹시 황태자라는 직위는 뻔뻔한 사람을 우선으로 뽑나? 확실히 그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 같기는 한데.

    황태자는 아직 멍청하게 서 있는 내게 앉을 것을 허락하며 손수 차를 따랐다. 준비된 다과는 단 것이었고, 차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지는 과일 향 차였다.

    마디가 크게 도드라지지 않은 우아한 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고 보면 황태자의 검 실력은 좋은 편이기는 해도, 특출 나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검을 쥐었으면 어떻게든 표가 나기 마련이다. 레오의 것처럼 마디가 굵어지고, 손끝이 거칠고 단단해진다. 저렇게 평생 펜보다 무거운 걸 쥐어 본 적 없는 것처럼 매끄러운 게 아니라. 그래서 키시아르 테사를 데리고 다닌 걸까? 기사단장을 개인적인 일에 끌고 다녀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호위인 레오를 끌고 다닌 게 아니라 다행이긴 했다.

    황태자는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도 간간이 웃어 가며 대답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연신 차만 들이켰더니 금세 잔이 비었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정원은, 그가 초대장에 쓴 것처럼 아름다웠다.

    골든보더가 갓 피어난 듯 움트는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유독 많은 꽃잎이 겹겹이 쌓인 형태의 장미는 조금 더 폈다간 고개가 꺾일 정도로 묵직해 보였다. 물론 그랬다간 전체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당장 제거되겠지.

    모양 좋은 입술이 내뱉는 소리를 반만 듣고, 나머지는 적당히 튕겨내기 위해 간간이 뒤쪽으로 시선을 주며 신경을 분산시켰다. 깊게 생각하면 내 속만 아팠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얼굴을 보면 짜증이 치솟았다.

    황태자가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달라붙어 황실 예절을 가르쳤을 선생들은, 그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황족의 위엄을 유지하며 기품 있게 행동하는 법은 가르쳤어도 사과하는 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당장 여기서 그가 또 미친 짓을 한다고 해도 감히 반발하는 것은 불경이며, 사과는 황송한 것이라 떠받들어야겠지. 그렇게 자랐다는 걸 아니 기대도 없다. 나는 속에 왜 저런 게 들어찼는지, 그게 제일 안타까운 얼굴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저 쓰레기는 원작의 메인이니까. 에르켈과 만들어 둔 계획에는 그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지나치게 틀지 않으면서, 반드시 바꿔야 하는 부분을 선택해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반감을 가져 봤자 내 속만 터진다.

    “좋아한다 들었는데. 입에 대지 않는걸.”

    내 앞에 들이밀어진 사탕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스펠먼이 가져왔던 것과 같은 종류다. 나는 내가 지금 실재하는 것을 보는 게 맞나 싶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입 앞까지 음식이 대령되는 서비스는 차남이 나를 끌어안고 밥을 먹이던 시절을 마지막으로 졸업했다. 음식을 건넨 손의 주인이 제국의 1황자이자 황태자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대단히 황송한 대접이 아닐 수 없다.

    그제야,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얼어붙은 눈이 온기를 찾아 녹아내린 장면은 뇌리에 박힐 만큼 자극적이다. 르웰린 에드윌이 남자에게 치이고 구르는 불우한 삶 속에서도 사랑에 빠진 이유를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그러니까, 그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꼭, 사, 시발, 사랑, 스러운 것을 보듯이.

    내가 생각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 싶었다. 회로가 고장난 것처럼 버벅거린다. 사랑, 스러운 눈길과 황태자라니. 두 단어를 나란히 나열하는 것만으로 속이 거북해진다. 하지만 정말 그것 외에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이 미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벌어진 입 안으로 사탕이 쏙 들어왔다. 사과 맛이었다.

    피가 돌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데 우아하다고 생각했던 손가락이 다가와 가볍게 건드렸다. 놀라서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멀리서 기립하고 있던 시녀가 다가왔다. 몇 사람의 손이 지나가고 나자 탁자와 바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깨끗해진다.

    그가 턱을 괴고 웃는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쳤다. 입을 틀어막았다. 이전에도 황태자는 겉으로나마 친절하게 굴었다. 일단 목소리만 들으면 그랬다. 그 안에 숨기지 않은 칼을 드러낸다고 해도,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는 목소리.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이전에는 이렇게 크림처럼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종이 뎅 울린다. 황태자가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왜 나를 불러냈는지. 오면서 생각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 버렸다.

    *

    그 뒤로 황태자가 뭐라고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내 넋을 놓고 있다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방으로 달려 올라가 그레도르의 일기장을 펼쳤다. 에르켈이 필요하다.

    <여름이 한창인 날. K에게.

    저번부터 고민하던 이름을 결정했어. 주인공이 들어가게 되는 길드 이름은 삼성이 어떨까 해. 어딘가에서는 성이 별을 뜻한다고도 하더라. 아벨 형이 고대 마법에 관해 설명하면서 알려 줬어. 소설에는 재능이 없는데, 이렇게라도 펜을 잡지 않으면 영 형편없는 문장을 나열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이제 남은 건 그 라이벌이 되는 곳인데.>

    일기장 사용 규칙은 간단했다.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신호를 보낼 것.’ 이번 달의 추가 규칙은 일기장에 쓰는 편지다. 잉크가 스며들자 곧 익숙한 필체가 떠올랐다.

    [오, 친애하는 L. 그건 애플로 하는 게 좋겠어. 한 입 베어 문 사과 엠블럼을 다는 건 어떠니.]

    <염병 진짜.>

    마음이 급해 글씨가 날아다녔다. 잉크가 튀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아네트? 집안일?]

    <시발.>

    [왜. 누가 괴롭혀. 가서 혼내 줄까.]

    <황태자 그 새끼가 문제야. 혼내 줄래?>

    [그자식이 또 왜.]

    [ㅠㅠ]

    <그 새끼가 미쳤다고 믿고 싶긴 한데, 그거야 이제 와서 새삼스럽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거….>

    [엥?]

    [오….]

    <원작이 시작된 것 같아.>

    *

    [치인 거 맞는 거 같은데?]

    황태자의 기이한 행각에 대해 써 바치자 원작자가 결론을 내렸다. 내심 아니라고 해 주길 기대한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뜬금없이 왜?>

    그 새끼가 내 목을 졸랐다니까.

    차마 에르켈에게 다시 그 사실을 상기시키지는 못하고 이를 갈았다. 본인 잘못도 아닌데 미안해하는 건 둘째치고, ‘대박… 완전 빼박이네….’ 하는 반응밖에 더 돌아올까 싶다.

    그놈이 나를 살려 둔 이유가 하필 그 순간 나한테 반했기 때문이라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엄….]

    [확실하지는 않은데.]

    상황을 정리한 에르켈은 가설을 세웠다. 이른바 ‘키워드’다.

    [내가 전에 써 준 거 생각나? 황태자는 열두 살에, 화원에서 만나서,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진다.]

    에르켈이 옆에 ‘열두 살’, ‘화원’, ‘첫 만남’을 따로 썼다.

    <ㅇㅇ>

    [마침 그게 배경이 밤이었거든. 달빛을 받으면서 르웰린 머리색이 꼭 달빛 같다고 하는 게 나왔어.]

    단어들 옆에 ‘밤’이 추가됐다.

    [그런데 봐 봐. 처음에 만난 걸로 첫 만남 부분이 충족됐잖아.]

    ‘첫 만남’ 위로 동그라미가 여러 번 덧그려진다.

    <그리고 고양이 때 화원이 채워졌고, 그날 밤과 열두 살이라는 조건까지 맞췄다?>

    [고렇지.]

    [확실하지는 않은데, 이게 제일 그럴듯하지 않나 싶어.]

    그렇긴 한데. 펜 머리를 툭, 툭 책상에 치며 고민했다.

    <그러면 원작 그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거 아니야?>

    [응. 만약 이게 진짜라면 사건 진행은 좀 달라져도, 결국 조건만 맞추면 굴러가긴 한다는 거겠지.]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

    다시 성에 틀어박혔다. 원작이 시작됐다는 말에 검에 대한 열정은 개뿔. 입맛도 뚝 떨어졌다.

    형제들은 이제 기운을 차리나 싶던 막내가 다시 침실에 틀어박히자 난리가 났다. 황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걸 아무 일도 없었다고 돌려보냈다. 절대 믿지 않는 얼굴이긴 했다. 그래도 케일이 잘 다독인 덕에 나머지 둘도 캐묻지 않았다.

    ‘고민이 있다면 꼭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돼, 르웰린.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네 편이란다.’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말하는 게. 아무래도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부정할 힘도 없고, 다른 핑계를 댈 것도 없어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어.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저한테 반해서 돼먹지 않은 플러팅을 하더라고요.’ 할 수도 없고.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다. 언제까지 성안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스펠먼과 다시 수업을 재개하기로 했고, 외출을 허가받은 김에 엘리엇과 3황자를 보러 가기로 약속도 잡아 놨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문제는 황태자는 눈치가 빠르다는 거다. 내가 자신을 피해 도망쳤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그와 마주쳐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그를 피하는 기간을 늘려 봤자 재회만 민망해질 뿐이다. 그래. 알고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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