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17)
  • #42

    그나마 그놈들이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 흠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었다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니. 아무리 개인의 도덕적 잣대는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기운다지만.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몰려오는 두통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있던 연민이 사라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품에 비비적거리며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그놈들이 죽지 않았으면 내가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죽이려고 한 건 황태자도, 그놈들도 마찬가지다. 동정 따위의 감상 대신 현실을 떠올렸다. 그들이 죽어 증인이 사라진 덕에 황태자가 나를 죽이려고 한 사실은 묻혔다.

    내가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댈 핑계는 떠오르지 않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비틀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난 듯, 누군가 데려다 주기는 했는데, 그 사람 얼굴은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다고 했다. 케일과 레오가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는 모양인데, 황태자와 키시아르 테사를 본 사람이 없으니 큰 소득은 없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졸렸는데, 가만히 있자니 정신이 말똥말똥하게 깨어났다. 커튼 너머로 넘어오는 빛을 보니 밤이 아닌 듯했다. 케일이 눕혀주는 대로 다시 누웠다. 장남은 이불을 내 목까지 올렸다가, 가슴팍으로 내렸다. 가만히 다독이는 손길에 일단 눈을 감았다.

    *

    손님이 찾아왔다. 엘리엇이 어머니와 함께 남부 항구를 보러 떠났으니, 오랜만의 손님이었다.

    상대가 에드워드 스펠먼이 아니었다면 더 순수하게 반가워할 수 있었을 텐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수업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터라 얼굴을 보기 민망했다.

    내가 수도에 간다고 하면 난리 날 사람이 성에 한둘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었고, 나도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편지만 달랑 보내는 건 성의 없어 보인다는 핑계로 미루다 선물과 함께 연락을 한 게 사흘 전이다. 답장이 없기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싶었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그런가요.”

    얼굴에 손을 올렸다. 일단 르웰린의 나이가 어렸고, 지나칠 정도로 잘 자고 잘 먹었다. 내가 묽은 수프를 볼 때마다 죽을상을 했더니 지난주부터 고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든든하게 먹었더니 단 게 땡겼고, 아벨을 꼬드겼더니 어렵지 않게 디저트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살이 찌면 쪘지, 죽어 가는 안색은 아니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피부는 푸석하기보다 말랑하고 부들거렸다.

    “미리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린애가 아픈 와중에 정신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다.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의외로 스펠먼은 그렇게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워낙 고지식하게 굴기로 유명한 데다, 10대 초중반이 되면 집을 떠나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이룩하기 전까지 돌아올 수 없다는 스펠먼가의 가풍 탓에 내가 아파도 나약한 정신을 운운하며 잔소리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그렇게 아끼는 두 딸도 예외 없이 밖으로 보내지 않았나. 장녀 데보라 스펠먼이 열여섯에 콜로세움 우승자가 된 이야기는 검을 들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아는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에드워드 스펠먼은 내게 엄하게 구는 대신 몸이 괜찮으면 됐다고 말했다. 혹시 이게, 그건가. 더 이상 그와 내가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니 그런 말이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해서?

    이제 와서 수업을 이어 나갈 수도 없으면서,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서운해졌다.

    “병문안 선물이다.”

    스펠먼이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나는 천천히 포장을 풀었다. 평생 검만 잡고 살아온 기사답게, 검, 갑옷, 아니면 영양제, 그것도 아니면 뭔가 아티팩트 따위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상자 안에 든 건 사탕이었다.

    혹시 손자들에게 가져갈 걸 잘못 가져온 건 아니겠지? 나는 노기사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아무리 봐도 선물을 잘못 가져와서 당황하는 사람의 것은 아니다.

    “기르테아에서 사온 사탕이라고 하더구나.”

    나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크지 않았다. 총천연색으로 화려한 사탕은 알이 꽤 굵고 안이 투명했는데, 움직임에 따라 안쪽에 채워진 것도 따라 기울며 찰랑거렸다.

    조심스럽게 입에 넣자 상큼한 맛이 났다. 입에서 천천히 굴리다 얇아진 부분을 혀로 툭, 툭 건드리자 터지며 액체가 쏟아졌다. 삼키고 나서도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달았다. 내가 멍하게 스펠먼을 바라보자 그의 수염이 들썩거렸다. 자랑스러운 얼굴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온갖 고급스럽고 특이한 건 다 입에 넣어 봤는데, 이건, 이것만큼 맛있는 것은 먹어 본 적은 없다.

    난생처음으로 설탕을 입에 댄 사람처럼 충격에 빠져 눈을 깜빡이다 상자를 조심스럽게 닫았다. 이대로 정신을 놓고 앉은 자리에서 다 끝내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아껴서, 제일 맛있는 상태로 먹고 싶다.

    “마음에 드는 것 같구나.”

    “네…. 기르테아에서 왔다고 했나요? 어느 곳에서 사 온 건지 아시나요?”

    “흠, 받은 걸 가져온 거라 정확히는 모르겠다.”

    상관없다. 이런 맛이 유명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곳에서 유명하다는 가게를 털다 보면 나오겠지.

    스펠먼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흐뭇하게 상자를 쓰다듬던 나는 그걸 보고 그대로 굳었다. 얇은 봉투를 봉한 것은 황가의 문장이었다.

    “네 형제들이 너를 아끼는 것은 알고 있으나, 너무 보호하려 드는 것도 때로 독이 된다.”

    “…….”

    “그간 네게 도착한 편지 중 황가의 것이 있었느냐?”

    없었다. 설마하니 황족의 명령을 어기며 편지를 빼돌릴 줄은 몰랐다. 내가 입술 안쪽을 잘근 깨물자 스펠먼이 봉투를 내 쪽으로 더 밀었다.

    “거절을 하더라도 네가 보고, 결정해서 해야지.”

    스펠먼은 쯧쯧, 혀를 찼다. 반박할 수 없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든 종이는 단단하고 두꺼웠다. 그걸 만지자마자 감이 왔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반, 피할 수 없으니 빠르게 끝내자는 마음 반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어. 그대의 형 말로는 회복하기 힘들어 성에서 요양 중이라는데, 내가 괜히 움직이게 만드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정원을 꾸몄는데, 그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 초대를….]

    유려한 필체를 다 읽지 않고 질색했다. 예상대로 초대장이었고, 놀랍지 않게도 황태자의 서명이 있었다. 이 새끼는 혹시 양심이라는 게 없나?

    “제가 거절하면, 피해가 갈까요?”

    내 말에 스펠먼은 침묵을 지켰다. 긍정의 의미다.

    “몸이 안 좋다고 하면 어쩌지 못하시겠지.”

    미룰 수는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가야겠지. 손톱으로 황태자의 서명 부분을 갉작였다. 그렇게 하면 지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괜히 심통이 나 봉투에 다시 초대장을 넣어 버렸다.

    “직접 보니 안색이 좋지 않고, 상태가 악화된 듯 보였다고 전하마.”

    스펠먼의 얼굴도 썩 좋지는 않았다. 한참 어린 전 제자에게 황태자께서 너를 부르시고, 너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고 전하는 속도 편치는 않겠지.

    “제가 따로 답장하겠습니다.”

    헛기침 소리와 함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스펠먼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다가, 괜찮아지면 연락해라.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굳는다.”

    “네?”

    놀라 되물었는데, 에드워드 스펠먼은 되려 그 반응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타박했다.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냐. 수업을 해야지.”

    그야 경과 제 관계가 쫑난 줄 알았으니까요.

    “마침 기대보다 성의 연무장이 쓸 만하더구나. 어차피 수도에서 할 일도 없는데, 신세 좀 지면 되겠지. 백작은 통이 큰 편이니 그 정도는 대가를 계산하지 않을 거다.”

    황성에 가는 게 불편해 죽겠다는 걸 알아챘는지 미리 말을 꺼내 주기까지 했다. 나는 민망함에 괜히 손톱으로 손바닥을 쑤셨다.

    “저는 경께서 크게 화를 내며 ‘이 근성 없는 놈! 당장 그만둬라!’ 할 줄 알았습니다.”

    “누구를 쪼잔한 늙은이로 만들려고.”

    스펠먼은 얼굴을 확 찌푸리더니 물었다.

    “설마 그렇게 흐지부지 끝내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나는 사사로이 사제 관계를 맺지 않는다.”

    “황태자 전하께서 부탁하셔서 받아들이신 줄 알았습니다.”

    “그랬으면 폐하의 명을 따라 다른 분들도 가르쳤겠지.”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내가 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노기사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네 재능이 쓸 만하다 여겨 지금껏 가르쳤다. 원한다면 다른 스승을 찾아도 좋으나, 나는 네가 충분히 좋은 재질을 가지고 있다 여긴다.”

    가까운 곳에 비교 대상이라고 해 봤자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레오나, 동문인 황태자 정도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는데. 제국 최고 기사였던 그가 저렇게 말해 주자 부끄러워졌다. 그라면 빈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어린애를 달래기 위한 허울 좋은 칭찬이라는 낙담이 충돌하며 다퉜다.

    *

    “어디로 가지?”

    “셀리아제 궁에 계십니다.”

    스펠먼이 다녀간 뒤, 나는 곧장 초대에 응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황태자는 바로 날짜를 잡아 주었다.

    가족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걸 뿌리치고 올 때까지만 해도 굳은 결심을 했는데, 막상 오랜만에 황성에 오자 줏대 없이 흔들렸다. 긴장 탓인지 손에 땀이 찼다. 지금이라도 안 되겠다고 등을 돌려 달아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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