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17)

#39

불안했다. 무언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 것 같은데, 폭풍 속에서 몸이 이리저리 휘청이는 와중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다. 왜 황태자가 신화시대의 유물로 측정되는 가면을 쓰고 수도를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었고, 왜 여기에 있는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저들을 전부 죽인 이유도 모르겠다.

분명 안에 들어와 있는데 눈앞을 가린 채 길을 찾고 있는 듯 불안감만 커져 대답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자 고개를 기울인 황태자가 손에 든 가면을 내 앞에 흔들었다.

“이 가면은 ‘그림자의 왼발’이라고 해. 타인에게서 사용자의 존재를 지워 버리지.”

좀 전과는 달리 나긋한 목소리였다. 알고 있는 이름과는 달랐다. 내가 여전히 답을 못 하고 헐떡이자 황태자가 내 뺨을 두드렸다. 상처가 난 곳이었다. 미려한 생김과 달리 끝이 단단한 손가락이 아픈 뺨을 지나 목에 닿았다.

“그런데 그대는 처음부터 알아봤잖아? 사실 제법 놀랐어.”

나는 셔츠 깃을 벌리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몸을 떨었다. 어느 정도에서 걷어내야 저 새끼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을까.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여느 때처럼 온기라곤 없었다. 보석을 세공한 것처럼 아름다운 눈이 감흥 없이 나를 훑었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서늘하고 단단한 손끝으로도 살기가 느껴졌다. 번들거리는 눈을 보면 겁이나 먹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 고민했어. 타고난 마법 재능이 뛰어나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에 찾아봤지만, 자질은 형편없었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 걸 황태자가 가볍게 제지했다. 내려가던 손가락이 다시 올라와 목덜미를 천천히 감았다.

덜컥 겁이 났다. 아직 얹었을 뿐인 손이 금방이라도 조여 올 것 같았다. 다급하게 황태자를 불렀다.

“전부터 그대는 그런 표정을 짓던데. 겁에 질려서는…. 숨이 막힌다는 얼굴이야.”

“전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섞여 튀어나온 ‘전하.’라는 호칭에도 황태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다. 나는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선 사냥감처럼 떨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런 나를 보며 눈썹을 찌푸릴 뿐이다. 얼굴만 떼어 놓고 본다면 대단히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거슬리네.”

나는 그제야 입이 뚫린 것처럼 다급하게 외쳤다.

“잊을, 잊겠습니다.”

황태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달빛을 받아 드러난 수려한 얼굴이 기울어진다.

“뭘?”

“전부요, 전부.”

“흠….”

“전하를 이곳에서 본 것도, 저, 사람들. 여기서 있었던 일들 전부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와 피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늘어놓았다. 그리고 내 말이 멈추자마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든 잡아 뜯어 보려 노력했지만, 위에서 짓누르듯 무게를 싣자 꼼짝하기도 어려웠다. 바닥을 구르던 발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미친, 새끼야. 뻐끔거리며 욕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보는 게 이 상판이라니. 억울함에 눈물이 났다. 내 꿈은,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굳이 죽음에도 꿈이라는 말을 붙이자면. 가족들 사이에서 평화롭고 조용하게 눈을 감는 거였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마지막을 꿈꿨다.

일이 틀어져 원작을 비틀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 황태자 이 새끼는, 르웰린을 사랑하게 된다면서. 첫사랑이라 본성도 숨기고 다정하게 대해 준다며. 다정은 개뿔. 목소리만 사근사근하면 그게 다정인가? 확실히 그렇게 치면 아네트도 상냥한 사람이고 황태자도 선인이다.

목뼈를 꺾을 생각은 없는지 기도를 틀어막은 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지막 기억이 온정 하나 없는 붉은 눈인 건 너무 슬펐다. 발끝에 힘을 주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크게 뜬 달이 마침 공터를 비추고 있었다.

“쿨럭, 컥, 커흑.”

정신을 놓기 직전에 손이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며 몸을 비틀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 탓에 뺨이 축축했다.

거슬린다며 사람을 죽이려던 놈이 내 목을 놓고 상체를 일으킨 채였다. 멈추지 않는 기침을 가리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뭔가 엄청난 것을 본 것처럼 눈을 뜨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새끼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서 더 무서웠다.

“그대는….”

엉망이 된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뭐라고 지껄이던 황태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뒤로 키가 훌쩍 크고 마른 키시아르 테사가 나타났다. 키시아르 테사는 다리를 다쳤는지 한쪽 다리를 느리게 끌고 있었다.

“잡았나?”

“놓쳤습니다. 팔을 잘랐으니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황태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았다. 목을 그어 놓고는 사과랍시고 선생을 붙여 주더니. 이번에는 그런 겉치레도 없다. 김민지가 말한 ‘쓰레기’가 그냥 비유인 줄 알았는데. 진짜 쓰레기를 뜻하는 건 줄은 몰랐다.

기침이 멎었는데도 몸을 일으킬 수 없어 바닥을 기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움켜쥐다, 그것이 황태자의 망토라는 것을 알고 기겁하며 밀어냈다.

“안전한 곳으로.”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나를 죽이려고 해 놓고, 이제는 기사를 시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으라니. 욕을 쏟아내고 싶었다. 상태가 조금만 양호했다면 온갖 새끼를 찾으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 뒤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키시아르 테사가 나를 둘러업고 움직인다 싶더니 밝고 트인 공간으로 이동했다. 익숙한 축제 현장이었다. 기사단장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나는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스왈튼가 기사에게 발견될 수 있었다.

헬레나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숨이 넘어가도록 우느라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엘리엇과 에이든의 얼굴도 심각했다. 다니엘은 기사들에게 화를 내며 당장 그 새끼들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이미 다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살인 현장에 있다 나왔으면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증언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힘이 없었다.

09. 그레도르의 편지

당시 우리의 보호자였던 다니엘은 나를 우선 스왈튼 저택에 데려갔다.

다니엘은 심하게 자책하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그의 탓은 아니었다. 다니엘과 스왈튼가 기사들의 경호는 엄중했다. 자신 있게 사람 많은 축제 한복판을 돌아다니겠다고 외칠만 했다.

당시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 헬레나가 끌려가던 것부터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도로가 복잡하다고 해도 마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광이 나는 스왈튼가의 갑옷은 마차 이상으로 위협적이다.

그사이 레오가 도착했다. 황실 부기사단장이 뛰쳐나오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긴 한데 싸늘하게 굳어 목소리에 날을 세우는 차남을 보자 그의 직장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후작이 부른 의원이 목의 상처를 치료해서 다행이다. 그걸 발견했으면 허리춤에 찬 검이 검집에 들어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레오는 내가 누운 침대 옆에서 침묵을 지키다가, 황실 기사단은 당장 움직일 수 없으니 스왈튼가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해 주지 않으면 사단을 벌일 기세다.

하나뿐인 딸이 수도 한복판에서 납치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스왈튼 후작도 레오 못지않게 눈이 뒤집혀있는 상태였기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엘리엇이 전해 주었다. 하긴 후작도 부상으로 급하게 은퇴하기 전까지는 전장의 지휘관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실적보다는 불 같이 급하고 강한 성격 탓이었다.

시체를 찾았다는 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뿌리를 뽑아 버리라고 지시했다는 말에, 나는 그들이 시체의 목을 다시 한 번 베겠다고 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오와, 이어서 도착한 케일은 나를 바로 옮기고 싶어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얻어 맞은 덕인지 열이 자꾸 올랐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포션을 먹고 좀 나아졌다가, 약빨이 떨어지면 다시 앓아누웠다. 겉으로 보이는 타박상은 없는데 애가 영 맥을 못 추리자 죽어나는 건 의원이었다.

결국 백작이 펄쩍 뛰며 신관까지 부른 후에야 마차를 타고 이동할 상태가 됐다.

가족들은 어찌나 놀랐는지 타운 하우스도 아니고 바로 에드윌 성으로 이동했다. 계속되는 호출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레오를 제외하고 백작, 케일, 아벨까지 나서서 호들갑을 떠는 통에 나는 내 손으로 수저를 들 필요조차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방을 나서기는커녕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큰일이 날 것처럼 굴었다. 막내 도련님이 복도에서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큰일이 난다고 울먹이는 하녀들 덕에 그냥 얌전히 침대에 올라갔다.

잠은 끝없이 늘어난다더니. 배가 고파서, 배가 불러서, 밤이라, 이불이 푹신해서. 온갖 핑계를 대며 눕다보니 하루 중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억지로 시간을 죽이고 잠에서 깨면 아침일 때도 있고, 해가 저물어 갈 때도 있고, 늦은 새벽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오늘로 정확히 3주째. 여전히 손가락을 까딱이고, 음식물을 씹고, 숨을 쉬는 것 외에 어떤 노동도 허락되지 않는 시간을 보내며 실시간 근손실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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