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17)
  • #37

    “길을 잃으신 모양입니다. 도와 드릴까요?”

    굉장히 느릿느릿한 말투였다. 직감적으로 사이렌이 울린다. 딱 봐도 양아치. 척 봐도 공갈 사기.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눈과 광대 사이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미소를 달고 다가왔다. 그닥 깔끔하지 않은 인상에 지나친 서비스 미소를 더하자 선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은 많고, 이쪽에는 집중하지 않고. 시끄러운 와중에 어리고 돈 많아 보이는 어린애 둘이 헤매고 다니니 별생각 없던 사람들도 나쁜 마음을 품을 상황이다. 동네 양아치라면 이게 어디서 굴러들어 온 떡인가 싶을 테고.

    나는 속으로 차남을 씹었다. 수도 경비를 강화한다면서 저런 놈들 단속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이럴 때 쫄면 지는 거다. 나는 최대한 재수 없는 어린 귀족처럼 보이길 바라면서 턱을 치켜올렸다. 표본이 되어 준 건 2황자 새끼다. 그 거만한 태도를 떠올리며 턱을 치켜들고 짜증을 섞었다.

    “길을 잃다니. 축제에서 길을 잃는 머저리도 있나?”

    여기 있다.

    “이 멍청한 녀석들은 자리를 잡아온다더니, 만들어 오기라도 하는 거야?”

    발을 구르며 있지도 않은 호위를 욕했다. 블러핑이었다. 남자가 우리가 단순히 돈 많은 집안 자식이 아니라, 힘도 있는 집안 자식인 걸 알길 바랐다.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족제비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뱀상이다.

    “이상하네요. 아까부터, 지켜봤지만. 호위는 없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헬레나의 손을 잡고 달렸다. 귀족인 티를 내도 어떻게 해 보겠다고 덤비는 놈들에게는 답이 없다. 법은 무섭지만,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 그리고 저런 류는 주먹이 아니라 칼도 휘두른다.

    일행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의식해 골목 안쪽으로 빠지는 모험은 하지 않았다. 남자는 달리는 우리를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길을 찾던 나는 운하 옆을 두껍게 채우는 사람들의 벽으로 뛰어들었다.

    사람 사이에 끼이면 움직이기 힘든 건 저쪽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몸이 작은 우리가 유리하다. 다리를 굽히면 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린!”

    “꽉 잡아, 엘라.”

    헬레나는 최선을 다해 내 뒤를 따라왔다. 바짝 붙었다가도 금세 손이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멀어졌다. 혼자라면 몰라도 둘이서는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는 생각보다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를 악물고 길을 뚫었다. 이럴 때 다니엘과 기사들이 나오면 완벽한 타이밍인데.

    “꺄악!”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정확히는 누군가 헬레나를 낚아채 갔다. 나보다 반 뼘쯤 작은 남자애였다. 사람들 사이로 가려졌다, 나타났다 하는 남자의 얼굴이 기분 나쁜 미소를 띤 걸 보니 그의 패거리인 듯했다. 인파 사이에, 그것도 저렇게 작은 일행을 넣어 놨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이런, 시발. 한 발 늦게 그쪽을 향해 움직였지만, 남자애는 이날을 위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연습이라도 했는지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갔다. 헬레나의 비명이 이목을 끌면 좋을 텐데. 마침 크게 떠오르는 등 때문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등은 온화하게 팔을 벌린 야캅의 모습이었다.

    기껏 빠져나온 보람도 없이 아까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간신히 뚫고 나오자 헬레나를 끌고 달리는 놈이 보였다. 연무장을 토 나올 때까지 돌았던 보람이 있다. 몸이 아직 더 달릴 수 있다고 외친다. 다리에 힘을 주자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마침 헬레나가 반항하며 바닥에 몸을 붙였다. 나는 그대로 달려 달아나던 등을 걷어찼다.

    “악!”

    “꺄아악!”

    붙잡힌 팔 때문에 같이 넘어진 헬레나를 부축했다. 원피스는 원래 색이 뭐였는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됐지만, 다른 곳은 멀쩡했다.

    “돈이 필요한 거면 구걸이라도 하든가! 납치해서 어쩌려고? 단체로 끌려가서 뒤지기라도 할 거야?”

    흥분한 덕에 말이 막 튀어나왔다. 옆에서 헐떡이던 헬레나도 알아서 치마를 탁탁 털었다. 헬레나는 심약한 편이 아니다. 그녀가 약한 건 엘리엇뿐이다. 놀라긴 했어도 다치지 않은 후작가 외동딸은 내가 아까 흉내 내던 거만한 귀족처럼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폈다.

    “너 내가 누군 줄이나 알아?”

    유치하지만 효과는 큰 말이다. 스왈튼이라는 성만으로 수도에서는 많은 걸 할 수 있다. 바닥에 얼굴을 갈아 코피를 줄줄 흘리는 녀석은 화를 내는 대신 흥!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그러게 귀족이면 얌전히 지정석에나 박혀있지 왜 싸돌아다녀?”

    “뭐?”

    잘못했다고 빌지는 않아도, 최소한 똥 밟았다고 피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소년은 그럴 생각도 없는 듯했다.

    “이 동네에서 나쁜 짓 할 때 얼굴 보이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아. 깨달음과 동시에 헬레나의 어깨를 감싸고 몸을 숙였다. 찰나의 차이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검집이 지나갔다. 뒤에서 나타난, 족제비와 뱀 사이 어딘가에 있는 남자가 아쉽다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제야 아까 잘 피해 놓고, 이번에는 골목으로 제대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다. 남자와 꼬맹이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다. 이대로 안쪽으로 몰리면 나갈 수 없다. 천천히, 할 수 있어. 그나마 좀 더 만만한 꼬맹이 쪽으로 방향을 틀다가 가슴팍을 걷어찼다.

    “엘라!”

    이번에는 예상했는지 녀석도 내 발을 꽉 붙잡았다. 어차피 이걸로 저놈을 보내 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노리던 대로 틈이 열리자 헬레나가 알아서 사람들 사이로 뛰어갔다. 아까는 제법 열심히 쫓아오던 남자는, 이번에는 그 뒤를 쫓지 않았다. 일행이 저 안에 더 남은 건가? 아니면….

    아예 무게를 실어 버리자 꼬맹이가 쿨럭거리며 발을 놓쳤다. 남자가 검집에 든 검을 휘두른다. 다시 피했지만, 이번에는 귀를 스쳤다. 묵직한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고, 웅웅거리는 이명이 남았다. 남자는 나를 맞추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피해 다니는 걸 보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모는 대로 몰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놈의 의도가 뭔지 알기 힘들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우리 둘 다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소년은 분명 의도적으로 얼굴을 보였다고 말했고, 그건 우리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등에 벽이 부딪쳤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친구분이 끌려오는 것까지 보지는 못할 테니까.”

    남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는 굉장히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자식 옷은 내가 가질래요. 덕분에 바지에 구멍이 났다구요.”

    꼬맹이가 넘어지면서 무릎이 해졌다며 투덜거렸다. 남자는 흔쾌히 허락했다. 내 바지의 소유권이 정작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저들에 의해 결정되다니. 웃기는 상황이었다.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왕 하는 거 재킷도 가져야지, 키프. 어차피 맞는 건 너밖에 없잖아.”

    골목 곳곳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패거리들이 나왔다. 설마하니 스펠먼이 말한 ‘언제나 한 명을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싸울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이렇게 빨리, 몸으로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검 대신 막대기라도 잡으면 안심은 될 것 같은데. 바닥을 살폈다. 영화에서는 이럴 때 쇠 파이프라도 굴러다니던데. 소득은 없었다. 무슨 놈의 공터가 쓰레기 줍기 봉사활동이라도 했는지, 휴지 조각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여럿이서 덤비는 거, 너무 비겁하지 않아?”

    족제비는 몰라도 다른 녀석들은 나잇대가 고만고만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됐거나, 그에 조금 못 미쳤다. 저 나이에는 호승심이 불탄다. 자존심이라도 상하길 바라며 비아냥거렸지만 효과는 없었다. 재킷까지 가지라고 소리치던 녀석이 배를 붙잡고 웃었다.

    “정정당당한 기사도, 그런 거라도 외우고 다니는 모양인데. 귀족이라 그런가?”

    “어린애잖아. 한창 그런 게 멋있어 보인다고.”

    시간을 끌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헬레나가 다니엘을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면 여기까지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최대한 희망을 가져 보려고 회로를 돌렸지만 번번이 막힌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무리다.

    “돈이 필요한 거면 줄게.”

    “적선이라도 하게? 미안한데, 구걸할 생각은 없거든.”

    꼬맹이가 코를 찬다. 코피가 줄줄 흐르는 상태로 이죽거려봤자 별로 무섭지는 않았지만, 다른 놈들도 조용한 걸 보니 같은 생각이긴 한 모양이다.

    “그럼 뭘 원하는 건데?”

    “글쎄. 고귀한 귀족 나리 엿 먹이기?”

    재킷 어쩌구가 꼬맹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족제비는 팔짱을 끼고 뒤에 빠져 있었다. 머리와 허리, 다리까지 이어지는 선이 곧다. 의식하고 선 게 아니라 더 확실하다. 남자는 검을 오래 쥔 사람이다.

    레오와 스펠먼을 봐 온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까 검을 휘두른 건 내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조절한 게 분명하다. 그러면 한층 더 기묘한 조합이다. 동네 양아치처럼 보이는 열 몇 살 애들과, 꼬맹이와, 30대 검사. 교점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 뭉치는 목적은 많지 않다.

    입술을 잘근거리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자기들끼리 농담을 따먹던 녀석들이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본다. 찌르는 듯한 긴장감이다.

    “백만.”

    “뭐?”

    “5백만.”

    조용해졌던 녀석들이 다시 떠든다. 지금 돈을 주겠다는 거야? 돈은 안 받겠다니까, 안 들리는 모양인데. 아직까지는 웃음소리가 나온다. 5백만 골드면 황실 서기의 3년치 봉급이다. 나는 단위를 한 번 더 올렸다.

    “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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