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17)

#35

헬레나의 풋풋한 첫사랑은 여전했고, 엘리엇의 거부도 그대로다. 엘리엇과 있을 때 스왈튼 후작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표정이 곱지 않았다. 보석보다 귀하게 키운 딸이 좋아하는 놈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심지어 딸의 짝사랑이라고 하니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제국의 변방에서부터 귀족들이 상경하는 중이었다. 민족 대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새롭게 권력을 쥘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수도 귀족과 부르주아가 많은 아카데미도 축제 기간에 맞춰 방학을 주었다. 짧지 않다고 해도 오고 가는 시간을 빼면 축제를 딱 절반 즐길 수 있는 정도다.

애들이 대부분 올라오는 와중에 에르켈은 아카데미에 남아 있겠다고 전했다. 사람이 빠졌을 때 해 볼 게 있다고는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하던데. 같이 갈 거지?”

“하….”

저렇게 인상을 쓰다 어린 나이에 미간 주름을 얻는 건 아닐까. 밑바닥에서부터 긁어모은 듯 깊은 한숨이다. 고민에 빠진 엘리엇이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탁자만 두드렸다.

엘리엇이라고 헬레나가 싫어서 저러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다만 가문, 상황을 고려했을 때 거절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겠지. 이왕이면 둘이 잘됐으면 하는 게 내 마음이지만, 끼어드는 것도 오지랖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헬레나가 상처받지 않게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포장하는 정도다.

“너무 그러지 마. 아직 어리잖아. 좀 크면 너를 좋아했던 건 기억도 못 할 거야.”

헛웃음을 지은 엘리엇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는 나한테 애늙은이라고 하지 마. 가끔은 네가 나보다 배는 산 것처럼 느껴지니까.”

나는 몸만 애고, 속에는 성인이 들어 있는데 너는 진짜 애면서 애답지 않게 구는 거잖아.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말을 삼키니 나오는 건 웃음밖에 없었다.

애들은 있는데 그들을 다뤄 줄 에르켈이 없다. 그간 더 시끄러워지면 시끄러워졌지, 조용해지지는 않았다는 걸 편지로 증명하는 애들을 데리고 어떻게 이 축제 기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지방 권력들이 올라오는 기회를 놓치기엔 아까웠다.

정치에서 중요한 건 돈과 사람이다. 괜히 학연, 지연, 혈연을 위해 기를 쓰는 게 아니다. 현대와는 양상이 조금 달라도, 결국 제국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쓸 만한 인연을 얻기 위해 발로 뛰고, 돈을 쓰는 건 중요하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통성명이라도 해 본 사이와 그렇지 않은 사이는 많이 다르다.

나와 엘리엇의 목표는 이번에 축제를 위해 올라온 귀족들과 안면을 트는 거였다. 비싼 선물을 안겨 줄 수 있으면 더 좋고. 적당한 선물은 호감을 사지만 비싼 선물은 부담을 준다. 뇌리에 남아 다음에 쉽게 이쪽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지. 아직 성인도 안 된 젖살 남은 어린애들이 젠체해 봤자 호감을 주기는커녕 가문을 믿고 망나니처럼 군다는 인상만 남기기 쉬웠다.

그러면 남은 건 가족들과 함께 움직이거나, 우리 또래를 만나 보는 것 정도인데. 이것도 쉽지는 않다. 케일은 칼 같고, 레오는 눈치가 빠르고, 아벨은 흥미를 느끼지 못할 테니까. 백작은… 백작과 함께 있는데 정치질을 시도하느니 얌전히 방에 돌아가서 안전을 기도하는 게 효과 있겠지.

“황실 연회는 무리야. 리키온 전하께서 확답 주셨어.”

연회는 귀찮은 대신,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떠든다고 해도 시선을 받지 않고, 테라스에 나가 은밀한 대화를 나눈대도 이상해 보이지 않고. 살롱 이후 어린애들이 참석하는 것에 느슨해진다 싶어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꽝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열일곱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네.”

“겉모습이라도 성인으로 만들어 주는 마법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냐, 이 정도면.”

작게 욕을 뇌까린 엘리엇이 다시 머리를 쥐어뜯는다. 펜으로 뭔가 끄적였다 지우기를 반복하자 종이가 지저분해졌다.

나는 쟤가 저럴 때마다 가슴이 콕콕 찔렸다. 저렇게까지 공범으로 열심히 해 주는 데 반해, 나는 숨기는 게 많았으니까. 책 속에 들어온 거야 차마 꺼낼 수 없는 주제이니 그렇다 쳐도, 에르켈과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서 시침을 뚝 떼려니 좀.

“룩스틸.”

“뭐?”

생각지 못한 이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펜 뒷부분을 볼에 짓누른 엘리엇이 눈을 가늘게 뜬다.

“룩스틸 말이야. 아직 연락하지?”

“아, 어….”

씨씨와는 아직 주기적으로 편지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엘리엇의 심드렁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보인다.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그놈의 첫사랑 운운이 또 튀어나올 것이다.

“축제에 온대?”

“안 물어봤어.”

사실 물어봤다. 아직 답은 오지 않았다. 사실 살롱 연회 이후로 씨씨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사정이 있겠거니, 하다 이번에 축제를 핑계로 얘기해 봤는데 역시나다. 괜히 부담스럽게 만든 건 아닌지 민망했다.

“설마 로베누스에서 오는데 혼자 오겠어? 보호자와 함께 오겠지. 그 동네에서는 예술이 있는 곳에 룩스틸이 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돌아다닌대.”

“저번에는 레베카 룩스틸 없이 왔던데.”

“만나긴 했구나.”

시발. 떠본 거였다. 느물거리는 얼굴이 얄미워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한다.

“이참에 서쪽에서 제일 인맥이 넓다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면 좋잖아.”

*

“르웰린! 엘리엇!”

오랜만에 보는 에이든은 몰라보게 커졌다. 키가 훌쩍 커 이미 나를 넘어섰고, 엘리엇과 비슷할 정도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간 게. 아카데미 생활이 꽤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괜한 뿌듯함에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혹시 아카데미에서는 검 대신 바위라도 드나? 벌써부터 단단한 몸이 당황스러울 정도다.

“어서 와.”

“오랜, 만이야.”

순박하고 착한 친구는 눈물을 글썽인다. 반갑긴 한데,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나? 차마 훌쩍이며 치대는 걸 거부할 수도 없어서 함께 팔을 벌렸다. 사람이 많은 대로에서 세 명이 끌어안고 있으려니 부끄러웠다.

“루이스랑 에르켈 전하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너라도 보니까 반갑다.”

엘리엇답지 않은 살가운 멘트에 또 감동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에이든 같은 관객만 있다면 강아지가 카메라를 핥는 내용으로 두 시간을 채워도 천만 관객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헬레나는 미뤄 둔 쇼핑부터 하고 온대.”

“이틀째?”

“사흘 정도 더 그럴걸?”

나는 그 열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의외로 엘리엇이 헬레나의 편을 들었다. 다른 도시에서 카탈로그로 사는 것과 직접 고르는 건 다르다고. 자신의 안목을 최대 무기로 여기는 녀석답게 벌써 관념이 뚜렷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에이든과 축제를 위해 꾸며진 수도를 쏘다녔다.

평소였다면 암묵적인 통금 시간이 있었겠지만, 한가한 축에 속하던 아벨마저 불꽃놀이를 위해 차출되자 집이 비었다. 제국의 불꽃놀이는 폭죽 대신 마법사들을 터뜨렸다. 실제로 터뜨렸다는 건 아니지만 그 비유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쥐어짜내 CG가 부럽지 않은 스케일의 불꽃이 황성을 배경으로 터진다고 했다. 듣기로는 수도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고 하는데, 물론 과장이겠지만 그만큼 크고 화려하겠다는 건 알겠다.

지금은 거리를 꾸미고 모든 가게가 호객 행위에 열을 올리지만, 정작 축제 기간에는 문을 닫는 곳이 많다길래 여기도 가 보자, 저기도 구경하자 하다 보니 끝이 없었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기자 엘리엇의 눈 밑이 퀭해졌고, 나도 점점 말을 잃었다. 처음과 같은 생기를 뽐내는 건 짐을 잔뜩 짊어진 에이든뿐이다. 체력은 나나 저 녀석이나 비슷할 테니 그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게 진짜 어린애의 힘인가?

“그럼 르웰린은 엘리엇의 집으로 가는 거야?”

“응.”

집에 사용인들이 있다지만, 케일을 안심시키기는 부족했다.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그에게 사용인은 편의를 위한 도구이지, 나를 맡길 수 있는 보호자가 아니었다.

‘아벨마저 바쁘니 네가 혼자 있잖니.’

당장 저택에는 인기척을 내고 있는 많은 하인과 하녀들이 있다. 케일은 좋은 고용주로, 그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고, 경조사에 도움을 주고, 퇴직이나 이직할 때 소개장을 써 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명백하게 선이 있는 거다. 내가 그의 막냇동생의 몸이 됐으니 망정이지. 평민이었다면 사랑을 받기는커녕 평생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제일 이성적이고 공정한 케일이 그러니 다른 형제들도 다르지 않겠지. 굉장히 새삼스럽게도 나는 제법 충격을 받았다.

뭐… 그렇다고 뼛속까지 제국인인 그에게 민주주의가 어떻고, 천부 인권이 뭐고, 그런 것을 주장할 생각은 없다.

아무튼 케일은 차라리 내가 딜런가에 신세 지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딜런 부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애초에 나와 친하게 지내라고 아들에게 비싼 선물을 들려 보낸 딜런 백작 부인이 그걸 거절할 리 없다. 그녀는 아주 상냥하게 아들의 친구들을 대했다.

루스터가의 타운 하우스와 딜런 저택은 가까웠다. 우리는 엘리엇이 더는 못 걷는다고 선언하고 부른 마차에 냉큼 올라탔다.

엘리엇은 마차에 타자마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잠들었는지 호흡이 고르고 가늘어졌다. 그걸 본 에이든은 꼼지락거리며 짐칸에 싣지 않은 가방을 뒤졌다. 잔뜩 눈치를 보며 엘리엇이 잠든 걸 다시 확인한 에이든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그, 전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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