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17)
  • #34 

    열한 살이 되면서 에르켈과 에이든, 루이스는 아카데미를 선택했다. 에이든은 바짝 긴장한 채였지만 전보다는 의연해 보였다. 검이 제법 적성에 맞는 듯했다.

    에르켈과 에이든은 빠르게 돌아오더라도 루이스는 마법부를 택했으니, 그가 아벨처럼 조기 졸업을 하지 않는 한 못해도 7년, 늦어지면 8년은 보기 힘들 터였다. 미래의 마법학도에게는 아벨에게 추천받은 마법 잉크와 노트 세트를 선물했다. 문장을 쓰면 교정을 해 주는 마법부 학생들의 잇템이라고 했다. 루이스는 감동에 찬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걸 등만 두드려 주었다. 어차피 얘네 세대에서 마법으로 최강 먹는 건 세드릭 클라인이다.

    “나… 잘, 잘 다녀올게.”

    에르켈은 의연한 척하더니, 급기야 떠나는 날 찔찔 짰다. 나 없어도 잘 지내야 해! 편지 꼭 하고! 길게 길게 써서 자주 보내고! 알았지!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마차 안에 들어가서 그를 달래느라 힘들었다.

    원래 황족은 아카데미에 가지 않는다. 에르켈 위의 형제들도 그랬고, 원작의 에르켈도 그랬다.

    가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귀족부터 평민까지 다양하게 섞인 곳에 황족이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그들을 가르쳐야 하는 교수들도 당황스러울 테고, 시설 재정비도 필요했다. 보통 일이 아니니 황후와 황제까지 설득해야 했고, 로웨나를 안심시키느라 진을 뺐다. 편을 들어 준 것은 의외로 황녀였다.

    황족이 몸소 평민들과 함께 교육받는다는 건 매우 상징적인 의미이며, 황자 중 누구도 하지 못한 걸 에르켈이 하겠다고 하면 응원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황제가 납득했다. 황태자는 말리지도, 응원해 주지도 않고 온화하게 웃고만 있더라고 에르켈이 전했다. 그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갈수록 모르겠다.

    “꼭 가야겠어?”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반대를 무릅쓰고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에르켈은 단호했다.

    “꼭 가야 해. 거기서 가져와야 하는 게 있어.”

    “가져올 거라고?”

    “응. 원래는 르웰린이 가져오는 거지만. 거기서 세드릭 클라인을 만날 텐데 너를 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는 자신이 르웰린에게 세드릭 클라인 같은 또라이를 붙인 것에 대단히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촉수만큼은 피하게 해 주겠다고 각오를 불태우기에 고맙다고 했다. 몇 년 내내 아네트의 앞에서 살얼음 위를 걷느니, 아카데미로 피해 있는 게 에르켈의 멘탈을 위한 길일 수도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원작 에르켈이 죽는 열일곱까지는 돌아오는 걸로 합의했다.

    엘리엇과 나는 수도에 남았다.

    나야 애초에 아카데미를 피할 생각이었다만, 별일이 없는 한 엘리엇은 아카데미에 가서 여유롭게 청춘을 보내다 올 계획이었다. 엘리엇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며 운동 시간을 늘렸다. 평소에 이성을 유지하려면 몸이라도 혹사시켜서 화를 풀어야 한다나. 열두 살치고는 지나치게 애늙은이 같은 생각이다. 그가 하는 일에 일일이 놀랐다간 끝이 없으니 그러려니 해야 한다.

    이번에는 그의 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탓도 있다. 결국 오리온 딜런이 앨런 케일러스의 손을 잡고 집을 나간 것이다. 당장 가문에서 이름을 빼 버리겠다는 협박에 ‘그러면 제가 오리온 케일러스가 되겠네요.’ 했다는데. 이쯤 되면 대단하다. 며칠 두문불출하다 나타나 짜증을 내던 엘리엇은 결국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받아들였다. 이미 내 것이 되기로 한 거니까, 형이 제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더라도 돌려줄 생각 따위는 없다고 하는 그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놀랍지 않게도 우리가 수도에 남겠다는 말에 당사자들보다 슬퍼한 건 아벨과 헬레나였다.

    아벨은 아직도 내게 마법을 영업하는 것에 대해 미련을 놓지 못했는지, 입학부터 졸업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필기 노트를 흔들었다. 필체가 다른 걸 봐선 본인이 쓰던 것은 아니고, 어디서 갈취한 것 같은데. 탐나기는 했지만 내게 쓸모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아카데미 내 명소, 팁을 알려 주며 나와 사소한 추억을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헬레나는 거의 숨이 넘어가게 울었다. 이래서 얘한테는 끝까지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에이든 탓에 나와 엘리엇이 아카데미에 가지 않는다는 얘기가 새어 나간 듯했다. 거의 열흘 가까이 떼를 썼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지막 날에는 팅팅 부은 눈으로 고개를 픽 돌렸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뭐든 손에 넣었던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난생처음으로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단단히 토라진 듯했다.

    집에서 형제들과 놀아 주기, 찔끔찔끔 오르는 검 수련치에 매달리며 구르기, 엘리엇과 만나기, 가끔 3황자와 시간 보내기, 틈이 날 때마다 편지 쓰기. 일상은 단조로웠고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체력이 많이 늘었고, 키도 부쩍 컸다. 케일은 요즘 내 옷을 맞추는 데 본격적으로 취미가 생겨 아예 의류 사업에 투자를 할 기세였다. 백작이 한다고 하면 뜯어말리겠지만, 케일이라면 센스가 나쁘지 않으니 괜찮을지도.

    2황자인 테시온이야 얼굴과 혈통이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망나니로 성장하고 있었고. 에르켈이 떠난 사이 엘리엇과 내가 타겟으로 잡은 3황자는 생각보다 공략 난이도가 낮았다. 뭐든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게 명확한 인물이라면 비위 맞추기 편하니까.

    어른스럽게 굴겠다고 정장을 맞춰 입은 3황자와 마주 앉아 달지도 않은 차를 마시는 거야 엘리엇과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어린애들과 어울려 주는 것보다 우아하게 차를 홀짝거리며 의미 모를 어려운 단어들을 읊는 게 훨씬 적성에 맞으니까.

    황태자와 황녀는 너무 어렵고 먼 존재였고, 바로 위로 있는 형제는 개차반 망나니에, 밑으로 남은 동생은 그나마 죽이 맞아 최근 가까워진 에르켈과 아직 엄마 품이 더 좋은 꼬맹이 정도였는데 에르켈이 훌쩍 아카데미로 떠나 버렸으니. 제 놀이 친구들도 대부분 아카데미에 간 덕에 3황자는 황성에 나와 엘리엇이 드나들며 상대가 되어 주는 걸 썩 기꺼워했다.

    상황이 우리를 돕고 있는데 기회를 잡아채지 못한다면 황성에 오기 위해 타는 마차도 아까울 것이다.

    엘리엇과 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그의 호감과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면 됐다. 처음에는 책, 새로 나온 마법 물품 따위를 가져왔지만 제국 모든 귀한 것이 모여드는 곳이 황성이다. 당연히 3황자의 눈에 웬만한 게 찰 리 없었다. 그는 온화하게 웃었지만 우리의 성에 차는 반응은 아니었다.

    특히 딜런가 차기 가주께서는 제법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며 대단한 것을 가져오던 경쟁은 결국 내가 아벨과 케일이 기꺼이 내어준 소장품을 섞어 가져오면서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아벨이 마탑에서 가져온 아티팩트를 보며 신기해하던 3황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엇은 딱 한 달 후 디멘시온이 지키는 북부 산맥 너머 이종족들의 검과 모형을 가져왔다.

    놀라는 3황자를 보며 뿌듯하게 쿠키를 씹는 엘리엇을 보니 조금 기가 질렸다. ‘딜런’이 황자조차 쉽게 볼 수 없는 물건을 가져오는 건 놀랄 일이 아니지만, 고작 열두 살짜리가 제 가문의 재력과 정보력을 쓴다는 건 무서운 일이 아닌가. 새삼 오리온 딜런이 출가한 데에는 자신의 동생 탓도 있지 않나, 하는 타당한 의심이 들었다. 엘리엇은 부정하겠지만 누가 봐도 딜런가의 가주에는 그가 적격이었다.

    요주의 인물인 황태자와 아네트는 의외로 조용했다. 아네트가 간간이 나를 불러 차를 마시기는 했지만 알맹이 없는 겉치레뿐이었고, 황태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은 이 평화가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현실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니, 비약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크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원작’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후회를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본 후 해야 한다. 어차피 황태자가 르웰린에게 반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니, 그가 내게 관심을 꺼 준다면 고마울 일이다.

    08. 태양제

    제국 최고 행사를 앞두고 수도가 시끄러웠다.

    제국은 국교가 없지만, 굳이 따져 본다면 태양신 야캅의 세력이 제일 컸다. 야캅의 최고 사제는 현대의 교황 이상의 의미를 가졌고, 덕분에 종교 최대 행사인 태양절은 언제나 성대했다. 제국의 것과 다른 교단만의 달력을 사용하는 태양절은 4, 5년에 한 번 황제의 탄신연과 맞물린다는 이유로 황실에서도 행사를 지원했는데, 올해가 마침 그 해였다.

    수도 경비 강화를 위해 레오는 아예 기사단 숙소에서 지냈고, 한창 예산 분배 문제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케일도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초췌하게 퇴근해도 새벽같이 일어나 기계 같은 모습으로 출근하는 걸 보면 대단했다. 역시 예비 가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에르켈 전하와 루이스는 일정 때문에 못 오고, 에이든만 온다던데. 루이스가 너한테도 편지 했어? 구구절절 마법부 과제에 대해 떠들어대서 내 귀가 아플 지경이야.”

    “…….”

    엘리엇이 답하지 않고 입술만 살짝 내민다. 뒷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그가 원하는 소식도 전해 주기로 했다.

    “헬레나는 일찍 도착한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엘리엇이 시침을 뚝 뗐다. 헬레나 얘기가 언제 나오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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