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17)

#31

“무슨 얘기 중이야? 응?”

아벨이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기웃거렸지만 나는 엘리엇과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을 뿐이다. 일단 3황자가 에르켈보다 빠르게 입장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입장 순서는 곧 연회의 세력 구도를 나타냈다.

하지만 움직이려면 일단…. 아벨부터 떼어 놔야겠지.

한숨을 쉰 엘리엇이 제 형을 불렀다. 손짓 한 번으로 형을 부르는 엘리엇 딜런이나, 거기에 바로 좋다고 달려오는 오리온 딜런이나. 하여간 저 집 형제도 보통 관계는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끼리 할 얘기가 그렇게 없어?”

“학창 시절 아벨 에드윌과는 사이가 그렇게….”

“아니면 눈치가 없어?”

단호하다 못해 싸늘한 말에 시무룩해진 오리온 딜런이 엘리엇 딜런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끼우웅 거리다 아벨의 옆에 붙었다.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며 붙어 있던 아벨은 체격 차를 이기지 못하고 끌려갔다.

“이거 안 놔, 오리온? 앨런에게 다 이를 줄 알아. 어? 이거 놓으라니까, 개새끼야.”

“응…. 앨런이 엘리엇 말을 잘 들으래.”

“야, 이 시발. 모자란 새끼야. 뇌 용량 잘 채워 두라고 했지. 르웰린!”

우리 애는 내가 옆에 있길 바란다니까? 르웰린! 처절한 외침은 곧 입을 틀어막는 오리온 딜런에 의해 조용해졌다. 몇몇은 시선을 주었지만 곧 흩어졌다.

“형이 굉장히…. 독특, 하시네.”

“너희 형들만 할까 봐. 그리고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하면 당연히 눈치를 봐야지.”

오리온 딜런이 상대를 데려왔다고 해 봤자 며칠 되지 않았을 텐데. 그사이 앨런 케… 뭐더라. 아무튼 형 애인의 신임을 사다니. 역시 수완이 장난 아닌 녀석이었다. 저런 놈이 백수로 인생을 낭비하는 건 제국의 손실이었다. 차라리 그가 딜런가를 물려받는 게 다수를 위해 옳은 일일지도.

*

“좋아. 내용을 말해 봐.”

느슨하게 의자에 기댄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엘리엇 딜런이 턱을 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버지께서는 네가 향후 7년간은 논란의 중심일 거라 판단하고 있어.”

“7년?”

“그래. 네가, 그리고 우리 또래 애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말이야. 어머니는 거기에 3년을 더 얹었고, 나는 거기에 또 3년을 더 얹었지.”

스물셋. 원작이 끝나는 시점이다. 뭘 알고 있지도 않을 텐데 정확한 햇수를 말하는 엘리엇에 소름이 돋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네가 재능이 있든, 없든. 단지 르웰린 에드윌이라는 이름만으로 주목받는 시간이지. 네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 물론 나는 네가 그 이후로도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말한 것보다 6년을 더 얹은 거야.”

“계속해.”

“그러니 아까도 말했듯 내가 네 호감을 사고, 그 옆에 붙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 마침 우리는 매일 만나는 사이잖아?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지. 어머니께서는 임무를 주셨고, 나는 그걸 충실히 수행할 생각이야. 가문의 일원으로 당연한 의무지.”

“너무 솔직한 건 반감을 살 수 있다고 배우지 않았어?”

“물론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자잘하게 쿠키 따위나 바치면서 너에게 친근하게 굴어 봤자 너는 선을 긋고, 그걸 넘어가는 걸 허용하지 않았을 거잖아. 친분이 있지만 함께할 수는 없는 사이에 머물겠지. 가족, 연인, 진정한 친구, 그리고 그 이후에 머무는 3등급 정도나 될까. 나는 고작 거기에 머무를 수 없어. 말했잖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네 가족이 될 수는 없고, 연인이 될 생각도 없으니 진정한 친구 정도는 차지해야겠어. 엘리엇이 테이블 위에 쿠키를 올려놓으며 설명했다. 가운데 있는 초콜릿 쿠키가 너. 그 옆에 생강 쿠키를 하나, 둘, 셋, 네 개째 일렬로 놓은 엘리엇이 네 번째 쿠키를 초콜릿 쿠키 근처로 옮겼다.

“이 브로치를 매고 연회에 참석해서 너와의 친분을 자랑해라?”

“에드윌과 딜런의 친분을 자랑하는 거지.”

“네가 얻는 건?”

“르웰린 에드윌의 절친한 친구로 붙어 있으며 얻는 모든 것.”

“딜런이 얻는 건?”

“제국의 태양이 될 황태자 전하와 고매한 아네트 부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타이밍을 미룰 수 있지.”

그사이 몸값을 불리는 건 내 역할은 아니니까. 엘리엇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는 것이 확실해서 편했다. 딜런, 엘리엇 딜런. 나는 고민했다. 에르켈과 나는 둘 다 성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 봤자 평범한 삶을 살던 인간이었을 뿐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데. 우리는 삐걱거리는 썩은 나무다리를 두드려 볼 여유도 없이 내달리고 있다. 기꺼이 로프를 내려 주겠다는 정성을, 거절해야 할까.

저 머리 잘 굴러가는 놈을 끌어들이면 편하긴 할 것이다. 걸리는 건 그의 진정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아니. 애초에 진정성 따위는 없다. 딜런은 사업가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우리는 협력을 하는 거지 평생 함께할 맹세를 하는 게 아니다.

“좋아.”

“훌륭한 선택이야. 실망시키지 않을게.”

“내 조건은 듣지 않고?”

“웬만한 대가는 준비되어 있거든. 말해 봐.”

쿠키를 씹던 엘리엇이 잠깐, 하고 웃음기를 지웠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에르켈 전하를 황제로 만들고 싶다, 뭐 그런 건 아니지? 전하께서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만 그건 불가능해.”

“그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황태자께서 반드시 황위를 이으시길 바라거든.”

“그래. 황태자께서….”

눈치 빠른 녀석이다. 목이 막힌 엘리엇이 급하게 남은 차를 들이켰다. 그가 상체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네트 부인을… 처리, 치울 생각이야?”

“어차피 때가 되면 그렇게 될 거잖아. 5황자는 어려. 황제께서는 노쇠하시고, 황태자께서는 이미 준비가 됐지. 누가 감히 붉은 금발과 붉은 눈을 두고 논란을 말하겠어.”

이번에는 엘리엇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계산을 했다. 황태자, 아네트, 황태자, 아네트. 어차피 답은 나와 있다. 원작에서도 황태자는 아네트에게 승리한다. 내가 손쓰지 않아도 황태자는 다음 황제가 될 것이다.

“에드윌 백작께서는 아네트 부인과 긴밀한 사이일 텐데.”

“아버지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일을 그르칠 분이 아니야.”

거짓말이다. 백작은 아네트를 저버리지 못하고 가문을 위험에 빠뜨린다. 결국 레오폴드 에드윌이 죽은 것에 백작의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차남을 사랑하고, 백작을 사랑한다. 차남이 죽지 않기를 바라고, 백작이 제 잘못으로 죽은 자식을 붙잡고 울지 않기를 바란다.

“에르켈 전하도 함께야.”

“…로웨나 부인은, 아니, 됐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엘리엇이 결심을 내렸다. 원작에서도 딜런은 황태자와 아네트 사이에서 재다가 황태자를 지원하지 않았을까. 에르켈이 원작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니 그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은 없었지만, 엘리엇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 같다.

“네 형제들도 같은 생각이야?”

“내가 형들 앞에서 귀여운 척하는 거 못 봤어?”

“그러게. 엄청 가증스럽더라.”

“그냥 편하게 생각해. 네 가문을 끌어들이라는 말이 아니야. 누가 어린애들 행동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겠어?”

엘리엇의 말을 돌려주자 그가 못 이기겠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07. 버릴 것, 가져갈 것

접근은 느긋하게. 불필요한 시선은 주지 않고.

그동안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3황자는 에르켈이 자리를 잡은 게 못내 불안한지 주요 인물들을 놓치지 않았다. 제 형제들보다 빨리 입장한 것을 오히려 이용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설프게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아직 어린 또래들은 물론이고, 나이 많은 보호자들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3황자를 보며 엘리엇이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2황자의 패악질을 직접 확인했던 나와, 그를 본 적 있는 엘리엇은 그를 버리고 갈 것을 단번에 합의했다.

‘2황자에 대한 기대는 버려. 솔직하게 말해서 황태자 전하와 절반이나마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게 믿기지 않던데.’

기대가 없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말할 용기는 없었다. 가만히 보면 협상 이후 나날이 막 나가는 녀석이었다. 황족에 대한 불경죄로 잡혀 갈 거라고 하니까 할 테면 해 보라고 하는데, 이걸 뭐 진짜 어디 찌를 수도 없고. 어차피 본격적으로 아네트와 척지게 되면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건 마찬가지라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어차피 미래를 이끌 얼굴들을 만나고 다닐 심산이라면 에드윌과 딜런을 빼놓을 수는 없다. 두 가문은 오랜 세월 영광을 누려 온 가문이다. 제국의 명가로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발 빠르게 처신하며 승리의 편에 섰다는 뜻이고, 승리자는 패배자를 갈취하며 몸을 불린다. 은퇴했다고 해도 여전히 자문 위원회의 일원인 백작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정계에 없고, 수도에 딜런을 통하지 않은 돈은 없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에르켈의 놀이 친구이니, 3황자가 우리를 찾아올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을 꽤 끄는데.”

“걱정 마. 몸이 달아오른 건 우리뿐 아닐 테니까.”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과 잡담을 나누었지만 온 신경이 3황자에게 쏠려 있었다. 사실 지금 내 입이 어떤 얘기를 내뱉는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지면 함께 웃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최적기는 2황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얼간이 2황자가 이쪽에 먼저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굳이 신경쓸 필요 없으니, 못해도 황녀의 입장 전까지.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르웰린 에드윌이 생각보다 더 주목을 받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