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17)
  • #26

    “그러게 제가 슬슬 은퇴하라고 했잖아요. 마탑에 아카데미에. 다 붙잡고 있으니 프레이만 죽어나가죠. 팀을 만들어 줘도 모자랄 판에.”

    할 말이 없는 아카데미 교장 겸 마탑주가 헛기침만 했다. 실제로 피사 테콘이 세드릭 클라인에게 마탑주 자리를 넘겨주기 전까지 겸직을 계속한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프레이가 더 안쓰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사람을 충원해 줄 거였으면, 이미 여럿을 쓰고 있었겠지. 결국 한참 스승에게 잔소리를 퍼부은 아벨이 내 손을 잡고 방을 나왔다.

    “불쌍한 녀석 하나 구제해 주고 연구실로 가자. 아니면 먼저 가서 구경하고 있을래? 네가 좋아할 만한 걸 기껏 준비해 뒀더니….”

    툴툴거리는 아벨에게 지금도 재미있다고 답하자 얼굴이 활짝 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탑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울 장소였다.

    아벨은 고민의 여지도 없다는 듯 층을 내려갔다. 벽으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문은 숯처럼 까만 나무였는데, 손잡이 부분을 용이 휘감고 있는 장식이 있었다. 얼핏 봐도 굉장히 섬세한 조각이라 금방 움직일 것처럼 보였다.

    “프레이, 들어간다.”

    “자아암, 깐요!”

    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벨은 듣지 못한 척 문을 열었다. 유리창 없이 뚫려 바람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창틀에 앉아 있던 프레이가 딸꾹질을 하며 울었다. 이미 눈물과 콧물을 닦았는지 푸석하고 하얀 얼굴에 눈과 코만 빨갛게 부어 있었다. 헐거운 다리 덕에 안경이 콧대를 타고 한쪽으로 기울어 내려왔다.

    “흐으엉, 아, 진짜 서운해요. 교수님이 어떻게 저한테, 어떻게 그래요.”

    “보충해 준다잖아.”

    “저번에도 그 얘기 하셨어요! 작년에도 하고, 재작년에도 하고, 또 그 전해에도!”

    들어오지 말라더니. 프레이는 아벨을 보자마자 품에 안겨들어 설움을 토해냈다. 아벨은 옷에 콧물과 눈물이 묻는 걸 찝찝하게 바라보았지만 프레이를 떼어내지는 않았다. 손은 당장에라도 말총 같은 머리를 잡아당기고 싶어 근질거리는 티를 냈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랬다. 오히려 이런 일이 잦은지 익숙하게 달래고 있었다.

    “그러게 왜 아직도 마탑에 붙어 있어? 언제까지 영감탱이 비위만 맞출래? 황실 마법부 파견 지원이라도 하라니까 말을 안 들어.”

    “저, 저는 사람 많은 건 별로 안 좋아해서요. 지금은 교수님 한 분 비위만 맞추면 되는데 황성 가면 위로 다 상관이잖아요.”

    “네 연차가 몇 년인데. 밑으로 후배가 수두룩하지! 코부터 풀어.”

    프레이는 아벨이 시키는 대로 코를 킁 풀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눈물도 소매로 닦아낸 프레이가 “생각해 볼게요….” 하고 답했다.

    에이잉, 쯧. 피사 테콘처럼 혀를 찬 아벨이 내 옆에 와서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쓰다듬어 주며 ‘잘했어요, 잘했어.’ 타임을 가졌다.

    내게 살갑게 구는 아벨을 본 프레이의 얼굴이 귀신을 본 것처럼 변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꽉 쥔 아벨의 주먹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아벨이 또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협박하는 중인 것 같았다. 자세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동생분이 좋아할 만한 걸 가져올게요!’ 하는 걸 보니 적어도 아까 본 초록 머리보다는 눈치가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죠. 저는 프레이 레이너라고 합니다. 동생분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저를요?”

    프레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이 탑에서 입을 열면 절반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덕분에 탑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사족도 덧붙었다.

    핏줄이 어디 가지 않는다고, 나를 천사라고 부르고 다니는 레오에 이어 요정이라고 부르고 다니는 아벨이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하하.”

    “저 같아도 르웰린 같은 동생이 있으면 자랑하고 다녔을 거예요.”

    “그렇지?”

    “초상화를 문 앞에 크게 달아 놨을지도 몰라요.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볼 수 있게.”

    그 말에 나는 프레이를 불쌍하게 여기던 것도 잊고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아벨이 “그러면 온갖 놈들이 다 르웰린 얼굴에 손을 대게 되는데, 그건 싫어.” 하지 않았다면 실행했겠지. 하마터면 주접 스케일을 한참 키울 뻔했다.

    “아! 잠시만요.”

    프레이는 마침 내 나이에 맞는 장난감이 있다고 일어섰다. 피사 테콘의 방에 있어야 할 짐까지 모두 프레이의 연구실에 담아 뒀다고 해도 믿을 만큼 엉망이었지만, 연구실 주인은 어렵지 않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자 더미에서 찾아냈다.

    나는 프레이가 자랑스럽게 건넨 장난감을 받았다. 성인 주먹 크기의 투명한 구체는 겉보기에 유리처럼 매끈한 광택을 냈는데, 정작 손에 닿는 감각은 부들부들하고 말랑했다.

    “주무르거나 흔들어 보세요.”

    꼬집듯 잡자 힘을 준 부위 주변이 분홍색으로 변하면서 스프링클처럼 생긴 알갱이가 생겼다. 시키는 대로 흔들어보자 색들이 몽글거리다 터지며 구체 안에 연기가 생겼다. 잠시 기다리자 어둡게 변한 구체 사이로 별이 나타났다. 밤하늘이다.

    “원격 천체 관측 기구예요. 원하는 곳의 하늘 상태를 볼 수 있죠! 점성술 관련 논문을 준비하면서 만들어봤어요.”

    나는 손안의 구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어린애들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프레이는 내가 관심을 나타내자 “벽면에 쏘아 볼 수도 있어요!” 하며 작동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랫부분을 지그시 누르자 구체에서 빛이 쏘아지며 방 안을 별이 뜬 밤하늘로 메웠다.

    내가 연신 탄성을 내뱉자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던 아벨이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 나도 준비한 게 있어. 르웰린, 잠깐만 놀고 있어. 금방 엄청 멋진 걸 보여 줄게!”

    아벨이 나가자 프레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람들과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더니, 낯선 사람과 있는 상황이 불편한 모양이다. 무릎을 모은 채 안절부절못하던 프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왔는데 마실 것도 안 내오고 있었네요. 좋아하는 게 있으세요?”

    “그냥 물이면 돼요.”

    “그랬다간 아벨이 저를 물에 담가 버릴 거예요. 교수님한테 선물 들어온 것 중 대부분은 저도 가지고 있거든요. 말만 하세요!”

    프레이는 자랑스럽게 방 한쪽을 가리켰다. 색색의 상자가 쌓여 있는 곳이었다. 자세히 보니 선물용으로 쓰이는 고급 차였다. 어린애 입맛에 맞는 종류는 아니었다.

    내가 고민하자 프레이가 손뼉을 쳤다. 자신이 중요한 걸 놓쳤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단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저녁 식사 후에는 우유를 넣은 진한 코코아 한 잔을 꼭 마신다면서요.”

    그런 얘기까지 하고 다니는 형제 덕에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이긴 했지만 그걸 형의 직장 동료까지 알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프레이는 벽장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어 내가 민망해하는 걸 보지 못했다.

    “저도 연구실에 오래 앉아 있으면 자꾸 입에 단 걸 물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살이 쪄서 그만뒀지만…. 그때 가져다 둔 초콜릿이 남았을 거예요.”

    살이 좀 쪄야 할 것 같은데. 프레이는 전형적인 마법사의 외형으로, 넓고 긴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드러난 손목과 뺨만으로도 그가 많이 마른 체형인 걸 알 수 있었다.

    프레이가 조그만 화로로 초콜릿을 녹여 만든 우유를 홀짝였다. 끔찍할 정도로 달았다.

    “프레이는 탑에 오래 있었나 봐요.”

    “오래까지는 아니고, 이제 5년 차죠.”

    영감, 아니 마탑주가 5년이나 그를 부려먹었다는 이야기다.

    “5년이면 프레이가 아벨보다 훨씬 선배인 거 아니에요?”

    “어, 엄청은 아니고. 졸업 연도는 별로 차이 나지 않으니까요. 입학은 조금 차이 나지만.”

    아벨의 이야기를 하자 프레이가 멍청하게 웃었다. 그 순박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따라 웃어 주었다.

    방 안에 펼쳐진 하늘을 접고도 손에 감기는 느낌이 좋아 조물거리고 있자 프레이가 손뼉을 짝 쳤다. 안경알 너머 보이는 눈매가 제법 날카로운 것 하며, 살 내린 뺨이나 마른 몸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하는 짓은 굉장히 어린애 같았다. 아직 어린 아벨의 품에 안겨 울질 않나,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면 가져가실래요?”

    “논문 때문에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집필이 거의 끝난 데다, 실험용으로 여러 개 만들었거든요. 크기나 색이 다른 버전으로 몇 개 더 있어요.”

    그렇다면야. 나는 고마워하며 챙겼다. 루이스에게 보여 주면 눈을 반짝이며 좋아할 것이다. 프레이는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물건을 몇 개 더 꺼내 왔다.

    “이 사탕은 빨면 맛이 계속 변하는 건데….”

    피사 테콘이 꺼내 준 그 사탕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마탑주 때문에 울어댄 프레이 앞에서 그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까 먹어 봤어요.”

    “그래요?”

    다행히 프레이는 자신이 만든 사탕을 내가 맛있게 먹었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는 아예 상자 하나를 소파 옆으로 끌고 왔다. 바닥에 깔려 있던 러그가 무거운 상자 때문에 밀려 일어났다.

    “이 목걸이를 착용하면 피부가 푸른색으로 변해요.”

    “오….”

    쨘! 효과음을 입으로 낸 프레이가 목걸이 줄을 손목에 감았다. 푸르스름한 색이 번지며 금세 얼굴까지 파랗게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혈색 없는 피부가 한층 더 질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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