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17)

#24

살살 위로하는 목소리만 들으면 그가 정말 내 안색을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착각하기에 붉은 눈은 싸늘했고, 그걸 숨길 생각도 없었다. 내가 그의 상냥함을 믿길 바랐다면 그는 더 확실하게 연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는 내가 그를 편하게 여기기보다 불편하고, 어렵게 생각하기를 원했다. 고약한 성질머리 같으니라고.

“그대가 거절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지. 이렇게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에드윌 경이 알면 또 심통을 내겠군.”

황태자도 황태자지만, 차남도 참… 차남이다. 농담이라도 편한 상대는 아닌 황태자에게서 심통이라는 귀여운 단어를 끌어내다니. 내가 에드워드 스펠먼에게 검을 배우게 된 것도, 사과라는 단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궁시렁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설마 황태자에게 가서도 그랬을 줄은 몰랐다. 레오폴드 에드윌은 내 앞에서나 멍청하게 굴지, 실제로 그런 사람은 아니다.

훈련이 끝난 후 지친 채 집에 돌아가면 버려진 개처럼 슬픈 눈으로 나를 보던 차남이 떠올랐다. 일하는 동안에도 그 모양이었으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을 만하다.

“부담스러운가?”

“…….”

“솔직하게 대답해도 좋아.”

그러다 진짜 솔직하게 답하면 어쩌려고. 댁이 존나 부담스럽고, 앞으로도 쭉 만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황태자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음. 역시 그만두는 게 낫겠다.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고….”

“아니고?”

“그… 당황스럽고, 또 너무 갑자기… 네. 갑작스러워서.”

“아.”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운 사람이었어, 내가.”

“아뇨,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말을 왜 그렇게 해.

당황해서 손만 젓다가 픽 새어 나온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이 새끼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 혹시 놀려 먹기 쉬운 이미지였나? 아닌 것 같은데. 르웰린 에드윌이 순하게 생긴 편은 아니었다. 김민지의 취향이 고양이상 미인이라고 했기 때문인지, 오히려 눈꼬리는 제법 날카로운 편에 속했다. 화사한 금발 탓인지 매서운 인상을 주지는 못했지만.

“삐졌나?”

“아닙니다.”

“이런. 삐졌느냐 묻는 건 되려 화를 돋운다고 했는데, 실수했어. 그러면 화가 났나?”

“아닙니다. 제가 어찌….”

직위도 없는 일개 백작가 아들이 어떻게 감히 황태자에게. 심호흡을 하며 짜증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거칠어진 숨도 다듬고, 튀어나온 입술도 집어넣고.

내 표정 관리를 모른 척 기다려 준 황태자가 연습이 남았느냐 물었다.

“잠시 휴식 중이었습니다.”

이미 잠시는 한참 지났지만. 그러고 보면 스펠먼은 어딜 갔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아마… 저거 때문이겠지만. 스펠먼의 긴 부재의 원인일 황태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침을 뚝 뗐다.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하지. 그때는 시간을 내 주었으면 해.”

멀지 않은 곳에 서있던 시종이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오늘의 만남은 아네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어떻게 각색될지는 모르겠다. 황태자가 직접 나타나서 꽤 오래 대화를 나누더라, 정도로만 끝나도 다행인데 내용까지 들어가면 그녀의 순한 눈이 황태자 못지않게 서늘해질 것 같다.

“다음에 보는 건 연회가 되겠군. 기대하지.”

하지 마. 기대 같은 거 하지 마, 시바.

*

“르웰린. 무슨 일 있니?”

장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의 자유 시간인 데다, 수도 구경을 하는 것도 제법 오랜만이라 들떠 있던 막내가 축 처져 있으니 걱정이 될 만했다. 그가 신경 쓸 게 뻔해 아닌 척하려고 노력했지만 부족했나 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고개를 젓는 것뿐이었다. 그의 걱정을 상쇄시키려 회심의 미소도 더했다. 내 미소를 마주친 장남이 마주 웃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매달려서 황태자가 나타나서 괴롭혔다고 한탄하고 싶었다. 징징거리며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당황스러웠는지 토로하고 싶었다. 장남이라면 내 말을 경청하고, 열심히 달래 줄 것이다. 나이보다 침착한 그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맞춰 주면 그 앞에서 얼마든지 애처럼 굴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나는 불만을 늘어놓는 대신 어리광을 피웠다.

황태자가 나타나서 나를 괴롭혔는데, 그래서 뭐.

장남이 즉각 조치를 취해 줄 수 있었다면 진작 그랬겠지. 애초에 아네트의 부름에 나를 궁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황태자가 에드워드 스펠먼을 선생으로 붙였을 때도 거절해 주었을 것이다. 평생 정쟁 따위와 거리가 멀던 나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는데, 노련한 정치가인 백작과 장남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르웰린 에드윌을 사랑하는 건 진심이니까. 황성에서 일하는 그가 매일 내 얼굴을 보겠다고 영지로 퇴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시가 되면 바로바로 퇴근하는 차남과 달리 장남은 어깨에 얹힌 것이 많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다른 디저트는 밥 대신에 먹어도 괜찮던데. 여덟 살 르웰린 에드윌의 위는 어떻게 돼먹은 건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꼭 탈이 나곤 했다. 덕분에 한동안 집에서 아이스크림부터 셔벗까지, 차가운 것은 모조리 금지였다. 내가 먹지 못하는 것을 나보다 형제들이 더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튼튼해졌으니 괜찮다. 사실 에르켈의 궁에서 이미 여러 번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장남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사랑스러운 막내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내 볼을 살짝 잡았다 놓으며 3단으로 사 주겠다고 약속했다. 베리와 시럽도 얹어서. 그 외 토핑도 잔뜩 얹어서!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이것저것 추가하자 혀만 대도 아릴 만큼 달고 위험한 비주얼이 됐다.

달고 찬 것을 입에 넣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전에는 단 걸 그렇게 즐기지 않았던 것 같은데, 르웰린이 된 후에는 군것질을 거른 적이 없다. 몸이 달라지며 입맛까지 달라진 건지, 어린애가 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골라 둔 게 있니?”

“으음…. 선물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반쯤은 진심이었다. 열 살짜리 여자애가 좋아할 법한 게 뭐가 있지? 유치한 캐릭터 상품들이 스쳤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런 물건들이 제국에 있을지도 모르겠고, 편지의 내용으로 봐서 씨씨가 그런 것을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가게를 하나하나 둘러보는데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책을 좋아할 것 같아 책을 선물하자니 이미 읽었을 것 같고. 그렇다고 아직 읽지 않은 게 뭐냐고 질문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너무 선물을 고르는 티가 날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헬레나와 루이스를 따라 돌아다닐 때 나도 신경 써서 선물을 봐 둘 걸 그랬다.

결국 씨씨에게 선물할 것을 찾는다며 들어간 서점에서는 내가 읽을 책만 잔뜩 샀다. 성에도 책이 많기는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은 부족했다. 정치, 행정, 역사, 마법 따위는 수업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 좀 더 크면 읽어야겠지만 굳이 열 살부터 그런 것에 손대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 괜히 주접 떠는 형제들 때문에 ‘우리 애 천재인가 봐!’ 소리라도 들으면 어떡해.

“여자애라면 액세서리는 어떠니?”

“액세서리요?”

“머리핀 같은 거라면 부담스럽지 않겠지.”

확실히. 헬레나의 시선을 앗아간 것도 반짝거리는 머리핀이었다. 역시 장남이다. 오늘 일정에 함께할 사람으로 그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안목이었다. 차남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파토 났을 것이다. 연애라니, 아직은 너무 일러. 조금만 더 옆에 남아 줘. 뻔한 레퍼토리를 쏟아내며 길거리에서 훌쩍거리는 걸 달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겠지.

케일의 손을 잡고 일전에 갔던 가게로 들어갔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눈치 빠른 점원은 그때 내가 선택한 주스를 준비했다. 단것을 먹어 얼얼하던 입 안에 상큼한 것이 들어오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선물을 할 건데. 열 살쯤 되는 여자애에게 어울릴 것으로.”

점원은 한쪽으로 케일을 안내했다. 간간이 내 얘기도 나오는 걸 보면 나에게 어울릴 만한 제품도 소개하는 모양이다. 단번에 손님의 니즈를 파악하다니. 그때도 느꼈지만, 장사 좀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들을 두고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던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목걸이였다. 꼭 씨씨의 머리카락을 닮은 보라색 보석이 박힌 것은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아 어린애 목에도 썩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꺼내서 보여 드릴까요?”

상냥한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에서 본 목걸이는 조명을 받아 움직일 때마다 묘하게 빛났다.

“눈 색을 닮은 보석을 선물하다니, 로맨틱하시네요.”

어린애한테 로맨틱이라니. 멍하게 목걸이를 보다 부끄러워졌다. 씨씨의 머리카락 색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르웰린의 눈도 보라색이었다.

#25

“르웰린, 진주로 장식한 게 어떨까 해서…. 이런.”

그동안 쓸 일이 없어 모아만 두던 용돈을 털고 있던 중에 장남에게 딱 걸렸다. 아네트가 인정한 심미안으로 열심히 선물을 골랐을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확실히 장남이 고른 머리핀도 예뻤다. 헬레나나 루시아가 보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목걸이가…. 하지만 저 핀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제 가물거리기 시작한 씨씨의 얼굴을 떠올리며 목걸이와 핀 중에 고민했다. 저번에는 머리 장식이 없이 풀고 있어서 평소에 어떤 식으로 장식하는지 모르겠다. 묶은 머리보다는 푼 머리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지만 내 고민은 짧았다. 금화를 하나하나 세면서 가격을 비교하고 있던 나보다 금패를 꺼내든 장남의 계산이 빨랐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노래를 부르던 그 금패다.

물론 에드윌이 저걸 발급받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장남과 차남은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성인이 아닌 나와 셋째는 간편한 결제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나마 내 동지였던 아벨도 곧 생일을 지나면 패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나에게만 먼 이야기였다.

“제 용돈으로 살 수 있었는데.”

“이건 내가 사게 해 주렴.”

우리 막내의 용돈으로 산 첫 선물을 받는 영광을 양보할 수는 없지. 장난스럽게 말한 그가 포장된 선물을 내게 건넸다. 혹시 구겨질까 조심스럽게 받아 든 나는 다음에 꼭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케일의 손을 잡고 가게를 빠져나오는 등 뒤로 진심이 담긴 인사가 들렸다.

장남에게만 선물하면 나머지가 삐질 게 분명하니까 전부 사야 할 텐데. 품목은 좀 생각을 해 봐야겠다. 내가 지나가다 들꽃을 꺾어다 줘도 호들갑 떨며 영구 보존 마법을 걸어야 한다고 할 사람들이었지만, 역시 제대로 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차남과 돌아본 루트도 나쁘지 않았지만, 장남의 센스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동네 맛집을 찾으려면 공무원들이 자주 가는 곳을 선택하면 된다더니. 황성 짬밥이 더 긴 덕인지 케일은 식당 외에도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내내 안아 들고 다니려고 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갈 때는 안아 줬다가, 걸을 만한 곳이 나오면 내가 다리를 흔들기 전에 알아서 내려 준 덕에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장남도 흥이 났는지 평소라면 사 주지 않았을 길거리 음식까지 손에 쥐여 주었다. 황성이 지척인 곳에서 그렇게 질 나쁜 것을 팔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톡톡 쏘는 맛이 신기해 입에 털어 넣은 사탕은 불량식품처럼 색소를 남겼다. 케일이 뒤늦게 내 혀가 초록색, 파란색으로 물든 것을 발견했다.

“이런 걸 팔다니….”

얼굴을 굳히던 케일은 “원래대로 돌아오겠죠?” 하고 묻는 내 말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잠들기 전에는 색이 빠질 것 같으니 걱정 말라는 그와 킥킥거렸다. 내 앞에서 주접을 떨어서 그렇지, 평소 진중한 이미지였던 케일이 꼭 그 나잇대 청년처럼 구는 게 생소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언젠가 그가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조카에게도 내가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한참 신나게 돌아다닌 후에야 게이트로 향하는 마차를 탔다. 오전에 한참 몸을 쓰고, 오후에도 많이 걸었더니 눈꺼풀이 금방 감길 듯 무거웠다. 여기서 잠들어도 일어나면 내 방 침대일 테니 괜찮지 않을까. 막지 못한 하품이 튀어나왔다.

케일은 기꺼이 자신의 허벅지를 내줬다.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르웰린.”

“네….”

이미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장남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용차 못지않은 승차감을 자랑하는 마차는 잘 포장된 도로를 매끄럽게 달렸다.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

06. 마탑

달리는 마차 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수도 루베테의 도로는 넓고 바닥이 매끈하게 다듬어져 걸리는 부분 없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마차가 달리는 길을 따로 구분해 둔 것은 황성 근처 대로뿐이라 그 외의 길을 달리려면 인파 사이를 비집고 나가야겠지만, 다행히 마탑석이 있는 게이트 근처는 모두 마차 전용 도로였다.

마차를 탈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마법석을 이용할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르웰린.”

잔뜩 들뜬 아벨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는 반짝거리는 얼굴을 보며 마주 웃었다.

우리는 황성 서쪽에 위치한 마법석 게이트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도착지는 마탑이다.

장남이나 차남은 황성에서 일하니 내가 가끔 일하는 곳으로 찾아갈 수 있었지만, 아벨은 마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장남과 몇 번인가 수도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벨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후로 저녁마다 창문을 열고 사색에 잠긴 척, 다 들리도록 ‘나도 르웰린에게 일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벨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날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아벨이 은근슬쩍 밀어넣는 기초 마법서와 환상 마법이 걸린 책들을 모른 척 넘겼다. 설마 아직도 내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마탑이 위치한 라히드는 물리적으로 수도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졌지만, 마법사들의 도시라는 별칭에 걸맞게 직통으로 이어진 마법석이 많았다. 처음 마차로 마법석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라히드에서는 다양한 이동 수단이 많다고 들었다.

그 말에 과장은 있어도 거짓은 없었는지, 라히드 게이트는 대단히 컸다. 높은 천정의 건물은 곳곳에서 라히드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보통 게이트가 마법석과 이동 마법 사용을 위한 마법사 두어 명이 배치된 간단한 구조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안녕하세요. 라히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니폼으로 보이는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손바닥 크기의 판을 내밀었다. 아벨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손목을 댔다.

“아벨 에드윌 님, 확인됐습니다. 일행분은 수속 절차를 밟으셨나요?”

“지금 받으러 가야 해요.”

“그러시군요. 수속 데스크는 왼쪽으로 크게 돌아간 후 나오는 방에 있습니다. 자세한 위치는 팜플랫 뒤쪽에 있는 지도를 참고하시고, 임시 인장 등급에 대한 내용은 3p부터 7p까지 자세히 나와 있으니 확인해 주세요.”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마탑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었다. 아카데미 설립 전까지 수많은 마법사를 배출하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업적을 쌓아 가는 마법사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라히드의 보안이 수도보다 까다로운 것도 놀랍지 않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거나, 마탑 소속 상급 마법사에게 제자로 인정받은 정식 마법사는 모두 마탑에서 인장을 받는데, 그게 있어야 자유롭게 라히드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아직 인장을 받지 못한 학생, 수습, 외부인은 게이트 근처에서 소속을 밟아야 했다. 그마저도 마법사 신분이 확인된 보호자가 일정 거리 이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제한이 있고.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인기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원래 남들과 차별화되는 걸 좋아하니까.

데스크에 있던 남자가 습관적인 서비스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초록색 머리의 마법사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는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과 달리 머리는 부스스하게 뻗쳤다.

“어어.”

아벨의 얼굴을 본 초록 머리의 눈이 커진다.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 덕에 차분해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는데 표정까지 저렇게 짓자 정말 괴짜처럼 보였다.

“와! 아벨, 오랜만이에요!”

“별로. 오랜만은 아닌 것 같은데.”

“에이, 19일 5시간 27분 만인데 이 정도면 오랜만이죠!”

음. 생긴 것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마법사들 중 상대적으로 괜찮은 거지, 객관적으로 좋다고 할 수 없는 성격의 아벨이 귀찮은 티를 팍팍 냈다.

“일하는 중이면 일부터 해.”

“아, 그렇죠! 그래도 테콘 경께서 알면 반가워하실 거예요. 한동안 집안에 일이 있다고 얼굴도 안 보고 돌아가셨다면서요. 덕분에 꼬장을 부리시던데. 오죽하면 프레이가 점심시간마다 연락해서 은퇴 계획을… 헉, 아니. 이건 잊어 주세요.”

말이 많은데 빠르기까지 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남자가 하는 말의 절반은 놓칠 정도였다. 멋있고 쿨하고 자기 일에 열심이며 전문적인 형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라히드까지 온 아벨이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일하라고, 한스. 일.”

“어휴, 알겠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쪽 서류부터 작성해 주세요. 아무튼 알겠죠? 아벨, 프레이 일은 비밀이에요.”

“그 녀석이 은퇴를 하든 자퇴를 하든 상관없다고.”

아벨이 손가락을 한스를 가리키고, 이어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더 했다간 네 입을 막아 버릴 거라는 제스처를 알아들었는지 한스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름, 나이, 거주 지역, 직업, 보호자 따위의 신상을 묻는 서류를 정성껏 작성해서 내밀자 도장을 찍어 주던 한스가 놀란 얼굴로 나와 아벨을 번갈아 보았다. 뭐라고 내뱉으려 했지만 아벨이 온화하게 웃자 엄지와 검지를 맞대 O 모양을 만들며 어색하게 웃는다.

이름을 확인한 후에야 우리가 형제라는 걸 이름을 알아챈 모양이다. 머리색이 달라서 그렇지 아벨과 많이 닮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류 확인을 마친 한스가 내 손등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잉크가 기름처럼 질척거리고 미끈했는데, 도장을 떼자 빠르게 승화해 싸한 감각만 남겼다. 인장은 마탑을 필두로 한 마법사 협회 인장이 연하게 남아 각도에 따라 반짝거렸다. 아벨은 옆에서 색이 짙고 인장이 화려할수록 상급 마법사라고 알려 주었다.

수속 데스크를 나설 때가 돼서야 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히드에서 즐거운 여행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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