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17)
  • #21

    “왜? 스왈튼이면 좋은 짝이지. 헬레나도 지금이야 어리다지만 금방 클 거고.”

    “상대가 누구든 후작의 눈에 차지는 않을걸. 그 영감님은 내가 가문의 재산 절반을 가져간대도 파렴치한 취급 할 거야. 그곳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느니 신관이 되는 게 낫겠어.”

    진심이 뚝뚝 떨어지는 말에 웃음이 절로 터졌다. 헬레나의 연심이 몇 년 뒤까지 이어져 약혼 얘기라도 나온다면 정말 다 버리고 신에게 모든 걸 바치겠다고 떠날 기세였다. 엘리엇 딜런과 신관이라니. 두 단어를 나란히 놓는 것만으로 기가 찰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백작께서 그걸 두고 보시겠어?”

    “우리 집은 방임주의라 괜찮아. 내가 남자랑 결혼한다고 해도 놀라는 게 아니라 지참금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실걸.”

    “역시 그 정도로 담대해야 사업도 하나 봐.”

    “배울 점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해.”

    딜런의 말에 대꾸해 주며 방 안을 살폈다. 오늘은 꽤 많은 애들이 오는 날이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보라색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목걸이를 주고 떠난 씨씨는 꼭 유리 구두를 남기고 떠난 신데렐라처럼 이후로 찾아볼 수 없었다. 꼬박꼬박 모임에 참석해 둘러보고, 슬쩍 여자애들 무리에 물어보기도 했다. 그중 제일 친구가 많은 루시아조차 고개만 갸웃했다. 애가 워낙 어리숙하고 맹해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주변만 떠돌다 조용히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고민하다 전에 만났던 나무도 찾아갔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래서 편지를 한다고 한 건가. 꼭 다시 봐야겠다 싶은 건 아니었지만, 괜히 서운하긴 했다. 궁에서 다시 볼 수 있다고 할 걸 그랬나.

    “오늘도 그 애를 찾는 거야?”

    “뭐?”

    “놀라는 거 보니까 진짜인 모양인데. 헬레나가 와서 알려 주던데. 네가 찾고 있는 여자애가 있다고.”

    엘리엇이 히죽거렸다.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다. 이러다 조만간 내가 진짜 씨씨에게 반해서 졸졸 따라다니고 찾아다닌다는 소문이라도 돌겠다. 씨씨가 남자애면 존나 큰일이고, 여자애여도 큰일이다. 집안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상대를 찾을 거고, 궁에서도 나를 보는 눈이 많은데.

    루시아, 젠장. 내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말이 없고, 얼굴이 예쁘고, 머리는 보라색이라고?”

    “너 뭐 어디에 감시 카메…, 아니, 눈이라도 달아 뒀냐.”

    시침을 떼려는 시도는 막혔다. 자세한 서술에 골이 아팠다. 이러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첫사랑 스토리가 날조될 것 같다. 같은 게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다.

    “아니야. 네가 뭘 생각하든 그거 아니라고.”

    “그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네가 여자애를 좋아한다니 신기하긴 한데. 사실 나는 네가 에르켈 전하와 찐한 관계로 발전하는 줄 알았어.”

    “뭔, 헛소리야. 엘리엇…. 너 아까 먹은 쿠키에 이상한 약 들어가 있던 거 아니야?”

    목소리를 낮췄다. 시바, 아니, 아, 물론 남들이 보기에 나와 에르켈이 유독 붙어 다니긴 하겠지만. 그걸 우정이라고 생각해야지 찐한 뭐? 저게 지금 열한 살이 할 말이야? 아무튼 요즘 애들은 까져가지고. 누가 들으면 불경죄로 잡혀갈 말을 막 꺼내고 있었다.

    당황해서, 아니 황당해서 말이 두서없이 튀어나갔다.

    “아…. 이거 혹시 그거야? 진짜 사랑을 감추기 위해 지어낸 소문? 미안하다. 모른 척해 줬어야 하는데. 못 들었다고 쳐. 나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할게.”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한 걸 깨닫고서야 얘가 지금 날 놀리려고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다.

    ‘두고 봐.’는 아직 안 끝났던 모양이다. 뒤끝 장난 아닌 놈. 앞으로 엘리엇에 한해서는 책잡힐 일이 없게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내 앞으로 편지가 도착한 것은 연회 열흘 전, 처음 만난 날로부터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안녕, 르웰린.]

    문장 하나를 내뱉는 것도 어색해하던 씨씨는 의외로 글을 잘 썼다. 글씨체도 어린애처럼 동글동글하거나 어설프지 않았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대신 글을 자주 쓰는 게 아닐까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애는. 나비 나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는 활기찬 애들 사이에 섞이는 것보다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차분한 모습이 어울렸다. 첫 만남이 나무에서 떨어진 씨씨와 마주친 것인데도 그랬다.

    [네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어. 편지를 쓰는 데 오래 걸려서 미안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말했지만 무슨 사정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 부분에서 본인도 고민했는지 잉크가 좀 번져 있었다.

    무시할까.

    정성을 들인 편지 세 장을 다 읽은 감상이었다. 이건. 시발.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다. 멀리서 적신호가 울린다. 조상이 내려 주는 경고등 같은 직감이었다.

    아마 여기서 내가 편지를 무시하면 이전의 만남은 그냥 별거 아닌 해프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편지에 답을 주지 않아도 좋아.’가 걸렸다. 시무룩해져서 치마만 쥐어뜯을 모습을 생각하자 안쓰러워졌다.

    “착하게 살면 안 되는데…. 그런 거 내 타입 아닌데.”

    한숨과 함께 펜을 들었다.

    [안녕, 씨씨. 너를 잊어버리다니 무슨 소리야.]

    *

    가을을 지나 본격적으로 겨울에 접어들자 모임도 느슨해졌다. 처음에는 애들한테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화려했던 악세사리들은 점차 정도를 찾아갔고, 프릴과 레이스에 파묻힐 것 같던 소매도 단순해졌다.

    슬슬 일정에 여유가 생기자 스펠먼이 넌지시 훈련을 재개하자는 뜻을 비쳤다. 나야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니 바로 동의했다. 케일은 탐탁지 않아하는 기색이었지만, 날이 춥다고 방에 얌전히 모셔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형제들이라면 나를 통통하게 살찐 찐빵처럼 만들 게 분명한데. 운동을 시작하기 전 뱃살이 찌는데도 그저 귀엽다며 말도 안 해 주던 걸 보면 뻔하다.

    그동안 애들 사이의 서열과 친분 관계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이제 얘기를 나누던 애들과 어울리고 있으면 더 이상 무리할 정도로 옆에 다가오는 애들이 없다는 뜻이다. 어울릴 무리는 내가 아니라 엘리엇이 골랐다. 열한 살의 애늙은이는 가문, 성격을 포함해 형제 관계까지 고려하며 조건을 세세하게 따져댔다. 자식의 결혼 상대를 고르라고 해도 이만큼 까다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에 엘리엇은 고민할 여지도 없다는 듯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원한다면 보고서라도 써줄 수 있다며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했는데, 요지는 간단하다. 자기가 어렵게 협상해 얻어낸 나와의 친분을 어중이떠중이들과 나눌 생각은 없다는 거다.

    그렇게 엘리엇이 고른 ‘지나치게 똑똑하진 않은데 멍청하지도 않고, 가문은 비슷한 데다 장남은 아닌 녀석들’ 중 몇과 알맹이 없는 대화를 나누던 차였다.

    “리이인.”

    헬레나가 애칭을 길게 늘여 부르며 다가왔다. 반짝거리는 눈과 상기된 뺨. 깜빡거릴 때마다 나풀거리는 긴 속눈썹. 딱 봐도 뭔가를 잔뜩 기대한 얼굴이다.

    내 옆에 엘리엇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확실히 헬레나는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얘를 어린애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고. 원래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무나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속셈이 있는 건 있는 거고.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니까.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헬레나를 반겼다.

    “무슨 일이야, 엘라.”

    “혹시 오늘 시간 되니?”

    오늘은 수업도 없는 날이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모임이 끝난 후라면 괜찮아.”

    인형처럼 예쁘장한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위드실 거리에 가고 싶어서.”

    위드실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고급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부터 액세서리 가게까지 다양했다. 장남과 차남의 손을 붙잡고 몇 번 가봤다.

    보통 열 살은 엄두도 못 낼 가격의 물건들이 즐비했다. 귀족 중에서도 후작의 금지옥엽인 헬레나 정도나 돼야 거기에서 가격을 보지도 않고 잔뜩 주문할 수 있을 정도다. 백작과 형제들이 주는 용돈이 적지 않은 데다, 그걸 쓸 시간이 없어 아껴뒀으니 나도 궁하게 굴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헬레나가 굳이 나를 콕 집어 함께 가자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리엇은 오늘 집안에 일이 있어서 못 나오는데.”

    “너랑 함께 가고 싶은 게 맞아.”

    혹시 이 아가씨의 관심이 엘리엇에게서 나로 옮긴 건가. 하지만 엘리엇의 이름만으로도 발을 구르는 걸 보면 짝사랑은 현재진행형이 맞다.

    “그….”

    입술을 잘근 물며 눈을 굴린 헬레나가 옆에 찰싹 달라붙자 근처에 있던 녀석들이 밀려났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엘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아하.

    엘리엇의 친구 역할로 선택된 거였다. 꼬맹이들의 풋내 나는 연애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나는 좋아. 그런데 선물을 보러 갈 거면 루시아와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안목이 좋잖아.”

    그 말에 조금 전까지 기대에 차서 뺨을 발갛게 물들이던 헬레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울상이 됐다.

    “루시아는 소피아랑 선약이 있대.”

    “내일은?”

    “내일은 타냐, 모레는 리지. 그다음 날은 언니랑. 이미 다음 주까지 약속이 꽉 차 있어.”

    입술을 삐죽인 헬레나가 하나도 까먹지 않고 기억해둔 루시아의 스케줄을 늘어놓았다. 루시아는 살롱의 어린애들 중 제일 인기 많은 애였고, 헬레나는 루시아 외에는 이렇다 할 친한 친구가 없었다. 내 눈에는 귀엽지만, 진짜 또래 애들한테는 마냥 사랑만 받으며 자란 헬레나가 조금 제멋대로인 아가씨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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