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17)
  • #18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어차피 궁에 가면 볼 얼굴인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찾아왔냐는 질문에 엘리엇이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뭔데? 상자가 고급스럽고 작은 게, 군것질이 들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딜런은 어깨만 으쓱했다.

    “뇌물.”

    “뭐?”

    “선물이라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목적은 뇌물이니까.”

    “어어….”

    이럴 때는 뇌물이어도 선물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

    상자 안에 있는 건 브로치였다. 화려하게 커팅 된 청보라색 보석을 메인으로, 주변의 장식까지 섬세한 게 고작 열한 살짜리가 구매할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네 눈 색과 맞췄어. 잘 어울렸으면 좋겠네. 연회에서 착용해 주면 더 좋고.”

    “이건 무슨 의미야?”

    “말했잖아. 뇌물이라고.”

    엘리엇이 쿠키를 씹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난 생강 쿠키가 싫어. 어설픈 단맛에 속다 보면 끝 맛이 별로란 말이야.”

    음, 동의하는 바다. 내 취향과도 거리가 먼 생강 쿠키가 간식으로 들어올 일은 없었는데, 타이밍을 보면 엘리엇을 노린 것 같았다. 이거 설마… 막내의 손님을 견제하는 그런 구도야? 애정과 구속은 한 끗 차이인데. 널 아끼기 때문에 그렇다는 핑계는 겉만 그럴듯하다. 진짜라면 경고를 해 둬야 한다.

    “어머니가 준비했어. 네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더라.”

    “나한테? 넌 딜런이잖아.”

    에드윌이 잘 나간다고는 하지만 딜런도 못지않은 명문가였다. 이미 광산을 여러 개 소유했고, 사업 수완도 좋아 손대는 족족 성공시키기로 유명했다.

    “응. 난 딜런이지. 하지만 내 가문의 성공은 높은 자존심으로 얻은 게 아니야. 흐름을 잘 보고, 기회를 잡을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너한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친분을 과시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

    얘 열한 살 맞아? 혹시 얘도 빙의자, 아니면 회귀자 이런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영향력이 큰 것 같지는 않은데. 난 고작 열 살 어린애일 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에드윌의 모두가 너를 아끼는 건 유명해. 폐하께 제일 사랑받는 후궁이 너를 궁으로 불렀고, 에르켈 황자께서도 너를 매번 따로 남기지. 심지어 황태자께서도 너를 아끼잖아? 무엇보다… 정말 고작 열 살 어린애는 자기가 어린애인 걸 인정하지 않아, 르웰린.”

    다 맞는 말이었다. 입이 말랐다. 어, 젠장. 에르켈이 필요했다. 엘리엇 딜런이 원래 이런 캐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형님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래. 아네트 부인께서는 아버지와 사이가 돈독하셨고. 아니, 그런데 황태자께서 나를 아낀다니. 무슨 말이야. 그분은 그냥….”

    “그냥 검술 선생을 소개해 주셨을 뿐이지. 스펠먼 경을 말이야.”

    그냥 검술 선생이라기에는 에드워드 스펠먼이 가지는 이름값이 너무 높았다.

    “나도 형님과 일곱 살 차이가 나지만 너처럼 천사 소리를 듣지는 않는걸.”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다 방법이 있지.”

    엘리엇은 여유로웠고, 나는 혼자 속이 탔다. 그냥 어른스러운 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나와 에르켈의 경우가 있다. 이 녀석도 ‘원작’을 알고 있는 존재일 확률은 얼마나 되지?

    신경전 끝에 내가 손을 들었다. 어벙한 열 살 연기는 때려치우기로 했다.

    “좋아, 엘리엇. 네가 말하는 건 알겠어. 그런데 굳이 내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뭐야? 차라리 좋아하는 간식을 싸 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어린애끼리 친해지기 부담 없지 않아?”

    “이편이 네 관심을 끌기는 좋잖아.”

    차라리 얘 속에 어른이 들어 있다는 게 덜 소름이겠다. 저게 정말 열한 살이면 그게 더 공포다.

    “내 관심을 끌면?”

    “협상을 시도해 볼 수 있겠지.”

    툭, 툭.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엘리엇은 기꺼이 나를 갑의 위치에 올려 주고 스스로 을이 되기를 자처했다. 딜런을 내 편으로 끌어들였을 경우, 거절했을 경우, 협상의 키워드.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잖아. 네 말대로 우리는 아직 어린걸.”

    누가 우리의 행동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겠어? 그가 생강 쿠키 사이에서 기어코 초콜릿 쿠키를 찾아냈다.

    “좋아. 내용을 말해 봐.”

    *

    에르켈과 엘리엇은 살롱이 에르켈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그를 통해 내 옆에 아네트의 눈을 붙일 속셈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둘의 짐작대로 살롱의 개최를 의미하는 연회 전부터 몇 번의 작은 모임이 열렸다.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한 가문의 자제들이 모였다지만 아직 어린애들이었고, 덕분에 궁에는 애들 웃는 소리가 울렸다. 황성에 이게 무슨 일이냐고 뒷목을 잡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반겼다. 황제가 승인하고 아네트가 주도하는 행사다.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모임에 초대되는 것은 아직 아카데미에 가지 않았으되 너무 어리지는 않은 이들이었고, 자연스럽게 에르켈 나이대로 좁혀졌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황자들과 황녀 쪽 심기가 불편해질 일이지만, 아네트는 어차피 살롱에는 연령별로 사람이 모일 텐데, 그 전에 어린애들에게 적응할 기간을 주는 게 맞지 않냐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넘어갔다. 사실 그게 억지라고 해도 꼬투리를 잡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전처럼 회의하기에는 에르켈이 지나치게 바빠졌다. 아네트는 기꺼이 권력의 한 줌을 에르켈에게 내주었고, 로웨나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이대로 열 살쯤의 꼬맹이들이 모이는 모임이 반복되면 다음 주인공은 5황자 루카스가 될 것이다. 생색을 낼 수 있고, 초반에 자리 잡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으니 아네트에게 밑지는 선택은 아니었다.

    에르켈의 놀이 친구인 나, 엘리엇, 루이스, 에이든도 덩달아 바빠졌다. 우리가 꼭 낄 필요는 없지만, 빠질 이유도 없는 자리다. 정규 수업을 듣는 걸로도 모자라 이후에도 줄줄이 스케줄이 잡혀서 결국 검술 연습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스펠먼은 이제 겨우 가르칠 몸이 됐는데 겨우 키운 체력이 다시 무너질 거라며 못마땅해했지만, 집에서도 꾸준히 운동하겠다고 설득했더니 못 이기는 척 승낙했다.

    나라고 좋아서 수업을 빼기로 한 건 아니다. 차라리 운동을 하는 게 낫지. 루이스보다 철딱서니 없고, 에이든보다 멘탈 약한 애들 사이에서 비위를 맞춰 주고, 놀아 주는 건 웬만한 정신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창을 구르는 나이가 되기 전에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춰 둬야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어디 가게?”

    슬쩍 몸을 빼려고 했는데 엘리엇에게 딱 걸렸다. 협상 이후 그는 부쩍 친근하게 굴었다.

    존나 슬프게도 모든 남자의 친근감을 경계하게 된 내가 에르켈과 상의했지만 결론은 ‘엘리엇이라면 괜찮다.’였다. 원작에서도 르웰린의 조력자, 친구 역할을 했던 게 맞고, 머리가 잘 굴러가는 것도 원래 설정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나를 안심시킨 건 원작에서 엘리엇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건 그가 르웰린에게 목매는 후보 중 역할이 크지 않다는 뜻이니까.

    엘리엇 딜런은 황태자처럼 인간 같지 않은 외모를 가진 건 아니지만 준수했고, 가문도 대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에드윌과 비등했다. 이 정도면 에르켈이 짧게나마 그가 르웰린에게 연정을 품은 캐릭터라고 설정할 만한 조건이다. 그런데도 비중이 크지 않고, 그마저도 친구 역할이었다면 뭐.

    설사 그가 르웰린 에드윌의 화려한 낯에 넘어간다고 해도 황태자를 비롯한 쟁쟁한 상대들이 피를 튀기는 곳에 끼어들 만큼 목을 매지는 않을 것이다. 고작 열한 살에 저만큼 계산적인 놈이 감정에 취해 이성을 잃을 리 없었다. 황태자는, 걔는. 원작에서는 그래야 스토리가 진행되니까 어쩔 수 없었나 보지. 그놈도 결국 사랑보다 권력을 선택하잖아.

    “숨 좀 돌리게.”

    “치사하게 혼자.”

    애들이 마냥 시끄러워 보여도 부모에게 들은 바가 있을 것이다. 에드윌과 엘리엇은 그들에게 친해져야 할 대상이었고, 덕분에 나와 엘리엇은 에르켈 옆을 떠나지도 못하고 시달렸다. 그나마 에르켈이 있으면 관심의 중심이 황자에게 몰렸기 때문이다.

    “둘이 빠지면 너무 눈에 띌 거 아냐.”

    “너는 혼자 빠져도 티 엄청 나거든.”

    그건 그래.

    에르켈을 한 번, 루스터와 클로이를 한 번, 서로를 한 번 쳐다본 엘리엇과 말없이 뜻을 나눴다. 그러면 같이 튈까? 좋아.

    “엘리엇!”

    막 빠져나가려는 순간 들려온 옥구슬 굴러가듯 높고 명랑한 목소리에 엘리엇이 이마를 잡았다. 빠르고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스왈튼 후작의 금지옥엽 헬레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얼굴도 반반한 엘리엇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헬레나에게 발견된 이상 엘리엇이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나는 우정과 자유 중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엘리엇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임에 의심이 없었기에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안녕, 헬레나. 오늘 입고 온 드레스 잘 어울린다.”

    “고마워, 르웰린. 네 타이도 정말 멋져.”

    좋아하는 엘리엇 앞에서 칭찬받자 부끄러웠는지 헬레나가 몸을 배배 꼬았다. 풍성한 원피스 자락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혈색 좋은 뺨과 반짝이는 눈,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헬레나는 확실히 귀여웠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열렬한 관심을 받으면 기뻐해야 할 테지만 엘리엇은 창백해진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제발….’ 했다. 사랑스러운 헬레나는 말이 조금 많다. 그녀의 말을 대충 넘길 수도 없고, 대꾸도 해줘야 하는 엘리엇은 상당히 피곤한 시간을 보내야겠지.

    그래도 너는 여자애한테 관심받잖아, 인마. 나는 원치도 않았는데 남자들의 관심을 받아야 하는데.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