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17)
  • #13

    “그 망할! 고양이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고!”

    2황자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난처한 얼굴로 서 있고, 시녀와 시종들은 자신의 상관을 달래느라 여력이 없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고 품 안을 확인했다. 심각한 상황을 모르는 고양이가 혀를 내밀었다.

    앓는 소리가 목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황자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찾는 고양이가 내 품에 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저기에 나갔다간 고운 꼴은 못 볼 게 뻔하다.

    성격 좆같기로 유명한 황자. 고양이. 황위 계승 서열 3위와 말 못 하는 짐승. 뭐가 더 중요한지, 어떤 선택이 더 안전한지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다.

    “돌겠네.”

    이를 악물고 재킷을 벗어 팔 부분을 묶었다. 아랫부분 단추를 뒤로 채우자 어린애 옷이어도 고양이 하나 들어갈 정도는 됐다. 꼴은 우습겠지만 도서관 근처는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니다. 잘하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다고 한들 2황자의 손에 고양이가 넘어가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고.

    제발 울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간절함은 통했는지 아직까지는 얌전하다. 바닥을 기다시피 납작 엎드린 채 움직였다. 속도를 내고 싶은데 잘못해서 소리가 나면 안 되니 뛸 수도 없었다. 신중하게 발을 디디다 보니 목소리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고, 내 심장도 쪼그라들었다 뛰었다를 반복했다.

    ‘다쳤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면서 놓쳤잖아. 다리를 자르라고 했는데 왜 검을 뽑지 않은 거지?’

    풀 위를 기던 팔이 멈췄다. 들은 내용을 의심하며 곱씹어 봤지만 다시 뜯어봐도 말 못 하는 동물을 잡겠다고 다리를 자르라고 명령했다는 게 맞다. 미친놈이.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언뜻 보이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노려보았다. 자기 아들뻘인 황자의 패악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기사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황자의 명령으로 고양이의 다리를 다치게 만든 게 저 사람인 모양이지. 위에서 시키니 하긴 해야겠고, 그렇다고 정말 자를 수도 없고.

    고양이가 품을 파고들었다. 작지 않은 크기에 걸맞은 무게라 재킷을 맨 목이 꺾일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시녀들이 2황자를 말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은 황자는 방방 뛰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상체를 일으켜 조금 더 빠르게 달렸다.

    화단이 미로처럼 이어진 게 다행이었다. 덤불은 점점 높고 빽빽해져 바로 옆으로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속도를 좀 더 내고 싶은데 무거운 걸 들고 달리려니 팔이 후들거렸다. 체력이 달리는 게 한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적이지 않나, 싶어 긴장이 풀렸다. 2황자가 패악을 부리는 소리가 멀어져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들릴 정도다. 고양이가 뒤늦게 에웅에웅 울었다. 너도 잘 참았다는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단단하고 무게 있는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다. 누군가 힌트라도 주듯 수풀 너머로 본 기사의 검이 떠올랐다. 발소리는 분명하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발.

    입술까지 악물고 이번에는 정말 달렸다. 예상대로 뒤따라온 건 아까 그 기사가 맞는지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거리는 당연하게 좁혀졌다. 혼자 달려도 빠져나가기 힘들 텐데. 지친 몸으로 자꾸 품에서 미끄러지는 고양이를 안고 달리려니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이대로면 잡힌다. 평소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야를 급하게 훑었다. 사람이 위기 앞에서는 능력이 생긴다더니.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나를 잡으려는 손이 얼마나 다가왔는지 느껴질 정도다. 다른 곳보다 허술한 덤불을 발견했다.

    저기다.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중에는 달리기보다는 앞으로 쓰러진다고 해야 맞을 정도로 몸이 기울었다. 눈앞이 어두워지는 걸 확인하고 눈을 꽉 감고 몸을 굴렀다. 묵직하고 따끈한 몸을 끌어안은 채 덤불을 통과했다. 멋지게 장애물을 넘는 건 영화에나 나오는 일이었다. 하늘과 화단, 분수, 풀, 붉은 금발, 신발.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붉은 금발?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바닥에 나뒹구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날카로운 것이 목을 할퀴었다.

    몸이 그대로 굳었고, 검은 천천히 멀어졌다. 검집에 검이 완전히 맞물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으면 목이 베이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붉은 눈이 온기 하나 없이 휘었다.

    “이건…. 생각지 못한 얼굴인데.”

    내가 너무 평화롭다는 배부른 투정을 한 탓인가. 그 죗값을 이렇게 받나?

    현실 같지 않은 현실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귀한 무릎을 꿇은 황태자는 손수건을 꺼내 목에 댔다. 아픈 줄도 몰랐던 목에 천이 닿자 따끔한 고통이 올라왔다.

    “수풀에 무언가 숨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베어야 할 것들이라. 무심코 검이 먼저 나갔어.”

    대답도 못 하고 헐떡이는 소리만 냈다. 황태자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하고, 손길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입꼬리만 올렸을 뿐 싸늘한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눈을 보고도 이것을 친절이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뱀의 눈을 마주친 사냥감처럼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던 황태자가 입술을 벌리려는데 내 뒤를 따라오던 무거운 발소리가 덤불을 돌아왔다. 기사는 나와 고양이를 발견하고 굳은 얼굴로 다가오다 벽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덤불 덕에 한발 늦게 황태자를 발견했다.

    “전하.”

    많이 당황했는지 무릎까지 꿇으며 고개를 숙인 기사를 황태자는 느긋하게 받아 주었다.

    “칼로네 경.”

    황태자의 허락 이후에 고개를 든 기사의 표정은 이상했다. 하긴 재킷을 앞으로 두르고 고양이를 껴안은 꼴부터 목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모습, 그걸 손수건으로 닦아 주는 황태자까지. 온통 당황스러운 조합이겠지. 나였으면 뺨을 때려 봤을 거다.

    “그렇게 급하게 뛰어다니는 걸 보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테시온 전하께서….”

    기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황자의 허물을 드러내는 꼴이니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기껏 어린 황자의 패악을 잘 견뎌 놓고, 황태자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치면 무슨 소용이겠어. 황태자가 상냥하게 채근하고 나서야 댐이 터진 듯 줄줄 이야기가 나왔다.

    “고양이?”

    “예. 저… 소년이 들고 있는.”

    이쪽을 흘끔거리는 눈길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이름을 모르는구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황성에 황족 아닌 어린애가 돌아다니는 일은 흔치 않으니 정체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저 기사가 고스란히 보고하면 2황자는 성질머리를 감추지도 않고 에르켈의 궁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그래서 황태자의 말은 의외였다. 고양이와 나를 본 것은 잊고, 자신의 핑계를 대라는 말에 기사가 순순히 답했다. 어차피 황태자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들으면 2황자가 알아서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이다. 황태자의 형제들 중 그를 기꺼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녀를 제외하면, 차라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기사가 다시 한 번 허리를 깊게 숙이고 떠났다. 이번에는 내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놓쳤다고 한다면 크게 까이겠지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많이 놀랐겠어. 상처가 깊지는 않아도 치료해 두는 게 좋아.”

    “…예.”

    떨림이 멈추지 않은 손을 몇 번 꽉 쥐었다 놓길 반복하자 상태가 좀 나아졌다. 계속 황태자가 손수건을 들고 있게 할 수도 없었다. 이게 맞는 건지 확신 없이 손수건에 손을 올리자 잠깐 손을 겹친 그가 미련 없이 일어났다.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던 고양이가 앞발로 가슴을 밀었다. 등을 토닥이며 다시 안았다. 착하지. 가만히 있자, 제발.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준비하지.”

    “아뇨, 아닙니다.”

    고개를 도리도리하려다 아직 피가 멎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급하게 답했다. 내 대답 따위 의미 없다는 듯 황태자는 여전히 예의 그 상냥한 웃음을 띤 채다.

    “아무 대가 없이 보냈다간 은퇴한 백작이 성으로 찾아올걸. 백작은 성격이 급하잖아. 내 호위께서도 단단히 화가 날 테고. 게다가….”

    너무 현실성 있는 말이라 차마 반박할 수도 없었다. 말을 끌던 황태자가 자신의 손수건을 보며 읊조리듯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어찌 그대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어?”

    사람 하나 데리고 나오지 않았는지, 황태자는 무려 직접 의원을 불러오겠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를 보고 놀랄 의원을 위해 거절했다. 그냥 에르켈의 궁으로 데려다주면 된다고 거의 사정을 하자 황태자는 ‘내 동생이 이렇게 신망 받는다니 기쁘군.’라고 주절거리며 근처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드디어 내 말을 들어주는 황태자에게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요.’도 덧붙였다. 황태자는 말없이 웃더니 대신 고양이를 안아들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기대했던 대로 평생 황성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사람의 흔적도 없는 곳만 잘 골라 다녔다.

    문제는 그 길이 생각보다 거칠고, 길었다는 거다. 익숙한 건물이 보일 즈음에는 놀이동산 헬륨 풍선이 된 것 같았다. 내 발로 걷는 게 아니라 황태자의 손에 이리저리 끌렸다. 이 새끼가 일부러 나를 엿 먹이는 건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따질 힘도 없었다. 신분적으로도 그렇고, 육체적으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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